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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원론 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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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원론 3강

2013년 3월 21일 목요일 오후 2:10

그… 지금 우리 수업의 진행은, 우리가 1, 2장 이후 발제, 토론- 그리고 제가 이야기. 그 이후 책을 봐야 하는데. 이후 밥 먹으면서 하려고 생각했던 것들이 빠졌는데. 또 보충하기로 하고요.

그것까지 포함해서. 3, 5장입니다. 책도 더 봐야하고. 발제도 더 해야 하고. 책에서 반드시 짚어 야 하는 부분이 1, 2장도 3, 5장도 있어요. 물론, 다 짚는 게 발제의 취지는 아니니까. 하여간, 오늘은 1 2 3 5 종횡무진 살펴야 하는 시간입니다.

일단 바로 끝낸 발제부터 지난 발제까지 아우르는 영역으로 놓고 이야기를 해봅시다.

그걸 주문하자면, 이 질문도 전체를 꿰는 질문이기도 해요. 앞의 발제에서도 성속 분리와 관련 해서 했는데. 3, 5장 발제 및 토론으로, 1 2 까지 아우르는 식으로 논의를 해봅시다.

*) 질문이 있는데요. 너무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도 모르겠는데요. 책의 저자 관점이- 이 분이 그리스도교인지 이슬람교인지 밖인지 안인지 위치를 정확히 몰라서요.

&) 자기 성찰의 한계 때문에 중요하다~

광우) 책에서 그리스도교라고 함. 하지만 스미스는 그렇게 보지 말라고 할 것 같음. 밑에 아우 르는 삶을 봐라. 기독교라고 지칭되지만, 소위 종교적 삶이 이슬람교에 공명되지 않냐- 중첩되지 않냐- 위가 아니라 밑을 봐라. 그러면 당신은 여전히 실체화된 종교 개념을 쓰고 있다 라고 말하 지 않나 싶어요.

*) 안과 밖의 사람. 그러면 안이던, 밖이던 어디에 위치할 지…

광우) 안 밖을 없애자고 하는 거 같아요. 누가 독서보고서에 물고기와 파리를 말하지만, 스미 스는 어항 자체를 없애자고-

$) 그건 안 되죠. 이미 그렇게 얘기하니까. 어떤 취지에서 경계를 짓는 것, 쌍방 이해 안 되는 것, 경계 허무는 것을 중시하기는 하지만- 과연 없앨 수 있나. 그래서 이야기하는 것은 지칭 내 용을 표현을 바꾸자로 표현하는 거로 이해했거든요. 다른 표현. 종교가 왜곡하니까. 정확한 지침.

과연 어항 관계가 없어질 수 있나.

광우) 제 표현이 좀 그랬는데. 관찰이 가능하다. 내가 파리, 물고기. 삶 자체가 얽혀있다는 거 죠. 100% 기독교인 이라는 것은 아니죠. 무교 유교 불교 다 있는데. 거기서 어떻게 하나로 뽑아 서 할 수 있나. 그냥 박광우가 있는 거지. 제가 말하는 어항은 구분이에요.

$) 다른 것 보다- 질문 이상하다고 했는데- 저는 공감이 되거든요. 어느 위치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는데.

광우) 저도 비슷한 이야기 했는데. 얽히는 것을 좀 하려고 해요. 예수 그리스도 믿고… 특수화 된 언어잖아요. 언어 부시는 것은 다른 이야기고. 개념을 없애자는 게 아니고. 질문자 이야기는 내가 속해 있냐에 따라 어떻게 이야기하냐- 가능하다는 거예요. 만나면서, 아래에서. 어떻게 기독 교면서 이슬람교 이야기하냐.

발제2) 저는 좀 다르지만, 답은 비슷하지만. 나는 그리스도인이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그리스도 인과는 다른 거 같아요. 굉장히 종교 개념의 폐기라고 할지. 무의미보다 부적절하다고 느껴요. 그 리스도교든, 이슬람교든, 교리 건드는 게 아니라. 하나의 마음, 관념으로서 연합된다고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러면 스미스가 절대자처럼 느껴져요. 거기까지는 확장이 힘든 거 같아요.

#) 기독교 판단 위해서는 기독교 밖에서 보는 게 더 합리적으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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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갇혀서는 회심의 가능성도 없고 정확히 볼 수도 없는데. 밖에서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근데 스미스가 그렇게 보는 것 같지는 않아요. 의미적인 요소를 이야기하는 거죠. 참 여자는 의미 안에 있고, 사는 거죠. 근데 관찰자는 종교에 관심을 갖는, 제도의 녹을 먹는 종교 지도자, 권력자.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물상화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러면 종교 안에도 기독교 안에도 관찰자가 존재할 수 있는 거죠. 저는 그렇게 이해했는데, 끊임없이 개념의 참여를 통해서 어떤 면에서 계속되어야 하고. 종교개혁이 아니라 의미적인 차원에서 삶의 의미를 회복시키려는 것이다.

@) 저도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스미스가 92쪽. 종교라는 말은… 의미하지 않았다는 사실…

스미스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 나라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붙이잖아요. 그 붙여진 이 름이라는 개념의 틀 속에 너무 갇혀있다는 거죠. 틀 안에 갇힌 게 아니다. 다양하게, 이름 붙여 진 처음 역사적인 배경부터 거슬러 올라가잖아요. 특히 3장, 이름 붙이기. 종교에 대한 개념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노력이 아닌가 싶어요.

광우) 참여자-관찰자. 어떻게 나누죠. 그거부터 고민이 되는 거 같아요.

발제2) 그리스도인의 인격체. 각자가 인격체, 그리스도의 전통이 각자에게 있다고 부여할 때, 참여자라고 할 때, 나머지는 관찰자.

광우) 맞는데. 처음처럼 하면- 이슬람을 보는 기독교인은 이미 실체인데. 개인 인격으로 하면, 공유가 되죠. 181쪽 보면 참여자는 하나님 관찰자는 종교. 밖에서 파리가 물고기 보는 거처럼 교리를 아는 것처럼. 종교 개념에 대해 부정적으로 접근하지 않습니까? 내거는 아닌데, 남에 거 는 종교라고. 그게 참여와 관찰. 근데 사실 모호하다고 봄. 이 학우를 바라봐요. 같지 않아요. 근 데 같이 보고 다루고 공유-이걸 적용하려고 하는데. 공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구분되는 게 아니 에요.

발제2) 저도 그리 생각. 똑같은 것을 봐도 나의 것은 다름. 종교적인 개념을 이용하면, 관찰자 가 될 수 있죠. 나의 생각에 따라- 그거 구별도 중요하지만, 의미가, 스미스의 의미가 현상을 보 여주기 위한 거였나. 그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용우) 구별되기 시작하면- 첫출발. 참여자라는 표현이 포함하는 것이라고 생각. 왜 논의할 필 요가 있나.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하냐- 아직도 종교를 가지고 하는 거 같아요. 논의 자체가- 스 미스가 아니지 아닐까.

나)

광우) 관찰자와 참여자. 그보다 참여자와 참여자. 다른 사람과 참여자. 주객분리의 구도를 넘어 설 수 있지 않을까.

주원) 광우 의견에 동의하는데. 어항은 모르겠는데.

교수) 전공 조교가 안 읽으면 어떻게 하나 주원) 전 관찰자…

교수) 참여 안 하고 있어...ㅋㅋ

주원) 뭘하고 있느냐. 참여, 체험. 체험은 관찰을 향해 표현을 지향. 참여자와 참여자가 서로 비난이든 설득이든. 변증법적 대화운동이 있고. 차후에 나눌 수는 있다고 보는데. 종교 연구에 있 어서. 신앙에 관한 두 대화자 사이에 개념과 명사 하면- 참여자나 관찰자. 요소로서의 종교성을 보면- 전체와 부분의 관계도 대립되는 관계도 아닌 것을 명사와 개념화에서 하는 거지. 어항이 깨질 수도 있다.

용우) 모호해진다고 하는데, 스미스는 풍부하다고. 신과 역사라고 하는데. 초월이나 인간 경험 으로 기반을 말하자면. 회피하기 어렵다는 표현에서 보면. 모호하다는 것을 회피할 필요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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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요. 개념이나 명사화로 가자면. 모호가 어쩌면 맞다고.

@) 모호해진다고 얘기하는 것은. 스미스가- 참여자가 신앙이고. 관찰자는 종교. 결국 이 과정 을 통해 추구하는 것은 관찰자와 참여자가 구분되지 않고, 참여자와 참여자만이 남아야 한다. 분 명히 구분이 되는 현실이 있거든요. 앎으로 받아들였을 때. 구분이 안 되면, 행동을 결정할 수 없어요. 신동엽 시인이 4.19에 관한 시를 쓰면서, 껍데기는 가라고 하잖아요. 거기서 껍데기는 종교라고 얘기할 수 있겠죠. 관찰자라고 할 수 있고. 저는 분명히 나눠져야 한다고 봐요. 많은 대화의 과정과 체험을 통해서, 그와 그, 너와 나. 서로 합일 되어지는 과정이 올 수 있죠. 합일된 지점 전에는 관찰자.

광우) 너와 나가 나왔잖아요. 나와 그는 참여자 구도,

모호하지만 모호하지 않아요. 다르잖아요. 그래도 얘기가 되잖아요. 관찰은 시공에서 벗어나서 보는 거잖아요. 이게 가능하지 않다고 봐요. 나름으로 보니까 참여자의 관계로 보잖아요.

나) 참여자 관찰자로 가면 결국 나는 참여자 타인은 관찰자 되지 않나.

$) 참여자와 관찰자는 태도의 문제.

@) 어느 날 찾아옴. 그래서 관찰자에서 참여자가 됨. 합일. 경계가 분명하더라고요. 스미스가 원하는 거는. 이름 붙이기. 거기에 걸맞는 나의 이름을 받고. 거기에 소망하는 거에는 뭐가 있냐 면. 행동이 나에게 있는가.

%) 그런 부분으로 보면, 목사님이 경험한 하나님. 인격적인 관계로 하고 있는데, 목사님이 경 험한 관계에서는 참여자가 되지만, 다른 사람이 인격적으로 경험한 것은 관찰자가 되기 때문에, 참여자와 관찰자가 된다, 모호하다. 스미스는 그렇게 볼 수 없다. 인격체적인 관점으로 정의하기 때문에. 또 다른 면에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고. 첫 질문이 이런 의미였는지. 다른 종교에 대 해서도 이야기하는데. 본인은 기독교라고도 하는데- 타 종교 관찰자인데, 이렇게 저렇게 얘기하 는 것이 옳은 이야기일 수 있는가. 첫 질문의 의도가 뭔지는 몰라도, 스미스 또한 참여자 관찰자 나누는 부분에서 논리적인 한계에 도달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용우) 종교라는 말을 계속 써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 저요? 저는 그다지. 종교 어감에 별로. 각각 신앙의 대상이 있잖아요. 근데 용어가 없으면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열어진 가슴으로. 다양한 종교를 비교종교학의 관점에서…

용우) 개념적 속성으로 필요?

@) 언어는 사회의 소산물이잖아요. 그래서 종교… 라는 어휘 자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좀 어렵지 않나.

*) 저도 비슷한 생각. 힌두교라는 게. 충격을 받았거든요. 자신이 아니라 구분을 위해 지어준 이름. 인디언도 잘못된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데. 객관적으로 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말도 안 되게 지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름이나 개념이… 객관적으로 생각한 게 하나도 아니라는 것 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힌두교나 불교. 소통을 위해서 부르지만.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이름을 짓는….

주원) 제 생각에- 종교라는 명사나 개념- 종교적이라는 현상에서 나온 것이니까. 싹 다 폐기하 자. 라고 써 있지만.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제안한 것은 돌아가자는 것인데, 실제로 이 루어지는 것은 종교적에서 종교가 나왔다는 거죠. 실제로 이루어진 현실, 더해진 현실이고. 아예 없는 것처럼 무화하는 것은 개념상에서나 가능한 것이고. 전통에서의 신뢰든. 과연 다 폐기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냐. 그러기는, 당장 그러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데. 제 3의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것 같은데. 스미스가 제안하는 역사와 종교적이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동명사로 하든. 형용사에서 명사가 자라난 것을 깨달으면서, 개념과 명사와 체계로서의 종교라는 것을 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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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자는 입장 같거든요. 그런 종교를 폐기했을 때는- 이미 우리는 종교성 다원주의 현실에 살기 때문에. 이미 도래한 현실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 내 종교 안의 차이가 더 클 수도 있기 때문 에. 양 극단- 분명히 서로 지향하는 상호적인 운동이 가능하고, 낙관만이 아니라 끊임없는 것으 로…

용우) 193쪽. 종교라는 고정되고… 불필요하다. 다 변해왔는데. 필요한가.

지수) 더 쉽게- 저 자신을 생각해봤어요. 이름이 실체를 다 담지 않아요. 제가 스스로 짓지 않 았어요. 누구에게 불려진. 그게 우리에게 덧입혀진 것이라서. 불려질 것인가, 부를 것인가. 어쩔 수 없다는 논의는 인정해요. 장지수가 아니면, 뭐라고 불릴까. 이름이 실체를 다 담지는 못하겠지 만. 인류학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필수가 아니라면, 불가한…

발제2) 저도 비슷한 생각인데. 영어 이름을 쓸 수도 있고, 개명도 가능하고. 뭐라고 하든, 그것 도 확실할 수 있는지. 그것도 언제나. 저도 좀 회의적이에요. 어떻게 말하든 완벽하지 않은데.

#) 이 스미스가 존재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게 아니고, 어떤 존재인가.

^) 비슷한 말씀에서. 불완전함을 전제로 해서 스미스가 말하는 것은 이미 벌어지고 존재한 현 실에서, 종교라는 말을 보면 운명이 기구하다. 동사형용사 거친 명사라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만 나느냐. 재고하자. 현대사회 이야기를 했지만. 모든 사유체계들의 개념화. 이렇게 되고. 다름과 다름이 만나지는 현상이 불가피해지면서, 종교라는 말을 구성하게 된 게- 너 ㄴ나와 달라가 아니 라, 세계적인 공동체가 만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을 텐데.

@) 단순 명료하게 스미스가 읽혀지는 거죠. 종교 개념이 잘못되었고, 삶과 너무 괴리되어있다.

니체의 안티크리스쳔 처럼, 그 자체를 버리자는 것은 아니라고 봤어요. 종교의 진정한 의미를 되 새길 필요가 있다고 봐요.

광우) 저는 오히려-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책에서 보면 되고. 종교… 목사가 되려는 과정 이지만. 한국인으로 태어났거든요. 기독교인으로서 박광우가 존재할 수 있는가. 개념은 있는 것을 싸잡으려는 거죠. ㄱ거 자체도 내려놓지 않으면. 기독교 이슬람교를 내려놓고. 주원학우. 안태진 학우. 박광우로 만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느껴진 것- 폴 니터. 불교, 스님과 이야기 나누는 것 보고, 보살 예수. 굉장히 실망. 그렇게 구분 지어서 있으면 무슨 얘기. 당위.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영적 상태를 나누면서, 다른 공동체와 함께 나누는게… 폴 니터라는 아저씨가 와서도 그런게 안 나와요. 너와 나는 기독교인과 불교인의 구분이 있으니 안 나오니까. 현실적인 이유에서도. 더욱 더 넓어지는-

나) 광우)

발제2) 해체 작업하면, 목사 전도사 개념도 해체될 것 같아요.

용우) 종교적 개인은 남거든요. 인격체들과… 경제적 인간 종교적 인간. 인간으로서 내려오면 되는데. 체제 개념으로서 종교를 지키려고 하니까. 재생산 되면서…. 함몰된다는 것은 못 깨닫고.

종교를 지켜야해- 효율적인 목적… 종교라는 표현-

$) 저도 하나님을 믿지 않다가 믿었는데. 따른 믿음이 없었어요. 그때는 쉽게 사람들을 이해하 고 인정할 수 있었어요. 나름의 소중함. 근데 하나님 믿고 나서- 전도하고 싶어서. 선포해야 하 고. 좋은 방향이 있잖아요.

광우) 생각해봐야할 것은 복음이 뭐여. 복음이 의미하는 것이 뭐여. 복음은 교리적인 차원으로 봐요. 구원하셨다는 것은 교리. 슐횽 좋아하는데, 우주의 직관, 체험. 그것처럼, 복음이든. 뭐든.

특수한 언어가 아니라 일상 언어로 해야 한다는 거에요. 근데 그게 어려워요. 복음에 대해 좀더 열려 있는. 교리로서 복음.

(5)

$) 내가 느껴서 좋고… 아니라…

발제2) 해체라고 하면. 종교 체계 관념이 가능하자면, 어디까지 해체? 어떻게 표현이 안 돼요.

모든 사람은 종교적인 인간. 그것도 해체 가능하다고 봐요.

$%) 해체가 목적이 아니니까. 참여자라고 하는- 본질에 갈등하고 집중하고 나아가면, 어떻게든 변하겠죠. 해체될 수 있고. 근데 해체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용우) 인간이 큰지 종교가 큰지.

**) 관찰자 입장에서 계속 이야기하는데. 굉장히 폭력적. 인간이 빠져버리는 듯한. 개념화시키 는 듯 한 느낌이 들어요.

주원) 맞습니다.

태진) 스미스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왜도 중요. 개념이. 왜 없애고, 대체되어 야 하느냐. 종교가 해방하고자. 근데 명사화된 것은 그렇지 못했으니 없애야 한다. 신앙도 인격체 적 관계. 종교와 종교라는 거대한 이야기에서는 인격체가 안 됨. 인간이 없어지고. 종교적인 인간 으로 되돌아가면, 또다시 물상화를 반복하지 않거나.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느냐. 그래서 그 이후가 더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광우) 철학사 같은거 살펴보면. 결국 나 중심에서 내 안에 무수한 타자 들어오는 것. 타자 인 식이 생김. 그 논의 때문에 인간으로 돌아가자. 언어의 한계상-

태진) 현실 교회. 교회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느끼고 있어요. 가톨릭 같은 경우 중 세의 완전한 종합을 회득하자. 초대교회 영성회복하자. 뭔가 시원적인 것도 허상이라고 생각. 형 용사적인 것이라고 생각. 종교적인 인간으로 되돌아가는 것- 신앙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 각하는데. 시원적인 명사화되기 전으로 가려고 하지만, 이런 과정이 또 있지 않을까. 정말로 해방 하는 종교를 이야기할 때, 어떻게 작업할 수 있나.

광우) 십자가를 상징으로. 십자가는 기존의 것을 해체하면서 구성. 교회사에서 교회가 문제없던 때가 없다. 구성과 해체를 동시에. 이거를 의식하면.

정우)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교로 간다고.

나) 종교적이 정말 시원적? 물론 나머지 흐름은 이해.

정우) 삶이 빠진 종교를 이야기하는지.

발제2) 짖궂은 질문. 종교적 인간.

나) 가능하다고 봄. 힘만을 따라가는 천박한 욕망.

태진) 과연 그때만 무종교인가?

광우) 정말 종교적인 게 없어진 게 아니라. 저의 해석이지만. 초월이 아니라, 관심이 없게 되 고. 어떻게든 살아가는- 정말 무종교적인- 종교성이 없는- 하나의 종교성의 표출인데, 다른 것으 로서의 표출. 정치적 표출이겠죠.

정우) 종교적 의 의미를 과연 국한할 수 있나요? 환원적으로 가는- 과연 종교적인가.

발제2) 발제를 뒤돌아보다가. 마지막 결론에. 네 가지 이야기. 예전에 어떻게 대체 시도해왔는 가. 저의 생각일 수 있는데, 다 여기에 속한다고 봐요. 다 맞는데. 스미스는 어떻게 생각할 지.

광우) 여기서 말하는 종교 개념은 실체로서 말하는 것 같아요. 실체적이라는 것이 괄호 속에 있는 것인데. 내려놓고자 하는 것은 삶으로서 가자는 게 아니라. 조금 우리 논의랑 결이 다른 것 같아요.

교수) 굳이… 그… 혼란을 정리하자면. 201페이지. 일종의 정리입니다. Clarification. 발제에 서 얘기한 것이 종교개념에 대한 역사로서의 대체는- 근데 광우는 대체 이전의 실체. 본질에 초 점을 맞췄는데 이런 식으로 그렸다. 근데 네 가지가 그냥 네 가지가 아니라. 본질과 기원. 첫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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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 기원과 공통. 시간 범주. 시작이고. 기원이야. 공통은 무수하게 등장하는 많은 것 중에 추리는 것. 나중에. 초월, 역사. 초월과 역사는 초월과 내재. 공간 범주. 네 개가. 단순 나열이 아니라, 시간 범주에서 시작과 지금까지. 초월과 내재. 이편과 저편. 그런 전제는 필요하리라고 봅니다.

개념화된 종교가 이렇게 전개되지 않았는가.

자. 시간이 꽤 흘러서. 여러분의 논의가 관찰자 참여자 한참 하다가. 대략 정리하자면. 야, 여 기 사람이 빠지고 왜 그렇게 하느냐. 인간 얘기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맥락을 그렇게 읽을 수도 있을 것이고. 사실 보자면, 관찰자 참여자도 다 사람얘기인데. 초점이 어디 가있는가. 자. 사람인 데. 태도의 문제. 그렇게 보게 되면 여전히 인간의 초점을 맞춘 게 아니게 된 것이고. 개념의 범 위를 놓다가 인간 얘기의 필요성을 공감한 것으로 흐름이 흘러 간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나. 잠시 쉬었다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었으니까.

이렇게 보면 어떻겠습니까.

자. 책을 좀 따라서 훑어봅시다. 다 착실히 잘 읽었고. 발제. 그리고 아주 재밌고 진진한 이야 기가 이어져서. 그리고 이야기를 가지고 또 어떻게 해야 할 지 감도 가졌을 거예요. 충분한데.

그냥 사족을 좀 붙여봅니다. 이게 본론이 아니라. 다 읽으셨겠지만. 머리말 봅시다. 좐 힉이 머리 말을 붙였어요~ 다 읽었지만. 좀 보충하겠는데. 11페이지. 중간문단. 마지막 줄. 스미스는 이 책 에서 지적하기를, 우리가 오늘날 일상적으로 인간의 종교적 삶을 보는 … 아니라는 것이다. 버리 도록 요구되는 시각은 인간의 종교적인 삶… 나눠진 것을 버려라. 어떤 느낌? 종교적인 삶이- 이 런 여러 개의 이름이 열거될 수 있는 종교의 복합체로 볼 수 있는 것을 버려라. 그래서 컬러를 확 드러내는 부분. 수십억 인구 대다수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는가? 스미스의 연구는 점차 해체시 키는 효과(13중간). 근대 200년. 근대 이전에는 없었다. 특정한 교리 체계로서의 종교- 실체화 명사화 등. 그 대신에 뭐냐. 밑 5줄. 다만 신앙 복종과 불복종, 경건 예배, 진리 등. 다소 유치한 독법이 될 수 있겠지만. 한번 해봅시다. 여기에 동그라미 쳐야 해요. 공동체들이 소유 신념 체계 에 동그라미. 그리고 아주 시각적으로 대비하고 있어요. 이게 아니라 저거다. 다 캐치하셨겠지만.

버전들을 새겨봅시다.

이후 칼뱅 나오고요. 아래. 이와 같은 역사의… 형용사적인 것… 실체적인 것. 경쟁적 실체들로 응고되어 버렸다… 이름을 만들어냈다… X 표. 여러분들이- 지금 이런 식으로 읽어보시면요. 다 이해하는 구조입니다. O와 X 그리면 틀이 만들어질 거예요. 독자적인 이름 종교적인 개념 X표.

동양에서 겹쳐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물상화. X표의 대상. 그리고 또- 15페 이지 마지막. 그리스도교 등등 단일실체들이 있다고… 여기도 X.

여기서 좀 타협하자면-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있어. 이름도 있고. 물상화 개념화 실체화 뭐 든. 나름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되게 된 과정을 거쳐서-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되어있어. 단일 실체가 아니에요. 이미 실체화가 되었어. 종교적인 삶에서는 왜곡. 이미 실체가 되어있어. 그것을 가릴 수 없는 것처럼, 최소한 적어도 단일실체가 아니다. 하나의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이지. 1세 기 20세기 기독교, 서양 아프리카 기독교 다르고. 이게 물상화 개념화 등이 주는 착시. 단일실체 일 것이다. 적어도 그걸 먼저 물음표. 여기 X표. 이 대목에서. 우선 역사가 인정해. 2장 보면 시 대 보면서 잘근잘근 씹어. 그런데. 어쨌든. 이 마당에- 그 특정한 이름 짓는 종교가 여러 종교들 로. 그럴 때 복수가 가능하잖아요. 구획칠 때. 그런 것들이 계속 우리에게 단일실체라는- 실체도 아니고 단일실체라는 오도된 뉘앙스를 전해준다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 서는 다블 X를 해야 해. 실체만이 아니라 단일도. 실체는 내내 할 꺼야. 단일이라는 것- 실체가 지칭하는 것이기도 한데- 단일성 이데올로기. 주목할 필요 있겠다. 그러더니 17페이지 중간. ~에

(7)

의할 것 같으면. 길희성 교수가 잘 쓰는 표현. 본질 X 실체 X. 개념 영역은 분명히 구분됩니다.

본질 실체 모두. 근데 둘을 구별하지 않을 때. 혼동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같은 말을 다른 말 로 해보면 이렇게 됨.

다른 말- 신앙과 전통. 본질 실체는 X인데, 실재는 O야. 실존 관계. 그 모든 것을 다 싸잡았 을 때 참, 참인 것. 실재. 그 단계를 여기다 대입해도 범주 구별이 될 것입니다.

단일성을 조금 더 중요하게 보자면- 더블 프로젝트로 보세요. 단일 이라는 문제. 실체라는 문 제. 어떤 식으로 그 문제를 어떻게 저렇게 다루는지. 19페이지 중간에. 분해시킴으로 얻어지는 결과. 역사 변화 동그라미. 무엇이 O인지 X인지. 이 유치한 듯 한 감으로 계속 대비를 시키면.

우리가 이것에서 저것으로 전환해야 한다 할 때 폭넓게 뜻을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1장-

여러 이야기, 그냥 읽으면 되니까 넘어갑시다.

2장-

역사적인 얘기 하죠. 봅시다. 39쪽 맨 밑줄. 역사적 고찰을 견지하면서~ 여기 역사가 주목이 되어있어요. 그 다음에- 40쪽 넘어가서. 위 4줄. 역사적 시야를 가지고 보면- 역사, 역사! 역사 적으로 볼 것 같으면, 내 주장이 파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다음에 그- 41쪽으로 넘어가서.

위에서 3번째 문단.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역사적 감각의 결여 때문에. 계속해서 역사적 관점, 시야, 감각 다 같은 얘기죠. 그렇게 하고 있어. 역사적인 통찰에 대하여 강조를 하는데, 서양 종 교를 위한 제 1단계. 그러더니 인제-

음-

42쪽 넘어가서. 위에서 한 6-7줄. 종교적이라고 부르는 현상들은. 현상. … 명확한 실체. 현상 과 실체를 대립개념. 현상에 O 실체에 X. 픽업할 말은 현상이 될 거예요. 상호교환 가능한 방식 으로 본질. 42쪽 제일 마지막 문단. 종교의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 없이 종교를 바라보는 방식.

종교적이라고 부르는 삶을 살아왔다.

현상이라는 말은 따로 있는 껍데기가 아니고, 종교적 삶으로 봐야죠. 종교적이라고 부르는 삶 은 의심의 여지없이 존재해왔다. 사실 현상이라는 말도, 형이상학적인 말로 하면 껍데기입니다.

형상이 진짜고 현상은 그림자에요. 플라톤은. 또 다른 표현은 이데아. 현상은 그림자죠. 원래 본 질이었는데, 잠시 감각의 껍질을 입고 왔어. 거기서 왔으니까, 최대한 기억을 잘해서 모방하는 거 야. 잘 기억해내. 원래 출신이 그거야. 그 다음 할일은 최대한 닮아야 해. 모방하고 닮으려고 하 다가 형이상학의 세계로 되돌아가. 이게- 기독교 신학에 적용되면서- 신과 인간, 인간상에 적용 되면서 창조 타락 구원으로 이어져. 구원은 원래로 돌아가기. 타락은 현상 입기. 플라톤과 기독교 의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 그렇게 볼 수 있겠지만. 고전적 형이상학. 근세 인식론에 오면, 현상 이라는 말을 경험론자들이 쓰죠. 이성론자들은 별로 안 쓰지만. 감각… 과 반성. 그런 경험의 과 정을 통해서 백지상태인 우리에게 비춰지는 모습으로서의 현상을 말해요. 그걸 칸트가 픽업하지 않습니까? Erschein과 Ding an Sich. 근데 고대에서는 가짜인데, 칸트는 그거 밖에 없다. 현상 건너의 물자체는 몰라. 근데 현상만 알 수 있어. 제한되지만 긍정적이야. 현상이 다야. 그 자체는 몰라. 저 앞은 있음의 차원에서 현상이야. 앎에 들어오니까, 있음 자체는… 있음이 쏘아낸 정보 중에 앎만큼-그게 현상이거든- 우리가 알겠어? 제한되면서 긍정적이야. 시간과 공간, 범주라는 범위. 이게 앎의 차원. 근데 스미스와 힉이 말하는 현상은 그런 현상이 아니야. 있음도 앎의 현 상도 아니야. 삶의 현상. 오날날 삶의 현상하면 떠오르는게 현상학이겠지. 그 현상은 삶이에요.

(8)

그래서 현대철학입니다. 다만 걔는- 현상은 분명 삶을 가리키는데. 그걸 가리키는 점에서 현대시 대정신을 공유하는데. 애석하게도, 그 삶에서- 옛날에는 현상 너머 본질이 있다고 했어. 그래서 실체를 봤어. 칸트는 무를 놓으니까 그거 못 봐. 근데 후설은 다른 게 있는 게 아니고, 이거야.

근데 그걸로 가자가 아니라(해석학), 현상 안에 있는- 뭔가 담았거든? 그걸 잘 베껴보면, 현상 안 에 본질이 있다. 본질 직관 해. Wesenschau. 시작은 현대인데. 본질로 되돌아가지고. 적용시도 가 있었습니다. 신학으로 정치로. 그래도 불구하고, 확대되지 못했고, 실존철학과 결합하면서 해 석학 출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어요. 그 정도로. 뒤에 위에가 아니라. 그 자체. 그런 의미에서 현상. 다들 아시겠지만.

종교적인 본질이 아니라 삶을 가리키는 현상.

2절로 넘어가면서- 구절 중에 눈여겨 봅시다-

1절의 제목을 붙이자면? 책이 친절하게도, 장 안에 넘버를 다 붙여놨어. 근데 불친절하게도 제 목이 없어. 불친절한 부분들을 나 스스로에게 친절하도록 작업을 해봐요. 그러면 종교 본질 현상 세 말 가지고 붙여봐요.

2절이면 본격적인 종교의 실체화 과정.

45쪽 중간 문단에- 형용사는 명사보다 더 안정된 역사… 삶O 세계O 명사 X 형용사 O . 47쪽 가니까 key term 이 나오죠? 그리하여 거대한 객관적 사물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종교.

종교의 등장. 이미 있던 인간의 종교는 종교적인 삶, 종교적인 현상이라고 했고. 거대한 객관적 사물…. - 아니라. 그 앞에 모두 O 추상화 일반화 다 X표. 그런 얘기도 계속해서 나와요. 이후 쭉쭉 넘어가고.

그리고 스미스가 친절하게 전개하는 종교라는 어휘, 등장했다 가라앉는 부침의 역사.

원래의 뜻, 배경의 역사.

그러다 중세로 가게 되면? 4절. 신앙이란 것 때문에 종교가 뒤로 물러서게 된. 짱개 지르고 도 망가잖아요? Religio는 경건 수도. 근세초기도 그 정도 어휘.

다 읽으셨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참된 종교라는 책. 우리는 이미 참된 종교로서 그리스도교를 말하겠구나 로 읽는다는 거지. 근데 본래 뜻은 그게 아니었다. 참된 종교 거짓 종교 주장이 아니 라. 그리스도인이 취한 종교적 삶이 참되거나 거짓된 경우. 종교라는 단위가 제도적인 실체가 아 니었다.

그랬는데-

주목해봐야할 6절이 나옵니다.

근세 후기. 본격적으로 실체화가 시작. 여기서부터 진하게 봐야하는데. 벌어지는 이유와 방식.

6절이 벌써- 그러나로 시작해요. 근데 17세기? 본격적인 탈종교와 앎의 시대. 16세기는 선구자 적 희생적인 시대였고. 17세기에 근대 초기가 본격적으로 만개. 종교개혁기를 거치고. 근데 여기 는.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할께. 67페이지. 체계적이고 추상적인 지적 추상물.

그 다음 문단을 잘 봅시다. 적어도 두 개의 축이 갈래를 형성하면서 모아가는 것으로 전개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인간은 누구든지… 심심한 세 가지 선택이 아니고, 랜덤 초이스가 아니고. 진 선미이자 지정의. 정신의 세 요소야. 그리고 그 너머 하늘=성. 위대한 체계들을 만들어냈다.

학기 초부터 해왔던 인간과 종교의 관계이자 종교적 인간의 모습. 체계라는 말을 어떻게 읽어 요? 체계는 너무 저 뒤의 말을 갖다 붙인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제가 지금 현상과 실체 현상과 본질. 종교적 삶이 먼저 있었고. 개념 일반화 등은 나중의 일이고. OX구도에서 이것은 어떤 방 향으로 이 이야기가 가고 있습니까? 이해의 그림들을, 종교가 취해진 모습들을 대비하면서 갔는 데. 이건 종교가 아니라 인간 얘기여. 읽다보면 거슬리지 않나요? 나 혼자 거슬렸나?

(9)

광우) 체계보다는 교리?

교수) 그건 일부지.

광우) 형태를 앞에서 써서. 형태 구조 체계.

교수) 맞아. 종교에서는 그렇게 OX로 갔다가. 인간으로 오니까. 인간은 그전부터 있었는데.

17세기부터 종교적 인간이 있는 게 아닌데. 맞든 않던, 이렇다. 인간은 이런 짓을 하고 있다. 종 교에 대해 OX했는데. 인간 그랬든 간에. 인간들이 한다는 거야. 슬슬 OX 아닌, 세모 같은 거.

형태 구조 체계. 츠빙글리의 생각이 어땠는지 간에. 구조. 저 위의 형태 구조 체계의 사례들이야.

인간의 보편적인 종교적 본능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칼뱅의 생각이… 이게 제가 즐겨하는 원초적 종교성이지. 근데. 인간의… 어떤 것도 할 수 없어. 완전히 씨가 말라버렸어. 그런데. 칼 뱅 식의, 아우구스티누스 칼뱅 바르트 라인에서 보면, 종교적 인간은 굉장히 불경한 말이죠. 그들 이 공유할 수 없는. 보편적 본능이야. 근데 보편 타락으로 박살나버렸어. 이마고 데이가. 아우구 스티누스, 칼뱅이. 칼뱅이 하늘 아래 새 것이 없었겠지. 그런데 토마스하고 붙으려니 아우구스티 누스를 데리고 왔고, 교회의 타락은 전적 타락의 좋은 예가 되겠죠. 여기 칼뱅은 피치노와 대치 가 되어있어. 인간이 하는 짓은 형태 구조 체계. 인간의 성향이야. 종교보다도. 피치노와 칼뱅은 정반대인데. 그거와 상관없이 인간이 이러고 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다만 칼뱅은 종교적 인간이 아니라는 게 아니야. 타락으로 박살 났다는 거지. 거기에 대하여?

그 한 문단은 그리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OX든,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음을 눈여겨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 17세기 유럽인들로 시작되는 부분에서. 역사적으로 17세기 독일 30년 전쟁 일어나지 않습 니까. 그래서 똘래랑스 생기고, 경건주의 운동이 생기잖아요. 그러면 경건주의 운동은 결국 교리 적인 논쟁들. 개신교 스콜라주의 논쟁이 피를 부르고 전쟁으로 피폐해지지 않았습니까. 기독교인 반성, 삶으로 가야하지 않겠나. 이런 운동으로 가는게 이미 근세에서 현세로 옮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거든요. 앞에 보면 경건성 이야기 나오거든요. 5번에서. 저는 6번 이후는 이미 근세에서 현대로 가는게 아닌가. 유럽의 컨텍스트 자체는.

교수) 어… 일견 의미가 있는 얘기에요. 의미가 있어. 그렇게 볼 실마리가 분명히 있지요. 근대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신학의 역사의 역사를 보면, 지금 경건주의의 타겟인 정통주의가 나타나 고. 그에 대한 반성으로 경건주의가 나왔지. 17-18세기 걸친 거고. 그 뒤를 이어 18-19, 근세를 마감하고 신정통주의라는 반동을 일으키게 되는 자유주의가 나오게 되었어. 그렇게 근세 신학을 정리할 수 있겠지. 그게 인간 정신요소로 보면 지정의겠지. 그래서 신학은 인간학이고요. 얼마나 이게 집요한 것이냐면, 근세 기독교사를 장식할 18-19세기는 동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세 후기 신학이잖아. 한 세기는 별 것 아니야. 동시대적인 경합이야. 그러면 동시다발적인 발생으로 볼 수 있어요. 다른 한편으로 지정의가 공시와 통시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타나냐? 고 중세를 지성지배로 볼 수 있어. 종교의 입장- 합리주의 대 신비주의로 대립한다고 볼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합리주의가 지배하고 있었어요. 신비주의는 깨갱했죠. 초기 형성과정에서는 신비주 의가 그래도 좀 그랬는데. 집성을 라틴교부가 했거든요. 헬라가 훨씬 창궐하고 많았는데. 라틴교 부인 아우구스티누스가 했다는 것- 이게 역사 왜곡이야. 정치적인 영향이지. 라틴 계열이 뭐여.

로마 제국이 배경이잖아. 그래서 교권이 작용한거야. 그래서 대권 장악하고, 고대를 정리하고 중 세로 가지. 아우구스티누스 자체는 다 나오지만, 시대적인 흐름은 합리주의야. 중세는 말할 것도 없지. 합리주의와 주지주의. 그러다 둔스가 의지로 싸우고, 쿠자누스가 신비주의. 삼발이이기는 한데, 지성지배입니다. 그리고 고대중세 다. 근데 정점 찍고 붕괴할 때 신비주의가 반짝했어. 헬 레니즘, 에크하르트. 하지만 그건 끝을 내는 아이러니야. 왜. 한 시대를 새롭게 풍미하는 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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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가 되기에는 빈약한 건가? 서태지의 신비주의가 아니고. 동네에서 돌아다니는 종교적 신비주의 가 아니고요. 합리주의와 대척을 이루는, 그만한 무게를 이루는 신비주의인데. 역사가 그랬어. 그 만큼 합리주의가 대세였고, 지성지배야. 중세가 마감했지. 철학을 시녀로 삼았었는데. 합리주의 아니라고 하면 몰역사적인 것이고. 신앙은 어떻게든 지성과 해야 해. 그러니 스콜라지.

근대는? 루터? 데카르트? 선두주자들이야. 그들의 칼날은? 의지라고. 앞선 사람들과의 대척점 에서. 라이프니츠 같은 사람은 마이너야. 큰 흐름에서는. 칸트는? 의지야. 진선미성을 그리잖아.

비판철학에서. 네 개의 가치를 놓고 이성 비판을 해. 근데 그 진선미성의 전개에서 꽃, 정점이 뭐냐? 실천이성이에요. 판단력은 사이드고요, 이성의 한계 안에 있는 종교는 실천 이성의 종교적 버전이야. 결국 도덕 윤리 문제로 치환시켜. 종교는 사실 도덕이야!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그리 고 순수이성은 종교가 불가하다 아니야? 그래서 도덕형이상학으로 가잖아. 그래서 근대를 전체 성격을 지워. 헤겔을 용광로야. 다 담아. 세 사상사를 다 묶어. 그걸 헤겔의 프로젝트야. 그래서 이런 저런 면이 다 있어. 그러면 근대 전체는 큰 특징이 의지에요. 그리고 끝은 감정이 나와.

공시는 삼발이, 통시는 지성 의지. 그러면 현대는? 감정이야! 슐라이어마허. 1800년. 신학이 철학보다 먼저였어. 원래 그래. 우리가 분발해야 해. 루터도 데카르트보다 앞섰어. 목숨 내놓는데 는 종교가 먼저야. 데카르트는 눈치 봤어. 친구한테 괜찮냐고 물어보고. 근데 슐라이어마허. 니들 이 보는 종교- 고대 중세는 지성 중시니까 교리야. 그리고 근대는 의지의 눈이니 윤리가 나와요.

실제로 그렇잖아요. 주일학교 선생들은- 뭐라고 읊어? 다 교리와 윤리 얘기해. 재미없고 어려워?

윤리 가야해. 이러니 착하게 살아. 결국 교리와 윤리에요. 지성과 의지야. 근데 계몽주의 세례를 받은 양반들이 보니까- 계몽됐어. 불빛이 딱 보니까, 탈종교도 농익고, 세상이 찬란한데 아직도 종교는 교리야. 근데 교리는? 고전적 지성의 필터를 통과한 산출물이지만, 근대에는 안 통해요.

인식론적 성찰을 거친! 합리주의가 표방하는 지성. 근대적인 지성. 아무리 르네상스여도, 인식론 적 성찰- 인간으로서의 위치를 설정한거야! 주도권과 한계야. 인간적일 수밖에 없어라는 한계와 인간이 주체야! 양면적인 성격이 이전으로 갈 수 없는. 그래서 칸트야. 칸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 시대~ 칸트가 지르기 전에 아무도 그 생각을 못 한 것 아니야. 데카르트 로크 흄. 칸트 와 헤겔은 종합이야. 종합의 천재지. 독창보다는. 물론 종합도 독창이지만. 하여튼 그래. 그그 그… 갈래를 가는데. 고전적 지식과 그리 다르니. 합당하지 않아. 고대적인 교리가 안 먹히지. 그 래서 윤리로 치환했어. 종교개혁자들이 버전이 달라도, 윤리가 있어. 타락이 하도 심하니까. 교회 타락이라는 문제에서 벗어나야 해. 그래서 윤리에 대한 강조가 되지. 과도할 만큼. 도덕주의로 갈 만큼. 그것도 반(反)인간적 도덕주의로 가. 한스 큉이 그런 것을 까. 신은 존재하는가 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윤리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들이 한참 나오고. 거기에 대해 세상들이 조소 하는 것. 쟤들이 윤리 말하고 있네? 세속의 윤리가 나오기 시작해. 니코마코스 윤리학보다도. 종 교가 윤리이기만 하면, 세속 윤리보다 나을게 뭐야. 필요 없어. 교리도 흔들, 윤리도 흔들. 굳이 종교적이어야 할 이유는 뭐야? 계몽적 교양인들이 막 멸시했어. 그래서 슐라이어마허가 등장한 거야. 종교를 말하겠다! 그래서 의지에 바탕한 윤리가 아니야! 그래서 감정. 정확하게는 우주와의 합일을 향한 직관과 찬양. 직관하면 어떻게 돼? 엥기는 거야. 절대의존. 그래서 현대를 시작해요.

그래서 현대신학사는 그걸 시작으로 해요. 왜? 교리도 윤리도 위험해. 새로운 게 필요해. 그래 서 감정이 필요해! 그래서 일견 맞는 말이야. 슐라이어마허도 경건주의와 자유주의에 걸쳐있어.

그러니 명실 공히 현대신학의 선구자로 읽히는 것이고, 그때 등장한 것이 감정이라는 것. 그것은 적어도 지성과 의지에 대하여 현대를 시작한 계기다. 경건을 그래서 강조하고. 신학에서는 현대 의 시작이라고 엄연히 말해줄 수 있는데.

철학으로 가면? 결국 지류가 모여서 바다로 그려져서 포스트 근대성의 그림이 그려져. 약간의

(11)

이해의 차이를 두는 것- 지성과 의지에 대하여 감정으로 가는 것. 신학도 철학의 역사를 공유하 기도 하고. 근데 감정의 이야기가 정신요소의 한에 있어서, 시작이기는 하지만, 지정의 삼각구도 그림에서 경계 그림이기도 하지만, 근대의 마무리기도 해. 그러면 근대의 마무리로서 현대는 어 떻게 관계하느냐? 지정의 정신이잖아. 그러면 몸을 등장시키죠. 지의정이라는 세 요소 중에서 나 중에 육체. 몸 이야기할 수 있는 첫 계기, 가교가 또 감정이라고. 감정이 몸 이야기를 육체로 끌 고 가. 그래서 굉장히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지성을 붙잡다가, 그걸로 안 되니까 의지로 가다가 감정으로 가고. 근데 지성 의지 제낀 게 아니라 묶은 거잖아. 다 묶었는데? 묶고 보니 전체가 보 이가 남은 게 보이는거야. 그게 바디라는 거지. 지의정 얘기할 때만 해도, I have a body, l live in time. 근데 육체가 오니까. I am body, I live time. 다른 어떤 것보다 삶에 호소력이 있는 요소를 선구자적으로 땡겼다고 말할 수 있을 꺼야. 그런 맥락의 연결에서 선구자로 보자면 그런 거고.

나 다섯 시 지키려고 했거든.

깨져버렸거든. 그럼 5시 반이라도 지켜야지. 뭐야 이거. 아무튼 그런데. 시대적인 순서- 제가 얘기한 것에 사족을 붙일게요. 우리에게 익숙한 순서는 지정의지. 근데 통시적인 역사의 흐름은 지의정으로 가요. 간발의 차이기는 하지만, 근대에서는 지정의로 가요. 의가, 자유주의가 근대를 종지부 찍어. 그래서 자유주의 때문에 신학을 뭐라고 해? 신학계에서 잘못 쓰이는 표현이지만- 신정통주의로 넘어가게 되는 계기에 자유주의가 신학을 위기로 몰고 갔다고 보고, 신학의 위기가 벌어졌다. 그래서 위기의 신학을 대처하자. 위기를 부각하니까, 위기로 읽으니까 다시 신정통주의 가 부각했죠. 자.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면-우리에게 익숙한 순서로 지정의. 지배적인 특성은 지 의정일텐데. 왜 우리는 지정의가 익숙해져있을까? 이유가 있죠. 그 이유를- 제가 이번 학기는 다 루지 않았지만- 안 다루지는 않았네. 성미선진. 과 비슷한 원리. 비슷한 작동방식이 작용하고 있 어요. 사이드 스토리로 챙길만하고요.

책 얘기로 되돌아갑니다.

68페이지 중간 문단에. 개념의 변천과정을 설명하면서, 그… 그리스도적 종교라는 이름.

68의 위 문단. 교리와 행위- 이게 윤리입니다.

그러다가, 이런 체계들은- 주지주의적인 의미에서.

69로 넘어가니까, 첫 문단, 신조들이 체계를 지칭한다. 17세기 후기에는. 본격적으로 성행하게 된다. 이것이 계몽주의의 사고방식이며. 사물에 대한 주지주의와 비인격적인 도식화.

자. 뭐, 이게 다 X 표 대상이지. X표 친 거는 뭐에요. 종교 개념에 대해 뭔가 수정하려는 근 본적인 이유거든. 비인격적인 도식화. 주지주의는… 그것만으로는 수정해야할 이유는 명확하게 알 수 없죠.

73쪽. 관찰자 참여자와 비슷한 이야기. 나 자신의 종교는 다 동그라미, 다른 종교는 다 X표.

내거는 다 O 다른 거는 다 X 이제 종교라고 하는 지칭 영역 차원을 놓고 눈에 띄는 대로 했는 데.

O와 X의 근본이유가 나와 남이라는 것. 그래서 종교를 진지하게 살필 때, 인간이라는 것. 특 히 나와 남. 생각하는 갈대 같은 거 말고. 이성적 동물 이런 것 말고. 인간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인간이데, 그때 인간이 나와 남이라는 거지. 타자에 대한 모든 분류에 있어서 알파와 오메가지.

자기와 타자라는 것. 시간 관계상. 참여자 관찰자라는 것도 이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

(12)

요. 크로스와 평행자로 얽히리라 생각하는데요. 자타 관계를 들이대면 그런 식으로 그려지리라 생각하는데. 자기와 타자- 시작과 끝이다. 무슨 얘기냐. 세상을 우리가 봐요. 종교에 관하면 유달 리 인간과 세상 이야기를 안 해요. 인간을 배제해야 종교를 깔끔하게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 요. 근데 자기 그림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그런데 종교뿐이겠습니까? 정치에서는 지배자와 피 지배자. 가진 자와 없는 자. 거칠게 둘로 갈랐지만, 내가 어느 쪽에 속했느냐에 따라서, 보는 세 상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니까, 강자와 약자. 그런 대비가 보는 세상은 근본적으로 다른데, 어떤 세상이 온전한 그림이야? 많은 분류가 있을 수 있지만- 온갖 것들이 다 있지만. 미안하지 만, 종교에 의한 분류도 별개 아니고, 근본은 자기와 타자야. 어느 종교가 참인 것은 내가 속하 니까. 이러지 못한 것은 자기반성이야. 필요성이 대두된 것은 한참 지났지만, 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이미 서론에서도 나왔지.

여기서 멈출 수 없어서 한 가지만 딱.

인간과 종교의 관계…죠? 그죠?

인간과 종교의 관계.

근데 관계가 어떤 관계냐? 이중적 양면성의 관계.

인간은 해방을 원해. 종교에게. 종교는 인간에게? 해방을 주기는 해. 때때로. 근데 스미스와 함 께, 종교에서 일어나는 문제 상황. 비인격체적인 물상화. 억압이 일어나. 이게 스미스 버전으로 개념화 물상화 실체화 비인격화… 모순이죠? 왜 그런가- 근본 뿌리에는 또다시 인간과 종교가 있 는데. 인간은 종교-의 관계서. 인간 최대의 욕망을 추구합니다. 한계를 넘는 것.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 저편을 향하는. 무한해. 욕망을 열심히 추구하지. 근데 종교는 인간에게? 욕망을 승화시키 거나 초월하라고 하지. 물론, 비교종교학에서 말하는 하등종교- 하등종교는 철저하게 욕망 충족 의 체계야. 즉각 충족시켜. 고등은 승화시켜. 욕망은 있어. 인간이니까. 있다는 것은 인정해. 질적 으로 다르지 않아. 하지만 충족하고 초월해. 상승하자. 올라가자. 이게 고등이야. 하등은 머무르 고. 한창 그랬어. 비교종교학에서. 그때 고등은 신현적인 종교든지, 성현적이든지. 욕망 충족의 역현성을 다 지니고 있다. 공통분모로. 모든 고등종교는 하등종교를 밑에 두고 있어. 그래야 돼~

그래야 사람이 모여. 그런데 불교는 고등종교인데- 하등으로 돌아가. 요즘. 그래서 대형화를 꿈꾼 다고 비판할 수 있어. 성현은 초원, 인본, 자력 구원이야. 내재. 스스로의 힘으로. 초월할 것도 없어. 초막이니까 분발할 필요가 없어. 근데 신현은 타력이고, 사막이고, 전갈밖에 없으니 초월해 야 해. 그런데 이런 극적인 비교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얽혀. 신현이든 성현이든.

하여간, 고등은 초월하라고 가르쳐. 반대로. 절묘하게 대립항을 주고 받어. 근데 뿌리에는 이런 얼개들이 있어. 근데 73쪽- 내주하심- 남의 종교는 인간과 종교, 풀스팩트럼으로 봐. 근데 내꺼 는? 해방과 욕망 초월만 봐. 그러면 저런 선택의 근거는 무엇이냐? 나 다른 사람. 종교를 종교의 정체로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고, 가능하지도 않고.

나는 왜 제낄까? 왜? 인간을 안 볼까? 생각해보십시오. 왜 내 종교서는 안 봐? 지난 시간 신학 적 인간학 하면서 보는 강박, 환상. 프로이트가 말하는 환상은 욕망 추구일꺼고. 아편도. 투사도.

흐흐흠.

왜 그럴까? 흐흠.

지난 시간 공부하신 분들은 이런 맥락서 생각해보시고, 안 하신 분들도 생각해보세요.

왜 나와 타자가 한쪽으로만 취하고, 다보고.

염두에 두고, 시간 관계상 멈추겠습니다.

그런데-

서양에서 종교얘기…

(13)

그래. 똑같은 얘기가 또 있네. 80쪽. 이거 하면 내가 2장 털어. 인간과 종교현실은 이래. 남의 종교는 당위와 현실의 역학구조를 다 살펴. 근데 내 거는 당위만 봐. 그렇게 된다. 그래서 최소 한 2장에서 이걸 추려야 해. 인간을 떼놓을 수 없는 이유. 그리고 3장 마지막서 중요한 이야기 있어. 대전환의 이유. 근데 시간이 이러니까. 그냥 확확. 20페이지 건너 띄울 수밖에 없어. 늘 강 조하지만, 대학원 수업에서 다 볼 수 없어. 꼭 집을 테니까.

다음은 스미스 마지막 시간인데. 3장부터 찍고 7장까지.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열띤 토론 플러스 여러 가지 등등 수고하셨습니다.

마치겠습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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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나온다 그걸 찾아볼 필요가 있다 강독은 이렇게 한다 생각한도 고로 존재한다.. 드는 관념 타고난 관념 본유관념 생득관념 가장

비트겐슈타인은 공동체 안에서 가능하지, 통용이 불가능하거든요... 신앙과

따라서 무한한 바다와 한갓 미물에 불과한 흰나비의 대조를 통해서 시인은 역사 혹은 운명과 같은 거대한 힘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나비

박인환은 버어지니아 울프의 죽음을 통해 인생의 허무감을 제시하고 그것을 전 쟁으로 인한 사랑과 인생 , 문학의 죽음이라는 우리 현실에

현토악장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훈민정음의 창제도면서부터이다... 목조부터 환조까지는 태조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골치 아픈 사업을 하지 말고 가업으로 이어가라고 조 언하고 있다... - 기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