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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노트09] 과학혁명의 개념과 그에 대한 비판 [학습목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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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트09] 과학혁명의 개념과 그에 대한 비판

[학습목표]

1. 과학혁명과 계몽사상과의 관계에 대해 알아본다.

2. 버터필드의 과학혁명 개념에 대해 알아본다.

3. 쿤의 패러다임 변화에 대해 알아본다.

[학습과제]

1. 서양 근대과학이 18세기에는 계몽사상이라는 합리적인 사상의 기초를 마련했고 19세기에 들어오면 산업혁명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보자.

2. 버터필드가 강조하고 있는 과학혁명의 중요성, 즉 과학혁명을 인류사의 최고의 사건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3. 쿤은 자자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학자로서 특별히 참신성이나 독창 성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다는 주장에 대해 알아보자.

4. 17세기의 과학발전을 하나의 통합되고 완결된 역사적 사건으로서 ‘과학 혁명’으로 부르는 것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보자.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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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의 개념과 그에 대한 비판

1. 천재들의 세기와 ‘과학혁명’

17세기를 서양사에서는 보통 ‘천재들의 세기’라고 부른다. 수많은 천재들이 등장하여 이 시기 서양의 학문적 수준을 한 단계 높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는 특히 자연과학자들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16세기의 코페르니쿠스에서부터 시작하여 17세기에는 브라헤, 케플러, 갈릴레 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하비, 보일, 뉴턴 등 수많은 과학자들이 등장하고 이들에 의해 천문학, 수학, 물리학, 해부학, 생리학 등이 급격하게 발전한 것 이다. 또 18세기에는 라부아지에, 프리스틀리 같은 사람에 의해 화학이 뒤늦 게 이에 동참한다.

특히 뉴턴은 이 모든 성과를 하나로 종합하여 유럽의 자연과학을 새로운 단계 로 진전시켰다. 중세를 지배했던, 지상과 천상의 원리가 다르다는 아리스토텔 레스의 전통적인 이론을 무너뜨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세계와 우주가 하나 의 수학적인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와 같은 것으로 믿게 만들었기 때문이 다.

그 당시에는 인간이 만든 가장 복잡한 기계가 시계였으므로 사람들은 이 우주 를 거대한 시계와 같은 구조를 가진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유럽인들은 이 제 세상 만물이 어떤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기계론적 세 계관’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렇게 17세기에 기초를 다진 서양 근대과학은 18세기에는 계몽사상이라는 합리적인 사상의 기초를 마련했고 19세기에 들어오면 산업혁명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서양 근대과학은 유럽 물질문명 발전에 큰 기 여를 했을 뿐 아니라 유럽의 세계 지배를 달성하게 하는 데도 근본적인 요인 이 되었다. 17세기의 과학 발전이 서양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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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린 화이트,『중세의 기 술과 사회변화』, 1962 이다.

이런 이야기는 17세기 과학발전을 ‘과학혁명’으로 규정하여 높이 평가하고 근 대에 있어 서양의 우월을 자연과 세계에 대한 과학적, 합리적인 인식의 결과 로 보는 서양 학자들의 일반적인 주장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특히 ‘과학혁명’

은 짧은 시간 안에 유럽 자연과학에 일대 변화를 야기했다고 생각하므로 지난 반세기 동안 과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근대 유럽과학의 발전에 대한 이런 설명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유럽중 심적인 것으로 상당한 문제를 갖고 있다.

2. ‘과학혁명’과 유럽중심주의

서양 근대문명의 발전과 과학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많은 서양학 자들이 지적해 왔다. 사실 이 둘을 연결시키는 것은 근대에 있어 서양의 우월 을 합리화하는데 매우 편리하다. 서양은 과학혁명이 있어서 발전했고 동양에 는 그런 것이 없어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기 쉽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과학혁명이 서양의 우월을 가져오는 데 본질적인 역할을 했 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넘어서서 서양과학이 중세시대에 도 다른 곳에 비해 우월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도 있다.『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를 쓴 린 화 이트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그는 16세기에 유 럽이 앞선 것은 9세기에 이미 유럽의 농업기술이 세계의 다른 지역을 앞섰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다. 또 유럽은 8세기에는 군사기술로, 11세기에 는 공업기술로 다른 지역을 모두 앞섰다는 것이 다.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있었 던 1950년대식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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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많은 서양학자들은 동양에서는 수학이 발달하지 못했으므로 논리적인 사고가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과학이 발전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서양 에서는 ‘그리스의 지적 사고의 유산이, 무엇보다 논리학과 논쟁을 통한 합리 적인 대화와 의사결정이 그 후의 서양의 지적 발전의 길을 마련했다’고 주장 한다. 이미 그리스 시기부터 달랐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인도나 중국, 이슬람 문명에서 과학이 상당히 발전했다는 사실과 일부 지역에서는 13, 14세기까지 서양을 능가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슬람 과학이 14세기까지 유럽과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 려진 사실이다.

중국과학사를 폭 넓게 연구하여 중국과학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데 크게 기여 한 조셉 니덤 같은 사람은 중세 시대는 물론 15세기까지 중국 과학이 우월했 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1644년까지는 중국과 유럽 과학 사이에 큰 차이가 없 었다고 주장한다. 차이는 그 후에 생겼다는 것이다.

이들은 아시아 과학이 근대과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서양에서만 그렇게 된 것을 사회경제적, 문화적, 제도적인 여러 차이의 결과로 본다. 즉 서양에서만 근대과학이 발전한 것은 서양사회의 여러 특징들과 법, 종교, 철학, 신학 등 서양의 여러 문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서양에서의 중세대학의 발전, 자유로운 연구 분위기의 존재, 중앙집권적 관료 제의 결여 등 온갖 주장을 다 편다. 로버트 머튼 같은 사람은 그 원인을 프로 테스탄티즘과 관련시킨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세계관 안에서 과학과 지식활동 에 대한 어떤 유의미성을 찾아야 했다는 것이다. 이는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 주의 발전을 연결시키는 베버의 테제를 과학에 적용한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 유럽과학이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 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손쉬운 주장들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이슬람과 학이나 중국과학 등 비유럽과학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으며 근대 유럽인 의 독창성을 과장하여 유럽과학 발전의 실상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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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근대의 어떤 중요한 역사적 사실에건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이려 하는 것은 20세기 후반 서양 역사학자들의 특유한 태도이나 이런 주장들 가운데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많다. 17세기 ‘과학혁명’을 통해 근대과학과 관련한 이 문제에 한번 접근해 보자.

3. 버터필드와 과학혁명

과학혁명이라는 말은 요즘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하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 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부터이고 그것을 일반화시키는 데 성공한 사람 은 영국 역사학자 허버트 버터필드이다. 그가 1949년에 낸『근대과학의 기원: 1300-1800』이라는 책이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는 과학사가가 아니라 일반 역사학자로『휘그역사학』같은 유명한 책도 저 술한 인물이다.

그는 ‘과학혁명’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데 좀 길기는 하나 그의 글을 인용해보자.

그러한 혁명이 중세뿐 아니라 고대 세계의 과학의 권위를 뒤집어 놓 았기 때문에 ⋯ 기독교가 일어난 이래의 모든 것의 빛을 잃게 하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단막극 정도로, 즉 중세 기독교의 체제 내부 에서 서로 자리바꿈한 정도의 사건으로 격하시키고 말았다. 과학혁 명이 물질계의 전모 및 인간생활 자체의 구도를 바꾸어 놓는 한편 정신과학의 탐구에 있어서까지 인간의 사고 습성을 변화시킨 이래, 그것이 근대세계 및 근대정신의 진정한 기원으로서 너무나 큰 모습 을 드러내고 있으므로 관습적인 유럽사의 구분이 시대착오적이거나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문명사에서 있어서의 이 새로운 장이 진정으로 시작된 것은 1660년’이며 ‘그리스도교의 대두 이래 역사에 있어서 이와 비교될 만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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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가 있는 다른 이정표는 아무것도 없다’고 이야기할 정도이다. 과학혁명 을 인류사의 최고의 사건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사건에 ‘혁명’이라는 정치적 비유를 사용할 때 근본적인 문제가 생긴다. 정치에서 말하는 혁명이 ‘갑작스럽고 급격하고 완전한 변 화’를 의미하며, 그리하여 과거와의 단절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갖고 있다 면 그런 ‘과학혁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터필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6, 17세기에 중점을 두기는 하지만 그 시간대를 1300-1800년의 500년으로 늘였다. 그러나 500년이 란 긴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도저히 혁명이라고 말할 수 없다.

버터필드 이전에 과학혁명 개념을 주장한 사람들도, 코페르니쿠스의 책이 나온 1543년에서 뉴턴의 책이 나온 1687년까지의 144년을 이 기간 대에 포함시키나 144년이라 해도 이미 짧은 기간 안에 일어난 급격한 변화라는 의미는 상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화학 같은 분야는 천문학이나 물리학보다 훨씬 늦게 18세기말에나 발전했으니 이를 포함하여 혁명이라 고 하기는 더 어렵다.

4. 쿤의 패러다임 변화

1962년에『과학혁명의 구조』를 써서 큰 인기를 모은 토마스 쿤(T. Kuhn) 의 견해도 별 다를 것이 없다. 사실 쿤은 과학혁명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자기 나름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하여 20세기 후반에 과학사 붐을 일으키 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며 과학사 지식을 일반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쿤이 처음 사용한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요즘 과학자뿐 아니라 일 반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일반화되었다. 패러다임이 과학뿐 아니라 사회 과학, 예술사, 신학 등 일반 학문세계에서 ‘생각의 틀’ 정도로 흔하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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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쿤의 저서, <과학혁 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1962)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의 영향이다.

실제로 그 개념은 매우 복잡하고 넓어서 어 느 과학 분야에서 기본이 되는 이론과 법칙 들 뿐 아니라 그 내용을 이루는 과학지식, 그것에 사용된 개념들을 포함한다. 이외에 도 과학자 사회가 공유하는 과학의 방법, 가치, 믿음, 습관까지도 포함한다.(김영식,

『과학, 역사 그리고 과학사』, pp.177-8)

그러나 자자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학 자로서 특별히 참신성이나 독창성을 가졌다 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알렉상드르 코이레 와 버터필드 같은 사람들로부터 배운, 과학 에서의 발전이 점진적이 아니고 급격하고 단절적으로 나타나는 변화라는 관점을 보다 포괄적으로 또 체계적으로 제시했을 뿐이 다.

그는 과학에서 진정으로 창조적인 개념이나 이론을 성장시키는 것은 ‘혁 명’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래도 그것들은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보았다. 대부 분의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기존에 받아 들여져 온 과학인 ‘정상(正常)과 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과학자들로부터 고립된 일부의 천재들이 반기를 들게 되 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전문가들이 그 뒤를 따르면서 혁명적인 뒤집힘(顚覆)에 의해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이 해체되고 새로운 패 러다임이 확립된다. 이 과정이 바로 과학혁명이라는 것이다. 17세기의 과 학혁명은 쿤에 의하면 전형적인 패러다임 혁명이다.

이런 과학혁명의 개념은 홀(A. Hall), 웨스트폴(R. Westfall) 등 여러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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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턴의『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1687) 들에 의해 계속 주장되며 아직까지도 이 시기 과학발전에 대한 주된 해석 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웨스트폴 같은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의 결별이야 말로 과학사에서의 불연속성을 보여주는 주된 사건으로 이로 인 해 발전한 신과학은 전통적인 자연철학과는 질적으로 달라졌다고 주장한 다.

5. 새로운 도전

그러나 이런 전통적인 주장은 최근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돕스(B. J. T. Dobbs)는 혁명이 갑작스럽고 과격하고 완전한 변화 라면 과학혁명은 이런 특징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코페르 니쿠스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서서히 이루어졌거니와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와의 결별도 완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케플러는 피타고라스주의에 몰두해 있었고 점성술사였다. 따라서 그가 수학적인 원리 를 추구하기는 했으나 근대적인 천문학자로 보기는 어렵다. 또 가장 늦은 시기의 인물 인 아이작 뉴턴(1642-1727)도 결코 근대 과학자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한 인물은 아 니다. 그가 18세기까지 살았으나 그에게 있 어 주된 관심사는 그가 명성을 얻은 물리학 이나 수학이 아니라 신학(神學)과 연금술이 었다.

이에 대해 웨스트폴은 뉴턴이 오늘날 기억 되는 것은 물리학, 광학, 수학 때문이지 신 학이나 연금술 때문은 아니라고 반론을 편

다. 웨스트폴의 주장은, 그들에게 중요한 점이 있다면 그들이 당시 어떻게 생각했느냐가 아니고 그것이 가져온 후대의 발전이라는 측면이다.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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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인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공헌을 한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다 시 말하자면 그들의 업적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남아 오늘날의 과학적 사고 방식을 만든 측면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대 과학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을 강조하여 평가한다면 그 이외의 것은 경시되거나 무시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런 태도가 17세 기 과학자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는 태도가 아님은 물론이다.

그들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갖고 있던 생각의 전제와 가정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 그들의 업적 전체를 놓고 그것이 어떤 성격을 가 진 것인지 밝힐 필요가 있다. 17세기 과학을 근대적인 과학으로 받아들이 기 위해서는 그런 검증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제이콥(M. Jacob) 같은 사람은 돕스의 의견을 받아들여 보다 종합적인 견 해를 제시하고 있다. 과학혁명은 17세기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18세기의 자연철학자(이 당시만 해도 과학이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았고 과학자들은 자신을 자연철학자로 불렀다. 과학(science)이라는 말은 19세기부터 사용 된 것이다)들이 뉴턴의 업적 가운데에서 신학과 연금술을 버리고 물리학과 수학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웨스트폴의 주장보다 더 설득력이 있음은 물론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보면 17세기의 과학발전을 하나의 통합되고 완결된 역사적 사건으 로서 ‘과학혁명’으로 부르는 것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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