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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권 동아시아학의 여정, 그리고 대안적 세계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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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문초록❙

정식외교가 수립되기 훨씬 이전부터 프랑스의 가톨릭 선교사들은 유럽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한반도에 거주 하면서 한국문화를 유럽사회에 지속적으로 알렸다

.

이들은

16

세기부터 이어져 온 예수회의 지적 전통인

본지 화

(

本地化

)’

정신을 계승하였으나

, 19

세기를 지배했던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지 못하였고 양립 불가능한 가치 관의 충돌 속에서 한국사회를 상호 모순적 시각 속에서 바라봐야만 했다

.

그러나

1886

년에 한국과 프랑스 간 에 정식으로 국교를 맺으면서 한국관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

이로써 선교사중심의 한국학이 끝나고 종교적 목적을 배제한 학술적 한국학이 시작된 것이다

.

하지만

20

세기 초반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

한 국학은 몇몇 연구자들의 헌신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1990

년대까지 침체기를 맞게 된다

. <

영어

,

불어

,

독어권 동아시아학 주요 성과

DB

구축 프로젝트

>

를 통해 구축된 프랑스어권

DB

를 분석한 결과

, 20

세기 동안 한국학 은 중국학은 물론 일본학에 비해서도 상당히 낙후되어 있는 실정이다

.

이에 대한 학계와 정부의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

프랑스학계의 일본학 연구는 국내 학계에서 거의 전무하지만 중국학의 경우

,

비교적 많이 소개된 편 이다

.

특히

18

세기 유교에 우호적이었던 볼테르를 비롯한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유교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국 내학계에서 가장 많았다

.

하지만 필자는 국내 일부 연구자들이 주장하듯이

,

유교가

18

세기 유럽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으로 본문에서 그 근거를 밝혔다

.

현재 프랑스어로 발간되는 동아시아 학 관련 학술지는 모두

13

종으로 파악되었는데

,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서 무상으로 열람할 수 있다

.

이처럼 인 문

·

사회과학연구 성과물들을 무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은 프랑스의 기초학문에 대한 국가의 보호정책이 있 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

프랑스의 지식무상보급정책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여파로

지식의 비용

이 급격히 증가하고 언어의 다양성이 죽어가는 오늘날의 학술생태계를 개선하려는

대안적 세계화

라는 성격이 있다

.

이 번 연구를 수행하면서 필자가 가장 놀랐던 점은 국내 학계가 프랑스어권의 동아시아학 연구를 바라보는 시선 이 한국은

19

세기

,

중국은

18

세기 계몽주의시대로 거의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

이러한 국내 학계의 편향 성이 혹시 자민족 중심적 사고에서 의도된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은 이항대 립적 관계를 형성하지만 결국 객관적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

.

오목 거울이나 볼록거울로는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다

.

현재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리의 모습

프랑스어권 동아시아학의 여정, 그리고 대안적 세계화*

– 이해와 공존을 향한 오디세이아 –

110)

박 성 진**

* 이 논문은 2016년 4월 22일 단국대학교에서 개최되었던 <구미 동아시아학 연구의 궤적>에서 발표되었던 「프랑스어권 동아 시아학 연구의 궤적과 DB 구축현황」의 내용의 일부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연구원 / psjquina@live.co.kr

(2)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있는 판판한 거울뿐이다

.

[

주제어

]

프랑스 동아시아학

, DB

프로젝트

,

한국학

,

중국학

,

유교

,

계몽주의

,

오리엔탈리즘

,

옥시덴탈리즘

,

공공성

,

세계화

❘목 차❘

.

머리말

.

동아시아학 연구사를 보는 국내외 간의 시각차

.

프랑스어권 동아시아학 관련 연구소

,

학술지 그리고 학술성과 개방정책

.

맺음말

대칭은

,

그 두 문화를 대립시키면서 또 하나로 통일합니다

.

가령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은 같으면서 도 다릅니다

.

반전된 상입니다

.

하나하나 보면 같은데 실물로 상이 환원이 안 되는 이상 같은 것은 아닙 니다

.

여행자들은 낯선 나라를 여행하다가 자기네와는 완전히 다른 사용법을 보게 되면 싫은 감정을 가 지고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

그것은 뒤집어서 보면 같은 것입니다

.

즉 누구에게는 낯선 것이 누구에게는 익숙한 것입니다

.

낯선 것에 적응해 익숙해지는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거죠

.”

– 클로드 레비 – 스트로스

,

「낯섦이라는 익숙함」

,

󰡔달의 이면󰡕 중에서

Ⅰ. 머리말

프랑스와 중화인민공화국이 수교한 지 햇수로 꼭

10

년째 되던 해인

1973

년에 한 권의 책이 프랑스의 서 점가를 휩쓸었다

.

집계에 따르면 그 책은 무려

885,000

부나 팔렸다고 한다

.

정말 빵 나가듯이

,

팔려나갔던 것이다

.

다소 자극적인 제목을 단 󰡔중국이 깨어날 때 온 세상이 떨게 될 것이다

( Quand la Chine s’éveillera

… le monde tremblera, 1973)

󰡕라는 이 책은 알랭 페이르피트

(Alain Peyrefitte)

의 대표작이었다

.

1) 그는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71

년에 프랑스 국회의원방문단의 대표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하고 그가 봤던

중국 의 실상

을 이 책에서 다루었다

.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

2)

중국은 인구와 인구증가율을 고려할 때

,

어떡해서 1)책 제목으로 쓰인 구절은 원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세이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었던 시기에 조지 매카트니(George

Macartney)의 󰡔중국관찰기(

Observations sur la Chine

)󰡕를 읽고 난 뒤에 한 말이라고 한다. 조지 매카트니(George Macartney:1737년~1806년)는 청(靑)에 영국 특사로 파견되어 건륭제를 알현할 때 청조의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거부해서 영국과 청제국 간에 외교적 마찰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나폴레옹이 한 말을 모두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중국을 잠들도록 내버려둡시다. 왜냐하면 중국이 깨어날 때 온 세상이 떨게 될 테니까요(Laissez donc la Chine dormir, car lorsque la Chine s’éveillera le monde entier tremblera).”

2)드골주의자였던 알랭 페이르피트는 중국을 방문하기 전인 1967년에는 교육부장관에 임명되었으나 마오주의자들을 비롯한 신 좌파가 주도했던 68혁명 때문에 곧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정계 은퇴 이후, 그는 천안문사태가 벌어지는 해인 1989년에

(3)

든 그 규모를 감당하기에 충분한 기술력을 보유하게 될 것이다

.

지금의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제의 중국 과 비교해보아야 한다

.’

3) 현재의 중국문화를 알기 위해서 중국의 과거를 살펴보아야한다는 주장이야 지극히 당연한 말이고 비단 중국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별로 문제 삼을만한 점은 없다

.

게다가 그가 방 문했던 때가 중국이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의 예상이 몇 십 년 앞을 내다 본 혜안이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

문제는 중국이 오랜 동양적 전제주의 전통 때문에 민주주의 가 불가능하며 현재의 마오쩌둥

(

毛澤東

)

의 독재는 필연적 결과라고 평가한 데에 있었다

.

4) 더구나 그는 문화 대혁명이 농촌사회를 변화시켰고 농민의 실질적 생활을 향상시켰다는 찬사를 덧붙이기까지 했다

.

5) 사실 알 랭 페이르피트의 주장은 중국학 연구자들 사이에 익숙한 주제인

근대성

(modernité)

논쟁

을 다시 한 번 끄집 어낸 것에 불과했다

.

그에게는

근대성

이란 서유럽사회의 고유한 특징이지 중국과는 관련 없는 문제이었다

.

한편 알랭 페이르피트가 중국을 방문했던 바로 그 해에 피에르 리크만

(Pierre Rychmans)

이라는 소장학자 가 시몽 레이

(Simon Leys)

라는 필명으로 󰡔벌거숭이 주석님

,

마오쩌둥

( Les habits neufs du Président Mao , Champ libre, 1971)

󰡕이라는 책을 냈다

.

6) 그의 책도 알랭 페이르피트의 책만큼은 아니었지만 학계뿐만 아니 라

,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

그동안 이데올로기적 선전

·

선동에 숨겨진 문화대혁명의 실상을 서구사회 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

7) 시몽 레이는 문화대혁명이란 마오쩌둥이 오랫동안 준비해온 쿠데타이 자

,

자신이 야기한 심각한 위기상황에 대한 책임을 정적들에게 전가시키기 위해 벌인 사건에 불과할 뿐이라 고 주장했다

.

어떻게 동일한 대상을 보면서 이토록 상반되는 해석할 수 있을까

?

과연 알랭 페이르피트와 시 몽 레이 중에서 누가 옳았던 것일까

?

알랭 페이르피트

?

아니면 시몽 레이

?

중국의 근대성

또는

민주주의

처럼 어려운 주제는 제쳐놓고 문화대혁명이 불러온 비극만 놓고 본다면 시 몽 레이의 진단이 명백히 옳았다

.

그렇지만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누가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

중국 문화에 대한 프랑스의 열기가 단순한 호기심이나 소수 전문가만의 논의에 머물지 않고 당시 프랑스인들의 삶

또 한 번 중국사에 관한 책을 출간한다. 이 책은 그전 책보다 사회적 파장은 다소 미약했지만 프랑스에서도 주목을 받았고 중국에서도 󰡔정체된 제국(停滯的帝國)󰡕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되었다.

3) Peyrefitte, Alain,

Quand la Chine s’éveillera

le monde tremblera,

Fayard, 1973, p.17.

4) 사실 1970년대 초반기 프랑스는 좌파뿐만 아니라, 우파조차도 마오주의에 호의적이었던 분위기였다. 마오 사망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발레리 지스카르댕(Valéry Giscard d’Estaing)은 마오의 죽음에 대해 ‘인류의 등불(le phare de l’humanité)’

이 꺼졌다고 조의를 나타냈다. Conan, Eric et Lacroix, Alexis, “Un Alain Badiou n’est possible qu’en France”,

Marianne

, 2014. 12. 13. http://www.marianne.net/Un-Alain-Badiou-n-est-possible-qu-en-France_a243272.html#8y WPG6PDEmdfq0Fg.99(검색일:2016. 3. 2).

5) Peyrefitte, Alain,

op. cit.,

1973, p.339.

6)현재 <영어, 불어, 독어권 동아시아학 주요 성과 DB구축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어로 자료화되었기 때문에 서지사항, 개요, 목차, 서평 등을 현재 온라인상으로 검색할 수 있다(http://ec2-52-78-36-41.ap-norheast-2.campute.amazonaws.com/).

앞으로 논문에서 인용된 문헌들 중에서 <프로젝트>를 통해 자료화된 것들은 서지사항을 일일이 밝히지 않고 <프로젝트>에 서 부여한 코드번호로 대체하겠다. 예를 들어, 󰡔벌거숭이 주석님, 마오쩌둥󰡕이란 책의 제목을 검색창에 입력하면 이 책에 관 한 여러 가지 사항들을 확인할 수 있다(코드번호:F0298).

7)책 제목은 안데르센의 󰡔벌거숭이 임금님󰡕에서 따온 것이다. 시문 레이는 석도(石濤)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그는 반마오주의적 활동 때문에 <르몽드(

Le Monde

)>로부터 ‘미국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써야 했고 또한 몇몇 동료 중국학 연구자들에게 따돌림을 받다가, 결국 프랑스의 대학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호주 시드니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하다가 2014 년에 생을 마감했다.

(4)

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

8) 프랑스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다닌다는 파리 고등사범학교

(École normale supérieure de Paris)

학생들을 인솔하고 베이징공항에 도착했을 때

학생들의 감격하는 모습이 마치 메카를 순례하는 이슬람교도 같았다

는 루시앙 비앙코

(Lucien Bianco)

의 증언은 당시 프랑스에서 마오주의에 대한 열광이 어느 정도이었는지를 가늠케 한다

.

9) 비단 학생들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

그들의 스승이었던 사르 트르

,

알튀세르

,

그리고 라캉조차도 마오쩌둥의

모순론

실천론

을 설파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

10) 장 – 뤽 고다르는

<

중국여인

(La chinoise, 1967)>

이라는 영화를 통해 프랑스의 젊은 마오주의자들의 세계를 그렸고 대표적 출판사 소이유

(Seuil)

의 문예계간지

< Tel Quel >

은 마오주의의 복음을 프랑스 전역에 확산시켰다

.

11) 잘 알려져 있는 대로 마오쩌둥은 지식인들을 경멸했고 학생들을 농촌으로 내쫓았다

.

그런데 당시 많은 프랑 스의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역설적이게도 그런 마오에 열광했고

< Mao, Ma o>

를 목청껏 불렀다

.

12)

지식인을 미워하는 건 바로 지식인 자신

이라고 했던가

?

왕년에 마오주의자였던 한 지식인이 당시 상황을 회고하면서 한 말이다

.

13) 이처럼 유라시아대륙의 극동과 극서에 위치했으면서도 중국과 프랑스는

60

년대 말에서

70

년대 초까지

마오주의

라는 열병을 함께 앓았다

.

사실 프랑스인들의 중국문화에 대한 열기는 비단 현대사회에만 국한되었던 현상은 아니었다

.

68

혁명의 현장을 직접 목격했던 이동윤

(

李東潤

)

교수는

16

세기부터

20

세기까지의 프랑스의 동아시아학 연 구사를 돌아보면서

,

프랑스인들의 기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

“17

세기에는 공자가 어떤 사람 입장에서는

철인

(

哲人

)

왕자

(

王者

)’

이고

,

다른 사람에게는

중국의 악마

(

惡魔

)’

라 불려지고 있다

.

현재에도 중국에 대한 프랑스 인의 관찰은 신

(

)

과 악마

(

惡魔

)

와의 사이 를 오가고 있다

.”14)

8) Bastid-Bruguiere, Marianne,

La Chine, une passion française: Archives de la diplomatie française XVIIIe-XXIe siècles

, Loubatières, 2014, p.240.

9) 파리고등사범학교 동기들이자 절친이었던 자크 데리다, 피에르 부르디외도 좌파이면서 마오주의자들을 비판했다. 당시 루시 앙 비앙코는 대표적 반마오주의적 중국 근현대학자였다. 반면에 그보다 연장자였던 장 셰노(Jean Chesneaux)는 열렬한 마 오주의자였다. Conan, Eric et Lacroix, Alexis,

op. cit.

, 2014. 12. 13; 박상수, 「루시엥 비앙코 중국농민의 ‘자발적 집단 행동」, 󰡔역사와 문화󰡕 15, 2008, 174~201쪽.

10) 문성원, 「‘진리’냐, ‘파국’이냐:문화대혁명의 서양철학적 반향에 대한 소고」, 󰡔시대와 철학󰡕 14, 2003, 111~129쪽; 제이슨 바 커(저), 이재원(역), 「주인기표:라캉 – 마오주의의 간략한 계보학」, 󰡔문화/과학󰡕 77, 2014, 319~338쪽.

11) Xu, Kefei, Le maoïsme de

Tel Quel autour de Mai 68, Transtext(e)s Transcultures

6, 2011, en lignes, http://transtexts.revues.org/436(검색일:2016. 2. 17); F0299.

12) 클로드 산느(Claude Channes)가 불렀던 유행가로서, <중국여인>의 배경음악으로도 사용되었다.

13) 이 말은 파리 7대학교 언어학과 교수였던 장 – 클로드 밀네(Jean-Claude Milner)가 68혁명과 마오주의를 회고하면서 한 말 이다. 그는 당시 <프롤레타리아 좌파>라는 마오주의 운동조직의 열성 당원이었다. Vallaeys, Béatrice, “Dans le maoïsme d’après 68, il y a la Chine et Mai”,

Libération

, 2009. 09. 29. http://www.liberation.fr/planete/2009/09/29/dans-le- maoisme-d-apres-68-il-y-a-la-chine-et-mai_584549(검색일:2016. 3. 17).

14) 李東潤, 󰡔프랑스人의 智慧󰡕, 正音社, 1980, 202쪽. 이동윤은 1961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자크 제르네(Jaques Gernet) 의 지도하에 송대 사회경제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78년에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부임해 1984년까지 약 7년간 교직에 몸을 담고 있다가 행방이 묘연해진 기인(奇人)이다. 대학에 몸담고 있던 기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학계에 낯설 었던 아날학파를 소개하고 중국사를 사회경제사적 관점에서 연구한 학자였다.

(5)

어떻게 보면 프랑스의 동아시아학

400

년의 역사는

극단과 극단 사이를 격렬하게 오가면서도 점차 그 사 이클의 폭을 줄여가며 실체로 수렴되는 과정

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

2013

4

월 한국연구재단의 토대연구 공모 주제 중에 하나였던

<

해외 동아시아학 연구 성과

(

문헌

) DB

구 축: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

연구과제명

)

– 이하 프로젝트

>

과제 수행은 프랑스어권 동아시아학 연구사와 그 특징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

15) 다시 말해 동아시아학

(

한국학

,

중국학

,

일본학

)

에 관한 서구학계의 주요 연구 성과가 무엇이며 또 각국의 동향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

특히 다른 서양 언어권

(

영어권

,

독어권

)

에 비해 프랑스에서 동아시아 인문학

(

文史哲

)

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한국 연 구자들이 극히 소수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번

<

프로젝트

>

는 프랑스어권 동아시아학 연구자들에서는 가뭄 끝에 내린 단비 같은 것이었다

.

이 기회로 프랑스어권 동아시아학의 연구 동향을 점검할 수 있었고 또 다른 언어권과의 비교를 해서 프랑스어권 동아시아학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아직

<

프로젝트

>

종 료까지 약

5

개월 정도 남았지만 그동안

DB

화된 단행본이

3,031

,

논문이

4,020

편에 이를 정도로 풍부한 연 구 성과들이 축적되었다

.

16) 물론 연구 성과들의 대부분은 영어권이 차지하고 프랑스어권의 성과는 양적으로

1/5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 한국에서 프랑스어권 동아시아 문사철 연구성과

DB

가 이 정도 규모로 구축된 적이 없었다는 점 또한 사실이기에 프랑스어권의 동아시아학 연구 성과들을 개괄적으 로 살펴보고자 한다

.

이 논문은

<

프로젝트

>

를 수행하면서 구축된 프랑스어권 동아시아학 연구에 대한 일종의 종합보고서로서 이 논문은 그 첫 편에 해당한다

.

보고서는 모두 세 편의 논문으로 구성될 예정인데

,

첫 번째 논문에서는 프랑스어권 동아시아학의 연구사 및 학계동향에 대해서 다루려고 한다

.

이후 두 번째 논문에서는 프랑스어권 동아시아학의 연구

DB

의 양적 분석을

,

마지막 논문에서는

DB

의 질적 분석을 다룰 예정이다

.

지난

4

세기 동안 프랑스는 구미권 동아시아 연구를 주도하여 왔고 특히 구미권 한국학과 중국학의 토대구 축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

그와 같은 이유 때문에 국내 학계에서는 구한말의 한국학과 계몽시대 의 중국학처럼 프랑스의 동아시학 초창기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

이 논문에서는 먼저 그동안 국내 학계에 서 제출된 논문들을 중심으로 국내 학계가 인식하는 프랑스학계 동아시아학의 일반적 특징을 도출한 다음

,

각론으로 들어가서 지역별로 보다 자세하게 알아보겠다

.

이처럼 국내 학계의 연구동향을 자세하게 살펴보는 이유는 국내 학계에서 바라보는 프랑스의 동아시아학과 그들이 바라보는 프랑스의 동아시아학을 서로 대조 해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

최근 프랑스의 한 중국학자가 프랑스의 중국학사에 관해서 짧은 글을 발표하 였다

.

논문에서는 이 글을 번역하여 전재함으로써

,

국내 학계와 프랑스학계의 시각들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

다음으로 프랑스의 동아시아학관련 연구소들과 동아시아 문사철 관련 학술지들을 소개하고 이번

<

프로젝트

>

를 통해서

DB

구축현황도 함께 제시해 보고자 한다

.

마지막으로 세계화에 따른 동아시아학술 생태환경의 변 화와 이에 대응하는 프랑스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다

.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먼저 프 랑스어권 동아시아학 연구사를 보는 국내의 시각을 다루고자 한다

.

15) 沈載勳, 「구미 동아시아학의 발전과 그 수용을 위한 한국판 DB 구축」, 󰡔大同文化硏究󰡕 87, 2014, 393~430쪽. 16) 2016년 3월 25일 현재.

(6)

Ⅱ. 동아시아학 연구사를 보는 국내외 간의 시각차

1. 프랑스어권 동아시아학을 바라보는 국내 학계의 시선

메타 분석적 관점에서 지금까지 국내 학계에 발표된 프랑스어권 동아시아학에 관한 연구 성과들을 살펴보 면 크게 세 가지 경향이 두드러지게 눈에 띤다

.

첫 번째는 연구대상인데

,

국내 학계가 프랑스어권의 중국학 이나 일본학에 비해 한국학의 연구경향에 유독 관심이 많다는 점이다

.

개인에서건 집단에서건 타자에게 자기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싶은 욕망을 갖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

하지만 타자의 입장에서 우리 문화뿐 만 아니라

,

우리의 이웃 문화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견주어봐야 비로소 우리 문화의 위상을 제대로 알 수 있고 그래야만 자아도취나 자기비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

두 번째는 연구주체인데

,

그동안 국내 학계 는 오로지 프랑스 학계의 동향에만 치중해왔다는 점이다

.

필자 또한 이 논문에서 프랑스학계를 중심으로 논 지를 진행하기 때문에 기존 연구들을 비판을 할 처지는 못 된다

.

다만 향후 총체적

,

다각적 연구를 하기 위해 서는 이 문제는 한 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아마 프랑스어권에서 프랑스가 중심이라는 사실 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그렇다 하더라도 프랑스인만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며 프랑 스가 동아시아학을 독점해 왔던 것도 아닌데

,

국내 학계는 프랑스어권의 다른 지역에 대해서 너무나 소홀했 다

.

이와 같은 편향성은 프랑스어를 모국어 또는 행정언어로 사용하는

80

개 국가와 정부가 참가하는

프랑코 포니

(Francophonie)’

문화적 예외성과 다양성의 원칙

에도 위배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

17) 현재 캐나 다의 퀘벡지역

,

벨기에

,

스위스 등 다른 지역에서도 의미 있는 연구 성과들이 지속적으로 제출되고 있는데

,

이 지역들의 학술성과들에 대해서도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

마지막으로 언급되어야 할 문제는 국내 학 계에 소개된 프랑스어권의 연구가 주로

18

세기와

19

세기 이전 시기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 프랑스어 권 학계의 연구 동향을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 20

세기 후반기 이후 프랑스학계에 대한 국내 연구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언어교육 및 교육기관 소개

,

문학작품의 번역 실태

,

프랑스 학술기관의 고문서 소 장현황 등 개별적이고 외형적인 사실들을 나열하는 수준의 보고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

18) 실제로 그들이 무엇을 연구하고 있으며 현재 프랑스학계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밝힌 연구는 극히 드물다

.

전반적으로 과거가 아닌 현재가

,

개별 사실의 나열보다는 심층적이고 종합적인 분석이 절실히 요구된다

.

19)

17) 김병욱, 「프랑코포니의 언어관 탐색:‘문화적 예외’와 ‘문화적 다양성’, 그리고 언어」, 󰡔한국프랑스학논집󰡕 64, 2008, 1쪽~ 28쪽; 미우라 노부타카(三浦信孝), 「공화국의 언어동화정책과 프랑코포니」, 󰡔언어제국주의란 무엇인가󰡕, 돌베개, 2005, 163~166쪽. 프랑스어권 국제기구(Organisation internationale de la Francophonie)의 2014년도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 상에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2억7천4백만 명으로 프랑스어는 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이다. Estimation des Francophons, http://www.francophonie.org/Estimation-des-francophones.html(검색일:2016. 3.

26).

18) 이혜은·이희재, 「꼴레쥬 드 프랑스 소장 한국 고서의 현황과 활용방안」, 󰡔한국문헌정보학회지󰡕 45, 2011, 236~251쪽; 오 정숙, 「프랑스에서 한국문학의 출판과 수용 사례 연구」, 󰡔프랑스학연구󰡕 38, 2006, 279~299쪽; 윤동원, 「프랑스 國立東洋 言語文化學院 圖書館 所藏 韓國本 典籍 考察」, 󰡔디지털도서관󰡕 73, 2014, 107~129쪽. 한국어교육 및 교육기관에 관해서는 뒤에서 논의하도록 하겠다.

19) 프레데릭 불레스텍스의 󰡔착한 미개인 동양의 현자󰡕(이향·김정연 역, 청년사, 2001, 336쪽)는 지난 800년간의 한국과 프랑

(7)

2. 프랑스어권 한국학을 바라보는 국내 학계의 시선

중국학도 마찬가지지만 가톨릭 선교사들이

16

세기부터

20

세기 초반까지 한국학 연구를 주도하였다

.

한국 과 프랑스 관계의 기원은 멀리

13

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20) 하지만 실질적으로 인적 교류가 시작된 시기 는 조선후기인

19

세기 전반기에 이르러서이다

.

특히 로마 교황청이

1831

년에

조선대목구

(

朝鮮大牧區

)’

를 설 치하고

1836

년에 파리외방전교회

(Société des 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가 교황청의 위임을 받아 선 교사를 파견하게 되면서 프랑스인들은 가장 먼저 조선에 정착한 유럽인이 되었다

.

21) 이들은 개항 전까지 유 럽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접근조차 불가능했던 조선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글을 써서 본국으로 보 냈고 그들이 보낸 글들은 정기 간행물의 형태로 유럽사회에서 확산되었다

.

선교사들이 축적한 조선에 대한 지식이 프랑스 한국학의 기원이 되었다

.

22) 당시 파리는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각지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의 보고서들이 집결되었던 도시로서 이미 유럽 동아시아학의 본산이었다

.

이젠 한국학의 중심 지로서의 역할까지 떠맡게 된 것이다

.

23) 파리외방전교회는 조선으로 파견되는 선교사들에게 현지인들의 자 립적인 가톨릭교회 건설지원

,

현지문화 존중 그리고 세속정치 불간섭 등 세 가지 기본정신을 강조하였다

.

24) 이 세 가지 방침 중에서 동아시아학 학술연구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문제는 현지문화에 대한 지침이다

. ‘

현 지문화에 대한 존중

,’

본지화

(

本地化:

inculturation)’

는 그들보다

2

백여 년 전에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벌 였던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부터 전승되어 온 프랑스 동아시아학의 전통이었다

.

프랑스의 원로 중국학자인 레 옹 방데르메르쉬

(Léon Vandermeersch)

는 최근 중국학에 관한 인터뷰에서

, ‘

본지화

전통은 현재까지도 이 어지고 있는 프랑스 동아시아학연구의 지적 전통이라고 강조했다

.

25)그러나 이러한 방침이 실제로 관철되었

스의 관계사를 전반적으로 파악하는데 유용하다.

20)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프랑스인들의 한국인식에 관계에 대해서는 김차규, 「19세기 이전 프랑스인들의 한국인식」, 󰡔인 문과학논총󰡕 32, 2011, 102~136쪽; 김학준, 「서양인들이 관찰한 조선의 모습들(제1회):개항 이전의 시기」, 󰡔한국정치연구󰡕

18, 2009, 260~304쪽; 전종호, 「󰡔중화제국전지(中華帝國全志)󰡕에 나타난 예수회의 중국관(中國觀)과 한국관(韓國觀)」, 󰡔西 江人文論叢󰡕 44, 2015, 211~253쪽; 정성화, 「한국관련 지식의 유럽적 기반과 내용 –17세기 전반기 예수회 중국 선교사들 의 기록을 중심으로」, 󰡔대구사학󰡕 97, 2009, 1~142쪽; 피에르 엠마뉘엘 후, 「조선 가교(架橋)의 재발견 –16~19세기 천주 교 선교사의 조선 진출 전략에 대한 기초연구」, 󰡔淵民學志󰡕 16, 2011, 189~233; 정해수, 「Le voyageur français:18세기 프랑스 사회에 투영된 조선시대의 모습, 그리고 작가가 조선을 바라본 시선의 의미」, 󰡔한국프랑스학논집󰡕 25, 1998, 615~

627쪽 참조.

21) 이경해, 「파리외방전교회와 조선의 만남」, 󰡔人文科學硏究󰡕 17, 2011, 89~111쪽; 조현범, 「파리외방전교회와 조선대목구의 분할」, 󰡔敎會史硏究󰡕 29, 2007, 15~60쪽.

22) 김은영, 「서양인이 읽은 조선:조불조약 체결(1886) 전 프랑스에서 생산된 출판물을 중심으로」, 󰡔서양사론󰡕 99, 2008, 202쪽.

23) 이경해, 앞의 논문, 2011, 90쪽. 24) 이경해, 위의 논문, 2011, 93쪽.

25) 이 인터뷰는 프랑스의 중국학 전통의 큰 흐름을 밝히고 있어 유용하다. 중국어 자막도 덧붙여 프랑스어 사용자뿐만 아니라 중국어 가능자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Entretiens exclusifs avec M. Léon Vandermeersch sur “Abel-Rémusat et la sinologie en France” https://www.youtube.com/watch?v=FBjFq2KGoQw(검색일:2016. 2. 3). 미국의 데이비 드 E. 먼젤로는 ‘본지화’를 ‘예수회 적응주의(jesuit accommodation)이라고 부르고 있고 또 국내 학계에서도 ‘적응주의’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는 것 같다(이향만·장동진·정인재(역), 󰡔진기한 나라, 중국:예수회 적응주의와 중국학의 기원󰡕, 나 남, 2009, 11쪽; 김혜경,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2, 5~13쪽). 하지만 영어에서나 프랑스어에서 나 ‘accommodation’라는 용어는 종교적 의미가 결여되어 있다. 반면에 ‘inculturation’이라는 용어에는 ‘종교적 적응’이라는 개념이 명확하게 담겨 있기 때문에 이 논문에서는 ‘incultur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inculturation’

(8)

는지는 의문이다

.

사실

본지화

지침은

19

세기 후반기에 우세했던 황화론

(

黃禍論

)

또는 오리엔탈리즘과 서로 양립되기 힘들었다

.

실제로 당시 조선에서 활동했던 프랑스인들은 유럽중심적 시각에서 한국사회를 바라보 는 경우가 많았다

.

26) 최근 당시 한국으로 파견된 선교사들의 복잡했던 심리상태

(mentalité)

를 분석한 연구 가 있어 흥미롭다

.

조현범은 기존 연구들의 호교론

(

護敎論

)

적 성격에서 탈피하여

,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했던 선교사들의 사적 서신

,

출생기록

,

사망자명부

,

비망록 등

1

차 사료를 직접 읽고 분 석하여 이른바

근대문명

을 대하는 그들의 상충적 의식구조를 역사심리학적 관점에서 조명했다

.

27) 그의 분 석에 따르면

1831

년부터

1866

년까지

35

년간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프랑스의 보수 적인 색채가 강한 지역의 빈농출신으로

23~25

세에 사제서품을 받고

2~3

년 내에 조선에 배속된 경우가 많았 다

.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성장한 그들은 자신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농촌 사회의 감수성으로 서구 유럽사회의 근대 문명을 타락으로 간주하면서 조선인의 공동체적 관습을 찬양하였다

.

한편으로는 조선의 정치

,

경제뿐만 아니라

,

가족

,

사랑

,

아동 교육에 대해서는 근대적인 심성으로 부정하는 이중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

때 문에 그들은 심적으로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

이러한 그들의 이중적 의식구조는 나아가 조선 천주교회의 일 반적 성향이었고 지금도 한국 천주교 종교문화의 기저에 깔려 있는 정서를 형성하게 되었다

.

28)

물론 종교적 배경에 벗어나 한국문화를 보다 전문적이고 학술적으로 접근하려던 프랑스학자들도 있었다

.

모 리스 꾸랑

(Maurice Courant)

은 그들 중에 한 명이었다

.

모리스 꾸랑은

1885

년 동양어학교에 입학하여 중국어 와 일본어를 전공하였다

.

그는 졸업한 뒤 통역관으로 북경에 체류하다가

, 1890

년에 서기관으로 서울에 부임해 오면서 처음으로 조선과 인연을 맺게 된다

.

29)초대 프랑스공사였던 꼴랭 드 쁠랑시

(Collin de Plancy)

에인도 되어 처음 한국문화에 눈을 뜬 꾸랑은 이후

1894

년부터

1901

년까지 한적

(

韓籍

)

들에 관한 문헌목록집인 󰡔조 선서지

(

朝鮮書誌

, Bibliographie coréenne )

󰡕를 차례로 출간하였다

.

30) 이 책은 서양에서 출간된 한국학에 관한 최초의 문헌목록집이었다

.

쁠랑시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서 가능했지만 꾸랑이 조선 체류 기간이 그리

를 우리말로 ‘문화화’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으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 의미가 모호하기 때문에 ‘본지화’ 또는 ‘현지화’라고 번역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26) 김귀원, 「구한말 프랑스문헌에서 군인 및 외교관이 본 한국의 이미지」, 󰡔한국프랑스학논집󰡕 46, 2004, 425~448쪽; 김귀원,

「프랑스 문헌에 비친 구한말의 의복문화」, 󰡔한국프랑스학논집󰡕 52, 2005, 277~302쪽; 김귀원, 「구한말 프랑스 문헌에 나 타난 한국의 주거문화」, 󰡔프랑스문화연구󰡕 21, 2010, 119~151쪽; 김성택, 「프랑스 문헌에 나타난 한국의 이미지에 대한 연 구:구한말 이전의 프랑스 문헌을 중심으로」, 󰡔한국프랑스학논집󰡕 47, 2004, 411~434쪽; 나애리, 「1907년 프랑스 신문에 나타난 한국과 한국인들의 이미지」, 󰡔프랑스문화연구󰡕 11, 2005, 121~142쪽; 오정숙, 「프랑스에서 한국이미지 표상의 역 사 및 지형도」, 󰡔프랑스문화연구󰡕 12, 2006, 107~127쪽; 이경민, 「프랑뎅(Frandin)의 사진 컬렉션을 통해 본 프랑스인의 한국의 표상」, 󰡔먼 나라 꼬레(Corée)󰡕, 경기도박물관, 景仁文化社, 2003, 215~254쪽; 이은숙, 「구한말에 나타난 한국관련 프랑스 문헌과 오리엔탈리즘」, 󰡔한국프랑스학논집󰡕 45, 2004, 357~376쪽; 이은숙, 「구한말 프랑스 문헌에 나타난 조선 여 성: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을 지닌 세 문헌을 중심으로」, 󰡔프랑스학연구󰡕 37, 2006, 223~244쪽; 홍순호, 「구한말(舊韓末) 서 구열강(西歐列强)의 대한(對韓)인식:프랑스를 중심으로, 󰡔먼 나라 꼬레(Corée)󰡕, 경기도박물관, 景仁文化社, 2003, 77~

117쪽.

27) 조현범, 「19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문명관:1836년부터 1886년까지」, 󰡔敎會史硏究󰡕 15, 2000, 83~112쪽. 28) 김가람, 「조현범, <19세기 중엽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인식과 문명관>」, 󰡔敎會史硏究󰡕 28, 2007, 269쪽.

29) Maurice Courant의 Courant은 ‘꾸랑’과 ‘쿠랑’ 등 두 가지로 표기되는데, 여기서는 전자를 따랐다. Collin de Plancy의 Plancy도 마찬가지로 ‘쁠랑시’와 ‘플랑시’로 표기되는데, 이 역시 전자를 따랐다.

30) 이 책에 소개된 한국문헌은 3,821권에 이른다. 모리스 꾸랑의 생애에 대해서는 다니엘 부셰, 「한국학의 선구자 모리스 꾸랑」,

󰡔東方學志󰡕 51, 1986, 153~194쪽; 다니엘 부셰, 「한국학의 선구자 모리스 꾸랑」, 󰡔東方學志󰡕, 52, 1986, 83~121쪽 참조.

(9)

<사진 1> 1929년 경주 석굴암을 방문한 앙리 마스페로 (

Mission archéologique françaises en Chine:

Photographies et itinéraires

, 2005)

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자

료를 수집하여 목록집을 편찬했다는 점 에서 다니엘 부셰의 평가처럼

,

모리스 꾸랑은 진정한 의미의

한국학의 선구자

이었다

.

오랫동안 망각되었던 꾸랑의 연 구들이 부셰의 재발견 이후

,

현재 다양 한 각도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

31) 동양 어학교 시절 꾸랑은 동기이었던 에두아 르 샤반느

(Edouard Chavannes)

와 막 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

32) 잘 알려진 대 로 후일 샤반느는 프랑스 중국학의 태두 가 된다

.

그렇다고 그가 한국학과 전혀 연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 1907

년 에

10

개월 동안 그는 중국 북부지역을 탐사하는 과정에서 광개토태왕비

,

장군 총

,

태왕릉

,

통구성

,

산성자산성 등 고구 려 옛 유적들도 조사하고 별도의 보고서 를 남겼다

.

그는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한국과 관련 있는 유적을 조사한 역사학 자였다

.

33) 저명한 중국학 연구자이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은 프랑스학자가 샤반

느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

그의 제자이면서 도교연구의 권위자였던 앙리 마스페로

(Henri Maspero)

도 한 국과 인연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

그는

1914

년에

1

차 중국탐사에서 남중국을 시작으로 북중국과 한국을 거쳐 일본까지 탐사할 계획을 세웠다

.

하지만 그 해 발발한

1

차 세계대전으로 탐사를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

그 뒤 그는

1928

9

월부터

1930

2

월까지 다시 북중국 탐사를 떠났는데

,

현재까지 그의

31) 다니엘 부셰, 「모리스 꾸랑」, 󰡔모리스 꾸랑의 서울의 추억, Souvenir de Séoul󰡕, 서울역사박물관, 2010, 76~83쪽; 박현 숙·윤종필,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의 고대 한·일관계사 인식과 그 특징」, 󰡔한국사학보󰡕 54, 2014, 131~155쪽; 이상현, 「<삼국사기>에 새겨진 27년 전 서울의 추억: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과 한국의 고전세계」, 󰡔국제어문󰡕 59, 2013, 189~227쪽; 이영미, 「쿠랑이 본 한국의 역사와 동아시아 속의 한국」, 󰡔한국학연구󰡕 28, 2012, 1~32쪽; 이희재, 「모 리스 꾸랑과 韓國書誌에 관한 考察」, 󰡔숙명여자대학교 논문집󰡕 28, 1988, 325~364쪽; 정대영,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의 󰡔韓國書誌󰡕 Bibliographie Coréenne에서 나타나는 고지도 자료 연구」, 󰡔한국고지도연구󰡕 3, 2011, 63~94쪽; 프란시스 마꾸엥, 「기메박물관, 한국 그리고 모리스 꾸랑」, 󰡔모리스 꾸랑의 서울의 추억, Souvenir de Séoul󰡕, 서울역사박 물관, 2010, 90~97쪽.

32) 다니엘 부셰, 앞의 논문, 1986a, 156쪽.

33) 서길수, 「에두아르 샤반느의 고구려 국내성 탐사(1907)에 관한 연구」, 󰡔高句麗硏究󰡕 22, 2006, 91쪽~173쪽.

(10)

탐사여정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

그가 북중국에서 출발하여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갔던 것은 분명한 데

,

한국에서의 그의 행적이 묘연하다

. 2005

년에 출간된 기메박물관의 한 도록에는 그가 경주 석굴암을 방문 하고 무언가 열심히 적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실려 있어

,

더욱 궁금증을 자아낸다

<

사진

1>.

34) 그와 한국의 만남이 여행길에 잠깐 스쳐 지나간 인연에 불과했는지

,

숨겨진 무언가가 있었는지 앞으로 추적해 봐야 할 일 이다

.

모리스 꾸랑이 한국을 방문하기

2

년 전인

1888

년에 조선을 다녀간 샤를 바라

(Charles Varat)

는 한국 민 속공예와 고미술을 프랑스사회에 광범위하게 알린 사람이다

.

그는 프랑스 교육예술부로부터 한국 인류학적 조사를 하라는 임무를 받고 약

6

주 동안 조선 각지를 여행하면서 한국 민속품과 도자기를 비롯한 골동품을 수집하였다

.

35) 그가 모은 수집품들은

1889

년에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 때 전시된 뒤 샤이요

(Chaillot)

궁 인류학박물관에 잠시 보관되었다

. 4

년 뒤인

1893

년에 동아시아예술 및 고고학 박물관인 기메

(Guimet)

박물 관에 한국관이 독립적으로 설치되고 바라의 수집품들은 그곳으로 이관되어 지금까지 전시되고 있다

.

36) 프랑 스 내의 한국관 설치는

19

세기 프랑스 사회에 진정한 한국 – 프랑스 문화교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 었다

.

국내 박물관이 건립되기도 전에 해외에서 먼저 한국 유물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에 자못 의 의가 있다

.

37)당시 기메박물관 한국관은 프랑스 사회가 한국 문화를 이해하고 한국 예술품을 직접적으로 접 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

한편 기메박물관은 새롭게 소장하게 된 한국 민속공예품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상황에서 마침 파리에 와 있던 홍종우를 촉탁직으로 채용하게 된다

.

홍종우는 한국실 전시 와 유물분류작업에 참가한 이외에도 레옹 드 로니

(Léon de Rosny)

의 󰡔춘향전󰡕

,

󰡔다시 꽃이 핀 마른 나무

(

심청전

)

󰡕 번역사업에도 참여했다

.

또한 홍종우는 「조선의 모자

(Les coiffures coréennes, 1899)

」라는 논문 을 쓴 앙리 슈발리에

(Henri Chevalier)

와 함께 󰡔직성행년편람

(

直星行年便覽

)

󰡕을 번역해서 󰡔기메박물관 연보󰡕

26

권에 게재하기도 했다

.

38) 이 같은 작업은 김옥균의 암살자로 알려진 홍종우가

2

년 남짓한 프랑스 체류기

34) 이 도록은 프랑스 중국학자들의 약력과 중국 고고학탐사의 여정이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부록으로 실린 CD에는 탐사과정 에서 촬영된 20세기 초반기의 귀한 사진들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Guimet”,

Mission archéologique françaises en Chine: Photographies et itinéraires,

Réunion des Musées Nationaux, 2005, p.33.

35)샤를 바라(저), 성귀수(역), 「조선 종단기:1888~1889」, 󰡔조선기행:백여 년 전에 조선을 둘러본 두 외국인의 여행기󰡕, 눈 빛, 2001; 노시훈, 「샤를르 바라의 「조선 종단기 Voyage en Corée」(1892)에 나타난 식민주의 담론」, 󰡔한국프랑스학논집󰡕

34, 2005, 151~167쪽. 한편 앙드레 빌르캥(André Billequin)은 쁠랑시의 권유로 한국도자사에 대한 논문을 집필하였다. Billequin André, “Note sur la porcelaine de Corée”,

T’oung Pao,

7, 1896, pp.39~46; 구한말 프랑스와의 도자교류에 관해서는 엄승희, 「근대기 한불(韓佛)의 도자교류」, 󰡔한국근현대미술사학󰡕 25, 2013, 7~43쪽; 엄승희, 「근대기 세브르국립 도자박물관의 한국 도자기 소장과 수용」, 󰡔한국근현대미술사학󰡕 29, 2015, 261~286쪽 참조.

36) 프레데릭 불레스텍스(앞의 책, 2001, 127쪽)는 1892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한국 민속품이 최초로 전시되었다고 썼지만 그 해 파리에서 박람회가 열리지 않았으므로 이는 오기(誤記)인 듯하다; 구한말 한국의 민속과 풍경을 담은 사진 자료는 루이 마랭(Louis Marin)이 수집하여 기메박물관에 기증하였다. Pierre Cambon(저), 홍지영(역), 「기메박물관(Musée Guimet) 의 루이 마랭(Louis Marin)소장품」, 한국에 관한 최초의 사진들」, 󰡔먼 나라 꼬레(Corée)󰡕, 경기도박물관, 景仁文化社, 2003, 281~295쪽; 현재 기메박물관에 소장된 한국문화재는 총 914점으로 자세한 소장현황에 대해서는 국립문화재연구소, 󰡔프랑 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1999, 347쪽 참조.

37) 신상철, 「19세기 프랑스 박물관에서의 한국미술 전시 역사:샤를르 바라(Charles Varat)의 한국 여행과 기메박물관 한국실 의 설립」, 󰡔한국학연구󰡕 45, 2013, 41~64쪽; 프란시스 마꾸엥, 앞의 글, 2010, 90~97쪽.

38) 김윤식, 「홍종우와 <춘향전>의 프랑스어 번역:우리 고전문학의 해외진출」, 󰡔韓國學報󰡕 40, 1985, 191~196쪽.

(11)

간에 한국학과 관련해서 이룬 업적이다

.

39)

필자는 프랑스어권 동아시아학 연구 성과들을

DB

화하면서 우연찮게

Kim, Yung-kun

이라는 이름을 가 진 사람의 논문을 보게 되었다

. ‘

일본어의 로마자표기방식

에 관한 짤막한 논문이었는데

, 1938

년 󰡔프랑스 극 동학원지

( Bulletin de l’É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 )

󰡕에 게재되었다

.

40) 처음에 한국인이

일본어 로마자표기법

에 대해서 논했다는 사실에 의아해하기도 했지만 당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고 려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

다만 그의 이름이 알파벳으로 표기되어 있어서 한글로 정확히 어떻 게 표기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

그렇게 궁금증만 갖고 있다가 이 논문을 쓰기 위해 여러 자료를 찾아보 던 중

,

우연히 그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

그는 김영건

(

金永鍵

)

이라는 인물로 그 자신이 술회했던 대로

전변 무상

(

轉變無常

)

한 생

을 살다간 사람이었다

.

김영건의 생애와 활동은 최근 윤대영에 의해 상세하게 밝혀졌는 데

,

그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

41)김영건은

1910

년에 태어나 총독부 중추원 촉탁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

해주 에서 경성

(

京城

)

으로 이주하여 경성 제

2

고보

(

현 경복고

)

를 졸업

(2

)

하고

21

세 되던

1931

년부터

1940

년까 지

10

년간 프랑스극동학원

(EFEO)

하노이지부에서 일본도서 담당사서 겸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

위에서 말 한

일본어로마자표기법에 관한 논문

은 그가 극동학원에 연구원으로 몸담고 있을 때 쓴 글이었다

.

김영건은 문학

,

민속학

,

역사학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집필활동도 왕성했다

.

하지만 그는 해 방정국 속에

1949

년 이후 종적을 감추게 되었고 곧 역사에서 잊히게 되었다

.

42) 한마디로 김영건은 당시 한 국인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국제적 시각 속에서 한국학을 조망할 수 있는 식견을 갖췄던 박학다식한 인물이 었으며 프랑스어권 동아시아학 연구사의 측면에서 볼 때

,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동아시아학의 유수 연구기 관에서 학술연구를 전문으로 했던 학자였다

.

43) 그의 학술적 업적에 상응하는 정당한 평가가 조속히 이뤄져 야 할 것이다

.

44)

39) 홍종우가 단순한 수구파가 아니라,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근대화를 추진하고 했던 인물이라는 평가가 있다. 조재곤, 「홍 종우 재조명:왜 김옥균을 살해하였는가」, 󰡔역사비평󰡕 17, 1992, 270~278쪽.

40) Kim, Yung-kun, Note sur la nouvelle romanisation officielle du japonais,

Bulletin de l’Ecole française d’Extrême- Orient

38, 1938, pp.306~308(FA0210).

41) 윤대영, 「김영건(金永鍵)의 베트남 연구 동인(動因)과 그 성격 –1930~40년대, 그의 ‘전변무상(轉變無常)’한 인생 역정과 관 련하여」, 󰡔동남아시아연구󰡕 19, 2009, 57~100쪽; 윤대영, 「金永鍵의 이력과 저술 활동」, 󰡔한국학연구󰡕 21, 2009, 127~

133쪽.

42) 1949년 이후 김영건의 행적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 기간 중 처형됐다거나 월북했다는 얘기가 떠돌았지만 확

인된 바 없다. 일각에선 “남양으로 가고 싶다”는 1948년 <어록>의 한 구절을 근거로 베트남·프랑스 밀항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세영, 「‘동아시아 지식인’ 김영건을 아십니까」, 󰡔한겨레󰡕, 2009. 12. 24. http://www.hani.co.kr/arti/culture/

religion/395278.html(검색일:2016. 3. 30).

43) 김영건의 활동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들을 참조. 안종철, 「김영건(金永鍵)의 한국대외관계사에 대한 인식과 해방 직후 활 동」, 󰡔한국학연구󰡕 21, 2009, 173~206쪽; 이희환, 「해방기 김영건의 문학활동과 비평사적 의의」, 󰡔한국학연구󰡕 21, 2009, 135~170쪽; 임동권, 「金孝敬·金永鍵論:1930年代 日本에서 活躍한 두 學者」, 󰡔韓國民俗學󰡕 28, 1996, 53~63쪽. 44) 전경수는 김영건의 기구했던 운명과 중국 인류학의 비조(鼻祖)로 추앙받는 페이샤오퉁(費孝通)의 운명을 대비해가면서 국내

학계의 현실을 개탄한 적 있다. 공교롭게도 김영건과 페이샤오퉁은 같은 해에 태어났다. 全京秀, 「金永鍵과 費孝通의 冥界 對話:雲南通信」, 󰡔근대서지󰡕 2, 2010, 27~30쪽.

(12)

3. 프랑스어권 일본학을 바라보는 국내학계의 시선

프랑스어권의 일본학 연구 현황을 소개하는 국내 연구는 상당히 적다

.

필자가 찾아 본 바로는 이향철의 논문 한 편이 유일하다

.

45) 그것도 유럽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프랑스어권의 일본학 연구부분은 아주 빈약하다

.

게다가 그의 논문이 주로 일본 측 문헌을 주로 근거로 프랑스어권의 일본학을 논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논지에 수긍하기 힘든 부분도 적지 않다

.

하지만 여기서는 그의 연구를 요약하는 것으로 프랑스 어권 일본학 연구사를 대신하고

,

추후 다른 지면을 통해 프랑스어권의 일본학 연구 성과에 대해서 보다 상세 하게 논하도록 하겠다

. 1858

년 프랑스와 도쿠가와

(

德川

)

막부 간에 통상조약이 체결되고 프랑스의 대학에 최 초로 일본어강좌가 개설되었다

.

그로부터

10

년 뒤인

1868

년에 일본어과가 대학에 설치되고 레옹 드 로니가 학과 주임교수로 부임하여 프랑스의 초기 일본학 발전에 공헌하였다

.

이향철은 프랑스의 일본연구가 중국학 이나 한문을 통한 불교연구의 지식과 전통을 배경으로 하여 성립되었다는 장 – 자크 오리가스

(Jean-Jacques

Origas)

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

프랑스의 일본학 연구가

)

일본의 근대국가로서의 후진성 때문에 역사를 거슬

러 올라간 고대일본의 종교와 사상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고 보았다

.

46)

1926

년에 건립된 도쿄일불회관

(

東 京日佛會館:

Maison franco-japonais)

은 프랑스의 일본학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된다

.

일불회관의 초대연구 원이었던 샤를 아그노에르

(Charles Haguenauer)

7

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

민족학

,

고고학

,

역사학 등 폭 넓은 분야에서 연구를 진행하다가

,

후에 동양어학교의 교장으로 자리를 옮겨 프랑스의 일본학자들을 수세대 에 걸쳐 양성하였다

. 2

차 대전 중에 프랑스의 일본학은 침체기를 맞이하는데

,

이향철은 그 원인을 영미 양국 은 일본과 교전대상자였지만 프랑스는 교전대상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에서 찾고 있다

.

하지만 일본의 경제성 장에 힘입어 최근 프랑스의 일본학 연구는 크게 성장하고 있다

.

4. 프랑스어권 중국학을 바라보는 국내 학계의 시선

마지막으로 프랑스어권의 중국학을 살펴보겠다

.

먼저 명청시대

선교사 중국학

에 관한 데이비드

E.

먼젤 로 또는 문젤로

(David E. Munggello)

의 두 저서

,

󰡔진기한 나라:중국 예수회 적응주의와 중국학의 기원󰡕과

󰡔동양과 서양의 위대한 만남:

1500~1800

󰡕이 최근에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싶다

.

이 책들은

45) 이향철, 「유럽인의 일본인식과 지식체계로서의 일본학의 형성과 전개」, 󰡔東方學志󰡕 112, 2001, 137~140쪽. 학술분야에서 프랑스의 일본학 연구에 관한 국내 논문은 극히 드물지만 19세기 후반기와 20세기 초기 유럽의 문학과 예술에 영향을 끼 쳤던 일본취향(Japonisme)에 대한 연구는 매우 많다. 프랑스사회와 일본취향에 관한 연구로는 김중현, 「󰡔마넷 살로몽󰡕의 주인공 코리올리스에게 미친 우키요에(l"ukiyo-e)의 영향 고찰」, 󰡔프랑스학연구󰡕 38, 2006, 25~47쪽; 김중현, 「피에르 로 티(Pierre Loti)의 ‘잃어버린 환상’:일본을 중심으로」, 󰡔프랑스학연구󰡕 40, 2007, 123~148쪽; 김중현, 「클로델의 일본 취 향에 관한 한 연구」, 󰡔프랑스학연구󰡕 62, 2012, 45~67쪽; 金賢華, 「파리 근대사회, 근대미술, 호쿠사이(葛飾北齋)와의 만 남 – 자연에 대한 경의」, 󰡔미술사연구󰡕 23, 2009, 141~169쪽; 신상철, 「자포니즘(Japonisme)의 근원과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프랑스 모더니즘 형성 시기 일본 미술의 수용 과정과 전시 고찰」,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40, 2014, 63~90쪽, 이유경·강미경, 「19세기 후반기 프랑스 나비파(nabis)에 끼친 자포니즘(japonisme)의 영향」, 󰡔예술문화󰡕 15, 2003, 207~

229쪽 참조.

46) 이향철, 위의 논문, 2001, 138쪽.

(13)

16

세기부터

18

세기까지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유럽 중국학의 전반적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견지에서 이 분야를 입문하는 연구자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

한편 최근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

문명연구 사업단은 ≪중국의 서학

,

유럽의 중국학:

17

세기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들의 초기 번역과 문자 이해를 중심으로≫라는 주제와 ≪중국의 서학

,

유럽의 중국학

2

:근대 유럽 지식인이 본 중국:

진기한 나라

에서

방부 처리된 미라

로≫라는 주제로 󰡔인문논총󰡕

67

, 68

집을 연속으로 펴냈다

.

47) 공동연구에 참여한 연구자 들은 초기 선교사들이

한자를 어떻게 인식했고 또 중국서적들을 그들의 언어로 어떻게 번역했는가

?’

하는 보 다 심층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초기 선교사들의 텍스트들을 면밀히 분석했다는 점과

18

세기와

19

세기 동안 전기 근대 계몽주의 운동에서 후기 계몽주의 운동으로 넘어가면서 급격하게 변화되는 중국관을 상 세하게 탐구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

보다 범위를 좁혀 프랑스의 중국학과 관련된 논문들을 일별해 보면

18

세기 프랑스 음악계에서의 중국취향

(chinoiserie)

을 다룬 연구

,

48) 피에르 로티

(Pierre Loti)

등 서양인이 바라 본 온 자금성의 이미지에 관한 연 구

,

49)

18

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중국지도제작에 미친 영향을 다룬 연구

,

50)장 밥티스트 뒤 알드

(Jean Baptiste du Halde)

의 󰡔중국지

( Description géographique, historique, chronologique, politique et physique de l’empire de la Chine et de la Tartarie chinoise)

󰡕에 대한 연구

,

51) 중국 언어학에 관한 연구

,

52) 프랑 스 작가들의 중국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에 관한 연구53)중국 근대문학사에 대한 프랑스어권의 연구동 향과 기관소개

,

54) 볼테르와 중국에 관한 연구55) 등 비교적 다양한 분야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다

.

그밖에 도 국내 역사학자들이 프랑스의 중국학을 학술사적 측면에서 고찰한 논문도 몇 편 있다

.

이 논문들은 풍부한

47) 박지현, 「중국의 서학, 유럽의 중국학:17세기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들의 초기 번역과 문자 이해를 중심으로」, 󰡔인 문논총󰡕 67, 2012, 383~386쪽; 안성찬, 「중국의 서학, 유럽의 중국학 2:근대 유럽 지식인이 본 중국:‘진기한 나라’에서

‘방부 처리된 미라’로」, 󰡔인문논총󰡕 68, 2012a, 3~6쪽.

48) 이서현, 「18세기 오페라에서의 이국주의(Exoticism)에 관한 고찰:중국 취향을 중심으로」, 󰡔음악이론연구󰡕 16, 2011, 112~

135쪽.

49) 민정기, 「1918년, 모두에게 열린 금성(禁城):마르코 폴로에서 피에르 로티에 이르기까지 서양인의 눈에 비친 중국의 궁성 (宮城)」, 󰡔中國文學󰡕 83, 2015, 185~223쪽.

50) 정인철, 「프랑스 왕실 과학원이 18세기 유럽의 중국지도제작에 미친 영향」, 󰡔대한지리학회지󰡕 49, 2014, 585~600쪽. 51) 沈泰植, 「뒤 알드의 ≪중화제국과 중국 타타르의 지리, 역사, 연대기, 정치, 자연(물리)에 대한 서술≫ 小考」, 󰡔중국학논총󰡕

30, 2010, 265~283쪽; 전종호, 앞의 논문, 2015, 211~253쪽.

52) 羅敏球·卞志源, 「프랑스의 중국언어학 교육과 연구:4대 연구소를 중심으로」, 󰡔中國言語硏究󰡕 24, 2007, 575~603쪽; 박 윤하, 「서양선교사의 중국방언연구에 대한 소고」, 󰡔中國言語硏究󰡕 5, 1997, 99~116쪽; 李姸周, 「프랑스의 중국언어학 연구」,

󰡔中國語硏究󰡕 33, 1999, 521~537쪽.

53) 김용현, 「20세기 프랑스 시와 동양:폴 클로델, 빅토르 세갈렌, 생 – 종 페르스, 앙리 미쇼를 중심으로」, 󰡔불어불문학연구󰡕

75, 2008, 79~106쪽; 김웅권, 「A. 말로의 󰡔정복자󰡕에서 중국 사상의 정복:소설의 상징시학을 중심으로」, 󰡔프랑스학연구󰡕

34, 2005, 59~92쪽; 김중현, 「클로델의 중국 취향에 관한 한 연구」, 󰡔프랑스학연구󰡕 46, 2008, 559~584쪽; 김중현, 「‘유럽 의 미개인’이 탐구한 아시아의 지혜들」, 󰡔프랑스학연구󰡕 50, 2009, 59~79쪽.

54) 李玲子, 「中國文學硏究史長篇(十一):프랑스의 中國語文學硏究」, 󰡔中國語文學󰡕 12, 1986, 369~389쪽; Andre Lévy, 「전통 적인 中國小說文學의 硏究에 대한 프랑스의 기여」, 󰡔東亞文化󰡕 22, 1984, 135~147쪽.

55) 김중현, 「볼테르의 ‘철학 콩트’ 속의 중국 이미지」, 󰡔동서문학비교저널󰡕 30, 2014, 73~98쪽; 송태현, 「볼테르와 중국:전례 논쟁에 대한 볼테르의 견해」, 󰡔외국문학연구󰡕 48, 2012, 163~182쪽; 안종수, 「볼테르와 유교(儒敎)」, 󰡔철학논총󰡕 56, 2009, 199~222쪽; Park, Young-Hai, “La Chine de Voltaire a travers L’Orphelin de la Chine en France et en Europe”, 󰡔불어불문학연구󰡕 37, 1998, pp.577~590.

(14)

자료들을 토대로 프랑스 중국학 연구사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이 분야에 관련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

.

그러나 이 연구들은 발표된 지가 오래 되어 최근 프랑스 학계의 동아시아학의 흐름을 읽는 데는 부족 한 감이 없지 않다

.

56)

그렇다면 프랑스어권 중국학에서 한국학계가 가장 관심이 많았던 분야는 무엇일까

?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18

세기 프랑스인들의 유학

(

儒學

)

또는 경학

(

經學

)

에 관한 연구였다

.

57)유교가 동아시아사회에서 지배이데올 로기로서 오랫동안 군림해왔고 특히 전근대사회 한국에서 성리학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

국내 학계의 이와 같은 관심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

하지만 필자의 판단으로는 국내 학계에서 소개되는

18

세기 프랑스 지성계의 유교인식에 관한 연구들이 조금 편향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

당 시 프랑스 지성계는 국내 학계에서 관심이 많은 쿠플레나 볼테르처럼 유교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에 서있던 인사들도 있지만 중국통치의 본질이 공포에 의한 민중협박이라고 본 몽테스키외와 디드로 등의 반중국파들 도 공존했는데

,

그에 대한 국내 연구는 매우 드물었다

.

58)데이비드 문젤로에 따르면 선교사들은 기독교를 중 국사회에 빨리 확산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유교를 선택했고 기독교와 경쟁관계에 있던 불교나 도교를 비판하 거나 멸시했다

.

59)게다가 유교의 교리조차도 중국내 기독교 전파의 유

·

불리에 따른 취사선택이었기 때문에 초기 선교사들의 호의는 어디까지나 가톨릭의 교리에 반하지 않는다는 한계 내에서였지

,

무조건적 호의가 아 니었다

.

예를 들어

, 18

세기 선교사들이 한대유학

(

漢代儒學

)

에는 호의적이었지만 송대 신유학

,

즉 성리학에는 적대적이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이다

.

60) 한편 계몽주의자들은 자국 내 현안을 풀기 위한 정치적 목적

,

반교권주의적 이상

을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서 유교의 몇 가지 교리를 수용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 다

.

61) 근본적으로 그들이 이해하는 유교는

피상적이었고

그나마도 유학의 일부 요소들을 계몽주의운동의

56) 이동윤의 저서는 학계에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출간된 지도 오래되었지만 프랑스 동아시아학의 발달과정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어서 전반적으로 프랑스학계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유용하다. 李東潤, 「프랑스에 있어서의 東洋學의 발달」, 앞의 책, 1980, 200~294쪽; 趙載德, 「프랑스의 “東洋學” 發展에 關한 一考察」, 󰡔仁荷史學󰡕 2, 1994, 145~169쪽. 한편 프랑스어 권에서 20세기 이후의 중국학연구현황을 최근 성과를 소개한 논문으로는 朴尙洙, 「‘漢學’에서 社會科學으로 – 프랑스의 근현 대 중국사학」, 󰡔中國學報󰡕 48, 2003, 395~413쪽 참조.

57) 김경용, 「18세기 프랑스 왕립대학 교수의 유교문명 개설서와 유교의 6고전 번역」, 󰡔한국교육사학󰡕 33, 199~223쪽; 안재원,

「중국의 서학, 유럽의 중국학:쿠플레의 󰡔역경󰡕 이해:겸(謙)괘의 라틴어 번역을 중심으로」, 󰡔인문논총󰡕 67, 2012, 461~510쪽; 안재원, 「쿠플레의 󰡔중국인 철학자 공자󰡕의 「서문」:Natura(性) 개념의 이해 문제를 사례로」, 󰡔인문논총󰡕 68, 2012, 87~120쪽; 안종수, 앞의 논문, 56, 2009, 199~222; 안종수, 「프랑스의 공자 예찬론자들」, 󰡔인간·환경·미래󰡕 3, 2009, 39~66쪽; 吳淳邦, 「淸代初期 예수회신부 조아셍 부베의 索隱派思想과 ≪易經≫ 硏究」, 󰡔中國語文論譯叢刊󰡕 31, 2012, 103~130쪽; 이향만, 「구미의 유교연구 현황:80~90년대 구미의 유교연구 성과 및 현황」, 󰡔儒敎思想硏究󰡕 14, 2000, 275~313쪽; 이향만, 「󰡔중국철학자공자󰡕(

Confucius Sinarum Philosophus

)와 계몽철학」, 󰡔신학과 철학󰡕 17, 2010, 1~46 쪽; 전홍섭, 「근대 유럽 계몽주의에 대한 宋儒 理學의 영향과 그 문화 철학적 의미:프랑스 데카르트 학파의 좌파 베일과 우파 말브랑슈를 중심으로」, 󰡔동양철학연구󰡕 57, 2009, 304~343; 車柱環, 「近代西人의 東洋硏究와 飜譯事業:儒家經典을 中心으로」, 󰡔民族文化󰡕 4, 1978, 30~45쪽.

58) 안성찬, 「크리스티안 볼프의 중국과 헤르더의 중국:18세기 독일에서의 중국관 변화에 대한 소고」, 󰡔인문논총󰡕 68, 2012b, 7~50쪽; 데이비드 문젤로, 앞의 책, 2009, 206~209쪽 참조.

59) 데이비드 문젤로(저), 김성규(역), 󰡔동양과 서양의 위대한 만남:1500~1800󰡕, 휴머니스트, 2009, 169~173쪽 참조. 60) 전홍석은 국내에서 최초로 신유학과 계몽주의사상의 관계에 대해서 심도 있게 논했다(全洪奭, 앞의 글, 2009). 그는 이 논

문에서 17~18세기의 서양 근대계몽주의가 신유학에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는 주겸지(朱謙之)의 주장에 근거해서 논지를 전개하고 있는데, 본문에서 밝혔듯이 필자는 이러한 주장에 회의적인 입장이다.

61) J. J. 클라크(저), 장세룡(역), 󰡔동양은 어떻게 서양을 계몽했는가?󰡕, 우물이 있는 집, 2004. 7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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