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법과 사회통합 : 법문화론, 아시아적 가치
[비서구의 학문 : 마루야마 마사오의 예]
앞에서 나는 한국 사회를 포함한 비서구 사회에서 법사회학이 서구의 경우보 다 더 문제가 복잡하고 꼬여 있다는 점, 달리 말해 법사회학 또는 법사회과학이 권력 의 도구로 쓰일 가능성과 자유의 도구로 쓰일 가능성 모두를 더욱 많이 가지고 있다 는 점을 예언하듯 지적한 바 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개별 학문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비서구 사회에서 학문 일반이 부딪히고 있는 문제라고 할 것입니다. 나부터가 강의에서 서양의 지적 계보를 우리의 계보인 듯이 막연히 전제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 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반도의 고유한 문제 상황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칸 트나 헤겔, 벤담이나 버크의 논리를 아무리 잘 주워섬긴다고 해도 그것이 한국 사회 의 구체적인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궁구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공론에 지 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격물치지(格物致知)이자 실사구시(實事求是) 의 입장이 한국 사회에서 법사회학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내가 보기에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 한국 사회가 가장 약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학자들이나 중국학자들은 조금 부족해 보이더라도 자신들의 언어로 문제를 분석 하고 대안을 제출하려는 경향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도통 영어 논문 을 얼마나 썼느냐 식의 성과주의적이고 결과주의적인 접근에 매몰되어 있는 것 같습 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공부를 하면서 읽은 글들 중에 최 고의 논문들 중 하나는 일본의 정치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의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라는 글입니다. 이 분은 1930년대에 동경제국대학 법학부의 조수였는데, 태평양 전쟁 말기에 학병 출진하여 남양군도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입니다. 그리고 패전 후에 돌아와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면서, 자신은 물론 온 일본 민족이 해명하지 않으 면 안 되는 거대한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그것은 “도대체 일본 사람들로 하여금 서양 과 맞서서 그토록 처절하게 광기에 휩싸여 싸우고 죽게 만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 가?”하는 문제였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두 질문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일 본은 어떻게 서양에 대하여 맞설 수 있었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은 왜 서양에
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가?”입니다.
마루야마는 이 문제를 유럽의 주권 국가 이념에 대한 칼 슈미트의 분석에서
‘국가의 중립성’이라는 개념을 빌어 와서 풀어갑니다. 한 마디로 일본은 서양의 주권 국가 이론의 껍데기는 빌어 왔지만, 그 핵심인 국가의 중립성 문제는 가져오지 않았 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일본인의 정치적 정체성은 권력의 중심(천황)과의 거리에 의하여 좌우되는 충성과 반역의 논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바로 태평양 전쟁 말기에 벌어진 광기어린 가미카제 집단 자살극의 심리적 원인이 되었다는 것입 니다. 흥미롭게도 일본인들은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이 있은 뒤, 마치 언제 그토록 잔인한 전쟁이 있었냐는 듯이 점령군에게 충성을 보이게 되는 데, 이것 역시 초국가 주의 논리와 심리 속에 이미 내장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루마야 마사오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학계의 텐노라고 불릴 만큼 일본의 사 상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입니다. 그의 이와 같은 ‘불완전 근대화론’은 지지하 는 측과 비판하는 측 모두에서 논쟁의 초점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논란이 잦아들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은 내가 마루야마 선생을 소개하는 초점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려는 핵심은 마루야마 정도의 식견과 배포를 가지고 우리의 문제를 보편적 시각에서 그리고 우리의 경험적 현실 속에서 풀어내는 진정한 학자들이 우리 사회에 는 아주 드물다는 고발입니다.
간절한 부탁입니다. 여러분은 이 한계를 꼭 뛰어 넘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서양 사람들의 공부 내용을 따라잡는 것과 함께, 꼭 우리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해방 공간과 개항 공간을 연결하는 식민지 시대에 대한 연구나 개항 공간 이전의 조선 사회에 대한 공부, 그리고 다른 나라의 사회들에 대한 비교 연구가 중요한 것은 궁극적으로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없다면, 도대체 누가 우리의 문 제를 해결해 주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