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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2000년간의 가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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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2000년간의 가뭄 역사

김현준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수자원 연구실 책임연구원)

1.서

‘-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는 지역적으로 장마와 태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연강수량의 70% 가까이가 6월 부터 9월까지의 홍수기에 집중되어 있다 이 기간 중에 강수량이 적으면 홍수 피해는 없으나, 당해 년은 물론이 고 이듬해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어 가뭄의 고통을 겪게 된다, 비가 많이 와도 걱정이지만 적게 오는 경우가 사실

은 더 걱정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대홍수가 인류의 생활

에 큰 영향을 끼친 경우도 많지만 가뭄만큼은 못하였다 홍수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 연적으로 치유되거나 적극적인 복구 및 홍수 방어를 위한 사업들이 시행되어 적응력을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가 뭄은 차원이 달랐다. 한 두 해의 기뭄이야 처장된 곡식과

인근 지역과의 교역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장기간에 걸

친 가뭄은 문명 자체를 송두리째 사라지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현대에 이르러서야

형댐이 건설되

고 유역간의 물이동을 통하여 어느 정도 가뭄에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강수량의 절대 부족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지난 2002년, 2003년 한반도는 사싱초유의 태풍피해를 경험하였다.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해를 거듭하여 피해

를 입혔다. 당시 피해액은 각각

5조원과 4조원을

넘었었

고 복구비용으로는 그 이상의 재원이 필요하였다. 피해금

제2권 XI/1호 2009던 3월

액으로만 보면 역대 1, 2위를 나란히 자리 메김 하였다 2004년 12월에 아르헨티나에서 개최된 유엔기후변화협 약 총회에서 기상전문가들은 기상이변이 환경파괴에 따른 재앙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근대 이전에도 홍수로 인한 농경지의 파괴와 이에 따른 경작지의 부족으로 기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더군다나 큰 비가 있은 다음에는 어김없이 가뭄이 찾아와 더욱더 피해를 가중시키기도 하였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중남미의 마야문명이 스페인 침략 훨씬 이전부터 오래 동안 지속된 가뭄 때문에

사회 기반 자체가 와해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1

)

고고학자 브라이언 페이건은 A.D. 300년부터 1850년까 지의 세계적인 기상이변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는 소빙 하기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으로, 기후변화는 갑자 기 발생한다는 것과 기후는 인간의 역사에 관여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인간이 기후에 강해졌다고 할 수 없으 며, 다만 적응할 수밖에 없는데 이 적응에는 비싼 대가 를

치러야 힌다고 하였다 2)

과거의 기상이변이나 자연재해를 이해하는 것은 미래 를 준비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역사기록에서 도 그러한 사실들을 살펴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는 다양한 역사기록과 함께, 자연재해에 대한 내용도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다. 특히, 홍수, 가뭄, 지진, 해일,

폭설, 황사 등 특이한 자연현상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때로는 피해 지역과 규모 및 복구 대책

등에 대한 지원, 사전에 준비해야 할

용 등도 수록하

고 있다 조선시대의 자연재해 기록을 파악함으로써 다 가올 재해에 대한 간접 정보로 활용하는 것도 의의가 있을것이다

l)Collapse, how societies choose 10 fail or sllcceed, Jared Diamond,2005 2)The little ice age • How Climale made histOly, Brian M. Fagan, 2002

7

(2)

김현 준

11.

역사기록의 가뭄

1. 고려시대 이전의 가뭄

우리의 역사기록에서 과거의 가뭄 흔적을 찾아볼 수 있 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둥과 같은 수많은 기 록 문서로부터 과거에 발생하였던 가뭄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와 고구려, 백제, 통일신라에서 발생한 가뭄기록을 수록하고 있다- 신라의 경우, 한해(북 害)가 27회 , 기근(戰鍾)이 17회 발생 하였다. 고구려는 한 해가 9회, 기근은 7회 발생하였으며, 백제는 한해가 22회,

기근이 15회 발생하였다. 통일신라의 경우는 한해 21회 및 기근이 17회 발생하였다. 가뭄이 심한 경우에는 백성 들이 서로 잡아먹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백제의 무령왕 6

년 (506년)에 발생한 것으로, “봄에 병이 돌고 3월부터 5월 에 이르기까지 비가 오지 않아 천택(川 i뽕)이 모두 마르고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왕은 창곡을 풀어 이를 구제하였다 고 하였다 고려사에는 한재(早~)로 표현된 가뭄재해가 총 47회 조사되었는데, 공민왕 9년 4월 경상도와 전라도 에 있었던 기근이 가장 피해가 심하였다 이때 기근으로 죽은 사람은 전 인구의 반이나 되었으며 죽어서 길에 버 려진 수는 이루 헤아랄 수 없이 많았다고 하였다.

2. 조선시때의 가뭄

조선시대에는 인구의 20%가 가뭄으로 사망하고 전 국 토는 물론 전 국민이 가뭄의 영향을 받았었던 것을 실록 에서 찾아볼 수 있다. 효종( 1649-1659), 현종(1659-1674), 숙 종(1674-1720) 초년은 조선왕조는 물론이고 아마도 한국 역사상 가장 심한 기근을 겪었던 시기였다. 특히, 1671년 의 가뭄에는 백만 명이 기아로 죽었다고 사간원의 윤경교 가 장문의 상소문에서 구체적인 사망자 수를 제시하였다.

당시의 인구가 516만명 정도이니 전인구의 20% 가까이가

기근으로 죽은 것이다 3) 당시 전라도의 참상을 보고한 전

라감사의 장계를보자.

“민간에 밥짓는 연기가 끊어진 참상이 봄보다 훨씬 더 합니다. 쓰러진 주검이 길에 즐비하고 낯빛이 누렇게 뜬 백성이 수없이 떼를 지어 문을 메우고 거리를 메워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있으며 맨발에다 얼굴을 가리고 살려 달 라고 애걸하는 사족(土族)의 부녀가 날마다 관아 뜰에 가 득합니다 곡물이 떨어지고 나면 이어서 소금과 간장을 주었고 소금과 간장이 떨어지고 나면 또 해초류를 주는 3)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김덕진, 2008

8

퉁 관아에 저축된 것으로서 입에 풀칠할 만한 것이면 모 두 긁어 썼지만 마침내 속수무책인 채 죽는 것만 보고 말 게 되었습니다. 역로(輝路)가 모두 비어서 장차 명령을 전 달하지 못하게 되었고 관속(官關)이 흩어져서 거의 모양 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죽은 자는 다 떠돌며 빌어먹는 자들이었는데, 근일 길에 쓰러진 주검은 모두 본토박이 양민입니다. 그러므로 각 아문에서 진흉에 쓰고

남은 곡물과 세 산성(山城)의 군향(軍뼈) 관적(官

햄)으로 서 창고에 약간 남은 것을 털어서 나누어 주변 만분의 일 이라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니, 조정에서 급히 허가해 주 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전세로 받은 콩과 쌀 또한 l백여 석을 남겨 둔 고을도 있을 것이니, 굶주린 백성 가운데에 서 가장 심하고 의지할 데 없어서 결코 도로 받아들일 수 가 없고 입을 별리고 먹여 주기를 바라는 무리에게 이것

으로 죽을 만들어 먹 이게 하였으면 합니다꺼)

얼마나 가뭄이 심하였으면 전쟁을 대비하여 산성에 비 축하였던 물자를 사용하고자 하였을까? 6월 14일의 기록 에는 서울 역시 가뭄의 손길을 벗어 날 수 없었음을 적고 있다 서울의 물가가 치솟고 가뭄은 신분 고하를 묻지않 고 모두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현종 의 재위기간에는 유달리 자연재해가 많이 발생하였다. 가 뭄과 홍수 둥이 없는 해가 없을 정도로 피해가 자주 발생 하였다 5),6)

서울의 기근이 심하여 은 8냥으로 겨우 한 섭의 쌀을 바꾸었다고 한다. 사대부의 집에서 앞다투어 비단 옷가지를 가지고 저자에 가서 팔려고 해도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았고 여느 해에는 서너 냥 정도의 값이 나가는 완구품으로 두어 되의 쌀을 바꾸려 하여도 되지 않았으므로 모두들 어쩔 줄을 모르고 얼마 안 가서 죽기만 기다릴 뿐이었다. 저자 에서 파는 쌀은 많아야 여남은 말에 지나지 않았고 적으 면 몇 말의 쌀뿐이었다. 사대부로서 벼슬이 낮아 봉록이

박한 자는

태반이나

굶주혔고 각사(各

司)의

원역

(員投)들 도 거의 다 굶어서 낯빛이 누렇게 떠서 장차 임무를 수행

하지 못하게

되었다 7)

~

태조부터 순종(1 392-

191이까지 가뭄

기록은 「기뭉J

3,173건,

「한발(북뺑)J 93건한해

(早害)J 63

건기

아(힘 L戰)J 118 건r.;흉년(~年)J 5 ,948건, 더한재(早~)J 1,766건 r 기근(購 않)J 1,657건 둥 총 12,800 여건의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세종, 성종, 중종, 효종, 현종, 영조, 정조의 재위시기에 가

뭄 기록이 많이 있으며, 조선후기인 순조, 헌종, 철종

시 4)현종실록 19권, 12년(1 671, 신해, 6월 15일(갑오)

5)조선시대 홍수기록조사, 김현준, 1999 6)조선시대 가뭄기록조사, 김현준, 20이

7)현종실록 19권, 12년 (1671, 신해, 6월 14일(계사)

흔/국재난관2/.표준학희지

(3)

한반도 2000년간의 가뭄 역사

기에는 비교적 기록 수가 그 이전에 못 미친다. 해를 거듭 하여, 연간 가뭄 기록 건수가 10회 이상인 기록들도 보이 는데, 태종(14~16년), 세종(17-18년, 21-22년, 25-27년), 성 종(5~6년, 12~13년, 16~18년, 21~22년, 24~25년), 중종(4~5 년, 9~12년, 20~24년, 27~28년, 3~37년), 명종 (8~10년,

14~15년), 선조(36~37년), 광해군(6~7년), 인조(l 8~19년),

효종(7~8년), 현종(1~2년), 숙종(3~년), 영조(47~49년), 정 조(5~6년, 22~23 년), 고종 (13년) 퉁이다.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을 보면, 490년 동안 총 100회의 가뭄이 발생한 것으 로 조사되었는데, 평균적으로 5년에 한번 꼴로 가뭄이 발 생하였음을 알 수 있고, 2년 연속 가뭄은 15회, 3년 연속 가뭄 4회, 4년 연속 가뭄 1 회, 6년 연속 가뭄 2회 동 해를 거듭하여 가뭄이 발생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효종 8년(1 657)부터 현종3 년 (1662)까지, 현종7년(1 666)부터 현

12년(1 671)까지는 6년 동안이나 연속하여 가뭄이 지속

되었음을기록하고있다-

3. 조선시대의 가뭄때잭

조선 지배층의 가뭄에 대한 시각은 사람의 도리를 다 못하였을 경우나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 에 발생한다는 성리학적 유교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가뭄이 발생했을 때 임금은 임금대로, 관리들은 관리대로 자기의 소임을 다 했는지, 사치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고,

원한이 맺힌 사람들이 있나 살펴보았으며, 기우제를 지냄 35.0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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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잉 며 꺼이빠-n k 하{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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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써 하늘의 노여움을 풀고자 하였다 그러나 가뭄을 이처럼 소극적으로만 대처한 것은 아니었다. 가뭄을 극복 하기 위하여 수리사업(水利事業)을 일으켰으며, 평상시에 도 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지방의 수령들을 감찰하였 다. 또한,

전국적으로 농서(農書)와 농정

(뽑政)에 대한 신 기술과 정책을 수렴하고자 하였으며, 중국과 일본에서 농

사에

이용하고

있는 수차(水車)를 도입하려는 노력도

기 울였다 제언(提樞, 저수지)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하고 농한기에 제언의 수축과 보강을 권장하였으며, 고려시대 에는 물관리를 위하여 공관(工官)의 하부조직으로 수조

(水費)를 두었고, 조선시대에는

시기별로

산택사(山澤

司),

제언제조(提樞提調), 제언사(提塊司), 준천사(溶川司) 등을 두어 물관리와 하천관리를 하였다

11 1.맺음말

우리의 역사문헌기록에는 자연재해에 대한 기록이 풍 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r조선왕조실록」 에는 조선 시대 전 기간에 대한 가뭄 기록들이 실려 있어서 과거에 발생

한 가뭄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 고 있다 조선 시대에도 해를 거듭한 가뭄이 있었으며 심 지어는 가뭄이 6년이나 계속된 적도 있었읍을 확인할 수

있다. 가뭄이 발생한 날짜와 피해 지역, 피해 정도, 구홀 대책 등이 실려 있으며, 하천이 말라버린 내용도 기록되 어 있다.

K~ KjO KjO KjO KjO 써o KjO :;(J 써o KjO 써 ~ K~ KjO KjO 써o K~ K~ Kjo 써O 때 써0

uf i(O 눔 중 다j 갖o l)J KIO oJ l'iO τJ 터o oJ ~<\f RO l'iOKO<fJ :jOJ~ 뎌 <fJ 그림 1 조선시대 왕대별 재우I 1 년 동안의 가뭄 기록

제2권 제 1호 2009던 3윌 9

(4)

김 현 준

선조들은 가뭄이 음양의 조화가 깨져서 발생한다고 생 각하고, 하늘의 뜻을 거역한 것이 무엇이었나 하는 자기 성찰과 반성을 하였으며,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기우 제를 통하여 음양이 조화롭게 되기를 기원하였다. 이러한 정신적 대웅 외에도 농사가 끝난 가을에는 제언을 보수하 고 새로 수축하기도 하였으며, 하천에 보(狀)를 막음으로 써 다음 해의 농사에 필요한 물을 확보하였습니다. 또 수 차와 농기구 동을 개발하고 농서를 편찬하는 동 구체적인 대책을세워 전국적인 강우관측체계를구축하였다.

자연 재해는 과거에도 있어 왔고, 현재도 있으며, 앞으

10

로도 발생할 것이다. 선조들이 물려주신 역사 기록에서 과거에 발생하였던 가뭄, 홍수, 태풍 동 자연재해에 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유산이다 이러한 기록들이 현재와 미래의 자연재해를 이 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충분히 활용되어야 한다.

본 고는 水자원(국토해양부 한강홍수통제소, 2009.12009

가뭄심포지엄(수자원의지속적확보기술개발사업단, 2009.3) 에 발표된 글을 정리한 것임을 밝협니다

흔}국재난관2/.표준학희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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