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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주요연보

문서에서 차례 (페이지 50-54)

[1889년]

• 3월 21일 도쿄에서 출생. 아버지 나라요시, 어머니 가츠코의 3남으로 도쿄시 아자부구 이치베이조에서 탄생.

[1909년] (20세)

• 버나드 리치의 일본방문으로 교우 시작.

• 간다(神田)에서 조선 도자기(모란이 그려진 항아리)를 구입.

야나기 무네요시와 한국 ◆ 49

[1910년] (21세)

•『시라카바(白樺)』 창간, 동인으로 논문 등을 기고.

『시라카바(白樺)』

- 『사라카바』는 철학, 종교, 문학, 미술이 종합적으로 다루어지는 잡지로서 1910년부터 1923년까지 발간.

- 가쿠슈인 출신들을 중심으로 하여 간행된 문예 잡지로서 인도주의, 이상주의, 개성 존중 등을 주창, 다이쇼 문화의 중심 역할을 담당.

- 야나기 무네요시를 비롯한 시가나오야, 무샤노코지 사네아츠, 기시다 류세이 등이 참여하여 서양 철학, 서양 미술 등 서양 문화를 중점적으로 다룸.

- 이들은 각기 다른 문예지를 발간하던 경험이 있었으나『사라카바』는 도쿄제국 대학교 철학과에 갓 입학한 야나기 무네요시를 중심으로 하여 잡지 발간이 이 루어짐.

- 당시 야나기 무네요시의 역할은 기획, 편집에서부터 표지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이름.

[1919년] (30세)

• 조선에서 3.1 만세 운동이 발발, 일본 정부의 탄압에 마음 아파함. 『요미우리 신문』에 「조선인을 생각하다」를 게재, 같은 글을 『저팬 애드버타이저 (The Japan Advertiser)』에 영어로 번역하여 발표. 남궁벽 등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이 야나기 집을 방문.

◎ 야나기의 조선 관련 저서

- 야나기는 조선의 옛 작품을 사랑하면서도 그 민족에 대한 사랑과 존경 심이 희박한 상황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 조선을 잘 알기 위해서는 살 아있는 사람들과 친해지기를 권고.

- 1922년 『신초』 1월호에 조선 미술론에 대하여 처음으로 글을 쓴

「조선의 미술」을 시작으로 많은 글을 저술.

- 그는 이 글과 함께 「조선인을 생각하다」, 「조선의 친구에게 보내는 글」, 「그의 조선행」, 「조선민족미술관의 설립에 대하여」, 「석불사 의 조각에 대하여」, 「사라지려는 한 조선건축을 위하여」 등 논문을 종합하여 『조선과 그 예술』을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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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32세)

•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와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을 계획. 간다 류이조소에서

『조선민족미술전람회』를 개최. 부인(야나기 가네코)과 함께 조선으로 건너 와 각지에서 강연회, 음악회를 개최(네 번째 방문).

[1924년] (35세)

• 조선민족미술관 개관

◎ 야나기와 조선민족미술관

- 야나기가 조선민족미술관 설립 취지에서 미술관 명칭에 ‘민족’이라는 단어 를 삽입한 것은 조선민족이 지닌 고유한 미를 일본인들에게 알리고 또한 조선인들에게 조선문화의 독자성과 그 가치를 자각하도록 하려는 목적.

- 문화적 동화 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던 상황 아래서 ‘민족’의 부각은 야나기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

- 조선민족미술관은 일본민예관의 출발점. 야나기는 조선 도자기와의 만남 을 시작으로 용도성에 충실한 기물이 아름답다는 발상을 통해 이후 ‘민 예’라는 새로운 사상을 확립.

- 조선민족미술관 설립 후 1936년 새로운 미의 표준을 세우기 위한 미술 관(일본민예관)을 설립.

[1925년] (36세)

• 하마다, 가와이와 함께 민중적 공예라는 의미의 ‘민예(민중공예)’라는 신조어를 만듦.

[1924년] (37세)

• 도미토모 겐기치, 가와이 간지로, 하마다 쇼지 등과 공동으로『일본민예미술관 설립취의서』를 발표함.

◎ ‘민예(민중공예)’를 만들다

- 야나기는 『일본민예미술관 설립취의서』에서 처음으로 ‘민예’라는 말을 사용.

- 야나기 무네요시, 가와이 간지로, 하마다 쇼지 등은 여행 중에 만들어 낸 민중적 공예를 의미하는 ‘민예’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민중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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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품을 전시하는 시설의 설립을 계획하고, 1926년 4월에 일본민예미 술관의 설립을 발표.

- 취의서에서는 야나기는 일본민예관의 설립 목적을 “우리들은 물건을 통 해서 미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 다”라고 적고 있음.

- ‘민중적 공예’인 ‘민예’는 민간에서 사용되는 일상품을 의미하며, 고급미 술을 의미하는 예술보다 무명의 장인들이 만들어 내는 실용적인 공예를 강조.

- 당시 일본에서 공예가 순수미술보다 하위의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던 상 황에도 불구하고 야나기는 공예야말로 미에 이르는 진실한 길이며, 진 정한 길은 민예에 있다고 주장.

[1936년] (47세)

• 10월 도쿄도 고마바(駒場)에 <일본민예관> 개관. 초대 관장으로 취임.

[1954년] (65세)

•『야나기 무네요시 선집』 간행 시작.

[1961년] (72세)

• 뇌출혈로 쓰러져 5월 3일에 사망함. 일본민예관에서 장례.

[1984년]

• 9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수여 받음.

52 ◆ 제15기 박물관대학 하반기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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