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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時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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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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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時調)

1. 개념

(1) 고려 후기에 이르러 신흥 사대부들이 역사적 전환기를 맞아 경기체가만으로 감당할 수 없 는 유교적 이념을 표출하기 위해 또 다른 표현 영역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창안된 국문학 양식 이다.

(2) 조선 5백년 동안 집중적으로 창작되고 향유되었던 문학이다.

2. 발생과 형성

(1) 발생 : 고려 중엽에 싹이 터서 말엽에 그 정형이 확립되었다는 것이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정착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2) 형성 : 무당의 노랫가락 기원설, 향가 기원설, '정읍사'와 같은 6구체가 기원설, 한시를 번역 하는 과정에서 생성되었다는 설, 고려 가요 기원설, 특히 '만전춘 별사'에 보이는 3장 형식이라는 주장 등 다양하다. 그 중 고려 강의 형태상 특징이 허물어지면서 단형화되어 새로운 문학 형식 인 시조가 이루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3. 특징 (1) 형식

○ 일반적 형식은 3장 6구, 45자 내외가 기본형이다.

○ 음수율은 3.4조 또는 4.4조가 기조로 되어 있으나 한두 음절의 가감은 무방하다.

○ 4음보의 율격을 이루며, 종장의 첫 음보는 3음절로 고정되어 있고, 둘째 음보는 5음절 이 상이어야 한다.

○ 시조에 있어서 가장 엄격한 제약이 따르는 것은 종장의 첫 음보이고, 다음이 종장의 둘째 음보이다.

(2) 내용

○ 유교적 충의 사상을 노래한 시조들이 많다. 여말 선초의 고려 유신들이 지은 회고가나 사 육신들의 절의가 등이 이러한 내용을 다목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 자연 속의 한가롭고 평화로운 삶을 노래하는 작품들도 많다. 이러한 작품들 역시 순수한 자연으 노래한 것이라기 보다는 유교적 충의 이념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 기녀들의 작품에는 그들의 애정 세계가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다.

4. 종류

(1) 평시조 : 시조의 기본형으로 단형(短形) 시조라 한다.

(2) 엇시조 : 평시조의 초장, 중장 중 어느 한 구가 길어진 시조. 영, 정조 시대에 많이 발달하 였다. 중형(中形) 시조하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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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설 시조 : 3장 중 두 구 이상이 평시조보다 길어진 시조로 영, 정조 시대에 많이 발달하 였다. 장형(長形) 시조라고도 한다.

※ 이밖에 내용상으로 연결된 2수 이상의 기본형을 나열하여 한편의 작품을 이룬 경우를 연시 조라고 한다.

5. 작가

일반 평민에서 임금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처음에는 주로 양반들이 짓고 부르던 것이 조선 영, 정조 이후에는 농민들도 짓고 불렀다. 이런 점에서 시조는 국문학의 대표적 장르라고 할 수 있다.

6. 시조집

(1) 청구영언(김천택, 영조 4년) : 곡조별로 분류했으며, 유명씨를 전반에 싣고 간단히 작가 소 개를 함

(2) 해동가요(김수장, 영조 39년) : 작가별 분류. 자작시 117수를 포함함. 영조 45년에 76수를 더 실어 증보함

(3) 고금가곡(송계연월옹, 영조 40년) : 내용별로 분류, 120여수가 3대 가집에 없는 것들임 (4) 근화악부(미상, 정조?) : 주제별로 분류

(5) 병와가곡집(이형상, 정조?) : 1956년에 발견된 시조집, 1권 1책의 사본. 정조 때 이형상의 엮 은 것으로 추정됨

(6) 가곡원류(박효관, 안민영, 고종 13년) : 곡조별 분류, 본명 해동악장 또는 청구악장 (7) 화원악보(미상, 고종?) : 곡조별로 분류

(8) 동가선(백경현?, 순조) : 작자 및 내용별로 분류

(9) 남훈태평가(미상, 철종 14년) : 순 국문으로 표기. 음악적 의도에서 종장 넷째 음보를 생략 하였음

* 악장(樂章)

1) 악장(樂章)문학의 정의

조선 시대 궁중에서 종묘 제향(宗廟祭享)때 부르던 송축가(訟祝歌)로서, 조선 건국 및 문물 제도(文物制度)를 찬양하는 내용의 노래로,'악부(樂府)'라고도 한다. 조선 건국이 천명(天命)이었 음을 들어 창업주(創業主)들의 공덕을 찬양하고, 임금의 만수무강(萬壽無疆)과 자손의 번창을 축원하며, 후대 임금을 권계(勸戒)하는 내용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조선 전기에 발생한 시가(詩歌) 형태로 ‘악부(樂府)’라고도 한다. 궁중의 제전(祭典)이나 연례(宴禮) 때 주악(奏樂)에 맞추어 부르던 가사(歌詞)이다. 건국의 성업(聖業)과 선대 임금의 위업 및 공덕을 기리고 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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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上)의 만수 및 자손의 번성을 송축(頌祝)한 내용으로, 특히 조선의 창업을 칭송한 것이 대부 분이다. 4구 2절의 형식으로 경기체가(景幾體歌)의 영향을 직접 받아 이루어진 특권계급의 과장 적인 문학인데, 주로 한시(漢詩)의 형식을 이어받은 한문계의 악장이 중심이 되어 있고, 국문계 의 악장도 있다. 악장은 조선 전기에 주로 발달하였으나, 특권 귀족층이 전유한 문학형태로서 얼마 안가서 소멸되었다. 악장의 범주에 드는 작품으로는 그 밖에도 정도전의 <납씨가(納氏 歌)> <정동방곡(靖東方曲)> <신도가(新都歌)>, 권근(權近)의 <상대별곡(霜臺別曲)>, 변계량 (卞季良)의 <화산별곡(華山別曲)>, 윤회(尹淮)의 <봉황음(鳳凰吟)> 등이 있고, 또 작자 미상인

<축성수(祝聖壽)> <성덕가(聖德歌)> <유림가(儒林歌)> <오륜가(五倫歌)> <연형제곡(宴兄弟 曲)> <북전(北殿)> 등이 있다.

2) 형성 및 전개

(1)조선 초기에 발생하여 세종 때 성행하다가 성종(成宗) 이후 소멸했다.

(2)경기 체가(景幾體歌)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싹튼 귀족 계층의 문학이다.

(3)초기에는 중국 고시체(古時體)의 형태를 본받았고, 훈민정음 제정 이후 약간의 국어가 섞인 현토체(縣吐體)로 바뀌었다가 후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같은 정형성(定型成)을 띤 신체(新體) 형식으로 고정된 것으로 보인다.

(4)4구(句) 2절(節)의 형식이 기본을 이루나 변조형(變調形)도 많다.

3) 종류와 작자층 (1)종류

①용도별 : 제례악, 연향악, 거동악(擧動樂)

②형태별 :

한시체 : <납씨가>, <문덕곡>, <봉황음>

경기체가체 : <상대별곡>, <화산별곡>, <오륜가>

속요체 : <신도가>, <감군은>

신체 :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2) 작자층 : 대부분 조선조의 권신(權臣)들이었으며, 향유 계층도 주로 특권 귀족층에 한정되 어 있어 진정한 국민 문학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 대부분이 건국초의 개국공신(유학자)들.

4) 가치(價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새로운 문화 양식이나, 몇 개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과장과 아유(阿諛) 가 심하여 문학적 가치를 크게 둘 수 없는 작품이 대부분으로, 목적성을 가진 장르였기 때문에 문학성은 그다지 높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은 영웅 서사시로서 문학성이 인정되고 있다. 한편 특권층의 문학이었기 때문에 향유 계층이 엷었고, 목 적성이 강해서 그 수명은 길지 못했다

1) 종묘 제향이나 연락때 불리어지던 송축가로 '악부(樂府)'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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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초기에 경기체가의 영향으로 발생하여 성행하다가 성종 이후에 소멸.

3) 신흥왕조에 대한 아유의 성격, 과장된 찬양과 송축으로 일관됨.

4) 강한 목적성을 가진 특권 귀족 계층의 문학으로, 국민 문학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일찍 소 멸.

5) 수록 문헌

<악학궤범(樂學軌範)>, <악장가사(樂章歌詞)>,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등에 기록되어 전한다.

*** 심화 자료

악장

궁중에서 나라의 공식적 행사에 쓰이는 노래 가사. 고려와 조선의 궁중음악으로 불려진 노래 가사를 모두 포괄하지만, 흔히 ‘악장’이라면 우리 문학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조선시대 초 기(15세기)의 특정한 시가들에 붙여진 역사적 장르 명칭으로 사용한다.

즉, 조선이 건국되면서 동양적 통치 관례에 따라 예악(禮樂)을 정비(整備)하게 된다. 나라의 공식적= 행사인 제향(祭享)이나 연향(宴享) 혹은 각종 연회(宴會)에 쓰기 위하여 새로 지은 노 래 가사들을 특별히 따로 묶어 시가 장르의 하나로 다루는데, 이것이 ‘악장’이다.

그러나 악장을 문학 장르로 설정하려면 통일된 형식과 성격을 보여야 한다. 그런데 작품에 따 라 속요·경기체가·시경(詩經)·초사체(楚辭體) 등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어 장르로서의 통일성 을 보이지 못하므로 각 작품이 지닌 형식이나 성격에 따라 본래의 장르로 되돌려야 한다는 견 해가 대두되었다.

이 경우 문제는 우리 문학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나 〈월 인천강지곡 月印千江之曲〉 같은 독특한 형식을 보이는 작품은 어느 장르에도 귀속시킬 수 없 다는 난점이 있다.

또 〈감군은 感君恩〉 같은 작품도 형식에 따라 고려 속요에 편입할 경우 속요로서의 성격보 다는 조선 초기 시가로서 갖는 특수성이 훨씬 강하게 반영된 작품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게 된다.

그래서 악장의 통일성을 형식보다 내용에서 찾아 창업주나 왕업을 찬양하고 기리는 송도적 성격(頌禱的 性格)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음에 착안하여 송도가(頌禱歌)·송축가(頌祝歌)·송시 (頌詩)·송도시(頌禱詩)·아송문학(雅頌文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자는 제안도 있다.

그러나 송도적 성격은 15세기 악장의 특수성이 아니라 멀리 신라 유리왕 때의 〈도솔가 兜率 歌〉 이래로 흔히 발견되는 일반성이라는 점에서 적절하지 못하다.

또, 악장을 ‘∼시’, ‘∼문학’으로 부르자는 제안도 그 존재양태가 시나 문학으로서가 아니라 노 래로서 향유되어왔다는 특수성을 무시한 명칭이므로 타당하지 못하다.

한편, 악장이라는 명칭을 궁중의 제향이나 연향에 쓰인 아악곡이나 속악곡으로 불린 한문으로 된 노래에 한정해서 쓰고 그밖의 각종 연회에서 당악과 향악으로 부른 노래를 가사(歌詞)라는 명칭으로 따로 설정하자는 제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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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악곡이나 속악곡으로 불린 노래와 당악이나 향악으로 불린 노래를 다시 분리해야 할 만큼의 각각의 독자성을 인정하기는 어려우므로 역시 적절하다고 할 수 없다. 현재로서는 악 장이라는 말이 널리 통용될 뿐 아니라, 궁중의 음악으로 쓰인 노래라는 특수성이 반영된 명칭이 어서 가장 적절하다 하겠다.

〔작품유형과 형식〕

악장은 언어형식에 따른 표기 체계상의 차이에 따라 한문악장·국문악장·현토악장(懸吐樂章) 의 세 가지 유형이 있다. 한문악장은 악장의 본래 영역으로서 양적으로나 음악적 비중으로 중심 위치를 차지한다. 정도전(鄭道傳)·하륜(河崙)·변계량(卞季良)이 대표적 작가이며, 4언구 중심의 시 경체와 장단구(長短句) 중심의 초사체가 대표적 형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통형식의 악장보다 우리말 시가인 경기체가나 속요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후렴구 형식의 한문악장이 더욱 중요하다. 경기체가의 영향을 받은 〈축성수 祝聖壽〉나 고려속 요의 영향을 받은 〈정동방곡 靖東方曲〉·〈천권곡 天眷曲〉·〈응천곡 應天曲〉·〈악장종헌 樂章 終獻〉 등이 그에 해당한다.

이들은 모두 3언 4구(3·3·3·3)의 한시에 ‘위(偉)∼’라는 특정한 후렴구를 붙인 분절형식과, 여러 연(5장 또는 10장)이 거듭되는 연장형식(聯章形式)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문악장은 한문악장에 비해 작품수가 훨씬 적지만 앞 시기의 고려 속요의 형식을 수용하여 새로운 세계관을 드러내어 기존 장르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측면에서 주목된다. 이에 해당하는 작품 중 〈신도가 新都歌〉나 〈불우헌가 不憂軒歌〉는 단련형식(單聯形式)이다.

그러나, 〈신도형승곡 新都形勝曲〉·〈도인송도곡 都人頌禱曲〉·〈유림가 儒林歌〉·〈감군은〉 등 은 10장 이내의 연장형식과 일정한 수의 행을 바탕으로 이에 후렴구를 덧붙여 연을 구성하는 분절형식으로 되어 있어 앞 시대의 속요 장르를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율격면에서는 속요의 3음보격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있다.

또 후기의 국문악장인 〈용비어천가〉·〈월인천강지곡〉에 오면 연장형식을 수용하되 100여장을 훨씬 넘는 장편화 현상을 보인다. 분절형식에 있어서도 뒷절이 후렴구의 성격을 완전히 벗어나 앞절과 대등한 자격으로 상승함으로써 형식면에서 속요와는 판이한 독자적인 모습을 보인다.

현토악장은 기존의 한시 작품에 우리말 토를 달아 지은 것이 대부분으로 작품세계의 독자성 보다 한시를 국문시가화하는 형태적 이행의 과정이 주목된다.

예를 들면 〈문덕곡 文德曲〉·〈납씨가 納氏歌〉·〈정동방곡〉은 원래 한문악장으로 지어졌던 것 을 뒤에 현토악장으로 바꾼 것이고, 〈횡살문 橫殺門〉은 두보(杜甫)의 칠언절구 〈증화경 贈花 卿〉을 현토하여 만든 것이며, 〈관음찬 觀音讚〉은 고려시대부터 있던 것을 현토화한 것이다.

특히 〈경근곡 敬勤曲〉·〈문덕곡〉·〈횡살문〉의 경우 4구나 6구로 된 원사(原詞)에 낙구나 후렴 구를 덧붙여 현토악장을 만드는 원리는 우리 시가의 전통적인 분절형식에 근거하고 있어 주목 된다. 여하튼 현토악장도 10장 이내의 연장형식과 낙구나 후렴구에 의한 분절형식으로 되어 있 음은 다른 악장과 같다.

단, 〈봉황음 鳳凰吟〉과 〈북전 北殿〉은 단련(單聯)으로 된 데다가 칠언시로 꼭 맞아 떨어지 지 않는 걸로 보아 처음부터 현토악장으로 창작된 듯하다. 이렇듯 악장의 형식적 원리가 연장형 식과 분절형식에 두어져 있음에 착안하여 하나의 장르로서 묶는 중요한 통일성의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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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견해가 나온 바 있다.

〔작자층과 작품내용〕

악장의 중심 담당층은 15세기 조선왕조를 건국하고 그 기틀을 확고히 다져나간 신흥사대부 가운데 핵심 관료층이다. 당시 권신(權臣)이면서 문(文)의 흐름을 부도하고 있었던 정도전, 하륜, 변계량, 권근(權近), 윤회(尹惟) 등이 대표 작가이다.

작품의 내용은 고려 후기의 혼란과 모순을 극복하고 새 왕조의 건설을 이룩한 창업주나 왕업 을 찬양하고, 그들의 성덕을 기리는 내용이 중심을 이룬다. 그 밖에 새 왕조의 문물제도나 도읍 을 찬양하고 과시하며 태평성대와 임금의 은혜를 기리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제에 걸맞는 표현효과를 획득하기 위하여 문체에 있어서는 문어체적 성격을 지향하며, 시적 정조(詩的情調)에 있어서는 장중함과 외경스러움을 짙게 드러낸다.

또 기존양식의 수용에 있어서도 근엄한 한시양식이나 찬양하고 과시하기에 적절한 경기체가양 식을 집중적으로 선택하였다. 혹 속요양식을 택하더라도 그 후렴구를 경기체가의 그것과 혼합하 든가(감탄사 ‘偉∼’로 시작되는 후렴양식), 아예 삭제하여 새롭게 변화시키고 있다. 표현어법에 있어서도 송도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역사적 전개양상〕

한문악장과 국문악장은 그 나름의 전통과 역사적 논리를 가지고 전개되었다. 그러면서도 표 기체계나 유형적 개별성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이를 뛰어넘어 한문악장이 국문악장 쪽으로 통합 되어가는 양상을 보이며, 그 중간단계의 징검다리 역할을 현토악장이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한문악장은 악장의 중심위치에서 중국의 원구악장(圓丘樂章)이나 방구악장(方丘樂章)의 영향을 입어 종묘의 제향이나 연향에 쓰임으로써 생성, 향유되었다. 그 중에서 〈융안 隆安〉·〈수 보록 受寶蘿〉·〈문명곡 文明曲〉·〈무열곡 武烈曲〉·〈휴안 休安〉·〈근천정 勤天庭〉·〈하황은 荷 皇恩〉·〈수명명 受明命〉 등은 연향에 사용한 아악곡의 악장에 해당한다.

또한, 형식에 있어서는 ≪시경≫의 풍(風)·아(雅)·송(頌)이나 ≪초사 楚辭≫의 영향을 받아 형 성되었으니 〈궁수분곡 窮獸奔曲〉·〈수명명〉·〈수보록〉·〈하황은〉·〈하성명 賀聖明〉은 ≪시경≫의 아체(雅體)를, 〈문명곡〉·〈무열곡〉은 송체(頌體)를 수용한 것이다. 〈몽금척 夢金尺〉은 초사체를 수용하여 창작한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한문악장의 독자적인 전개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조선의 건국 초기부터 국문 시가의 영향을 받아 고려속요와 경기체가의 분절양식, 특히 낙구나 후렴구의 형식적 전통을 수 용함으로써 한시의 전통을 벗어나게 되었다.

〈정동방곡〉·〈천권곡〉·〈응천곡〉·〈축성수〉 등 후렴구가 있는 한문악장이 그에 해당한다. 한편 한문악장은 거꾸로 국문악장의 생성 발전에 영향을 주게 되는데, 주로 작품의 소재나 주제, 내 용의 측면에서 그런 현상을 보인다.

현토악장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훈민정음의 창제도면서부터이다. 처음에는 이 미 한문악장으로 창작된 것들이나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작품, 혹은 중국의 한시에 현토하는 방 식을 취하다가 뒤에는 순수한 창작의 현토악장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악장 가운데 가장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은 국문악장이다. 한문악장에 비해 양적으로 는 열세하지만 한문악장의 내용과 국문시가의 형식적 전통을 함께 수용하여 변용시킴으로써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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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기존의 장르와는 전혀 다른 독특한 양식으로 악장을 발전시켰기 때문이 다.

즉, 처음에 국문악장은 고려속요나 경기체가 등 기존의 국문시가 장르의 형식적 전통을 수용 하여 분절형식과 연장형식에 기대면서, 형식의 문제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게 된 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다가 〈용비어천가〉에 이르르면 연장형식이 장편화되어 그 양이 방대해지 고, 분절된 각 장의 앞 절과 뒷 절의 구성이 대등해지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발 전을 통해 비로소 악장 특유의 양식을 창출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독특한 표현양식을 〈월인천강지곡〉에 그대로 적용하여 장르의 정착과 확대를 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일반화시키는 정도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으므로 결국 악장은 미 완의 장르로 남게 되었다.

따라서 현존하는 악장의 거의 모든 작품들은 장르로 확립된 뒤의 작품이라기보다 장르로 형 성되어가는 과정의 작품이므로 그 장르적 통일성을 쉽게 발견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악장의 장르적 성격은 그 중심을 송도성에 기반한 교술적 세계관을 단편악장이라는 서정적 형식에 담아 표현한 ‘교술적 서정’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

에 이르러 서사적 모티프를 전면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서사적 성격까지 통합하는 독특한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 용비어천가 내용

〈용비어천가〉는 세종이 정인지(鄭麟趾)·권제(權踶)·안지(安止)를 시켜 짓게 한 것으로, 훈민정 음을 반포하기 1년 전인 1445년에 완성되었다.

세종은 노래 이름을 '용비어천가'라 짓고, 노래에서 다른 사적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음을 염려 해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강희안(姜希顔)·신숙주(申叔舟) 등에게 명하여 자세한 주해를 붙이 도록 했다. 제작과 주해를 맡은 사람들은 대부분 훈민정음 창제에도 관여했으므로, 2가지 일이 깊은 관련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용비어천가〉에서 건국의 시조들을 찬양한 것은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전통의 재 현이다.

민간 전승까지 받아들여 신화적인 배경을 갖추어, 필연적인 징후에 따라 영웅적인 투쟁을 거 쳐 위대한 과업을 성취했다고 하는 오랜 전통을 이었다. 유학에 입각한 합리적인 통치 방식이 강조되었던 조선 초기에도 문학적인 설득력을 가지고 민심을 장악하는 것은 계속 필요한 일이 었다. 따라서 훈민정음을 표기 수단으로 하여 설화가 잡다하게 변모하는 것을 막고 정제된 서사 시를 지었다. 〈용비어천가〉를 노래로 부를 때의 곡명은 〈여민락 與民樂〉이라고 했다. 감화가 백성에게까지 미쳐 함께 즐기게 될 것을 기약하는 의미이다.

〈용비어천가〉라는 책은 3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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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노래가 먼저 있고, 이어서 같은 내용이 한시로 표현되었으며, 그 다음에는 역사적 사 실 또는 전설을 자료로 한 자세한 주해가 있는데,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용비어천가〉라 는 작품은 우리말 노래로 한정되는데, 모두 125장이다. 제1장은 1줄이고 그 다음부터는 계속 2줄 씩이며 마지막 제 125장은 3줄이다. 반 줄이 끝날 때마다 글자의 오른쪽 하단에 작은 동그라미 를 표시했고, 반 줄 안에는 글자의 하단 중간에 작은 동그라미 표시를 한 것으로 보아 율격에 대한 고려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줄이 4토막으로 이루어져 있고, 1토막이 예사 노래의 2토막에 해당되니 8토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조의 형식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 같은 형식이 〈월인천강지곡〉에도 쓰였다.

〈용비어천가〉라는 노래 이름은 해동 육룡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뜻으로서, 〈주역 周易〉의 건 괘(乾卦) 설명에 나타난 상징을 바탕으로 뜻을 마음껏 펼쳐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 한다.

'해동 육룡이 이미지이미지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이미지시니//불휘 기 픈 남이미지이미지이미지매 아니 뮐이미지 곶 됴코 여름 하이미지니/이미지미 기픈 므른 이미지 이미지래 아니 그츨이미지 내히 이러 바이미지래 가이미지니'

제1, 2장에 노래 전체의 주제가 요약되어 있다.

해동 육룡은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태조·태종이다. 목조부터 환조까지는 태조 이성계의 선조이다. 여진족이 사는 곳까지 밀려갔던 가문이 오랫동안 기반을 다져 마침내 왕조를 창건했음을 자랑하고, 선조들을 높이고자 하여 6대에 걸친 내력을 노래했다. 제1장에서 말한 옛 성인은 중국의 창업주들을 말한다. 제3~109장에는 다소 예외가 있으나, 중국 창업주들의 경우와 여섯 용의 위업을 1줄씩 노래해서 서로 대응될 수 있게 했다.

중국의 경우를 먼저 내세우고 기준을 삼아 사대적인 의식을 나타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중국과 조선이 대등하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문화적인 의식에서 중국과 대 등한 자주성을 가지고자 하는 것은 고려 후기 이래로 거듭 확인된 추세였기 때문이다. 제3~8장 은 목조에서 환조에 이르는 한아비들의 행적을 노래했는데, 이들은 하늘로부터 명을 받았다고 했다. 제9~14장은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한양으로 천도한 경위를 노래했다. 제15~26장은 태조가 왕이 될 징후가 고려 초기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목조·익조·도조·환조에 와서 표면화되었 다는 내용을 말했다.

제27~46장은 태조의 비범한 모습과 재주 및 신이한 기적을 노래했다. 제47~62장은 태조의 무 공과 덕을 왜적과 북쪽 오랑캐를 예로 들어 말했다. 제63~85장은 태조의 활쏘기 재주, 학문,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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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을 기리고, 제86~89장은 다시 태조의 신이한 힘과 무공을 기리면서 끝을 맺었다. 제90~109장은 태종의 용모와 인품, 하늘의 도움, 부인의 내조에 대해 노래했다. 제110~125장은 작품의 결론이 자 후대 임금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선조의 어려움을 기억하여 건국의 뜻을 잊지 말라고 하고, 정치의 그릇됨으로 나라가 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경계했다.

태평과 사치, 교만, 간사, 백성 수탈은 모두 잘못된 정치라 하며, 치자(治者)가 지켜야 할 행동 규범을 제시함으로써 정치철학적 시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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