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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집권기와 박정희 집권기의 동상 비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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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투고일_2018.08.10 심사기간_2018.09.01-16 게재확정일_2018.10.05

이승만 집권기와 박정희 집권기의 동상 비교 연구

Comparison between the Statues Set up during Lee Seung-man's

Administration and Those Set up during Park Jeong-hee's Administration

이하연 중앙대학교 대학원 예술학과 , / 김영호 교신저자( ), 중앙대학교 대학원 예술학과 Lee, Ha Youn_Graduate School of Art Science, Chung_ang University /

Kim, Young Ho(Corresponding author)_Graduate School of Art Science, Chung_ang University

차례 1. 서론

연구의 배경과 목적 1.1.

연구의 범위와 방법 1.2.

국가적 동상의 시작 2.

충무공과 반공이데올로기 2.1.

전쟁을 상징하는 동상 2.2.

서양인 동상과 친근한 우방의 이미지 2.3.

이승만 동상과 권위 2.4.

자주적 근대 이념의 표현 3.

계몽주의와 동학의 선구자 3.1.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의 설립 3.2.

역사적 인물의 이용 충무공과 세종

3.3. :

애국선열들의 건립 3.4.

이승만 집권기와 박정희 집권기의 동상 비교 4.

형태와 조각가 4.1.

동상에 부여한 이념 4.2.

권위의 표현 4.3.

결론 5.

(2)

이승만 집권기와 박정희 집권기의 동상 비교 연구

Comparison between the Statues Set up during Lee Seung-man's

Administration and Those Set up during Park Jeong-hee's Administration

이하연 중앙대학교 대학원 예술학과 , / 김영호 교신저자( ), 중앙대학교 대학원 예술학과 Lee, Ha Youn_Graduate School of Art Science, Chung_ang University /

Kim, Young Ho(Corresponding author)_Graduate School of Art Science, Chung_ang University

요약 오늘날 우리의 주변에 남아있는 한국 근대 인물 동상은 주로 이승만과 박정희 집권기에 건립된 것이다 본 연구. 는 두 시기에 국가적인 차원으로 건립된 인물 동상을 비교 분석하는 것으로 각각의 집권기에 건립된 동상들에 어떤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부여하였으며 그것이 어떤 차이를 지니고 오늘날까지 영향을 주는 요인은 무엇인지 를 도출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각 시기에 보도된 신문기사와 간행물을 연구의 주된 자료로 이용하였고 한. 국의 근대동상과 각 지도자의 정치이념에 관련한 문헌을 통해 연구를 진행하였다 한국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집권한 이승만은 친근한 우방의 이미지와 반공 이데올로기를 서양인 장군과 충무공을 통해 나타냈고 반 일의 감정을 부여한 동상은 거의 제작하지 않았다 이승만 집권기에 건립되지 못했던 항일 순국열사들의 동상은. 박정희 집권기에 국가적인 정책으로 설립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에 의해 건립되었다 박정희는 이 단체를 . 통해 전통적인 인물 동상을 다수 건립하였고 이것은 계몽을 위한 민족주의에 의한 것이자 그의 부족했던 정통 성을 채우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인물을 이용하여 이념을 나타냈던 박정희는 본인의 권위 또한 충무공 세종을. , 통해 나타냈다 하지만 이승만은 본인의 동상을 건립함으로 그의 권위를 직접 나타냈고 독재청산이라는 목적으. 로 훗날 모두 철거되었다 동상에 부여된 이념 역시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동상의 인물선정과 드러나는 형상이. ,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본 연구를 통해 도출했다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인물 동상 역시 발전할 수밖에 없. 고 박정희 집권기의 동상이 더욱 다양하고 안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근대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정책의 하나로 건립된 근대 인물 동상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가시적인 무언가로 남기려는 시도, 였다는 것에서 두 집권기의 인물 동상에 의미가 있다.

The statues of Korean modern figures remaining around us today were mostly erected during Lee Seung-man's and Park Jeong-hee's administration. This research aims at comparing and analyzing the figure statues put up on a national scale during the two administrations. Newspaper articles and publications reported in each administration were used as the main materials of this study, and the research was conducted through the documents related to modern Korean statues and each leader's political ideologies. Lee Seung-man, who came to power in the times of Korean War, expressed familiar images of allied nations and anti-communism ideology through a western general and Chungmugong. Park Jeong-hee made many traditional figure statues erected with Deceased Patriot Ancestor Committee, which was by nationalism for the purpose of enlightenment and also for the fulfillment of legitimacy that he had lacked. Park Jeong-hee, who expressed ideologies using traditional figures, also showed his own authority through Chungmugong and King Sejong. However, Lee Seung-man directly displayed his authority by making the statues of his own figure put up, and all of them have been pulled down later on the purpose of the elimination of dictatorship. It has been concluded through this study that even though the ideologies granted to the statues are also important, before which, the selection of the figures for statues and shapes on display work importantly. It's a fact that figure statues naturally develop with time, and the statues during Park Jeong-hee's administration were more various and stable. Yet, the figure statues during the two administrations are meaningful in that they were modern statues put up as a part of the policies to progress toward a modern nation, and that it was the attempt to leave something tangible related to Korean history.

중심어

한국 근대 동상 이승만 집권기 동상 박정희 집권기 동상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

ABSTRACT Keyword

korean modern statues Lee Seung-man's administration statues Park Jeong-hee's administration statues Deceased Patriot Ancestor Committee

(3)

서론 1.

연구의 배경과 목적 1.1.

한국 근대조각은 창작 과정의 물리적 제약과 한국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까지 겹쳐 평면회화 보다 작품 수가 적고 제작된 작품 중에서도 상당량이 유실되어 현재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다, . 그러나 한국 근대조각의 시작과 더불어 나타난 한국 근대동상은 한국 근대조각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로 작용한다 또한 동상. , 1)은 오늘날의 공공미술에 있어서 세대에 해당하는 1 장르로 다루어져 왔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특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제작되고 설치됐으므로 , 당대의 사조나 사회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인물 동상은 한국의 빠른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한 서구 근대의 모방 중에 하나로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다수 건립되었다 하지만 대동아 전쟁 당시에 전쟁물자 공출을 이유로 대부분은 . 철거되어 남아있는 것들이 별로 없다 오늘날 우리 곁을 지키고 있는 동상은 일제강점기가 . 끝나고 처음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다 현재 한국에 세워져 있는 많은 동상은 . 근대동상이 시작되었던 1950년대 그리고 국가적인 정책으로 애국선열의 동상을 제작하였던 , 년대에 건립되었다 이 시기는 국가권력의 지향점에 따라 동상 제작 사업의 목적과 1960, 70 .

방법에서 주목할 만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처음으로 정부가 들어서고 . 국가적으로 건립하였던 이승만 집권기 동상과 근대의 이념을 주축으로 삼고 국가 정책의 하나 로 다수의 동상을 건립하였던 박정희 집권기 두 정부의 동상을 직접 비교할 것이다.

연구의 주요 내용은 이승만 집권기와 박정희 집권기에 건립된 동상을 조사 비교하는 것으로 , 동상 건립의 시대적 배경과 동상에 부여된 각각의 정치적 이념을 이해하고 그 상관적 개연적 , 관계를 분석하는 것에 있다 각 시기 동안에 건립된 인물 동상을 비교 분석하여 동상에 어떠한 . 이데올로기를 부여하였으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동상은 무엇이고 그 동상에 남아있는 이데올 로기는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표다.

연구의 범위와 방법 1.2.

이승만 집권기인 1948~1960년과 박정희 집권기인 1963~1979년에 동상 이라는 키워드로 ‘ ’ 당시 주된 신문사들의 기사를 조사하여 어떤 동상의 건립이 국가적인 행사로 인식되었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인물선정 동상의 크기 동상의 형상 표정 손짓 소품의 사용 등. , , ( , , ), 건립 비용과 헌납자 제막식에서 나타난 요소들에 어떤 정치이념이 담겨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 , 게 나타나는지를 해당 시기의 동상 연구와 당시 지도자의 정치이념을 다룬 선행연구를 통해 도출해낼 것이다 그리고 두 집권기의 동상에 대한 차이점과 철거된 동상과 그렇지 않은 동상. 을 비교 분석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본 논문은 1948~1979년에 보도된 신문기사와 인물 동상에 관한 조사 그리고 , 이승만과 박정희 각각의 정치이념에 관한 선행연구를 통해 두 집권기 인물 동상의 차이점과 각각 동상에 담긴 의미와 상관성을 진단하였다 이는 동상 분석을 정치적 이념 이 다른 두 . ‘ ’ 집권기로 나누고 비교 분석하였다는 것 인물 동상 건립이 많이 이루어졌던 시기지만 활발하게 , 연구되지 않았던 부족함을 채운다는 것 그리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동상의 의미를 파악한다는 , 것에 의미를 지닌다.

국가적 동상의 시작 2.

충무공과 반공 이데올로기 2.1.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고 처음으로 건립된 것은 진해의 충무공 동상이다 이 동상을 의뢰받은 . 윤효중은 노량해전 전날 밤 충무공이 기도하는 모습으로 제작하려 하였으나 좌상을 피하고자 기도가 막 끝나고 일어서는 모습으로 제작한 것이라 하였다.2)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이러한 동상의 모습은 무념무상 으로 대별되는 동양적 철학성과 싫증의 염려를 생각하여 정적이게 ‘ ’

1) 동상이란 원래 구리와 소량의 청동으로 주조된 것이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동상이란 특정 인물의 기념상을 의미하는 것이 보통이다. 2) 윤효중, ‘無念無想 中 忠武公銅像( ) 製作하고 동아일보’, , 1952.04.06

(4)

표현된 것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갑옷으로 가려져 있고 긴 칼을 들고 서 있는 모습에서 강하, 고 엄숙한 장군의 모습이 드러난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지 350년이 되는 해를 맞아 건립된 이 동상은 년 동안의 제작 기간을 4 거쳐, 1952년 월 4 13일에 성대한 동상제막식을 했다 천 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동상제막식을 . “ 참관하기 위하여 몰려들었고 이승만 대통령 이하 정부 고관과 국회의장을 비롯한 유엔 한국부 흥위원단장과 내빈 다수의 연설이 있었다.”3) 이러한 인파는 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국민 들이 갖는 절박함의 상징이자 이승만 정권이 선택한 충무공이라는 역사적 승전의 인물이 그의 이념을 담기에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었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4)

이승만이 집권하자마자 처음으로 충무공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선택하고 건립 기념일을 계속 해서 성대하게 치렀다는 것 그리고 , 1953 , 1955년 년에 부산과 통영에 충무공 동상을 연이어 건립한 것은 이승만 정권이 충무공이라는 인물에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일본이 북한과 손을 잡으려 하자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하여 남한. 을 또다시 침략할 것이라는 이승만 정권의 논리 그리고 국민의 반일정서에 힘입어 반공 이데, “ 올로기를 반일 이데올로기에 결합시키는 역사적 소재”5)로 이승만은 충무공을 선택하였다 더. 욱이 친일파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승만 정권은 충무공상을 내세움으로써 국민에게 반일투‘ 사 처럼 보이기를 그리고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던 그가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주의자로 ’ , 여겨지기를 바랐던 것이다.6)

따라서 그가 충무공 동상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연이어 건립한 이유는 반일을 위함이 아닌 친“ 일파 정권이라는 것에 대해 대응하기 위해 반일처럼 보이기 위한 하나의 위장책이자 민중들이 지닌 강렬한 반일감정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에 정통성을 부여”7)하는 것 혹은 왜곡된 친일, “ 과 왜곡된 반일”8)에 대한 결과물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전쟁을 상징하는 동상 2.2.

해군을 대표하는 영웅으로 충무공 이순신이 있었다면 육군에는 살수대첩으로 고구려를 지켜, 낸 을지문덕이 있었다. 1953년 11월 25 , 일 광주 상무대에 용사들의 월급에서 지출된 돈으로 을지문덕 동상이 건립되었고 제작은 차근호가 맡았다 경향신문은 수양제의 침략을 물리치고 . “ 고구려의 국난을 구원한 일대의 명장 을지문덕 장군의 동상제막식이 28일 오후 한 시 광주 상무대에서 정부 요인 및 군 관계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다.”9)고 보도하였다.

을지문덕 동상은 긴 칼을 쥐고 두꺼운 갑옷을 입은 충무공 동상과 유사하게 강한 무인상으로 표현되었고 많은 돈을 들여 크게 제작 성대히 제막식을 치렀으며 우표를 제작하는 등의 노력, , 을 하였지만 충무공 동상만큼 성공하지 못했다 동상이 제막되었던 해의 언론 보도와 , . 1994년

월 일 상무대에서 전남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로 동상이 이전되었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12 17

자료가 남아있지 않음이 그 사실을 대변해준다 충무공 이순신이 지켜낸 국토는 남한의 지역이. 었던 반면에 을지문덕이 지켜낸 국토는 북한 쪽이었기에 조은정(2016)은 전쟁 이후 제막된 “ 이 동상은 국난극복의 상징이 되기에는 때가 늦은 것”10)이었다고 하며 이 동상의 한계점을 지적하였다.

해군에는 이순신 육군에는 을지문덕이 있다면 공군에는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인 이근석 준장, 이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 공군의 원조로 신예기 . 10대를 인솔하여 적을 공격하다 산화한

3) 충무공 동상제막식 성대 . 13李承晩 대통령 등 참석하에 ’, 조선일보, 1952.04.16

4) 박계리 충무공동상과 국가이데올로기, 」 『, 한국근현대미술사학 12 ,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04, P. 150 5) 박계리 위의 글, , pp. 156-158

6) 박계리 위의 글, , pp. 158-159

7) 서중석 이승만 대통령의 반일운동과 한국민족주의, 」 『, 인문과학 제 집 30 , 2000, pp. 313-314

8) 이승만의 반일정책을 비판적으로 보고 한일관계를 정상적으로 해결해야 함을 주장하는 자들 정치세력 과 일본에서 반이승만 운동을 ( ) 펴거나 북진통일이 아닌 중립화 통일을 주장하는 자들을 배척하기 위해 이승만은 새로운 친일의 정의를 내렸으며 이러한 왜곡된 친일에 대한 정의로 얼마나 왜곡된 반일을 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서중석 위의 글. , , pp. 315-317

9)乙支文德 將軍銅像 28日 尙武臺 除幕 ’, 경향신문, 1953.11.25 10) 조은정 동상 다할미디어, , , 2016, p. 123

그림 을지문덕 동상 우표

< 2>

그림 진해 충무공 동상제

< 1>

막식에 참석한 이승만

(5)

이근석 준장의 흉상이 1953년 월 7 24일에 제막되었다 동아일보는 조국 항공의 수호신으로 . “ 처음 희생한 고 이근석 준장의 호국정신을 기리 빛내고자 공군 장병의 총의로 이루어졌다”11) 고 전하였다 이 동상은 현재 대구 기지로 옮겨졌고 여전히 그의 추모식을 동상 앞에서 진행하. 고 있다.

서양인 동상과 친근한 우방의 이미지 2.3.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에서 남한을 도왔던 서양 장군 다수를 동상의 인물로 선택하였다 그것. 의 첫 번째가 1957년 월 9 15일에 제막된 맥아더 장군 동상이다 인천 자유공원에 김경승에 . 의해 세워진 이 동상은 인천상륙작전 당시 불바다를 이루었던 인천 앞바다를 향해 의연히 서 있는 모습으로 육군 정모를 쓰고 오른손에는 쌍안경을 들어 실제 맥아더의 모습을 최대한 , 반영하여 제작된 듯하다.

맥아더 동상의 제막식은 각계 귀빈과 수많은 시민의 참석으로 공전의 성황을 이루었다.12) 당시 공산의 침략에 대한 평화와 자유의 상징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이승만 정권의 반공 이데올 로기를 정치적으로 선전하는데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승만은 제막식에서 맥아더는 거대한 . “ 인물이고 거대한 지도자이며 군인 병략가를 대표하는 것이니 그분의 동상이 우리를 종종 경선 해서 의용한 자만이 자유권을 가진다는 뜻을 기념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라고 하면서 동상.”

의 의미를 전달하였다.

맥아더 장군 동상에 이어 1960년 월 3 21일에는 콜터 장군 동상과 밴 플리트 장군 동상이 동시에 제막되었다 모두 김경승이 제작한 이 동상들은 육군 정모를 쓰고 한 손을 허리춤에 . 놓은 모습을 하고 있어 형태적으로 유사성을 띠고 있으며 동상의 제막식에는 동상의 주인공이 모두 직접 참여하였다 이승만을 비롯하여 유엔군 총사령관과 다수의 참석 아래 성대히 진행된 . 제막식에서 이승만은 우리의 자유를 굳게 해준 장군의 은공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 .”13)이라 고 말하며 밴과 콜터 장군에 대한 감사를 동상을 통해 표현하였다.

서양인 동상을 다수 건립하고 제막식에 그들을 직접 초대한 것은 미군을 강조함으로 반공을 나타냄과 동시에 한국인들에게 이승만 대통령의 절친한 친구가 국군의 아버지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14)이기도 했다.

이승만 동상과 권위 2.4.

이승만은 집권기에 본인의 동상을 다수 건립하였다. 1954년 월 9 18일에 철도창설 55주년을 맞아 제막된 이승만 대통령의 흉상은 최초의 이승만 동상이다 국가의 행정기관 중 하나인 . 교통부가 철도창설 기념일을 맞아 대통령의 동상을 제작하였다는 것은 국가가 주도로 제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 1956년 월 일 건립된 두 번째 이승만 동상은 독립운동의 3 1 근원지인 탑동공원에 양복을 입은 모습으로 세움으로 그가 3.1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장소가 해외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었다.15)

이승만 탄신 80회를 맞아 펼쳐진 방대한 사업 중 하나로 남산에 건립된 세 번째 이승만 동상은 개인의 우상화 정책 중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조각은 윤효중이 담당했다 이 동상은 이승만. . 의 팔순 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조각장식은 석가의 일생을 여덟 단계로 정리한 팔상도(八相圖) 의 분절적 기법을 이승만의 일대기에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왼손을 앞으로 펴고 오른손은 , 높이 들고 있는 것은 석가여래의 수인(手印) 중 시무외(施無畏 · 여원인() 與願印 · 통인(通)

을 떠오르게 한다

) .

16)또한 동상 앞에 향로를 설치하는 등 모두 동상을 종교적인 대상으로 성화시켜 나가려는 의도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화 신격화하는 동상의 표현을 통해 . ·

11)最初蒼空守護神 李准將銅像除幕式 來四日 泗川서 동아일보’, , 1953.06.07 12) 맥아더 將軍銅像除幕式’, 경향신문, 1957.09.16

13)再建事業功績記念’, 동아일보, 1959.10.17 14) 조은정 앞의 책, , p. 128

15) 조은정 이승만 동상 연구, 」 『, 한국근대미술사학 제 14 , 집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05, pp. 105-106 16) 조은정 위의 글, , p. 93

그림 경향신문에 보도된

< 3>

맥아더 동상제막식

그림 탑동공원의 이승만

< 4>

동상

(6)

그가 동상을 통해 본인을 우상화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조각 작품으로서 표현 방식뿐만 아니라 이 동상은 억 백여만 환의 탈세로 제작하고 만여 1 8 명이 넘는 인원을 동원하여 건립하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의 우상화 정책이 도를 넘어섰다 는 비판을 낳았다 국회의원 김영삼은 이승만 대통령은 동상 및 기념비 건립에 소요된 금액으. “ 로 만여 명의 굶주린 한국인들에게 개월간의 식량을 제공할 수 있을 것2 1 ”17)이라고 말하면서 점점 독재적인 경향을 보인다고 부언하였다 그리고 이 동상은 이승만의 독재를 청산한다는 . 목적 하에 4·19혁명 직후 철거되었고 숭고한 선열의 정신을 보이기 위한 명분으로 제작되었, 던 탑동공원의 이승만 동상 역시 시위대가 무너뜨리고 끌고 다니게 된다 따라서 이승만 정부. 가 건립한 모든 이승만 동상은 현재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자주적 근대 이념의 표현 3.

계몽주의와 동학의 선구자 3.1.

혁명의 기치 아래 이승만 정부가 종식되고 새롭게 등장한 박정희는 대통령취임사를 통해 4·19

정치적 자주와 경제적 자립 사회적 융화와 안정을 목표로 대혁신운동을 추진하면서 우리는

“ ,

먼저 개개인의 정신적 혁명을 전개해야 한다 라고 강조하였다 그의 취임사에서 알 수 있듯이 .” . 그는 개개인의 정신을 교육하는 정책을 다수 시행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동상 건립을 통한 , 것이었다.

이러한 이념을 나타내듯이 박정희 정부는 숭고한 정신을 길이 추앙하며 민족중흥의 새로운 “ 기틀을 마련”18)하기 위해 1964년 월 3 20일 대구 달성공원에 최제우 동상을 제일 먼저 건립하 였으며 최제우가 국민의 정신적 지주가 될 것을 강조하였다. 1966년 월 5 19일에는 탑골공원 에 오른손은 책을 들고 왼손은 가슴에 둔 모습의 손병희 선생 동상이 건립되었다 제막식에 . 참석한 박정희는 선생은 근대화의 선각자로서 민족자주 정신의 구현자로서 그리고 “ , 3.1 독립 운동의 위대한 영도자로서 청사에 길이 빛날 위인이며 선생의 위용과 웅자를 담은 우람한 동상 을 건립 영세 불후의 공적을 후세에 길이 보존하게 되었음은 뜻 깊은 일, ”19)이라 하였다.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의 설립 3.2.

년 서울시 남대문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길거리에는 많은 수의 석고 조각상이 세워졌다

1964 .

이는 민족정기의 앙양과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선현에 대한 추모이념을 높이기 위해“ ”20)문교 부에서 주관하여 개당 만 원의 제작비를 들인 하나의 사업이었다 그러나 경향신문의 기사에 4 . 의하면 이를 서울의 대로 한복판에 조각 학도들이 만드는 역사상 인물의 석고상들이 줄줄이 “ 늘어서서 이를테면 야외 쇼를 벌일 예정”21)이라고 하며 어설프고 유치한 쇼 라고 명명하였다‘ ’ . 그도 그럴 것이 석고라는 재료는 야외조각에 맞지 않고 작은 크기로 효과도 없을뿐더러 인물, , 의 선정 또한 의미가 불분명했기에 계속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1966년 월 7 20 , 일 건립된 지 년 만에 모두 철거되었다2 .

당시 풍전산업 대표인 이한상은 제 회 1 5.16민족상 산업부문에서 부상으로 받은 50만 원을 선열들의 석고상 보수비로 희사했다 하지만 석고 조각상들이 철거됨에 따라 이것이 계기가 . 되어 발족된 것이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였다.22) 1966년 월 8 15일 서울신문사에 사무국을 설치하고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그 목적을 우리 민족사상 불멸의 공적을 남긴 위인 및 열사들“ 의 조상을 건립함으로써 그 정신을 길이 선양케 하여 민족의 귀감을 삼고자 함”23)이라고 했다.

17)獨裁傾向憂慮’, 경향신문, 1956.08.25 18) 대한뉴스 461

19)孫秉熙先生 銅像을 제막 경향신문’, , 1966.05.19

20) 정호기, 박정희시대의 동상건립운동 과 애국주의 -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 의 활동을 중심으로 」 『, 정신문화연구 제 권 제 30 1 호, 2007, p.335

21) 어설프고 유치한 쇼 『 』’, 경향신문, 1964.04.25 22) 사명 大師銅像제막 동아일보’, , 1968.05.11

23) 윤범모 기념조각 그 문제성의 안팎, , 」 『, 미술과 함께 사회와 함께 미진사, , , 1980, p.83 그림 경향신문에 보도된

< 5>

석고 조각상의 결함

(7)

위원회는 동상을 제작하기에 앞서 동상의 인물선정 과정으로 각계각층의 인사 128명에게 의 견 조사를 하여 78통의 답신을 정리해 명단이 세워졌다 결국 이순신 세종대왕 을지문덕. , , , 사명대사 김유신 강감찬 계백 광개토대왕 김춘추 윤관을 순차적으로 건립하기로 했지만, , , , , , , 광개토대왕 김춘추 윤관은 제작되지 않았다, , .24)그리고 애국선열조상의 건립사업이 진행되면 서 인물을 추가로 선정하거나 변경하기도 하였고 순서가 바뀌기도 하였다.

위원회에서 주관하여 건립된 동상들은 시민들의 성금을 모금하는 운동 의 형식이 아닌 개인이‘ ’ 나 기업체에서 경제적인 것을 모두 부담하는 사업 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동상건립‘ ’ . 비용의 문제는 덜 수 있었고 비용 부족으로 추진이 늦어지는 경우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렇게 , . 국가적인 사업의 하나로 조직을 결성하고 한 조직이 다수의 동상을 건립한 경우는 국내에서는 특히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역사적 인물의 이용 충무공과 세종

3.3. :

앞서 말한 순서에 의해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첫 번째로 건립한 동상은 충무공 이순신이 다 이 동상은 현재 광화문을 상징하는 동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서울시에서 가장 . 유명한 동상으로 남아있다 김세중이 제작한 이 동상은 박정희의 헌납으로 당시 국내 최대 . 규모로 만들어졌다 동상제막식에는 박 대통령을 비롯한 삼부요인과 유진오 신민당 당수 등 . “ 각계 대표가 참석 조국을 지킨 선열의 그 얼과 그 정신을 되새기며 민족중흥의 결의를 다짐했, 다.”25)고 경향신문은 보도하였다.

위원회가 첫 번째로 충무공 동상을 제작 건립하고 특히나 이것을 박정희가 직접 헌납했다는 , 것은 이 충무공 동상에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우리는 . “ 하나의 뚜렷한 자주 자립 자위의 구국 노선에서 고금의 일치를 보아야 합니다 즉 충무공과 , , . , 우리를 연결시켜야 합니다 구국 노선의 승리만이 조국을 모든 근대국가의 대열에 서도록 보장. 할 수 있습니다 이 구국 노선의 선두에 선 이가 바로 충무공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충무공의 . . 구국 노선을 그대로 밟아가야 하고 국가도 그러합니다. (대통령비서실, 1970)”라고 주장하며 박정희 자신과 충무공 이순신을 일치시키고 있다.26) 즉 박정희는 본인과 일치된 충무공을 통해 자신의 친일적 이미지를 상쇄하고 강력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부각하려 한 것이다.

박정희는 우리의 전반적인 역사와 전통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지만 충무공과 세종대왕만은 , 성군과 성운으로 인정하곤 하였다.27) 그에게 이순신은 외세의 침략을 막고 침체된 땅에서 새로운 역사를 쓰게 한 그리고 세종대왕은 우리의 역사에서 유일한 황금기를 맞게 해준 위인, 이었다 이에 박정희는 침체의 속에서 새로운 부흥의 땅을 열고 황금기를 맞게 할 것이라는 . 메시지를 동상을 통해 전달한 것이다.28)이를 그대로 보여주듯이 충무공이 세종로에 건립되고 며칠 후 덕수궁에 세종대왕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

위원회의 두 번째 사업인 세종대왕 동상은 국무총리 김종필의 헌납으로 이루어졌다 김경승이 . 제작한 이 동상은 과거 우리나라의 근대동상에서 보기 드문 좌상으로 왼손에는 책을 들고 , 오른손은 위로 들어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있는 모습이다 최초의 임금 동상이며 최대의 좌. “ 상”29)인 이 상의 제막식에는 박 대통령 부처 김종필 국무총리 서민호 대중당수 등 백여 “ , , 2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30)

무관인 충무공은 박정희 집권 초기에 그가 이용하였던 대표적인 영웅의 이미지였지만 문화적 , 우수성을 표상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에 박정희는 우리의 역사 중 황금기로 꼽은 세종 시대의 성군 이미지를 선택하면서 지도자상에 변화를 주었다.31) 따라서 정부는

24) 조은정 애국선열조상위원회의 동상 제작, 」 『, 내일을 여는 역사40, 내일을 여는 역사, 2010, p.156 25)忠武公 銅像제막 경향신문’, , 1968.04.27

26) 이수인, ‘박정희 체제 의 국가주의 담론 연구 」 『, 민주사회와 정책연구7 , 2005, p.380 27) 박계리 앞의 글, , p.161

28) 박계리 앞의 글, , pp. 161-162 29) 조은정 앞의 책, , p.154

30)世宗大王銅像제막 덕수’, 동아일보, 1968.05.04

31) 안인기 박정희 시대의 민족주의와 미술의 변화에 대한 연구, 」 『, 예술교육연구 제 권 9 , 2011, p.40 그림 광화문 충무공 동상

< 6>

제막식

그림 덕수궁 세종 동상

< 7>

(8)

세종대왕의 영릉과 효종 대왕의 영릉 일대를 성역화하는 운동을 년 동안 억여 원의 경비로 5 5 진행하였고 위원회의 세종과는 별개로 1971년 또 다른 세종대왕 동상을 건립하였다.32)

애국선열 동상들의 건립 3.4.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는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총 15개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앞서 말한 . 충무공과 세종 그리고 사명대사 동상을 , 1968년에 건립하고 1969년에 율곡 이이 원효대사, , 김유신 을지문덕 동상이 차례대로 세워졌다, . 1969년에 건립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의 동 상들이 대부분 통일을 위한 자주정신과 적을 물리치는 위업 그리고 그 애국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의 동상이 가장 많이 건립된 해인 1970년에는 10월 12 , 일 유관순 동 상의 제막으로 그 시작을 알렸다 이어서 훌륭한 어머니 어진 아내 뛰어난 글과 그림 실력으. , , 로 모든 여성의 표본이 되는 신사임당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을 기리기 위한 정몽주의 동상이 , 건립되었고, 10월 20일에는 근세 실학의 대가인 다산 정약용과 조선 시대 유학의 대가인 퇴계 이황의 동상이 동시에 제막되었다.

년 월 일에 강감찬 장군 기마상이 제막되었고 이어서 김대건 신부의 동상 오른손에

1972 5 4 ,

폭탄을 쥐고 던지는 모습의 윤봉길 의사의 동상이 제막되었다 그리고 이 동상을 마지막으로 . 위원회에서 주관한 동상은 더 이상 건립되지 않았다 위원회의 동상 건립 제막식에 꼬박꼬박 . 참석했던 박정희는 1972년의 제막식에는 더 이상 참가하지 않았고 이를 통해 위원회의 동상 건립에 전과 같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되고 박정희 정권은 도산공원에 안창호 동상과 강릉 경포대에 신사임당 동상을 건립하였고, 1976년 12월 일에는 박정희 특별성금과 최규하 국무총리 등 각계인사들7 의 성금으로 조만식 선생의 동상이 어린이대공원에 세워졌다 그리고 . 1977년 월 박정희 집3 , 권기에 건립된 동상 중 언론에 보도된 마지막 동상인 정발 장군 동상이 부산 동구 초량동에 세워졌다 박정희 정권은 애국선열의 동상을 건립하기 위해 위원회를 발족하였지만 이 조직을 . , 통하지 않은 동상들도 대개가 그 주인공이 애국선열이었다.

이승만 집권기와 박정희 집권기의 동상 비교 4.

정호기(2007)의 주장처럼 이승만 정권은 동상 건립보다 한국전쟁 기념물과 추모시설의 건립 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던 반면에 박정희 정권은 국가 주도로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 기념사업을 대규모로 추진”33)한 것은 사실이다. “1960년대 이후 본격적인 조각 수업을 받은 미술대학 출신 현역 조각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34)했기 때문에 동상을 제작할 수 있는 조각가의 수도 늘어났고 조각의 기술 역시 나아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동상의 양적인 면이. 나 질적인 면에서 이승만 집권기의 동상보다 박정희 집권기의 동상이 월등하다고 말할 수 있 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근대적인 독립 국가를 형성하고 근대적인 동상을 . 국가적인 차원에서 건립하였다는 데에 그리고 박정희 집권기 동상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에 , 의의가 있다.

형태와 조각가 4.1.

박정희 집권기의 동상이 이승만 집권기의 동상보다 양적인 면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뛰어나다는 사실은 동상의 형태를 통해 알 수 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 자주적이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건립한 근대동상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현실적으로 점점 더 많은 수의 조각가가 나오고 작업실의 시설이나 규모 또한 발전. ,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 50년대에 동상을 제작할

32)民族文化永遠表象 여주世宗 英陵孝宗 寧陵 聖域化熱意, 동아일보, 1970.01.20 33) 정호기 앞의 글, , p.342

34) 윤범모 앞의 글, , p.83

(9)

때에는 동적인 것보다 정적인 동양의 미를 선호한 탓도 있었다.

이승만 집권기에 충무공 동상을 만든 윤효중은 동상 제작 후기에 너무 동적으로 하면 조형적“ 으로는 좋으나 침착한 동양적 철학 성이 부족하고 오래 보면 싫증이 날 염려가 있기에 될 수 있는 대로 정적인 포즈”35)로 제작하였다고 하였다 이승만 집권기의 동상이 왜 입상밖에 없으. 며 모두 최소한의 움직임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이다 이승만 집권기의 동상. 에서 가장 역동적인 것은 한 손을 하늘을 향해 높게 쳐들거나 한쪽 발을 앞으로 내밀어 움직이 는 듯한 형태를 취한 정도다.

반면에 박정희 집권기에는 보다 다양한 형태의 동상이 만들어졌다 그중 용상에 앉은 세종 . 동상은 좌상으로 권위 있는 임금의 모습을 하고 있고 폭탄을 던지는 모습의 윤봉길 동상은 , 당시의 역동성이 표현되었으며 바닥에 앉은 신사임당 동상은 정좌 상으로 친근함이 더해졌다, . 특히 1966년 제작된 최초의 기마상인 계백장군 동상을 시작으로 이와 유사한 형태인 김유신 동상 홍의 장군 동상 강감찬 동상이 건립되어 말을 탄 채 대군을 이끌고 앞으로 진격하는 , , 장군의 모습을 기존 장군상과 달리 훨씬 역동적이며 강하게 표현되었다 입상만을 고집하지 . 않고 인물에게 맞는 다양한 자세로 더욱 동적인 동상이 제작된 것이다.

건립 시기 동상명 제작자 건립위치 현재

1948.04.13. 충무공 윤효중 경남 진해 변화 없음

1952.09.29. 을지문덕 차근호 광주 상무대 장성 상무대

1953.05.21. 충무공 김경승 통영 남망산 공원 변화 없음

1953.07.04. 이근석 윤효중 사천 기지 대구 기지

1954.09.18. 이승만 작자미상 교통부 광장 철거됨

1955.12.24. 충무공 김경승 부산 용두산 공원 변화 없음

1956.03.01 이승만 문정화 탑동공원 철거됨

1956.08.15. 이승만 윤효중 남산공원 철거됨

1957.08.30. 민영환 윤효중 안국동 네거리 변화 없음

1957.09.15. 맥아더 김경승 인천 자유공원 변화 없음

1958.11.12. 무명용사 작자미상 논산 연무대 훈련소 변화 없음

1959.05.24. 안중근 김경승 남산 철거 후 새로 건립

1960.03.31. 콜터 김경승 이태원 사령부 입구 변화 없음

1960.03.31. 밴 플리트 김경승 육군사관학교 변화 없음

이승만 집권기의 주요 동상

< 1>

이승만 집권기의 동상이 박정희 집권기의 동상보다 다양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는 특정 조각 가가 대부분의 동상을 제작했다는 것에 있다 물론 박정희 집권기에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도 . 다양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위의 표를 보면 이승만 집권기에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는 작자. ( 미상인 동상을 제외하고) 12개의 동상 중 개의 동상을 윤효중이4 , 6개의 동상을 김경승이 제작하였다 거의 모든 동상을 명의 조각가가 제작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비율이. 2 다 따라서 동상의 모습이 인물만 변화할 뿐 동일한 작가에게서 나오는 형태의 표현과 얼굴의 . 묘사 동상의 분위기가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동상에 부여한 이념 4.2.

이승만 집권기의 동상과 박정희 집권기의 동상을 비교했을 때 두드러지는 차이점 중 하나는 살아있는 인물의 건립 여부다 동상은 대개 살아있지 않은 그래서 그 인물을 후세에 기리기 . , 위하여 건립된다 박정희 집권기에 건립된 동상은 대부분이 살아있는 인물이 아닌 이미 세상에 . 없는 역사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이승만을 포함하여 살아있는 인물의 동상을 . 다수 건립하였는데 그중 주로 건립된 것이 서양인 장군이었다 살아있는 인물의 동상을 건립, .

35)無念無想 上 忠武公銅像( ) 製作하고 동아일보’, , 1952.04.05 그림 계백장군 동상

< 8>

(10)

한다는 것도 특이점이지만 서양인 장군의 동상을 다수 건립하였다는 것도 이승만 집권기 동상 의 특이점 중 하나다.

미국인을 남한에 세우는 것에 대해 조은정(2016)은 미국을 대표하는 장군을 통해 나라를 “ 공산주의 손에서 구해낸 이승만 대통령의 친교력을 확인시키고 한국과 미국의 공고한 관계를 입증하는 물적 증거였던 것”36)이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기 전 미 군정 . , 미술 정책이 조선의 미술계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승만 정부는 이 정책을 그대로 , 이어받은 미술 정책을 펼쳐나갔기 때문에 이에 대한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예측해볼 수 있다.

반면에 박정희 정권은 우리의 전통적인 인물을 고집하였다 그가 전통적인 인물을 고집한 주된 . 이유는 군사적 수단을 통한 집권으로 정치적 정통성에 있어서의 약점“ ”37) 보완과 개인의 민족 적 동일성 확보였다 군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는 자신의 집권과 권위주의적 통치를 . 정당화하기 위해 반공과 함께 경제성장 조국 근대화를 내세웠고 이 경우 근대화를 정당화하고 , 타당 화하는 중요한 방식 중의 하나는 전통적 요소를 동원하는 것이었다.38)또한 국민의 호응, 을 얻고 개인의 동일성을 확보하는 데에 있어서 민족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은 가장 효과적인 , 요소였다 더욱이 분단체제라는 독특한 역사적 상황으로 인해 민족은 새롭게 구성해내야 할 . 중요한 대상으로 부각되었다.39) 이에 박정희 집권기에는 동상의 인물선정을 전통적인 인물에 서 찾았으며 이러한 이유로 역사적 위인을 집중적으로 건립한 것이다.

이승만은 단군의 자손을 강조하고 단군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내세우고“ , 신라 화랑도에서 민족정신을 찾는다고 하는 등 비역사적 또는 초역사적인 주장”40)을 하며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독립적인 국가를 세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성과 직결되“ 는 항일순국 의사나 열사를 기리는 동상 건립 독립 운동자에 대한 복지 책의 출판 등과 같은 , , 활동”41)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 3.1절 기념사와 광복절 기념사에서 반공과 자신이 민 주국을 세우려고 분투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주로 언급하고 일제강점기나 반일문제에 대해서, 는 언급이 없었다는 것을 통해 이승만이 반일문제보다 반공 문제를 더욱 중요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2) 반일은 그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반공보다 더욱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이승만 집권기에 건립된 대다수의 동상 역시 반공 이데올로기를 나타내는 것이. 었다.

실제로 계속해서 추진해오던 안중근의 동상 건립은 년을 미루어 뒤늦게 이루어졌고 이 동상5 , 은 이승만 집권기 동상 중 유일한 항일순국 의사의 동상이다 당시 이승만 정권에 있어서 항일. 투사나 독립운동의 열사는 민족의 영웅이지만 대한민국의 영웅은 아니었고 따라서 안중근 , 의사의 동상은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먼저 건립하고 제작되어 늦어졌던 것이다.43) 동상의 제막식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고 장 부통령과 중국대사 등 유가족들이 참석한 , 가운데 거행되었다 또한 계속해서 미루어져 건립되지 못했던 항일순국 의사의 동상은 결국 . , 박정희 집권기에 건립되었는데 그중에는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에 의해 건립된 유관순 동, 상 재외교포들의 성금으로 건립된 김구 동상이 있다, .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한국전쟁을 막 끝내고 들어선 이승만 정권이 독립운동가나 항일순국 의사를 건립하면서 그들을 추모하거나 기념하는 것보다 한국전쟁을 위해 순국한 열사들을 건 립한 것은 이승만 집권기 동상의 큰 특징이다 특히 이승만 집권기에는 적군에게서 우리의 . 영토를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로 해군의 이순신 육군의 을지문덕 공군의 이근석을 그리고 , , 한국전쟁을 이끈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박정희 집권기에도 육군사관학교에 강재. 구 소령 해군사관학교에 이인호 소령 등이 군인과 시민들의 성금으로 건립되었지만 이것은 , ,

36) 조은정 앞의 책, , pp. 126-127 37) 안인기 앞의 글, , p.34 38) 이수인 앞의 글, , p.373

39) 오명석, 1960-70 년대의 문화정책과 민족문화담론」 『, 비교문화연구 제 호 서울대학교 비교문학연구소 4 , , 1998, pp. 146-147 40) 서중석 앞의 글, , pp. 297-298

41) 서중석 앞의 글, , pp. 297-298 42) 서중석 앞의 글, , p.305 43) 조은정 앞의 책, , p.132

(11)

한국전쟁의 기념 혹은 우리 영토를 지키기 위함보다는 박정희 군사 정권의 권력을 보여주고 그의 출신을 알려주는 동상이었다. 1969년 월 1 21일에 제막된 최초의 경찰관 동상인 최규식 경무관 동상 역시 경찰들의 성금으로 이루어지면서 경찰과 군인의 힘을 강조하였다.

권위의 표현 4.3.

박정희 집권기의 동상과 이승만 집권기 의 동상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동상을 통해 그들의 권력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권력을 나타내는 방법은 달랐 다 이승만 집권기에 이승만은 본인의 . 동상을 건립하였고 그 규모 또한 당시, 의 동상 중에 가장 컸다 그는 본인의 동. 상을 통해 그의 권력을 보여주고 여러 종교적 장치로 본인을 신격화하였다 하. 지만 박정희는 박정희 본인의 동상을 건 립하지 않고 전통적 인물에 자신을 오버

랩시켜 건립하였다 그 예시가 광화문에 자리 잡고 있는 충무공 동상이다. .

당시 대한민국 최대 규모였던 세종로의 충무공 동상은 이승만 집권기에 윤효중이 제작한 충무 공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윤효중이 제작한 충무공은 적군과 싸우게 될 . 먼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반면 김세중이 제작한 충무공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 있다 그 장소 또한 전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역사적인 곳이지만 후자는 충무공과는 전혀 . 관련이 없는 서울의 중심지일 뿐이다 이는 마치 자신의 군사들 즉 국민을 보고 있는 듯하다. , . 또한 턱을 바싹 당기고 눈을 지릅떠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부각하고 지휘관의 , “ , 권위를 상징하는 장식용의 칼”44)을 들고 있어 적군을 물리치는 장군으로서의 충무공이 아닌 지도자로서의 충무공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업적을 기념하거나 시민들의 반발에 대응하기 위한 상징으로 동상을 건립할 때에도 이승만은 본인의 동상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였고 박정희는 전통적 인물에 빗대어 사용하였다, . 이승만은 우리의 영토에서 항일운동을 하였던 것이 아니므로 그 정통성을 부여하고 항일운동 자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탑동공원이라는 장소에 본인을 세웠다 반면 박정희. 는 군사 정권에 대한 전통성을 부여하고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한 본인의 이념을 위해 전통적인 인물을 이용하였다 이러한 둘의 차이점은 오늘날까지 영향을 준다. .

혁명 당시 시위대는 탑동공원의 이승만 동상을 내려서 끌고 다녔고 이승만 독재청산을

4·19 ,

위해 남산공원에 건립되어 있던 이승만 동상도 철거하였기 때문에 현재 우리는 당시 지어졌던 이승만 동상을 사진을 통해서 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박정희가 전통적 인물에 부여하여 자신. 의 권위를 나타내고 군사 정권의 정당성을 찾으려 했던 동상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 이는 아무리 동상에 목적성이 있고 건립된 이유가 분명하다고 할지라도 그 동상의 인물. 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과 역사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광화문 광장에 세워져 있는 충무공 동상은 부여된 이념과 부적절한 장소 고증의 문제로 건립 , 이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오고 있다 그럼에도 철거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 있으며 심지어 서울시의 랜드마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상 속에 내포된 의미는 남산공원. 에 있던 이승만 동상이나 광화문에 세워져 있는 충무공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동상의 인물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 그것을 계속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다.

안인기(2011)는 역사의 이용 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과거 역사의 재구성에서 출발하고 이 “‘ ’ 과정에서 미술은 시각의 힘을 빌려 역사를 가시화”45)한다고 말하였다 계속되는 문제 속에서.

44) 박계리 앞의 글, , pp. 163-165 45) 안인기 앞의 글, , p.36 그림 독재청산으로 철거

< 10>

되는 남산의 이승만 동상

그림 진해 충무공 동상과 광화문 충무공 동상

< 9>

(12)

도 동상이 철거되지 않고 남아있는 이유다 실제로 이승만 집권기에 건립되었던 동상 중 이승. 만 동상을 뺀 나머지의 동상들은 철거되지 않고 남아있다 이승만이 어떠한 목적과 이유를 . 가지고 동상을 건립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동상을 철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승만의 형상 이었기 때문에 철거가 되었던 것이다.

이승만 집권기 박정희 집권기

형태 입상 위주 정적인 자세, 다양한 형태 동적인 자세,

주요 인물 현존 인물 이승만 서양인 장군 과 충무공( , ) 전통적 역사적 인물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 )

동상 제작비 모금 형식 특정인물이 헌납

주요 이념 반공 친미, 계몽 경제성장 근대화, ,

권위 표현 자신의 모습을 직접 이용 전통적 인물에 자신을 연계해 이용

이승만과 박정희 집권기 동상 비교

< 2>

결론 5.

년대에 우리는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한국전쟁을 마치고 독립적인 국가를 이루었다

1950 .

근대국가를 처음으로 이룬 대한민국은 모든 면에 있어서 빠른 근대화를 이루어야 했다 길거리. 에 들어서게 된 인물 동상 역시 빠른 근대화를 이루었던 도시들의 상징으로 그들의 길거리를 , 모방하고자 건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승만 집권기의 동상과 박정희 집권기의 . 동상은 우리의 독창적이고 전통적인 조각의 기법을 사용했다고 보기보다는 어떤 정형 안에서 계속 반복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인물을 선택하고 그 인물에게 맞는 형태. 를 구상하며 동적인 것은 피하고 최대한 동양의 철학성을 고려한 정적인 것을 추구하였으며 얼굴의 표현은 조선시대의 초상화를 기반으로 하였다는 것에서 우리의 정통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이승만 정부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장군과 군인들을 건립하여 한국전쟁을 기 념 추모하였고 우리나라를 지켜줄 강인한 인상을 남기도록 하였으며 그의 정치적 상황의 대응· , 책이 되어주기도 하였다 또한 본인의 동상을 탑동공원에 건립하여 대한민국의 항일운동자로. , 서의 정통성을 찾으려 하였고 거대한 동상으로 권위를 미국인 동상의 건립으로 그의 친미주의, 와 반공 이데올로기를 나타내었다.

다수의 동상을 남긴 박정희 정부는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한 국민의 정신 교육의 하나로 동상을 건립하였고 국민과 국가가 하나라는 민족주의 개념과 본인의 정통성을 전통적 인물의 건립으, 로 찾으려 하였다 그리고 그는 전통적 인물에 본인을 중첩해 권위를 나타내었고 역사적으로 . , 자주적 사상을 지닌 인물들을 다수 건립하며 자주 근대화를 강조하였다.

두 집권기의 동상 모두 어떠한 이념을 담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많이 보는 공공의 장소에 건립하여 그 효과를 발휘하도록 해야 했고 그렇기에 적당한 장소에 적절한 인물의 형상을 배치하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 의 기록이 극히 적게 남아있고 결국 현재는 원래의 장소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으로 옮겨진 동상이 꽤 된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많은 사람이 보기 위해 . 제작된 것이 많은 사람에게 노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적인 인물을 공공의 장소에 . , 배치할 때에는 그 인물의 고증이 확실해야 했는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힘들었다는 점 그에 , 따라 조형적인 요소 역시 과감하게 드러나지 못했다는 점이 한계로 남는다.

각각의 동상들은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그들의 이념을 담고 권위를 나타내기 위함이 공통된 특징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현재 그들의 동상이 계속해서 논란이 되는 이유 중 하나도 이 때문. 이다 물론 조각가 위치 형태 건립 목적에서 다양한 문제와 논란 사항이 존재하지만 계속해. , , , 서 위치해 있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동상을 통해 보존 확산할 수 있는 기념행위 중 하나이기 · 때문일 것이다 각 정부가 선택한 인물과 그 인물에 부여한 이념 그리고 건립의 목적은 모두 . , 달랐지만 역사를 보존 확산시키려 했다는 것은 동일하다 이에 두 정권 모두 동상을 제작,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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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하며 제막식을 성대히 진행하였고 동상 건립 기념일을 진행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각각의 . 동상에 담긴 숨어있는 의미를 찾는 것도 중요할 것이지만 인물이 가진 역사성과 정체성도 근대 자주 국가가 가져야 할 중요한 사항 중 하나였음이 틀림없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그들의 건립 사업 역시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했는가를 떠나서 우리의 전통을 보존 확산하려 시도했다는 ,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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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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