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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그 짐멜의 예술철학의 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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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 주 식*

머리말 짐멜 철학의 현대성

. :

짐멜의 예술적 관심과 예술이론 .

짐멜의 예술철학과 생 철학

. ( )

예술연구의 학문적 성과 .

. 맺음말

머리말 짐멜의 현대성 . :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1918)에 관한 연구는 그간 우리나라에서 는 최근에 이르기까지 모름지기 사회학자로서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의 다. 채로운 철학적 사유에 관해서는 별로 주목되지 않았다 사실 그의 철학 저술들이. 진지하게 폭넓고 깊이 있는 시야 속에서 읽혀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현대. 유럽과 미국에서는 짐멜 연구가 그의 예술철학과 사회철학을 중심으로 크게 확장 되어 가고 있다 우선 짐멜의 철학을 구체적으로 고찰하기에 앞서 그의 학문이. , 오늘날에 미치는 영향력과 그 현대적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짐멜은 독일에서 최초로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의 존재를 인 식한 사람이며 베르그송의 저술도 몇 가지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짐멜의 철학은, . 독일적인 개념주의를 딛고나와 풍부한 예술적 감수성을 띄고 있다 이러한 점과.

영남대학교 교수

*

이 연구는 2008학년도 영남대학교 학술연구조성비에 의한 것임.

(2)

관련해서 볼 때 짐멜은 프랑스 철학과 독일 철학의 가교 역할을 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을 응시한 짐멜의 철학은 야스퍼스. (Karl

와 하이데거 에게도 영향을 미쳤

Jaspers, 1883-1969) (Martin Heidegger, 1889-1976)

.1) 특히 하이데거는 짐멜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진 않지만 하이데거, 의 존재와 시간 가운데 논의되는 죽음의 분석이라거나 후기의 예술철학을 보면 짐멜이 제기했던 물음이 그에게 강하게 호소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짐멜은 어쩌면 1920년대와 30년대의 철학에 결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물론 짐멜은. 20세기 사회학의 성립에 대해서도 전 문적인 사회학자 이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밖에도 괴테와 렘브. 란트에 관한 짐멜의 논고는 독일의 김나지움 교육에 중요한 교육 수단이 되었 .2) 그는 슈트라스브루크 대학에서 학교 교육학 강의도 행하였다 짐멜의 문제 . 상황에 관해 요약한다면 비록 그의 시대는 이미 먼 과거가 되었을지 모르나 그, , 의 철학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매우 가까운 문제의식을 가지고 울려 퍼지고 있 다는 것이다.

짐멜은 생‘ ( ) 의 철학자 로서 니체 베르그송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같은 , , 계열에 위치한다. 이들 철학자들이 목표로 삼고 구축하려고 했던 생철학 이란 어떠한 철학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생 은 동물학적

(Lebensphilosphie)’ ? ‘ ’

인 생이라고 하기 보다는 인간 존재를 전체로서 캐묻는 것이며 이성, (理性)을 갖 고 있는 인간을 특별히 간주하고 장엄화(莊嚴化)하는 것의 대극(對極)이다 그래. 서 짐멜은 인간의 생을 생 이상의 생 (Mehr-Leben als Leben)’이라고 불렀는데, 바로 이것이 중요한 논점이 된다 물론 짐멜을 비롯하여 니체 베르그송 오르테. , , 가 이들 네 사람은 신칸트학파나 기타 학파처럼 기본적인 공통인식에 의해 하나, 의 학파를 형성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두 합리주의 주지주의 칸트. , , 주의에 대하여 그리고 니체 이외의 세 사람은 앞서 말한 신칸트학파의 방향에, 대하여 비판과 대항을 행함으로써 각기 새로운 철학을 내세우고 있다 니체가 역, . 1) Barbara Smitmans-Vadja, Die Bedeutung der bildenden Kunst in der Philosophie

Georg Simmels, Shaker-Aachen, 1977 참조.

2) Barbara Smitmans-Vadja, Die Bedeutung der bildenden Kunst in der Philosophie Georg Simmels, Shaker-Aachen, 1977, p. 169.

(3)

설한 진리는 모든 인간적 원근법의 소산이다 라고 하는 주장 베르그송의 부단히 , 연속하는 움직임을 인간의식의 존재성이라고 설명하는 견해 오르테가의 생리성, 즉 인간의 생에 대한 구체적인 물음의 수행을 근본으로 하는 반( ) 합리주의의 현현(顯現), 이러한 사고들은 19세기에 융성을 보인 과학적 세계상 그리고 사회와 산업에 대해 작용하는 과학의 기술화를 눈살을 찌푸리고 흘겨보면서 새롭게 욕망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관심은 짐멜에 관해서인데 그의 생철학은 니체 베르, , 그송 오르테가와 비교해 볼 때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첫째로 도시적, . (都市的) 고상하며 전아한 활기가 있고 둘째로 유비할 바 없는 시점, (視點)의 섬세함이 있 으며 셋째로 호기심의 자기 증식, (增殖)적인 꿈틀거림이 있다 그의 철학은 이러. 한 모더니티(modernity)의 성격에 감싸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니체의 격렬한 비. 판성과 예리한 철저성 베르그송의 인간 의식의 응시와 차분한 생명과학적인 천, (穿鑿), 오르테가의 역사적 라틴적 민족성의 표현과 시대에 대한 고발적인 자( ) 세 이것들과 짐멜은 전혀 별도의 차원에 서있다고 말할 수 있다, .

한편 게오르그 짐멜의 예술적 세계는 음악을 비롯하여 회화 조각 문학 등, ,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있으며 그 영역이 매우 광범하다 그 때문에 이들 장르 전반. 을 함께 취급함으로써 그의 예술적 세계를 논하는 일은 그리 용이하지가 않다. 게다가 그의 예술적 세계 근저에는 앞서 말한 그의 생철학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연결고리가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그의 사회학적 관점도 찾아볼 수 있. 다 그렇다면 이 양자는 어떻게 서로 얽혀있는 것일까 그의 독자적인 예술철학. ? 의 기반은 이러한 점을 살펴보는 가운데 충실히 해명될 것이다 본 논문의 과제. 는 짐멜의 예술철학의 생성이 갖는 의미를 예술이론의 계보 를 추적하는 가운데 고찰하고 동시대 예술에 대하여 취하게 된 그의 생철학과 결부된 비판적 관점 을, 살펴보며 나아가 그의 다양하고 새로운 예술철학적 연구 성과를 점검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4)

짐멜의 예술적 관심과 예술이론 .

짐멜은 예술에 대한 훌륭한 소양과 남다른 애호의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예술은 세계와 인생에 대한 우리들의 감사이다 3)라고 말했다 그는 초기. 이래 만년에 이르기까지 종교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 에 대해서도 그에 못지않은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굳이 부언하여 말한다면. 그의 경우 학문적으로는 예술에 대한 관심이 종교에 대한 관심보다 훨씬 일찍부 터 있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최초의 논문. 음악에 관한 심리학적 및 민족학 적 연구(“Psychologische und ethnologische Studien über Musik”, 1882 )년 가 보여주듯이 비록 음악 분야에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그의 예술에 대한 관심은, 매우 이른 시절부터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최초에 학위논문으로서 베를린 대학 철학부에 제출되었는데 학, 위논문 심사위원회는 심사과정에서 이 논문보다도 같은 학부의 최종 학년 때에 현상논문으로서 수상한바 있는 칸트의 물리적 단자론에 관한 논문을 적절하다고, 인정하였다 짐멜의 위의 논문은 처음에는. 음악의 기원에 관한 심리학적 민족- 지적 연구(“Psychologisch-ethnographische Studien über die Anfänge der 라는 다른 이름의 제목이 붙어 있었다 이것은 민족 지적 자료를 사용하

Musik”) .

여 음악의 기원 을 심리학적으로 해명하려 했던 것으로 모두 베를린 대학 교수였 , 던 민족학자 아돌프 바스티안과 민족 심리학자 모리츠 라찰스에게 그가 사사한데 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거기에서는 스위스의 민요 요들 이 문제가 되었다 짐멜. . 은 여기에서 말하기를 요들은 그 성격상 가장 원시적인 음악적 표현에 속하는 것 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은 본질상 너무나도 확실하게 가곡과 구별되기 때문에 가, 곡 성립의 논의에서는 결말을 내릴 수 없다고 하였다.

짐멜의 이러한 음악에 대한 관심은 일찍부터 존재하였다 그는 어렸을 적 누 이의 한 사람으로부터 피아노의 초보기술을 배웠고 후에는 바이올린에도 친숙하, 였다 그리고 그의 음악에 대한 애호는 음악을 통해 교제가 있었던 음악출판사, 3) Georg Simmel, Fragmente und Aufsätze, hrsg. von G. Kantorowicz, Georg Olms

Verlagsbuchhandlung(1923), 2. Aufl., 1967, p .9.

(5)

페텔스의 경영자 율리우스 프리들렌더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돌 아저씨 라고. ‘ 불린 프리들렌더로부터 짐멜이 받은 영향은 매우 크다. 1874 16 세 때에 유태인 상인인 아버지를 잃은 그에게 후견인이 되어준 사람이 다름 아닌 프리들렌더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1889년 프리들렌더가 사망했을 때 짐멜이 일가를 지탱할 수 있을 만큼의 유산도 남겨주었다 이리하여 짐멜은 어렸을 때부터 음악뿐만 아니. 라 넓은 교양을 몸에 익힐 수 있게끔 성장하였다 그가 후에 음악을 포함하여 조 형예술 문학 등 예술의 여러 분야에 대해 갖게 된 섬세하고 예리한 통찰력의 바, 탕은 이미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한 통찰은 또한 그가 순수한 베를린 태. 생이며 도시인의 감각을 갖고 있음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와 동, . 시에 메트로폴리탄이었던 그의 천부적 품성은 유태인 특유의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음악에 대한 관심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짐멜의 예술적 관심이, 기초하는 원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떻게 될까 그가 처녀작 즉 데뷔작이었던?

사회적 분화론 (

Über soziale Differenzierung

, 1890) 3제 장에서 집단의 확대 와 개성의 신장 을」 논했을 때 단테(Dante Alighier, 1265-1321)를 예로 들고 있 다 이처럼 그는 일찍부터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 . 의하면 인격의 강화와 완성 이 최대의 권역 (Kreis) 내부에서의 생활과 매우 밀접 하게 관련되고 있다고 한다 이를 한층 발전시킨다면 개성의 현저한 신장과 그. , ‘ 현저한 존중 이 자주 세계주의적인 (cosmopolitan) 신념과 결부될 뿐만이 아니라, 거꾸로 좁게 한정된 사회집단에 대한 헌신은 양자를 저해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신념이 그 가운데 나타나는 외적 형식들은 동일한 도식을 따르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르네상스시대에 이탈리아에서는 한편으로는 완전한 개성을 만들어내, 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좁은 사회적 환경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신념 및, 교양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사실은 직접적으로는 단테의 다음과 같은 말 가. 운데 나타난다 즉 피렌체를 전적으로 열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물고. , 기에는 바다가 그러하듯이 나 자신과 또 나와 비슷한 사람에게는 세계가,

(6)

조국이다 간접적으로는 그리고 소위 경험적으로는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 실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즉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만들어낸 생활 형식들은. 전체 문명세계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모든 종류의 개성에게 여태까지 아직 예상되지 못했던 활동의 여지를 가져 다주었기 때문이다.4)

다소 긴 문장을 인용하였지만 여기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이탈리아 르네상, 스가 나은 13세기의 시인 단테와 같은 매우 개성적인 인간은 그 출생지 피렌체를 열애하였다고는 하지만 실로 거기에 속박됨이 없이 세계가 조국 이었으며 이탈, , 리아 르네상스는 그 후에 매우 많은 개성적인 인간에게 활동의 여지를 가져다 준 것이다 이렇게 짐멜이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거론한 것은. ,「집단의 확대와 개성의 신장 가운데 일례에 지나지 않지만 그가 당시의 문학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 , 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짐멜은 같은 책 제 장에서 사회적 수준4 (das soziale Niveau)을 취 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개인들의 분화 가 사회적 수준의 증대 를 유발함과. ’ ‘ 동시에 하나의 계기에 입각하여 역작용도 일어나는 경우를 들고 있다 즉 정신적, . 산물들이 축적되고 모든 것이 거기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면 될수록 자극과 범례, 를 필요로 하는 약한 소질이 점차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충분하게. 제공되는 광범위한 사회적 수준이 없을 때에는 한층 개인적인 교양과 지위를 획, 득할 수 있는 수많은 능력은 잠재적으로 머물고 있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사회. 적 수준이 존재한다면 그 다양한 내용은 각자로부터 그에게만 존재하는 것을 유, 도해 내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들은 도처에서 즉 그리스 로마의 철학에서도 르네상, , 스 미술에서도 독일 문학의 제, 2 전성기에서도, 19세기 음악사에서도 어떻,

4) G. Simmel, Über sociale Differenzierung: Die Probleme der Geschichtsphilosophie (1892), Georg Simmel Gesamtausgabe Bd. 2, Aufsätze 1887 bis 1890, hrsg. von Heinz-Jürgen Dahme,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89, p. 53. 그리고 Georg Simmel, Soziologie, 1908, 3. Aufl. München/Leipzig: Duncker & Humblot 1923, p.

544-545 참조.

(7)

게 천재의 시대에 뒤따라 탤런트의 시대가 이어지는가를 찾아보게 된다 어. 떻게 하여 종속적이며 미분화된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이 어떤 예술적 내지 기술적인 작품을 관찰하여 돌연히 자기의 능력과 자기의 본래적 사명을 알 게 되고 그때부터 개성적인 신장을 위해 노력했는지가 여러 차례 우리들, , 에게 보고되고 있다 모범이 이미 많으면 많을수록 어느 정도로만 특별한. 각자의 소질이 전개되며 따라서 분화된 생활지위를 획득하는 확률은 크, .5)

이와 같이 서술하는 짐멜은 예부터 철학의 분야는 물론 미술 문학 음악의, , 분야에서도 천재의 시대에 탤런트의 시대가 이어진다 는 사실을 통찰하고 있다 .

이리하여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집단적 소유물이라는 의미에서의 사회 적 수준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실로 소유물의 유사라고 하는 의미에서 사회, , 적 수준을 감소시킨다 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짐멜의 관점은 분명히 사회적 분야 . 의 증대와 감소의 관계와 관련되는 사회학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사. 회학적 관점을 취하면서도 예술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시야를 갖고 있었음을 살 펴볼 수 있다 즉 그의 예술적 관심은 일찍부터 매우 광범위하였다고 볼 수 있다. . 특히 짐멜의 미술에 대한 관심은 그가 베를린대학 철학부에 재학하던 시절 에 이미 찾아 볼 수 있다 이 점에 관하여 독일의 사회학자 프리드리

(1876-1881) .

H. 텐부르크는 베를린 대학 재학 중의 짐멜이 역사와 철학을 배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미술사가 헤르만 그림 밑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사를 배웠을 때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부. “ ( ) 과목으로서의 이탈리아어의 선택은 당 연히 미술사 강의들에 대한 참여와 결부되었고 양자는 독일 휴머니즘 특히 야콥, , 부르크하르트의 당시의 투철한 저작들에 결부되어 있었다고 보아도 지장이 없을 것이다.”6) 이렇게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J. Burckhardt,

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

, 1860)로써 명성을 날리고 있었던 스위스의 미술사가 부르크하르트의 저작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는 역사와.

5) G. Simmel, Über sociale Differenzierung, pp. 95-96.

6) F. H. Tenbruck, “Georg Simmel(1858-1918)”, in: Kölner Zeitschrift für Soziologie und Sozialpsychologie, 10. Jahrgang, Heft 4, Köln, Opladen : Westdeutscher Verlag 1958, pp. 587-614, p. 588.

(8)

철학 외에 심리학도 배웠으며 그의 미술사 연구는 역사연구 계열로 볼 수 있다, . 베를린대학 재학 중의 짐멜이 지녔던 관심에 관해서는 독일의 철학가 미하 엘 란트만도 1958년에 쓴 짐멜의 전기 (傳記)에 대한 기념비 가운데 언급하고 있는 만큼 여기에서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짐멜은 미술사에도 몰두하여 헤르만, 그림에게 개인적으로 접근하였고 학위시험을 위해 부 과목으로서 옛 이탈리아어 를 선택하였으며 그 때 그는 특히 페트라르카에 심취하였다, .”7)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젊은 날의 짐멜이, 14세기 이탈리아의 시인 페트라르카(Francesco 에게 매혹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과 함께 그가 앞서 사

Petrarca, 1304-1374) .

회적 분화론 가운데에서 단테에 대해 관심을 보인 사실을 아울러 생각하면 그 , 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한 경도는 상당히 컸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덧붙여1881 1 20년 월 일자 수험자 게오르그 짐멜의 박사학위 수여 시 험에 관한 기록 에 의하면 짐멜은 구두시험의 첫 질문을 던진 에드와르트 첼러 , 로부터 철학 및 철학사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받고 매우 잘 연구하고 있음 이, ‘ 증명되었고 그 후, <부과목으로서의 이탈리아어 에 관해서는 아돌프 토플러가 질>

문을 하였다 즉 토플러는 짐멜에게 페트라르카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요구한 후. 이 부과목의 구술시험에 대한 답 을 만족할만하다고 평가하였다 마지막으로 그

.

림이 질문을 행하였다 그 때의 사정은 다음과 같다. . “그림씨는 라파엘과 미켈란 젤로 상에 대한 저작 자료를 묻고 나서 다음으로 두 거장의 활동 전체를 상세하 게 논하게 했다 수험자는 매우 잘 연구하고 있음을 증명하였으며 예외적으로 한. , 번 말문이 막히기도 하였는데 곧 다시 정답을 말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8) 리하여 베를린 대학 철학부는 구술시험의 결과에 입각하여 수험자 짐멜을 우( , 라고 판정하였다 이로부터 볼 때 분명하듯이 그는 이미 학생시대에 cum laude) .

페트라르카에 관한 충분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에 그의 예술적 관심의. 원점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제 짐멜의 예술이론의 계보를 추적해보면 그의 초기, (1881-1900 )년 의 저작 7) M. Landmann, “Bausteine zur Biographie”, in: Buch des Dankes an Georg Simmel, hrsg. von K. Gassen und M. Landmann, Berlin: Duncker & Humblot, 1958, pp.

11-33, p. 15.

8) Ibid., p. 18.

(9)

들 가운데에도 도처에 예술에 대한 관심을 찾아볼 수 있지만 중기 대략, ( 1902-1910 )에는 소저 칸트와 괴테 (

Kant und Goethe

, 1906)가 있는 정도로 그치며 후, (1911-1918 )년 가 되면 많은 저작이 간행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단행본만을 예. 로 든다면 철학적 문화 (

Philosophische Kultur

, 1911),괴테(

Goethe

, 1913),

렘브란트 (

Rembrandt

, 1916),생의 직관(

Lebensanschauung

, 1918) 등이 있 다 나아가 그가. 1918년에 60세로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사망한 후 년 뒤에 예술4 의 철학을 위하여(

Zur Philosophie der Kunst

, 1922) ,가 또 35년 뒤에는 소저

렘브란트 연구 (

Rembrandtstudien

, 1953)가 공간되었다.

이들 저작을 보더라도 후기 즉 만년의 짐멜이 특히 예술에 관심을 보인 것 은 분명하다 사실 후일 회상으로부터의 발췌. 」를 쓴 그의 아들 한스 짐멜은 그 가운데 이 점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즉. 1903년 초에 짐멜은 휴가를 얻어 게르 톨트 부인과 한스를 데리고 이탈리아 여행을 가기로 작정하였다 절반 정도는 그. 의 일 때문이었으며 나머지 절반은 부인을 모든 가사로부터 해방시켜 훌륭한 기, 후 속에서 휴양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한스에게는 이. 1903년의 이탈리아 여행이 매우 생생한 추억으로 가득 찬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한스는 당시의. 아버지에 관하여 나의 아버지는 다른 의무에 시달림이 없이 자기의 예술철학, “ 을 쓰려고 생각하였다9)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1914년 제 차 세계대전이 발1 발하자 이와 동시에 짐멜은 곧 그러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 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는 그 후 렘브란트. (1916)를 썼다 이렇게 볼 때 따라. 서 만년의 그의 최대의 관심사가 예술철학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짐멜의 예술철학과 생 철학

. ( )

짐멜은 오귀스트 로댕에 관해 쓴 같은 제목의 논문(1911) 가운데에서 로댕,

9) Hans Simmel, “Auszüge aus den Lebenserinnerungen”, in: Ästhetik und Soziologie um die Jahrhundertwende: Georg Simmel, hrsg. von H. Böhringer und K.

Gründer, Frankfurt am Main: V. Klostermann, 1976, pp. 247-268, p. 253.

(10)

이 초순간적인 것의 인상 즉 무시간적인 인상 을 추구하는 점에 주목한다 그 경 . 우 짐멜은 로댕이 의고주의(Klassizismus)를 넘어서서 그리고 실로 그것에 의해, 인습주의(Konventionalismus)를 넘어서는 결정적인 제일보를 내디딘 사람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우리는 짐멜의 인습주의 비판과 자연주의. (Naturalismus) 비판을 찾아볼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조각에서 고전적 양식을 고집하는 것은 현대인의. 생활감정에 크게 모순되는 일이며 하나의 인습주의임을 전적으로 피할 수가 없, 다 이러한 조각에서의 인습주의는 현대의 어떠한 예술에서보다도 지배적이며 조. , 각이 독특한 비현대적인 예술임을 나타내고 있다 인습의 파괴자로서 우선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자연주의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습주의의 보족물 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짐멜은 이러한 자연주의와 인습주의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 양자에 대한 그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양자는 그 조형의 규범을 외부로부터 받 아들여 한편은 자연의 인상을 다른 한편은 본을 뜬 종이를 베껴 쓴다 그래서 양, . 자는 본래의 창조자에 대해서는 표절자이며 본래의 창조자에게 있어서 자연은, 그 자신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형식을 세계의 내부를 향해 형성하기 위한 자극과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주의와 인습주의는. 19세기의 두 개의 폭력행위 즉 자, 연과 역사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양자는 자유로운 자기 자신에 속하는 인격을. , 질식시키려고 엄습하였다.”10) 그 이유는 자연주의에서는 그 메커니즘이 영혼 을 낙하하는 돌과 성장하는 줄기와 마찬가지의 맹목적 강제에 복종시켰기 (Seele)

때문이며 인습주의에서는 그 메커니즘이 영혼을 사회적인 실 줄의 단순한 교차, 점으로 만들어 영혼의 모든 생산성을 자유롭게 발휘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

이렇게 자연주의와 인습주의의 경우 자연과 역사라고 하는 거대한 덩어리, 에 의해 압박 받는 개인은 자기에게 있어서 외적의 폭력의 단순한 통과점이 되, 었으며 예술상의 제작에서는 이것은 말하자면 다른 한편의 극에서 다시금 나타, 났다 즉 자연주의의 비. ( ) 자립성 이 우리들을 사물들의 단순한 소여에 얽어매고 , 인습주의의 비 자립성 이 우리들을 역사상 거기에 있는 것과 사회적으로 승인

( )

10) G. Simmel, Philosophische Kultur: gesammelte Essais(1911), 3. Aufl. Potsdam: G.

Kiepenheuer 1923, p. 191.

(11)

된 것에 얽어매는 것에 의한다 다시 말해 전자는 지금 있는 것에 후자는 일찍이. , 있었던 것에 우리들을 얽어매었던 것이다 양자 모두가 우리들이 자연과 필연성. 을 추구하는 의미에서는 그것들을 우리들에게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이, . 와 같이 짐멜의 자연주의 비판과 인습주의 비판은 매우 준엄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자연주의 비판에 관해서 그는 만년의 에세이 문화형식들의 변천 (“Wandel der Kulturformen”, in:

Berliner Tageblatt

, 27. August 1916) 가운데서 도 언급하고 있다 그는 우선. 19세기 말경 예술상의 자연주의가 전개되었을 때, 그러한 현상은 고전주의(Klassik) 이래 지배적인 예술상의 형식들이 생(Leben) 더 이상 자기 속에 받아들이지 않게 된 하나의 표지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소. 여의 현실이 가능한 한 인간의 의향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직접적인 이미지 속, 에 생을 자리 잡게 할 수 있다고 하는 희망이 생겨났다 그러나 짐멜은 자연주의. 는 이 결정적인 욕구들에 답하지 않고 있다11)고 본다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대. 상 이미지를 심적 경과와 그 동일한 직접적인 발현으로 치환해버리는 당시의 표 현주의(Expressionismus)도 그러하다고 본다.

그러나 표현주의에 관해서는 이듬해의 강연 근대문화의 갈등 (

Der Konflikt der modernen Kultur

, 1917) 가운데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서는 표현. 주의에 대한 평가가 반드시 부정적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그것은 그의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보더라도 분명하다 나에게 잘못이 없다면 표현주의의 의미는 예. “ , 술가의 내적 감동이 그것이 체험되는 대로 전적으로 직접 작품 속에 지속하는, 것 더욱 정확히 말해 작품으로서 지속하는 것이다 이 내적 감동은 자기의 내부, . 에 있는 존재 즉 실재적인 또는 관념적인 존재로부터 자기에게 강제되는 것 같은 형식에 의해 지속하기도 하고 또는 그러한 형식가운데 쏟아 붓기도 하는 그러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이 내적 감동은 어떤 존재 또는 사건의 모방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12) 이와 같이 서술하는 짐멜은 이러한 내적 감동은 이 존재, 11) G. Simmel, Brücke und Tür: Essays des Philosophen zur Geschichte, Religion, Kunst und Gesellschaft, herg. von Michael Landmann, Stuttgart: K. F. Koehler, 1957, p. 98.

12) G. Simmel, Der Konflikt der modernen Kultur: ein Vortrag(1917), 3. Aufl.

München, Leipzig: Duncker & Humblot, 1926, p. 24.

(12)

또는 사건의 객관적 자연법칙적 형태에서도 또 인상주의가 바랐던 것처럼 이 존, 재 또는 사건에 관해 우리들이 갖는 순간적 감각적 형태에서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보고 있다 여기에는 표현주의가 자연주의와도 인상주의와도 다르다는 사. 실이 지적되고 있다.

나아가 표현주의에 관해 짐멜은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표현. “ 주의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원인과 그 결과는 이들의 외적 현상형식이 결코, 동일할 필요가 없으며 양자의 전적으로 내면적인 동적, (動的)인 관계는 아무런 명 백한 친화성을 가질 필요가 없다.”13) 이리하여 화가가 바이올린이나 인간의 얼굴 을 응시하면 감동이 생겨나고 이 감동은 그의 예술적 에너지에 의해 변화되어, , 마침내는 내용상 자기 자신만의 충실한 생을 자극하여 활동시키는 유인 (誘因)’ 모델 로 치환하는 셈이 된다 그것은 짐멜에 의하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위한 생

.

의 투쟁 이다 말하자면 생은 자기를 표현하는 경우에는 실로 자기 자신만을 표현 . 하려고 하며 그 때문에 자기 이외의 현실을 위한 현실에 의해 또는 법칙을 위한, , 법칙에 의해 자기에게 부과되는 각각의 형식을 파괴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생과 형식 즉 문화와의 갈등이며 이것은 곧 짐멜의 문화 철학이 관계되는, 지점이다 이것에 관해서도 그의 문화 철학에 관해 독일의 철학자 막스 프리쉬아. , 이젠 쾰러가 다음과 같이 언급한 사실을 상기해 본다 짐멜을 표현주의적 사상가. “ 로서 나타내는 일이 허용된다면 그의 문화 철학은 문화 그 자체를 생의 표현주, 의적 창조로서 파악하는 시도이다.”14) 이러한 견지에 따른다면 짐멜을 표현주의 적 사상가 라고 명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그러나 짐멜이 로댕의 인상주의(Impressionismus)를 높이 평가한 데에도 나 타나 있듯이 그는 표현주의보다도 오히려 인상주의 편에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 다고 생각된다 반증이 되는 것은 그가 앞의 강연 근대문화의 갈등 속에서 후. 기 인상파 화가 반 고흐에 대해 언급한 다음의 문구이다 즉 짐멜은 고흐의 예술. 에 접하고 거기에는 회화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서 정열적으로 약동하는 생, ( )”

13) Ibid., p. 13.

14) Max Frischeisen-Köhler, “Georg Simmel”, Sonderdruck aus den Kant-Studien, Band XXIV, Heft 1, Berlin: Reuther & Reichard, 1919, p. 24.

(13)

이 전적으로 진귀할 만큼 광대함과 심오함으로부터 돌연히 나타나면서 이 생의, ‘ 분류(奔流)의 수로(水路)’만을 소위 화가의 천부적 재능 속에 찾아내고 있음을 느 낀다 그리고 그는 고흐가 갖는 매력을 작열. (灼熱)하는 직접성 가운데 느낄 수 있 는 생이라고 본 다음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러한 생은 물론 어떠한 경우에도, 그 형성물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다른 한편 오늘날의 일부 청년들에게 전적으. 로 추상적 예술에 대한 동경이 있는 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감정에 유래할 것, 이다 즉 생이 직접적인 적나라한 자기표현의 정열을 갖고 마치도 모순과 불가능. , 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순과 불가능을 감히 도전하여, 행한다고 하는 감정이다.”15) 이와 같은 청년 가운데 볼 수 있는 생의 훌륭한 감 동이 그러한 경향을 절대적인 극단 속으로 휘몰아가는 것이다 이리하여 짐멜은. 추상예술을 동경하는 청년 가운데에도 고흐에게서 볼 수 있었던 생의 악동을 인 정하였다.

앞의 로댕에 대한 찬미도 그러하지만 인상파 예술가에 대한 짐멜의 태도는, 실로 경도되었다고 할 정도이다. 헝가리의 마르크스주의자 게오르그 루카치 가 짐멜이 서거한 직후에 짐멜을 위대함과 한계를 (György Lukács, 1885-1971) ,

한마디로 정의 한다면 현대의 최대의 과도기 철학자이다 그는 인상주의의 참된, . 철학자이다16) 라고 말한 것은 이 점에 관계되는 주목할 만한 언급으로 볼 수, 있다 앞에서 짐멜은 프리쉬아이젠 쾰러에 의해 표현주의적 사상가 라고 명명되. 었지만 루카치가 간주하고 있듯이 그를 인상주의의 참된 철학자 라는 이름을 붙, 이는 편이 더욱 타당하다고도 생각된다.

앞에서 언급한 바로부터 분명하듯이 짐멜은 예술작품에 대한 예리한 감상, 안을 갖고 있었다 그는. 1904년에 칸트 (

Kant

, 1904)를 공간했을 때에는 신칸트 주의적 경향을 농후하게 띄고 예술작품을 내용들의 상호작용 (Wechselwirkung)’

내지는 상호적 관계 (gegenseitige Beziehung)’ 즉 형식의 점에서 취급하기도 했지 15) Georg Simmel, Der Konflikt der modernen Kultur(1917), 3. Aufl., 1926, p. 16.

16) G. Lukács, “Erinnerungen an Georg Simmel”, in: Buch des Dankes an Georg Simmel, hrsg. von Gassen und Landmann, Berlin: Duncker & Humblot, 1958, pp.

여기에는 루카치가 짐멜 사후에 곧장 쓴 논문 게오르그 짐멜

171-176, p.172. (G.

Lukács, “Georg Simmel”, in: Pester Lloyd. 2, Oktober 1918)이 재수록 되어있다.

(14)

만 신칸트주의적 경향을 넘어서서 생을 근거지로 하여 생철학이라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 보다 앞서 그는 일찍이 화폐의 철학. (

Philosophie des Geldes

, 가운데에서 예술작품을 자기 자신을 충족시키고 있는 전체 로서 취급하고

1900)

있으며 이어 에세이 그림틀, (“Der Bildrahmen”, in:

Der Tag

, Berlin 1902, Nr.

가운데서는 예술작품이 한사람의 인간만 을 요구하고 그것이 하나의 전체 인

541) ,

점에 그 본질을 찾았다.

이보다 한 해 전에 짐멜은 논문 슈테판 게오르게 (“Stefan George”, in:

Neue Deutsche Rundschau

, 12, 1901) 가운데에서 예술작품과 그 작용을 이해하, 기 위해서는 그것을 하나의 게다가 특정한 자질을 부여받은 정신의 표출 로서 취, 급할 필요를 논하였다 그리고 그가 예술작품을 영혼의 발현으로 보고 있는 것은. , 다음의 문장으로부터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술작품의 격조와 색 말과 사상의 다양성은 영혼에 의해 상호 작용, 을 행하게 되며 침투되고 집중된다 영혼은 그것들을 방사하는 원천이며, . , 그것들이 우리들 자신의 영혼 속에서 형태를 만드는 통일의 담당자라고 생 각된다 예술작품을 영혼의 상. ( ) 아래에’(sub specie animae) 느끼는 것 은 기본적인 범주의 하나이며 이것에 의해 예술작품은 처음으로 우리들에, , 게 그것이 있어야 할 것이 된다.17)

이리하여 예술작품을 영혼의 상 아래에 느끼는 짐멜의 미적 감상안은 분명 히 그의 생철학과 결부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위대한 예술작품가운데 항상 단. 순한 예술 이상의 것 을 느끼고 있고 이러한 예술 이상의 것 이야 말로 위대한 , 예술이 지금까지 생으로부터 해방된 순수 이념적 형상으로서 나오게 된 동일한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음에 주목한다 요컨대 생은 자기가 산출한 형식들의. 차안과 피안에 서 있다는 사실이 주목되고 있다 여기에서 생과 예술형식의 관계. 를 찾아볼 수 있다.

17) Georg Simmel, Zur Philosophie der Kunst: philosophische und kunstphilosophische Aufsätze, 3. Aufl., herg. von Gertrud Simmel, Potsdam: G. Kiepenheuer, 1922, p.

41.

(15)

예술연구의 학문적 성과 .

짐멜은 만년의 논문 풍경의 철학 (“Philosophie der Landschaft”, 1913) 에서 예술작품의 근저에는 예술이 있고 예술이 생으로부터 태어나면서도 자립된 존재가 되는 사실을 강조하였다.18)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렘브란트. 』와 필생의 저작이라 할 수 있는 생의 직관 에서 위대한 예술 (große Kunst)’ ‘과 불완전한 예술(unvollkommene Kunst)’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전자의 근저. 에는 생의 전체성이 있고 전자가 인격의 심오함으로부터 생겨남과 동시에 전적, 으로 보편적이며 동시에 전일적인 것 즉 신의 용기(容器)라고 보고 있으며 다른, 한편 후자는 예술의 내재적인 요구들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지루하고 평범하며 무 기력하다고 보고 있다.19) 이것은 그가 예술과 예술작품을 취급하는데 있어서 생 과의 관련 속에서 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그의 예술적 세계에 접근하. 는 데에는 이러한 사실이 첫째로 우선적으로 거론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짐멜의 미적 감상안은 유럽의 고금에 걸친 예술작품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예술가에 대해서도 향하고 있다 그가 취급하는 예술작품이 조형예술의, . 영역은 물론 문학의 영역에까지 미치고 있듯이 그가 취급하는 예술가가 이들 영, 역과 겹쳐지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그가 에세이 예술을 위한 예. (“L’Art pour l’art”, in:

Der Tag

, Berlin 4. Januar 1914) 가운데에서 묘사하 는 예술가 상은 창조적인 예술가 와 예술의 단순한 기교가 와의 구별 속에서 찾, ‘ ’ ‘ 아볼 수 있다 즉 후자의 경우 그 기교가 아무리 완벽하더라도 기교의 궁극적인. 고지에 달하는 일은 불가능하며 단지 직인에 그치고 만다 이에 대하여 전자는. 말하자면 항상 위대한 예술가 이상의 것 이며 그 자신의 내부에는 전체적 생의 , 엄청난 진폭과 강렬함을 느낄 수 있으며 다른데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을 정도, 18) Georg Simmel, Brücke und Tür: Essays des Philosophen zur Geschichte, Religion, Kunst und Gesellschaft, herg. von Michael Landmann, Stuttgart: K. F. Koehler, 1957, p. 146.

19) Georg Simmel, Rembrandt: ein kunstphilosophischer Versuch, Leipzig: K. Wolff, 1916, p. 203.; Georg Simmel, Lebensanschauung: vier metaphysische Kapitel, 1918, 2. Aufl., 1922, München: Duncker & Humblot, pp. 73-74.

(16)

의 인간적 완성을 찾아볼 수 있다.20)

이러한 예술가 상을 머릿속에 갖고 있는 짐멜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 후의 만찬도> 가운데 개인들의 완전한 내적 자유 를 인정하고 있다 .21) 이것은 중 세적 인간의 편견을 극복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인간적 투영이라 볼 수 있는 것 인데 짐멜이 다빈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다빈치의 동시, . 대인인 미켈란젤로의 천재와 정열에 주목한 그가 미켈란젤로가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였다 고 본 것도 주목할 만하다 짐멜은 미켈란젤로와 비교해 볼 때 . 렘브란트의 작품들에서 어떤 불완전함 을 찾아보았지만 렘브란트가 처음으로 현 , 상의 집중적 기능으로서의 정신성(Seelenhaftigkeit)’을 발견한 것을 평가하고 그 독창성을 인정하였다 특히 렘브란트가 초상화 가운데에서 처음으로 생의 움직임. 을 예술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한 사실 그 표현의 방식이 렘브란트가 말하는 한, 개인의 천재성 에 결부되는 사실은 짐멜이 높이 평가하는 바이다 , .22) 이와 함께 그는 동시대인 로댕과는 교우관계가 있었고 로댕을 현대의 최대의 예술가라고 부 르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로댕은 짐멜에 의해 미켈란젤로보다 높이 평가되었. 고 특히 로댕이 무시간적인 인상 을 추구하고 운동 의 무시간성을 추구하고 있음, 이 주목되었다.

짐멜이 조형예술로부터 문학으로 눈을 옮겼을 때 괴테, (Johann Wolfgang

와 게오르게 를 거론하게 된다

von Goethe, 1749-1832) (Stefan George, 1868-1933) . 짐멜에게 있어서 괴테는 존재상을 그의 다감한 개성에 따라서 형성한 주관적인 사상가 였다 짐멜은 괴테의 서정시 와 미켈란젤로의 조각 과의 일치점을 인정 . 하였지만 미켈란젤로는 처음부터 말할 것도 없고 렘브란트나 베토벤 같은 사람, 이상으로 괴테를 높이 평가하였으며 괴테의 위대한 인류적 업적을 인정하였다, . 그리고 그는 괴테의 성장과정을 통일로부터 분화로 향하는 교체에서 찾고 여기, 에 사회분화에 동반하는 즉물적 비인격적 규범의 형성을 보고 있다 그뿐만 아니. 라 후에는 분화를 경험한 주관이 그렇게 함으로써 마침내 하나의 대상을 파악하 20) Georg Simmel, Zur Philosophie der Kunst, p. 82.

21) Ibid., p. 56.

22) Georg Simmel, Philosophische Kultur: gesammelte Essais, p. 107; Zur Philosophie der Kunst, p. 106; Rembrandt, 1916, p. 8.

(17)

게 되는데 짐멜은 여기에서 사회분화에 뒤따라 이어지는 사회통합을 보고 있, .23) 따라서 그는 괴테 상을 그리는데 있어서도 사회학적 관점을 잊지 않고 있 다 한편 짐멜은 예술을 위한 예술 을 주창하는 게오르게에 관해서는 그의 서정시. 를 들고 그것이 영혼의 통일점, (統一點), 유일점(唯一點)으로부터 솟아나는 사실 에 주목하고 게오르게의 시를 찬미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생각과 일치하고 있음, 을 인정하고 있다.

셋째로 짐멜의 미적 감상안은 훌륭한 예술작품과 예술가를 낳은 이탈리아의 도시들 특히 로마 베네치아 피렌체 등에 향하고 있다 그가 언제 몇 번 이탈리아. 를 방문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1878년 무렵 이미 로마를 방문하고 있음은 분 명하다 그에 의하면 로마는 미적 위대함의 절정 이며 최고급의 예술작품과 다르. 지 않은 것이며 통일을 요구하는 자기 활동 이 로마의 가장 귀중한 선물이다 , ‘ 24). 로마에 관해서는 짐멜은 그의 철학적 문화 에 수록되어 있는 에세이 폐허 가운데서도 언급하고 있다 거기에서 그는 특히 로마의 폐허에 관

(“Die Ruine”) .

해 논하고 있다 폐허는 생. ‘ ( ) 이 떨어져 있는 생의 장소 이다 그것은 과거의 생 . 의 현존하는 형식 을 만들어 내는 것인데 그 생의 내용과 잔재에 의해서가 아니 , 라 그 생의 과거 그 자체에 의해서이다 즉 무인, . (無人)의 폐허야 말로 실로 폐허 다운 그 성격에 적합한 것이다 그리하여 로마의 수많은 폐허 가운데에는 폐허. 특유의 매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것들에는 인간에 의한 파괴. 가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이 폐허 그 자체의 의미가 되고 있는 인간의 작품, , 과 자연의 작용과의 대립 에 모순되기 때문이다 .25)

한편 짐멜은 베네치아를 인공의 도시 로서 취급한다 그는 베네치아가 갖는 . 아름다움이 쥐어뜯긴 꽃잎이 바다를 떠돌고 있듯이 뿌리도 없이 생의 한가운데 ,

23) Georg Simmel, Goethe(1913, 5. Aufl., Leipzig: Klinkhardt & Biermann, 1923, p.

224-225.

24) Georg Simmel, Zur Philosophie der Kunst, 1922, pp. 17-28. 여기에는 하나의 미학 적 분석 이라는 부제를 가진 짐멜의 로마 (“Rom, Eine ästhetische Analyse”, in:

Die Zeit, Wien. 1898, 28. Mai)가 수록되어 있다.

25) Georg Simmel, Philosophische Kultur, pp. 135-143. 여기에는 짐멜의 폐허 」가 수록 되어 있다.

(18)

를 헤엄쳐 다니는 모험의 애매한 아름다움26)이라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하여 피. 렌체는 그가 가장 사랑한 도시이며 현상학적 철학자 에드먼드 후설에게 보내는 편지(1907 3 12 )년 월 일 에는 피렌체는 나의 조국 나의 마음의 고향 ’, 27)이라고 쓰 여 있다 짐멜에 의하면 피렌체는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는 훌륭하고 명백한 확실. 함을 가져다준다 다른 한편 베네치아는 인공의 도시 이기 때문에 생이 몰락하여. , 영혼이 빠진 무대 가면의 거짓된 아름다움 만을 남기고 있다 그렇지만 피렌체는

, .

결코 단순한 가면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그 모습이 현실의 생의. 거짓 없는 말 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자연과 정신의 대립이 사라져 없어진 . 것 같은 느낌이 솟아나온다 이리하여 피렌체에서의 생을 현저하게 완벽하다고. 간주하였다.

그는 피렌체를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고 거기에는 자연 위의 도처에 문화, 의 형식이 있음을 인정하였다 나아가 피렌체의 내적 한계는 곧 예술의 한계라고. 까지 짐멜은 생각하였다 그는 이 피렌체 론을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피렌체. . “ 는 이미 생의 본질적인 것을 획득 내지 단념하였는데 이러한 점유 내지 단념으, 로 인해 지금은 단지 그 형식만을 추구하려고 하는 전적으로 성숙된 사람들의 행 복이다.”28) 짐멜이 꽃의 도시 피렌체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는 이 문장으로부터 보더라도 잘 알 수가 있다 여기에서 보더라도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비교하는 경. 우에 그가 사용한 대비의 수법은 극히 유래가 드문 것이며 거기에는 그의 생철, 학의 맥박이 고동치고 있다.

넷째로 짐멜은 유럽의 예술작품 및 예술가와 이탈리아의 도시들에 관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단순한 이국취미를 넘어서서 동양의 미에 대한 관심을 품고, 있었다 사실 그는 로댕 을 다루었을 때 일본화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즉 일. , .

26) Georg Simmel, Zur Philosophie der Kunst, 1922, pp. 67-73. 여기에는 짐멜의 베네 치아(“Venedig”, in: Der Kunstwart, 20, . Hälfte, 1906/07) 가 수록되어 있다. 27) Georg Simmel, Simmels Briefe an Edmund Husserl, in: Buch des Dankes an

Georg Simmel, hrsg. von Gassen und Landmann, Berlin: Duncker & Humblot, 1958, p. 85.

28) Georg Simmel, Zur Philosophie der Kunst, p. 66. 이것은 Florenz(1906)라고 제목을 부친 짐멜의 소론 가운데 하나이다.

(19)

본화에서는 운동하는 것은 신체가 아니라 신체의 선 ( ) 만이며 묘사의 목적과, 내용은 그것 자체를 위하여 또한 내측으로부터 움직이는 신체가 아니라 장식적, , 인 시점(視點)으로부터 움직이는 신체의 윤곽선이다.”29) 이것은 야마토에(大和繪) 를 가리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리하여 일본의 예술 즉 야마토에는 소재로서의. 신체의 실질을 단념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영혼은 어느 것 하나로서 지배하거, 나 또한 움직이는 일 없이 자기의 동성, (動性)을 분명하게 하는 것을 찾아내지 않 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한편 짐멜은 에세이 손잡이. (“Der Henkel”, 1911)속에서 일본인을 가리켜 손잡이의 최대의 거장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는 일본의 도제. (陶 의 손잡이에 흥미를 보인다 본체와 등질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의 주전자나 수

) .

반의 손잡이와 비교해 볼 때 주전자의 직경, (直徑)위에 호상(弧狀)으로 고정되어 있는 일본 도자제품의 손잡이를 두고 그것이 식물넝쿨로 짠 분리가 가능한 차, 주전자의 손잡이 를 그대로 흉내 내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그것을 지극히도 소중 , 히 여겨야 할 것 이라고 지적한다 .30) 이를 통해 보면 비교법을 사용하는 그의 심 미안의 폭이 갖는 넓이와 깊이는 놀랍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짐멜은 나아가 그의 필생의 저작 생의 직관 가운데에서 옛 일본의 다완 에 주목한다 그는 섬세한 금으로 된 상감이 자주 종행으로 행해지고 있는

(茶碗) . ,

사례를 들고 있다 이것들은 도자기의 유약부분에 생기는 가는 금이나 깨진 부분. 이 수복되어 있는 것이다 확실히 아마추어의 눈으로 보면 이것들은 상처로 여겨, 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완벽한 그릇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지라도 그 나름대. , 로 명기(名器)임에는 변함이 없다 짐멜은 이러한 점조차 충분히 알아차리고 있. 다 그의 다음과 같은 글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 “유럽인의 눈에는 이들 도기가 대체로 촌스러운 것으로 보일 것이다 아니 조야하고 보잘것없는 것. 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세월을 거듭해 감에 따라 비로소 그 아름다움과. 깊이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더라도 이것들은 중국자기와 같은 상. 투적인 의미에서 예술 이 아니라 오히려 우연한 자연 산물과 양식화된 예술 사이 , 에 있는 일종의 중간물(中間物)처럼 보인다.”31) 이리하여 짐멜은 유럽의 미학이 29) Georg Simmel, Philosophische Kultur, p. 195.

30) Ibid., p. 13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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