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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 Contents

교육일정 • ··· 3

근대 시각문화와 조선인의 이미지-사진엽서를 중심으로_

권혁희 • ··· 5

근대 개화기의 서양식 호텔_

이순우 • ··· 13

노랑머리 서양인들, 대한제국 정부의 관리가 되다_

김현숙 • ··· 25

스텐 베리만의 조선생물 탐사기_

문만용 • ··· 37

야나기 무네요시와 한국-민예운동을 중심으로_

이병진 •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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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기 박물관대학 하반기과정 교육일정

◈ 주 제 : 근대, 이국

異國

과의 조우

◈ 기 간 : 2013년 9월 6일 ~ 10월 25일

◈ 장 소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석남홀

구 분 날 짜 강 의 주 제 강 사

제1강 9/6 근대 시각문화와 조선인의 이미지 - 사진엽서를 중심으로

권 혁 희

(서울시립대학교박물관)

제2강 9/13 근대 개화기의 서양식 호텔 이 순 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

9/20 휴강(추석연휴) -

제3강 9/27 노랑머리 서양인들,

대한제국 정부의 관리가 되다

김 현 숙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제4강 10/4 문화유적답사 -

제5강 10/11 식민통치의 표상공간 경주 - 수학여행을 중심으로

윤 소 영

(독립기념관)

제6강 10/18 스텐 베리만의 조선생물 탐사기 문 만 용

(KAIST)

제7강 10/25 야나기 무네요시와 한국 - 민예운동을 중심으로

이 병 진

(세종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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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시각문화와 조선인의 이미지

- 사진엽서를 중심으로 -

권 혁 희

(서울시립대학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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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시각문화와 조선인의 이미지 ◆ 7

근대 시각문화와 조선인의 이미지

- 사진엽서를 중심으로 -

목 차

1. 사진엽서의 유행

2. 일본과 조선의 사진엽서

3. [朝鮮風俗]엽서에 재현된 조선인의 이미지 4. 조선풍속인형과 조선인의 재현

1. 사진엽서의 유행

19세기 말 20세기 초 사진엽서 산업의 호황은 사진과 인쇄기술의 발전 혹은 엽서의 대중화라는 현상 그 이상을 내포하고 있다. 당시 사진엽서는 통신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수집하고 교환하는 대중의 소비상품이었으며, 새로운 문 명과 타문화에 대한 대중의 시각적 욕망이 재현되어 있는 시각유물(visual artifacts)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이 시기는 제국주의의 시대로 식민지에 대 한 그로테스크하고 페티시적인 시각을 포함하고 있어, 야만과 미개로 분류된 타자들의 이미지가 엽서로 재생산되어 대중들에게 소비되었다. 동시에, 교통의 발달과 함께 시작된 근대 관광산업의 성장은 이국적인 풍경과 도시의 경관과 명소, 유적들을 훌륭한 기념품으로 재생산하도록 한다.

1900년대 초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조선관련 엽서의 상당수 역시 이러한 사 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다. 초기에는 주로 ‘조선풍속(朝鮮風俗)’으로 명명되어 조선인의 인종, 지리, 생업과 의례 등이 복합된 각종의 이미지를 포 함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풍속’이라는 용어는 통합적 의미로서 문화를 함의하 고 있었다. 이후 1930년대부터는 철도관광의 성장에 힘입어 조선의 각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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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제15기 박물관대학 하반기과정

를 주제로 하는 엽서상품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다. 도시의 주요 명소와 고적, 건축물뿐 아니라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이미지를 투사시키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상품으로 소비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사진엽서는 근대 시각문화 전반을 이해 하기 위한 매개체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일본과 조선의 사진엽서

일본의 사진엽서는 인쇄산업이 급격히 팽창하는 계기가 되었던 러일전쟁과 연관이 있다. 전쟁을 기념하는 각종 기념엽서와 전쟁에 승리한 천황과 장군들 의 이미지가 대량으로 복제되어 판매되기도 했다. 이미 1900년 사제엽서의 생산과 유통이 허가되어 제도적 여건이 마련된 것도 일본에서 사진엽서가 성 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풍속 사진을 찍어 외국인들의 기념품으로 상품화 시키는 데 성공한 일본의 사진관 사업자들 역시 사제엽서가 허가됨에 따라 기 존 앨범 위주의 인화지 사진보다 사진을 원판으로 하는 엽서 생산에 눈을 돌 리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관련 사진엽서는 일본 사진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 다. 1860년대부터 일본 요코하마에 등장했던 ‘요코하마 사진’이라는 풍속사진 의 형식을 일본인들이 그대로 조선에 적용하여 조선에서 사진관을 개업하고 풍속사진을 판매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성신문 1901년 12월 6일자에서 보이 는 풍경․풍속 사진엽서 발매 광고와 1902년 1월 7일자의 착색사진이나 신유 행 미술사진 등의 제작 판매 광고 역시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다.

일본에서는 1863년 페리스 비아토(Felice Beato)라는 종군사진가가 요코하 마에 스튜디오를 개설하면서 풍속사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는 1884년까 지 21년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외국인의 구미에 맞는 일본의 자연 풍경과 게 이샤, 사무라이 등 이국적 풍속사진을 채색한 후 앨범으로 만들어 판매하였다.

비아토 이후에도 많은 사진가들이 이를 계승하여 사진엽서가 유행한 1900년 무렵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다. 서구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요코하마 사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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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시각문화와 조선인의 이미지 ◆ 9

미국을 중심으로 대량 수출되었고, 미국에서는 이것을 원판으로 많은 일본 풍 속사진들이 대량 복제되어 유행하였으며, 동시에 1900년 이후에는 사진엽서 로 꾸준히 재생산되었다.

1900년 이후 한국에서 유통된 초기 풍속관련 사진엽서 역시 일본의 요코하 마 사진이 그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이 무렵 일본인 사진관을 중심으로 판매 된 채색사진이나 미술사진은 다름 아닌 ‘요코하마 사진’풍으로 제작된 조선의 풍속사진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풍속사진은 곧 사진엽서로 대체되기 시작하여 일본인들을 비롯한 서구인들에게 팔려나갔던 것이다. 특히, 1904년 러일전쟁 에서 승리한 이후, 일본인들의 조선진출이 활발해지게 되면서, 일본인 사업가 들의 진출은 조선관련 풍속사진들과 엽서들을 생산해 냈으며, 이러한 이미지 들은 자국 일본인들의 기념품으로 소비되었다.

3. [朝鮮風俗]엽서에 재현된 조선인의 이미지

190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인들에 의해 생산된 사진엽서는 식민지 시기 내내 꾸준히 생산된다. 특히, ‘조선풍속’으로 명명되는 이미지들이 식민 초기인 1910년대와 1920년대까지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들 엽서에서 조선인은 다양한 이미지로 재현되어 있는데, 주로 남성과 여성 혹은 계층별로 분류되거나 생업, 의례와 신앙 등 일정한 분류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발행자마다 서로 분류법이 다르거 나 일정하게 분류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조선인과 관련된 모든 이미 지가 그만큼 다양한 상품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스튜디오에서 정교하게 구성된 사진부터 길거리에서 우연히 찍힌 사진까지 여러 이미지가 등장 한다.

그중 초기 이미지에는 조선인의 신체가 크게 부각된 인물사진이 등장한다.

이들 사진은 조선인의 두발과 복장 등 문화적 이질성을 보여주는 장치라고 해 석될 수 있다. 서구인들이 아프리카인의 피부색과 인디언이나 아랍인들의 독 특한 복장을 클로즈업하여 서구와의 차별성을 강조했던 것처럼 조선인의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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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제15기 박물관대학 하반기과정

지 역시 이와 유사한 맥락으로 재현된다. 다만, 조선관련 엽서의 주생산자였던 일본이 조선인과 같은 피부색을 지닌 유사한 인종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으므 로 주로 인종 자체보다는 문화적 차이를 보여주는 두발이나 의복, 복장 등이 부각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러한 조선인 관련 이미지에서는 조선인 남성, 여성, 어린이 등 직접적으로 지칭된 이미지뿐 아니라 각종 생업과 의례, 민속 등 인물이 주인공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관련된 이미지에서도 조선인의 신체 이미지는 크게 부각되어 재현 되고 있다. 특히 제목에서 지칭되는 조선인 또는 선인(鮮人)과 같은 명칭은 각 인물의 개인성이 제거된 채 조선인 전체를 표상하는 이미지로 재현되었다. 사 진엽서에 재현된 조선인은 개인으로서의 개체성이 소멸되고 조선의 남성과 여 성, 어른과 아이를 상류층과 하류층 등 문화적 타자로서 재현된 이미지가 주 류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남성과 여성, 상층과 하층으로 구분되는 카테고리는 가장 일반적인 분 류기준이었다. 남성의 이미지 역시 주로 계층별로 구분되어, 하층민의 경우는 대개 생업과 관련된 이미지로 농사와 관련된 일을 하거나 시장에서 물건을 팔 고 있는 모습, 지게를 지고 물건을 나르는 모습 등으로 재현된다. 반면, 상류 층 남성의 경우는 관복을 입고 찍은 인물사진이 많이 등장한다. 주로 계층적 특성을 보여 주는 의복이 주요한 포인트로 나타난다. 여성의 이미지 역시 상 류층은 복장이 두드러지게 표현된 반면 하류층의 경우는 가사노동이 주요한 이미지로 재현된다. 곧 조선인의 이미지는 남성과 여성 모두 상류층은 복장을 통해, 하류층은 노동을 통해 재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류층 여성은 주로 가사노동과 연관되어 여성의 열악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낙후성을 보이며, 상류층 양반가 여성은 주로 쓰개치마를 쓰거나 가마를 타고 외출하는 이미지 를 통해 폐쇄적이고 이국적인 이미지를 생산했다. 특히, 짧은 저고리 틈으로 보이는 여성의 가슴은 자연스럽게 노출되었다기보다는 다소 작위적으로 가슴을 드러낸 경우도 있다. 대개 이런 이미지들은 풍속사진으로 소개되었지만, 식민지 여성의 원초적이고 관능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지배자적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기생 사진이 1900년대부터 꾸준히 생산되었다. 1910년대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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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시각문화와 조선인의 이미지 ◆ 11

상당수가 주로 관기복장을 한 기생의 초상이나 기예를 보여주는 이미지가 많 다. 화려한 색과 무늬가 있는 복장과 족두리를 쓴 기생의 이미지는 성적인 이 미지보다는 풍속적 이미지가 강했다. 검무나 가야금을 타고 있는 기생의 이미 지도 지게를 지고 있거나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있는 여성의 이미지와 유사하 게 풍속적인 이미지로서 표상되었다. 관기의 이미지는 주로 조선의 풍속으로 소개되면서 조선 여성의 전통적 복장과 공연 예술을 보여주는 이미지로 표상 되었다. 그러나 1910년대 후반 이후부터 기생의 이미지가 변화를 맞게 된다.

전통적 복장에서 풍기던 풍속적 이미지에서 점차 외모와 복장, 자세 등이 바 뀌게 된다. 기존 기생 이미지의 중심이었던 기예를 보여주는 이미지보다 기생 의 외모 자체를 부각시킨 이미지가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복장에서 풍기 는 전통적인 이미지에서 외모와 포즈에서 기생의 외모가 강조되어 갔다. 기생 의 이미지는 곧 초기 풍속적 이미지를 강조했던 관기의 이미지에서 점차 엔터 테이너로서의 세련된 외모가 강조되거나 성적 매력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변 모하게 된다.

4. 조선풍속인형과 조선인의 재현

사진엽서뿐 아니라 조선풍속인형으로 불리는 관광기념품을 통해 조선인의 이 미지가 일정한 패턴으로 재현되었다. 당시 조선풍속인형의 생산과 소비는 관 광산업의 발전과 일본의 향토완구 산업의 결합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1930 년 일본에서는 철도성(鐵道省) 내에 국제관광국(國際觀光局)이라는 새로운 정 부조직이 등장함에 따라 국가에 의한 관광산업의 진흥이 체계적으로 추진되었 으며, 조선에서는 1917년 이후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위탁경영했던 조선의 철도를 1925년 조선총독부에서 직영하면서 조선 내 여객수요를 증가시키기 위한 경영 정책이 추진된다. 이러한 철도국의 경영 정책은 일본인들을 조선으 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조선에서 일본인들을 위한 조선 토산품 산업의 성장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동시에, 일본의 관광진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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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제15기 박물관대학 하반기과정

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토산품 진흥은 일본의 향토완구 산업을 성장시켰으며, 이것이 조선으로 영역을 확장시켜 조선을 방문하는 일본인과 외국인들을 위한 조선인형을 생산해 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형은 철도국과 민간 관광협회에서 발행하는 안내책자에 조선토산품으로 소개되기도 했으며, 조선의 주요도시 상점가와 백화점, 온천과 유적지 등 관광지와 역 부근의 토 산품 상점에 비치되어 조선을 대표하는 기념물로서 소비되었다.

특히, 조선인형은 일본의 전통적 향토완구의 대표적 형태인 일도조인형과 토 제인형으로 생산되었으며, 이미지 재현의 유사성과 표현기법 등을 통해 조선 인형이 일본 향토완구산업의 영향 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가장 널리 소비된 것으로 보이는 ‘조선풍속인형’은 조선인에 대한 일반화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인형은 주로 조선인을 남녀 혹은 상층, 하층의 계층적 구분 에 의한 스테레오타입화된 이미지를 만들거나, 조선인 가족을 표본으로 삼아 재현한 인형이었다. 이러한 시각적 재현물은 이미 1900년대부터 유행했던 ‘조 선풍속’사진엽서에서 널리 소비되었던 이미지들로서, 1930년대 이르러 ‘조선 풍속인형’으로 재생산되었다.

따라서, 1930년대 이후 ‘조선풍속’은 인형과 사진엽서라는 서로 다른 매체를 통해 상호 복제되었으며, 관광기념품으로 상품화되어 소비되었다고 할 수 있 다. 이것은 관광이라는 근대 소비문화가 조선이라는 타자를 어떻게 재현하고 상품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생산되었던 재 질과 기법의 인형을 조선의 토산품으로 변모시켜 상품화시키고, 이것을 조선 인의 일반화된 문화적 이미지로서 소비하였던 것이다. 또한, 해방 이후 일제시 기에 생산되었던 인형의 형태가 재생산되었던 현상은 한 시대의 지배적인 시 각문화의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다. 식민지 시기 선택된 조선인의 전형화된 이 미지는 해방 이후에도 선택되어 상품화되었다. 물론 일제시기에 생산된 조선 향토색을 강조하는 문화담론에 의해 한국의 전통적 정성의 봉제인형들이 대량 으로 만들어졌지만, 어떤 대상이 한국의 전통성을 보여주는 이미지인가에 있 어서는 식민지 시대 일반화된 패턴과 연관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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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화기의 서양식 호텔

이 순 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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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화기의 서양식 호텔 ◆ 15

근대 개화기의 서양식 호텔

목 차

1. 근대시기 서양식 호텔의 흥망사 2. 근대시기 인천지역의 서양식 호텔

1. 근대시기 서양식 호텔의 흥망사

근대 개화기에 이 땅을 찾아온 숱한 여행가, 외교관, 선교사, 특파원, 탐험가, 사냥꾼, 기업가 등이 한결같이 한국에서 불편함과 어려움을 호소하는 대상은 주로 ‘숙박시설’과 관련된 것이었다. 서울로 오는 서양사람들은 대개 자국의 외교공관이거나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을 만한 다른 정착 서양인들의 선의(善 意)에 기대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누추한 조선식 주막이나 숙박시설을 감수 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러한 탓에 그 누구라도 일단 자기 나라에서 설치한 공사관이나 영사관에 신세를 지는 것을 하나의 관례로 여기고 있을 정도였다.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 (1897)의 저자로 우 리에게 친숙한 영국인 여행작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여사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1894년 3월에 처음 서 울을 찾은 이래로 여러 차례 방한 때마다 영국공사관을 숙박지로 삼곤 했다.

주한미국공사를 지낸 호레이스 알렌(Horace Newton Allen, 安連; 1858~

1932)이 저술한 『조선견문기(Things Korean)』 (1908)에도 당시의 형편이 잘 서술되어 있다.

철도가 놓이기 전의 초창기에는 서울에 적합한 호텔이 없었으므로, 탐방객들은 대개 어떤 종류의 소개장을 가져와서 자기네 나라의 공사관에서 접대를 받곤 했 다. 다른 서양사람들보다 나타나는 미국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고 또한 우리는 여 러 해 동안 이런 여행자들의 접대에 알맞은 별관 시설을 유지하고 있었던 탓에, 유럽에서 출판된 어떤 가이드북에는 서울의 호텔들이라는 제목의 목록에다 “게스 트 하우스(Geust House), 미국공사관”이라고 써넣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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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제15기 박물관대학 하반기과정

우리나라에 있어서 근대호텔의 첫 등장은 인천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일찍이 인천에서는 1880년대 이래 일본인 호리 큐타로(堀久太郞)가 운영한 대불호텔 (大佛호텔, 다이부츠호텔, Daibutsu Hotel; 이 호텔 주인의 덩치가 아주 크다 고 해서 붙여진 이름), 중국인 이태(怡泰)의 스튜어드호텔(Steward’s Hotel;

이 호텔의 주인이 한때 미국군함 모노카시호에서 급사로 지냈다고 해서 붙여 진 이름), 오스트리아계 헝가리인 스타인벡(Joseph Steinbeck)이 주인이었던 꼬레호텔(Hotel de Coree), 이탈리아인 삐이노(F. Bijno, 邴魯; 경운궁 앞에 있었던 ‘서울호텔’의 주인)이 서울에서 옮겨와 개설했던 삐이노호텔(Bijno Hotel), 그리고 크렐 부인(Mrs. N. Krell)이 잠깐 운영했던 오리엔탈 호텔 (The Oriental Hotel) 등이 잇달아 생겨나 성업 중이었다.

이에 비해 서울에 서양식 호텔이 등장한 것은 늦어도 한참이 늦다. 이러한 상 황에서 명실상부하게 호텔(hotel)이라는 이름을 내건 서양식 숙박시설이 마침 내 본격적으로 서울의 거리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00년 무렵의 일이다.

새로운 황궁인 경운궁 영역과 인접한 곳에 자리했던 ‘서울호텔(Seoul Hotel, 삐이노호텔; 1897년 4월 개업)’, 정동 경운궁 대안문(大安門, 덕수궁 대한문) 앞의 ‘프렌치호텔’과 ‘임페리얼호텔’, 그리고 성문 밖 서대문 정거장 부근의

‘스테이션호텔’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이 가운데 프렌치호텔은 궁궐 바로 앞에 있다 하여 ‘팔레호텔(Hotel du Palais)’이라고도 하였다. 인천에 근거를 둔 스 튜어드호텔도 한때 ‘이태호여관(怡泰號旅館)’이라는 이름의 분점을 따로 정동 대안문 앞쪽에 개업했던 시절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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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화기의 서양식 호텔 ◆ 17

새문 밖(충정로 1가 75-2번지, 현 농협중앙회 후면)에 있었던 ‘스테이션호텔 (정거장호텔)’은 한강철교의 준공과 더불어 경인선이 완전 개통되면서 1901년 4월 영국인 엠벌리(W. H. Emberley, 音法里)가 서대문역 바로 앞에서 개업하 였다. 이 호텔은 1905년에 원래 ‘팔레호텔’을 운영했던 프랑스인 마르텡(L.

Martin, 馬田)에게 인수되면서 그 이름도 ‘애스터 하우스(Astor House)’로 변 경되었으며, 이곳은 마르텡의 한자이름을 따서 ‘마전여관(馬田旅館)’으로도 알 려졌다. 1907년 이후에는 단순한 숙박시설에만 그치질 않고 활동사진 연극장 으로도 널리 이름이 높았다. 또한 이곳 ‘애스터 하우스’는 대한매일신보 사장 이었던 영국인 어네스트 베델(Ernest Bethell, 裵說, 1872~1909)이 일제의 탄압으로 마지막 숨을 거둔 장소로도 기억되어야 하는 공간이다.

흔히 ‘미스 손탁(孫澤孃)’으로 알려진 앙트와네트 손탁(Antoinette Sontag, 1854~1925)이 주인이었던 손탁호텔(정동 29번지)의 존재도 물론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다.

‘손탁빈관(孫澤賓館)’ 또는 ‘한성빈관(漢城賓館)’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이 호텔은 아관파천이 있던 해인 1896년을 전후한 시기에 러시아공사관 건너편 자리를 사들이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1902년에는 벽돌건물이 신축되어 궁내 부의 ‘프라이빗 호텔(Private Hotel: 예약된 손님만 투숙하는 특정호텔)의 형 태로 운영되었다. 일찍이 그의 집은 반일친미세력의 대명사인 ‘정동구락부(貞 洞俱樂部, Chongdong Club)’의 회합소였던 적도 있었고, 또 한창 때는 서울 거주 서양인들의 일상공간처럼 자리매김되기도 했다.

1904년 러일전쟁을 고비로 러시아세력이 크게 위축되면서 호텔은 그럭저럭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으로 전락하였으나, 이 와중에 특히 1905년 당시 일본 의 특파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 머물며 이른바 ‘을사조약’을 배후에 서 조종했던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 된 순간도 없지 않았다.

이렇듯 주요한 정치인물의 회합소나 외국인 탐방객의 숙소로 널리 이름을 떨 쳤던 손탁호텔은 결국 1909년에 이르러 다른 서양인 호텔이었던 팔레호텔의 주인 보에르(J. Boher)에게 경영권이 넘겨지는 행로를 걸었다. 그 이후 ‘손탁 이 없는 손탁호텔’은 경영난 탓인지 1917년에 건물부지가 이화학당에게 넘겨 져 여학생 기숙사로 전환되어 사용되다가 1922년 그 자리에 프라이홀의 신축 을 위해 헐리면서 그 이름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처럼 근대 개화기 서울의 서양인 호텔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역사 현장이었던 순간들이 수두룩했다. 우리가 이들 서양인 호텔들을 단순히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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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제15기 박물관대학 하반기과정

나 사교문화와 같은 근대 서양문물이 퍼져 나가는 진원지로만 이해해선 안 될 까닭은 바로 이러한 대목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른 서양인 호텔들의 경우에도 손탁호텔의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것들 역시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전후한 시기에 잇달아 문을 닫아 더 이상 그 명맥을 잇지 못하였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는 일본인들의 손 에 의해 꾸려지는 ‘서양식’ 호텔만이 서울거리에 존재했을 따름이었다.

2. 근대시기 인천지역의 서양식 호텔

근대 개항기 이후 우리나라 서양식 호텔의 원조는 의심할 바 없이 인천지역 에서 먼저 형성되었다.

일찍이 최고의 교통수단으로 화륜선(火輪船)이나 범기선(帆汽船)에 의존하던 시절 제물포(濟物浦)는 서울로 진입하려는 수많은 외교관, 여행가, 선교사, 장 사꾼과 그들의 가족이 지나치지 않을 수 없는 유일무이한 항구였다. 따라서 중간 기착지(寄着地)인 이곳에 이들을 맞이하기 위한 숙박시설이 들어선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더구나 아직은 철도교통조차 마련되지 못한 때였으므로 서울로 들어가기 위 한 가마꾼이나 말과 마부를 구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한강(漢江)을 거슬러 올 라가는 소기선(小汽船)의 운항시각에 맞추려면 하루, 이틀 또는 며칠씩을 기다 려야 했으므로, 그 사이에 이들이 머물러야 할 공간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 이었다. 도보로 이동할 경우 자칫 출발시간이 늦어지면 서울도성의 성문이 닫 히기 전에 제때 도달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는 때도 왕왕 있었으므로, 이러 한 진퇴양난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라도 인천에서 하루를 더 묵어가는 일 이 흔히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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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화기의 서양식 호텔 ◆ 19

청국조계지 방면에서 일본조계지 쪽의 풍경을 담아놓은 사진판화 속에는 ‘호텔 다이부츠(HOTEL DAIBUTSU)’라고 적어놓은 표지간판이 보인다. 여기에는 ‘신선한 빵과 고기’라는 안내문구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사진의 앵글로 감안하면, 인근에 있던 ‘스튜어드호텔(Steward‘s Hotel)’ 2층에서 담아낸 장면으로 짐작 된다.

하지만 개항 초기 이들을 위한 숙박시설이란 것이 그렇게 많지도, 또한 썩 좋은 형편도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생각보다 아주 오래 전에 채록된 몇 가지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의료선교사로 우리나라 에 건너왔다가 주한미국공사의 지위에까지 오른 호레이스 알렌이다.

그가 제물포에 당도한 것은 1884년 9월 20일이었다. 그 자신이 직접 술회한 바 에 따르면, 그는 ‘해리’라는 중국인 경영의 오막살이 호텔에 투숙하여 당구대 위 에서 밤잠을 자고 숯불로 후라이한 닭고기로 요기를 채운 다음 하루 뒤, 상해에 서 동행한 중국인 언어교사와 함께 당나귀를 타고 떠나 이튿날인 9월 22일 마침 내 서울에 당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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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제15기 박물관대학 하반기과정

이 호텔의 정체에 대해서는 좀 더 보완조사가 이뤄져야 하겠지만, 이보다 한 해 앞서 1883년 11월 제물포에 당도한 영국외교관 윌리엄 칼스(William Richard Carles, 賈禮士, 加里士; 1848~1929)가 남긴 『조선풍물지(Life in Corea)』 (1888)를 통해 “우리가 묵을 수 있는 곳이 이 제물포에는 한 군데 도 없었다는 것이 명백해졌고, 그나마 잠자리를 구할 수 있는 이곳의 판잣집 과 토담집 어느 하나도 우리를 반기지 않았다”고 적은 당시보다는 조금은 상 황이 나아진 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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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화기의 서양식 호텔 ◆ 21

흔히 인천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일컬어지는 ‘다이부츠호텔(대불호텔, 大佛호 텔, Daibutsu Hotel)은 이미 1884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 우리나라를 드나드는 외국인들이 점차 많아지게 되자 인천 지역에는 몇 개의 서양식 호텔이 더 늘어나는 상태가 되었다.

가령, 조선주재 일본공사관의 교제관시보(交際官試補) 출신이었던 하야시 부이치(林武一, 1858~1892)가 1891년에 펴낸 『조선안내(朝鮮案內)』라는 책의 104~105쪽에는 인천지역 호텔과 여관의 면면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 어 있다. 여기에는 역시 다이부츠호텔이 최상급으로 객실수도 11개나 되지만, 벳부(別府)호텔, 이태(怡泰)호텔, 호텔 드 꼬레 등 여타의 것들은 객실이 고작 서너 개 정도인 군소 규모의 호텔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서양식 호텔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영국인 여행가 새비지 랜도어 (Arnold Henry Savage-Landor)가 『코리아 혹은 조선(Corea or Chosen)』

(1895)에 남긴 기록에도 등장한다. 다만, 여기에는 아쉽게도 벳부 나오사부로 (別府直三郞)가 운영했다는 벳부호텔의 존재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새비지 랜 도어가 우리나라를 찾아온 시점은 1890년 크리스마스 때이며, 그 후 1891년 1월 이후 몇 달을 서울에 머물렀던 것으로 확인된다.

내가 제물포에 당도했을 때 그곳에는 사실상 세 곳의 유럽식 호텔이 있었다. 이 것들은 실제가 그렇다기보다는 이름으로만 더 유럽식 호텔이었지만, 거기에 그것 들이 존재했고 이제 빠르게 밤이 다가오자 나는 몹시 머물 곳이 필요했으므로 어 딘가를 선택해야만 했다.

이들 호텔 중의 하나는 한 중국인이 경영했는데, 이곳의 소유주가 어느 미국선 박의 급사 노릇을 했다는 단순한 이유로 스튜어드호텔(Steward’s Hotel)로 불렀 으며 그로부터 이것이 성씨로도 전용되어 사용되었다. ‘꼬레호텔(Hotel de Coree)’

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두 번째 호텔은 헝가리인 소유였으며, 이 항구에 기 항하는 전함의 수병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휴식처가 되었는데 이는 한편으로 모 든 종류의 술을 갖춘 살롱이 갖춰진 것이 이 집의 자랑거리였고 또 한편으로 터 키어와 아랍어는 물론이고 한국말과 일본말까지 지구상의 모든 언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가장 빼어난 재주를 지닌 처녀이자 이 호텔 주인의 딸인 매우 매력 적인 젊은 숙녀가 카운터 너머로 술잔을 건네주기 때문이었다.

현대적 표현양식의 고상한 맨션인 세 번째 호텔은 아주 새로운 건물이었으며 한 일본인의 소유였다. 그가 자신의 안식처에 붙여놓은 이름은 ‘다이부츠(大佛)’인데, 영어식 표현으로는 ‘그레이트 갓(The Great God)’이라는 뜻이었다. 그 이름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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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제15기 박물관대학 하반기과정

카츠키 겐타로의 『한국안내』 (1902)에 수록된 ‘대불호텔’의 광고문안이다. 주소지가 ‘인천항 일본거류지 13호지’로 표 시되어 있다.

성함과, 아마도 외관만 보았지만 깨끗한 인상에 이끌려 나는 우연히 다이부츠호 텔을 나의 숙소로 정하였다. 나는 천상의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제물포에 있는 이 위대한 신의 집보다 지구상에 덜 거룩한 곳은 없다는 것을 확실히 떠올 릴 수 있었다. 객실들이 눅눅하고 냉기가 도는 걸로 보아 이 건물은 최근에 지어 진 것이 분명했는데, 내가 침대를 살피려 다가서서 침대시트가 깨끗한지 뭔가 좀 의심스러운 듯이 말했더니 “그건 아주 깨끗하답니다”라고 주인이 이렇게 덧붙였 다. “단지 두 분의 신사가 먼저 그 시트 안에서 주무셨으니까요.” 하지만 새해가 코앞에 있었으므로, 그는 나의 비위를 맞추려고 그것들을 마지못해 교체해 주었 고, 나는 그의 제안을 새해 선물로 여겨 기꺼이 받아들였다.

새비지 랜도어가 ‘다이부츠’의 뜻을 ‘위대한 신’으로 받아들인 것은 다소간 그의 착각이다. 원래 다이부츠(大佛)는 ‘큰 부처상’을 말하는 것으로, 코사카 사다오(小坂貞雄, 1899~1942)의 『외국인이 본 조선외교비화(外人の觀たる 朝鮮外交秘話)』 (1934), 253쪽에는 이 부분에 대한 에밀 마르텔(Emile Martel, 馬太乙; 1874~1949)의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

[다이부츠군(大佛君)의 큰 돈벌이]

인천에 선박이 입항할 때면 매번 돈을 벌어들인 것은 일본인이 경영 하던 호텔과 함선매입(艦船買込)의 어용상인(御用商人)들이었으며, 그 으뜸 은 누가 뭐래도 호텔을 경영했던 호리군(堀君)이었다. 호리군은 덩치가 아주 커서 어느 샌가 다이부츠(大佛) 이라는 닉네임이 붙여져 그 호텔도 통칭(通稱) 다이부츠호텔(大佛ホテル) 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는데, 아주 인기가 좋은 호텔이었다. 지금도 인천(仁川) 지나가(支那街, 중국인거리) 의 일각(一角)에 삼층 건물의 지나 요리점(支那料理店)이 있는데, 그것이 당시 다이부츠군이 경영했던 호텔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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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화기의 서양식 호텔 ◆ 23

하지만 이렇게 번성했던 인천지역의 서양식 호텔들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차 츰 쇠퇴의 길을 걸었다. 개항 이후 제물포는 사람들의 왕래가 더욱 번성한 지 역으로 변했으나 1899년 경인철도의 개통을 계기로 더 이상 이곳에 사람들이 며칠씩 머물며 묵어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경부철도의 완공으로 부산항에서 곧장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일이 가 능해지면서 구태여 인천항을 거칠 필요가 없는 상황이 이어진 것도 이러한 변 화를 재촉하였다.

인천지역 쪽의 사정과는 다르게 서울 서대문 정거장과 정동 안쪽에 하나둘씩 생겨난 서양인 호텔들이 차츰 명성을 얻기 시작한 때는 역설적으로 바로 이 시기와 고스란히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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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머리 서양인들,

대한제국 정부의 관리가 되다

김 현 숙

(서울시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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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머리 서양인들, 대한제국 정부의 관리가 되다 ◆ 27

노랑머리 서양인들,

대한제국 정부의 관리가 되다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서양인들의 고용실태

3. 고위급 서양인들의 내한과 활동 4. 나가는 말

1. 들어가는 말

2. 서양인들의 고용실태

1) 취업동기

: 19세기 말 서양의 전문 인력들이 동북아시아 지역으로 대거 이동하게 된 배경 ① 구직난 : 19세기 인구증가와 교육의 확대에 따른 고급 인력이 증가. 출 신 성분이 좋고 교육을 잘 받은 잉글랜드인, 유럽의 상류층들은 고액의 연봉 직업을 구할 수 있음. 반면, 사회적 지위나 상속에서 배제된 귀족 의 차남들과 몰락가문의 후예들, 새로운 부와 명예를 획득해야 하는 중 산층들, 또한 아일랜드인, 독일인 등은 상대적으로 구직난.

== 이때 식민지와 주변부 국가에는 관료직, 군대, 기술직, 의료 및 기타 무역업 등 상당수의 일자리가 창출되어 중심부의 엘리트에게 열려있음.

② 명예와 출세의 기회 : 식민지와 주변부는 이들에게 마지막 개척의 땅.

높은 보수, 수십 명의 하인을 부리면서 누리는 귀족과 같은 생활, 군사 적 무훈, 이국적 음식과 문화, 열등한 인종을 문명화시키는 사명감과 기 독교의 전파 등은 백인들의 인종적인 우월감을 과시할 수 있는 무형의 보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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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이권알선과 무역기회: 정부에 고용되는 외국인들은 국내 정치세력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확보한 인맥 및 정보를 이용하여 각종 경제 이권들을 알선하여 수수료, 재산 증식 기회. 상당수의 서양인들은 대학교육을 받은 중산층 출신의 화이트칼라, 사회적 지위와 부를 찾아 먼 극동의 땅에 온 자.

사례 1: 묄렌도르프는 독일인 몰락귀족의 후예로 부와 명예를 쫒아 중국으로 건너와 청국해관에 근무하다가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의 추천으로 고 위 고문직으로 오게 된 자였다. 그는 조선에서 조약 교섭 및 근대화 정책을 수행하면서 상당한 권력을 향유하였고, 이권과 금권수수에 관 심을 많이 보였다.

사례 2: 조선의 탁지부 고문 및 해관총세무사로 장기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 했던 브라운은 아일랜드 출생이었다. 그는 영국의 대조선정책의 기조 하에서 해관과 관세를 운영하였고, 일본의 경제진출에 큰 공을 세웠 다. 그 공으로 조선에서 퇴직한 후 영국여왕으로부터 훈작사 작위를 받았고 일본으로부터도 상당한 금액을 수수받았다.

사례 3: 외교고문이었던 미국인 데니는 이권양여와 차관도입에 관심이 많았던 자로, 귀국 후 상원의원으로 활약.

사례 4: 궁내부 고문 샌즈는 조선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외교관으로서 재직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에 온 대다수의 서양인들은 극동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 회, 정치적으로 출세를 하고, 부를 쌓고자 하는 야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상과 같은 요인이 중심부에서 고급 인력을 배출하는 요인이었다면, 우리나 라와 같은 주변부에서 그들을 고용하게 된 요인을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정부의 고빙 배경

1) 임오군란 이후 본격적 개화정책

: 자주적 근대화를 통한 부국강병과 자주독립 수호.

① 선진 기술 습득, 해관 운영, 대외교섭과 국제법 자문.

② 제국주의 국가의 침투 견제: 일, 청 등을 견제하기 위한 고문과 모국 유 인책. == 고문관의 선정기준도 그의 전문성보다도 국적이나 친조선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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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머리 서양인들, 대한제국 정부의 관리가 되다 ◆ 29

이 우선적 고려. 정치적 목적이 우선하자 고빙된 고문관도 정치성 띰.

(갑오 이전 고문관들은 주로 이홍장의 추천으로 고빙. 고종의 고문관 길 들이기 작전. 측근 관리로 내무부 소속되어 반청정책과 근대화정책 입 안, 추진.)

* 동아시아 삼국의 공통 대응:

<일본> 1872년부터 1898년 정부 고용인 6,200명, 민간 고용인 약 12,500명.

<청국> 중앙 정부 및 해관에 많은 서양인들이 근무. 해관에만 천명

<조선> 1882년 ~ 1904년 2월. 약 320명. 중앙정부와 산하기관에서 근대화 업무를 담당. 근대화에 자극제 역할.

* 조선에는 언제부터 외국인들이 고용되기 시작했는가?

1882년 김옥균의 주선으로 박문국, 우정국 및 별기군에 일본인 교관 호리모 토 레이조(堀本禮造)등을 고용한 이후 국내 유학자 및 민중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서양과의 외교통상 관계증진, 선진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그해 11 월 최초로 서양인 묄렌도르프(Mőllendorff)를 외교고문으로 고빙. 1883년부 터 해관 및 기기국 등 산하기관에 본격적으로 외국인들이 고용.

* 1882년부터 1904년 2월까지 약 340여 명의 외국인들이 정부의 각 부 처와 산하기관에서 관리로서 직책을 부여받고 근무. 이들의 직책과 지 위, 권한, 대우 등은 정부의 고용인 정책에 따라 혹은 제국주의 국가의 외압의 정도에 따라 각 시기별로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면 정부문서와 고용 계약서에 나타나는 명칭, 지위, 권한, 업무, 대우 등을 종합적으로 분 석, 조선정부가 고용한 외국인들을 5가지 직업으로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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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분야별 직업과 봉급

<표 1> 직업별 외국인 고빙현황 (1882~1903)

국적불명 기타

고문관 6 2 1 1 2 16 2 0 1 31

행정관 12 24 13 21 5 44 4 1 10 133

기술관 27 7 15 7 5 32 3 1 1 89

교육관 4 6 8 4 2 11 2 0 0 35

군사교관 4 3 0 0 31 1 0 0 0 39

직업불명 0 0 0 1 0 0 0 1 0 3

53 42 37 34 45 104 11 3 12 341

* 고문관 : 31명은 행정부서의 고문관으로 근무. 미국인 주로 등용.

* 행정직 : 133명은 중앙행정부서 행정직, 우정국, 기기국, 조폐국, 해관, 전환국 에서 실무를 담당. 전체 고용인의 약 40% 차지. 주로 일본인이 갑오기 파견, 해관.

* 기술관 : 89명(22%)은 서구의 선진공업 및 농업기술을 도입(일본의 경우 명치 초기 39% 정도 차지. 주로 영국인, 독일인 고용). 미, 일, 프 순서.

* 군사 교관직 : 39명 근대식 군대로 훈련시키는 군사 교관직(주로 러, 일).

* 교육관 : 35명은 근대 학교에서 외국어 교육, 근대 학문 교육(일, 프, 영).

3) 국적별 고용현황

<도표 1> 직업별 외국인 고빙현황 (1882~1903)

0 2 4 6 8 10 12 14 16

명수

청 국적불명 기타

국적 국적별 고용 고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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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머리 서양인들, 대한제국 정부의 관리가 되다 ◆ 31

* 갑오 이전 : 총 121명 고용. 그 중 미국인이 33명으로 27%. 영, 일, 독 순 서. 일본인 경우 주로 갑신 이전과 1890년 이후 집중, 일의 대조선 진출과 연계 시사.

* 갑오기 : 40명에 달하는 일본인이 대거 등용. 타국인은 4명인 기현상.

* 아관파천기 : 러시아인이 3명 고용. 기타 6개국에서 16명. 이 중 미국인이 10명. 러미 협조관계 반영.

* 1898년 이후 : 외국인 다변화 추세. 프의 진출이 주목. 미국은 퇴조. 이 시 기 근대 문물 도입 창구는 프와 일. 1904년 4월 일이 고문관 정리 착수할 때 약 79명이 종사.

== 1882~1904까지 일, 미, 러, 영, 프 순. 근대문물 수입선은 70%가 서양, 대부분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수입(일의 경우 영, 프, 미, 독의 순서).

국가별 직업 현황 : 미국인은 고문직, 행정, 기술직. 영국인은 행정, 교육. 독 일인은 행정, 기술. 프랑스인은 행정, 기술, 교육. 일본인은 기술, 고문. 러시아 인은 군사 교관직.

4) 근무환경과 업무

(1) 근무 여건 : 의사소통의 문제와 통역관

* 매력적인 곳이 아님: 열악한 사회기반시설, 질병, 일련의 정치 음모들과 쿠테타, 반외세 정서 등 외국인들은 생명에 위협을 느꼈고 업무에 전념하 기 힘들었다.

* 샌즈 사례 : 업무 준비 과정

1. 먼저 샌즈는 자신이 국왕에 건의할 내용을 영문으로 작성한다.

2. 영어 통역관으로 하여금 그것을 조선어로 번역시킨다.

3. 번역된 조선어 문서를 프랑스어 통역관에게 읽히고 프랑스어로 번역시킨다.

4. 또 다른 통역관에게 그가 아는 다른 외국어로 번역하여 읽게 하고 오역 부분을 수정한다. 다단계의 번역을 거치는 것은 샌즈 자신의 의도가 정 확히 전달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5. 여러 차례의 번역과 수정을 거친 문서는 이제 공문서의 서식에 맞게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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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제15기 박물관대학 하반기과정

서술된다.

6. 이상의 5단계 과정에 참여하지 않은 통역관에게 재 서술된 문서를 번역 하여 읽게 한다.

7. 내용에 이상이 없으면 마지막으로 수석 서기를 불러 해서체로 멋지게 베껴 쓰게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작성된 문서를 들고 샌즈는 통역관을 한 명 대동하고 고종 을 알현하였다. 그는 통역관을 통해 고종에게 문서의 내용을 브리핑하고, 고종 이 읽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 한가하실 때 차분히 읽으시라고 문서를 놓고 나온다 한다. 이러한 언어소통의 문제와 인력 관리의 비효율성은 고용인들에 게 투자한 만큼의 효과를 얻지 못하게 한 주 원인이 되었다.

3. 고위급 서양인들의 내한과 활동

<표 2> 구한말 주요 서양인 고문관

이름 국적 직위 고빙기간 연봉

P.von Möllendorf

(穆麟德) 독일 統理衙門內外文武協辦 1882.12-1885.9 3600元

O.N.Denny

(德尼) 미국 協辦內務府司 兼外衙門掌交司堂上 1886.4-1890.2 12000元 C.W.LeGendre

(李善得) 미국 協辦內務府司, 궁내부고문

의정부 贊務 1890.2-1899.9 9300元 6000元 C.R.Greathouse

(具禮) 미국 協辦內務府司,郵遞局幇辦.

외부고문 겸 법부고문 1890.8-1899.10 9300元 3600元 McLeavy Brown

(柏卓安) 영국 海關總稅務司 겸 탁지부고문 1893.10-1905.11 10,800元 K. Alexeiev

(戛樂攝) 러시아 탁지부고문 1897.12-1898.4 3000元

W.F. Sands

(山島) 미국 궁내부고문 겸 임시 외부고문 1899.11-1904.1 3600元 R. Crémazy

(金雅始) 프랑스 법부고문 1900.5-1905.8 6000元

C. Deleoigue

(戴日匡) 벨기에 博文院 贊議 겸 내부고문 1903.11 -1905.1 6000元 출전: 고종실록』, 규장각 소장 계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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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머리 서양인들, 대한제국 정부의 관리가 되다 ◆ 33

1) 근대외교와 고문관의 역할

* 정부의 정책 입안자들에게 세계의 사례, 실무경험, 개혁방안에 대한 정보 제공, 정책결정에 도움.

* 지시에 따라 외교정책과 당면한 외교현안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모색.

ex) 구미공사 파견, 중립화 추진.

* 고문관들은 국제법과 협상실무에 어두웠던 외교관리를 보좌하여 조약 및 각종 협상 주도.

* 정부는 고문관들을 이용하여 국제분쟁이나 국가 위기 시, 각국공사관에 지 원 요청, 분쟁을 해결하도록 함. 국제법 활용에 기여. 대신하여 외국과의 국 제법 논쟁, 조선이 국제법으로 독립국가임을 논증.

===조선 외교의 근대화와 독립수호에 일정한 역할. 그리하여 1890년대 접 어들어서는 조선인 관리들이 단독으로 협상을 주도하고 조약을 체결할 수 있을 만큼 조선의 외교 실무력이 발전하였다.

2) 근대식 경영기법의 도입과 기관의 운영

정부 산하 근대기관을 운영하는데 근대 경영기법과 엄격한 감독체제를 도입 하여 상당한 성과.

* 만국우편연합에의 가입과 우정총국 설립을 준비.

* 고등재판소 운영: 갑오기 사법제도의 개편에 따라 고등재판소 신설, 이를 운 영할 전문 사법인이 전무. 그레이트하우스는 고등재판소 감독관으로 임명, 서양식 재판경험이 없던 조선인들에게 재판이 효율적으로 운영되도록 감독, 고문을 폐지, 법정질서를 유지. 갑오기 개혁된 사법제도가 정착하는데 기여.

* 탁지부 운영: 수입이 증가, 근대식 경영방식에 따라 합리적으로 운영되어 타 기관에 모범. 제국주의 국가의 침투 통로로 역이용.

* 해관경영: 해관을 탁지부와 고종의 지배․감독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으로 운 영하는 반식민지적 외인(外人)기관. 영․일의 사주를 받은 맥리비 브라운이 관세처분권을 이용하여 샌즈의 대미차관과 이용익의 대불차관을 저지, 해관 을 기반으로 정부가 불허한 일본의 제일은행권을 유통. 이와 같이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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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제15기 박물관대학 하반기과정

국가들은 서구인들이 운영하는 근대적 기관을 거점으로 조선의 정치․경제에 침투해 들어왔다.

3) 고문관들의 외교정책과 주권 수호

* 대외정책은 조약체결을 통해 전통적인 화이질서의 질곡에서 풀어 만국공법 적인 세계질서에 편입시켜 독립을 확인받고, 조약체결국들의 세력을 유인, 조선영토에 위협적인 세력을 견제한다는 다변외교.

* 친미․친러적인 경향성이 짙은 특징. 1897년 이후에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 한 친영․일․미 경향.

* 이권외교와 차관외교를 통해 구체화. 중립화안 제시. 특징은 열강들이 중립 화의 승인 대가로 이해조정의 주도권을 쥐며, 조선시장의 개방을 보장받으 며 열강이 선정한 협의체가 조선의 정치․사회․경제개혁을 주도하는 것이다.

이 같은 고문관들의 중립화안은 실질적인 주권을 행사하고 영토를 보장받고 자 하는 조선정부의 주체적인 중립화안과 차이가 있다.

4) 고문관들의 경제개혁안과 시장개방

서구를 모델로 한 자본주의 사회의 건설로 집약.

* 위로부터의 개혁: 정부의 합리적인 재무제도의 확립과 농민생활 향상을 위 한 조세 경감과 조세제도의 개혁을 제안했다. 여기서의 개혁은 민중들이 원 하는 토지개혁이 아니라 지주제를 온존하는 가운데 부분적인 조세경감과 수 취체제의 개혁을 통해 봉건모순을 해결하려는 안으로 판단된다. 또한 서양 농법을 도입하고 상품 작물을 심어 해외수출을 꾀한다는 안을 내었는데 단 작 농업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주제 온존과 연결된 것이다. 상공업과 무역의 육성을 촉구하고 수출을 통한 국부증진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개혁안은 조선정부 및 독립협회의 부국강병안과 궤를 같이하며 조선 이 나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당시 개화 파의 경제개혁안에 영향 줌.

* 내용을 분석: 추진주체, 개혁목표에서 정부의 안과 차이. 불평등조약질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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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머리 서양인들, 대한제국 정부의 관리가 되다 ◆ 35

확대를 통해 조선의 경제와 시장을 개방, 외자, 기술, 인력도입을 통한 근대 경제개발임. 그러나 서양인 주도하의 개발.

ex) 차관금을 관리할 재정위원회 설립.

5) 고종과 고문관

고종의 측근관리로 정권안정에 일조. 치외법권을 향유하는 서양인이라는 신 분을 이용하여 주로 대외적인 위기에 맞서 고종을 지원하고 정권을 안정시키 는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 고문관들은 조선정부 및 고종의 대내외정책을 연구․

자문하는 일종의 참모로서의 역할 담당. 필요한 정보와 자문을 제공하고 정책 을 수행하는 집행자로서의 역할. 고문관들은 자신들의 외교․경제정책의 유효성 을 설파했고 국제법과 서양 열강에 대한 신뢰를 가지도록 부추켰다. 그러나 고종이 고문관들의 끊임없는 자문, 청원, 제안을 다 들은 것은 아님. 이들의 자문은 조선인들의 목적이나 의도에 부합되어야 채택되었던 것이다.

6) 고문관과 이권수수

국내외 외교․통상문제를 담당하면서 필연적으로 이권업무에 관여. 이권수주는 비공식적으로 전개. 개혁안을 통해 이권사업의 필요성을 부각시키고 차관도입 을 통해 그 반대급부로서 이권알선을 주선하고 있는 특성을 보임. 고문관들은 이해관계가 있는 공사들의 막후에서 정보를 제공하고 조선인 담당관리들을 소 개․면담. 고종에게 이권양여의 필요성을 설파하며 비공식적으로 청원하는 보조 역을 맡았다. 이권양여의 대가로 고문관들도 중개역할을 맡은 조선 측 관리들 과 함께 비자금을 수수했다.

7) 고문관과 열강과의 관계

공생관계. 고문관들은 금전적인 이익 및 지위를 제공․보호해주는 외국인들과 공사관에게 반대급부로 정보제공 및 이해를 대변하였다. 이 같은 경향은 청일 전쟁 후 조선정부의 확고한 정치력의 부재와 권력쟁탈이 진행되면서 심화되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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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제15기 박물관대학 하반기과정

4. 나가는 말

개항 이후 서양인들과 서양인 고문관들을 통해 들어 온 근대성, 즉 서구성은 우리에게 전 방위적으로 큰 충격. 근대성의 강요ㆍ갈등ㆍ혼돈ㆍ수용ㆍ활용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근대적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 유교와 중국 외에 다른 대안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신분해방, 민족국가, 자유, 평등, 진보, 문 명, 경제발전 등 평등하고 풍요로운 외연을 띠고 있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희 망이자 목표가 됨. 그러나 근대성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식민성을 간파하고 대 비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좌절과 실패의 경험이 필요. 우리에게 개항 기는 그런 시련의 시작, 식민지기는 좌절과 굴절이 본격화되는 시기, 민족분단 과 한국전쟁은 시련의 절정기. 그 후 한국이 이룩한 민주화와 경제발전은 바 로 이런 시련과 좌절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 소중한 것. 20세기 치열한 민족 생존시대를 지나 21세기 다민족 시대를 맞이하여 한국 역사는 이제 홀로 엮 는 역사가 아니라 외국인들과 함께 씨줄과 날줄로 엮어가는 역사. 외국인들과 함께하는 역사는 바로 개항을 매개로 시작, 역사의 굽이굽이 시련 속에서 외 국인들은 우리와 함께 슬퍼하고 도와주고 배반하는 또 하나의 우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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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텐 베리만의 조선생물 탐사기

문 만 용

(KAIST 한국과학문명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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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텐 베리만의 조선생물 탐사기 ◆ 39

스텐 베리만의 조선생물 탐사기

목 차

1. 박물학자 ․ 탐험가 ․ 사진작가 ․ 대중강연가, 베리만 2. 베리만의 한반도 탐사

3. 『한국의 야생동물지』

4. 일제 강점기 한국생물 연구

구한말이나 일제 강점기 한반도를 찾았던 이방인들이 남긴 기록들이 적지 않 지만 베리만(Sten Bergman, 1895~1975)의 『In Korean Wilds and Villages』

(1938)는 한반도의 동물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이 책의 원 제는『한국의 야생과 마을』로서 당시 삶의 여러 흔적들을 되짚어볼 수 있는 민속학‧인류학적 내용도 많이 담겨 있지만『한국의 야생동물지』(집문당, 1999)라 는 번역서의 제목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동물에 대한 이야기가 풍부하다.

이는 필자인 베리만이 동물학자이자 탐험가였고, 한반도를 찾은 주된 목적이 동물 표본 채집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였다.

베리만은 왜 지구를 절반이나 돌아 우리 땅을 찾았을까? 그가 보고 듣고 채 집해간 것들은 무엇이었나? 스웨덴의 동물학자가 찾아와 이 땅의 동물들을 찾 아 헤맬 때 우리 학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오늘의 강연은 베리만의

『한국의 야생동물지』를 중심으로 이같은 질문에 답을 해보고자 한다. 우선 베리만이 어떤 사람인지 소개한 다음 그의 한반도 탐험의 배경과 과정에 대해 설명하겠다. 그리고『한국의 야생동물지』에 포함된 내용들을 소개한 다음 일 제 강점기 한국의 생물에 대한 연구 상황을 살펴보면서 한국인 생물학자들에 대해서도 논의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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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제15기 박물관대학 하반기과정

1. 박물학자‧탐험가‧사진작가‧대중강연가, 베리만

우리말로 자연사 혹은 자연학으로도 번역되는 박물학은 동식물에서 지질광물 에 이르기까지 자연을 이루는 모든 대상들을 정리하여 분류, 체계화하는 학문 으로, 베리만이 한국을 찾았던 1930년대까지 생물학보다 박물학이라는 표현 이 일반적이었다. 당시 학교에서 가르치는 박물 과목은 동식물학, 지질광물학 에서 보건위생까지를 포괄하고 있었지만 역시 동식물학이 중심이었다. 박물학 자에게 채집이나 이를 위한 탐사여행은 연구의 기본이자 출발점이 되며, 경우 에 따라 목숨을 건 탐험이 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박물학자들은 대 체로 자신의 연구에 큰 영향을 준 탐사의 경험을 지니고 있다.

오늘의 주인공인 스웨덴의 베리만 역시 박물학자이자 탐험가였다. 그는 1895년 베름란드주의 란세테르에서 태어났으며, 번역 등 문학에 종사한 부모 님의 글을 교정 보는 등 어릴 때부터 글쓰기에 대한 감수성을 키웠으나 그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동물, 여행, 사진이었다. 베리만은 스톡홀름 대학에서 동 물학, 식물학, 교육학을 전공했으며, 1920~23년까지 캄차카 탐험을 마치고 돌아와 대학원 공부를 다시 시작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20년 대학에 서 식물을 전공한 당뉘와 결혼식을 치른 후 신혼여행으로 캄차카 탐험을 선택 했다. 1923년까지 계속된 이 탐험의 경험은『개썰매와 스키로 가로지른 캄차 카(Through Kamchatka by Dog-sleds and Skis)』(1927)라는 제목의 탐험 기로 출판되었다.

베리만은 캄차카 외에, 1929~30년 쿠릴 열도, 1935~36년 한반도, 1948~50 년과 1952~53년, 1956~59년 등 세 차례에 걸친 뉴기니 탐험을 했다. 베리 만의 탐험은 기본적으로 동물학적 목적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는 정력적인 수집 가이자 뛰어난 사진작가였으며,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매우 꼼꼼 한 민속학‧인류학적 기록도 남겼다. 그의 탐험 경험은 모두 15권의 책으로 엮 어 나왔고, 뉴기니의 경험담을 담은『나의 아버지는 식인종(My father is a Cannibal)』은 3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그의 다양한 탐험 경험 은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해서 그는 수많은 곳을 다니며 강연을 했고, 라디오 방송에 고정출연해서 강연을 했는데, 그의 강연 횟수는 도합 6000회 가 넘었다. 베리만이 채집한 표본들은 현재 스웨덴 자연사박물관, 스웨덴 왕립 과학아카데미, 민속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가 일곱 번의 탐험을 통해 채집한 동물 표본은 곤충을 제외하고도 5000여 점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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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텐 베리만의 조선생물 탐사기 ◆ 41

2. 베리만의 한반도 탐사

베리만은 1935년 2월 21일 경성에 도착하여 21개월간 한반도에 머물면서 전국에서 수많은 동물을 채집했다. 베리만이 한국을 방문하게 된 데에는 그보 다 9년 여 전인 1926년 10월 고고학자이며 스웨덴의 왕세자인 구스타브 6세 부부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경주의 고분을 발굴한 인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왕세자는 이를 계기로 한국의 야생 동물을 채집하여 스웨덴 자연사박물관에 전시하고자 했고, 그 임무를 베리만이 맡게 된 것이다.

베리만은 스웨덴 최고의 박제사로 꼽히는 훼크비스트와 함께 13일에 걸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경성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한 저녁에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우가키가 그를 위한 만찬을 베풀어주었는데, 이후 한국 체류 기간 동안 베리만은 백두산 탐험 때 마적들의 습격을 막기 위해 관동군의 호위를 받는 것을 비롯해 경찰, 세관, 총독부 고위관리들로부터 직간접적인 협조를 받 았다. 베리만은 일본에서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고, 함경도의 지리에 능숙한 일 본인 사냥꾼 후지모토를 고용하여 당시 유럽인들에 이름난 휴양지였던 함경도 주을에 캠프를 차리고 본격적인 사냥을 시작했다.

베리만이 사냥한 야생동물 중 가치가 있는 것은 훼크비스트가 현지에서 박제 를 하여 스웨덴으로 보냈다. 베리만 일행이 잡은 짐승은 곰, 멧돼지, 영양, 날 다람쥐, 꿩, 멧닭, 부엉이 등의 조류, 갑각류, 어패류 등 매우 다양했으며, 베 리만이 가장 큰 관심을 지니고 있던 조류의 경우 스웨덴으로 보낸 것만 380 종에 달했다. 그는 북부지방의 채집을 끝내고 지리산을 탐사했으며, 제주도에 도 건너가 야생 동물을 사냥하기도 했다. 또한 신의주에 머물면서 압록강의 조류 생태를 조사하기도 했다. 그가 채집한 동물 표본들은 모두 스웨덴 자연 사박물관에 기증되었고, 현재까지 소장되어 있다. 베리만이 한국에 도착한 다 음달 경성에서 과학지식보급회 주최의 환영회가 열렸고, 이때 숭전농과 교수 이자 곤충학자인 김병하가 500여 점의 곤충표본을 스웨덴 황태자에게 봉정했 는데, 이 표본들 역시 스웨덴 자연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베리만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조선박물학회, 왕립 아시아학회 한국지부, 이화 학당 등 여러 기관에서 한국의 야생동물에 대해 강연을 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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