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朴趾源의 필사본 小集들과 自編稿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2

Share "朴趾源의 필사본 小集들과 自編稿 "

Copied!
29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朴趾源의 필사본 小集들과 自編稿 󰡔煙湘閣集󰡕 및 그 계열본에 대하여

52) 金 榮 鎭*

❙국문초록❙

박영철(朴榮喆)이 1932년 간행(刊行)한 󰡔연암집(燕巖集)󰡕은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아들 박종채(朴宗采, 1780~1835)에 의하여 1829년 이전 편집이 완료된 필사본(筆寫本) 󰡔연암집󰡕을 저본(底本)으로 간행되었다.

이 󰡔연암집󰡕의 소집(小集) 중심(中心)의 독특한 편차(編次)는 박지원 본인에 의해 만년인 안의현감 시절 (1791~1795) 1차 정리된 소집 󰡔연상각집󰡕을 박종채가 맨앞에 배치하고, 나머지 소집들은 박종채에 의해 재편된 것을 차례로 이어 붙여 생긴 결과이다. 본고는 박종채가 편한 󰡔연암집󰡕의 저본이 되었던 연암 초·장년기의 소집 원본들(대부분 燕巖手澤本)을 확인 가능한 선에서 총정리하였다. 가장 중요한 원고본 들로 󰡔종북소선(鐘北小選)󰡕, 󰡔백련관잡록(白蓮舘雜錄)󰡕, 󰡔벽매원잡록(碧梅園雜錄)󰡕, 󰡔방경각외전(放瓊閣 外傳)󰡕(以上 ‘공작관집’ 내), 󰡔겸헌만필(謙軒漫筆) 건·곤󰡕, 󰡔엄계집(罨溪集) 건·곤󰡕 등을 소개하였다.

이어 󰡔연상각집(煙湘閣集)󰡕 현존본과 그 계열본(系列本)을 소개하고, 󰡔연상각집󰡕의 특징 및 의의를 밝 혀보았다. 󰡔연상각집󰡕은 제1차 편집본(안의현), 제2차 편집본(면천군, 한양대본 󰡔면양집』4권3책이 그것 이다), 최종 편집본(󰡔과농소초󰡕 탈고 이후)으로 구분된다.

연암 시문 원고본의 대대적인 출현으로 말미암아 향후 󰡔연암집󰡕 교감(校勘), 연암 작품의 개작 변개 양상, 작품 창작년 고구(考究), 연암의 초장년기와 만년기의 문체(文體) 및 문학관 변화 등등에 전면적인 연구가 진행될 것으로 기대된다.

[주제어] 박지원(朴趾源)의 필사본 소집(小集), 자편고(自編稿) 󰡔연상각집(煙湘閣集)󰡕, 박종채(朴宗采)편

󰡔연암집(燕巖集)󰡕

❙목 차❙

Ⅰ. 서 론

Ⅱ. 朴趾源의 필사본 小集들과 󰡔燕巖集󰡕의 편찬 과정

Ⅲ. 󰡔煙湘閣集󰡕 계열본

Ⅳ. 필사본 소집(小集)과 간본 󰡔연암집󰡕 내 소집과의 상관 관계

Ⅴ. 󰡔煙湘閣集󰡕의 특징과 의의

Ⅵ. 맺음말

* 계명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 kyj2164@hanmail.net

(2)

Ⅰ. 서 론

그간 축적된 연암 박지원(1737~1805)의 문학과 사상에 대한 논문은 수백 편을 헤아리지만 󰡔연암집󰡕

의 편찬과 간행 과정, 이본(異本) 대비 등 텍스트에 대한 연구는 극히 적었다.1) 작가 및 작품 연구 의 기초라 할 수 있는 ‘텍스트 비평’에 소홀한 우리 학계의 실태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만 하다. 하지만 2005년 신호열·김명호의 󰡔국역 연암집 1, 2󰡕(민족문화추진회)이 나옴으로써 박지원의 시문 전체가 국내 최초로 완간되고, 같은 때 단국대 퇴계기념도서관에서 연민문고 소장 박지원 관련 자료 상당수를 홈페이지에 화상이미지로 탑재하면서 박지원 자료의 원전 교감 내지 비평의 문제는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2) 필자도 이 방면에 관심을 두어 2005년 박지원의 필사본 소집(小 集)들을 정리하여 학계에 처음 보고한 바 있다.3) 그 이후로도 박지원의 필사본 소집이 여러 종 더 발굴되었기에 본고는 2005년 논문의 보유(補遺)의 성격을 띈다. 아울러 박지원이 만년인 안의현감 시 절에 자편(自編)한 󰡔연상각집(煙湘閣集)󰡕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박지원은 󰡔연상각집󰡕 외에도 젊은 시절부터 여러 종의 소집(小集)들을 자편(自編)한 바 있고, 이를 묶어 󰡔공작관집(孔雀舘集)󰡕으로 재편(再編)한 바 있음이 확인되었다. 본고에서는 먼저 박지원의 필사 본 소집들과 󰡔연암집󰡕의 편찬 과정을 고찰하고, 󰡔연상각집󰡕의 편찬과 그 계열본을 고찰한 뒤 󰡔연상 각집󰡕이 차지하는 의의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Ⅱ. 박지원의 필사본 소집(小集)과 󰡔연암집󰡕의 편찬 과정

󰡔연암집󰡕은 연암의 차남 박종채(朴宗采, 초명은 宗侃, 1780~1835) 등에 의해 1829년 이전에 1차 편집이 완료되었다.4) 이후 19세기 후반 박선수(朴瑄壽, 1823~1899) 등에 의해 간행이 시도되었으나

1) 텍스트에 대한 대표적 연구는 다음과 같다. 김성칠, 「옛 사람들의 문집 교정 ― 󰡔열하일기󰡕의 경우」, 󰡔민족문학사연구󰡕;

3호, 민족문학사연구소, 1993; 강동엽, 󰡔열하일기연구󰡕, 일지사, 1988; 김명호, 󰡔열하일기연구󰡕, 창작과비평사, 1990;

김윤조, 「朴榮喆本 󰡔燕巖集󰡕의 ‘錯誤·脫落’에 대한 검토 ― ‘文’ 부분을 대상으로 勝溪文庫本 󰡔연암집󰡕과 비교하여」,

󰡔한문학논집󰡕 10, 단국한문학회, 1992; 김혈조, 「󰡔燕巖集󰡕 異本에 대한 고찰」, 󰡔한국한문학연구󰡕 17, 한국한문학연 구회, 1994; 김영진, 「朝鮮後期의 明淸小品 수용과 小品文의 전개 양상」,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학위논문, 2004;

김영진, 「박지원의 필사본 小集들과 작품 창작년 고증」, 󰡔대동한문학󰡕 23, 2005 등.

2) 2005년 박희병과 정민은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연암의 서간첩을 동시에 발굴, 소개함으로써 인간 박지원의 보다 세 세한 면모를 알게해주었다. 박희병은 󰡔연암을 읽는다󰡕(2006), 󰡔연암산문정독󰡕(2007), 󰡔연암산문정독2󰡕(2009) 등 작품 이본 대교와 교감을 통한 연암산문 분석을 이어가고 있다. 서현경, 「열하일기 정본의 탐색과 서술분석」(연세대 대학 원 국문과 박사학위논문, 2008)은 󰡔열하일기󰡕의 이본과 교감 문제를 다시 제기하였다. 최근 김혈조는 기존 󰡔열하일 기󰡕 번역본의 오류들을 교정한 수준높은 완역본을 내놓았다.(󰡔열하일기󰡕 1~3, 돌베개, 2009)

3) 김영진, 「박지원의 필사본 小集들과 작품 창작년 고증」, 󰡔대동한문학󰡕 23, 2005.

4) 󰡔過庭錄󰡕(권4)에 1829년 가을, 대리청정 중이던 孝明世子의 命으로 연암 후손가에서 필사본 󰡔연암집󰡕을 올렸다는 기 록이 나온다. 文稿 16권, 熱河日記 24권, 課農小抄 15권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연암집󰡕의 정리 편차에는 박지원

(3)

유림(儒林)의 비방을 의식하여 성사되지 못하였다.5) 주지하다시피 연암 시문의 최초 간행은 창강(滄 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이는 시문 전체가 아닌 선본(選本)이었다.6) 연암 시문 전체를 수록한 󰡔연암집󰡕(17권 6책, 鉛活字本)은 1932년 박영철(朴榮喆, 1879~1939)7)에 의해 간 행되었다. 이 박영철본은 바로 박종채가 편집한 󰡔연암집󰡕(필사본)을 저본으로 하고 있는 바8), 본고에 서는 이 박종채 편 󰡔연암집󰡕의 저본이 된 연암 당대에 만들어진 소집(小集)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양상을 검토하고자 한다.9)

현행 박영철본 󰡔연암집󰡕은 종래에 흔히 보는 문집과 체제가 크게 다르다. 일반적인 문집은 시와 문을 구분하여, 시는 시체별로 또 연대순으로, 문의 경우 문체별로 재편(再編)하는 것이 상례화되어 있다. 그런데 󰡔연암집󰡕은 소집별(小集別)로 나누고 다시 그 안에서 문체순으로 배열하고 있는 것이 다. 여타 작가의 문집 가운데도 관직(官職)의 이동 또는 유배(流配), 사행(使行) 등 특정 시기별로 나 누어 소집(小集) 모음 형태로 문집이 편집된 것이 드물게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편년순 은 지키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연암집󰡕의 경우 그 소집(小集)이 편년순으로 되어 있지 않다. 성 공적으로 편집된 문집은 못 되는 셈인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종채는 󰡔연암집󰡕

을 편집하면서 박지원이 안의현감 시절 자선(自選)한 󰡔연상각집(煙湘閣集)󰡕을 맨앞에 두었다. 부친의 의사(意思)를 존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소집(小集)부터는 부친이 만들었던 원래 소집을 그대로 가져오거나(󰡔방경각외전󰡕), 원 소집의 이름을 그대로 쓰면서 원 소집의 수록작에 작품을 더 추가하여 소집을 만들기도 했다(󰡔공작관문고󰡕, 󰡔종북소선󰡕 등). 이제 이러한 사실들을 고증하고자 한다. 우선 박종채 편집본과 이를 저본으로 한 박영철 간본의 목차를 제시, 비교해 본다. 박종채 편집본(후손가 장본)은 지금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10) 이를 그대로 필사한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본 등11)이 있

의 처남 李在誠과 장남 朴宗儀도 一助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주도적인 역할은 박종채가 했음이 여러 곳에서 확인 된다. 박종채는 1822년 봄부터 󰡔과정록󰡕의 집필을 시작하여 1826년 무렵 거의 정리를 마쳤는데(최종 수정 완료는 1831년 봄) 󰡔과정록󰡕 내에 󰡔연암집󰡕의 글들이 많이 인용되는 것으로 보아 󰡔과정록󰡕 집필 무렵에 󰡔연암집󰡕의 정리 도 거의 이루어졌으리라 추정된다. 박영철 간본 󰡔연암집󰡕과 구분하기 위해 본고에서는 이를 박종채 편 󰡔연암집󰡕으 로 부른다.

5) 金澤榮 編, 「朴趾源年譜」, 󰡔重編燕巖集󰡕.

6) 1900년 原集(全史字本) 6권2책, 1901년 續集(全史字本) 3권1책, 1917년 重編(新活字本) 7권3책(中國 南通 刊)

7) 박영철에 대해서는 전게 김혈조 논문 162~163쪽 참조. 박영철은 일제시대에 서화골동 수장가로도 유명했다. 그의 수집품은 경성제국대학에 기증되어 현재 서울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최근 발굴된 󰡔燕巖先生書簡帖󰡕도 그의 소 장품이었다. 󰡔연암선생서간첩󰡕은 전문이 역주되었다. 박희병 역주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돌베개, 2005, 정 민, 「새 발굴 󰡔燕巖先生書簡帖󰡕의 자료적 가치 ― 附 원문 및 역주」, 󰡔대동한문학󰡕 22, 대동한문학회, 2005.

8) 洪起文은 박영철본 󰡔연암집󰡕이 대전에 사는 연암 후손 朴泳範 집안의 필사본을 저본으로 했다고 증언하였다. 박영 범 소장 연암 수택본들은 이후 이가원이 70여책 이상을 입수하게 되었고, 후손가에는 10여책 가량만이 남았다. 후손 가의 책은 1987년 한국한문학연구회 주관의 연암탄신250주년기념학술대회의 기념전시회에 출품된 적이 있었다. 출품 목록이 󰡔한국한문학연구󰡕 11, 1988, 117~118쪽에 실려 있다.

9) 김영진, 「朝鮮後期의 明淸小品 수용과 小品文의 전개 양상」, 고려대 국문과 박사학위논문, 2004, 101쪽 주 310), 104 쪽 주322) 등에서 필사본 󰡔종북소선󰡕의 중요성, ‘燕岩山房’ 版心 絲欄空卷, 󰡔孔雀館集󰡕(3책, 일본 천리도서관 소장), 박지원 소품산문에 대한 창작년 고구 등이 일부 제시되었고, 김영진, 「조선후기 실학파의 총서 편찬과 그 의미 ―

<三韓叢書>, <小華叢書>를 중심으로」, 󰡔한국한문학 연구의 새 지평󰡕(이혜순 외 공편, 소명출판, 2005)에서 박지원 편

󰡔삼한총서󰡕에 대한 소개, 현존 殘卷의 실태 등에 대한 보고를 한 바 있다.

(4)

다. 이제 양자(兩者)의 구성을 대비해보면 다음과 같다.

승계문고본 박영철본

卷一~卷六 煙湘閣選本 卷一 煙湘閣選本 卷七~卷十 孔雀館文稿 卷二 煙湘閣選本

卷十一 映帶亭雜詠 卷三 孔雀館文稿

卷十二 映帶亭賸墨 卷四 映帶亭雜詠

卷十三 書事 卷五 映帶亭賸墨

卷十四~卷十五 鍾北小選 卷六 別集 「書李邦翼事」 

卷十六 放璚閣外傳 卷七 別集 鍾北小選

卷十七~卷四十 熱河日記 卷八 別集 放璚閣外傳 卷四十一~卷五十五 課農小抄 卷九 別集 考槃堂秘藏 卷五十六 考槃堂秘藏 卷十 別集 罨畵溪蒐逸 卷五十七 罨畵溪蒐逸 卷十一~十五 別集 熱河日記

卷十六~十七 別集 課農小抄

박종채의 󰡔과정록(過庭錄)󰡕 권412)에 1829년 가을, 대리청정 중이던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명(命)으 로 연암 후손가에서 필사본 󰡔연암집󰡕을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본은 문고(文稿) 16권, 열하일기 (熱河日記) 24권, 과농소초(課農小抄) 15권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위 승계문고본, 즉 박종채가 편집 한 후손가장본의 체제는 효명세자에게 진상(進上)했다는 본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다. 특기할 것은 승 계문고본 권56 「고반당비장」과 권57 「엄화계수일」13)이 박영철본에서는 「열하일기」의 앞으로 재편되 어 있다는 것이다. 박영철본은 이 역시 일반 시문(詩文)이란 점을 고려하여 위치를 옮긴 것이다.

1829년 직전에 편집된 후손가장본에는 권56-57이 없다. 이로 보면 권56-57은 1829년 이후 박종채가 추가 수집한 것이거나, 아니면 이보다 훨씬 뒤에 박종채의 아들代에서 추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14)

10) 전22책 가운데 󰡔열하일기󰡕 부분인 제13, 제15, 제18책만이 실학박물관에 남아 있다.(󰡔한국한문학연구󰡕 11에 사진이 실려 있음.)

11) 승계문고본 외에도 중요한 필사본으로 서유구의 자연경실장본(숭실대 소장), 이희평의 계서본(단국대 연민문고 소 장), 영남대본, 일본 동양문고본 등이 있으나 승계문고본을 기준으로 삼는다.

12) 김윤조 역주, 󰡔역주과정록󰡕, 태학사, 303쪽.

13) 승계문고본 「엄화계수일」의 끝에는 그 목록에 없는 「稽山修禊序」와 「挽趙淑人」이 필사되어 있다. 같은 저본으로 간행한 박영철본에 이 두 작품이 빠진 것을 보면 이 두 작품은 승계문고본의 필사자인 김승렬이 다른 데에서 찾아 補錄한 것으로 추정된다.

14) 최근 조선후기 한 경화벌열가 소장 서책 목록이 나왔는데(修綆室 소장, 필사본 1책)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약 250종의 서책명이 기재되어 있다. 1860년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자료에 대해서는 박철상, 「조희룡의 󰡔향설관척독초존󰡕

으로 본 󰡔석우망년록󰡕의 성격에 대하여」, 󰡔문헌과해석󰡕 22, 2003, 262쪽 주12), 13) 참조. 이 목록에 기재된 자료의 실물들(대부분 동일 필체임)도 상당수 현존하고 있는 바, 이 목록에는 󰡔연암집󰡕 7책(1~3책, 연상각선본, 4~5책 공 작관문고, 6책 영대정잡영·영대정잉묵, 7책 종북소선·방경각외전), 󰡔열하일기󰡕(12책), 󰡔과농소초󰡕가 포함되어 있 다. 󰡔연암집󰡕은 임형택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데 이 본 역시 고반당비장, 엄화계수일이 수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1829년 효명세자 진상본을 저본으로 필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열하일기󰡕는 성호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5)

󰡔연암집󰡕의 정리·편차에는 박지원의 처남 이재성(李在誠, 1751~1809)과 장남 박종의(朴宗儀, 1766~1815)도 일조(一助)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15) 주도적인 역할은 박종채가 했음이 여러 곳에서 확 인된다.16) 박종채는 1822년 봄부터 󰡔과정록(過庭錄)󰡕의 집필을 시작하여 1826년 무렵 거의 정리를 마 쳤는데(최종 수정 완료는 1831년 봄) 󰡔과정록󰡕 내에 연암의 유문(遺文)이 많이 인용되는 것으로 보아

󰡔과정록󰡕 집필 무렵에 󰡔연암집󰡕의 정리도 일정 정도 이루어졌으리라 추정된다.

󰡔연상각선본󰡕은 박지원이 안의현감 시절에 자선(自選)한 것으로 현재 그 원 실물 2책이 남아 있 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공작관문고󰡕는 박지원이 만든 소집(小集)이 원래 있었다. 󰡔공작관문고󰡕 앞에 있는 「문고자서(文 稿自序)」에는 글을 쓴 간지(干支)가 나오지 않으나 󰡔겸헌만필(謙軒漫筆)(坤)󰡕(단국대 연민문고)이라는 필사본을 통해 이 자서(自序)는 ‘기축년(1769) 겨울 백련봉사(白蓮峰社)에서 자제(自題)’한 것임 새로 확인되었다. 󰡔겸헌만필󰡕은 1776년 무렵 박지원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그 앞에 전체 서문격으로 이 글을 다시 배치하고 있다.17) 󰡔공작관문고󰡕는 󰡔겸헌만필󰡕과 상당한 상관성을 갖기는 하나 박지원 본 인이 편집한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박영철본 󰡔연암집󰡕 목차의 끝에 “후손가 원고본의 󰡔공작관문 고󰡕에는 「淸香堂李公墓誌銘」과 「竹閣李公墓誌銘」이 있는데 그 두첨(頭籤)에 ‘규수(珪壽)는 생각건대, 이는 할아버지(박지원)의 글이 아니라 지계 이공(이재성)의 글인데 잘못 섞여 들어갔으니 의당 산삭 (刪削)해야 한다.’고 하였다. 때문에 지금 이 본에는 넣지 않는다.”라는 편자(編者)의 지(識)가 있 다.18) 이로 보면 󰡔공작관문고󰡕는 박종채에 의해 편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박종채는 「청향당이공묘 지명」과 「죽각이공묘지명」을 박지원의 작품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영대정잡영󰡕 역시 끝에 붙은 종간(宗侃)의 지(識)로 인해 박지원의 시를 모아, 박지원이 쓴 바 있 던 ‘영대잡영’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와 편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가 (詩로 자처하지 않은) 선친 의 평소의 뜻을 미루어 문편의 끝에 부친다(謹追平日雅意, 附之文編之末).”라는 말로 보아 박종채는 박지원의 일반 문은 󰡔연상각선본󰡕과 󰡔공작관문고󰡕로 중요 작품들은 거의 모였고, 여기 뒤에 시를 첨 부함으로써 일단락 지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이 뒤 소집(小集)들은 추가 발굴된 단행권(󰡔영대정잉묵󰡕,

󰡔방경각외전󰡕 경우)이거나 이미 있던 단행권에 새로 발견된 작품을 추가로 첨부하는 형태(󰡔종북소선󰡕

경우19))로 이어졌다. 󰡔방경각외전󰡕의 경우 부친이 젊은 날 한 때의 희작(戱作)으로 치부했기 때문에

15) 이재성은 연암과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던 인물이다. 이런 때문에 연암의 글에 評을 가장 많이 남긴 것으로 도 추정된다. 하지만 그는 연암이 죽은 직후인 1809년에 죽었기에 연암 遺文을 제대로 수습할 겨를이 없던 것으로 보 인다. 박종채의 󰡔연암집󰡕 편찬은 이재성이 죽은 뒤부터 본격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박종의는 일찍 백부 朴喜源에게 양자를 갔기 때문에 󰡔연암집󰡕 편찬에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없었다.

16) 󰡔연암집󰡕 내에 박종채(초명 宗侃)의 識가 붙은 곳은 박영철본의 권차 기준으로 권3 공작관문고의 「酒禁策」, 권4 영 대정잡영의 끝, 권8 방경각외전의 끝, 권10 엄화계수일의 「原士」 등이다.

17) 大字로 서문을 쓴 스타일이 󰡔종북소선󰡕(후손가장본) 序, 󰡔방경각 외전󰡕 序, 󰡔북학의󰡕(이겸로 소장본) 序 등과 동일 하다.

18) “按, 原稿孔雀館文稿中有淸香堂李公竹閣李公墓誌銘二篇, 而頭籤曰 ‘珪壽按, 此二篇, 原非先王父文字也, 卽芝溪李公之 作, 而錯混入編者, 宜刪之’云, 故今本不刊”

19) 박지원 당대의 󰡔종북소선󰡕(후손가장본) 원본이 남아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연암집󰡕 내 「종북소선」의 서화제발,

(6)

󰡔연암집󰡕의 맨 끝에 배치하였다(󰡔방경각외전󰡕에 얽힌 저간의 사정은 宗侃의 後識에 상세하다). 󰡔고 반당비장󰡕과 󰡔엄화계수일󰡕은 일문(逸文)들을 모아 가장 늦게 만들어진 소집(小集)임은 앞서 말한 바 있다. 󰡔연암집󰡕이 이처럼 특이하게 소집별로 엮인 것은 박지원 본인에 의해 만년에 만들어진 󰡔연상 각집󰡕을 아들 박종채가 그 뜻을 존중해서 맨 앞에 위치시키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연암이 초년 에 썼던 당호(堂號), 소집명(小集名)을 박종채가 잉용(仍用)하면서 작품들을 추가로 편입하였기 때문 에 연구자들의 혼란을 초래하였다. 󰡔연상각선본󰡕, 󰡔공작관문고󰡕, 󰡔종북소선󰡕, 󰡔엄화계수일󰡕 등에 특 히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다. 논의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또 연암 글의 원고본 또는 초기본 정리 의 차원에서 우선 박지원의 중요 필사본 소집들을 연대순으로 소개한다.20)

① 󰡔孔雀館集󰡕21)(1769년 自序本/1770年代 중후반本)

이 󰡔공작관집󰡕과 관련해서는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다. 동명(同名)의 책이 여러 종이기 때 문이다.

첫째는 1769년 자서가 붙은 󰡔공작관집󰡕인데 이 책은 미발견본이다. 따라서 수록작도 미상 이다. 󰡔연암집󰡕에 실린 이 소집(小集)의 「자서」에는 창작년이 나오지 않으나 󰡔겸헌만필󰡕(곤) (단국대 연민문고)에 실린 이 작품의 끝에는 “己丑(1769)大寒日自題于白蓮峰社”라고 나와 있 다. 아마도 삼청동 백련봉 아래 거주하던 1767년부터 1769년 전후의 글들이 수록되었을 것으 로 추정된다.

둘째는, 박지원 본인이 1770년대 중후반 자신의 소집(小集)들을 재정리하면서 ‘孔雀舘集’이란 판심이 새겨진 광곽(匡廓)만 있는 무사란(無絲欄) 원고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암후손가 자료들인 󰡔燕岩草稿(七)󰡕22)(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의 일부인 ‘白蓮舘雜錄’, 󰡔燕岩草稿(八)󰡕(단 국대 연민문고)의 ‘碧梅園雜錄’과 ‘放璚閣外傳’이 ‘공작관집’ 판심 원고지에 쓰인 소집들이다.

모두 중국 종이에 유려한 필체로 쓰여 있다.

요컨대 1769년 자서가 붙은 󰡔공작관집󰡕은 아래 󰡔종북소선󰡕보다 약간 앞 시기에 지어진 작품 들을 수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1770년대 중후반에 편집된 󰡔공작관집󰡕은 연암의 이 시기까지 의 작품들을 소집(小集)별로 재정리한 것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선집(選集)일 수 있다.

② 󰡔放瓊閣外傳󰡕

1760년대 후반 성책(成冊)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연암 후손가 구장의 󰡔燕岩草稿(八)󰡕(단국대

「제우인국화시축」 등은 연암 후손이 추가로 찾은 글들로 첨입된 것임을 알 수 있다.

20) 여기 언급한 단국대 소장본은 모두 연민 이가원 선생의 기증본이다. 이가원의 전게 논문에 의하면 1967년 가을 연 암의 현손 朴泳範 丈으로부터 연암 관련 서적 70여 종을 입수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연민이 소장한 대부분의 연암 관련 서책들은 연암 후손가 구장본들(거개가 ‘燕岩山房’ 版心의 絲欄空卷임)임을 알 수 있다.

21) 연암이 ‘공작관’이란 당호를 쓴 것은 이 「공작관집자서」를 통해 적어도 1769년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1772 년 무렵부터 쓰기 시작한 ‘연암’이란 호와 함께 1770년 초반까지 ‘공작관’은 박지원의 대표적인 당호였다. 윤광심의

󰡔병세집󰡕을 비롯하여 박제가, 이덕무, 박남수, 홍원섭의 문집 등에서 1770년대 박지원의 당호를 ‘공작관’으로 쓰고 있는 사례들이 확인된다. 아울러 이 이름을 만년 안의현감으로 나가서 현의 건물 이름으로도 붙였다. 박지원의 필 사본 초고들에는 ‘공작관집’이란 표제를 붙인 것이 많이 남아 있다.

22) 이 책에 대해서는 아래 ⑧에 소개한다.

(7)

<그림 1> 󰡔종북소선󰡕 첫면 연민문고)에 수록되었으나 이 외의 󰡔방경각외전󰡕 단행 필사본23)은 발견된 바 없다. 다만 󰡔기담총 화(奇談叢話)󰡕, 󰡔연상각집」24)을 비롯한 19세기 전후 필사된 여러 잡록들에 󰡔방경각외전󰡕 내의 작품 들이 널리 전사(轉寫)되어 있다. 유한준(兪漢雋, 1732~1811)·유만주(兪晩柱, 1755~1788) 부자는 1785년 󰡔방경각외전󰡕을 읽고 극찬하기도 하였다.25) 금번 󰡔방경각외전󰡕이 수록된 󰡔연암초고(八)󰡕의 발굴을 통해 박종채가 「방경각외전·후지」에 언급했던 “집에 책이 없어 매번 남들에게 얻어왔 다”는 언급도 再考를 요하게 되었다.

③ 󰡔鐘北小選󰡕(1771년 겨울 序), 필사본(中國紙)26) 1책, 연암 후손가 舊藏(현 소장처 미상)

이 책은 1988년 한국한문학연구회 주최의 연암탄신 250주년기념 자료전에 출품되었던 것이다. 홍대용의 장서인 ‘湛軒外史’, ‘大容’, ‘德保’ 등이 찍혀 있다. ‘辛 卯孟冬’에 ‘靑莊(이덕무)’이 쓴 敍27)가 있어, 여기 실 린 10편의 작품이 1771년 겨울 이전에 지어진 것임을 알려준다. ‘종북소선’이란 내제(內題) 아래에 ‘左蘇山人 著, 因樹屋 批, 槑宕 評閱’이라고 되어 있다.

‘좌소산인’은 연암의 제자이기도 한 서유본(徐有本, 1762~1822)의 호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박지원이 그 보다 앞서 썼음이 이 책에서 처음 확인된다. ‘좌소’는 경기도 장단(長湍)의 이칭(異稱)이고 박지원의 선영(先 塋) 역시 이곳에 있었기에 이런 호를 썼던 것이다.28)

23)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여항문인의 문집에 󰡔방경각외전󰡕 「마장전」이 실린 것이 있다.

24) ‘茶山學團’의 일원인 自怡堂 李時憲(1803~1860)의 舊藏本이다. “柳帥가 서울에 갔다가 가지고 왔길래 한 부 베낀다”

는 1852년의 필사기가 있다. 류수는 강진 細柳營의 營將 申石浯인듯하다. 표제는 ‘연상각집’이지만 수록작은 대부분

󰡔방경각외전󰡕 내 작품 및 「허생전」, 「호질」 등이다. 자료를 알려주시고 복사해주신 정민 교수께 감사드린다. 이시 헌에 대해서는 김봉남, 「다산 제자 이시헌의 시문에 관한 일연구」, 󰡔동방한문학󰡕 38, 동방한문학회, 2009. 참조.

25) “侍閱󰡔放瓊閣外傳󰡕. 議是一奇文字也. 雜取中庶閭巷異聞奇蹟, 論次而形容之, 如是逼眞. 自成古文. 非天授之奇才, 而能 之乎! 議是文優於作用, 不步亦趨, 亦於古人糟粕, 是爲大難及. 此人政有史才, 詢可用於三綱之役, 而意帶玩世, 落拓如 此, 苟行攝入之法, 則大有意致也.”, “󰡔索隱󰡕·󰡔演奇󰡕, 都遜󰡔放瓊󰡕, 靈鈍自懸, 何翅十重!” 유만주, 󰡔흠영󰡕 1785. 11.

13 및 同年 11.17)

26) 이 책은 대단히 화려하게 만들어진 필사본이다. 최고급 唐紙를 쓴 점. 세련되면서도 해정한 글씨, 홍대용의 장서 인, 이덕무의 批評(친필) 등등에서 그러하다. 필자는 이 책이 중국의 문사들에게 보이기 위해 고급스레 만들어진 選本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책과 마찬가지로 唐紙를 쓰고 본인의 고급 소장인이 찍힌 화려한 책으로 이서구 친필 본 󰡔自問是何人言󰡕(김윤조 교수 소장), 유득공 친필본 󰡔中州十一家詩選󰡕(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책의 외관만으로도 연암 그룹의 문예 취향을 살피는 데 좋은 자료이다.

27) 이 서문은 엄연히 ‘靑莊’이 題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박영철본 󰡔연암집󰡕에 「종북소선자서」로 글자 및 文句가 약간 변개되어 실려 있다. 필자는 2005년 논문에서 ‘청장’을 이덕무가 아니라 박지원이 썼던 호가 아닐까 과도하게 추정 하였던 바, 이를 수정한다. 이와 관련해서 강국주 「<鍾北小選序>의 改修와 작자 문제」(󰡔고전문학연구󰡕 30, 한국고 전문학회, 2006) 참조. 󰡔벽매원잡록󰡕에는 「종북소품서」라고 되어 있는 바 연암 본인이 ‘소품’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는 점 주목해야 할 뿐 아니라 이덕무 原作을 改作하여 본인 것으로 삼고 있음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28) 이덕무도 ‘좌소산인’이란 호를 쓴 적이 있다.(「선귤당기」 이덕무 비평)

(8)

비점(批點)을 한 ‘인수옥’은 누군지 미상이다. 평을 달은 ‘매탕’은 이덕무이다. 수록된 10편의 작품은 「夏夜讌記」, 「念哉堂記」, 「蟬橘堂記」, 「觀物軒記」, 「孔雀館集序」, 「蜋丸集序」, 「綠鸚鵡 經序」, 「亡姊孺人朴氏墓誌銘」, 「麈公塔銘」, 「鬻梅牘」이다. 이 책을 통해 수록된 10편이 1771년 이전 작품임이 확정된다는 점, 통용본 󰡔연암집󰡕의 작품과 제목(「念齋記」, 「觀齋記」의 원래 제 목은 「念哉堂記」, 「觀物軒記」였다) 및 본문에서 글자 출입이 상당히 많다는 점, 책 전체에 빼 곡한 이덕무의 비평(批評) 등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본문 글씨는 유려한 ‘종요체’로 구사되 어 있는데 박지원의 친필인지 좀더 고찰이 필요하다. 평어는 전부 이덕무의 친필이다.

④ 󰡔映帶亭賸墨󰡕(1772년 10월)

이 책은 실물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연암집󰡕 내에 편차되어 있어 내용은 다 확인이 된다.

척독 50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자서」(1772년 10월)가 있다.29) 연암은 이 글에서 ‘척독’을 ‘진부 한 고문(古文)’과 대비시키면서 높이 인정하고 있다. 󰡔燕岩草稿(七)󰡕(실학박물관)에 이름이 올라 있는 ’烟湘閣小赤‘이 동일본이 아닌지 모르겠다.

⑤ 󰡔手鈔燕巖集󰡕(1773년 무렵, 이서구 편)

이 책은 미발견본이다. 이서구 친필본 󰡔자문시하인언(自問是何人言)󰡕30)(김윤조 소장)에 이 책 의 서문이 실려 있다. 이 글을 통해 이서구의 연암에 대한 흠모를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연 암 문장이 이처럼 연암그룹원을 통해 전사(轉寫)되어 나갔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1775~1776년 즈음 이희경(李喜經)에 의해 편찬된 박지원·이덕무·박제가 등의 시문·척독 모 음인 󰡔백탑청연집(白塔淸緣集)󰡕(미발견, 박제가의 서)과 함께 매우 소중한 자료다.

⑥ 󰡔謙軒漫筆(乾)󰡕(1776년 무렵), 필사본 1책, 단국대 연민문고

고급 저지(楮紙)에 정사(淨寫)(연암 친필로 추정)된 필사본이다. 비점(批點)과 평(評)이 있다.

유만주의 󰡔흠영(欽英)󰡕 1777년 1월15일조에 이 책을 보았다고 하면서 「贈季雨序」 등 7편31)을 언급 또는 전문(全文) 인용한 바 있는데 정확히 일치한다. 목차가 있고 이어 「名論」, 「玉璽論」,

「送贈白永叔入基麟峽序」, 「贈季雨序」, 「送沈伯修出宰狼川序」, 「送徐元德出宰殷山序」, 「大隱巖唱 酬詩序」, 「會友錄序」, 「自笑集序」, 「楚亭集序」, 「孔雀館集序」, 「夏夜讌記」, 「貂裘記」, 「酬素玩亭 夏夜訪友記」, 「王考手書翰林薦記」, 「不移堂記」, 「梁護軍碣」, 「贈弘文館正字朴君墓誌銘」, 「麈公 塔銘」, 「孺人朴氏墓誌」, 「筆洗說」, 「騷壇赤幟引」까지 총 22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흠영󰡕을 근거로 이상 작품들이 1777년 1월 이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⑦ 󰡔謙軒漫筆(坤)󰡕(1776년 무렵), 필사본 1책(中國紙), 단국대 연민문고

표제에 ‘謙軒漫筆 坤’이라고 되어 있지만 乾冊과 동시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건(乾)이 정

29) 연암의 척독에 대해서는 정민, 「연암 척독소품의 문예미」, 󰡔한국한문학연구󰡕 31, 한국한문학회, 2003를 참조.

30) 󰡔薑山全書󰡕(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5)에 영인되었다.

31) 7편은 「증계우서」, 「會友錄序」, 「自笑集序」, 「筆洗說」, 「왕고수서한림천기」, 「초정집서」, 「古今科體引」(「소단적치인」

임)이다.

(9)

<그림 2> 󰡔겸헌만필(곤)󰡕(단국대 연민문고) 사본(淨寫本)임에 비하여 이 책은 난필(亂

筆)(연암 친필)이 많은데다가 건(乾)과 중복 되는 작품도 많다. 책 전체의 서문 격으로

「孔雀館集序」(끝에 󰡔연암집󰡕에는 없는 “己 丑大寒日自題于白蓮峰社”라는 구절이 쓰여 있다)가 있고, 본문으로 「送永叔序」 등 25 편의 산문이 실려 있다

수록 작품의 창작년 하한은 건(乾)과 마 찬가지로 보인다. 이 가운데 「蘚書齋集序」

(1772년 무렵작)는 강산(薑山) 이서구(李書九) 의 종제(從弟)인 이정구(李鼎九, 1756~1783) 의 시집에 부친 서문으로 󰡔연암집󰡕엔 박종

선(朴宗善, 1759~1819)의 시집에 부친 「菱洋詩集序」로 윤색되어 있음이 주목할 만하다. 「능양시 집서」는 연암의 사유 방식 등과 관련하여 주목을 받아온 글인데 그 원작의 창착년이 1772년 무렵으로 올라간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32)

⑧ 󰡔白蓮舘雜錄󰡕(1778년 이전), 필사본 낱장 4장(中國紙), 실학박물관

‘燕岩草稿 七’이란 표지 포함 낱장 4장이다. 표지 우측 상단에는 ‘白蓮舘雜錄’, ‘士訓’, ‘烟湘 閣小赤’(‘영대정잉묵’과 동일한 것으로 추정됨), ‘衆香城酬唱’(유만주의 󰡔흠영󰡕 1777년 5월 22일 조에 언급된 바 있다), ‘雜艸’라고 적혀 있으나 ‘白蓮舘雜錄’의 目錄과 그 첫 장(「玉璽論」 부분,

“弦公 撰, 泠齋 閱, 凈宵舘評”이라 적혀 있다), ‘雜艸’ 가운데 2-3칙(중국책인 󰡔제경경물략󰡕, 󰡔속 고승전󰡕 등에서 抄) 정도만 남았다. ‘백련관잡록’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옥새론」, 「명론」, 「초 구기」, 「불이당기」, 「증계우서」, 「유씨도서보서」, 「영처고서」, 「형언도필첩서」, 「초정집서」, 「녹 천관집서」, 「영재집서」, 「순패서」, 「사장애사」, 「제오천처사이장문」, 「소단적치인」

⑨ 󰡔碧梅園小品󰡕

유만주 󰡔흠영󰡕 1785년 11월 19일조에 연암의 소집(小集)으로 언급되어 있다.33) 실물이 발견 되지 않다가 최근 필자가 연민문고에서 󰡔燕岩草稿(八)󰡕에 ‘碧梅園雜錄’으로 실려 있는 것을 발 굴했다.

32) 이덕무의 「선서재시집서」(󰡔병세집󰡕에 수록)가 1772년에 쓰여진 것으로 보아 연암의 이 글도 같은 때 쓰여졌을 것 으로 추정된다. 연암이 이 글을 이처럼 바꾼 것은 李鼎九의 죽음이 순리로운 죽음이 아니었다는 점(그는 孤兒의 한을 품고 한강에 투신 자살하였음, 김윤조 「<강산전서> 해제」, 󰡔강산전서󰡕,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5 참조) 때문으로 보인다.

33) “古今文章, 盖後代之作, 難乎古矣, 難乎大矣. 其自以爲切事情者, 擧不免於說家小品. 自謂範圍活而間架整者, 又却涉乎 凡而無當, 詢不可及古人之文之大矣, 詢不可及古人之文之古矣. 然能文章者, 當要大. 大然後, 間架立矣. 當務古, 古然 後, 規度簡矣. 間架立而規度簡, 則事於文, 亦庶矣. 議祗誠才矣, 然竟歸于說. 曾見其󰡔碧梅園小品󰡕, 亦然. 取示 󰡔畵溪 外傳󰡕二冊云, 今製之體, 殊異󰡔梅品󰡕, 盖可謂之古文也.”(󰡔흠영󰡕, 1785년 11월19일조)

(10)

<그림 3> 󰡔燕岩草稿(八)󰡕(단국대 연민문고) 표지 <그림 4> 󰡔燕岩草稿(八)󰡕 내 「벽매원잡록」 첫면

‘碧梅園集 目錄’이 있고 이하 다음과 같은 13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鍾北小品序」, 「蜋丸集序」(李德懋評), 「會友錄序」, 「孔雀館集序」, 「綠鸚鵡經序」(李德懋評),

「觀齋記」(李德懋評), 「夏夜讌記」(李德懋評), 「蟬橘堂記」(李德懋評), 「念齋記」(李德懋評), 「麈公塔 銘」(李德懋評), 「贈弘文館正字朴君墓誌銘」, 「亡姊孺人朴氏墓誌銘」, 「梁護軍墓碣銘」

8편의 작품에 이덕무의 평이 붙어 있는데 ③󰡔종북소선󰡕에 실린 이덕무 평과 글자 출입이 약 간 있을 뿐 동일하다(단, 「孔雀館集序」와 「亡姊孺人朴氏墓誌銘」의 경우 󰡔종북소선󰡕에는 이덕무 의 평이 있으나 여기에는 없다. 평이 있던 면이 찢겨져 나갔다). 본서는 이덕무의 평이 있다는 점, 연암 생전에 중국 종이에 ‘공작관집’이란 판심까지 새겨 만들어놓은 문집이란 점, 연암 스 스로 서명(書名)에 ‘소품(小品)’이란 단어를 쓰고 있는 점, 「念哉堂記」의 작품명이 본서 편집 이 전에 이미 「念齋記」로 바뀌었고(이 글을 받는 주인공도 󰡔종북소선󰡕의 ‘叔凝’에서 ‘季雨’로 바뀌 었다) 「觀齋記」는 이 때까지 「觀物軒記」였다가 본서 편찬 직후 제목이 바뀌는 등 여러 가지가 주목된다.34)

⑩ 󰡔畵溪外傳󰡕(2책)

이 자료는 미발견이라 내용도 미상이지만, 아래 ⑫ 󰡔엄계집󰡕일 가능성이 높다. 앞에 󰡔벽매원 소품󰡕이 언급된 유만주 󰡔흠영󰡕 1785년 11월 19일조(앞의 주33)에 이 자료에 대한 언급도 있다.

“연암이 진실로 재주는 있지만 끝내 설가(說家)로 귀착되었다. 일찍이 그의 󰡔벽매원소품(碧梅園

34) 조선후기 시문집 가운데 표제에 ‘소품’을 단 경우는 극히 드물다. 19세기의 조희룡·이정작의 경우가 있을 뿐이다.

(11)

小品)󰡕을 보았는데 역시 그러하였다.”라고 한 후, 그의 󰡔화계외전(畵溪外傳)󰡕 2책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요사이 지은 이 작품들은 󰡔벽매원소품󰡕과는 전혀 다르니 고문이라고 말할 수 있 다.”라고 하였다. 󰡔화계외전󰡕이 󰡔엄계집󰡕과 동일본이라 가정할 때, 왜 ‘외전’이란 이름을 썼는 지, 󰡔엄계집󰡕 ‘건’과 ‘곤’의 성격 차이가 크다는 문제 ― 즉 󰡔엄계집󰡕 건은 결국 󰡔겸헌만필󰡕과 동일하고 여기 수록작들은 󰡔흠영󰡕에서 폄하했던 󰡔벽매원소품󰡕 수록작과 중복되는 작품이 많다

― 등을 해명(解明)해야 할 것이다. 만약 󰡔화계외전󰡕이 󰡔엄계집󰡕과 동일본이라면 󰡔화계외전󰡕 2 책은 󰡔엄계집(곤)󰡕과 발굴되지 않은 또 다른 󰡔엄계집󰡕35)일 가능성도 있다.

⑪ 󰡔衆香城唱酬󰡕(1책)

미발견. 중향성은 금강산을 뜻하는데 󰡔흠영󰡕 1777년 5월22일조에 이를 언급하고, 연암의 시

「贈左蘇山人」, 「輓趙淑人」, 「搜山海圖歌」, 「叢石亭觀日出」의 전문(全文)을 싣고 있다. 󰡔燕岩草 稿󰡕(七) 표지에 ‘衆香城唱酬’라는 소목(小目)이 적혀있다. 필자는 통행본 󰡔연암집󰡕에 누락된 「輓 趙淑人」의 조숙인은 홍봉한의 삼남이자 박지원의 친구였던 홍낙임(1741~1801)의 처 임천조씨(父 明健, 1741~1771)로 추정한다.36) 홍낙임이 ‘역(逆)’으로 죽은 1801년을 전후해 박지원 본인이 없 애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士章哀辭」의 전반부도 마찬가지다.

⑫ 󰡔罨(畵)溪集󰡕(1778년 무렵), 필사본 零本 2책, 단국대

ㄱ. 표제는 ‘罨畵溪集 乾 一’(우측 상단 ‘別集 二’, 하단에 ‘共三’이라 쓰여 있다)이다. 목차 에 내제가 있는데 먹으로 지웠다.(‘○○謾筆’) 총 22편이 수록되었는데 앞에 소개한 ⑦ 󰡔謙軒 漫筆(乾)󰡕과 완전히 일치한다. 목차의 제목 앞에 작은 圈(○)이 쳐져 있는 작품은 따로 표시 하였다.

「名論」, ○「玉璽論」, ○「送白永叔入基麟峽序」, 「贈季雨序」, 「送沈伯修出宰狼川序」, 「送徐元 德出宰殷山序」, 「大隱巖唱酬詩序」, ○「會友錄序」, 「自笑集序」, ○「楚亭集序」, 「孔雀館集序」,

「夏夜讌記」, 「貂裘記」, 「酬素玩亭夏夜訪友記」, 「王考手書翰林薦記」, 「不移堂記」, 「梁護軍墓碣」,

○「贈弘文館正字朴君墓誌銘」, ○「麈公塔銘」, ○「孺人朴氏墓誌」, 「筆洗說」, ○「騷壇赤幟引」

ㄴ. 표제는 ‘罨畵溪集 坤 二’(우측 상단 ‘別集 二’, 하단에 ‘共三’이라 쓰여 있다)이다. 내제 는 ‘罨溪集’이다. 중국지(中國紙)에 필사되었다.

본문 글씨는 이덕무의 필체와 흡사(恰似)하고, 교정(校正)한 글씨는 연암의 친필이다. 매 작 품 끝에 평어가 있는데 이덕무의 친필이다. ‘엄화계’는 개성 연암협에 있던 시내로 연암이 붙인 이름이다. 1777~78년 연암협에 은거할 적에 지은 12편의 글 모음으로 수록작은 다음과 같다.

35) 아래 ⑫의 󰡔엄화계집󰡕(건)의 표지 우측상단에는 ‘別集二’이라 쓰여있고, 우측 하단에는 ‘共三’이라 쓰여있는 것으로 보아 󰡔엄화계집󰡕은 애초 3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36) 李澤遂의 󰡔奮齋集󰡕(규장각 소장, 필사본 1책)에 실린 「淑人趙氏哀辭」도 동일인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다.

(12)

<그림 5> 󰡔엄계집󰡕(곤)(단국대 연민문고) 첫면 역시 목차의 제목에 권(圈)이 쳐진 작품이 있다.

○「以存堂記」(주인공 薛仲擧), 「晝永簾垂齋記」, 「晩休堂記」,

「竹塢記」, ○「獨樂齋記」, ○「永思菴記」, ○「不37)僧菴銘(幷 序)」, 「琴鶴洞別墅小集記」, 「謝留守送惠內宣二橘帖」, ○「■

38)參奉王君墓碣銘」, 「雲峯縣監崔君墓碣銘」(銘 없음), ○「伯 嫂李恭人墓誌銘」.

마지막에 수록된 「伯嫂李恭人墓誌銘」(1778년 9월)만은 앞 의 본문만 필체가 다르다. 연암의 친필인지 後考를 요한 다.39) 본문 글씨는 이덕무·유득공 등이 구사했던 전형적인 글씨다. 교정의 흔적이 많고, 비점(批點) 및 작품 평이 붙어 있는데 평은 모두 이덕무(친필)의 것이다.

Ⅲ. 󰡔煙湘閣集󰡕 계열본

이제 이하(以下)에서는 박지원이 안의현감 재직시에 만든 소집들을 소개한다. 이 책들은 수록작 및 성격이 비슷하다. 정조(正祖)는 1792년 12월 문체(文體) 문제로 측근 신하들에게 자송문(自訟文)을 짓게 하였고, 그 불똥은 연암의 󰡔열하일기󰡕로 튀었다.40) 정조는 남공철(南公轍)을 시켜 연암에게 편 지를 띄워 한 부의 순정(醇正)한 문자(文字)를 지어 올리라고 하였다. 하지만 연암은 임금이 직접 내 린 명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에 응하지 않았다.(󰡔과정록󰡕 권2 33칙 및 󰡔연암집󰡕 「答南直閣書」 참조) 하지만 연암은 정조에 의해 불시(不時)에 있을지 모를 문집을 올려보내라는 명(命)41)에 대비해서 일 종의 자선집(自選集)을 만들어 놓았다. 나름대로 득의작(得意作)이자 순정작(醇正作)들을 뽑은 셈이다.

게다가 1793년 봄부터 많은 지인(知人)들이 안의현에 놀러왔기에 자연스레 이들로부터 작품 비평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42)

37) 본문의 제목에는 ‘不’자를 ‘髮’자로 수정했다.

38) 목차 및 본문의 제목에 ‘麗陵’이란 두 자를 뭉겠다.

39) 이 작품에서 연암은 스스로를 ‘祗源’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유만주 󰡔흠영󰡕에 줄곧 박지원을 ‘祗’라고 지칭하고 있는 바 드디어 그 내력을 알게 되었다. 박지원은 ‘趾源’과 ‘祗源’을 함께 썼던 것이다.

40) 관련 기록을 유득공도 남겼다. “(전략) 燕巖弱冠善屬文, 名動京師, 旣而, 落拓未第, 隨族兄錦城都尉使燕, 遊熱河而歸, 著日記二十卷, 嘻笑怒罵, 雜以寓言. 其「象記」·「虎叱」·「夜出古北口」·「一日九河」等篇, 極恢奇. 一時士大夫, 傳寫借 看, 數年而未已. 此書, 竟徹九重, 有是聖敎也. 燕巖, 余輩素所周旋, 方其著日記也, 悉削前日所爲文, 意以謂有此記, 則 餘不足傳也. 今在下邑, 巾篋中, 旣無一葉舊藁, 忽欲爲莊語, 烏能滿二十卷! 莊語又未易膾炙, 所待以不朽者, 則殆同準 勅惡詩, 天下狼狽人, 莫如燕巖, 余與懋官, 一場葫蘆.”(󰡔古芸堂筆記󰡕 권3 ‘熱河日記’조)

41) 正祖의 이런 사례는 종종 보인다. 심노숭, 이봉환의 경우 등등.

42) 󰡔과정록󰡕 권2에 보면 1793년 봄 처남 이재성, 사위 이종목, 사위 이겸수, 김기무, 이희경, 윤인태, 한석호, 양상회

(13)

① 󰡔映帶亭集󰡕43)(乾·坤)(1793년 무렵), 필사본(‘燕岩山房’ 版心 絲欄空卷) 각 1책, 단국대 표제는 건·곤으로 다르지만 건책에 현행 󰡔연암집󰡕에 보이지 않는 「映帶亭集序」가 앞에 있 는 것 외엔 수록작은 완전 동일한 본이다. 「燕巖集目錄」이 있으며 본문은 「答南直閣公轍書」 등 총 21편의 산문이 수록되었다. 1770년대 초반 작품부터 만년 안의현감 재직시 작품까지 고루 분포되어 있다. 수록작은 다음과 같다.

″「答南直閣公轍書」, ″「玉璽論」, ″「永思菴記」, ″「文丞相祠堂記」, ′「李忠烈公神道碑銘」,

「洪德保墓誌銘」, ″「金孺人行狀」, 「髮僧菴記」, ″「恭人李氏墓誌銘」, ″「贈白永叔入麒麟峽序」,

″「會友錄序」, 「黃金臺記」, 「弘仁寺記」, ″「獨樂齋記」, 「麈公塔銘」, ″「賀金右相履素書」, ″「癡 菴崔翁墓碣銘」, ″「楚亭集序」, ″「以存堂記」, 「孺人朴氏墓誌銘」, ″「騷壇赤幟引」.

각 작품의 본문에는 주요 구절 권점(圈點) 및 평비(評批)가 있다.(곤책의 목차에만 일부 작 품에 點(″)이 찍혀 있다.) 건책, 곤책 모두 본문은 연암의 필은 아니고, 다만 곤책의 두평(頭 評), 미평(尾評), 협비(夾批) 등은 이재성과 이서구의 친필이다. 건책은 연암 본인이 이를 다시 재정리한 본으로 따라서 건책의 앞에만 「영대정집서」(󰡔연암집󰡕 미수록작)44)를 최종 추가한 것 이다. 건책의 평들은 모두 연암이 친필로 재사(再寫)한 것이다(건책에는 곤책에 들어있지 않은 혜중(惠仲: 韓錫祜의 字)의 평이 「황금대기」 등에 붙어 있다). 곤책의 평이 이재성, 이서구의 친필로 되어 있기에 통행본 박영철 간 󰡔연암집󰡕의 평어들의 주인을 상당수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② 󰡔煙湘閣集󰡕, 필사본(‘燕岩山房’ 版心 絲欄空卷) 零本 각 1책, 序記 부분 실학박물관 소장(69 장)/墓銘 부분 성균관대 소장(32장45))

󰡔煙湘閣集󰡕(序記)는 연암의 서(序) 7편, 기(記) 21편이 실려 있는 정사본(淨寫本)이다. 전체 3책 또는 4책 가운데 영본(零本)이다. 각 작품에 권점(圈點)은 물론 두평(頭評), 협비(夾批), 미평(尾評) 등이 붙어 있다.

등이 안의현에 놀러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이재성은 무려 세 번을 오갔다. 아마 연암의 원고를 들고 서울에 가서 성대중, 이서구, 유득공, 박제가 등의 평어를 또 받았을 것이다. 권2 36조의 안의현에서의 연암 생활 모습(자기 작 품 낭송하고 벗들의 평어 듣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었다고)

43) 󰡔영대정집󰡕은 김문식, 「단국대 소장 연민문고 필사본의 자료적 가치」, 󰡔동양학󰡕 43,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2008.

2.에 소개된 바 있다.

44) 弟昨日, 授兒子關雎章, 得千古大文評矣. 有人焉, 婉如高唐, 翩若洛神, 而臨堂目成, 隔牕心挑, 則此固不可以君子友而 淑女稱矣. 下此而顰齲西施, 塗抹羅敷, 投橘調客, 贈芍謔士, 則尤不足以使人艶動, 貞士邂逅, 幾何其不哇之. 今夫三家 村裏, 老農家, 養得女兒, 二十而嫁, 禮也. 迨永而歸, 時哉, 嫁於十斛麥舍翁兒子, 老農女, 語其德, 則幽閒貞靜, 麥舍 兒, 論其性, 則挈而有別, 若謂之不然, 則實寃矣. 但初沒有寤寐反側, 琴瑟鐘鼓, 極其哀, 極其樂, 顧安見情欲不感. 宴 私不沒, 而不傷, 而不淫, 這文評尤極絶倒, 先生試想, 此前二層, 是何代何等文章, 後一段, 又是何地何人著述. 識此則 文之雅淫醇醨, 古今眞贋. 約略可辨矣.

45) 32장의 뒤에 다른 종이 6장이 한 데 묶였다. 이 6장은 󰡔엄화계집󰡕(건·곤, 단국대본)과 같은 판형이다(中國紙). 연 암 친필 여부는 後考를 요한다. 「麗陵參奉王君墓碣銘」, 「雲峯縣監崔君墓碣銘」(銘 있음), 「伯嫂李恭人墓誌銘」이 필 사되었고, 「孝子贈司憲府持平申君墓碣銘」은 제목만 있고 내용은 누락되었다. 이 작품은 「贈司憲府持平芮君墓碣銘」

(1792년작)인데 誤寫가 있다.

(14)

<그림 7> 󰡔연상각집󰡕 끝의 연암친필 「海印寺唱酬詩序」

<그림 6-1> 󰡔연상각집󰡕(실학박물관) 표지(감색 비단) <그림 6-2> 󰡔연상각집󰡕 목록

책 끝에 붙어 있는 「海印寺唱酬詩序」<그림 7>는 목록에는 빠진 채 연암의 친필로 추기(追記)된 것으로 보아 본서는 이 작품이 지 어진 1795년 9월 이전 안의(安義)에서 정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수록 작품은 다음과 같다.

「초정집서」, 「증백영숙입기린협서」, 「회우록서」, 「족형도위공주 갑수서」, 「홍범우익서」, 「이자후하자시축서」, 「합천화양동병사기」,

「영사암기」, 「담연정기」, 「이존당기」, 「안의현사직단신우기」, 「안 의현려단신우기」, 「백척오동각기」, 「공작관기」, 「하풍죽로당기」, 「독 락재기」, 「夜出古北口記」, 「一夜九渡河記」, 「文丞相祠堂記」, 「黃金 臺記」, 「象記」, 「안의현현사사곽후기」, 「충신증도이공(술원)정려음 기」, 「거창현오신사기」, 「함양학사루기」, 「함양군흥학재기」, 「발승 암기」, 「해인사창수시서」.

󰡔연암집󰡕 내 󰡔연상각선본󰡕의 서(序), 기(記) 부분과 일치하는데, 다만 「야출고북구기」 이하 5편은 원 출전인 󰡔열하일기󰡕에 들어있기 에 박종채가 재편(再編)하면서 󰡔연상각선본󰡕에서는 뺀 것이다.

󰡔煙湘閣集󰡕(墓銘)<그림 8>은 연암의 묘갈명, 묘지명, 신도비명 등 10편을 수록한 것이다. 수 록작은 「癡菴崔翁墓碣銘」, 「洪德保墓誌銘」, 「贈司憲府持平芮君墓碣銘」, 「參奉王君墓碣銘」, 「恭 人李氏墓誌銘」, 「贈弘文館正字朴君墓誌銘」, 「忠烈李公神道碑銘」, 「孺人朴氏墓誌銘」, 「李處士墓 碣銘」, 「麈公塔銘」이다. 역시 󰡔연암집󰡕 「연상각선본」의 묘명(墓銘) 수록작과 그대로 일치한다.

「연상각선본」의 서(書)와 기타 작품들을 수록한 󰡔연상각집󰡕이 한두 책 더 있겠으나 아직 발견

(15)

되지 않았다. 「연상각선본」의 서(書)에는 일부 면천군수 시절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안의현 감 시절 󰡔연상각집󰡕을 만들고 그 직후인 면천군수 시절의 작품 일부를 보입(補入)한 것으로 추 정된다.46)

한편 󰡔煙湘閣集󰡕(墓銘)의 후반부(31장 a-b)에는 다른 필체로 된 文稿補遺目錄과 熱河日記補 遺目錄이 적혀 있다<그림 9>.

<그림 8> 󰡔연상각집󰡕(성균관대) 목록 <그림 9> 󰡔연상각집󰡕(성대본) 내 문고보유목록

文稿補遺目錄에는 「忍齋記」47), 「實窩記」, 「靜存窩記」48), 「灌泉小集記」, 「與人」, 「與觀齋」, 「報 巡使草」, 「上巡使書」, 「醉黙行狀」, 「丁亥草」, 「壬戌草」, 「烟湘偶筆」49), 「書許生事後」, 「士訓」,

「菊花詩軸序」50), 「畵苑序」51), 「用甎說」, 「老賴日記序」, 「廋辭小引」, 「跋辭」(嶺南·湖西), 「尺牘」,

「隨錄」이 적혀 있고, 熱河日記補遺目錄에는 「금료소초」, 「양매시화」, 「천애결린집」, 「열하궁전 기」, 「열하태학기」, 「단루필담」, 「제이사룡문」이 적혀있다. 문고보유목록의 아래에는 “文集 一 千三百四十張 罨畵卷及補遺不計”라는 기록이 있다. 후손이 󰡔연암집󰡕을 정리, 완료하면서 남긴 글임을 알 수 있다. 문집 필사에 1,340장의 종이가 들었는데 엄화권(罨畵卷)과 보유(補遺)는 제

46) 󰡔과정록󰡕 권4(전게 󰡔역주과정록󰡕 287~288쪽)에는 竹下 金箕書(1766~1822)가 率更(세자익위사를 말함)으로 서울에 올라와 박종채를 만나고는 湖右(충청남도 지역)에서 유행하는 연암의 글은 모두 읽었는데 全集은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박종채는 ‘煙湘諸集’을 빌려주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김기서가 세자익위사 侍直에 임명된 것은 1812년의 일이 다(金履陽 찬, 「竹下金君墓誌銘」, 󰡔梧石集󰡕 上). ‘煙湘諸集’이 문제인데 ‘연상각집 여러 책’인지, ‘연상각집 및 기타 문집’인지 불분명하다. 필자의 생각은 前者쪽이다. 前者로 볼 경우 이 시기까지 박종채의 󰡔연암집󰡕 편찬 작업은 그 리 많이 진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건 박종채는 부친의 문집 중 󰡔연상각집󰡕을 대표로 간주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47) 「答仲玉」에 이 글에 대한 언급이 있다. 아마도 중옥의 청으로 지어주려 했던 글인 듯하다.

48) 󰡔겸헌만필󰡕(곤)에 글의 일부가 메모처럼 적혀있다. 박남수의 요청으로 지으려 했던 글이다.

49) 󰡔면양잡록󰡕(단국대 소장)에 수록되어 있다.

50) 󰡔연암집󰡕 권7 「종북소선」에 「제우인국화시축」으로 수록되어 있다.

51) 󰡔연암집󰡕 권7 「종북소선」의 서화제발인 듯하다.

(16)

외한 양이라는 것이다. 엄화권은 박지원이 연암협에 있을 적에 남긴 잡록찰기(雜錄札記)인듯하 다. 메모의 형태도 많고, 난초(亂草)의 형태로 많은 양이 남아 있어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③ 󰡔雲山萬疊堂集󰡕, 필사본(‘燕岩山房’ 版心 絲欄空卷) 1책(90장), 실학박물관 소장.

記(14편), 序(3편), 書(9편), 墓銘(6편), 事狀(1편) 등 33편의 연암 산문이 실려 있다. 역시 안 의현에서 정리, 필사된 책으로, 󰡔煙湘閣集󰡕과 비슷한 성향을 보이는데 󰡔연상각집󰡕에서 초(抄)된 듯 하다. 이 책은 이본(異本)이 1종 더 있다.52)

④ 󰡔百尺梧桐閣集󰡕 필사본(‘燕岩山房’ 版心 絲欄空卷) 건·곤 2책, 단국대 소장.

乾冊(64장)에는 記(21편), 狀(「김유인사장」 1편), 傳(「열녀전」 1편), 論(「옥새론」 1편), 引(「소 단적치인」 1편), 序(「海印寺唱酬序」 1편)을, 坤冊(66장)에는 序(6편), 書(9편), 墓誌銘(3편), 墓碣 銘(4편), 神道碑銘(1편) 등의 문체를 싣고 있다. 건·곤 도합 49편이다. 이 책(건책) 역시 끝에

「해인사창수서」가 붙어 있는데 이 작품은 목차에도 없고 앞의 글씨와는 다른 연암의 친필로 쓰여 있어 책이 성책(成冊)된 뒤에 여백지에 추기(追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책 역 시 「海印寺唱酬序」가 지어진 1795년 9월 이전에 안의현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체 목차는 다음과 같다.(몇 작품에는 제목에 、가 찍혀 있다) 본서에도 평어 및 비점이 많다. 평어 가운데 각 작품에 있는 마지막 두 필체는 󰡔연암집󰡕에는 수록되지 않은 평어이다.53)

건책:目錄 、「陜川華陽洞丙舍記」, 「永思菴記」, 「澹然亭記」, 、「以存堂記」, 、「安義縣社稷壇神 宇記」, 、「安義縣厲壇神宇記」, 、「百尺梧桐閣記」, 、「孔雀館記」, 、「荷風竹露堂記」, 、「獨樂齋記」,

、「夜出古北口記」, 、「一夜九渡河記」, 、「文丞相祠堂記」, 、「黃金臺記」, 、「象記」, 、「安義縣縣司祀 郭侯記」, 「忠臣贈大司憲李公述原旌閭陰記」, 「居昌縣五愼祠記」, 「咸陽郡學士樓記」, 「咸陽郡興學 齋記」, 、「髮僧菴記」, 目錄 「金孺人事狀」, 「烈女傳」, 、「玉璽論」, 、「騷壇赤幟引」, 「海印寺唱酬序」

(목록엔 없는 작품임)

곤책:「楚亭集序」, 「贈白永叔入麒麟峽序」, 「會友錄序」, 「族兄都尉公周甲壽序」, 「洪範羽翼序」,

「李子厚賀子詩軸序」, 「賀族姪拜相因論寺奴書」, 「賀金右相書/第二書」, 「答巡使論玄風縣殺獄元 犯誤錄書」, 「答巡相論密陽金貴三疑獄書」, 「答巡使論咸陽張水元疑獄書」, 「答巡使論密陽疑獄書」,

「答論賑政書」, 「答大丘判官李侯端亨論賑政書」, 「答南直閣書」, 「贈弘文館正字朴君墓誌銘」, 「恭人 李氏墓誌銘」, 「洪德保墓誌銘」, 「癡庵崔翁墓碣銘」, 「李處士墓碣銘」, 「贈司憲府持平芮君墓碣銘」,

「參奉王君墓碣銘」, 「嘉義大夫行三道統制使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諡忠

52) 함양에 사는 개인이 소장한 것으로 경성대 김철범 교수께서 제보해 주시고 자료도 보내주셨다. 이 자리를 빌어 감 사드린다. 이 책이 함양에서 轉寫되었다는 데서 안의현감 시절 만든 것임을 더욱 분명히 알려준다. 이 함양본에는 총 41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후손가장본에 수록된 「홍범우익서」가 빠지고, 「백척오동각기」, 「공작관기」, 「하풍죽로 당기」, 「답이감사적중서」, 「呈渭城使君」, 「이처사묘갈명」, 「충신증도헌이공술원정려음기」, 「함양학사루기」, 「홍양 호상소」가 더 추가되어 있다. 「정위성사군」과 「홍양호상소」는 연암의 글이 아니다.

53) 필자의 󰡔백척오동각집󰡕 해제(단국대 연민문고 해제)에 모두 제시하였다.

(17)

烈李公神道碑銘幷序」

⑤ 󰡔荷風竹露堂集󰡕 필사본(‘燕岩山房’ 版心 絲欄空卷) 零本 각 1책 단국대 소장(111장)/성균관대 소장(101장)

이 책 역시 󰡔연상각집󰡕, 󰡔백척오동각집󰡕과 유사한 성격의 책이다. 記 16편(단국대본 17편54)), 書 9편, 序 6편, 引 1편, 墓銘 7편55), 事狀 1편, 論 1편 등 총42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단국대(표지 ‘乾’)와 성균관대(표지에 ‘地’라고 쓰인 것을 ‘坤’으로 고쳐 썼음)에 소장되어 있는 데 두 본은 완전 동일본이다. 성균관대본의 목차는 연암 친필로 추정된다. ‘하풍죽로당’은 안의 현아에 붙인 이름이고, 서(序) 가운데 1795년작인 「해인사창수시서」가 없는 점, 서(書) 가운데 면천군수 시절 지은 작품이 없는 점 등으로 보아 1795년 이전 안의현에서 만든 책이 분명하다.

⑥ 󰡔三洞集󰡕, 필사본(‘燕岩山房’ 版心 絲欄空卷) 1책, 실학박물관 소장.

표제 ‘三洞集’의 삼동은 안의현의 화림동, 심진동, 원학동 삼동(三洞)을 뜻한다. 제목대로 안 의현감 때 모은 글로 현감 재직시 지은 글이 대부분이고 그 이전에 지은 글 일부 등 총20편(묘 도문 3, 序 3, 記 7, 書 7)이 실려 있다.

「贈司憲府持平芮君墓碣銘」, 「族孫贈弘文正字朴君墓誌銘」, 「參奉王君墓碣銘」, 「이자후하자시 축서」, 「족형도위공주갑수서」, 「홍범우익서」, 「합천화양동병사기」, 「안의현려단신우기」, 「거창 현오신사기」, 「안의현사직단신우기」, 「함양군흥학재기」, 「안의현현사사곽후기」, 「담연정기」, 「答 大丘判官李侯端亨論賑政書」, 「答丹城縣監李侯論賑政書」, 「賀族姪宗岳拜相因論寺奴書」, 「答巡使 論玄風縣殺獄元犯誤錄書」, 「答巡相論密陽金貴三疑獄書」, 「答巡使論咸陽張水元疑獄書」, 「答巡使 論密陽疑獄書」

⑦ 󰡔流觴曲水亭集󰡕(乾) 필사본(‘燕岩山房’ 版心 絲欄空卷) 1책, 단국대 연민문고 소장.

이 책은 乾坤 2책으로 이루어진 책이나 건책과 곤책56)의 성격이 많이 다르다. 건책은 󰡔연상 각집󰡕 계열로 볼 수 있다. 수록작은 다음과 같다.

「楚亭集序」, 「贈白永叔入麒麟峽序」, 「會友錄序」, 「賀族姪拜相因論寺奴書」, 「答丹城縣監李侯 論賑政書」, 「答大邱判官李侯論賑政書」, 「賀金右相書, 附 第二書」, 「答南直閣公轍書」, 「答巡使論 玄風縣殺獄元犯誤錄書」, 「答巡使論密陽疑獄書」, 「答巡相論密陽金貴三疑獄書」, 「答巡使論咸陽張

54) 단국대본엔 「함양군학사루기」가 추가되어 있다. 목록에도 이 작품 제목을 부전지로 끼웠다.

55) 성균관대본은 목록에 있는 「홍덕보묘지명」이 본문엔 누락됨.

56) 곤책에는 잡문(襍文), 소차(疏箚), 잡록(雜錄), 호구수(戶口數), 절학약방(絶瘧藥方), 대물건기(貸物件記), 조묵요방(造 墨要方) 등이 적혀 있다. 저자미상의 「冠者五六童子六七廊記」로부터 시작하여 박지원의 「洪範羽翼序」, 박제가의 「社 稷壇記」, 「厲壇記」, 「比屋希音頌幷引」, 홍양호의 「錢弊疏」, 이희경의 󰡔造墨要方󰡕, 신돈항의 「烈婦朴氏行錄」, 윤광석 의 「烈婦朴氏傳」, 이면제의 「朴烈婦傳」, 저자미상의 「我東異人」, 강세황의 「題仙玉影」, 박지원의 「答金參奉書」(答金 季謹序), 桂山寓人의 「詩社移文」, 미상 「戶口」, 조진택의 「嶺伯辭職疏」, 남공철의 「敬述孝子贈持平芮公節孝一編贈 呈嗣孫秀謙先輩」, 홍대현의 「題金陵芮孝子行錄後贈其孫益之」, 심염조의 「敬題孝子芮持平行錄後」, 강세황의 「題仙玉 小影」(題跋), 「題仙玉小影」, 「弼雲臺看杏花」, 미상 「貸用錄」, 미상 「肥齊勝金丸 瘧疾劫用方」, 미상, 영남인물에 대 한 메모 및 잡록 등이 실렸다.

(18)

水元疑獄書」, 「痴菴崔翁墓碣銘」, 「洪德保墓誌銘」, 「參奉王君墓碣銘」, 「恭人李氏墓誌銘」, 「贈弘 文館正字朴君墓誌銘」, 「象記」, 「黃金臺記」, 「居昌縣五愼祠記」, 「麈公塔銘」, 「陜川華陽洞丙舍記」,

「安義縣厲壇神宇記」, 「安義縣縣司祀郭侯記」, 「安義縣社稷壇神宇記」

본서에 수록된 글 중에서 창작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작품은 「초정집서(楚亭集序)」이고, 가장 후기의 작품이 「합천화양동병사기(陜川華陽洞丙舍記)」 등으로 1796년에 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본서는 연암이 안의에서 현감을 마치던 1797년 이전에 지은 작품을 선별하여 만든 소집임을 알 수 있다. 앞에 ③󰡔雲山萬疊堂集󰡕 역시 연암이 안의현감 때 작품을 선발한 것인데, 본서와 비교 해 보면 󰡔운산만첩당집󰡕에 수록된 작품이 본서 건책(乾冊)에 모두 수록되어 있고, 「공인이씨묘 지명(恭人李氏墓誌銘)」,「주공탑명(麈公塔銘)」 등과 같은 작품이 본서에 더 수록되어 있다는 점 이 다르다. 또한 󰡔연상각선본󰡕의 글과 비교해보면 본서의 글 중 곤책(坤冊)의 「답김참봉서(答金 參奉書)」만 제외하고 모두 󰡔연상각선본󰡕에 수록되어 있다. 「답김참봉서(答金參奉書)」는 󰡔연암집󰡕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에 수록되어 있다. 수록작 가운데 비평이 붙은 것은 「痴菴崔翁墓碣銘」,

「安義縣厲壇神宇記」, 「安義縣縣司祀郭侯記」, 「安義縣社稷壇神宇記」 네 편이다. 다른 본에 실린 비평과 차이가 있다.

⑧ 󰡔沔陽集󰡕 필사본(‘燕岩山房’ 版心 絲欄空卷) 4권 3책, 한양대 소장57).

표제는 ‘沔陽集’, 내제는 ‘燕岩集’이다. 제1책 권1 記 21편, 제2책 권2 書 20편, 제3책 권3 墓 文 8편, 권4 序 6편58)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 55편이 수록되었다.

<그림 10-1> 󰡔면양집󰡕(한양대본) 표지 <그림 10-2> 󰡔면양집󰡕 권1 목록 57) 자료를 복사해주신 박수밀 교수께 감사드린다.

58) 󰡔연상각선본󰡕의 「증백영숙입기린협서」가 누락되었다.

참조

관련 문서

물의 수소는 다른 물분자의 산소와도 결합되어 있다 (이 미 토양입자 표면에 흡수된 물분자를 포함하여).. 서로 좋아하는 분자의

於二零二一年六月三十日,本集團之總借款包括銀行及其他借款及優先票據、關聯公司貸款

Examination of such materials led to the conclusion that Pak Chi-wŏn originally intended to have the five texts including “ Yangmaesihwa” in Yŏrha ilgi

신입 회원의 기록이 나타내는 그래프가 기존 회원의 기록을 나타내는 그래프보다 왼쪽으로 치우쳐 있으므로 신입 회원 의 기록이

시가 이외에도 조선 문인과 최성환 본인이 쓰는 시가도 함께 수록됐다는 것을 보면 최성환은 조선 시가의 수 준을 높이 평가하려고 한 동시에 중국 시가와

2008 年2月

「自分の体を神に献げなさい」とありま す。 「何だキリスト教は人身御供のように自 分をささげなさい。と言うのか、そんなこ 日本基督教団 千代田教会 名誉牧師 松野俊一

食少, 腹脹, 腹中冷痛, 喜溫喜按, 四肢不溫, 大便稀薄, 形寒, 口淡不渴, 肢體浮 腫, 小便不利, 女性白帶淸稀量多, 舌質淡嫩, 苔白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