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종교와 문화>
1. 미에쉬코 1세와 가톨릭 도입
폴란드 민족은 주변의 체코 민족, 슬로바키아 민족과 함께 슬라브족 중 서슬라브족에 해 당한다. 6-8세기경을 거치며 폴란드인들이 오늘날 폴란드 지역에 들어와 정착하고, 이후 그 들의 강력한 중세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한 역사는 최초의 도읍지로 알려진 포즈난(Poznań) 이라는 상업 도시 인근의 그니에즈노(Gniezno)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폴란드인들이 이곳에 들어오기 이전, 이 지역에는 켈트족, 게르만족 등이 주로 거주하였으며, 이 외에도 스키타이 족, 훈족 등 다양한 유목 민족들이 이곳에 정착 혹은 거쳐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폴란드인들의 신화에 따르자면, 슬라브족의 3형제(체흐 Chech, 루스 Rus, 레흐 Lech) 가운데, 오늘날 체코 땅과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 정착한 다른 형제들과 달리, 레흐는 하얀 독수리의 인도에 따라 오늘날 폴란드 땅에 정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신화적 허구 를 떠나, 역사적으로 가톨릭을 도입하고 중세 폴란드 왕조를 구축한 인물로는 미에쉬코 1세 (Mieszko I, 930-992, 재위 960-992)를 들 수 있다. 10세기 당시 폴란드 전역에 흩어져 있던 여러 슬라브 부족 중 가장 강력한 지도자였던 미에쉬코 1세는 비록 공식적으론 왕의 자격을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주변의 여러 슬라브족들을 규합해, 초기 폴란드 왕조인 피아 스트(Piast)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미에쉬코 1세가 차지하였던 폴란드의 영토는 여 러 서슬라브 부족들 중 ‘폴라니아족이 사는 땅’이라는 뜻에서 ‘폴라니아(Polania)’로 불렸고, 여기서 ‘폴로(Pola)’는 서슬라브어로 ‘평원 혹은 초원’을 뜻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참고 로, 동슬라브어는 폴례(Поле), 남슬라브어는 ‘폴리예(Polje)’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폴란드 국호인 ‘폴스카(Polska)’ 또한 여기서 유래했다 하겠다.
6-7세기 경, 러시아 서부를 중심으로 대규모 거주하였던 원시 슬라브족들은 게르만족이 로마 영내로 이동함에 따른 지역적 공백과 아바르족, 훈족 등 여러 유목 민족들의 유럽 침 공에 따라, 원거주지를 벗어나 게르만족의 본 거주 지역 및 비잔틴 제국이 자리한 발칸반도 등 다른 여러 지역들로 이주하게 된다. 초기 폴란드인들 또한 원시 슬라브족들이 신봉하였 던 토템 신앙을 지니고 오늘날 폴란드 땅에 정착하였다. 하지만, 당시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인 등 폴란드인들의 주변을 둘러싼 민족들은 이미 로마 제국의 유산에 따라 크리스트 교(로마 교회, 훗날 가톨릭으로 발전)의 영향력 하에 속해 있었다. 따라서 초기 왕조의 기틀 을 마련하고, 국가적 체계를 잡아가고 있던 미에쉬코 1세는 북부의 포메라니아족, 동부의 마조비아족, 렌디스족 그리고 남쪽의 비슬란족 등 주변 다른 슬라브족들과의 통일 전쟁 외 에도, 크리스트교화 된 프랑크 인들과 색슨족들의 종교 개종 압력에도 시달려야만 했었다.
10세기 중엽, 미에쉬코 1세는 국력을 강화하고 폴란드인의 단결을 유도하기 위해, 당시 크리스트교를 신봉하고 있던 보헤미아 왕국(오늘날 체코)과의 협약을 통해 로마 교회(가톨 릭)를 받아들이게 된다. 966년 폴란드 역사상 최초로 가톨릭 세례식이 거행되었으며, 이후 폴란드는 이 해를 국가 수립의 신년으로 역사 속에 기록하고 있다. 로마 교회를 받아들인 이후 미에쉬코 1세는 종교적 단결을 통해 강력한 중세 폴란드 왕국의 기틀을 마련해 나갈 수 있었다. 역사 속에서 이러한 가톨릭 전통과 그 유산은 폴란드가 주변 외세의 침략과 지 배를 받을 때마다, 폴란드인들의 단결과 항전의 의지를 일깨우는 주요 요소가 되었으며, 폴 란드인들이 동유럽 내에서도 가장 강력한 가톨릭 민족으로 성장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2. 독일 기사단과 몽고 타타르족의 역사적 유산
폴란드는 지리적으로 오드라(Odra) 강 동쪽에서부터 유라시아 대륙으로 이어지는 대평 원 지대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와 함께 지정학적으로는 오늘날 북서쪽으로는 러시아, 북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 남서쪽으로는 독일, 남동쪽으로는 과거 합스부르크 제국의 중심 이었던 오스트리아가 자리하고 있는 등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또는 유럽에서 아시아로 들어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만 하는 유럽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사방이 탁 트인 대 평원 지대라는 지리적 특성과 함께, 주변에 둘러싼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 들어가 있는 관계로 폴란드는 역사 속에서 항상 주변국들의 영토적 침략과 분할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던 볼레스와프 1세가 사망한 이후, 폴란드는 후계자 문제를 둘러 싼 여러 갈등으로 인해 영토가 여러 지역으로 분할되었고, 이후에는 주변국들의 침략으로 인해 고통을 겪어야만 했었다. 당시 폴란드를 위협한 세력으로는 우선 폴란드 북부에 프러 시아를 세운 ‘독일 기사단(튜튼 기사단, Teutonic Knight)’을 들 수 있으며, 이후에는 무엇 보다도 ‘몽고와 타타르족의 유럽 침략’에 의한 파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독일 기사단은 로마 가톨릭의 십자군 전쟁 당시 독일 지역에서 파견된 십자군들이 주축이 된 것으로, 1189년 예루살렘 인근에서 하나님 성전 수호를 목표로 최초로 창설된 것이다. 초기 이들의 역할은 성전을 위해 싸우는 기독교 기사들의 간호와 의료 역할에 주력 하였으나, 이후에는 점차 로마 교황청과 십자군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반(反)이슬람 군 사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십자군 운동의 실패 이후 이들은 독일로 귀향하지 않고, 1211년 헝가리 왕국의 용병으로 트란실바니아 지역에 정착해 이민족들의 침략에 대한 헝가리 방어 를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1225년 헝가리 왕국을 전복하려는 움직임이 실패로 돌아간 후 추방된 독일 기사단은 1233년 당시 이교도 문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폴란드의 요청에 따 라 이교도(원시 프러시아족) 진압을 위해 북부 폴란드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은 이후 약 50년간에 걸친 이교도들에 대해 잔인한 진압을 통해 오늘날 발틱 3국 지역 외에도 북부 폴 란드와 러시아 인근 지역까지 장악해 갔으며 새로운 프러시아 국가를 수립하게 된다. 독일 인들의 계속된 이주 속에 세력이 크게 확대된 독일 기사단은 이후 폴란드 영토까지 침범하 였으며, 1410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군이 연합한 그룬발트(Žalgiris/ Grunwald) 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중세 폴란드 역사에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1519년 폴란드와 독일 기사단과 의 마지막 전투에서 폴란드가 승리함에 따라, 이후 독일 기사단의 활동이 중단되었고, 이어 폴란드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독일 기사단이 차지하였던 프러시아 지역은 훗날 현대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남겨주게 된다. 우선, 현대 폴란드-독일과의 역사적 관계 속에서,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 일이 폴란드 침략의 명분으로 내걸었던 그단스크(Gdańsk, 독일에선 단치히(Danzig)로 불림) 수복 문제를 안겨주었다. 더불어, 독일 기사단의 여러 상징물들은 영토 팽창과 게르만 민족 주의를 꿈꾸던 히틀러와 나치의 장식으로 차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에는 이들 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이 독일인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군사 도시이자 발틱 함대 의 주요 기지인 칼린그라드(Калинингра́д/ Kalingrad)를 건설함으로써 오늘날까지도 국제 역학 구도의 균형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함께, 13세기 몽고와 타타르족의 유럽 침공은 폴란드인들과 유럽인들에게 고대 훈 족의 유럽 침공 이후 아시아 유목 민족에 대한 공포감을 다시 한 번 각인시키는 계기를 마
련해 주었다. 12세기말 몽고 전역과 서쪽으로는 우랄산맥까지 장악한 칭기즈 칸(Genghis Khan, 1162-1227, 재위 1206-1227)은 13세기 초에 들어와 타타르족에 대한 강력한 지배 정책을 구사해 몽고 지배 하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하게 된다. 1227년 칭기즈 칸이 사망하 고 난 후, 몽고는 본격적인 유럽 정복 전쟁을 다시 계획하였고, 이에 따라 몽고군 본진은 헝가리로 타타르족의 주력 부대는 폴란드로 침공하여 약탈한 후, 오늘날 체코의 보헤미아에 서 합류할 것을 약속하였다. 특히 폴란드 침공에 앞서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했던 타타르족 은 1240년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를 공격해 하루 만에 무너트린 후 잔인한 학살과 약 탈을 감행하였다. 군인은 물론 민간인들에 대한 잔인한 보복과 무차별적인 진압 소식을 들 은 이웃 폴란드인들은 엄청난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키예프를 근거지로 타타르족은 폴란드 침공을 정비하기 시작하였고, 1241년 드디어 당시 유럽에서도 황금 도시로 알려져 있던 크 라쿠프(Kraków)와 폴란드의 상당 지역을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타타르족의 공격으 로 당시 10만 명 이상의 폴란드인들이 학살되고 사망한 것으로 역사 속에선 기록되고 있다.
13세기 몽고군과 타타르족의 유럽 공략에 따라, 폴란드를 비롯해 헝가리와 트란실바니 아, 보헤미아, 오늘날 루마니아 지역인 몰다비아,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 동유럽의 거의 모 든 지역이 이들의 약탈과 학살로 고통을 겪어야 했었다. 이후 러시아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는 폴란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몽고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폴란드 또한 몽고군 및 타타르족과의 국경선 설정에 따라 이들과의 역사적 관계를 한 동안 계속 유지해야만 했었 다.
3. 가톨릭 우주관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16세기에 들어와 폴란드는 독일 기사단의 쇠퇴와 몽고군의 공격이 약해지면서, 국가적 안정 속에 예술과 문화, 그리고 여러 과학 기술과 건축술들이 크게 발달하게 된다. 특히, 이 시기는 오스만 터키의 침공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던 발칸유럽의 민족들과는 달리, 서유 럽 내에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답습하는 르네상스(Renaissance)시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인본주의적 사상과 철학들이 여러 다양한 문화와 건축 그리고 예술 작품들에 표현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이어진 예루살렘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운동의 연 이은 실패와 가톨릭계의 절대 권력화 추구, 그리고 이에 저항하며 절대 왕정을 추구하려 했던 절대 군주들의 야심이 부딪치는 속에서, 유럽인들은 그 동안 신봉해왔던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점차 변모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 은 종교 개혁의 움직임과 함께, 여러 학문 분야에 있어 다양한 주장과 의견들이 대두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폴란드 또한 이러한 유럽 내 분위기 속에 편입되었는데, 이 시기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폴란드 학문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코페르니쿠스(Mikołaj Kopernik/ Nicholas Copernicus, 1473-1543)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오랜 동안 유럽에 퍼져있던 종교적 우주관에 기초한 천동설을 부인하고, 지동설 이론과 체계를 구축한 인물로 유명하다. 코페르니쿠스는 15세기 중반 크라쿠프 인근에서 태어났으며, 1491년 크라쿠프 대학에 입학하여 천문학을 공부한 후, 이탈리아에서 법학과 의학을 공부 하였다. 이탈리아 유학 생활은 그의 인생에 많은 전환점을 안겨주었는데, 여기서 그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및 여러 지동설을 주장했던 학자들의 주장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전 히 종교적 세계관과 우주관에 따른 천동설이 절대적 힘을 발휘하고 있었던 당시 유럽 사회
속에서,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을 따라 움직인다는 자신의 확신을 1543년 사망 직전 에서야 비로소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그가 저술한 <천체순환에 관하여, On the Revolutions of the Heavenly Spheres>란 저서를 통해 유럽인들은 비로소 천동설의 진위 여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였고, 뒤 이어 그의 주장은 훗날 갈릴레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주장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바로 당시 발달하기 시작한 인쇄술의 개발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었다. 인쇄술의 발달에 따라, 폴란드에서 시 작된 그의 주장은 전 유럽 지역의 지식인들에게 보다 쉽게 전파될 수 있었고, 다양한 학문 적 분야에도 영향을 미칠 수 가 있었다. 더불어, 인쇄술의 발달은 가톨릭의 개혁에도 큰 영 향을 미치게 된다. 가톨릭의 경직성과 교회의 지나친 권력 추구에 지친 다양한 종교 개혁가 들은 인쇄술 발달에 따른 정보 전달을 통해 서로 간의 생각들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 그리 고 이러한 정보와 사고의 공유는 점차 기독교적 본래 가치로의 전환에 대한 그들의 고민을 낳기 시작하였다. 실제 인쇄술의 발달에 따라 폴란드에서도 종교 개혁에 대한 의견과 사상 적 교환이 보다 활발히 전개될 수 있었고, 이에 따른 논쟁이 보다 확대되는 계기를 마련하 게 되었다.
4.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의 생애와 업적
친근한 성격과 현실적 참여 그리고 온건하면서도 실천적 종교관으로 가톨릭계를 넘어서 일반 대중들에게 조차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제 264대 로마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II, 1920-2005, 재위 1978-2005)는 본명이 보이티와(Karol Józef Wojtyła)로 폴란드 출신이다. 그는 통상 역사적으로 이탈리아계와 독일계가 독점하여 왔던 로마 교황 자리에 슬라브계로선 최초로 교황에 오른 역사적 인물로, 동유럽 내에서도 가톨릭 신념이 매우 강 한 폴란드인들의 자부심이자 상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로마 교황들 중 58세 라는 최연소 나이에 교황에 오른 그는 27년 가까이 재임하였으며, 이것은 역대로 34년 동 안 재임한 성 베드로와 31년의 비오 9세에 이어 사상 세 번째로 오래 재임한 교황으로 알 려져 있다. 오랜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역대 어느 교황들보다도 활발한 대외 활동(총 104차 례 해외순행, 117개국 방문)과 선교 활동을 통해 제 3세계 및 세계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 게 가톨릭을 전파하려 노력하였으며, 폴란드 및 동유럽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였고, 세계 평 화와 생명윤리 등의 분야에서 크리스트교의 도덕관을 수립하려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육상선수’, ‘행동하는 교황’이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활발했던 그의 활동은 단순히 종교적 범위를 뛰어 넘어 세계의 정치, 사회적인 일반 분야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 다.
폴란드 남부에서 태어난 보이티와는 1938년 크라쿠프의 야기엘로 대학교 연극학과에 입 학하였는데, 이 시절 축구 등 운동 외에도 시와 연극 등 예술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언어적으로는 라틴어 외에도 우크라이나어, 그리스어, 네덜 란드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영어, 러시아어, 크로아티아어 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만큼 언어적 감각 또한 뛰어났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1939년 독 일의 폴란드 침공에 따라 대학교가 문을 닫게 된 후 그의 삶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 다. 이 당시 독일로의 송환을 피해 숨어 지내면서도 그는 유태인들의 피난처를 제공하는 등 반(反)독일 활동을 하거나, 지하에서 비밀리에 연극 단체를 결성해 연극 활동에 대한 열정
을 계속 이어나가기도 하였다. 특히, 이 기간 중인 1942년 크라쿠프 교구장인 사피에하 추 기경이 비밀리에 운영하는 지하 신학교에 입학한 계기는 보이티와의 운명을 바꾸게 된 큰 계기를 마련해 주게 된다. 그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 직후인 1946년 11월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얼마 뒤 로마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 교황청 대학교에 들어간 그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작품에서 드러난 신앙, Doctrina de fide apud S. Ioannem a Cruce> 이란 제목으 로 석사 학위를 이수하였다. 이후, 폴란드의 여러 지역에서 사제 수행 및 대학들에서 강연 을 통해 이름을 알려가던 그는 1958년 9월 당시 38세의 어린 나이로 폴란드에서 가장 젊 은 주교가 되게 된다. 이후, 신앙적 신념과 활발한 활동을 인정받은 그는 1963년 12월 제 262대 교황인 바오로 6세(Pope Paul VI, 1897-1978, 재위 1963-1978)에 의해 크라쿠프 대주교로, 그리고 1967년 6월엔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1978년 8월 바오로 6세가 선종하자 로마 교황청은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Conclave)를 열었고, 요한 바오로 1세 (Pope John Paul I, 1912-1978, 재위 1978년 8월-9월)가 선출되었으나 즉위한 지 34일 만에 선종함에 따라, 다시 콘클라베가 개최되게 된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8번째의 투표 과 정을 거치며, 마침내 1978년 10월 22일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게 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생애 동안 수많은 업적을 남기었다. 이중 가장 주목받는 것으로는 무 엇보다도 종교 간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실제, 그는 1999년 3월 이란의 하타 미 대통령을 만나 11세기 이후 처음으로 크리스트교와 이슬람 세계간의 화해를 시도하였으 며, 1054년 크리스트교 대분열 이후 처음으로 정교 국가인 루마니아와 그리스 등을 방문하 여 정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합동 성찬예배를 집전하기도 하였다. 2000년 3월엔 교황으로서 는 최초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하였으며, 또한 독일을 방문해 신교 인 루터 교와도 화해함으로써 구원론을 둘러싸고 500년 가까이 대립된 개신교와의 대립을 종식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석가 탄신일을 앞두고는 전 세계 불교 신자들에게 축하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어, 2001년 5월에는 시리아를 방문하여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이슬람 모스크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세계 주요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세계 평화기도의 날 행사에 참석하여 세계 평화와 환경 생태계 보전 그리고 모든 폭력 종식을 호소하는 종교적 관대함 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외에도 그는 과거 교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인류에게 저지른 여러 잘 못들을 최초로 공식 인정하였으며, 갈릴레이를 비롯한 각종 이단 심판, 십자군 원정 당시의 만행, 유태인 차별과 탄압, 여성 억압 등 교회의 모든 잘못을 공개적으로 일일이 거론하면 서 이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용기를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는 생전에 조국 폴란드를 총 7차례나 방문하였는데, 특히 교황으로 선출된 이듬해인 1979년 폴란드 방문 당시 행한 그의 연설은 폴란드인들의 민주화 운동에 커다란 불씨를 안 겨주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체제에 신음하던 조국 폴란드의 현실을 매우 가슴아파했 던 그는 바르샤바와 크라쿠프 등에서 행한 기도회에서, 폴란드인들이 화합과 단결 (Solidarność)을 바탕으로 보다 나은 미래의 삶을 위해서라도 현재의 투쟁을 두려워하지 말 라는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폴란드인들의 반(反)공산주의 운동 재개와 1980 년 자유 연대 노조의 설립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파킨슨병을 비 롯해 1996년부터 계속된 질병으로 인해 고생하다가, 2005년 4월 2일 마침내 84세의 나이 로 선종하였다. 선종 직전 그가 남긴 말 한마디는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 오. 울지 말고 우리 함께 기쁘게 기도합시다!”였다. 교황의 선종 소식을 들은 이탈리아 군중 들은 전통 방식에 따라 고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박수갈채를 보냈고, 조국 폴란드에서는 조기를 내걸고 6일 동안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