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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유희석*

목 차 1. 머리말

2.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의 요지와 물음들 3. 동아시아 ‘거대분단’ 재론

4. 미국과 동아시아 거대분단 5. ‘촛불혁명’ 이후의 한반도 2018

<국문초록>

본고의 목적은 이삼성 교수가 다년간 개진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을 백낙청 교수가 화두로 던진 동아시아의 거대분단이라는 발상과 대비하면서 2016년 촛불 혁명의 의의를 성찰하는 데 있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의 학문적 성취는 무시할 수 없지만 이론의 여지도 적지 않다. 단일한 ‘체제’라기보다는 느슨한 무/질서라 할 만한 현상이 한국과 북한 및 중국과 대만,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시공간에서 반복된다고 생각하는 관점에 비추면 특히 그렇다. 게다가 변혁의 잠재력은 일정한 시스템이 견고하게 작동하는 자기완결적 체제보다는 느슨하기 때문에 인간의 ‘수 리작업’이 그만큼 용이한 정치 환경에서 더 커지는 경향이 있다. 이는 복잡계연구 (Complexity Study)의 주요 통찰 가운데 하나지만 어찌 보면 상식에 가깝다.

인간사회이든 자연이든 닫힌 시스템은 오래갈 수 없지만 따지고 보면 완벽하게 자 족적인 체제라는 것도 사람의 머릿속에나 존재하는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다.

하지만 본고의 주장은 그런 ‘상식’에서 출발하여 논제를 연역하기보다는 동아시 아 대분단체제론에 대한 다각도의 비판적 검토에 근거한다. 기본적으로 어찌하여 자기완결적 체제가 아닌 느슨한 무/질서의 동아시아 공간에서 변혁의 잠재력이 더

* 전남대학교 영어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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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발생하는가를 묻는 분석 작업이라는 것이다. 특히 한․중․일 사이를 가로지르 는 역사적 단층들과 거기에 축적된 위험에너지를 엄밀하게 ‘계측’하면서 동아시아 역내 질서에 개입하는 미국의 영향력을 지혜롭게 활용할 때 비로소 한반도의 분단 도 점진적 해소의 실마리를 얻기 되리라 본다. 그같은 점진적 해소의 제도적 방안을 일컬어 (낮은 단계의) 남북연합이라 칭하지만, 그 연합의 상은 이제부터 만들어가 야 할 숙제로 남아 있음을 결론으로 제시한다. 동시에 그같은 숙제가 촛불혁명이 남긴 과제임을 주장한다. 그런 과제의 원만한 수행을 위해서 촛불혁명의 현재성에 대한 발본적 사유가 절실한바, 이는 미국이 상수로 개입하는 동아시아 시공간의 분열양상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데도 필수적이라는 것이 본고의 핵심 논제다.

주제어 :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동아시아의 거대분단, 미국의 패권, 한반도, 유동적 상황, 체제, 촛불혁명

1. 머리말

세계체제분석에 따르면, 자본주의근대는 16세기 무렵 서유럽에서 출범했 다. 자국에 ‘본사’를 둔 서구 자본가들의 판로 개척으로써 중심부를 비롯한 주변부와 반주변부라는 위계 공간이 분할되고 그 과정에서 식민지가 창출 된 역사적 시간대가 자본주의근대인 것이다. 물론 이제 지구의 전역으로 파 고든 자본주의근대의 국지적 양상들도 천차만별인 터라, 일반론으로는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20세기 동아시아만 해도1) (자본주의)근대,

1) ‘아시아’에 관한 개념적 분별에 대해서는 특히, Amitav Acharya, “The Idea of Asia,”

Asia Policy 9 (2010년 봄) : 32~39면; “Asia Is Not One,”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69:4 (2010) : 1001~1013면 참조. 동아시아, 나아가 ‘아시아’ 자체가 서구의 개념적 구성물 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논외로 한다. 다만, 필자가 염두에 둔 동아시아는 주로 한․중․일 과 대만 및 북한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시아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따라서 동남아시아는 물론 러시아와 인도도 논의에서 배제된다. 필자의 능력 부족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이는 한반도적 시각의 절실함이 주로 앞서 언급한 5개국의 복잡미묘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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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공간, (제국주의)권력이라는 세 개념의 연쇄적 작동이 낳은 현실 은 결코 간단치 않은 지적 과제를 제기한다. 가령 1945년 종전 이후 40년 넘게 지속된, 미․소 냉전체제의 성격만 해도 유럽과 동아시아가 전혀 다르 다.2) 미국이 상수로 개입하는 동북아 20세기는 열전의 세기였을 뿐더러, 중 국내전(1946-1949), 한국전쟁(1950-1953), 베트남전쟁(1955-1975) 등으로 이어진 열전의 ‘잔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3)

유럽에서는 과거지사가 되어버린 냉전체제의 불씨가 사그라지기는커녕 복잡미묘하게 축적되어 인화력(引火力)을 유지하고 있는 한반도의 38선이 야말로 강대국들의 각축이 남긴 ‘냉전’의 가장 뚜렷하고도 끈질긴 지정학적

‘유산’일 것이다. 이 유산을 어떻게 청산하느냐에 따라 한반도는 물론 동아 시아 전체의 갈등요인을 결정적으로 해소할 가능성이 큰 만큼 그 세계사적 의의는 지대하다. 미국의 ‘보호국’이 - 개번 맥코맥(Gavan McCormack)의 표현대로 하면 ‘의존 국가’(client state)가 - 된 일본의 오키나와(沖縄)나 대 만의 진먼따오(金門島)도 그 유산의 병리적 발현이며, 지구시대 민주주의 의 성패를 가늠하는 중요한 현장들이다. 하지만 ‘한반도문제’는 결을 달리 하는 면이 있다.4) 사안 자체가 워낙 고차방정식인데다가 6자회담 등 그간

에서 확인된다는 점도 고려한 불가피한 방편이다.

2) 그 차이에 관한 다각도의 논의는 특히 김학재, 「‘냉전’과 ‘열전’의 지역적 기원 : 유럽과 동아시아 냉전의 비교 역사사회학」, 뺷사회와 역사뺸 114, 2017, 205~243면 참조.

3) 월러스틴이 ‘냉전’의 전지구적 양상을 명석하게 분석한 평문의 결론을 “아시아에서의 냉전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다지 유용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끝맺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Immanuel Wallerstein, “What Cold War in Asia?: An Interpretative Essay”, Zheng Yangwen, Hong Liu and Michael Szonyi, ed. The Cold War in Asia : The Battle for Hearts and Minds (Brill, 2010) 15~24면 참조.

4) 엄밀하게 말해 ‘북핵문제’는 ‘북한문제’의 핵심적인 일부다. 그렇다고 북핵문제의 해소 가 북한문제의 해결로 저절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비핵화의 중추적인 역할을 할 북핵문제의 해소는 단기간에 이뤄질 성질이 아님을 직시할 필요가 있거니와, 경제와 인권, 생태 등 온갖 방면에서―한국의 약점과는 다른 차원에서―취약한 북한문제도 한 반도 평화체제의 수립 과정에서 확실한 해법의 실마리를 찾으리라 본다. 따라서 ‘한반도 문제’를 거론하는 기본 시각은 한국도 북핵문제, 더 나아가 북한문제의 당사자이자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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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국제적 처방도 제대로 먹히지 않은 터라, 단칼의 해법이 없음을 누구나 절감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총체적 인식을 끊임없이 파편화하는 분단체 제의 작동을 정확하게 읽을 필요가 커진다. 그런 읽기는 읽는 자의 의식 자 체를 왜곡하는 체제의 작동에 민감하면서 새로운 통합을 지향하는 모든 지 력을 요구하지만 학계에 적을 둔 학자일수록 이를 좀더 솔직담백하게 말할 줄도 알아야 한다. 즉, 극도로 복잡한 매개항을 거치는 한반도문제도 다른 어떤 요인들보다 우리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 점을 직시하는 성찰만이 ‘사상심리전’을 통해 형성된 분단체제의 뇌관을5) 안전하게 해체 하는 작업과 연결되리라 본다.

20세기 동아시아의 지정학에 대한 주밀한 복기와 검토도 그같은 성찰과 작업의 일부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10년을 거치면서 폭발의 조짐마저 보 이던 분단체제의 ‘리스크’를 제대로 관리하고 더 바람직한 체제로 바꾸지 않고서는 한반도문제를 해소할 길이 없다. 이 또한 대국(大局)적 분석을 요 하는 일이다.6)그러나 이같은 당위를 진정으로 제기해야 할 하나의 물음으 로 전환하고 그런 물음에서 성찰의 방위를 탐색하려는 필자는, 방편으로 이 삼성 교수가 제기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의 공과를 살펴보겠다. 미국이 20세기 동북아에 개입한 정치적 양상을 검토하면서 대분단체제와 양립하

관계가 갈리는 국제사회에 문제의 해법을 제시해야 하는 ‘중재자’라는 인식에 근거한다.

5) 사상전과 심리전의 양상을 모두 갖는 양상을 분석함으로써 동아시아 냉전에 대한 새로 운 이해를 시도한 집단적 연구성과로는 백원담․강성현 편, 뺷열전 속 냉전, 냉전 속 열 뺸(진인진, 2017) 참조.

6) 외교정책포커스(Foreign Policy In Focus) 소장인 존 페퍼(John Feffer)의 정치소설인 Splinterlands (Haymarket Books, 2016)도 상상력을 동원한 대국적 분석에 해당한다.

페퍼는 지구기후의 파국적인 변화로 인해 국민국가체제가 사실상 괴멸 상태에 들어간 세계정세를 공상과학소설의 형식으로 그려내는데, 한반도의 상황도 나온다. 북한은 2050 년까지도 붕괴하지 않고 밀수 등으로 체제를 연명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반면에 남한의 상황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2050년까지 남북이 어떤 종류의 교류나 연합을 시도하지 않고 각자도생만을 추구하면서 살아남는다는 발상은 동북아의 국제현실과는 무관한, 오 롯이 ‘소설’의 영역에 국한된 상상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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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힘든 동아시아의 ‘거대분단'(macro-division)이라는 발상을7)논하는 것 도 그같은 방편의 일환이다. 세계체제연구의 통찰도 필요한 만큼 활용하겠 지만 동아시아에 과연 - 한반도의 분단체제에 비견할 만한 - ‘체제’가 존재 하는가는 물음이 미국의 위상에 관한 논의와 더불어 주요 논제가 될 것이 다. 논의의 최종적인 방점은 ‘촛불혁명’ 이후 전개되고 있는 한반도의 새로 운 설계 가능성에 찍힌다.

2.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의 요지와 물음들

이삼성교수는 20세기 동아시아에 ‘체제’가 존재했다는 ‘가정’ 하에 다년간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를 역설했다.8) 대분단체제가 1950년 1월부터 현재까 지 지속되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전후 동아시아의 복잡한 정치지형을 대분 단체제로 개념화한 것이다. 그는 그 근거로 대략 세 개의 요인을 거론했다.

적실한 토론을 위해서라도 제시된 근거들을 가급적이면 그가 쓴 표현 그대 로 인용하겠다.

첫째, “동아시아의 대분단의 구조는 지역 강국인 중국과 일본의 관계가 미소의 양극질서 및 그 초강대국들 간 갈등과 동맹의 구조와 밀접하게 결

7) 동아시아의 거대분단이라는 논제는 백낙청 교수가 체계적으로 논했다기보다는 하나의 화두로 스치듯 던졌다고 말하는 편이 맞겠다. ‘거대분단’에 관한 언급은 Paik Nak-chung,

“Barriers to reconciliation in East Asia : the case of two Koreas and its regional implications, Inter-Asia Cultural Studies, 11:4 (December 2010) 503~504면.

8) 이하 이삼성 교수의 입론은 아래 논문들에 근거하여 필자가 정리한 것이다. 이삼성,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성격과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 동아시아 분단체제의 구조와 그 함의」한국정치학회 하계학술회의(2004) 자료집 VIII; 「동아시아 : 대분단체제와 공동체 사이에서」, 뺷민주주의와 인권뺸 6:2, 2006, 6~50면;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성격에 관한 일고: ‘대분단체제’로 본 동아시아」, 뺷한국과 국제정치뺸 22:4, 2006, 41~83면; 「전후 동아 시아 국제질서의 구성과 중국 :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형성과정에서의 중국의 구성적 역할」, 뺷한국정치학회보뺸 50:5, 2016, 163~189면; 「동아시아의 질서와 평화: 천하체제, 제국체제, 대분단체제」, 뺷공동체의 삶뺸, 이재열, 박명진 외, 민음사, 2016, 285~36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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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되면서 형성되었다.” “미소간의 갈등적 양극구조의 체계적인 영향 속에 서 형성․유지된” 대분단 구조는 냉전구도가 깨진 이후에는 중국과 미/일 동맹체제의 대립으로 변모한다. 둘째, 대분단의 구조는 “두 개의 다른 작은 분단 체제를 거느리게 되었다. 한반도의 남북분단, 그리고 대만해협을 사이 에 둔 중국과 대만의 분단이다.” 소분단체제로 명명된 이 체제들은 “미국과 유라시아대륙 간의 냉전구조와 결부되면서, 한반도의 남한과 중국의 대만 은 미일동맹과 하나의 진영을 이루었다.” 셋째, “미소 냉전이라는 두 초강 대국들 간의 갈등구도,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차상위강대국 사이의 역사적 상처의 응결과 대립이라는 (역사심리적) 갈등의 조건, 그리고 한반도의 남 북한, 대만해협을 사이에 둔 중국의 내적 분단, 이 세 종류의 다른 질서단위 들이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받”은 끝에 동아시아의 대분단체제가 구축되었 다는 주장이다. 이런 체제는 냉전체제의 영향을 받아왔지만 “미소 간 냉전 구조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인 실체”다.9)

이삼성교수는 전술한 세 가지 전제를 구체화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동아 시아 대분단체제의 요건으로 1949년 이후 역내에서 발현된 “중층성, 다차 원성, 그리고 상호작용성”을 부각시킨 것도 그런 작업의 일환이다. 그는 각 각의 항목에 다음과 같이 첨언한다. 중층성은 미․일 연합과 중국 사이의 긴장 구조에서 연유한다. 그는 그 구조를 “대분단의 기축”으로 명명한다.

다차원성은 대분단의 기축에서 발생된다. 기축 하에서 한반도의 38선, 대만 해협, 베트남의 남북을 가른 17도선 등이 국지 분단(=소분단체제)으로 작동 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는 대분단의 기축과 소분단들의 축이 상호작용함으로써 유지되는 일정한 구조의 표현인 셈이다. 이교수에 따르 면 “전후 동아시아 질서를 대분단체제로 만드는 것은 이러한 중충성과 다 차원성 모두에서 작동하는 상호작용성이다.”10)

9) 이삼성,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성격에 관한 일고」, 59면.

10) 이삼성교수는 2014년 7월 31일자 뺷한겨례뺸 기고문 「백낙청 교수의 ‘대분단체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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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역사학을 비롯한 사회과학계 일각에서는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군사대립과 ‘장기 전쟁’을 근간으로 하는 “동아시아 분단 체제”라는 용어도 통용된다.11)표현만 다를 뿐 동아시아를 통어하는 체제 가 실재한다는 주장이다. 이삼성 교수가 제시한 세 가지 전제들에 크게 이 견을 제시하기 어렵다. 그의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은 동아시아의 지정학 현실을 ‘전체’로 파악하는 데 일정하게 기여했다고 본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러한 전제들을 종합하여 단일한 체제를 구축하는 논리에는 완전히 수긍 하기 힘든 점들도 발견된다. 특히 동서냉전구도가 붕괴된 1989/1991년 이후 국면을 염두에 둘 때 그렇다.

필자는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냉전구도로 환원 할 수 없다는 이교수의 진단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떤 경우든 동아시아의 지정학 실상을 파악하는 데 “미․일 연합과 중국 사이의 긴장 구조,” 즉,

“대분단의 기축”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미․일 대 중국이라는 대분단 기축의 존재감은 지난 20년간 크게 변화한 것이 없다고 봐야 옳다.

그러나 그 점을 인정해도 문제는 남는다.12) 대분단의 기축이라는 가정은

‘상식선’에서는 납득할 만하지만 소분단체제들이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되는 동아시아의 정치 상황이 과연 체제(system)라는 규정 내지는 개념에 값하 는 견고한 내구성과 자기재생산성을 지니는가는 물음표가 달릴 수밖에 없 다는 것이다. 하나씩 검토해보자.

에 대한 반론」에서 위의 입장을 더 간명하게 개진한 바 있다.

11) 동아시아 분단체제를 하나의 개념으로 차용한 논의는 정근식, 「동아시아 냉전․분단체 제의 형성과 해체: 지구적 냉전 하의 동아시아를 새롭게 상상하기」, 뺷한국학의 학술사적 전망 2뺸, 소명출판, 2014, 41~76면; 정영신, 「동아시아 분단체제와 안보분업구조의 형성 :동아시아의 전후 국가형성 연구를 위한 하나의 접근」, 뺷사회와 역사뺸 94집, 2012, 5~47면 참조.

12)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기축으로 설정된 미․중 관계가 대립으로 일관된 것도 아니지 만, 더 중요한 점은 한반도문제를 두고 21세기 들어 두 강대국의 전략적 이해가 상충되 지 않을 수도 있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에 관한 언급은 정근식․

션즈화 대담 「한국전쟁과 동아시아 냉전체제」, 뺷역사비평뺸 121, 2017, 181~182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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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소분단체제들 가운데 베트남의 분단 경우는 통일(1975)을 이루었기 때문에 논외가 된다. 반면에 진영․체제 대결에 근거한 ‘냉전’이 일정 부분 해소된 이후에도 중국과 대만은 여전히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별개의 국가 다. 하지만 미중 수교를 계기로 양안 관계가 악화되다가 당시 야당인 국민 당의 렌잔(連戰) 명예총재가 후진타오 주석과 세 차례(2005년 4월, 2006년 4월, 2007년 4월) 회담을 연이어 하면서 양안관계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2018년 현재는 다시 관계가 악화되는 조짐이 보이 지만 향후 ‘하나의 중국’이라는 국체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보다는 한 결 긴밀한 ‘일국양제’로 두 나라가 발전할 가능성을 배제하기도 어렵다. 물 론 이삼성교수가 대분단 기축의 조건들로 덧붙인 점들, 즉 미․일 연합 대 중국의 지정학적 긴장,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균열, 역사심리적 간극 등도 중국과 대만의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들이다. 규모 면에서 결코 맞대응 될 수 없는 중국과 대만의 관계와 사뭇 다른 면이 많은 한반도의 남북관계 에서도 그런 요인들은 무시할 수 없는 중요 변수다.

이쯤해서 체제 개념과 연관하여 이삼성교수의 입론을 원론 차원에서 짚 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절대적 자족성을 갖춘 체제라는 것은 머릿속에서나 존재하는 하나의 관념이다. 모든 역사적 체제는 상대성과 관계성을 띤다는 말이다. 이는 분단체제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반세기 넘게 완강한 자기재 생산능력을 키워온 것으로 보이는 분단체제만 하더라도 그 자체로 완결된 시스템이라기보다는 동아시아를 중간 매개로 세계체제와 연결되는 세계체 제의 하위 단위에 불과하다. 물론 하위단위의 독자성도 그 자체로 연구대상 인 것은 분명하다. 한반도에 체제라 할 만한 긴밀한 자기재생산적 질서가 자리를 잡았다 해도 그 질서의 수준과 양상은 동아시아와 세계체제의 현실 정치적 작동에 의해 결정되기에 더욱 그러하다. ‘적대적 공존’으로 표현되 는 분단체제 70여년의 궤적이 크고 작은 요동으로 가득 찬 것은 결코 우연 이 아니거니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한민족’이면서도 전혀 이질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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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들로 구성된 남북이 매우 느슨한 것 같으면서도 긴밀한 연동적 관계 망 속에 존재하는 현상 역시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실 그 점은 왕년에 선거 때마다 등장하곤 했던 ‘북풍’을 들먹일 것도 없다.

그렇다면 동북아시아는 어떤가? 한국인에게 동아시아는 북한을 제외하 고 왕래가 자유로울 뿐더러 대부분 유학이나 투자, 관광 등, 문화 및 경제 활동도 얼마든지 가능한 지역이다. 동(남)아시아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이 라면 대개가 공감할 수 있듯이 한자문화권이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지 않 는다. 그럼에도 그런 문화권에 분단체제에 맞먹는 어떤 내재적 연동질서가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면에 앞서 언급했다시피 한반도는 그런 무/질 서보다는 비교적 강고한 어떤 자기조절기제 - 체제라고 부름직한 기제 - 가 가동되어왔다는 점이 피부로 느껴진다. 물론 엄밀한 분석이 따라야 할 논제 를 실감으로 대신할 수 없다. 이삼성교수가 청일전쟁부터 1945년까지를 동 아시아 제국체제로 정의한 대목부터 살펴보자.

이 기간에 여러 형태의 제국‘들’이 실재했다는 점은 납득할 수 있지만 체제체제체제체제체제 가 존재했다는 주장은 상식에 반하는 면이 있다. 가령 러시아는 혁명(1905) 이후 사회주의혁명에 성공했으나 내부 모순이 격발하고 세계대전에 휘말리 면서 아(亞)제국의 체모를 간신히 유지했다. 반(半)식민화가 된 상태에서 신해혁명(1911)으로써 간신히 새로운 복합 국민/민족국가의 초석을 마련했 던 중화민국은 알다시피 제국의 위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2차에 걸친 국공내 전의 양상이 말해주는 것처럼 1949년까지의 중국은 외세와 내부의 적을 상대 로 싸우면서 대륙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으나 패퇴한 국민당이 장악한 대만과 는 새로운 ‘분단’을 낳았다. 금문도야말로 이런 분단의 비극적 착잡함을 웅변 하면서 대만 같은 ‘작은 나라’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는 제국의 실상을 증거 하는 상징이다.

몰락한 중국을 부분적으로 식민화하면서 ‘대동아공영’을 꿈꾼 일본의 또 다른 사례다. 제국의 체제적 동력을 확보하는 데 필수적인 정치 이념과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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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인프라를 제대로 갖출 새도 없이 패망한 일본이 동아시아 역내에 남긴 역사적 상흔을 추적하노라면 20세기 전반기 동아시아는 - 전화(戰火)에 휩 싸인 서유럽 역시 비슷했지만 - 체제는커녕 다극적 분열과 혼돈의 시기였 음이 분명해진다. 서구 근대주의의 맹목적 추종이나 다름없는 탈아입구(脫 亞入口)의 일본 이데올로기 자체가 동아시아의 바람직한 체제적 질서 형 성에 암운을 드리웠다는 것이 정확한 역사인식에 가깝다. 일본 패전 이후의 동아시아에 대해서도 비슷한 판단이 선다. 중국과 미국을 비롯하여 한국과 일본, 일본과 북한, 중국과 대만 등이 저마다의 특수한 상황에서 중․저강 도의 반목과 화해를 반복하는 형국이 ‘동아시아의 질서’이기 때문이다.13) 시시각각 유동하는 동아시아의 구체적 현실보다 체제라는 ‘상’을 앞세울 때의 문제점이 부각되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다. 동아시아의 근대와 같은 이질적 시공간에서 어떤 고정된 질서를 추출하려는 노력이 충분한 설명력을 갖기 어렵지만, 더 중요한 논점은 동아시아에서 대분단체제를 설정하는 시각 으로는 ‘한반도문제’를 충분히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실제로 이삼 성 교수의 작업에서 화해와 평화라는 일반론을 넘어선 어떤 구체적인 해법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도 대분단체제라는 상(像)에 매달린 탓이 크다.

3. 동아시아 ‘거대분단’ 재론

동아시아의 ‘거대분단’을 일종의 화두로 던진 백낙청은 동아시아에 체제 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개 념의 남용으로 보는 입장이다. 동아시아에는 체제라기보다는 “거대분단이

13)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동아시아 분단구조’라는 발상을 선호한다 고 말한 백영서의 문제의식도 그같은 중․저강도의 반목과 화해를 반복하는 동아시아 특유의 유동성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백영서, 「핵심현장에서 다시 보는

‘새로운 보편’ : 동아시아 분단구조 극복의 길」, 뺷민족문학론에서 동아시아론까지뺸, 백영 서․김명인 엮음, 창비, 2015, 383~384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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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부를 수 있는, 즉 좀더 긴 역사적 뿌리가 있는 대규모의 분단”이 존재 할 뿐이라는 것이다.14)그에 따르면 분단선은 두 갈래로 뻗어 있다. 하나는 중국과 그 나머지 세계이며, 다른 하나는 일본과 그 나머지 세계이다. 중국 과 나머지 세계의 분단은 주로 근대 동아시아에서 ‘제국’으로 군림한 중국 대륙의 물리적 규모 및 유구한 문화 및 역사와 관련된다. 중국은 그 자체로 미국과 유사하게 하나의 ‘세계’지만 미국과는 사뭇 다르게 다채롭고 장구한 전통의 보고(寶庫)라는 것이다. 알다시피 수많은 소수민족들의 문화를 품 은 대국 중국은 근대 단일 국민국가(nation-state)의 일반 모형을 초월하는 엄청난 다양성을 지닌 나라다.

여타 사회․문화적 면모는 말할 것도 없이, 바로 그 다양성 면으로만 봐도 중국은 동아시아의 중․소형 국가들과 구분된다. 약 14억 인구에다가 한족을 필두로 50개가 넘는 소수민족들이 존재하는 나라라면 국민/민족국가의 동질 성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그런데 거대분단이 역내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다방면으로 갖는 중국의 압도적 비교우위와 무관치 않다고 할 때, 그 정치적 함의는 어떤 것인가? 일단 중국과 그 외 지역 사이에 존재하는 분리선 은 단순한 주권국가의 경계선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1987년부터 중국 내 친지의 방문과 투자가 가능했던 대만과 중국의 분리선으로 국한될 수 없다. 주민들의 왕래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실질적으로 반(半)주권국가라고 해야 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가르는 한반도의 38선과도 다르다. 20세기 세계체제의 패권 투쟁으로 인해 더 깊게 파인 중국과 나머지 국가들 간의 거대분단은 비유컨대 중국이라는 거대물체의 중력이 작용하는 동아시아 근대 국민국가체제(modern nation-state system)의 지역적 특수성 을 말해주는 하나의 지표다.

14) 백낙청, “Barriers to reconciliation in East Asia, 503면. 물론 엄밀하게 따지고 들면

‘분단’이라는 용어는 이 경우 주민 간 왕래조차 금지된 한반도 분단과 다르고 개념상 혼란의 여지도 없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거대분단보다는 거대분리가 더 적절한 표현이 라고 판단되지만 이 글에서는 백낙청의 용어를 일단 그대로 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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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일본과 그 나머지 세계의 거대분단은 어떤가? 일본은 중심과 주변 사이에 낀, 제국의 아주변(亞周邊)에 속한 터라 한반도와는 또 다르 게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을 독자적으로 소화해온 역사도 만만치 않다.15)그 러나 인구 1억 3천이 채 안 되는 일본의 거대 분단은 중국의 그것과 비교하 면 연조가 짧고 상대적으로 규모도 크지 않다. 다만, 조공체제의 와해로 노 골화된 중국의 거대분단’도 그 성격이 간단치 않은 것처럼, 일본과 동아시 아 나머지 지역과의 단절 양상 역시 꽤나 굴곡진 것이다. 동아시아 조공체 제에 수세적으로 참여해온 일본이 아시아의 나머지 나라들과 분리되는 과 정은 역설적이다. 에토 바쿠후(江戶幕府, 1603-18-67)를 무너뜨린 메이지 유신의 성공으로 일본은 서구적 근대를 선취한바, 국가 이념이나 다름없었 던 탈아입구가 초래한 서구화는 역내 질서에 커다란 변형을 가하면서 불협 화음을 끊임없이 방출했다. 일본 문화의 전체성을 천황제와 동일시하고 후 자를 문화개념으로 부활시켜야 한다면서도 서구의 유미주의에 파괴적으로 탐닉한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1925-1970)의 최후야말로 탈아입구의 역사적 역설을 웅변하는 동시에 일본과 나머지 동아시아 세계의 분단으로 인해 어떤 사상적 질곡이 초래되었는가를 시사한다.

그러한 질곡은 ‘역사문제’를 포함한 온갖 종류의 퇴행과 왜곡을 내포한 다. 일본과 나머지 세계의 거대 분단은 결과적으로 중국처럼 지리적 규모나 내적 다양성 면에서 발생하는 차이와도 다른 성격의 분열과 반목을 초래했 다. 물론 ‘서구근대 따라잡기’라는 기획은 18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에서 도 일반적인 현상이었고 중국 역시 반(半)식민화 과정을 거치면서 그 길을 따랐다. 그러나 일본만은 유독 서구 따라잡기라기보다는 ‘서구 되기’에 가 까웠다. 탈아입구라는 발상은 오랜 시간에 거쳐 구축․진화한 ‘중화주의’와 는 차원이 다른, 근대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한 급조 이데올로기였던 것

15) 이에 관한 논의는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옮김, 뺷제국의 구조: 중심․주변․아주변뺸(도 서출판 b, 2016) 7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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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제국주의에 맞선 대동아공영이라는 ‘허구’도 탈아입구에서 비롯된 거 대분단과 무관치 않은 셈이다. 아무튼 중국과 일본이 각기 표상하는 거대 분단에 대해 장즈창은 이렇게 논했다.

백낙청이 제시한 동아시아 내부의 두 가지 거대분단을 종합해본다면, ‘중국과 그 나머지’ 사이의 분단 중 나머지 지역은 주로 일본과 한반도이며, ‘일본과 그 나머지’ 사이의 분단에서 나머지란 주로 중국과 한반도이다. 즉 동아시아 내부의 거대분단은 실질적으로 중국과 일본 간의 거대분단이라 할 수 있다. 한반도는 그 가운데 미묘한 위치에 처해있다. 남한의 경우 백낙청의 말처럼 친일파와 친 미파가 통치계급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점했기 때문에 “동아시아 나머지 지역에 대해 남한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애매한 태도를 취하였다. 다른 한편 북한은 그 근대사에서 드러나듯이 당연히 중국의 입장에 더 근접해 있었다. 바로 이 점에 서 우리는 ‘중국과 그 나머지’의 분단이 중일 간의 분열 관계로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바로 이 점에서 만약 우리가 ‘일본과 그 나머지’ 분단 뒤에 존재하 는 이데올로기적 전제를 ‘중국과 그 나머지’ 분단에 적용한다면, 그것은 선진과 낙후의 분단, 즉 낙후한 중국과 선진적 일본 사이의 분단이 될 것이다. 중국 내부 의 근대화론자들은 만청(晩晴) 시기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러한 시각으로 중일 관계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중국이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시기조차 “낙후한 자 는 얻어맞아야 한다”는 것을 철저히 증명하는 것이라 보았다.16)

백낙청의 화두를 받은 장즈창의 해석에서 특기할 점은, 동아시아의 거대 분단을 서구 근대에 대한 대응의 차이로 파악하면서 실질적인 분단이 낙후 중국과 선진 일본 사이에 존재한다고 해석한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중국과 일본의 거대 분단에서 ‘그 나머지’가 주로 한반도를 가리키며, 이때 중국과 일본의 기본 대립 구도에 북한은 중국, 한국은 미국에 더 근접한 것 으로 보면서 동북아의 전체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남한과 북한의 지배세력은 각각 미국 및 중국과 밀접한 동맹관계를 지속해왔지만

16) 장츠창, 송가배 역, 「‘거대분단’의 극복과 이상적 동아시아의 가능성 : ‘한중 인문유대 강화’가 지역의 미래에 주는 의미」, 뺷통일과 평화뺸 5:2, 2013, 60~6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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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각자 일정한 자기조정을 거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장즈창의 그림에 중국과 미국의 대결인 동시에 협력이라는 프레임을 추가해보자. 그리고 여기에 중국/북한, 중국/대만, 미국/한국, 한국/일본, 북 한/일본이라는 ‘불안정한 패들’이 더해지면 동아시아의 질서는 어지간히 불 투명한 양상을 띠는 셈이다.

게다가 장즈창이 언급하지 않은 ‘오키나와문제’나 ‘홍콩문제’까지 고려한 다면 ‘그림’은 그야말로 혼돈에 가깝다. 물론 대만을 비롯해 홍콩, 또는 오키 나와는 중국과 관련하여 전혀 다른 범주의 쟁점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작 은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요한 변수들로서 동아시아에 불안정성을 증폭시키는 요인들이다. 이 세 지역의 식민주의역사를 배경으로 가령 남한 이 중국과 수교(1992)하는 순간이 곧바로 대만과의 단교로 이어진 상황을 상기한다면, 그리고 이에 훨씬 앞서 중국을 의식한 일본과 대만의 단교 (1972)까지를 고려한다면 동아시아의 연동적 질서가 갖는 파동의 진폭이 얼마나 큰가를 확인해준다.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동아시아의 국가연동성은 충분히 안정적인 어떤 체제를 형성하기 힘든 성질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중국과 일본의 거대분단에 초점을 맞춰보자.

“낙후한 자는 얻어맞아야 한다”는 루쉰(魯迅, 1881-1936)적 자각에 관한 한, 일본이 가장 선진적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앞서 서술했듯이 그런 선진성이 자기기만을 초래하고 동아시아의 일원으로서의 의식과 책임 을 사실상 방기하도록 했다면 20세기 일본의 정신사는 동아시아 공동체에 결코 모범이 될 수 없다. 20세기 중국은 좀 다른 경우라고 판단된다. 낙후에 대한 자각이야 중국인들도 어느 국민 못지않게 강렬했겠지만 적어도 냉전체 제가 지속되는 시기 동안 해체된 중화체제를 대신하여 동아시아에 좀더 바람 직한 질서를 창출하는 데 중국이 얼마나 기여했는가는 의문이다. 그러기는커 녕 원시적 자본축적의 성격마저 띤 문화대혁명(1966-1976)의 일탈이 단적으 로 말해주듯이 거대한 반(反)근대적 퇴행의 조짐마저 있었고 그로 인한 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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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질곡도 더 깊어졌다.17)마침내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G2시대가 운위 되면서 중국은 ‘얻어맞는 자’의 교훈을 절치부심 학습하여 새로운 향도국(向 導國)으로 부상했다. 일대일로의 이념을 내세운 대국 중국이 동아시아의 화 평에 실질적으로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남아 있는 것이다.18)

그 점에서도 동아시아의 ‘질서’를 엄밀하게 파악하는 지적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1952)에서 로마협정에 따른 유럽경 제공동체(1957)를 경유하여 탄생한 유럽연합(EU, 1993~)과 비교하면 동아 시아의 (이 경우) 무질서가 더 실감된다. 가까운 장래에 유럽연합과 유사한, 화폐 통일에 근거한 단일 경제권역이 우리 주변에 나타날 가능성도 거의 없을뿐더러, 동아시아 국가들을 통어할 초국가적 정치기구의 출현도 요원 한 일이다. 오히려 식민역사의 해석에서 드러나는 갈등이나 조어도(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일 영토분쟁에서 보듯이 역내 무질서도(無秩 序度)는 더 증폭되는 양상이다. 바람직한 역내 평화체제의 구상이 절실해

17)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 문화혁명 등의 성격 규정을 둘러싼 흥미로운 논쟁으로는 특히 Perry Anderson, “Two Revolutions,” New Left Review 61, 2010, pp.1~22; Wang Chaohua, “The Party and Its Success Story : A Response to ‘Two Revolutions,’ New Left Review 61, 2015, pp.1~19 참조. 이와는 별개로 한 가지 지적해 둘 점은, 중국의 비약적 경제 발전과 지구화담론의 범람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중국 지식인들이 ‘아시아의 나머지 세계’에 대한 관심이 더 희박해지고 있다는 자기반성이다. Wang Xiaoming, “The concept of ‘Asia’ In Modern China : some reflections starting with the 2007 Shanghai conference,” Inter-Asia Cultural Studies 11:2, 2010, p.198. 어떤 면에서 왕 샤오밍의 반성은 여전히 동아시아의 거대 분단이 온전히 성찰되고 있지 않음을 가리키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18) 이는 1978년 이래의 ‘신시기’에 이룩한 그 나름의 성취에 은폐되고 망각된 사상관념을 중국 지식계가 얼마나 치열하게 추구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허 자오톈은 “사상의 무의식”이라는 개념으로써 시진핑(習近平, 1953- ) 권력체제를 비 판적으로 점검하고 중국 굴기의 이면을 통찰한 있는데,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 적지 않다. 허 자오톈, 「중국의 굴기와 당대 ‘사상의 무의식」, 뺷창작과비평뺸, 2017년 가을호, 319~336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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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대목인데, 그런 구상은 중․일을 축으로 형성된 거대분단에서 중핵이 랄 수 있는 한반도의 정세를 어떻게 판단하는가에 따라 실행 여부가 판가 름 날 공산이 크다.

“동아시아 내부의 거대분단은 실질적으로 중국과 일본 간의 거대분단이라 할 수 있다. 한반도는 그 가운데 미묘한 위치에 처해있다.”는 장즈창의 지적을 음미하는 것은 바로 그런 맥락이다. 식민지와 내전을 거쳤으나 휴전 상태로―

전쟁의 잠정적 중단 상태로―60년을 넘긴 우리가 아닌가. 장즈창은 중일의 거대분단과 관련하여 한반도의 미묘한 위치라고 했지만 사실은 이것도 무려 다섯 개나 되는 조합, 즉 한/중, 북/중, 한/일, 북/일, 남/북이 개입하는 위치다.

한반도문제는 남북을 중심으로 적어도 나머지 네 개의 조합이 원만하게 조율 되어야 비로소 해결의 단초를 얻을 수 있는 난제다. 게다가 이 조합들의 역학 에 결정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미국을 생략할 수도 없다. 중일의 거대분단이 안고 있는 모순을 성찰하는 데 미국은 상수라는 것이다. 남북관계에서도 미국 의 대(對)아시아/한반도 정책을 어떤 방식으로 고려하느냐에 따라 현실주의 적인 해결책이 가능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것이다. 질서라고도 그렇다 고 혼돈이라고도 말하기 힘든 상황에서 끊임없이 현상태(status quo)를 유지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미국이 담당해왔다면 그 패권에 대한 실사구시적 분석은 동아시아의 바람직한 질서를 모색하는 데도 관건이 된다.

4. 미국과 동아시아 거대분단

미국의 국력이 하향곡선을 그린다 해도 ‘패권의 몰락’은 과장이다. 미국 패권의 해체를 분석적으로 예견한 월러스틴의 좀더 정확한 표현은 ‘쇠락’이 다.19) 그에 따르면 근대 세계체제의 후발주자인 미국은 대략 1873년을 기

19) Immanuel Wallerstein, The Decline of American Power : The U.S. in a Chaotic World (The New Press, 2003); 뺷미국 패권의 몰락뺸, 한기욱․정범진 옮김, 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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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으로 침체기에 접어든 세계경제의 틈새를 비집고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영국은 패권국의 지위를 내주고 1914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30 년 전쟁’에서 미국이 독일을 패퇴시킴으로써 세계체제의 명실상부한 최강 자로 떠오른다. 하지만 ‘미국의 평화’는 기존 패권국들의 패권 싸이클과 비 교하면 단명한 꼴이다. 그 기간이 대략 1945년~1989/1991년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쏘비에트연방의 해체와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역사의 종언’으 로 표상된 자본주의의 최종 승리가 미망임이 드러나면서 미국도 몰락의 길 을 재촉하게 된다는 것이 월러스틴 입론의 골자다.20)

그런데 월러스틴의 독창성은 2차 대전 이후 세계정치 판도, 특히 냉전의 형성과 냉전이 해체되는 과정에 관한 해석에 있다. 미․소 냉전은 표면적으 로는 자유진영 대 공산진영의 체제 대결이었지만 사실은 자본주의체제의 단일 규칙을 따른 경쟁이었고, 미국의 호적수인 소련은 사실상 체제의 하위 파트너였다는 것이다. 세계체제의 ‘최고경영자’로서 미국의 지위는 1945년 2월 얄타협정과 이후 소련의 ‘대무’(對舞)로써 더욱 공고해진다. 그로써 (미 국과 그 ‘우방국들’인) 자유세계 대 (소련과 그 ‘위성국들’인) 공산세계의 냉 전 구도는 더욱 확고해졌다.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열전의 실상도 바로 그 구도에 의해 호도된바, 1989년에서 1991년에 이르는 현실사회주의국가들의 붕괴와 독일 재통일로 인해 ‘공포의 균형’이 결정적으로 무너짐으로써 미국 의 헤게모니도 이울기 시작한다는 논지다.

월러스틴은 1991년 이후 쇠락의 본격적인 징후들을 열거하면서 가장 극 적인 계기로 9․11 사태를 지목했다. 그는 “다음 10년 동안 세계적 사건을 결정하는 미국의 힘은 계속 쇠퇴할 것이라는 데는 거의 의심이 없다”고 단 언하면서 “진짜 문제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기울고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20) 이 대목에서도 2007-2008년 전지구적 금융위기의 진원지가 월가였다는 사실은 기억함 직하다. 그러한 금융위기가 미국 패권의 상징적 쇠락을 가리킨다는 데는 좌우를 막론한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특히 Jonathan Kirshner, American Power After the Financial Crisis (Cornell UP, 201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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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세계와 자신한테 최소한의 손상만 입히면서 우아하게 하강하는 길 을 찾느냐 아니냐이다”라고 결론내린 바 있다.21)그런데 동아시아로 눈을 돌리면 미국의 패권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알다시피 미국과 관련 하여 2009년부터 동아시아에서 운위되는 용어는 G2시대다. 이 용어를 미국 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지만 중국을 ‘세계경영’의 대등한 파 트너로 인정한 오바마 행정부가 단독으로는 세계체제 경영을 감당하기 어 려움을 시인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물론 얄타회담에 낄 자격도 여력도 없었던 중국이 세계체제의 무대에 극 적으로 등장할 것을 예견한 이는 적지 않았다. 중국을 상수로 놓고 기존 세 계 패권의 역사를 수정하려고 시도한 아리기(Giovanni Arrighi)도 그중 하 나다.22)비자본주의적 발전 노선의 가능성으로 집약되는 아리기의 중국 평 가도 따져볼 점이 있지만, 월러스틴의 경우는 세계체제에서 중국이 갖는 - 또는 향후 가질 수 있는 - 잠재력을 평가절하면서 한반도 분단의 복잡성을 간과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그가 동아시아의 정치역학에서 일본의 영향 을 과대평가한 점과도 무관치 않다.23)

아무튼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친 동북아 지형의 식민지 분할은 철저하게 열강의 ‘나눠먹기’로 - 영국(버마), 프랑스(월남), 미국(필리핀) 등

-진행되었지만 한반도에 개입한 미국의 역할은, 적어도 20세기 초반까지는, 대체로 우회적이었다. 19세기 말까지 반(半)식민 상태로 전락한 중국을 두고 -각기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일본 등이- 다툰 자리에서 미국의 지분은 미미했다. 미국이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가르는 계기가 표류 사건 이후

21) The Decline of American Power, 34면; 뺷미국 패권의 몰락뺸, 41면.

22) 가령, Adam Smith in Beijing : Lineages of the Twenty-First Century (Verso, 2007);

강진아 옮김, 뺷베이징의 아담 스미스뺸, 길 2009.

23) 좀더 들여다봐야 할 점이지만, 월러스틴이 중국의 잠재력보다 일본의 국력을 중시하면 서 동아시아의 판도를 짚은 것은 대동아공영권을 구상하고 부분적으로 실현한 왕년 일 본제국의 상(像)이 알게 모르게 작용한 탓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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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이 더 지난 1905년 7월의 가쓰라․태프트(桂․Taft) 밀약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세기 후반이 전지구적 패권의 교체기였고 남북전쟁의 후과를 감당해야 했던 미국이 한반도에 직접 손을 뻗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 나 얄타회담을 기점으로 상황은 달라진다.24)일본의 패망은 동아시아에 미국 이 개입하여 냉전이라는 양극체제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제품을 소비할 유효수효를 창출하기 위한 일환으로 서유럽 전역에 먀샬 플랜을 집행한 것과도 다른 차원의—하지만 남한에서 시행한 것과 유사한—정치적 구조조정을 일본의 패전을 기화로 관철시킴으로써 미 국은 오늘날 동북아 질서의 청사진을 실질적으로 설계했다.

그러한 청사진을 ‘냉전’으로 명명한 것은 그들의(미국+서유럽) 세계지배 전략의 관점이자 해석이었다. 2차 대전 이후 짜인 동서 냉전의 구도가 표면 상 미국(+자유세계) 대 소련(+공산세계)이었지만 동아시아의 지경학은 냉 전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그런데 동북아의 거대분단을 염두에 두고 ‘그 림’을 그릴 때 부각되는 사실은, 2차 대전 이후 일본을 핵심 고리로 삼은 미국의 전면적인 ‘관여’와 그런 미국에 대한 중국의 견제로 인해 동아시아 에는 체제가 아니라 독특한 ‘무질서’가 생겨났다는 점이다. 독특하다고 말 한 것은 그런 무질서가 불안정한 불안정한 불안정한 불안정한 상태로 불안정한 상태로 일종의 패턴을 형성해 왔기 때문상태로 상태로 상태로 일종의 일종의 일종의 일종의 패턴패턴패턴패턴 이다. 그런 패턴도 일단 한반도를 중심에 놓고 해석해볼 필요가 있다. 1948 년 8월 15일, 즉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일은 타율적으로 해방을 맞은 상태에 서나마 한국인들이 이룩한 그 나름의 성취가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여러 제 한 조건들이 따라붙는다. 특히 세계체제의 구도에서 볼 때 그날의 역사적 명암이 확연하다. 남한의 정부수립일은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민족적 생 존 공간을 확보하고 대한민국의 기틀을 마련한 결정적 순간이다. 그러나 동

24) 얄타회담과 관련하여, (독일 같은 전범국가들에 적용된) 점령주의 원칙과 신탁통치안 을 모두 애매하게 놔둠으로써 결과적으로 미국 주도로 전자가 관철되고 그로써 분단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노경덕, 「얄타 회담 다시 보기」, 뺷史叢뺸 87, 2016, 317~349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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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미국이 패전한 일본을 ‘접수’한 상태에서 소련과 중국에 맞서는 사실 상의 전초기지로 남한을 ‘배치’한 시간이기도 하다. 이 구도에다가 한국과 는 또 다른 의미에서 미국의 관리 하에 들어간 대만까지 끼어 넣는다면 식 민주의․제국주의의 과거 때문에라도 (적어도 당시로서는) 결코 온전한

‘한 팀’이 될 수 없었던 한․일․대만이 미국이 짜놓은 장기판의 한쪽에 정 연하게 도열한 형국임이 분명해진다. 물론 이 도열은 일차적으로 양극체제 로서의 냉전이 동아시아에서 관철되는 하나의 잠정적 질서에 불과했고, 얽 히고설킨 20세기 동아시아 지형에서 변주된 - 특히 한반도와 베트남에서의 민족해방투쟁이라는 열전을 동반한 - 갈등과 불화는 미국의 ‘관여’로 인해 한층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25)

여기서 ‘중국과 그 나머지 아시아’ 및 ‘일본과 그 나머지 아시아’라는 동아시 아의 거대분단에 미국이라는 상수를 넣고 다시 생각해보자. 중국과 그 나머지 세계의 분단은 제국으로서의 중국이 동아시아에 군림해온 근대사의 산물이 고, 따라서 그렇게 분단된 데는 미국 자체가 중요 변수로 작용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거듭 강조컨대 20세기, 특히 2차 대전 이후는 사정이 다르다.

미․중 수교(1972) 이후 벌어진, 소련의 뻬레스트로이카로 표상되는 탈냉전 시대에 중국․대만․한국․북한 사이에 새롭게 불연속적인 단절선이 그어 진 데는 일본을 전초기지로 삼아 동북아를 관리하려는 미국의 대 동북아 정책이 결정적이었다. 중국과 그 나머지의 거대분단은 현상으로서 지속되고 있지만, 냉전 이후 중국은 미국을 견제하며 북한과 여전히 그때그때마다 적절 한 만큼의 혈맹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중국과 그 나머지 세계, 즉 대만․한 국․일본 사이에는 온냉을 오가는 격절(隔絶)이 단층처럼 존재한다.

중국이 역학적 중심이 되어 중국과 나머지 세계의 간극이 좁혀지거나 완화

25) 따라서 동아시아에 EU와 견줄 수 있는 차원의 국가연합은 고사하고 그런 연합에 반드 시 필요한 다자간 무역구조조차 튼실하지 못한 책임을 동아시아 국가들 탓만으로 돌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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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 있지 않은 현상은 미국이 한․미․일 삼각안보동맹을 지속적으로 추진 하고 변용해온 역사를 빼놓고 온당하게 해명하기 힘들다. 다른 한편 메이지 유신과 ‘탈아’로 인해 발생한 일본과 나머지 지역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데 미국이 긍정적인 역할만 했다고 보기 어렵다. 일본의 근대화 성공이 동아시아 의 공영(共榮)에 이바지하지 못하고 서양열강을 대리한 아(亞)제국주의 세 력으로 부상하면서 동북아에도 여러 차원의 격절이 발생한 것이다. 아시아 탈출이라는 관념에 기반한 일본의 근대화 성공이 드리운 그림자는 깊고 어두 웠고, 패배의 그림자 역시 못지않은 후과를 남겼다. 1차 대전을 계기로 패권국 으로 발전한 미국(과 그 연합군)에 의해 일본 제국체제가 완전히 해체되었지 만 그런 해체가 좀 더 바람직한 질서로 이어지기보다는- 일본이나 남한 등에 서 식민주의세력이 극적으로 부활하고 북한에서는 교조주의가 패권을 장악 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동아시아 ‘장기 냉전’의 포석으로 이용된 것이다.26) 이상의 논의에 비춰보면, 현재 동아시아에 존재하는 나쁜 현상태(status quo)를 타파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져 있음이 재차 확인된다. 서로 물고물리는 식민지배의 상흔도 그중 하나지만 시야를 넓히면 우리는 ‘미국이라는 문제’와 반드시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미국은 균형자라기보다는 균형의 필수적인 일부이”며, 미․중 어느 쪽도 동아시아에서 패권적 지배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진단을27)한반도의 분단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 구상

26) 그로써 미국에 의해 재건된 패전 후 일본의 민주주의도 충분히 건강하게 성장할 수 없었고, 일본의 정치적 재건은 독일의 패망과는 사뭇 다른 성격의 유산을 동북아에 남겼 다.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은 사실상 냉전체제로 흡수되어 전혀 다른 모습, 즉 미국이 주축이 되는 패권적 구상으로 변용되었다는 혐의마저 걸리는 것이다. 그로써 일본은 동아시아 지역의 협력적 일원이기보다는 미국의 맹방임을 맹목적으로 고집하고 있다. 일본과 나머지 세계 사이에도 19세기 말 메이지 시대의 ‘탈아’로 인해 빚어진 분단 과는 성격이 다른 격절이 조성되었다면, 그에 맞서는 동아시아 연대의 책무는 지난하고 무거울 수밖에 없다. 미국의 책임론을 논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아시아 지역이 EU와 같 은 차원의 국가연합이 될 가능성은 낮게 보면서도 동아시아 연대구축의 희망적 조건들 을 여러 각도로 논한 평문으로는 백낙청, 「‘동아시아공동체’ 구상과 한반도 : 일본의 한 국병탄 100주년을 맞아」, 뺷역사비평뺸 2010년 가을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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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중․미를 중심으로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는 동아시아에 단일한 체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함의 는 의외일 수 있다. 20세기 절반을 지배한 식민주의 질서보다 더 나쁜 체제가 동아시아에 들어서는 것을 막고 바람직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화해/협력 의 공간이 질서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혼돈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더 확실하게 확보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5. ‘촛불혁명’ 이후의 한반도 2018

동북아 차원에서나 한반도 층위에서나 바로 그런 가능성의 일단을 보여준

‘사건’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이다. 김대중정부를 계승한 노무현정부 가 6․15의 실천 강령까지 폭넓게 마련했건만 한미동맹을 철저하게 내치(內 治)에 악용한 이명박/박근혜정부는 남북관계도 벼랑 끝까지 몰아갔다. 돌이 켜보면 두 정권은 본질적으로 분단체제의 타성에 최대한 의존한 수구동맹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두 전직 대통령의 수감에서 역사의 희비극적 반복만을 읽어낼 일은 아니다. 바야흐로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정부가 목하 6.15 의 시대정신을 새롭게 되살려 망가진 남북관계의 복원을 넘어서 ‘남북연합’의 지평을 구체화하는 중이다. 물론 2018년 8월 현재, 장밋빛인 남북관계가 불퇴 (不退)임을 공언하기에는 안팎으로 아직 불안한 장애물들이 충분히 제거되 었다고 보기 힘들다. 당장 미국의 국내정치가 혼미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뿐더러 남북의 교류협력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남과 북 공히 혼란이 가중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조만간 불퇴의 차원까 지 남북관계가 나아가야만 하는데, 지식인의 입장에서 2016년 10월 29일부터 2017년 이듬해 4월 29일까지 이어진 촛불혁명의 의의를 차분히 되돌아보는

27) 이에 관한 논의는 Henry Kissinger, World Order (Penguin Press, 2014) 5-7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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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도 그런 나아감에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리라 본다.28)

종합편성채널 JTBC(2011. 21.1~)의 헌신적인 ‘공영방송’이 촉발시킨 대대 적인 촛불 시위는 전국 차원이었다. 하지만 수도 서울 특유의 집중성과 역동 성이 가세하지 않았던들 지속되기 힘들었을 ‘사건’이기도 했다. 그런데 현재 도 그 여파가 지속되는 시간대지만 정말 중요한 점은, 그것을 우리가 혁명으 로 부르는 이유다. 그간 심증만 있던 박근혜정권의 국정농단이 만천하에 드러 나면서 시민들의 궐기가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퍼졌지만 시위와 항거는 가히 축제의 평화 모드 속에서 진행되었다. 비장한 지사(志士)적 애국심이나 거창 한 운동가적 포부보다는 ‘저 사람들이 길바닥에서 저리 애쓰고 있는데 나라도 가서 머릿수를 채워줘야겠다’는 심정으로 시위에 참석한 이들이 대다수였고, 그처럼 ‘작은 마음’ 나누기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와 이후 2017년 5월 9일 보궐선거로 치러진 대선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당시는 잘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과연 혁명에 맞먹는 변화 를 이뤄냈다’는 느낌이 들만도 했다. 그 점은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 령에 대한 탄핵 인용부터 5월 9일 궐위에 의한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 극 도의 혼란에 빠질 수도 있는 위험이 상존했던 - 기간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대구․경북․경남의 상당수 시민도 그러했지만 전 지역의 민심이 촛불을 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민심의 역동성도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6․10항쟁을 잇는 남한 변혁운동의 연속선상에서 생각해

28) 그렇게 촛불혁명의 참뜻을 되새기면서 북핵문제도 단시간의 해결책이 통하기 어려운, 중장기적인 정책구상을 요하는 것임도 적시함직하다. 이에 대해 백낙청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핵무기를 가지고 있을 때 비핵화하는 거하고 핵시설은 있지만 아직 핵무 기는 없는 상대를 설득해서 안 만들게 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예요. 훨씬 어려운 문제 입니다. 이 어려운 문제를 너희가 먼저 비핵화 하면 도와주겠다 하는 건 괜히 해보는 소리고, 그렇다고 경제지원하고 뭐 해주면 핵무기 다 내놓지 않을까? 저는 그것도 쉽지 않다고 봐요. 저는 남북연합 건설과정을 포함해서 동북아 차원의 지역협력체제, 거기다 가 미국․일본과의 국교정상화, 경제협력과 사회․문화교류, 이런 게 전부 복합적으로 작용해야지 겨우겨우 달성할 수 있는 과제라고 봅니다.” 좌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 으며 어디로 가야 하나」, 뺷백낙청 회화록 6 : 2007-2012뺸 (창비, 2017), 55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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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일이 중요하다. 물론 촛불혁명 자체의 획기적 독자성을 강조하고 그 과정을 시기적으로 세분해서 평가하는 일도 긴요하다 . 하지만 그같은 작업 이 쇄말(瑣末)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큰 틀에서 지난 60여 년간 온 갖 우여곡절로 점철된 시민역량의 성숙과 수구보수의 점진적 몰락이라는 궤적을 병행하여 추적․관찰하는 거시 분석이 절실한 실정이다.29)

‘박근혜 대통령 퇴진운동’을 촛불혁명으로 부르는 것이 단순히 시민들의 궐기로써 기존 권력을 축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20세기 후반기 한국 시민 항쟁을 이어받은 촛불혁명의 진정한 차별성은 보통사람과 운동가/혁명가 의 구분이 있을 수 없었던, 선거를 통한 합헌적 절차를 혁명에 준하는 시민 들의 힘으로 차근차근 강제한 과정 자체에 있다고 본다. 시민단체들의 연대 체인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 2016. 11.9 공식 발족)의 주 도가 있었지만, 그 주도력이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 시민들의 참여를 북돋 는 무대의 제공에 국한되었다. 시민들의 열망을 앞장서서 뒷바라지한 것이 지 ‘퇴진운동’을 지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바로 그 점이 그간 축적된 한국 시민운동의 저력이요 ‘퇴진행동’이 시민들의 전폭적인 호응을 받은 요 인이라 할만 했다.

그렇다면 일상 속의 - 아니, 일상이 흐트러지지 않았기에 가능한 - 혁명

29) 그러한 분석에 관한 한, 한반도 양국체제론을 본격적으로 주창한 김상준 교수의 관점에 동의하기 어렵다. 그는 4․19혁명 이후(1960-1987) 및 87년 6․10항쟁 이후(1987-2016) 의 흐름을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장기(長期) 매커니즘”으로 일반화했지만 그 역사적 시간들은 그렇게 일반화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역사에 어떤 철칙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필자는 몹시 더디고 착잡한 과정을 통해서나마 한국의 민주주의는 한걸음 씩 앞으로 나아갔다고 본다. 그 과정을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과정”으로만 인식한다면

’민주‘를 위해 분투한 숱한 사람들의 노고는 어찌되는 것인가. 김교수의 논제는 일종의 연역적 순환론에 가까운데, 책상 위의 관념이라는 비판에 취약한 것 같다. 김상준 교수의 논의는 「2016-2017 촛불혁명의 역사적 위상과 목표 : ‘독재의 순환고리 끊기’와 ‘한반도 양국체제 정립」, 뺷사회와이론뺸 31, 2017, 63~90면 참조. 김상준 교수의 발상에 대한 비판 적 논평으로는 이일영, 「양국 체제인가 한반도 체제인가」, 뺷동향과전망뺸 2018년 겨울호, 9~20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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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로 촛불혁명임을 좀더 치열하게 성찰해야 할 과제가 제기된다. 혁명이 으레 떠올리게 하는 피와 공포, 파괴와 혼란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부질없이 탄핵 국면에서조차 폭력이냐 비폭력이냐, 혁명이 냐 아니냐는 식의 논란을 낳았지만 촛불혁명은 ‘구원’이라는 것도 실로 일 상에서 온다는 사실을 실증한 희귀한 사건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군 기무사령부가 작성한 - ‘실행 여부’를 두고 정치권에서 갑론을박을 벌였 던30)- ‘촛불시위 계엄령’ 문건이 웅변하듯이,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 태로운가를 시민의 입장에서 등골 서늘하게 되새겨야 하리라 본다. 일상성 자체는 꽤나 낡은 개념이지만 필자는 촛불혁명의 세계사적 의의도 일상성 의 발본적 성찰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프랑스혁명 같은 고 전적 혁명이나 러시아혁명 같은 계급혁명과 촛불혁명의 차별성도 더 숙고 해야 할 쟁점이다. 다른 한편 급변하는 정세일수록 혁명의 일상화가 도대체 무엇일 수 있을까를 더 지혜롭게 생각해야 한다. 어떤 경우든 세상을 바꾼 답시고 이소성대(以小成大)를 게을리하는 일은 없어야 하리라 본다. 그럴 때 ‘적폐청산’이라는 것도 단번에 완수될 수 없고, 그렇게 완수되어서도 안 되는 성질임이 부각된다. 정신에 스며들어 자신이 노예임을 망각하게 만드 는 것이야말로 적폐의 진짜 모습이지만 지금껏 승자독식으로 귀결되는 선 거법의 개정은 말할 것도 없이, 부분적인 개헌조차 추진하지 못하는 국회의 기득권적 구태가 그렇고, 변화의 열기를 온전히 수렴할 수 있는 시민참여의 제도 장치들도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018년 6․13지방선거의 결과가 그리 나타난 것 역시 바로 그 점을 시민들 이 염려했기 때문이 아닐까 . 물론 야당의 참패를 두고 국민이 제1야당을 탄핵했다는 말도 야당 일각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현재진행형인 촛불혁명

30) 그같은 입씨름 자체에 대한 일침으로는 이필렬 교수의 칼럼 「계엄을 가볍게 여기는 자들」, 뺷경향신문뺸(2018.7.2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7262023005&cod e=990100#csidx5ca926d009dbbe18f534160feb2e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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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한탄은 박근혜전대통령이 탄핵되었을 때 당시 집권여 당인 새누리당도 - 탄핵소추안을 두고 분열하면서 투표한 여당인 그들도! - 사실상 탄핵대상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철저히 망각한 코믹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반도에 움트는 평화의 기운을 자가당착적으로 외면한 이들을 6․13지방선거의 민심이 심판한바, 보수가 아닌 수구냉전세력에 대한 탄핵이 라는 것도 바로 그런 아이러니로 풀 때 제2차 탄핵은 ‘문재인 효과’에 편승하 면서 촛불혁명의 과제들이 갖는 절박성에 온전히 호응하고 있지 못한 집권당 에 대한 경고나 다름없다. 수구냉전세력의 자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6․

13지방선거의 민주당 압승에서 최종 승자는 시민이었던 것이다.

그럴수록 과정으로서의 촛불혁명의 성패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 남 북관계의 진전에 있음을 냉철하게 생각해야 한다. 남북이 한반도의 주인임 을 그야말로 공복(公僕)의 정신으로 실천하는 문재인정부가 주변국들의 극 도로 복잡한 계산속을 헤아리면서 세우고 있는 남북관계의 이정표들이 무 엇을 가리키고 있는가는 분명하다. 그것은 분단체제의 극복과 한반도 평화 체제의 구축이다. 어떤 경우든 한반도 종전선언을 포함한 평화의 제도화는

‘점진적 통합’을 위한 설계로서의 - 목하 진행 중인 - 남북연합이라는 발상 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전쟁이나 그에 준하는 파국이 아닌 한, 압박/제재와 대화/화합이라는 딜레마를 돌파할 유일한 방안은 동 북아 평화구축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남북연합의 단계적 추진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31)

31) 이 대목에서는 이명박정부가 한창 ‘흡수통일’의 꿈을 꾸었을 당시 백낙청이 발표한 평 문 「포용정책 2.0을 향하여」(뺷창작과비평뺸 2010년 봄호, 71~94면)의 핵심을 상기함직 하다. ‘engagement policy’를 포용정책으로 옮기는 것은 영어를 떠나 국제 정세나 한반 도의 실상에 비추어서만도 적절한 번역이 아님은 백낙청 자신이 자상하게 설명한 바 있다. 경제력의 압도적인 우위를 전제한 ‘포용’이라면 말이 되지만 남북의 특수한 관계 를 고려하면 그런 식의 포용이 북에 먹혀들 리 없다. 경제상의 격차에 대한 인식을 넘어 서 이런저런 차이를 서로 쾌히 인정하면서 남이 북이 교섭하는 지혜가 여전히 절실한 실정이다. 「포용정책 2.0을 향하여」의 골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한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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