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안01] 다원주의(pluralism)와 예술의 종말(the End of Art)
[학습목표]
1. 단토의 예술종말론과 그 의미에 대해 알아본다.
2. 다원주의 시대의 예술의 정체성과 특질의 문제에 대해 알아본다.
3. 모더니즘 내러티브에 대해 알아본다.
[주요용어] 다원주의(pluralism), 예술의 종말(the End of Art), 예술계(artworld), 내 러티브(narrative)
[학습과제]
단토가 “역사-이후”의 예술, 즉 종말 이후의 시기의 예술은 더 이상 가야할 특정한 내적인 방향이 없는 자유로운 상태의 예술이라고 진단한다. 이 시기가 바로 무엇이 든지 예술이 될 수 있는 시기, 즉 다원주의 시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 토가 오늘날이 예술의 종말 상태이며 더 이상 가야할 특정한 내적인 방향이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
[개관]
다원주의와 예술의 종말
오늘날의 예술은 이전의 예술과는 매우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기존의 장르의 구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매체의 예술이 등장했고, 기존의 다양한 장르의 매체가 결합하여 지금까지와는 다른 효과를 창출하는 예술이 등장했다. 또한 오늘 날에는 일상의 사물과 전혀 구분할 수 없는 작품들, 기존 작품의 일부를 차용한 작 품들 그리고 노골적으로 특정한 사회적 이념을 담고 있어 포스터와 구분이 안 되는 작품들이 예술로서 등장하고 있다. 더욱이 예술적 가치라고 여기던 미 혹은 미적
경험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채 개인적인 특이한 경험을 제공하는 대상들도 예술이라 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한마디로 오늘날은 무엇이든지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시기이다.
오늘날의 예술이 난해하다고 하는 이유 중 상당 부분은 이러한 다양성에 기인한 다. 오늘날은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뒤샹의 「샘」에서 보듯이 일상의 사물과 지각적으로 동일하게 생긴 대상이 예술작품으로 등장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지각적 성질만 가지고는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지각 적 성질만을 통해서는 훌륭한 가치를 지닌 작품을 찾아낼 수 없다. 또한 오늘날에 는 작품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기가 어려워졌다고 할 수 있다. 이전의 예술 작품의 경우, 그것이 재현적인 작품이든 추상적인 작품이든 그 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 재현적인 혹은 표현적인 성질을 통해 그 작품의 의미를 추측하고 해석할 수 있었지만 레디메이드, 미니멀리즘 작품 혹은 첨단 디지털 매체 등과 같이 작가의 개입 혹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작품의 경우에는 이러한 추측이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예술상황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입장에서 접근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다양 한 유형의 예술 중에서 일부의 예술만이 진정한 예술이고 나머지는 저급 혹은 가짜 예술이라고 진단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의 이론들은 예술의 고유하고 유일한 가치 혹은 목표가 있다고 주장하고 이것을 기준으로 예술과 비예술을 구분한다. 이 이론 들은 자신의 예술 정의에 속하지 않는 작품들을 예술의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기 때 문에 다른 문화권에 속해있는 많은 작품들에 대해 예술의 자격을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두 번째는 오늘날의 예술 상황을 더 이상 하나의 진정한 예술 사조나 양 식을 주장할 수 없는 상황, 즉 모든 사조가 동등하게 가치가 있다는 의미에서 다원 주의 상황이라고 진단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전자의 입장과 달리 오늘날의 예술 상황에 대해 진정한 예술을 찾기 어려운 위기상황이 아니라 더 이상 하나의 목표를 추구할 필요가 없는 낙관적인 상황이라고 보고 있다.
아서 단토(Arthur Danto)는 오늘날의 예술 상황을 다원주의로 규정하고, 그 근거 로 “예술의 종말”을 주장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예술종말론은 예술의 목표가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 도래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예술종말 론과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전의 종말론들은 헤겔에서 볼 수 있는 것처 럼 예술의 신성한 과업의 성취가 불가능한 상황으로 설명하든 예술의 능력의 고갈 로 설명하든 예술의 위기 상황을 지적하기 위해서 주장되었다. 이에 반해 단토는 오늘날의 다원화 상황을 옹호하기 위하여 예술의 종말을 주장하고 있다. 그에게 있 어서 예술의 종말은 비관적인 상황이 아니라 예술이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제 자리를 찾게 된 낙관적인 상황을 지적하기 위해서 주장되었다. 또한 그의 이론 은 오늘날의 예술의 다양화 현상으로 인해 새롭게 제기된 예술의 정체성, 평가 그 리고 비평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단토가 예술의 종말을 선언할 때 의미하는 바는 오늘날에 이르러 하나의 예술 실 천의 복합체가 다른 실천의 복합체에 자리를 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주장
하는 것은 예술작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도 아니고 예술이 내적 으로 소진되어 더 이상 밀고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비평적 판단 도 아니다. 그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은 하나의 이야기, 즉 내러티브가 끝났다는 것이다. 서구에서 예술의 개념이 출현한 이래 1960년대 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예 술의 역사를 발전하는 거대한 내러티브로 파악할 수 있는데, 이 내러티브가 종말에 이르렀고 이제는 “역사-이후” 시대에 도래했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이후”의 예 술, 즉 종말 이후의 시기의 예술은 더 이상 가야할 특정한 내적인 방향이 없는 자 유로운 상태의 예술이라고 진단한다. 이 시기가 바로 무엇이든지 예술이 될 수 있 는 시기, 즉 다원주의 시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토가 오늘날이 예술의 종말 상태이며 더 이상 가야할 특정한 내적인 방향이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는 예술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객관 적인 역사적 구조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뵐플린의 말처럼 모든 것이 어떤 시대 에나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특정한 예술 생산을 가능하게 만드는 역사적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예술의 종말 이후의 시기는 그 이전의 시기와는 다른 역사 적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마치 한 시대가 끝나고 다른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느낄 정도로 불연속성을 경험하게 만든다고 단토는 주장하고 있다. 종말 이후의 시 대는 이전의 시대와 달리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는 객관적인 예술 실천의 구조 로 이루어져있다. 이러한 역사적 불연속성을 의식하게 만든 작품이 바로 앤디 워홀 의 「브릴로 상자」이다.
그렇다면 워홀의 「브릴로 박스」의 어떤 특성이 단토로 하여금 불연속성을 의식하 게 만들었는가? 그는 「브릴로 상자」가 “단순한 실제 실물”, 즉 슈퍼마켓에서 사용 하고 있는 브릴로 상자와 지각적 측면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고,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예술작품이 되는 것은 지각적 측면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당신이 예술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한다면 감각 경험으로부터 사고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이다.” 이 작품의 등장을 통해 오늘날에는 일상의 사물과 눈으로 식별 불가능한 예 술작품이 원리적으로 있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예술작품으로 보일 수 있는 특별한 방식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사건은 눈으로 지각할 수 있는 특징만으로는 더 이상 예술의 정체성과 특질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이제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예 술의 본질을 파악할 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또한 「브릴로 상자」의 등장은 시대마다 상이한 예술에 대한 믿음 체계가 있고, 그것들이 변화한다는 것을 의식하게 만들었다. 이 작품의 등장을 통해 1960년대 이후에 와서는 그 이전의 시기와는 다른 믿음 체계, 즉 무엇이든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믿음 체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1964년 의 「브릴로 상자」는 그것이 어느 하늘 아래에서나 실제의 브릴로 상자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오직 1960년대 맨하탄의 하늘 아래에서만 그것은 예술작품이 된다는 것
이다. 이 사건은 각 시대마다 각각 다른 ‘예술’ 개념 혹은 예술에 대한 다른 믿음의 체계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만들었다. 만약 1860년대에 어떤 작가가 「브릴로 상 자」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예술작품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1960년대에 「브릴로 상자」가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의 예술 상황과 연결하여 설 명될 수 있다. 1950년대 전후 물감들의 향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추상표현주의가 미국의 예술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미국의 예술 시장은 그 뒤에 팝 아트, 즉 상품 이미지든 스타 이미지든 익숙한 이미지들을 물감의 흔적처럼 화려하게 배열하고 있 는 팝 아트의 등장을 막을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팝 아트 이후, 워홀의 「브릴로 상자」처럼 일상의 사물의 이미지와 구분할 수 없는 다양한 작품들이 등장하게 됨으 로써 이제는 무엇이든지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단토는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예술계”(artworld) 즉, “한 대상을 예술작품으 로 식별하기 위해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무엇, 곧 예술사의 지식과 이론에 해 당하는, 예술계”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한 대상이 예술작품인지 알기 위해서는 눈 으로 확인할 수 없고, 그 당시의 예술 제작 상황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당시의 예 술에 대한 믿음 체계와 관련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 「브릴로 상자
」가 예술작품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 작품이 워홀이 일상적인 것을 찬양하기 위해 일상에서 친숙하게 사용한 브릴로 상자를 이용한 것이라는 지식과 더불어 그 당시가 일상적인 것과 유사하게 보이는 대상도 예술로서 허용할 수 있는 분위기 혹 은 예술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던 시기라는 지식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상자」가 17세기나 18세기에 나타났다면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할 사 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단토는 「브릴로 상자」의 등장이 시대마다 상이한 예술에 대한 믿음 체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만들었고, 동시 에 이 사건이 기존의 믿음 체계와는 완전히 다른 예술에 대한 믿음 체계를 갖도록 만든 사건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이 기존의 예술에 대한 믿음 체 계의 변화를 야기하여 새로운 예술 개념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그렇다면 단토는 왜 예술에 대한 새로운 믿음 체계의 형성을 예술의 종말과 연결 시키고 있는가? 단토가 주장하는 바는 서구에는 예술에 대한 고유한 믿음 체계가 있고, 그 믿음의 체계의 변화가 예술의 역사에 대한 내러티브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러티브가 팝아트에 이르러 끝났다는 것이다. 단토가 주장하는 서구의 예술의 내러티브는 무엇인가? 단토는 예술에 대한 믿음 체계가 어떻게 이어 져 내려왔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예술에 대한 거대한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그는 이 것을 두 개의 에피소드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바자리의 에피소드이고, 다른 하 나는 모더니즘의 에피소드이다. 단토는 양자 모두를 진보적인 것으로 본다. 바자리 는 예술을 재현적인 것으로 보고, 시간이 지나면서 예술은 “시각적 외관”의 정복에 더 능숙해진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원근법, 명암법 그리고 단축법 등을 통해서 세 계에 대한 회화적 재현에서 진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단토는 이러한 전통적인 재 현 예술의 에피소드가 르네상스에서 시작해서 인상주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후에는 모더니즘의 에피소드가 그 뒤를 잇는다고 설명하고 있 다. 전통적인 회화가 모더니즘에게 길을 내준 이유에 대해 단토는 동영상의 등장과 기존의 문화적 신념의 상실로 설명한다. 실재를 묘사하는 데 동영상이 회화보다 훨 씬 더 낫다는 점이 증명되고, 동시에 아프리카와 동양의 예술이 소개되면서 외관의 정복이 예술의 유일한 목표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르네상스로부터 인상주의까지 이어져 내려오던 예술에 대한 믿음 체계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전통적인 재현 미술의 이야기인 바자리 내러티브는 끝나고, 모더니즘 내러티브가 시작된다고 단토는 설명한다.
모더니즘의 내러티브는 “외관의 정복이 예술의 진정한 목표가 아니라면 미술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예술들은 “진정 한 예술이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이것을 자신만의 양식으로 작품 속에 제시하려고 했다. 그 대표적인 예들이 20세기 전반에 등장한 수많은 선언문 (Manifestos)과 그에 근거들 둔 다양한 예술 운동이다. 그 선언문들을 보면 예술에 대한 믿음의 내용은 이전의 시기와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으나 여전히 예술의 유일 한 본질적인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수많은 선언문들은 하나같이 특정한 종류 의 운동과 특정한 종류의 양식만을 확정해서 이것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예술이라고 선언한다.
단토는 이러한 모더니즘 내러티브의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그린버그의 내러티브 로 보고 있다. 그린버그는 예술의 본질이 “예술의 매체의 본성 속에 유일무이하게 들어 있는 모든 것”과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모더니즘의 작품은 자신의 본질에 충 실하기 위해서는 다른 예술의 매체로부터 빌려왔거나 다른 예술의 매체가 빌려간 것으로 여겨지는 일체의 효과를 제거하여야 한다고 그는 보고 있다. 그는 무엇이 회화를 다른 예술로부터 구분시키는가의 관점에서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들었고 매 체의 물질적인 조건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아냈다. 그런데 단토는 그 내러티브가 팝 아트의 등장으로 끝났다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팝 아트의 등장을 통해서 “단순한 실제 실물”과 예술이 지각적 측면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고, 무엇 이든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이때 비로소 예술에 관 한 진정한 철학적 자기반성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반성 덕분에 “나는 갖고 있지만 다른 예술은 가질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제공하고 있는 모더 니즘의 역사는 끝나게 된다. 다시 말해 예술작품은 어떠해야 한다는 특수한 방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였을 때 예술의 내러티브는 종말에 이르렀 다고 단토는 보고 있다. 이때 “모든 것은 예술작품이다” 혹은 “누구나 예술가이다”
와 같은 슬로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런 것들은 예술의 거대한 내러티브의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예술의 시대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철학적인 정체 성을 요구하던 예술사는 끝났다.” 예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자기 이해이후, 역사 의 짐으로부터 해방된 예술가들은 그들이 바라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이 바라는 어떤 목적으로든, 혹은 아무런 목적 없이도 자유롭게 예술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역사-이후의 예술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단토는 오늘날이 실제로 예술의 종말의 상태이지 새로운 예술의 시대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상황에 대한 주장이면 서 예술의 미래에 관한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더 이상 예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 라는 의미에서 종말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타나는 예술은 더 이상 “예 술이 해야 할 과업은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작품으로 제시할 것인가?” 등의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고민했던 그 예술”의 종말을 주장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팝 아트의 등장을 통해서 시각적으로 식별불가능한 서로 다 른 작품들이 있을 수 있고, 이것들은 서로 다른 의미와 가치를 줄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로 인하여 이제까지 믿고 있던 목표, 즉 예술의 고유한 본질을 작품을 통해서 제시하려는 목표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는 한 작가가 어떠한 것을 목표로 삼고 예술의 작업을 수행한다 해도 그 목표가 다른 어 떠한 목표보다 더 가치가 있다거나 더 가치가 없는 작업이라고 말할 권리가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단토는 이제 예술은 무엇이나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는 아침에는 추상주의자가 될 수 있고 오후에 는 표현주의자가 될 수 있으며, 저녁에는 포토리얼리스트가 될 수 있다.” 이제 예 술사의 특별한 방향도 없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어떠한 양식도 동등한 권리 이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단토는 오늘날의 예술 상황을 다원주의 시기라고 규정 짓고 있다.
예술의 종말의 시대가 지니는 가장 중요한 함의는 모더니즘 시기에는 예술의 역 사 밖에 놓여 있던 다양한 목표와 가치를 지니고 있던 작품들에게 예술의 자격을 다시 수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의 종말 이전의 시대는 한 마디로 예술이라고 여기는 것으로부터 예술이 아닌 것을 분리해내려는 “자격박탈”의 역사(History of Disenfranchisement)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타적인 믿음 체계가 모방의 시기와 모더니즘의 시기에 연속하여 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팝 아트 이후 이러한 “자격 박탈”의 역사는 종말을 고했다. 따라서 예술의 내러티브의 종말 이후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오늘날은 예술가들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선택하여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이 예술의 종말 이후 시대라는 의미에서 다원주의 시대라면 오늘날의 예술 은 기존의 예술이 수행해왔던 역할과는 다른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이제 예술은 유일한 예술적 가치라는 의미에서 미, 진리, 혹은 조형성 등을 찾아 제시하려는 시 도에서 벗어나 다양한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양식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다원주의 시대의 예술은 이전과는 다른 비평, 즉 다원주의 비평을 요구한다. 이 제 비평의 임무는 각각의 작품들이 추구하는 목표와 의미 그리고 그 의미를 구현하 는 방식에 대해 해명하는 것이다. 이제는 그 이전 시대의 비평처럼 “예술이 무엇인
가” 라는 이론적 반성에 구속된 비평을 할 필요가 없다. 다원주의 비평이란 하나의 배타적인 내러티브에 의한 비평이 아니라 작품 자체에 입각해서, 즉 이것의 의미는 무엇이고, 이것이 어떻게 물질적으로 구현되었으며 또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를 해명하는 비평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거대 내러티브가 아니라 작품마다 그 작품 에 해당하는 개별적인 내러티브에 입각해서 작품을 분석해야 한다. 예컨대 외적으 로는 동일하게 보이는 서로 다른 회화들이 있을 때, 이 회화들은 각각 그들의 삶의 형식에서 상이한 구실을 맡고 상이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평이란 각각의 다른 삶의 형식에 속하는 작품들의 의미체계를 재구성하여 그 작품들의 의 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하나의 언어를 상상하는 것이 하나 의 삶의 형식을 상상하는 것인 것처럼” 한 작품을 상상하는 것은 이 작품이 특정 역할을 맡고 있는 삶의 형식을 상상하는 것이다.
다원주의 비평이 그 자체로는 중립적인 형식으로 구성된 이미지에 대해 그 양식 의 채택의 이유를 추론하고 그 의미를 채워 가는 것이라면, 다원주의 시대의 가치 평가는 한 작품이 다양한 목표 중에서 어떤 목표를 추구하는지 밝혀내고, 그 목표 를 완성하기 위해 차용된 양식이 적절한 것인지 확인하는 것을 통해 가능할 것이 다. 종말 이후의 시대의 이미지 자체는 그것이 어떤 형태를 지녔든지 관계없이 가 치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 작가들이 원하는 다양한 주제를 나타낼 수 있고, 그 주제에 따라 우리는 그 이미지에 대해 각각 다른 반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제도 역시 다원주의 시대에 적합한 형태로 변화되어야 한다. 현재 예술계에 서 진행되고 있는 수상 제도와 공공 미술관의 작품의 선정 제도는 여전히 유효하지 만 그 선정 기준은 “훈련된 안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작품들이 각각 개별적인 특 정 목적을 성취하는데 성공했는지 여부로 바꿔져야 한다. 또한 다원주의 시대에는 미술관 제도 역시 변화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미술관은 형식적인 기준에 의해서 작 품이 선정되고 전시되는 “모더니즘 미술관"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다양한 요구와 그에 따른 다양한 가치를 보여 줄 수 있는 미술관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미술관 은 미의 보고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의 형식과 삶의 가치를 이해하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