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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영화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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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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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이미지를 통한 사유

이 지 영*

1)

Ⅰ. 들어가면서

Ⅱ. 탈중심화, 비인간화

Ⅲ. 탈영토화

Ⅳ. 시간과 생

Ⅴ. 맺으면서

“영화 그 자체의 본질이란, 더 고양된 목표로서 오로지 사유와 그 작용 이외의 어떤 것도 갖지 않는다.”

(IT 219/332-333)

Ⅰ. 들어가면서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영화에 대한 두 권의 저서 시네마

* 서울대학교 철학과 강사

이 논문은 한국미학예술학회 2017년 여름 정기학술대회 기획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원고 를 수정보완하여 게재한 것임.

* DOI http://dx.doi.org/10.17527/JASA.52.0.04

(2)

Cinéma 1. L'Image-Mouvement, Cinéma 2. L'Image-temps를 펼치면 독자들 은 운동과 시간 등의 개념들, 베르그손(Henri-Louis Bergson, 1859-1941)과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와 같은 철학자들의 사상, 고전이라 불 리우는 영화사의 수많은 영화들과 유럽 예술 영화들, 그리고 영화 이론들이 복잡 하게 직조되어 있는 다양체를 만나게 된다. 이 난해한 다양체인 시네마는 영화 와 철학의 다층적인 만남들을 통해 창조적인 논의들을 생산해 오고 있지만, 그러 한 창조성이 충분히 이해되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들뢰즈의 시네마에 관해 발 표된 대부분의 논문들 역시 시네마에서 제시된 개념들의 의미와 적용 사례들을 설명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1) 물론 이러한 접근 역시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 러한 개념들을 통해 들뢰즈가 무엇을 하고자 했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지적하고 있지 않다. 또한 시네마에서 제시된 개념들의 내적 논리에만 관심을 가질 경우 들뢰즈 철학 전반과의 관련성 역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시네마를 존재론적 이고 미학적인 접근으로만 한정하게 되는 결론으로 나아가기 쉽다. 그렇게 되면 들뢰즈의 영화 철학은 사변적인 영화 존재론, 아트 하우스 영화만을 위한 난해한 미학적 이론 등으로만 한정하게 된다. 이러한 한정은 시네마가 초기 영화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영화들과 철학적 논의들의 난해한 다양 체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고, 아직은 국내의 연구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사실 때 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자 본 논문에서는 들 뢰즈의 영화 철학에 대해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들뢰즈는 시 네마에서 수많은 영화와 철학적 논의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기본 적이지만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답변을 시도함으로써 들뢰즈의 영 화 철학적 사유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제시하고자 한다.

들뢰즈는 시네마 1권에서 베르그손 철학을 바탕으로 한 영화 이미지 존재

1) 국내에서 발표된 다음의 연구들의 경우 대표적으로 그러한 사례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이 각 연구들의 성취를 무화시키거나 폄훼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둔다. 진기행(2008, 2011), 김형래(2015), 유윤영(2013), 조성훈(2012) 등을 대 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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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이미지 분류학을 제시하고 있으며, 2권에서도 역시 베르 그손의 시간 철학을 중심으로 다양한 영화 이미지들을 분류하고 있다. 하지만  시네마 2: 시간-이미지에서는 베르그손적 시간-이미지의 다양한 분류를 보다 일 반적 원칙으로서의 니체적 시간 하에 두면서 시간-이미지 영화의 공통적 특성들 을 제시한다.2)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로 구분된 두 권의 저작은 한편으로는 베르그손 철학에서의 지각에서 기억으로의 이행, 혹은 베르그손 철학에서 니체 철학으로의 이행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전 영화에서 현대 영화로의 이행과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중첩된다. 이러한 다중적 중첩을 통해 들뢰즈는 — 예술에 대한 자신의 다른 저작들이나 연구들과 달리— 개별 영화가 아닌 영화 매 체 자체에 대한 존재론적 시스템 구축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결 코 닫혀 있지 않다. 시스템 자체가 내포하는 다중적인 중첩들은 생성이 이루어지 는 간격들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열려 있으며, 들뢰즈 자신의 다른 저작들에서 창안된 개념들을 소환하거나 참조하는 방식으로 열려 있다. 따라서 시네마의 이해에 접근하는 통로는 하나의 방식으로만 주어지지는 않는다. 다양한 접근 가 능성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들 중 본 논문에서 채택하는 방식은 일단  철학이란 무엇인가 Qu'est-ce que la philosophie와 천개의 고원 Mille plateaux에서 제시된 개념들과의 관련성 하에서 시네마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의 마지막 저작인 철학이란 무엇인가에는 예술과 철학의 관계, 예술의 목표 등이 상당히 예외적인 방식으로 정식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한 이 저작들은 시네마의 다중적 중첩이 만들어 내는 사유의 생성적 균열 지점 들을 더 잘 볼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들뢰즈에게 철학이란 개념들을 창조하는 방식으로 사유하기를 창조한다.

“구성 요소들의 수에 의해 정의되는 불규칙한 윤곽을 갖는”3) 다양체로서의 개념

2) 시네마에서 베르그손과 니체의 관계는 전체 구조와 시간-이미지의 의미를 이해하는 문제에서 중요한 논의이지만, 본 논문의 주요 논지에서 벗어나므로 더 이상의 논의는 생략한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졸고, 「들뢰즈의 <시네마 2>의 구조에 대한 연구: 거 짓의 역량을 중심으로」, 철학사상 51권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14)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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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서로의 역사는 다를지라도 주어진 문제에 해를 제시하기 위해 서로 연결되 고 재분할되면서 각자의 윤곽들을 함께 조절하는 방식으로 동일한 하나의 철학에 속하게 된다. 개념들이 동일한 평면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은, 커다란 맥락에서 설 정된 동일한 문제에 해를 제시하기 위해 개념들이 공동으로 창조된다는 것이다 (co-création).4) 이러한 맥락에서 시네마에 등장하는 수많은 개념들이 어떠한 문제에 대한 해를 해결하기 위해 공동-창조의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다른 저작들과의 교차 지점에서 시네마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다음의 개념들의 관계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탈중심화, 비인간화, 탈영토화, 시간과 생(vie). 시네마에서 이루어지는 영화 철학적 논의에서 이러 한 개념들이 어떠한 공동-창조로서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은 들뢰 즈의 영화 철학에 대한 충실한 이해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줄 방향 지시등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Ⅱ. 탈중심화(décentralisation), 비인간화(déshumanisation)

시네마 전체 논의의 출발점이자 대전제에 해당되는 운동-이미지 개념은 단순히 영화의 움직이는 이미지(moving image)를 지칭하기 위한 개념에 그치지 않는다. 들뢰즈가 시네마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베르그손의 이미지 개념은 이미 지에 대한 통념적인 이해와 상당히 다르다. 일반적으로 이미지는 ‘무언가에 대한 이미지’, 즉 어떤 대상에 대한 주체의 느낌, 인상, 표상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진 다. 하지만 베르그손은 서양 철학사의 실재론과 관념론의 이원론적 대립의 문제 를 해소하기 위하여, 물질과 기억 Matiere et Memoire에서 이미지를 사물과

3) Deleuze, G. & Guattari, F., Qu'est-ce que la philosophie? (Les Éditions de Minuit, 1991);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정임, 윤정임 옮김 (현대미 학사, 1995), p. 21, p. 27 (이하 QP로 약칭).

4) QP, pp. 21-28, pp. 27-3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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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중간에 있는 것, 객관성과 주관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제시한다.

이미지란 “내가 나의 감관들을 열면 지각되고, 내가 그것들을 닫으면 지각되지 않 는”5) 것으로서, “그 자체로 우리가 지각하는 대로 그림같이 펼쳐져 있는”6) 것이 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지각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한다. 지 각의 주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감관을 열어 지각을 하거나 아니거나 일 뿐이 다. 이렇듯 객관성과 주관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존재로서의 “이미지들의 총체가 물질”7)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베르그손의 이미지 개념을 받아들여 “이미지란 가 정된 실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실재”8)임을 강조한다. 그 자체로 실재인 이미지는 즉자적인 수준에서 작용과 반작용의 운동이라는 존재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들뢰즈는 베르그손의 이미지 개념보다 운동의 차원 을 보다 강조한 운동-이미지 개념을 제시한다.

심지어는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에 작용한다거나 반작용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실행되고 있는 운동과 구분되는 물체도, 받아들여진 운동과 구 분되는 움직여지는 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이미지는 작용 및 반작용 과 구분되지 않는다. 이것은 보편적 변이(universelle variation)이다. […] 물 질의 운동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미지이고 운동 안에서 우리가 보는 것과 는 다른 것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 이것이 참이다.9)

들뢰즈는 이미지=운동=물질로 이해되는 운동-이미지들의 총체인 물질적 우 주, 혹은 운동-이미지의 내재성의 평면을 인간의 지각과 영화적 지각 이전에 전 5) Henri Bergson, Matière et Mémoire (puf, 1896), p. 11/p. 37 (편의상 이하에서 MM 으로 표기한다. 물질과 기억, 박종원 옮김 [아카넷, 2005]의 쪽수도 함께 병기한다).

6) MM, p. 2/p. 23.

7) MM, p. 11/p. 37.

8) Gilles Deleuze, Deux règimes de foux (Les Éditions de Minuit, 2003), p. 199.

9) Gilles Deleuze, L' image-Movement (Les Éditions de Minuit, 1983); 시네마 1: 운 동-이미지, 유진상 옮김 (시각과 언어, 2002), 불어본과 한글본의 쪽수를 병기한다, p.

86/pp. 11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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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된 실재(réalité)로 제시한다. 영화적 지각의 선택 작용에 의해 부분적으로만 지 각되는 이 실재는 우리에게 사유의 대상으로 주어진다. 여기에서 들뢰즈가 제안 하는 영화 이미지 존재론의 흥미로운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영화 이미 지는 단순히 재현된 허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유해야 할 실재의 부분 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본질을 사유에서 찾고 있는 들뢰즈에게 영화 이 미지의 실재성이라는 주장은 영화란 매우 적합한 사유의 대상이며, 영화 이미지 들의 분류학을 통해 사유를 전개하는 들뢰즈의 영화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정당 성을 가지게 된다. 둘째, 지각 이전의 운동-이미지의 내재성의 평면(전체)은 영화 적 지각(부분)보다 더 많은 실재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영화 이미지가 그 무한한 운동-이미지의 평면을 더 많이 혹은 더 가까이에서 포착할 때 실재에 대해 더 잘 사유하게 할 수 있다.

이 논점 역시 흥미로운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먼저, 인간의 지각과 영화 의 지각을 비교할 경우 카메라의 객관적 특성 때문에 영화의 지각이 인간의 지각 보다 운동-이미지의 내재성의 평면을 더 많이 포착할 수 있다. 흔히들 영화가 인 간의 시선을 닮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들뢰즈는 인간의 지 각의 주관적 성격을 지적하면서 카메라의 지각이 우월함을 강조한다. 소비에트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의 ‘키노-아이(kino-eye)’ 개념과 발터 벤야민의 카메라가 드러내 주는 ‘시각적 무의식’과 유사한 논의를 통해 들뢰즈는 영화적 지각이 인간 의 지각이 포착하지 못하는 것들을 포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간의 지 각은 인간의 몸에 정박되어 있어서 운동 그 자체를 포착할 수 없으므로, 영화가 탈중심적 운동-이미지들의 내재성의 평면에 보다 더 근접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논점은 지각-이미지를 단계적으로 고체적 지각–액체적 지각–기체적 지 각으로 분류하면서, 기체적 지각을 보여주는 베르토프의 영화가 운동-이미지의 내재성의 평면을 영화적으로 구현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지점에서도 또다시 확인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지각에 비해 영화적 지각이, 고체적 지각-이미지 보다 기체적 지각-이미지가 운동-이미지의 내재성의 평면에 더 근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근접(approximation)의 방향성은 이미지의 탈중심화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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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성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영화 이미지의 탈중심화는 실재에 더 근접하려는 방 향성과 일치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영화 철학에서 탈중심화란 결국 실재에로의 근접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탈중심화의 방향성은 프레이밍과 지각-이미지에 대한 부분에서만이 아니라 시네마에서 이루어지는 논의들 모두 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는 시네마가 전제하고 있는 중요한 하나의 사유의 방향성을 드러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탈중심화의 방향성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전개되어 있는 들뢰즈의 예술에 대한 논의에서 그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저작에서 들 뢰즈는 철학과 예술 그리고 과학의 관계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이 세 분야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카오스를 재단하는 평면들에 따라 세워진다.10) 그는 “예술, 과학, 철학은 사유 혹은 창조의 형식들로서의 카오이드들(Chaoïdes)”11)이고, 각각 의 카오이드란 “카오스를 절단하는 평면들 위에서 생산된 실재들”12)이라고 말한 다. 다시 말하자면, 예술을 비롯한 각 영역들은 카오스라는 무한에 대한 접근 방 식이라 할 수 있고, 각각의 카오이드들은 각 영역에 특유한 방식으로 생산된 실 재이므로 예술이나 철학이 생산하는 하나의 방식만으로는 무한을 파악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사실 들뢰즈에게 무한으로서의 카오스는 철학, 예술, 과학에 의한 카오이드의 절단 이전에 존재론적인 전제 조건으로서 주어진다. 달리 말해, 무한 인 카오스는 각 분과 영역들의 존재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카오스는 철학과 과학, 예술을 가능하게 해 주는 존재론적 원천일 뿐만 아니라, 예술과 철 학이 끊임없이 지향해야 하는 목표 내지는 지향점으로 설정되어 있다.13) 이런 맥

10) 카오스(Chaos)란 고대의 우주 발생론적 의미에서 질서의 결여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 되는 개념으로서 근대적 의미의 엔트로피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 카오스는 자신의 고유한 방향적 구성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결정론적 카오스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카오스는 질서와 대립되고 미분화되지 않고 생각 불가능한 흐릿함이 아니라, 질서가 자발적으로 발현하는 발생 매개체이다 (펠릭스 가타리, 카오스모제 [동문선, 2003], p. 105 참조).

11) QP, p. 196/p. 300.

12) QP, p. 196/p.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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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에서 들뢰즈는 예술의 특성(propre)이란 “무한을 되찾고 복원하기 위해 유한을 거쳐가는 것 (passer par le fini pour retrouver, redonner l'infini.)”14)이라고 주장 하는 것이다. 무한으로의 지향성은 달리 말하면 유한 중에서도 가장 협소한 인간 이라는 중심으로부터의 탈중심화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탈중심화는 그저 중심 을 벗어난다는 의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화 이미지의 존재론적 전제 조건이 라 할 수 있는 운동-이미지의 내재성의 평면, 그리고 그것의 존재론적 전제인 무 한으로서의 카오스 쪽으로의 사유의 방향성, 즉 영화 이미지의 존재론적인 기반 을 근본적으로 사유하라는 의미를 강력하게 함축하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 탈중심화는 앞서 영화에서 지각-이미지 분류와 예술의 독립성과 자율성 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협소하고 고정적인 중심을 벗어나는 ‘비인 간화’라는 특성을 동반한다. 비인간화는 인간의 지각과 감각을 중심에 두는 유기 적인 재현 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연결된다.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1940- ) 역시 들뢰즈 예술론의 비인간적 성격을 시학의 몰락과 연결하여 지적한 바 있다.

랑시에르는 시학을 미메시스와 유사성의 원칙에 의해 지배되는 재현의 우주 안에

13) 들뢰즈는 예술이란 구성의 평면 위에 세워지는 감각의 구성물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때 감각의 구성물은 지각(Percept)과 정감(Affect)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이때 지각 과 정감은 인간의 주관적 감정작용(affection)이나 지각작용(perception)과는 달리, “인 간의 부재 안에 존재” (QP, p. 155/p. 234)하는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QP, p. 158/p.

241) 존재들이므로 “예술 작품은 즉자적으로 존재(elle existe en soi)” (p. 155/p. 234) 한다. 들뢰즈는 이에 대한 논의에서 예술 작품은 감상자뿐만 아니라 창작자인 예술가 에게서도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통념상 인간의 창조물 중 가 장 인간적인 활동의 산물로 보이는 예술 작품에 대한 들뢰즈의 이러한 입장은 예술이 무한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지점이다.

즉 예술 작품의 자율성과 독립성에 대한 논의에는 그 기저에 인간의 좁은 한계에서 벗어나 무한인 카오스로 다가가야만 하는 예술의 지향성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졸고, 「들뢰즈의 영화론의 철학적 위상에 대한 연 구」, 시대와 철학 제19권 1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08)과 「들뢰즈의 예술철학에서 윤리적 가능성에 대한 연구」, 시대와 철학 제26권 3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5), pp. 92-96을 참고하라.

14) QP, p. 186/p.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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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작품들을 지배하는 진리의 양태로 정의하면서, 여기에서는 작품이 아니라 작 품을 감각하는 사람이 중심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랑시에르가 들뢰즈의 미학 을 유기성 비판과 재현의 거부로 특징짓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시 들뢰즈 미학 의 핵심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5)

들뢰즈는 영화에서 유기적 재현 시스템을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으로 ‘감 각-운동 도식(schème sensori-motrice)’을 제시하고 있다. 이 도식은 인간의 지각 이 어떻게 행위에로 정향되어 있는지를, 따라서 지각이란 행위에의 유용성과 관 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변적인 정신 활동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 해 베르그손이 물질과 기억에서 제시했던 것이다. 들뢰즈는 이 도식을 바탕으 로 운동-이미지의 영화들을 지각-이미지, 정감-이미지, 충동-이미지 등으로 분류 한다. 들뢰즈의 영화 철학 체계에서 베르그손의 감각-운동 도식은 변형을 거치며 수용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지각의 중심이 인간에서 영화 카메라로 이동하게 되면서 인간의 지각에 비해 영화 이미지는 훨씬 더 탈중심화되어 있다. 이와 더 불어 인간의 경우 분리될 수 없었던 지각과 행위, 정감 등이 영화에서는 보다 더 분리된 방식으로 분류가 가능해진다. 물론 단 한 종류의 이미지만으로 이루어진 영화는 존재하지 않지만, 영화의 경우 지각-이미지나 정감-이미지가 지배적으로 등장하는 영화들이 가능하다. 따라서 베르그손의 철학 체계 내에서 지각-정감-행 위가 맺는 관계와 달리 들뢰즈의 영화 철학에서 지각-이미지, 정감-이미지, 행위- 이미지가 맺는 관계는 비유기적이고 탈중심화되어 있다. 따라서 시네마 1: 운동- 이미지에 제시되어 있는 이미지들은 감각-운동 도식에 따라 분류된 것이지, 감 각-운동 도식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감각-운동적 이미 지의 연쇄에 기반하는 행위-이미지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들뢰즈 가 지각-이미지, 정감-이미지의 예로 들고 있는 영화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체 적 지각-이미지의 사례로 들고 있는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 1896-1954)의

15) Jacques Rancière, “Existe-t-il une esthétique deleuzienne?”, in: Gilles Deleuze:

Une Vie Philosophique, dir. Par Eric Alliez (Les Empêcheurs de Penser en Rond, 1998), pp. 532-53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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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들, 정감-이미지의 사례로 제시하는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 1901-1999)이나 칼 드레이어(Karl Dreyer, 1889-1968) 영화들의 경우 이미지들은 감각-운동 도식적 연쇄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시네마 두 권의 저작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시간-이미지의 영화에서 비판의 준거점으로 등장하는 감각-운동 도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감각-운동 도식은 영화의 이미지와 사운드 그리고 서사를 결합하는 유기적인 재현 체계이다. 인간의 지각-행위 모델의 유기적인 중심성과 유사한 방 식으로 영화의 요소들을 재현하는 시스템으로써 행위-이미지의 영화는 인과관계 라는 유기적 재현의 원리에 따른 이미지들의 구성을 통해 그 유기적이고 중심적 인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시네마에서, 긍정적이건 혹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건, 이미지들의 분류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등장하는 감각-운동 도식은 행위 -이미지 영화의 내부에서 파열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 것으로 드러난다. 감 각-운동 도식의 붕괴에서 출현하는 시간-이미지의 영화들은 운동-이미지의 영화 보다 진보된 혹은 우월한 것처럼 보인다.16) 이러한 이미지의 전개 과정은 점차 인간 중심성(antropocentrism)을 벗어나는 탈중심화이자 비인간화의 경향성을 보 여준다. 그리하여 들뢰즈의 영화 철학에서 영화적 사유는 탈중심화와 비인간화 경향성을 통해 영화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 무한으로서의 실재에 대한 새롭고 다 양한 사유의 창조를 지향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16)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표현임을 밝히고 싶다. 들뢰즈는 서문에서부터 자신의 철학적 작업이 이미지 분류학임을 강조한다. 운동–이미지에서 시간-이미지로의 이행 이 발전의 과정이 아님을, 또한 어떤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보다 더 우월하거나 열등 한 것은 아니라고 종종 강조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사를 가로지르는 그 의 영화 철학적 사유는 들뢰즈 자신의 언명과 이론적 긴장을 만들어 내는 주장들 역 시 제시하기도 한다. 즉 시간-이미지의 영화와 운동-이미지의 영화가 그저 다른 영화 가 아니라 영화의 역사적 (혹은 철학적) 전개 과정에서 어떤 영화적-철학적 진화의 선상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게끔 만들기도 한다. 이 두 모순적인 입장은 시네마에서 이론적 긴장을 형성하고 있다. 흥미로운 주제이기는 하지만 본 논문의 논지에서 벗어 나므로 자세히 다루지 않음을 밝혀둔다.

(11)

Ⅲ. 탈영토화(déterritorialisation)

탈중심화와 비인간화는 시네마에서 탈영토화의 방향성과 맞닿아 있다. 들 뢰즈가 천개의 고원의 결론 부분에서 정의하는 것처럼, 탈영토화란 “누군가 영 토를 떠나는 운동이다. 그것은 도주선의 작동이다.”17) 여기에서 “영토란 개념적, 언어학적, 사회적, 혹은 정서적인 시스템 등 어떠한 종류의 시스템일 수 있다. 대 조적으로 재영토화는 탈영토화된 요소들이 재결합하고 새로운 배치나 낡은 배치 의 변형의 구성체에서의 새로운 관계들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들을 지칭한다. 어 떠한 종류의 체계이건 체계는 언제나 “탈영토화의 벡터들”을 포함한다.”18) 탈영토 화가 언제나 그에 “상관관계에 있는 재영토화들과 분리될 수 없”19)지만, 탈영토화 는 부정적일 수도 긍정적일 수도 있다. 탈영토화된 요소들이 그것의 탈주선을 방 해하거나 제한하는 재영토화에 종속될 때, 탈영토화는 부정적이다. 하지만 탈주선 이 재영토화의 형식들보다 우세하면서, 탈주선의 경로를 확장하거나 혹은 재영토 화를 완전히 새로운 배치로 이끌어가는 방식으로 다른 탈영토화된 요소들과 연결 될 때, 탈영토화는 긍정적이다. 들뢰즈는 이에 더해 각각의 과정의 절대적이고 상 대적인 형식들도 구분한다. 절대적인 탈영토화는 생성과 순수한 사건들의 잠재적 인 영역과 관계하고, 상대적인 탈영토화는 체화된 역사적 사건들과 과정들의 현 실태적 영역 안의 운동들에만 관련된다.20)

탈영토화 운동은 언제나 재영토화와의 관계 속에서 긍정적/부정적으로 구분 되며, 관계되는 영역이 잠재적/현실태적인가에 따라 절대적/상대적 탈영토화 운동

17) Deleuze, G & Guattari, F.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ii , trans. Brian Massumi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7); 질 들뢰 즈, 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쪽수는 병기, p. 508/p.

967 (이하 ATP로 약칭).

18) Paul Patton, “Deleuze's Political Philosophy”,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Deleuz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p. 208.

19) ATP, p. 509/p. 968.

20) Paul Patton, “Deleuze's Political Philosophy”, pp. 208-20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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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탈영토화 개념은 “특정한 사건이나 과정의 성격을 판단하 는 기술적 언어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규범적(normative)”이라고 할 수 있다.21) 들뢰즈의 규범성은 앞서 언급했던 “무한을 되찾고 복원하기 위해 유한을 거쳐가 는 것”22)이라는 예술의 특성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달리 표현하면, 예술은 절대 적이고 긍정적인 탈영토화를 통해 실재를 대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영화는 유 기적 재현 시스템으로서의 감각-운동 도식으로부터 부단히 탈영토화해야 한다.

영화 이미지의 탈중심성이 영화의 탈영토화의 첫 번째 단계라 할 수 있다. 하지 만 이미지들의 결합, 이미지와 사운드의 결합, 서사의 형성이 다시금 감각-운동적 인과 관계에 종속된다면, 이는 재영토화에 포획당한 부정적 탈영토화의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영화의 탈영토화는 탈중심적 영화적 지각에서 출 발하여 이미지, 사운드, 내러티브의 결합 과정이 감각-운동 도식적 재현 시스템을 벗어나서 실재에 대한 사유의 창조로 나아가야 한다. 무한으로서의 탈영토화라는

“규범성은 […] 가치들의 창조에 있어서의 내재적인 윤리적 원칙으로 간주되어야 한다.”23) 그러므로 감각-운동 도식적 재현에의 거부는 단지 기존의 시스템에 대 한 거부의 의미만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실질적 의미는 긍정적이고 절 대적인 탈영토화로의 방향을 함축하며, 이는 무한한 실재를 대면하고 감당하기 위해 그 실재에 대한 사유를 생산하는 것까지 함축한다. 탈영토화가 함축하는 이 러한 규범적 방향성은 들뢰즈의 시네마에서 강조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지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영화의 탈영토화의 의미를 강력하게 드러내는 중요한 또 하나 의 계기는 ‘행위-이미지의 붕괴에서 시간-이미지로의 이행’이다. 들뢰즈에게 감각 -운동적 도식이라는 재현 체계에 종속되어 있는 행위-이미지의 영화는 (비난까지 는 아니더라도) 비판의 대상임은 분명하다. 들뢰즈에 의하면, 감각-운동적 이미지

21) Paul Patton, “Deleuze's Political Philosophy”, p. 209.

22) QP, p. 186/p. 285.

23) Braidotti, R. & Pisters, P., (eds), Revisiting Normativity with Deleuze (Bloomsbury, 2012), p.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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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판에 박힌 이미지, 즉 클리쉐를 재생산해서 진정한 사유를 못하게 방해한다.

단순화시켜 이야기하자면,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블록버스터 액 션, 로맨스, 스릴러 등의 장르 영화들은 행위-이미지의 영화들이다. 그런데 흥미 로운 것은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이러한 영화들이 ‘정상적인’ 혹은 ‘표준적인’ 영화 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념의 원인에 대해서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원 인들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영화에 대한 인식’이 특정한 방식으로 영토화되어 있으며, 그러한 통념이 지배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 다는 점이다. 그래서 영화란 모름지기 시청각적 쾌락을 주는 이미지들이 재미있 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주어져야 하며, 또한 어떤 관객이라도 기본적으로 이 해하기 어렵지 않은 오락거리여야 한다. 물론 이 오락거리는 가끔은 감동과 눈물 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여하튼 결코 전복적인 사유의 형태는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들뢰즈가 두 권의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영화를 통해 사유 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영화에 대한 인식과 통념의 전복이다. 다르게 사 유하라 – 그것이 사유의 전복적 힘이다. 감각-운동 도식에 대한 비판은 기존의 통념이라는 영토에서 벗어나 탈영토화하라는 의미 역시 함축한다. 이러한 맥락에 서 시간-이미지로의 이행은 기존의 통념에서 탈영토화하여, 감각-운동적인 재현 의 방식으로 영화 이미지들이 무한인 실재에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클리쉐들로 부터 진정한 이미지를 끄집어낼 것”24)이라는 규범적 방향성을 함축하고 있다. 이 때 진정한 이미지란 영화에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시간과 사유”25)를 통해서 보이는 것 너머의 “더 깊은 생명의 직관으로부터 솟구치는 거 대한 힘들”26)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렇듯 시간-이미지 영화의 체계에서 탈영토화 는 감각-운동적 이미지들의 연쇄를 파열시키고 이 파열된 간격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비선형적인 시간의 흐름 쪽을 향하고 있다.

24) Gilles Deleuze, L’image-temps (Les Éditions de Minuit, 1985); 질 들뢰즈, 시네마 2: 시간-이미지, 이정하 옮김 (시각과 언어, 2005), p. 32/p. 46 (이하 IT로 약칭).

25) IT, p. 29/p. 41 (rendre sensibles le temps, la pensée, les rendre visibles et sonores).

26) IT, p. 34/p.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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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시간(temps)과 생(vie)

들뢰즈의 영화 철학 전체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개념이자 어려운 개념 중 하나가 아마도 시간일 것이다. 감각-운동 도식의 붕괴와 더불어 현대 영화, 혹은 시간-이미지의 영화로 이행하면서 시간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시 네마 1: 운동-이미지에서 시간은 ‘운동과 지속’으로, ‘간접적으로 재현되는 시간’

으로만 등장하고, 베르그손의 비선형적인 시간 철학을 바탕으로 한 본격적인 시 간에 대한 논의는 시네마 2: 시간-이미지에서 전개된다. 들뢰즈는 왜 시간의 문 제를, 난해한 베르그손적 비선형적 시간의 문제를 자신의 영화 철학에서 다루어 야만 했는가.

지금 관객의 눈앞 스크린 위에서 펼쳐지는 영화 이미지는 그 생생함 때문에 현재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특히 행위-이미지의 영화의 경우 행위와 상황의 연쇄는 선형적인 현재들의 연속성으로 이루어진 시간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소위 표준적인 영화들에 익숙한 관객들의 경우 영화의 시간성이란 현재들의 연속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일 수 있다. 하지만 들 뢰즈는 이러한 통념에 대해 “현재란 나쁜 영화를 제외하고는 결코 영화에 존재하 지 않는다”는 고다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비판한다. 들뢰즈는 “과거와 현재에 사로 잡히지 않은 현재, 이전의 현재에 환원되지 않는 과거, 이제 오게 될 현재로 이루 어지지 않은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한 연속성은 지나가는 현재들에 영향 을 미치지만, 각각의 현재는 과거, 미래와 공존하고, 이 과거와 미래 없이 현재란 그 자체로 지나갈 수조차 없을 것이다.”27)라고 지적하면서 영화 이미지는 필연적 으로 현재에 속한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들뢰즈는 “현재의 이미지와 공존하는 이 과거와 미래를 포착”하여 “이전인 것과 이후인 것을 영화화 할 것”이라고 영화가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에 대해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28) 들뢰즈는 “이미지와 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적인 것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공존하 27) IT, p. 55/p. 83.

28) IT, p. 55/p. 83 (강조는 들뢰즈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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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그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그 자체로서의 이전과 이후에 도달할 것. […] 시간 의 직접적 현시에 이를 것”29)을 요구한다.

여기에서 이전과 이후로서의 시간을 영화가 포착하는 것이 곧 시간의 직접 적 현시, 직접적인 시간-이미지이고, 이러한 시간-이미지는 이미지와 공존하고 있 는 실재라고 들뢰즈는 밝히고 있다. 결국 시네마에서 시간에 대한 논의는 실재 에 대한 사유, 존재에 대한 사유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현재만이 존재하는 ‘나쁜 영화’에서는 실재에 대한 사유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영화에서 이미지들이 인 간을 중심으로 하는 감각-운동 도식의 인과적 연쇄의 흐름만을 따를 때에 현재들 의 연속으로서의 시간성만이 존재하게 된다. 즉 감각-운동 도식에 의해 영토화된 현재의 시간성만이 존재하게 된다. 바로 이 현재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습관에 대 해 들뢰즈는 비판한다: “우리는 너무나도 ‘현재’의 견지에서 생각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30) 현재를 지나간 과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비교해 생각해 보자면, 그 생생함과 구체성 때문에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현재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 스러울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재는 다른 현재가 그것을 대체할 때에만 지 나갔다고 믿는다.”31) 이러한 통념과 습관에 대해 들뢰즈는 시간의 네 가지 역 32)을 통해 반박하면서, 비선형적 시간의 중첩 속에서 우리의 존재를, 그리고 사 유의 대상으로서의 실재를 발견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 실재의 모습을 시네마에 제시된 방식으로 재구성한다면 다음과 같다:

지속의 움직이는 단면들인 운동-이미지들이 무한히 펼쳐져 있는 운동-이미지의

29) IT, p. 55/p. 84.

30) Gilles Deleuze, Bergsonisme (puf, 1966); 질 들뢰즈, 베르그송주의, 김재인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6), p. 54/p. 78.

31) Gilles Deleuze, Bergsonisme, p. 54/p. 78.

32) 시간의 네 가지 역설이란 (1) 과거와 현재의 동시성(contemporanéité), (2) 현재와 과 거 전체의 공존성(coexistence), (3) 순수 과거의 선재성(préexistence), (4) 과거 전체 의 자기 자신과의 공존성으로서, 베르그송주의의 제3장 ‘잠재적 공존으로서의 기억’

과 차이와 반복의 제2장 ‘대자적 반복’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지면의 부족 때문 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들뢰즈가 시네마 2: 시간-이미지에서, 특히 3장에서 5 장까지의 내용은 이 ‘시간의 역설’을 바탕으로 전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6)

내재성의 평면은 지속에 참여하고 있는 무한한 물질적 우주이고, 이 물질적 우주 의 평면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지속의 한 움직이는 단면이다. 이 평면은 물 론 무한히 거대한 단면이지만. 무한한 시간의 흐름에서 절단해 낸 하나의 단면이 다. 이 무한한 비선형적 시간 속에 펼쳐진 물질의 우주가 들뢰즈가 바라보는 실 재이고, 이 실재는 끊임없는 변화와 창조가 발생하는 비유기적 생명(vie)이다. 이 무한한 생명으로서의 실재를 사유하는 것이 예술과 철학에게 주어진 규범성이고, 그러기 위해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영토화는 끝없이 탈영토화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영화의 본질로서의 사유의 작용은 영화의 메커니즘(프레이밍, 쁠랑, 지각- 이미지, 감각-운동 도식 등)에서의 영토화 작용, 영화 이미지에 대한 통념이나 습 관으로서의 영토화, 이와 연관된 현재성 중심의 영토화를 부단히 탈영토화해야만 한다. 이러한 탈영토화 운동의 방향은 결국 실재에 대한 사유의 창조라는 목적을 향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시간-이미지의 사유에 함축되어 있는 규범적 요구라고 이해할 수 있다.

시네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 탈영토화의 운동이 시간-이미지에서 어떻 게 구체적으로 드러나는지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사례로 크리스탈-이미지를 들 수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크리스탈-이미지란 인식의 질서(ratio cognoscendi)에서는 직접적인 시간-이미지에 앞서는 것이고, 존재의 질서(ratio essendi)에서는 더 근 원적인 직접적 시간-이미지가 그것을 통과해야만 솟아나올 수 있는 것이다. 즉 크리스탈-이미지는 직접적 시간-이미지를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인식론적 통로 의 역할을 한다. 또한 이 인식론적 통로는 시간-이미지의 묘사와 서사에서 시각 적인 방식(ex. 거울-이미지)으로도 확인할 수 있으므로 들뢰즈의 시간-이미지를 가시적으로 형상화하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지각과 회상의 식별불가능성을 중심으로 회상들의 중첩된 구조를 형상화한 베르그손의 8자형 주의 도식에 근거하여 크리스탈-이미지에 대한 논의 를 전개한다.33) 주의 도식에서 가장 좁은 회로인 AO가 영화에서 크리스탈-이미 지에 해당된다. 이 회로 안에서 “지각과 기억, 실제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물리적 인 것과 정신적인 것은 서로가 서로를 좇고 어떤 식별 불가능성(indiscernabilité)

(17)

의 지점 주위에서 서로에게 환원되면서 끊임없이 서로를 추구”34)한다. 그러나 “이 식별불가능성의 지점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가장 작은 회로, 즉 현실태적 이미지 와 잠재태적 이미지의 합생(coalescence), 현실적인 동시에 잠재적인, 양면을 갖는 이미지로 구성된 가장 작은 회로”35)이다. 크리스탈-이미지의 식별불가능한 이 두 면은 구분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호 전제하고 있는 본성상 다른 두 면은 언제 든 서로 다른 면으로 뒤집어질 수 있는 구조적 관계에 있으므로 ‘구별성 자체를 할당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식별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중요한 것 은 이 불가능성이 누군가의 주관적인 혼동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중적인, 실존 하는 이미지들의 객관적 성격”36)이라는 점이다.

이 잠재태적 이미지와 현실태적 이미지의 회로는 회상-이미지, 꿈-이미지, 세계-이미지가 우리의 짐작과는 달리 직접적인 시간-이미지가 아님을 논증하는 기준으로 활용되며, 또한 이후에 등장하는 직접적인 시간-이미지들에 대한 논의 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논거의 역할을 한다. 이렇듯 크리스탈-이미지는 시간- 이미지 영화의 전체 체계에서 중요한 철학적 기준점과 논거로서의 위상을 가진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크리스탈-이미지의 객관적 성격을 가진 혼동에 대해서 탈 영토화의 맥락에서도 이해해 볼 수 있다. 과거/현재의 회로와 상상적인 것/실제적 인 것의 혼동의 회로를 생각해 보자. 과거가 현재와 공존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더 라도 영화에서 주어지는 것처럼 그렇게까지 과거가 현재를 엄습하는가. 상상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이 혼동된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경우에 우리는 영화에서처럼 그 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경우에 따라 심지어 과장으로

33)

34) IT, p. 93/pp. 144-145.

35) IT, p. 93/p. 145.

36) IT, p. 94/p. 146.

(18)

느껴지게 하는 크리스탈-이미지의 식별불가능성은 우리의 ‘현실’ 개념을 비판하며 주어진 현실만이 전부가 아님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흔히들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세계, 유용성과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 이런 것을 굳건한 현실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 개념 역시 영토 화된 하나의 고안물일 뿐이다. 따라서 그러한 세계는 단지 잠정적이고 부분적인 것일 뿐, 그것이 우리가 대면해야 할 실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들뢰즈는 말 하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들뢰즈에게 크리스탈-이미지가 기반하는 시간 철 학적 논의는 시간-이미지의 구조에 대한 존재론적 논의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으로는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 역시 하나의 고안물일 뿐이므로 ‘굳건하게 억압하 는 이 현실을 바꾸고 싶다면, 그로부터 탈영토화하여 다른 다양한 현실을 고안하 라’라는 실천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영화는 다양한 현실 들, 다양한 실재의 측면들과 관점들을 생산함으로써 관객에게 사유의 대상으로서 의 기호들과 마주치게 한다. 이렇게 들뢰즈는 영화적 기호들에 의해 강요된 사유 를 통해, 사회의 지배적인 틀과 시스템으로부터 주어진 단 하나의 편편하고 딱딱 한 영토화된 현실로부터 탈영토화하여, 우리가 다층적 층위의 풍성함과 변형의 유연성을 가진 실재의 모습을 대면하고, 영화를 통해 또 다른 새로운 현실들을 창안할 수 있는 전복적인 사유를 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Ⅴ. 맺으면서

지금까지 들뢰즈가 시네마라는 두 권의 저작을 통해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자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을 ‘탈영토화’의 경향성을 중심으로 제시 해 왔다. 탈중심화, 비인간화, 비유기성 등의 개념들은 탈영토화 개념으로 수렴되 었으며, 영화에서 탈영토화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계기는 감각-운동 도식의 붕 괴와 직접적 시간-이미지의 등장과 깊이 연관됨을 보았다. 사실 이 논문은 지금 껏 가장 많이 접해 왔던 들뢰즈의 영화 철학에 대해 충분히 이해되지 못한 점들

(19)

을 해명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첫째, 들뢰즈의 영화 철학에는 존재론 과 미학만 있을 뿐, 실천 철학적인 함의는 없다. 둘째, 영화 이미지의 탈영토화라 는 개념은 해체적이고 파괴적으로 느껴진다. 끝없는 해체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셋째, 시간-이미지가 출현한다는 의미가 대체 무엇인가. 왜 영화에서 시간만이 가 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간주하는가.

이 각각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으로 다시금 ‘탈영토화’ 개념을 중심에 두고 앞서의 논의를 정리해 보자. 예술이라는 것은 무한을 사유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서, 유한의 창조를 통해 무한을 되찾고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무한은 예술 이나 철학 이전에 주어진 존재론적 전제이자, 철학이든 예술이든 사유를 통해 대 면해야만 하는 규범적 방향성을 근본적으로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탈영토화의 벡터’의 방향성을 이해할 수 있다. 탈영토화 운동은 무한을 되찾기 위해서 기존의 한계 지워진 영토를 떠나 새로운 영토를 창조하는 과정을 무한히 계속해야 한다.

영토를 떠나 새로운 영토를 창조하고 그것을 다시 떠나는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파괴, 해체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으나, 탈영토화의 파괴와 해체는 생성과 창조를 위한 필수적 조건이다. 그리하여 탈영토화는 무한으로서의 실재에 대한 사유의 창조라는 규범성과 관련해 이해되어야 한다. 사실 들뢰즈에게 직접적 시간-이미 지에 대한 사유는 실재, 존재, 생에 대한 사유와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시간 속에 기거하므로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의 과정에 있는 실재 역시 시간적인 차원에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영화에서 시간-이미지는 감각-운동 도식적 재현으 로부터의 탈영토화이자, 생에 대한 사유, 실재에 대한 사유라고 말할 수 있다.

들뢰즈에게 탈영토화는 무한이라는 존재론적 바탕에서 이해되는 운동의 경 향성이지만, 탈영토화는 존재론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함축을 가진다 는 점이 중요하다. 주어진 것에서 빠져나와 그것을 전복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야 하는 부단한 운동으로서의 탈영토화는 실상 인간의 자연적인 보수적 경향성과 는 반대되는 방향을 가리킨다. 탈영토화는 이미 주어진 안전하고 편안한 것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위험하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영역을 창조함으로써 끊임없이 스스로를 초월하기를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20)

“철학과 영화의 유일한 목적은 다르게 생각하라는 것”이고, “다르게 생각하 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게 보는 것의 문제”이다.37) 이때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 게 본다는 것은 기존의 영토화된 사유와 시각으로부터 탈영토화하여 새로운 사유 를 창조하라는 것이다. 새로운 사유의 창조는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38)하는 좋은 힘이다. 들뢰즈는 니체를 바탕으로 ‘좋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좋음이란 분출하고 상승하는 삶, 자신이 만나는 다른 힘들에 따라 변형되고 변할 줄 아는 삶, 그리고 이 힘들과 함께 끊임없이 살고자 하는 역량을 배가시키고 새로운 ‘가 능성들’을 열면서 더 큰 역량을 구성하는 삶이다.”39) 영화의 다르게 보고 다르게 사유하기란 새로운 사유를 창조하는 것이고, 그러한 생성과 창조는 생의 역량을 상승시키는 좋은 힘이다. 영화적 사유의 탈영토화를 통한 새로운 사유와 시각의 창조란 “우리 존재의 생성하고 변형될 수 있는 생의 역량을 어떻게 상승시킬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40)와 관련된다.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 만, 지금보다 더 좋은 삶, 지금보다 생의 생성적 역량을 더 상승시킬 수 있는 삶 의 방식과 새로운 공동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를 윤리적 사유라고 부를 수 있 다면, 이는 결코 철학적 사유와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사유한다는 것은 윤리와 분리 불가능하다.41) 결국 시네마의 부단한 탈영토화로서의 영화 철학적 사유는 그 생성과 창조의 역능과 관련하여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함축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42)

37) Ronald Bogue, “To Choose to Choose�to Believe in This World”, in: Afterimages of Gilles Deleuze's Film Philosophy, edited by David Rodowick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0), pp. 127-129. 


38) IT, pp. 184-185/pp. 281-282.

39) IT, pp. 184-185/pp. 281-282.

40) 이지영, 「들뢰즈의 예술철학에서 윤리적 가능성에 대한 연구」, 시대와 철학 제26권 3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5), p. 110.

41) David Rodowick, “The World, Time”, in: Afterimages of Gilles Deleuze's Film Philosophy, edited by David Rodowick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0), p. 99 참고.

* 논문투고일: 2017년 8월 15일 / 심사기간: 2017년 8월 16일-9월 15일 / 최종게재확정일:

2017년 9월 20일.

(21)

참고문헌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저작들>

펠릭스 가타리, 카오스모제, 동문선, 2003.

Deleuze, Gilles, Bergsonisme, puf, 1966
(질 들뢰즈, 베르그송주의, 김재인 옮 김, 문학과 지성사, 1996).

______, Deux règimes de foux, Les Éditions de Minuit, 2003.

______, L'image-Movement, Les Éditions de Minuit, 1983 (질 들뢰즈, 시네마 1: 운동-이미지, 유진상 옮김, 시각과 언어, 2002).

______, L'image-temps, Les Éditions de Minuit, 1985. (질 들뢰즈, 시네마 2: 시 간-이미지, 이정하 옮김, 시각과 언어, 2005).

Deleuze, G & Guattari, F.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ii , trans. Brian Massumi,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7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______, Qu'est-ce que la philosophie?, Les Éditions de Minuit, 1991 (질 들뢰 즈, 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정임, 윤정임 옮김, 현대미학 사, 1995).

<2차 문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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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국문 초록

본 연구는 들뢰즈의 영화철학의 실천적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들뢰즈 의 영화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물음을 던지고자 한다: 들뢰즈는

시네마에서 수많은 영화와 철학적 논의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들뢰 즈의 영화 철학은 영화에 대한 형식과 스타일에 대한 미학적 분석에만 한정되는 것일 뿐이거나, 난해한 유럽 예술 영화들에만 타당한 논의이기 때문에 그의 영화 철학은 실천적인 의미로 확장되지 않는다는 제한적 인식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제한은 들뢰즈의 영화철학을 그의 전반적인 철학의 맥락 속에서 살펴본다면 그의 영화철학적 사유가 지향하고 있는 방향성을 파악함으로써 어느 정도는 해소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를 위하여, 본 논문은 천개의 고원과 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제시된 개념들과의 관련성 하에서 시네마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의 마지막 저작인 철학이란 무엇인가에는 예술 과 철학의 관계, 예술의 목표 등이 상당히 예외적인 방식으로 정식화되어 있으며,

천개의 고원에서는 실천적 개념들의 함축을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 다. 또한 이 저작들은 시네마의 다중적 중첩이 만들어 내는 사유의 생성적 균 열 지점들을 더 잘 볼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유의 맥 락에서 시네마에 등장하는 수많은 개념들이 어떠한 문제에 대한 해를 해결하기 위해 공동-창조의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다른 저 작들과의 교차 지점에서 시네마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다음의 개념들의 관계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탈중심화, 비인간화, 탈영토화, 시간과 생(vie). 시 네마에서 이루어지는 영화 철학적 논의에서 이러한 개념들이 어떠한 공동-창조 로서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은 들뢰즈의 영화 철학에 대한 오해들 을 극복해 나아갈 수 있게 해 줄 방향 지시등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 대한다.

핵심어

들뢰즈, 생, 시간, 시네마, 비인간화, 탈영토화, 탈중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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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Deleuze's Film-Philosophy : Thinking through Images

Ji-Young Lee*

43)

This study poses a basic question about Gilles Deleuze's film-philosophy in order to resolve some misunderstandings and elucidate the practical implications of his film-philosophy: What Deleuze wants to mean with numerous examples of films and convoluted philosophical discussions in Cinema Books? Some criticize that Deleuze's film-philosophy has no practical implication due to their misapprehension that his film-philosophy is limited to the aesthetic analysis of filmic form and style, and only to esoteric European art house films. I think that these can be resolved if one understand the directionality that his philosophy implies through examining the context where his film-philosophy lies. For this purpose, this essay will present what Cinema Books wants to purport in relation to the concepts which are produced in A Thousand Plateaus and What is Philosophy. Since one can identify the relationship between philosophy and art, the goal of artistic creation and the structure of artistic thinking in What is Philosophy, and the practical implication of his philosophy in A Thousand Plateaus. Also, these works make us assure the ruptures of becoming that the multiple layers of Cinema

* Lecturer, Seoul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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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es. From these contexts, this study will examine how the co-creation of many concepts is being formed in Cinema Books. Thus, this article examines what Cinema wants to show in relation to following concepts at the crossroad of his other works: decentralisation, dehumanisation, deterritorialisation, time and life. Understanding of the relationship, as co-creation, between these concepts will help us overcome the misunderstandings that have surrounded Deleuze's film-philosophy.

Key Words

Cinema, decentralisation, dehumanisation, Deleuze, deterritorialisation, lif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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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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