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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전쟁 - 홍.차.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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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이₩야₩기

김승일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 차의 유럽 전래

중국과 유럽의 교역은 아주 오래 전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때 물품을 가지고 가는 중국인들이 차 를 애용했을 것이므로, 이미 차는 아주 오래 전부터 유럽인들 에게 알려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를 증거할 만한 기 록이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궁금증은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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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가운데 유럽인들의 책에서 차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 것은 그들이 해로를 통하여 아시아 지역을 왕래한 이후부터이다. 1545년 이탈리아 사람인 라무지오가 쓴『항해기집성(沆瀣記 集成)』

이라는 책에는 차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아마도 이것이 최초의 차와 관련된 기록이 아닐까 생각된 다. 그 내용을 보면, ‘중국에서는 어디를 가든 차를 마신다. 배가 고플 때 한두 잔을 마시면 열병, 두통, 위통, 관절 등의 통증이 없어지는 효과가 있다. 많이 먹었을 때도 이를 조금 마시면 소화가 잘 된다.’ 라고 적고 있다. 이처럼 유럽 사람들은 차를 일종의 약이나 혹은 손님들에게 내놓는 음료수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유럽에 직접 전해지게 된 차는, 차의 재배법이라든가 차의 품종 등이 해외로 이전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던 중국의 차가 아니라, 비교적 교역이 자유스러웠던 일본차였다. 이렇게 해서 차라는 것이 서서히 유럽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던 것이고, 그 결과 차를 본격적 으로 수입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시기는 대략 17세기 초경이었다.

유럽에서 최초로 차를 마신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후에 중국과 직접 교역을 하면서 중국의 차를 대량으로 수입해 가기는 했으나 처음 차문화를 직접 접촉하게 된 것은 나가사키(長崎) 를 통해 교역을 먼저 시작한 일본차였다. 이렇게 하여 시작된 네덜란드인들의 차 마시는 풍속은 프 랑스, 독일 그리고 후에 영국으로까지 전해져 갔던 것이다.

○ 영국의 사회사와 홍차

이렇게 해서 뒤늦게 차의 맛을 알게 된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통해서 중국의 차를 대량으로 수입하 게 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녹차와 홍차가 구분되게 되었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 다. 원래 홍차라는 것은 중국에는 없었다. 그런데 녹차가 중국을 출발하여 덥고 습기가 많은 인도양과 아프리카 남부를 돌아가야 하는 장기간의 항해로 인해 변질되어, 영국에 도착할 때는 김이 모락모락 날만큼 숙성하게 되어 홍차(tea)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홍차의 출현 은 유럽인들의 입맛 때문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일화라 할 수 있다.

영국인들은 처음에는 홍차를 약으로써 마시기 시작했다. 16세기 중반에 출판된 네덜란드 의학서 적에는‘차를 마시면 결석, 담석(膽石), 두통, 감기, 안염(眼炎), 카타르(점막염증), 천식 및 위장병 에도 걸리지 않는다’ 는 기록이 있다. 홍차는 수입량이 적었고 가격도 비싸서 서민들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물건이었으며, 왕후, 귀족, 대상인 등 상류계급이나 마시던 음료였다.

그러던 것이 일반인들에게까지 홍차 마시는 것이 유행하게 된 것은 1688년에 일어난‘명예혁명’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 의회는 제임스 2세의 전제정치에 종지부를 찍고, 제임스의 장녀인 메리와 그녀의 남편 윌리엄에게 네덜란드군을 인솔하고, 영국으로 오도록 요청했다. 그리하여 제임스 2세 는 프랑스로 피신했고, 윌리엄과 메리는 영국으로 와서 왕이 되었던 것인데, 이것이 바로‘명예혁 명’ 이다.

새로운 여왕 메리 2세는 네덜란드에 있을 때, 일본의 아리다(有田) 도자기 및 중국제 도자기로 홍차

마시는 것을 아주 즐겼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영국의 왕이 되면서 영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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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영국왕실에서도 이전부터 홍차를 마시기는 했지만, ‘차의 여왕’ 이라고 불리던 메리의 영향은 너 무나 커서 영국 귀부인들 사이에서 차를 안 마시는 자는 미개인으로 취급될 정도였다. 나아가 이러한 풍조는 일반인들에게도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당시 영국에는 독일의 맥주, 프랑스의 포도주에 필적할 만한 국민적 음료가 없었고, 커피, 코코 아, 우유 등을 마시기는 했지만, 우유 이외에는 값이 비싸서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는 음 료가 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인구의 급격한 도시집중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우유 공급에 한계를 가져다주어 결국 홍차가 우유를 대용하는 음료로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또한 정부와 산업자본가들에 의해 실시된 정책의 효과가 컸었다. 당시 저임금 과 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던 영국의 노동자들은 하루의 피로를 진(gin)과 알코올로 푸는 것이 일 반적인 풍습이었기에 알코올 중독자가 계속해서 늘어가고 있었다. 주정뱅이가 아닌 근면한 노동자 를 필요로 했던 산업자본가들은 정부와 손을 잡고 알코올을 대신하는 홍차를 권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홍차세를 철폐하여 찻값을 내림으로써 홍차의 대중음료화를 꾀했다. 이에 1680 년 1파운드당 30실링이던 홍차는 1740년에는 거의 8분의 1 수준인 4실링 정도로 가격이 떨어지게 되었다.

○ 미국인이여, 차 대신 커피를 마시자!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영 국은 점차 제국주의의 길을 가기 시작 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아메리카 대 륙이었다. 영국은 아메리카 대륙 동부 에 13개의 식민지 정부를 세우고, 가 혹한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그것 은 본국과 경합관계에 있는 식민지산 업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를 위 해 각종 법령을 강제로 시행하여 성장 중이던 식민지의 상공업을 압박했다.

그 한 예로서 이들 식민지에서는 서

인도제도에서 설탕을 수입한 뒤 그 당

밀(糖蜜)로 럼주를 제조하고 있었는데, 영국은 설탕조례(Sugar Act, 당밀조례)를 제정하여 식민지

로 들어오는 설탕에 높은 관세를 부과했다. 그것이 1763년에 발표된 악명 높은 인지조례(Stamp

Act)였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식민지인들은 맹렬하게 반대하였고, 그 결과 이 조례는

철회되었다. 그렇지만 영국은 4년 뒤 다시 식민지가 수입하던 납, 종이, 유리, 차 등에 대해 수입세

를 부과하는 타운센트법을 제정하여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법도 식민지인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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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것이었기에 불매운동이 전개되었고, 그 결과 이 법도 폐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영국은 동인도회사에게 차의 독점판매를 허가하는 차 조례(Tea Act)를 제정하여 파산 직전에 있던 회사를 구제하려는 정책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1773년 12월 16일 밤, 인디언으로 변장한 급진파 조직인‘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 에 속하는 일단의 무리가 보스턴항에 정박 중이던 동인도회사 선박에 난입하여, “보스턴 항을 찻주전자로 만들자” 고 외치면서 342상자의 차를 바다 속에 던져 버렸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보스턴 차사건은 식민지와 영국과의 대립을 피할 수 없게 만들어, 소위‘독립전쟁’ 이 시작되는 배 경이 되었다.

그 결과 차에 대한 불매운동이 확산되게 되면서 식민지 사람들은 차 대신 커피를 보다 많이 마시게 되었다. 현재 미국인 중에 커피 애호가가 많은 이유는 지금도 이런 전통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아메리 칸 커피는 홍차처럼 묽고, 설탕을 별로 넣지 않고도 몇 잔이든 마실 수 있는데, 설탕을 넣지 않는다는 것도 설탕조례에 대한 반발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비열한 영국인들

영국의 중요 식민지였던 아메리카가 독립함으로써 영국과 동인도회사는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 었다. 더구나 중국산 수입차에 지불하는 은의 증대는 더욱 더 경영악화를 부추겼다. 이에 고민하던 동인도회사는 벵갈 지방의 농민들에게 강제로 양귀비를 심게 했고, 이 양귀비를 이용하여 아편을 만들어 중국으로 반입했다. 이와 같은 아편무역 때문에 아편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극히 당연 한 일이었다.

이 무렵 영국은 인도 토후들의 저항을 거의 진압하여 전 인도를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게 되자, 중국보다 거리가 가까웠던 인도에서 차 재배를 시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에서 가져온 차나무 의 이식에 실패하여 차 생산은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는 가운데 아샘지방에서 야생 차나무가 발견되는 바람에 다아지일링(darjeeling)을 비롯한 북인도에 차 농장이 확대되어 갔다. 남방에서도 실론(오늘날 스리랑카)이 대규모 차 생산지로 성장해 가면서, 영국은 대영제국 안에서 대부분의 차 를 자급자족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차 농장의 노동력 부족은 영국의 큰 고민거리였다. 이에 영국은 인도의 타밀족을 강 제로 연행해서 실론으로 보내게 되었으니, 현재 스리랑카에서 투쟁 중인 싱할리족과 타밀족의 대립 원인은 바로 영국인들의 이러한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영국의 부라는 것은, 일본이 아시아를 식민화하면서 그들로부터 빼앗은 자원과 식민지무 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던 것처럼, 대영제국하에 놓여졌던 식민지국 국민의 피와 땀으로써 이룩한 것이다. 이러한 제국주의로 뻗어 나아가는 전면에 차 맛에 빠진 유럽인들의 입맛이 있었다는 사실 은, 역시 살기 위해 먹기 보다는 먹기 위해 살려고 애쓰는 인간의 너절함을 생각하니, 왠지 씁쓰레 한 감을 떨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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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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