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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전환기 한국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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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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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형석*ㆍ이난수**ㆍ이철승***ㆍ이종란****ㆍ김현우*****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교(敎)의 철학 3. 민(民)의 철학 4. 미(美)의 철학 5. 나오는 말

<국문초록>

본 논고의 목적은 우리철학총서 집필내용을 중심으로 근대전환기 한국 종교․미 학에 대한 성찰과 전망을 시도하는 데에 있다. 이 연구는 근대전환기 전통철학 전반 을 통섭적인 방법으로 서술하는 가운데 우리철학의 자생이론을 기반으로 현대적 가치를 체계화한다는 대주제의 하위 분야로서 진행되었다. 전통철학인 유(儒)․불 (佛)․도(道)를 중심으로 근대전환기 철학 양상인 민족종교 그리고 전통 미의식 등을 <아我>(총론), <리理>(성리학), <심心>(양명학), <기氣>(기철학), <실實>

(실학), <교敎>(도교․불교), <민民>(민족종교), <미美>(미학)의 8가지로 구분하 여 이 시기 전통 철학을 통섭적으로 고찰하였다. 그 중 본 논고는 근대전환기 한국 종교와 미학을 담당하고 있다.

본 논고에서 말하는 ‘근대전환기’는 서세동점의 시작인 19세기 중후반부터 일제

* 제1저자, 경상대학교 철학과 조교수 ** 공동저자, 조선대학교 우리철학연구소 연구원 *** 공동저자, 조선대학교 철학과 부교수 **** 공동저자, 조선대학교 우리철학연구소 연구원

***** 공동저자,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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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기를 포괄한다. 이 시기를 포함하여 전통철학의 연구는 60% 이상이 유교분야 이고, 한국 종교와 미학에 대한 연구는 매우 적다. 하지만 이 시기 종교와 미학은 근대전환기 기층 민중의 근대적 문제의식이 잘 반영되어 있으며, 유교철학보다 독 자적인 자생이론이 잘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으로 한국 종교와 미학은 현재 우리 철학의 지향점을 보다 명확히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나아 가, 다양한 전통철학의 연구와 함께, 곧 도래할 통일한국의 통합 가치와 글로컬 시대의 미래 구상 속에서 ‘우리철학’의 의미와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

주제어 : 근대전환기, 도교, 불교, 동학, 대종교, 증산교, 원불교, 미학

1. 들어가는 말

본 논고는1) 근대전환기 한국의 종교와 미의식 전반을 통섭적인 방법으 로 서술하는 가운데 자생이론을 통한 우리철학의 특징과 그것의 현대적 가 치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본 논고에서는 근대전환기 종 교와 미의식을 교의 철학, 민의 철학, 미의 철학으로 구분하였고, 그 중 교 의 철학은 도교와 불교, 민의 철학은 동학ㆍ대종교ㆍ증산교ㆍ원불교로 세 분하여 고찰하였다.

본 논고에서 말하는 ‘근대전환기’는 서세동점의 시작인 19세기 중후반부 터 일제강점기를 포괄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내적으로 봉건주의의 모순 과 외적으로 제국주의로 무장한 외세의 침략에 의한 민족모순이 만연하였 다. 이러한 시대적 모순에 대한 인식과 반응 양상은 대체로 당시 위정자들 이나 엘리트지식인 계층에게서 다양한 이론과 사상으로 드러난다. 그 속에

1) 본 논고는 2015년부터 연구된 우리철학총서 연구사업의 집필내용을 중심으로 요약, 작성되었다. 그 중 김형석은 서론과 결론 및 도교와 불교, 이철승은 동학, 김현우는 대종 교, 이종란은 증산교, 이난수는 원불교 및 미의 철학 등을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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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단순히 당대를 합리화하기 위한 변명들도 있고, 우국과 애민에서 나온 논의들도 있다. 우국과 애민, 혹은 철저한 공의를 지향하는 논의들에는 다 음과 같은 다양한 입장이 있다. 전통 성리학을 고수하거나, 이를 당대에 맞 게 재해석하는 입장도 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자기 이론의 강화, 유․

불․도 삼교의 통합, 서구 기독교와의 절충 등 다양한 시도가 나타났다. 더 나아가, 철저하게 급진적 서구화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비록 이런 양상 들이 당시 시대 모순에 대한 산물들이지만, 정작 기층 민중의 근대 의식을 모두 반영한 것은 아니다.

기층 민중은 현실에서 당대 모순에 직면했기에 그들의 반응은 단순하면서 도 역동적인 양상이었다. 구체적으로 그들의 대응은 어렵고 복잡한 철학적 이론보다 종교와 미학의 영역에서 잘 나타났다. 과거의 종속적 삶에 잔혹했던 세계사적 격변기를 겪어내며,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믿고 의지하고 고민하던 것들은 ‘종교’라는 영역으로, 아끼고 사랑하던 것들은 ‘아름다움’의 영역으로 나타났기에 본 논고에서는 근대전환기 종교와 미학에 주목하였다.

그중 도교와 불교는 전통 종교로서 오랫동안 기층 민중의 신앙을 대변해 왔다. 근대전환기의 시대적 모순에 맞서 도교는 반외세적 민족주의 정신을 선양하기도 했으며, 다양한 사상과 결합하여 전통적 윤리의식에 기반한 동 도서기의 절충적 태도 또는 반항적 민간도교의식으로서 민중종교로 통합 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불교 역시 한편으로 개화에 앞장서는 등 근대 화에 적극적인 모습을 드러냈고, 다른 한편으로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 해 거사불교와 결사운동 등 한국불교 전통의 수립과 계승을 위해 노력했다.

민족종교는 우리민족의 고유한 종교의식과 관련이 깊다. 외세의 침략으로 민족 공동체에 위기가 오거나, 외래 사상의 급격한 유입으로 문화 정체성이 위협받을 때, 고유의 종교의식은 현실의 형태로 재현되었다.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1860년 동학을 창시하였다. 그는 전통 유ㆍ불ㆍ도를 중심으 로 천주교를 비판적으로 계승ㆍ변용하여 평등과 자의식에 관한 이론을 새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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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정초했다. 한편, 당시의 한국 사회에서 동학의 창시는 이후 다양한 민족종 교의 출현으로 이어져왔다. 나철(羅喆, 1863∼1916), 오기호(吳基鎬, 1865∼

1916) 등이 주도한 대종교는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단군(檀君)을 신으로 모 시는 민족종교로 강한 민족주의를 지향하였다. 일제 초기 독립운동에 중요한 기반이었으며 항일무장투쟁을 강조하여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강 일순은 해원과 상생의 정신을 통해 한민족 중심의 이상사회를 도모하였다.

그 과정에서 기층 민중은 사회를 이루는 주체로서 평등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강일순의 이 정신은 이후 다양한 증산교단으로 이어졌다. 박중빈이 창건한 원불교는 민중의 교화를 중심으로 민중의 의식을 실제적으로 변화시킬 방법 을 고민했으며, 이는 원불교 이념의 근대적 공동체관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민족종교의 양상들을 본 논고에서는 동학의 자의식, 대종교의 민족의식, 증 산교의 이상세계관, 원불교의 근대적 공동체관을 중심으로 각 종교가 기층 민중에 끼친 영향을 정리할 것이다.

미의 철학은 근대의 조선인이 추구한 독특하거나 고유한 아름다움과 깊 게 관련된다. 다시 말해 미에 대한 표현 방식의 규칙 그리고 표현 요소와 관련된 제반 상황을 통해 드러나는 고유한 정신적 원리를 바로 미의 철학 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논의들을 통해 근대전환기 종교ㆍ미학 분야의 다양한 논리 와 현실대응을 고찰하였다. 다만 본 논고는 근대전환기 종교․미학에 관한 전반적인 흐름을 대상으로 한 우리철학총서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각 분야의 세부적인 논의보다는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통섭적 연구 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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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敎)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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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교

여기에서는 근대전환기 한국 도교의 흐름과 그 특징에 대해 한국 도교 전통의 맥락 속에서 검토하였다. 특히 당시 한국 도교의 문제의식과 이론을 잘 드러내고 있는, 전병훈(全秉薰)의 뺷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뺸에 주 목하였다.

(1) 근대전환기 한국 도교의 흐름과 특징

근대전환기 한국 도교의 전개 양상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 다. 첫째 관방도교가 아닌 민간도교의 색채를 띠는 경우이다. 둘째 다양한 사상을 결합하여 만들어진 민족종교의 형태로 드러나는 경우이다.

이 중 조선 후기 이래 민간도교의 전개양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후 기 민간도교의 경향에 대해 관우숭배신앙을 지적할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에 의해 수입되었으며 이후 왕실의 주도로 유행되었다. 또 한 이러한 관제신앙(關帝信仰)은 민간도교의 또 다른 양상인 권선서(勸善 書)의 유행과도 관련된다. 권선서3)는 명대(明代) 이후 특히 많이 만들어졌 으며, 조선 초기에 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권선서의 유행 중 특

2) 본 절에서 도교 부분은 김형석, 「근대전환기 도교전통의 모색 - 전병훈의 뺷정신철학통 편뺸에 보이는 근대적 문제의식을 중심으로」(뺷인문학연구뺸 52,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 원, 2016.)을 중심으로, 불교 부분은 「개항기 한국불교의 모순 인식과 반응」(뺷인문학연 구뺸 54,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7), 「근대전환기 한국불교 교단의 지향- 국가권 력의 ‘외호’에서 자립으로」(뺷동양철학뺸 48, 한국동양철학회, 2017)의 주요 내용을 중심 으로 재구성하였다.

3) 차주환은 권선서 자체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권선서 자체가 유불 도 삼교의 사상이 혼융된, 민중교도를 지향한 권선징악을 내용으로 하는 책이기는 하나 도교적인 색채가 가장 농후하고 또 도교연구의 일환으로 다루어지고 있다.”(차주환, 「조 선후기의 도교사상」, 뺷동양학뺸 24권 1호 부록 동양학학술회의록, 단국대동양학연구소, 1993,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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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주목할 점은 19세기에 정부주도의 간행 및 국역화사업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양은용은 근대 민간도교적 요소는 민중의 신앙과 사회윤리적 측면 으로 부각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권선서 신앙을 ‘근대’적 경향이라는 키워 드로 이해하려고 했다.4)조선 후기 권선서의 유행은 중국 권선서의 보급에 머물지 않고 독자적인 권선서의 편찬에까지 이른다. 정재서는 이 책에 나타 난 신격(神格)을 분석하여, 조선 권선서와 무풍(巫風)의 밀접한 관련성을 지적하면서, 조선 (민간)도교의 특징으로 간주하고 있다.5) 19세기 조선 민 간도교의 세 번째 전개 양상으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은 종교결사 선음즐교 (善陰騭敎)와 무상단을 중심으로 한 삼성제군(三聖帝君 : 관제제군․문창 제군․부우제군) 신앙과 난단도교적 경향이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주문수 행과 강필, 즉 난서(欒書)이다. 난서(欒書)란 신과 합일상태에서 강필하는 일종의 자동서기법을 의미한다. 이러한 강필과정에서는 주문수행을 통하여 천기(天氣)와 감응(感應)하는 상태가 중요시되었다. 이외에도 권선서의 경 우처럼, 조선에서 직접 만들어진 난서도 등장하였는데, 감응(感應)상태를 중요시한 점 및 난서(欒書)가 직접 만들어진 점 등을 고려할 때 조선 민간 도교와 무속(巫俗) 전통이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다양한 사상을 결합하여 민족종교의 모습으로 드러난 경우는 정재서의 다음과 같은 지적을 참고할 수 있다. 즉 조선 말기에 일어난 반항적 민간도 교의식이 기존 질서의 해체와 재통합을 목표로 하는 민중종교의 이념에 수 용되어 이른바 민족종교 또는 신종교 현상으로 표출된 것이다.6)동학, 대종 교 계통이 대표적인 예이며, 이들의 특징으로는 민족주의적 경향과 체제비

4) 양은용, 「한국 도교의 근대적 변모」, 뺷한국종교사연구뺸 제5집, 한국종교사학회, 1996, 366~367면.

5) 정재서, 「韓國 民間道敎의 系統 및 特性」, 뺷도교문화연구뺸 7, 한국도교문화학회, 1993, 201~203면.

6) 같은 글, 203~207면; 정재서, 뺷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4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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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적 경향, 서학(현대사상)과의 결합, 유․불․도 삼교 합일의 경향 등을 거 론할 수 있다.

(2) 근대전환기 한국도교 전통의 모색 : 근대적 문제의식과 사상적 모색 김성환이 지적했듯이 내단수련에 정통한 수련가이자 철학자인 전병훈 (全秉薰, 1857~1927)은 사상사가(思想史家)이자 국학자인 이능화와 함께 한국 근대선도연구의 두 흐름을 상징한다.7)이 중 이능화는 이론이나 학술 적인 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근대 전환기에 처하여 도 교 전통의 맥락을 계승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근대적 문제의식에서 출발 하여 서양의 이론들을 흡수하고 도교이론을 새롭게 구축하였다는 점에서 전병훈의 사상을 연구 주제로 삼았다.

전병훈의 삶과 학문적 배경을 통해 그의 문제의식을 알 수 있다. 그는 청 년기까지 성리학을 공부하였고, 관료 시절에는 외세의 압박 아래 조선의 어 려움을 체험했으며, 관직 생활을 은퇴한 후에는 중국으로 가서 도교 이론 및 수련을 직접 연마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유․불․도라는 학문 배 경, 지식인으로서의 우환의식, 그리고 동도서기(東道西器)론적 담론 속에 서 근대화와 제국주의 등 당시의 시대적 모순과 과제에 대하여 뚜렷한 나 름의 입장과 방안을 제시하였다. 전병훈은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근대서양 철학까지 그리고 노자, 공자로부터 강유위에 이르는 동양철학을 아울러서 세계 평화, 세계 통일 정부, ‘공화’ 등 당대의 논제에 대해 설파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19세기 이래 한국 도교의 전통의 맥락에서 전병훈의 뺷정 신철학통편뺸8)에 보이는 근대적 문제의식을 고찰하면, 그에게서도 유․

불․도 삼교 사상 및 윤리의식의 합일, 내면적인 집중을 통해 천(天)과의

7) 김성환, 「한국의 선도 연구」, 뺷도교문화연구뺸 28, 한국도교문화학회, 2008, 9~13면.

8) 뺷정신철학통편뺸은 1920년 2월 7일 북경에서 출간된 책이며, 유․불․도와 뺷천부경(天 符經)뺸을 비롯한 한국사상, 그리고 서양의 철학사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통합한 전병훈의 대표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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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일 도모, 단군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적 전통, 서학[현대사상]과의 합일 전통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뺷정신철학통편뺸에서 나타난 문제의식은 한마디로 ‘자유’ 또는 ‘하늘 (에 근원함)[(原)天]’이라는 관념으로 귀결시킬 수 있다. 비록 ‘자유’라는 근 현대적 개념이 나타나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 개념이 전통적인 맥락에 근거하고 있기도 하다. 즉 ‘자유’를 얻기 위해서 ‘천(天)’과의 합일이 필요하 며, 이것이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의 영역에서 통합되는 것은 전통적인 맥락이기도 하다. 그의 사유 속에는 근대적 문제의식이 한국 도교 전통을 비롯하여 다양한 사상과의 만남을 통해 전개되고 있으며, 그는 이를 ‘조제 (調劑)’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연구를 통해 우리는 전병훈이 제시한 구 체적인 방안이나 제도가 오늘날 얼마나 유효한지를 펑가하기 보다, 그의 시 도 속에 담긴 근대적 문제의식과 철학적 모색이 아직까지 완결되지 않은 채 여전히 진행 중임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2) 불교

(1) 개항기 한국불교의 인식과 반응

여기에서는 구한말 개항기로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한국불 교가 겪은 주요 사건들을 통해 한국불교가 만난 시대적 모순, 모순에 대한 인식, 그에 대한 반응 양상을 분석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친일-항일의 구도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과 종교, 세간적 국가와 출세간적 진리라는 구도 를 제시하고, 또한 당시 불교인들이 느꼈던 딜레마 상황을 조망했다. 즉 이 연구는 근대전환기 시대적 모순에 대해 불교적 입장에서 인식하는 태도 및 그 모순에 대하여 반응하는 양상에 대한 고찰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거사불교와 결사운동을 통해 불교인들의 자각과 행동을 살펴 보았고, 개화파와 개화승을 통해 선각적 불교개화 그룹의 문제의식과 행동 에 대해 고찰하였다. 또한 일본불교의 침투, 일본불교 종파들의 진출과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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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입성해금 등에 드러나는 시대적 모순에 대하여 당시 불교인들의 인식, 그 리고 그에 대한 반응에 대하여 살펴보고, 이를 한국 불교의 입장에서 어떠 한 이론과 근거를 가지고 정당화하는가라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들 각각 의 동기나 목적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당시 반외세와 반봉건이라는 시대적 모순 속에서 각자 자신의 선택과 입장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또한 이러한 시대적 모순에 대한 반응이라는 형식으로 드러난다. 예컨대 경허의 결사운동은 시대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이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보다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불교의 진리를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시대적) 문제해결의 적절성, 타당성, 효율성 등에 대한 평가와 무관하게, 불교라는 노선 자체에서는 정당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한편 불교계의 선각적 개화그룹이나 이후 일본불교에 대한 조선불교 대부 분의 반응의 경우, 전통 성리학에 맞선 근대적 불교의 선양이라는 점에서

‘근대화(반봉건)’의 논리는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이들에게서 ‘반외세(반 제)’의 논리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들의 동기나 목적을 ‘애국’인지 ‘매국’인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들은 적 어도 ‘친일(친외세)’적 성향이 강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반봉건과 반외세(반제국주의)라는 시대정신을 불교 계에서 언제부터 어떻게 인식하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그 정신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출세간 - 세간 및 호법(護法) - 호국(護國) 그리고 호민(護民)의 논리는 어떤 형태로 개입하여 영향을 끼치고 각자의 처신 및 노선을 정당 화해나갔는지 살펴보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일제강점기 이래 나타나는 ‘한국불교 전통 수호’라는 측면 - 예컨대 이종욱의 경우 - 과 ‘피압박 민중을 위한 보살도 이념’ - 예컨 대 한용운의 경우 - 이라는 한국불교의 두 반응양상에 대하여, 불교 교리의 보편주의(혹은 석가모니의 교리)라는 측면에서 각각 어떻게 해석될 수 있 는지의 문제가 남는다. 또한 ‘한국 고유의 불교 전통’을 불교적 진리, 민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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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근대화라는 세 측면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도 남는다.

(2) 근대전환기 한국불교 교단의 지향 : 국가권력의 ‘외호’에서 자립으로 여기에서는 근대 전환기 한국불교의 경험 그리고 지향에 대하여 불교교 단과 세속권력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고찰했다. 즉 한국불교가 구한말부터 일제시기의 시대적 모순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반응의 양상을, 국가권력의

‘외호’에 대한 요청, ‘외호’로부터 벗어남, 한국 불교교단의 자립이라는 방향 성의 수립 등의 과정으로 분석하였다.

먼저 석가모니 당시 불교교단과 세속권력의 ‘외호(外護)’에 대해 살펴보 았고, 이후 불교의 역사 속에서 드러난 양상을 분석하였다. 다음으로는 구 한말 적지 않은 수의 조선불교사찰이 일본불교사원에 관리청원을 했던 사 실과 함께, 사사관리서 등을 통해서 조선불교가 조선정부에게 다시 공인되 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는 세속권력인 국가에 의해 ‘외호’를 받게 된다 는 것인데, 결국 국가의 승단관리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 면 과연 세속권력이 교단을 관리 또는 통제하는 것이 불교의 교리나 석가 모니의 본의에 비추어볼 때 정당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이 와 관련하여 일제 강점기 사찰령은 세속권력의 강력한 통제를 의미하는데, 결국 한국 불교교단의 운영뿐만 아니라 교리 내용 방면에도 왜곡이나 변질 을 가져오게 되었다. 3․1운동을 경험한 이후 민족의식을 자각한 한국불교 계는 사찰령에 대해 보다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궁극적으로는 일제라는 국 가권력으로부터 자립하여 불교통합종단을 수립하여 운용해야한다는 지향 을 명확히 가지게 되었다.

‘외호’가 아닌 ‘자립’이라는 근대전환기 한국불교의 방향성에도 불구하고, 한계로 지적할 점은 다음과 같다. 세속권력의 승단 관리에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은 일제 조선총독부의 통제가 시작된 이후라는 것이다. 또 일제시기의 현실에서, 세속의 정치권력으로부터 승단의 ‘자립’이라는 문제의식은 시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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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인 ‘근대화(반봉건)’와 ‘민족(반외세, 반제국주의)’의 맥락 속에서 복잡하 게 얽혀 있었다. 일제강점기 세속권력으로부터 자립하는 통합승단이라고 할 수 있는 ‘총본사’의 설립을 누가 주도할 것인가 또는 ‘총본사’를 일제 세속권력 에게 승인받을 필요성의 문제, 나아가 ‘자립’한 한국불교교단의 내용을 정의 하는 것과 관련하여, 누구를 종조(宗祖)로 삼을지, 종통(宗統)과 종단(宗團) 의 주체, 통합, 운용 등의 문제가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한국불교에서 개혁 [근대화]해야 할 대상[제도]을 어떻게 규정할지, 또 한편으로 지켜가야 할 계율과 수행과 포교 면의 전통을 어떻게 규정할지 등의 문제와 연결될 수 있다. 그런데 근대전환기 한국불교에서 개혁하거나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라는 문제는 단순히 ‘불교’[호법護法]만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근대화’와

‘민족’이라는 두 시대적 모순 및 과제[호국護國 또는 호민護民]에 대한 ‘불교’

의 인식, 위상, 역할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3. 민(民)의 철학

1840년 이후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조선에는 다양한 종교가 출현하였다. 유 교는 종교는 아니었지만, 서구 문명의 근저가 기독교라는 통념으로 인해 우리 전통 문화의 근저로서 기독교와 같은 종교로 해석되었다. 이 때 일본에서 들어온 근대 개념어 ‘종교(宗敎)’는 ‘religion’의 번역어였지만, 한국 유학자들 은 ‘宗敎’라는 한자어를 통해 이 개념을 추정했다. 때문에 이들의 종교는 ‘최 고의 교지’로, “修道之謂敎”(뺷중용뺸)의 “敎” 또는 “傳不習乎?”(뺷논어(論 語)뺸)의 “傳”과 같은 의미였다. 하지만 서학을 통해 유입된 천주교와 1885년 부터 들어온 개신교 등 기독교가 확산되면서 일반 국민들에게 종교는 유교의 도덕담론이 아닌 ‘절대신’ 또는 ‘구원자와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사고가 확산 되어 갔다. 이 와중에 조선에서는 기독교와 대비적인 민족종교가 동학, 대종 교, 증산교, 원불교 등의 순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현실을 중시했다는 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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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전통 유교와 유사하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이나 예수에 해당하는 절대자 및 구원자를 설정하였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논리와 연관성이 있다.

민족종교는 유교와 기독교에 실망한 기층 민중들에게 당대를 살아가기 위한 이상을 제시했다. 민족종교는 갑오농민전쟁처럼 거대한 사회변혁의 흐름으로(동학), 청산리전투의 승리처럼 민족 기상의 발현으로(대종교), 해 원상생을 통한 세계 평화와 공존으로(증산교), 민중 교화를 중심으로 한 근 대적 종교 공동체(원불교) 등으로 각각의 교리를 통해 근대전환기 일반 민 중의 세계관을 확대시키는 역할을 했다. 본 논고에서는 민족종교에 대해 철 학적 특징, 실천방향 및 시대적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동학(東學)9)

19세기 후반의 한국 사회는 이전 시대보다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내적으 로는 지배층의 핍박에 시달리던 민중들의 자의식이 확립되었고, 외적으로 는 서양의 문화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수백 년 동안 높은 위상을 차지했던 성리학적 이념에 대한 성찰과 회의가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상의 출현을 바라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 무렵 사회적 실천을 통해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많은 민중들 은 수직적인 질서의식을 반영한 이론보다 수평적인 인권의식이 반영된 이 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들은 민중의 주체의식이 배제된 강자 중심 의 권위주의적인 질서의식을 선호하지 않았다. 그들은 균등의식을 반영한 가치관을 배경으로 하여 당면한 시대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동학은 민중의 주체적인 삶의 중요성이 증가하던 이러한 시대 배경에서 탄생했다. 동학을 태동시킨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1860년에 기존

9) 본 절은 이철승의 「동학사상에 나타난 자아관의 성립 근거와 의의」(뺷철학연구뺸 87, 철 학연구회, 2009), 「동학사상에 나타난 도덕의식」(뺷인문학연구뺸 54, 조선대 인문학연구 원, 2017) 등의 주요 내용을 중심으로 재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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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들과 구별되는 우리철학의 단초를 마련했다. 그는 오랫동안 한국 사회 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했던 유교와 불교와 도교의 사상과 서양으로부터 전해진 천주교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새롭게 변용하여 평등관에 입각 한 철학을 정초했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은 최제우 의 사상을 계승하고, 뺷동경대전(東經大全)뺸과 뺷용담유사(龍潭遺詞)뺸를 편 찬하여 이론의 체계를 세웠다. 손병희(孫秉熙, 1861~1922)는 3대 교주로서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고,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독립 운동과 교육 에 심혈을 기울였다.

동학의 핵심 사상은 한울님의식에 기초한 평등관이다. 철학적 원리가 풍 부하게 내재된 ‘21자’10)주문은 평등관의 이론적 근거이다. ‘지기금지 원위 대강(至氣今至, 願爲大降)’이란 매우 신령스럽고 맑은 숭고한 기의 어울 림이 우리의 삶속으로 다가오기를 염원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지극한 기’의 조화는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지만,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항상 밝게 존재하면서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된다.

사람들은 이 ‘지극한 기’의 어울림을 품고 있기 때문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 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중들이 ‘지극한 기’의 어울림과 함께 그들의 삶을 구성하기를 염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시천주(侍天主)’란 한울님을 모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의무감으로 모신다거나,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허위의식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깨달음의 감동이 마음속에 깊게 내재한다는 의미이다.

‘조화정(造化定)’은 한울님의 조화인 ‘지극한 기’의 덕에 부합하여 마음을 정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인위적인 태도가 배제된 상태에서 저절로 이루어 지는 상태이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러한 원리와 흐름에 합류할 수 있다.

‘영세불망 만사지(永世不忘, 萬事知)’는 평생토록 ‘지극한 기’의 조화를 잊지 않고, 깨달음의 내용을 마음에 새기어 삶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것

10) “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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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이것은 이원론적 세계관에 의해 조물주와 피조물을 둘로 나눈 후, 피 조물을 조물주의 하위 개념으로 여기는 사상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유기적 세계관에 의해 피조물과 조물주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깨 닫게 하는 것이다. 동학에 의하면 사람은 ‘지극한 기’에서 나왔기 때문에 사 람의 몸에는 ‘지극한 기’인 한울님이 들어 있다.

한울님의 덕을 밝히고 잊지 않으면 하늘의 마음은 바로 사람의 마음이 되고11), 나의 마음은 바로 너의 마음이 된다.12)이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 든 것 속에 한울님의 속성이 있으므로 사람 역시 하늘과 다르지 않다. 따라 서 사람은 한울님이다.13)

동학은 이 21자 주문에 내재한 이상적인 꿈을 사후 세계가 아니라, 역동 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동학은 외형적으로 종교적인 옷을 입고 있지만, 이상을 현실에서 도피하는 피안의 세계로 설정하지 않는다. 동학이 구현하고자 한 터전은 도구적 이성에 의해 인간의 수단화 현상이 증가하면서 발생한 수많은 모순이 팽배한 구체적인 현실 사회이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을 토대로 하여 동학도들은 당시 사회의 모순을 해결 하고자 했다. 그들은 신분의 차별과 남녀의 차별이 여전히 팽배한 당시 사 회의 계급 모순과 제국주의적 성향을 띤 외세의 개입이 증가하면서 발생한 민족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많은 민중들의 지지를 받은 “사람을 하늘로 여기고, 하늘 섬기듯이 사람 섬기기를 중시하는 동학의 이러한 현세 중심적이며 인간중심주의적인 가치 관은 성(誠)과 경(敬)과 신(信)의 태도로 마음을 닦고(修心), 기를 바르게 하는(正氣) 가운데, 효도하고 공손하며(孝悌), 나라를 보호하고 민중을 편안

11) “天心卽人心.”

12) “吾心卽汝心.”

13) “人乃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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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하며(輔國安民), 널리 민중을 구제하고(廣濟蒼生), 세상에 덕을 베푸 는(布德天下) 것과 같은 정치의식으로 무장하여 후천개벽의 유토피아 사회 를 이루고자 했다.”14)

따라서 동학은 도덕성을 토대로 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전통 유학 과 하느님을 닮는 삶을 중시하는 천주교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변 용하여, 기철학적 관점에서 사유체계를 새롭게 정초한 우리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2) 대종교(大倧敎)15)

20세기 초에 출현한 민족종교들은 두 가지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서구 기독교에 해당하는 한국 종교가 필요하다’는 사고로 ‘동아시 아 문명 근저에 유교가 있듯이 서구 과학기술 근본에는 기독교가 있다’는 통념을 기반으로 한다. 이를 근거로 서구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유교를 기독 교처럼 변화시키거나, 새로운 종교를 찾아야 한다는 사고들이 등장하게 되 었다. 둘째는 ‘서구 문명은 물질에만 국한되고 도덕정신은 부재하다’는 사 고이다. 이 도덕정신은 유교에서 비롯한 도덕담론이지만 현실에서는 서세 에 대응하는 민족정체성으로 확장되어 갔고, 당시 유교, 불교, 민족종교 등 의 여러 종교들이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그중 대종교 는 이 두 가지 사상적 배경이 가장 잘 융합된 민족종교였다.

대종교는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민족종교로 나철(羅喆, 1863~1916), 오 기호(吳基鎬, 1863~?), 정훈모(鄭薰模, 1868~1943) 등에 의해 1909년 1월 15일에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하고 ‘단군교(檀君敎)’라는

14) 이철승, 「동학사상에 나타난 도덕의식」, 뺷인문학연구뺸 54집, 조선대 인문학연구원, 2017, 18면.

15) 본 절은 김현우의 「대종교의 민족 정체성 인식」(뺷인문학연구뺸 54, 조선대학교 인문학연 구원, 2017)에서 주요 내용을 중심으로 재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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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으로 창시되었다. 1910년에는 종단의 명칭을 ‘대종교’로 변경하는데, 이 것은 교리의 발전을 일부 내포하고 있다. 단군교의 ‘단군’이 예부터 내려오 는 명칭을 그대로 쓴 것이라면, 대종교의 ‘대종(大倧)’은 신의 종교적 위상 인 대제사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미 그 명칭 속에 일정한 근대적 종교로 서의 교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타 종교와 비교한다면, 단군은

‘예수’, ‘석가’ 또는 ‘강일순’에 해당하고, 대종은 ‘그리스도(구원자)’, ‘모니(성 인)’ 또는 ‘구천상제’에 해당한다. 이러한 변모는 대종교가 1909년 창시이후 단기간에 신화적 단군신앙에서 탈피하여 근대적 종교로 변화ㆍ발전하였다 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대종교사에 의하면, 대종교는 1909년 서울에 있는 총본사와 함께 1910년 에 만주 북간도 지사를 포함하여 전국에 지사를 만들었다. 나철은 백전(伯 佺)과 두일백(杜一白)을 만나 대종교를 창시하게 되는데, 이들은 모두 백 두산 모처에 있는 종교 집단 소속의 인물들이었다.

일제강점기가 도래하자 서울 총본사와 북간도에 있던 대종교 지부는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1915년 일제가 종교통제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종 교단체로 규정하자, 나철은 이에 저항하여 1916년 8월에 황해도 구월산에서 자결하였다. 이후 2대 도사교(都司敎) 김교헌(金敎獻, 1868~1923)은 1917 년 총본사를 만주로 옮긴 이후에 무장투쟁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데 김교헌 이 총본사를 옮기기 전에도 만주에는 이후 3대 도사교가 된 윤세복(尹世復, 1881~1960)을 중심으로 하는 대종교가 활동하였다. 윤세복은 종교성보다는 민족독립 더 정확히는 민족정체성 회복에 몰두하였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 종교통제안의 발표와 나철의 자결 이후, 대종교는 개인 신앙보다는 민족 정체 성 확립과 국가 독립을 위한 항일운동 노선으로 선회했던 것이다. 나아가 대종교의 항일운동은 무장투쟁으로 이어졌고, 1920년 청산리전투의 승리로 까지 이어졌다.

대종교는 4대 민족종교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에 있던 종교들 중에서 항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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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투쟁의 최선봉에 있었다. 다른 종교들이 1920~30년대를 거치면서 여러 이유로 일제와 타협하거나 비폭력 저항으로 자기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고자 할 때, 대종교는 8․15 해방에 이르기까지 무장투쟁의 노선을 버리지 않았다.

이는 민족정신의 원형인 단군을 종교 신앙으로 삼는 확고한 민족정체성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이러한 무장투쟁 일변도는 해방 이후 종교적 교세 약화로 이어졌다. 대종교는 더 이상 투쟁할 대상이 없어진 상황에서, 개인의 보편적 영성을 중시하는 일반 종교로 전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종교는 근대전환기 우리 사회에 중요한 가치를 제공했다. 유교 이전의 원형적 민족정신을 소개하여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신채호(申 采浩, 1880~1936), 주시경(周時經, 1876~1914), 정인보(鄭寅普, 1892~?), 안확(安廓, 1886~1946) 등의 독립운동 및 조선학 운동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 하였다. 그 후광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단군의 환기는 고조선 역사화의 원동력이 되었고, 개천절(開天節)은 현재 4대 국경일로 제도화되었다. 나아 가 향후 한민족 공동체 성립의 방면에서 일제강점기 무장투쟁과 민족 정체성 정립이라는 대종교의 역사는 남과 북의 화해와 단결을 위한 공동의 역사와 가치가 될 것이다.

3) 증산교(甑山敎)16)

증산교는 한국의 신종교 가운데 하나로서 교주 강일순(姜一淳, 1871~

1909)의 가르침을 따르지만, 그의 사후 여러 갈래로 분파되었다. 따라서 여 기서 말하는 증산교는 특정 교파를 가리키지 않는다.

증산사상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사상은 여러 갈래이다. 마치 여러 냇물이

16) 본 절은 우리철학총서 ‘민의 철학’ 집필 내용 중 증산교 관련을 요약한 것으로서, 그 선행연구인 이종란, 「강증산 사상의 철학적 특징- 민중의 입장이 반영된 이상세계 건립 과 관련하여」(뺷인문학연구뺸 제54집,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7), 이종란, 「뺷전경뺸의 사상분석으로 살펴본 ‘우리철학’의 방법론」(뺷대순사상논총뺸 제30집, 대순사상학술원, 2018) 등의 내용이 그 속에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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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큰 강에서 만나듯이 전통의 유․불․선과 민간신앙 그리고 동학과 정역(正易)사상뿐만 아니라, 개화기 당시 서양에서 전파된 문물을 포함하고 있다. 심지어 비록 대부분 비판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이지만, 사상적인 측면 에서 기독교의 일부 논리를 수용하거나 그것에 대응하고 있다.17)이 때문에 그 사상의 지향점이 하나의 국가나 민족에 머무르지 않고 전 세계를 대상으 로 하고 있다. 이렇듯 그의 종교사상은 전통의 계승과 그것의 한국적 특성화 및 외래사상의 포용과 대응 양상을 종합적으로 보여주고 있다.18)

먼저 그의 사상은 대체로 당시까지의 현실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상극 과 상생의 원리를 각각 선천과 후천을 지배하는 원리로 나눈다. 여기서 선 천과 후천은 그의 천지공사를 기준으로 나눈다. 비판의 대상은 선천세계를 지배했던 문명이다. 선천세계가 이렇게 부조리한 것은 상극 원리의 지배를 받은 인간의 원한이 누적되어 인간세계뿐만 아니라 자연마저도 재해가 일 어난다고 여겼다. 그 원한의 시초는 요의 아들 단주(丹朱)가 왕위를 승계하 지 못한 데 대한 원한 때문이다.19)여기서 강일순 자신은 상제로서 이러한 부조리에 쌓인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강세(降世)하여 천지공사(天地公事) 를 통해 선천의 부조리한 원리를 개조하여 후천의 지상선경(地上仙境)을 건설한다고 자임하였다.

바로 세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기초는 기존의 성인 중심의 유교적 역사관 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 때문인지 일부 수양과 관련된 성(誠)․경(敬)․신 (信)이나 효도 등의 윤리적 덕목 등을 제외한 기존의 유교적 예법과 관습

17) 증산교에 있어서의 서학 논리의 수용은 단편적인 교리의 수용이 아니라 증산을 재림예 수로 평가하리만큼 전적이라는 지적도 있다(정규훈, 「한국 신종교의 특징과 상호 영향 관계」, 뺷동양철학의 체계와 인식뺸, 상허 안병주 교수 정년기념 논문집Ⅰ, 1998, 621면.) 18) 이종란, 앞의 글(2018), 227면. 우리철학의 방법론을 더 구체적으로 보면 한국인의 삶에

기초한 시대인식과 문제의식, 전통사상의 발전적 계승, 전통사상의 재해석을 통한 한국 적 특성화, 외래사상의 비판적 수용, 외래사상에 대한 대응 또는 한국적 특성화이다(같 은 글, 207면).

19) 「공사」 3장 4절, 뺷전경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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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당시 선비사회나 도학자(예, 田愚)들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이런 시대인식은 전근대적인 조선사회에서 억압된 민중들의 의식을 반 영하고 있다. 비록 그것이 상징적․신화적이면서 보편적인 것으로 포장된 종교적 논리에 반영되어 있어 합리적 이해와 일정한 간극이 있지만, 전통과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천지공사를 통해 이루려고 한 것은 인간의 구원이며 그 실천적 목표가 지상선경의 건설이다. 특히 지상선경의 주체는 사회적 약 자에 속하는 민중으로서 차별받던 계층이었다. 그리고 그 지상선경의 모습 은 먼저 만인이 평등하여 남녀 차별이 없으며, 질병이 없어 불로불사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며 교통도 편리하고, 무엇보다 세계의 언어가 통일 된 세상이다. 바로 이 지상선경에 개화기 당시 전파된 서양의 근대적 요소 가 들어 있다.

그런데 선천과 후천이 전혀 다른 세계라는 점, 부조리의 시초로서 단주의 원한, 그리고 인격적인 상제 자신의 강세와 천지공사를 통한 해원과 인간 구원, 더 나아가 지상선경의 건설과 신명의 우대 등은 비록 전통의 사상을 특성화시킨 것이지만, 기독교의 가르침에 새롭게 대응하는 방식으로 보인다.

강일순은 자신의 가르침을 세계적인 것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비록 기독 교에 호의적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것에 대응하는 의식을 가졌던 점은 확실해 보인다. 그 까닭은 증산교가 당시까지 알려졌던 종교를 극복하여 하 나로 통일시키려는 입장에서 볼 때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기 때 문이다.20)

그런데 강일순은 서양 근대의 신문물에 대해서 한말 도학자들처럼 사치 를 조장하고 인심을 타락시키는 것이라 보지 않았다. 도리어 유교 식자층과 는 달리 이상사회의 모습으로 지상선경의 내용에 반영한 점은 당시 민중의

20) 이종란, 앞의 글(2018), 2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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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입장에서 볼 때 당연한 일이고, 주류 유교의 가르침과 거리가 있다.

따라서 “그의 지상선경의 모습과 내용은 비록 민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 는 종교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서구적 근대화를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는 대안적 근대화의 모습이다”21)라고 평가할 수 있다. 게다가 천지공사도 상 징 또는 은유로 표현한 것이 많기 때문에 신학뿐만 아니라 철학적으로 해 석할 수 있는 여지가 풍부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민중이 전근대적 체제와 관습과 문명으로부터 해방된 대안적 근대세계의 주체로 거듭나는 계기를 만든 선각자의 색다른 가르침의 방식인데, 종교적으로는 절대자의 은총을 상징한다.”22)는 것이다.

그리고 증산교에서 말하는 해원과 상생을 비롯하여 “남에게 척을 짓지 말라”23)는 등의 사상도 이런 이상세계뿐만 아니라 이상세계를 건립하기 위 한 주체의 실천적․윤리적 이념이다. 이것은 전통의 그것을 재해석하여 보 편화시킨 것으로 기독교의 기본정신을 그 속에 포용 또는 대응하면서 이미 세계를 향하고 있다. 그래서 보편적인 인류애 정신을 강하게 띠고 있다.

그러나 증산교 사상은 당시 일제의 침략과 동학운동의 좌절이라는 시대 적 배경 위에서 성립된 것이어서 사회적 운동성의 확장에는 제한적일 수밖 에 없었다.

4) 원불교(圓佛敎)

원불교는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이 1916년 대각(大覺)을 얻고 전라 남도 영광군 영산지역에서 포교 활동을 시작하면서 형성된 민족종교이다.

당시 근대 문명의 폐해와 피지배 국가라는 민족 정체성의 상실에 직면하여, 박중빈은 종교공동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창건하고자 하였다. 그 종교는

21) 이종란, 앞의 글(2017), 192면.

22) 같은 글, 204면.

23) 「교법」 3장 4절, 뺷전경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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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로 명명되었고, 광복 이후 2대 송규(宋奎, 1900~1961) 종법사에 의해 현재의 ‘원불교’가 되었다. 1937년 불법연구회 의 「회보」(33호)에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박중빈의 주장 은 원불교의 개교이념이다. 박중빈의 물질과 정신의 개벽 논의는 민족종교 의 화두인 후천개벽(後天開闢)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후천개벽은 근대 산 업문명에 의해 초래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대표적 민중사상이다. 이에 박중빈은 현실적으로 민중들의 의식을 변화시킬 방법을 고민하였다. 이를 테면 그는 1917년부터 저축조합을 중심으로 경제공동체 운동을 펼쳤으며, 영광군의 갯벌을 막아 농지로 만드는 개척 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기도 운동을 전개하여 종교 공동체 건설에 힘써왔다.24)이처럼 원불교는 민중의 교화를 중심으로 현실적이며 합리적인 의식 변화를 추동하고자 하였다.

박중빈의 「교리도(敎理圖)」 가운데 “일원(一圓)은 법신불이니 우주 만 유의 본원이요, 제불 제성의 심인이요, 일체 중생의 본성이다.”25)라는 구절 에서 ‘일원’은 원불교의 핵심 교리이다. 박중빈의 ‘일원’사상은 송규에 이르 러 “한 울안 한 이치에, 한 집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26)라는 삼동윤리(三同倫理)로 구체화된다. 송규의 삼동윤리는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모든 종교가 하나의 진리에 근원 한다는 동원도리 (同源道理)와 온 인류가 하나의 기운으로 연계된 동기연계(同氣連契), 그 리고 국가나 사회에서 서로 화합하여 발전하는 원리인 동척사업(同拓事 業)으로 구분된다. 송규의 삼동윤리는 종교와 인종 그리고 국가라는 각각 의 공동체가 지향할 점을 논의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일원의 세계상을 밝히 고 있지만, 근대 공동체 정신의 회복 및 공동체 건설의 문제에 주목한 것으 로 보인다. 이러한 송규의 공동체 사유는 김대거(金大擧, 1914~1994) 종법

24) 박맹수, 「소태산 박중빈과 종교공동체운동: 초기 원불교 역사를 중심으로」, 뺷국제원광 문화학술논집뺸 제1권 제2호, 원광보건대학교원광문화연구원, 2011, 8~9면 참조.

25) 「敎理圖」, 뺷圓佛敎全書뺸, 圓佛敎正化社, 1997, 9면.

26) 같은 글, 7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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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 이르러 현대적 모습으로 계승된다. 김대거는 신년법문으로 세계평화 삼대 제언을 하였다. 그는 개인의 측면에서 심전계발, 종교단체의 측면에서 연합기구 창설, 그리고 공동시장 개척으로 공동체의 공생과 상생 등을 모색 하였다.27)이렇듯 원불교의 공동체 이념은 일원사상을 토대로 원불교의 교 화를 활성하기 위한 방안으로 나타났다. 원불교 초기 활동은 공동체의 생존 을 위한 삶의 터전 확보와 이를 통해 사람들을 가르치는 교육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민중의 의식이 깨어나고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 하였다. 송규와 김대거에 의해 원불교는 경제적 공동체이자 수행 공동체 로서 현대 한국사회의 대표적 종교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4. 미(美)의 철학

본 논고에서 미의 철학이란 미의식이라는 예술의 영역에 나타난 현상적 특색을 범주로 하고 있다. 즉 한국인이 추구한 미에 대한 사유가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형상화 하였는지에 대한 문제를 중심으로 한다. 오늘날 ‘미학’

은 곧 서양 미학(aesthetics)으로 18세기 이후 등장한 ‘감정인식의 학’에 근 거한다. 이에 한국 미학의 시작을 서구 미학이 들어온 시점인 1920년대 경 성제국대학 미학연구실의 개설로 보고 있다. 그동안 한국의 미학계는 주로 서양 미학의 체계와 구성을 중심으로 한국의 미에 대한 학문적 기반을 다 져왔다. 본 논고에서 취급하는 미의 철학은 서양 미학의 구조에서 분석된 한국 미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근대에 이르러 등장한 조선인이 추구한 독특한 혹은 고유한 아름다움을 찾아내어 미를 어떻게 경험하였으 며, 그 현상을 어떻게 규명하였는지를 고찰하는 것이다. 본 논고에서는 미 에 대한 표현 방식의 규칙 그리고 표현 요소와 관련된 제반 상황을 통해

27) 「大山宗師法門集 第4輯」 <제2부 열반인 영전에> 참조. (http://won.or.kr/bupmun 원불교경전법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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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나는 고유한 정신적 원리를 바로 미의 철학으로 여긴다.

본 논고에서는 근대화라는 문명의 자각과 더불어 식민지 국가라는 시대 적 상황에서 학문으로서의 고유한 미를 추구했던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다 루고자 한다. 이를 테면 한국 최초의 미학자이자 미술사학자였던 고유섭(高 裕燮, 1905~1944), 한국 전통사상에 대한 주체적인 계승을 주장한 박종홍 (朴鍾鴻, 1903~1976), 조선적인 미를 탐구한 안확(安廓, 1886~1946) 등은 한국 근대시기의 우리 고유의 미의식과 미적 이념의 문제를 탐구하고 고민 했던 사상가들이다. 본 논고는 그들의 미에 대한 탐색이 미 철학의 정초를 이루었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미적인 것, 그 의식에 대한 고찰

고유섭의 경우 미적 경험의 다양한 가능성과 그 표현 방식의 원리를 통해 한국미술 고유의 특성을 규명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점은 한국인의 미의식 을 전제로 한 주체적인 관점을 견지하면서 그 속에서 존재하는 고유한 혹은 특수한 미의 구조분석이나 미적 가치에 대한 의미를 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의 시도는 단순히 시각적 표현에 따른 방식과 그 경험에 대한 미적 관 련성의 규명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멀리 나아갔다. 그는 자연과 예술 그리 고 예술과 인간 사이의 상호관계에서 한국 예술이 추구한 정신적 가치의 지향과 그 의미를 규명하고자 하였다.28) 그의 대표적인 한국미의 특색을 살펴보면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민예적인 것’, ‘비정제성’, ‘적조 미’, ‘적요한 유모어’, ‘어른 같은 아해’, ‘비균제성’, ‘무관심성’, ‘구수한 큰 맛’29)등의 미적 개념을 통해 한국의 고유한 미적 현상을 구현하고자 하였 다. 또한 미적 개념의 다양한 표현을 통해 미의 범주가 확장되는 가능성을 열어줌으로써 한국 미 철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8) 권영필 외, 뺷한국의 美를 다시 읽는다뺸, 돌베개, 2015, 9면 참조.

29) 같은 책, 56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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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살펴볼 박종홍은 한국인으로서 서양철학 연구를 한 초창기 학 자로서, 다른 학자들과 다르게 서양철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견 지할 수 있었다. 그의 연구는 한국 사상에 대한 주체적인 전통과 계승을 강 조하면서 새롭게 한국 사상을 개진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삶을 비춰볼 때 사상사가 이면서 한국 정치와 사회에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평가된다.

이처럼 박종홍 연구는 한국 근대 사상뿐만 한국 현대사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본 논고에서는 그의 미 철학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박종홍은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학문을 공부하면서 시작한 연구가 바로 미학이 었다. 일제의 식민통치로 인해 날이 갈수록 물질과 정신적 핍박이 심화되는 현실에 직면하여, 그는 독립을 위해 민족이 하나가 되는 길을 모색한다. 민 족이 하나가 되기 위한 방안으로 그는 민족의 고유한 특성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민족의 특성을 조선미술사에서 발견하면서 미에 대한 연구를 시작 하게 되었다. 당시 이러한 시각은 다카야마의 미술사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 진 것이다. 그의 뺷미학 및 미술사뺸를 읽으면서, 박종홍은 조선 미술사를 집 필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에 미술사 연구를 시작하면서 민족의 특성을 밝 히고자 하였다. 그의 미술사 연구는 조선인에 의한 민족 고유의 미의식을 고찰하고자 하였던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그의 이러한 연구는 나아가 한국 철학을 정립하는 데에 기틀이 되었다.

2) 조선의 미, 고유성과 보편성을 중심으로30)

본 절에서는 1910년대 이후에 형성된 조선적인 것을 중심으로 조선미의 담론을 피력한 안확의 조선미와 예술관을 분석하였다. 안확의 조선연구는 물질문명보다는 정신문명을 추구하려는 주체의 자각으로부터 기인한다. 그 에 의하면 이성을 지닌 개인의 자율적 행위의 결과가 바로 문화이며, 이 문

30) 본 절은 이난수의 「안확의 조선미(朝鮮美)탐구」(뺷儒敎思想硏究뺸 72, 韓國儒敎學會ㆍ 成均館大儒敎文化硏究所, 2018.)의 주요 내용을 중심으로 재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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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근거로 정신문명이 발전될 수 있다. 이러한 개인의 자각으로 인해 주 체의 정신이 발현된다. 이 때의 정신은 민족의 고유한 본성을 일컫는다. 이 러한 그의 시도는 조선 역사와 문화 전반을 재조명하는 작업으로 나아간다.

다시 말해 그의 조선적인 것의 의미는 바로 조선의 문화적 전통을 확립하 는 것에 있으며, 이를 토대로 민족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규명하는 것에 있 었다. 이를 위해 우선 그는 미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하였고, 나아 가 조선의 미술과 문학 그리고 음악 등의 예술에 나타난 조선적인 미를 각 각의 장르를 연구하면서 고찰하였다.

이를 테면 그의 「조선문학사」에 나타난 고유성과 보편성의 문제를 살펴보 면, ‘종(倧)’사상이 중심으로 논의된다. 그는 조선 문학의 기원을 ‘종’사상으로 보며, 이를 조선의 고유성으로 삼았다. 그에 따르면 ‘종’사상은 우리 민족 누구에게나 고유한 본성으로 구유되어 있으며, 스스로 이러한 점을 느낀다.

그는 이를 토대로 문학사를 전개하였다. 역사적으로 ‘종’사상의 변천과 발전 의 형태에 대하여 그는 협화라는 개념을 주창한다. 협화를 통해 ‘종’이라는 민족의 고유성은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면서, 조선의 고유성인 ‘종’사상에는 보편성이 내재하게 된다. 그의 ‘종’사상은 초기 문학사의 서술에서 등장하는 것으로, 후기 문학사에는 신화의 측면이 ‘종’사상을 대신하고 있다.

또한 그의 「조선미술사요」의 서두를 보면, 민족의 고유성이 조선인의 미 의식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조선 미술의 역사는 조선인의 미의식과 외래문화의 관계 속에서 전승되어 발전하였다. 미술사의 전개과정 을 보면 고유문화와 외래문화의 융합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문화의 복합 성과 혼성성을 승인하고, 이를 중심으로 조선의 미술사가 전개되었다. 특히 그는 백제의 미술에 나타난 특성을 민족의 고유성이 외래문화와의 융합을 통해 보편적 문화로 거듭났다고 주장하였다.

안확의 조선의 미에 대한 연구는 식민지 상황이라는 근대를 맞이한 조선 인에게 독립된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조선학의 범주에서 재생산된 학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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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당시 안확은 조선의 독립된 실체를 스스로 표상할 수 있는 담론으로 문학, 음악, 미술, 종교 등 문화전반을 포함하였고, 이는 민족의 정체성을 선도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조선다움을 발견하고 자 한 것이며, 그 가운데 본 논고는 조선적인 미를 고찰하였다. 조선의 미에 함의된 고유성과 보편성의 문제는 그의 미 철학의 핵심이다.

5. 나오는 말

근대전환기는 서구문명이 본격적으로 수입되어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또한 서구문명의 영향과 이에 대한 대응도 전 민족, 전 계층을 대상으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피통치자로 살아 온 이 땅의 기층 민중 역시 서구문명 그리고 이를 통해 그들의 삶을 통제하려는 식민지 권력들에 대해 다양한 형태의 반응을 보여 주었다. 특히 이러한 기층 민중의 양상들은 종 교와 미학에서 다양하게 투영되었다.

조선 사회에서 도교와 불교는 기층 민중의 신앙을 대변하는 종교였다. 하지 만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유교에 의해 두 종교가 배척받아 온 것도 사실이다.

‘도교’의 경우 민간도교의 색채를 띠거나 기존 질서의 해체와 재통합을 목표 로 하는 민중종교의 이념에 수용되었다. 이들은 민족주의, 삼교합일, 천인합 일, 기독교와의 절충 등의 양상으로 보여 주었다. 전병훈은 이러한 맥락을 주도하면서, ‘천(天)의 근원성(根源性)’과 ‘인(人)의 자유(自由)’라는 키워드 로 근대적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그는 큰 틀에서는 동양문화를 중시하는 입장 이지만, 시대적 모순에 의해 나타난 배척의 상황을 한국ㆍ중국ㆍ서양의 ‘다양 한 층차의 만남’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조선 초기부터 시행된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은 불교에 보다 많은 타 격을 주었다. 하지만 불교는 왕실과 기층 민중의 삶에 여전히 큰 영향을 미 쳤다. 근대전환기 반봉건과 반외세(반제국주의)라는 시대정신에 불교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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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양상으로 반응하였다. 경허의 결사운동, 불교계의 선각적 개화그룹 이나 이후 일본불교에 대한 조선불교계의 반발 등은 이를 대변한다. 하지만 출세간 - 세간 또는 호법(護法) - 호국(護國) 및 호민(護民)을 둘러싼 다양 한 입장과 관점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이 시기 불교계는 근대전환기 새 로운 한국 불교를 온전히 재구성하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불교계가 취한 입장은 각각의 노선에 교리적 또는 시대적 정당성의 차이는 있었다. 그러나 근대전환기 기독교 수용의 일환으로 정립된 종교의 자유를 불교계는 재도 약의 발판으로 삼지 못했다. 여기에는 당연히 일제 치하 시대적 모순이라는 원인이 가장 크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세속권력과 중요 불교교단 과의 상보적 관계는 일부 불교계의 친일행위와 관련이 깊고, 또 현재 불교 계의 중요 문제들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비판받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기층 민중들의 삶을 위로하고 새로운 시대를 밝히려는 노력들도 있었다. 독 립운동가로 알려진 한용운,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고등강숙과 중앙불교 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한 박한영 등이 대표적이다.

민족종교는 새로운 시대를 지향하는 기층 민중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 았다. 동학은 당시 기층 민중들이 선호한 종교 가운데 하나이다. 동학은 인 간의 평등의식과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한울님 사상, 21자 주문, 후천 개벽의 유토피아 등으로 발현되었다. 특히 민중들의 자의식의 확립은 동학 혁명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들이 구현하고자 한 터전은 도구적 이성에 의 해 인간의 수단화 현상이 증가하면서 발생한 수많은 모순이 팽배한 구체적 인 현실 사회이었다. 그들은 신분의 차별과 남녀의 차별이 여전히 팽배한 당시 사회의 계급 모순과 제국주의적 성향을 띤 외세의 개입이 증가하면서 발생한 민족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따라서 동학은 도덕성을 토대로 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전통 유학과 하느님을 닮는 삶을 중시 하는 천주교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변용하여, 기철학적 관점에서 사유체계를 새롭게 정초한 우리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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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는 민족정체성을 강조한 대표적인 민족종교이다. 대종교는 일제 강점기 항일무장투쟁의 최선봉으로서,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무장투쟁 의 노선을 버리지 않았다. 이는 민족정신의 원형인 단군을 종교 신앙의 대 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항일무장투쟁 이외에도 대종교는 원형적 민족정 신을 발굴하고, 조선학운동의 근원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대종교의 정신은 단군조선 연구, 개천절 정립 등 오늘날의 한국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치 고 있다. 그것은 남북화해를 통한 민족의 공동 번영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될 수 있다.

증산교는 해원과 상생의 정신을 통해 이상세계를 건립하기 위한 주체의 실천적․윤리적 종교이다. 그것은 강일순을 통해 선천의 부조리한 원리를 바로 고쳐 후천의 지상선경으로 진입한다는 교리를 근간으로, 평등과 주체 성을 강조하였다. 그 속에는 서구 또는 일본의 근대화를 맹목적으로 추종 하지 않는다는 저항의식도 있었다. 하지만, 증산교는 일제의 박해와 서구 이성주의 학문의 전개라는 시대적 배경 하에서 동학이나 대종교와는 달리 구체적인 현실 문제를 다루지 못한 측면도 있다.

원불교는 박중빈의 구도로 시작한 민족종교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일원 의 세계상을 밝히고 있으면서도, 근대 공동체 정신의 회복 및 공동체 건설 의 문제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원불교 초기 활동은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삶의 터전 확보와 이를 통해 사람들을 가르치는 교육을 통해 민중의 의식 이 깨어나고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후 원불교의 공동체 이 념에 나타난 근대적 공동체관을 통해 종교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적 공동체 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미의 철학에서는 근대전환기 우리 고유의 미의식과 미적 이념의 문제를 탐구하고 고민했던 세 명의 사상가(고유섭, 박종홍, 안확)들의 미의식에 대 해 살펴보았다. 한국 미술 고유의 미적 특성에 대한 규명 시도(고유섭), 조 선미술사에서 하나로 통일되는 민족적 특성에 대한 탐색(박종홍), ‘조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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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이념과 ‘조선적인 것’의 탐구 속에서 조선 미와 예술관의 분석을 통 한 민족의 고유성과 보편성 증명(안확) 등으로 이어지는 연구를 통해 근대 전환기 미학 연구가 갖는 의의를 검토하였다.

이상 각자 다른 분야에 대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시대적 모순[도 전] 속에 몇 가지 공통적인 반응[응전]의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전근대-근대, 제국주의-민족주의라는 구도와 그 속에서 발생한 모순들 에 직면하여 해결책을 찾으려했던 수많은 종류의 몸부림이 있었다. 정면으 로 도전하며 좌절하기도 하고, 종교적 믿음이나 조선의 예술․‘미’ 속에서 나아갈 길을 모색하기도 했으며, 일정부분 타협 또는 회피하거나 외면하기 도 하는 시행착오를 거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런 몸부림의 과정 가운데 보편성, 고유성, 민족성, 전통, 전근대, 근대성, 도덕, 합리, 공리(公利), 상생, 공영(共榮), 자립, 평등 등의 개념이 등장하였다.

당시 그들이 가졌던 문제의식은 현재 및 앞날의 생존과 관련되었기 때문 에 매우 절실하였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긴장감은 당시와 비교할 때 일 정 부분 해소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에 제기되었던 문제의식은 오늘날에 도 여전히 본질적으로 ‘해결’되지 못하였다. 예컨대 당시에 부각되었던 ‘전 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등의 중층적인 가치의 충돌과 교류의 문제는 특 수와 보편의 문제로서 근대전환기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에게도 해결해 야 할 중요한 주제이다. 이것은 한국철학의 지향점에 대해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즉 ‘우리철학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깊게 관계한다. 따라서 근대전환기 한국 사회와 문화 속에서 형성된 종교의식과 미의식에 대한 성 찰적 탐구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연구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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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원전자료 뺷大巡典經뺸 뺷大倧經뺸 뺷東經大全뺸 뺷龍潭遺詞뺸 뺷圓佛敎大宗經뺸 뺷典經뺸

뺷精神哲學通編뺸

2. 저서 및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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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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