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에서 즐기는 엘도라도(황금의 도시) 탐험여행
장항선 철도가 지나는 지역 중 가장 격동하는 근현대 역사를 간직한 곳은 장항이다. 일제 강점기, 일제는 충남과 경기도 일대의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충남선을 건설했다.
1923년부터 건설되기 시작된 충남선(천안∼장항)의 종점인 장항은 1931년에야 철도가 개 통되었는데, 이보다 앞서 1930년에 장항항이 개항한 것으로 보아 자원 수탈이라는 장항 선 건설의 목적이 분명해진다. 1936년에는 전쟁물자 구매에 필요한 금을 생산하기 위해 장항제련소도 건설하였다. 오늘날 서천군에는 서천읍과 장항읍이 있는데, 서천이 1979년
제480호 2021 OctOber
<그림 2> 문화예술 창작공간(옛 미곡 창고) <그림 3> 전망산 위 옛 장항제련소의 굴뚝
<그림 1> 장항항의 부잔교
에야 읍으로 승격된데 비해 장항은 1938년에 이미 읍이 되었다. 장항의 성장에는 외부와 의 연결에 유리한 항구를 가진 지리적 입지가 밑받침이 된 것이다.
흔히 일제강점기의 가옥이나 산업시설 등 근대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관광지로 군산 을 많이 찾는데, 군산 맞은편 장항항구 일대도 기억되어야 할 여러 근대유산이 많다. 군 산보다도 먼저 장항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부잔교가 건설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서해안은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항구 발달에 불리하므로 큰 조차에 대응해 바닷물의 수위 변화에 따라 상하로 움직이는 부두가 필요했다. 부잔교(浮棧橋), 즉 뜬다 리 부두이다. 밀물 때 장항항에 서 있으면 ‘텅∼텅’ 둔탁하고 무거운 기계음이 계속 들리 는데, 부잔교가 살아 움직이는 소리이다.
옛 장항역 일대의 근대문화유산은 오늘날 테마 관광지로 변화하고 있다. 철도차량 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사용하는 열차용 턴테이블인 전차대, 장항 일대를 전망할 수 있는 장항도시탐험역 전망대, 일본으로 보낼 쌀을 보관하던 미곡 창고에 자리 잡은 청 년 커뮤니티 공간 등을 둘러보는 여행 프로그램 명칭이 예술적이다. ‘황금의 도시 장 항 향미미션여행’. 참 재미있는 이름이다. 장항제련소의 금 생산 역사를 모티브로 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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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철도망과 고속국도 <그림 5> 장항항 주변의 옛 철로
*읍·면 소재지는 글에 언급된 곳만 표시함.
성장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현재 장항역은 국립생태원 서문 옆에 있는데, 2008년 장항선이 군산선과 통합되면서 새로 생긴 역이다. 옛 장항역은 장항화물역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신 장항역에서 장항항 까지 뻗어 나온 철도를 장항화물선이라 명명했다. 과거에는 이 장항화물역(옛 장항역)에 서 장항항, 장항제련소로 이어지는 화물용 철로도 활발히 이용되었다. 남미 칠레 등지에 서 배로 가져온 구리와 주석, 원광석이 장항항에서 철로를 통해 제련소로 운반되었다.
또한 장항항 일대 공장에서 생산된 구리, 주석, 종이 등 공업제품이 장항화물역을 거쳐 철길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남동 임해지역 중심의 수출주도형 공업육성정책에 따라 1980년대 울산의 온산에서 대 규모 제련소가 가동되면서 우리나라 제련업의 중심지는 장항에서 울산으로 옮겨간다. 마 침내 1989년 장항제련소 용광로의 불은 꺼졌지만, 공장 주변의 오염된 토양은 계속 골칫 거리로 남았다. 2009년에야 정부에서 제련소 주변 반경 1.5㎞ 토지를 매입하고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서천군은 오염된 토지를 정화한 후 이 일대를 생태관광단지 등으로 개발하 고자 한다. 장항화물선도 2021년 국가선로에서 폐지되어, 이제는 무거운 화물을 싣고 느 리게 움직이던 열차를 장항항구 일대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다. 이에 따라 장항화물역이라 는 이름도 장항도시탐험역으로 바꾸고 장항문화관광의 주춧돌로 기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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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동백정과 옛 서천화력발전소 굴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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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량리의 붉은 동백꽃은 피고 지고
2021년 6월, 세계 최초로 폐쇄 화력발전소 밑에 묻혀 있었던 마량리의 동백정해수욕장 이 복원된다는 보도가 꽤 흥미를 끌었다. 마량리는 서천군의 동북쪽 해안에서 배의 닻 모 양으로 바다를 향해 뾰족하게 펼쳐져 있는 곳이다. 마량리 동백정 주변에는 우리나라에 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동백나무 숲이 자리 잡고 있어 붉은 동백꽃은 물론 시원한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이름난 관광지였다. 1970년대에는 대천해수욕장, 학암포해수욕장과 함께 충남의 3대 해수욕장이었다. 또한 마을 공동체의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는데, 약 500년 간 지속하고 있는 어촌마을의 전통인 마량리의 당제(堂祭)도 동백정에서 제를 지낸다.
마량리도 장항과 닮은 점이 많다. 산업화라는 거대한 파도가 자연에 할퀸 생채기가 여 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천화력발전소가 들어서기 전까지 아름다운 모래밭이 펼쳐져 있던 동백정 앞 해안을 다시 과거 모습으로 돌려놓겠다는 발표에 놀랐다. 동네 주
<그림 7> 춘장대역 커뮤니티 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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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배낭을 짊어지고 들떠 있는 사람들로 붐비는 춘장대역의 모습 은 과거 사진에만 존재할 뿐이다.
지금은 폐석탄화력발전소 부지에 매립되었던 지역을 파내어 갯벌로 복원하는 사업과 더불어, 서천화력선 폐철도공간을 활용하기 위한 여러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그중 하나 가 서천화력선 춘장대역 철길 때문에 30여 년간 쪼개졌던 마을 공동체를 위해 철길을 걷 어낸 춘장대역 자리에 춘장대역 커뮤니티 센터를 2021년에 개관한 사업이다.
시간이 멈춘 너더리 마을, 판교
장항선 직선화로 여러 간이역들이 사라지고 서천군에는 현재 세 개의 철도역만 운영되고 있는데, 가장 북쪽에 있는 역이 판교역이다. 장항선 직선화 사업으로 2008년에 이전한 지금의 판교역은 마을 중심지와 동떨어진 곳에 홀로 자리 잡고 있는데, 사실 옛 판교역도 판교리가 아닌 현암리에 자리 잡았다. 기차역이 생기면서 현암리가 판교면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장항과 마량리가 외부의 힘으로 공간이 빠르게 변한 사례라면, 판교는 역사의 흐름에 이끌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숙명에 따라 서서히 변화해 온 삶터라 하겠다.
판교는 보령시, 부여군과 잇닿은 곳에 있는 서천군의 길목으로, 1931년 판교역이 생기 면서 철도교통도 편리해져 크게 성장하였다. 한때 충남의 3대 우시장이 열렸고 한산의 모 시장과 함께 전국적으로 이름난 곳이었으나, 산업화라는 거대한 물결에 쓸려가며 여느 농 촌과 마찬가지로 활력을 잃어갔다. 하지만 빠른 변화에 허덕이는 현대인들이 레트로(retro) 열풍에 젖어 드는 것처럼, 쇠락하고 고즈넉한 시골마을이 느림의 여유와 풋풋한 추억을 소 환하는 따뜻한 마음의 고향으로 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현대까지의 농촌지역 변화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시골 동네가 최근 ‘시간이 멈춘 마을’로 유명세를 타더니 정미소,
<그림 8> 옛 판교역 터 <그림 9> 일본식 가옥인 장미 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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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조장, 사진관, 영화관 등 판교의 근대문화유산이 2021년 국가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필자가 답사한 날은 월요일이었데도 도토리 냉면집은 외지에서 온 사람들로 붐볐고, 옛 장날의 풍경을 담고 있는 장터 주변의 소박한 벽화도 마을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판 교역은 옮겨 갔지만 옛 판교역 앞에는 ‘판교 역전 슈퍼’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판 교(板橋)의 지명을 간직한 콩국수 파는 ‘너더리 식당’ 간판도 재미있는데, 너더리는 나무 판자 다리를 말하는 흔한 이름이다. 남루하고 을씨년스러운 장소도 지워야 할 대상이 아 니라 그곳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의 삶터로서 기억되어야 할 소중한 공간이다.
치유의 자연과 고즈넉한 역사를 품은 생태도시, 서천
서천군의 공식 슬로건은 ‘서천 육백 년, 삼천 년 역사를 품다’이다. 조선시대에는 비인, 한 산, 서천이 각각의 군현이었다. 넓은 들판이 있고 바다와 인접하여 일찍부터 외적의 침입 이 많았던 탓에, 모두 읍성을 쌓아 방어에 힘을 쏟았던 지역이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비
<그림 12> 한산모시전시관과 모시풀 <그림 13> 한산읍성
비인
서천
한산
<그림 10> 대동여지도의 서천 일대 <그림 11> 서천읍성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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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요충지인 진(鎭)이 표현되어 있다. 지도의 마량진 앞 ‘동백(동백섬)’은 오늘날 동백정이 있는 작은 산으 로, 썰물 때는 건너갈 수 있는 섬이었다.
장항선 직선화로 2008년 서천역이 서천읍 시가 지에서 더 멀어진 곳으로 이전하자, 군청도 새로 이 전한 서천역 인근으로 옮아가 주변에 새로운 주거 지역을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더불어 행 정관청 이전에 따른 옛 도심 일대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에 대비해 서천군은 성곽 복원을 중심으로 옛 군청 일대에 역사문화 특화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서천 향교에서 걸어서 언덕을 조금만 올라가면 최근 복원된 서천읍성 동문이 나타난다. 동문에서 서쪽으로 뻗은 성곽길을 따 라 서천여자고등학교 뒤편을 거쳐 서천군청까지 산책 삼아 갈 만하다. 옛 성곽 유적은 수 난의 역사를 간직한 문화유산이다. 서천 및 한산읍성도 서산의 해미읍성이나 보령의 남 포읍성처럼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
서천읍에서 동쪽으로 기산면을 지나 빛고개를 넘자마자 고개 아래에 한산모시마을이 있다. 읍성 유적이 잘 남아 있는 한산면도 한산모시문화제와 소곡주 관련 축제에 참여 하는 관광객들을 한산읍성 방문까지 이끌기 위해 남쪽 성곽 복원사업을 하고 있다. 서
<그림 15> 고산생태원에서 본 국립생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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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군 곳곳에서 이처럼 지역 문화유산을 활용한 특화된 관광자원을 개발하려는 노력들 이 보인다.
한때 제조업을 지역 중심산업으로 육성하고자 했던 서천군은 오늘날 생태산업 및 관광 을 지역 발전전략으로 밀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정치적 의도로 지정된 군장 국가산업단 지의 장항지구 개발계획이 2007년 취소된 대신 서천발전 정부대안사업으로 서천에 들어 선 것이 국립생태원, 국립해양생물자원관, 장항 국가생태산업단지이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찾는 국립생태원은 새로 이전 · 건립된 장항역 바로 뒤편에 널찍하 게 자리 잡고 있다. 장항역에서 나와 장항선 철길 아래 터널을 통과하면 바로 국립생태원 서문이다. 이 국립생태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인상적인 건축양식을 가진 실내 전
시관 에코리움으로, 열대관, 온대관, 사막관, 극지 관, 지중해관으로 구성되어 다양한 생태환경을 관 람할 수 있다.
<그림 16> 송림갯벌의 카이트 서핑
<그림 17> 스카이워크에서 본 송림갯벌
처음 방문했을 때, 생태원의 다양한 식물 조성에 참여한 경희대학교 지리학과 공우석 교 수님의 설명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기후변화와 생태계에 관심을 두고 오랫동안 한라산 고산 식물을 연구하신 분이다. 추운 환경에서 자라는 고산 식물이 고산생태원에서도 자 랄 수 있도록 여름에 차가운 바람이 언덕 곳곳에서 나오도록 설계하였다고 한다. 큰 너덜 이 있는 계곡의 돌무더기 사이로 냉기가 나오는 얼음골 원리를 적용한 것이라고 하셨다.
고산생태원 뒤편에는 용화실못이 있다. 국립생태원이 이곳에 위치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연못으로, 국립생태원 전체의 물 공급원이기 때문이다. 용화실못을 바라보면 연못 왼쪽으로 약간 곡선의 작은 길이 보인다. 옛 장항선 철길의 흔적이다. 마침 2021년 8월 에는 연못 옆에 인공으로 모래언덕을 조성하여 ‘바닷가 모래언덕 이야기’라는 특별전을 열고 있었다. 기후변화와 개발로 사라져가는 바닷가 모래언덕의 가치를 알리고자 기획된 전시였다.
대규모 공업단지 유치를 포기하고 새로운 지역 발전전략으로 생태관광도시를 지향하 는 서천의 핫 플레이스는 송림 장항스카이워크이다. 국립해양생물자원관과 연계하여 서 천군에서 야심 차게 만든 장항송림산림욕장 안에 있다. 기벌포 해전 전망대인 스카이워 크 위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환상적이다. 저 멀리 옛 장항제련소 굴뚝은 물론이고 밀물 때는 카이트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을, 썰물 때는 끝없이 펼쳐진 서천갯벌의 광대함을 볼 수 있다. 해질녘 송림 모래언덕 의자에 앉아 울창한 소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황금빛 노을을 바라보며 마시는 한잔의 소곡주는 정말 감미롭다. 지성이면 감천이랄까. 올해 서천갯벌은 고창, 신안, 보성-순천의 갯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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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신. 2020. 근대 산업도시 장항의 형성과 변천 그리고 산업유산. 한국지리학회지 9권 1호: 115-134.
서천군. www.seocheon.go.kr
심승희, 한지은. 2021. 장항선의 기능 및 연선 지역의 변화. 문화역사지리 33권 1호: 134-157.
연합뉴스. 2021. 화력발전소에 묻힌 서천 동백정해수욕장 40여 년 만에 복원, 6월 28일. https://www.yna.co.kr/view/
AKR20210628068800063?input=1195m (2021년 9월 2일 검색).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