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독자적 사상가들
대구한의대학교
박 홍 식
일본 사상가 1호
쇼토쿠 태자 (聖德太子, 574~622)
• 이하 일본 사상가의 내용은, 『일본사상 이야기 40』
(나가오 다케시 지음/박규태 옮김/ 예문서원)을 주로 참고하였음
쇼토쿠 태자 (聖德太子, 574~622)
앞의 초상화는 일본 법륭사(法隆寺)의 쇼토쿠태자 초상화.
阿佐太子御影이라고도 불린다.
백제 아좌태자(阿佐太子, 572년~645년)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본은 1949년의 대화재로 불타 없어졌다. 현재 작품은 원래의 그 림을 모사(模寫)한 것이라 한다.
<30여 년간의 섭정>
31대 요메이 천황의 장남. 생전에는 우마야도(廐戶)황자라 불렸다.
33대 女帝 스이코(推古)천황의 시대에 20세가 되었을 때부터 천황 대신에 정치를 섭정하여 30여 년간 정치가로 활동하였다. 당시 정 권을 장악한 소가 씨(蘇我氏)는 자기 집안의 황녀를 스이코(推古) 천황으로 내세우고, 사위인 쇼토쿠 태자에게 섭정을 맡긴 것이다.
쇼토쿠 태자 (聖德太子, 574~622)
<왕권 강화, 중앙집권적 국가의 기초 완성>
- 일본 최초의 성문법인 「헙법 17조」를 제정
- 내정과 외교뿐만이 아니라 불교문화의 융성에도 기여하였다.
- 그는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국가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가 활약한 시기는 아스카시대((飛鳥 時代, 593년 ~ 622년)에 해당한다.
<'관위 12계(冠位十二階)' 제도의 제정>
- 쇼토쿠 태자는 603년 씨족 문벌 정치를 청산하고 뛰어난 인물을 등용하기 위하여 '관위 12계(冠位十二階)' 제도를 제정하였다.
- 관위 12계는 개인의 재능과 공적에 따라 지위를 정하고 그 상징으로 관(冠)을 수여하는 제도다.
- 관위 수여는 일대에 한정하여 세습적인 관위제도를 방지하기 위한 혁신적인 정치 시스템이었다.
쇼토쿠 태자 (聖德太子, 574~622)
<쇼토쿠 태자의 사상적 특징>
- ‘천황’이라는 요소를 사회적 정의의 중심에 놓았다.
- ‘화 和’를 사회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았다.
- 불교와 유교를 받아들여 일본식의 독자적인 사상을 만들어 냈다.
<불교와 유교의 수용>
- 쇼토쿠 태자에게 불교와 유교를 가르친 스승은 당시 일본에 귀화한 도래인이었다.
- 쇼토쿠태자는 불교를 고구려 출신 혜자慧慈스님에게 배웠고, 유교는 백제의 학자인 박사 각가覺哿에게서 배웠다.
- 쇼토쿠 태자는 小野妹子(오노노 이모코) 등 많은 유학생들을
다섯 차례 중국 수나라에 파견(遣隋使)해 중국 문화를 받아들였다.
607년 수나라로 파견된 견수사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가 수나라 황실에 건넨 국서에는 '해 뜨는 곳의 천자가 국서를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보내니 별일 없는지'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쇼토쿠 태자 (聖德太子, 574~622)
<헌법 17조에 나타난 일본 사상의 원형>
오늘날 의미의 헌법이 아니라 호족과 관료들에 대한 도덕적 훈계를 말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불교와 유교의 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일본서기』 스이코 천황 12년(604년)조 기사에 전문(全文)이 처음으로 인용되어 실려 있다.
“和를 귀하게 생각하여 다투지 않을 것을 항상 마음에 새겨 두어라. 사람은 모두 도당을 만들려고 하며 사물을 공평하게 보려는 자가 적다. 때문에 분쟁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윗 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서로 마음을 온화하게 가지고자 애 쓰고 화목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올바른 도리가 저절 로 통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문제라도 해결될 것이다.”
(제1조)
쇼토쿠 태자 (聖德太子, 574~622)
“마음의 분노를 다스려 겉으로 튀어나오는 성마름을 버리고,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 성을 내서는 안된다. 사람은 모두가 자 기 생각이 있고 거기에 잡착하기 마련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 각하면 상대방을 틀리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항 상 성인일 수 없고, 상대방이 항상 어리석은 것만도 아니다.
사람은 모두가 ‘범인凡人’이다. 옳으냐 그르냐는 어느 누구도 정할 수 없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화를 내면 오히려 내게 어 떤 오류가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해 보아야한다. 또한 나만이 옳다고 생각되더라도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잘 듣고 보조를 맞추어 행동하도록 하라.” (제10조)
“삼보三寶를 깊이 숭경하라. 삼보란 불佛 · 법法 · 승僧을 가 리킨다. 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귀의할 곳이며, 모든 나라 의 근간이다. 어떤 시대도 어떤 장소의 사람도 이 불법을 존 숭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2조)
쇼토쿠 태자 (聖德太子, 574~622)
이 밖에 제4조에서는 예禮를 강조하였고, 제 9조에서는 신의 信義 를 중시하여 유교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불교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다>
그는 불교 교전의 주석서로서 승만(勝鬘) · 유마(維摩) · 법화(
法華 ) 3경의 의소(義疏, 주석서)곧 삼경의소 (『三經義疏』)를 저술 하여 불교의 이해와 보급에 힘썼다. 그가 건립한 절은 호류지(法 隆寺 )를 비롯하여 일곱 군데(열한 군데라는 설도 있다)이다.
- 쇼토쿠 태자의 유언
“세간은 가상이고, 오직 부처만이 참이다.”
조닌(町人) 사상가
조닌(町人) 사상가 *조닌이란
일본 에도 시대(도쿠가와 시대)의 경제 번영을 토대로 17세기에 등장하여 빠르게 성장한 사회 계층이다. 도시에 거주했으며 대부분 상인과 수공업자들이었다. 무사로부터 신분적 차별을 받는 아래 계층이었으나 부를 축적하면서 그 위신을 높이고 일본의 사회, 경제, 문화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두산백과)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 1685~1744)>
비사무라이 출신의 대표적 사상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교토의 상가에서 일하였다. 독학으로 공부하여 틈만 나면 독서하였다고 한다. 43세 때 상가 일을 그만두고 45세 때 처음으로 공개 강의를 시작하였다. 이 강의를 듣고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고, 이 제자들에 의해 그의 사상이
전국적으로 퍼졌다.
조닌(町人) 사상가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은 11살 때 교토의 포목점에서 수습 점원으로 일하였다. 4년이 지나 포목점은 망하였다.문을 닫 는다. 이시다 바이간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23세때 또 교토의 기모노집에 수습점원으로 취업하였다.
이곳에서 17년간 일하면서 독학으로 공부였으며 오구리료운 (小栗了雲)이란 스님을 만나 선(禪)의 세계에 입문하였다.
상공업인들의 상도덕 윤리를 적은《도비문답, 都鄙問答》은 일본뿐만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주목을 받고 많은 사람들 이 읽고 있다.
조닌(町人) 사상가
“사농공사 중 하나라도 없으면 사회가 지탱되지 않는다. 사 농공상은 똑 같이 군주의 통치를 받고 군주를 돕는다. 사무라 이는 위계를 가진 신하이고 농민은 자연 속에서 일하는 신하 이고 공상은 거리에서 일하는 신하이다, 상인이 돈을 모으고 직인은 임금을 타는 것도 농민이 작물을 재배하여 그 대가를 취하는 것도 사무라이가 봉록을 받는 것과 다 같은 것이다.”
( 이시다 바이간, 『都鄙問答』)
이러한 사고는 상하관계에 의해 사회질서를 표방하는 주자 학자 들에게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도덕과 사상에 관해 사색하고 인도를 추구하는 일은 비록 사
무라이가 아니라 누구라도 해야만 하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
이 바이간 사상의 최종 도달점이었다. 그는 서민 교화를 적극
추구했다. 그의 자택에서 공개 강의가 있는 날에는 ‘청강 자
유, 입장 무료’ 라는 간판이 걸렸다고 한다.
조닌(町人) 사상가
그는 서민들이 주체적으로 살 것을 가르쳤다. 그는 ‘정직’을 실천을 사람다운 길로 강조했다.
-정직론-
“담배곽 하나라도 상품의 좋고 나쁨을 바로 알 수 있는 법이다.
이것을 요리조리 속이려 한다면 나쁜 상인이다. 그 가격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좋은 상인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자신의 성실과 불성실이 바로 비쳐 보인다는 것을 잊고 사는 사람이 많다.
정직이야말로 사람의 신뢰를 받고 성공하는 비결이다.”
( 이시다 바이간, 『都鄙問答』)
신분의 상하관계를 부정한(신분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직분 론은 당시 무사층에게 천시당하고 자신감을 상실했던 서민층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준 가르침이었다.
그의 사상은 心學으로 불리며 뒤에는 상급 무사 층에게까지 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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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닌(町人) 사상가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 1685~1744)
- 상인출신으로서 유학을 공부하여 상인정신을 고취한 사상가로 유상(儒商) 이라고 할 수 있다.
- 그의 마음공부는 불교의 마음공부를 수용하여 그의 학문을 心學(石門心學)이라고 불린다.
- 그는 일본 오사카 상인들의 상도(商道)에 유학사상과
불교를 접목시켜 상인정신을 체계화시킨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 그는 현재까지도 일본에서는 상인들의 귀감으로 여겨지고 있다.
임상옥 (林尙沃, 1779~1855) -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신.
- 1796년 상업에 종사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국경지방 인삼의 무역권을 독점하였다.
- 빈민구제와 시주(詩酒)로 여생을 보냈다.
- 저서에 『적중일기(寂中日記) 』 와『가포집』이 있다.
- 최인호의 소설 『商道』의 주인공이다.
조닌(町人) 사상가
<야마가타 반토(山片蟠桃, 1748~1821)와 자본주의 맹아>
상인 출신의 서민 사상가. 유통과 금융에 뛰어난 사상을 전개했다.
철저한 현실적 합리주의자.
“물가는 수요와 공급의 균형으로 정해진다.”
“높은 가격으로 흥정된 상품은 거기에 맞는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 문에 가격이 비싼 것이므로 그 자체를 나쁘게 보아서는 안된다.”( 『 유메노시로[夢の代]』)
그의 투철한 시선은 시공을 종횡으로 뛰어다닌다. 천문, 지리, 역사, 경제 등 장대한 우주관이 그의 저서 『유메노시로[夢の代]』 속에 잘 펼쳐져 있다.
오사카부는 그 공적을 칭송하여, 해외에서 간행된 일본문화 연구서 와 저자를 표창하는 「야마가타 반토상」을 창설했다.
조닌(町人) 사상가
<야마가타 반토(山片蟠桃, 1748~1821)와 자본주의 맹아>
당시 일본인의 일반적 정서와 비교해보면 그는 놀라울 정도로 미신 을 믿지 않았다.
반토는 영혼이라든가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혼론 無魂論’을 주 장했다. 반면 그는 유교 윤리를 신봉하는 입장에서 예의를 중시했 고 사자死者 공양을 중시했다. 이것은 ‘죽은 자와의 생전의 약속을 지키는’태도의 표현이었으며, 신비적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지옥은 없다. 극락도 없다. 자아도 없다. 다만 존재하는 것은 인간 과 만물뿐이다. 신불神佛도 없고 귀신도 없다. 세상에 기기묘묘하고 불가사의한 것은 더 더욱 없다.”
(『유메노시로(夢の代)』)
18-19세기 사무라이에 의해 주창된 중상주의
<혼다 도시아키(本多利明, 1743~1820)>
- 관영무역 제창, 무역 진흥의 중요성을 일깨움
저서: 『경세비책 經世秘策』 『西域物語서역이야기』 『경제방언』
『도해 일기』 『장기론』 등.
“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한 국가가 국토 내에서의 생 산물만으로 전체 국민을 먹여 살리고자 한다면 반드시 부족하게 된 다. 즉 해외의 생산물을 수입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발전적으로 뻗 어 나갈 수 없다. 따라서 교역이 불가결하다. 그런 항해술의 습득에 는 천문학과 지리학이 불가결하며, 그 학문들은 모두 수학을 기본 으로 한다. 그러므로 수학이란 국가를 지탱해주는 모든 것의 기본 이다.” (『西域物語』)
“천하를 손에 넣은 은의 탕왕과 주의 무왕을 이상으로 삼는 일은 미친 짓이다.”
“사무라이의 아이덴티라는 것 때문에 본래 국민들 모두에게 골고루 분배되어야 할 부富가 극소수의 상인들에게 독점되고 있고, 많은 서민(연공을 바치는 농민)들이 고통을 받는다.”( 『경세비책 經世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