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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의 젠더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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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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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정화*

목 차

1. ‘정동적 전회’와 감정의 문제 2. 수치와 젠더

3. 수치와 침묵

4. 그녀의 수치와 공감의 한계 5. 나가며

<국문초록>

브라이언 마수미와 이브 세즈윅은 권력관계의 장으로서의 문화와 사회적 의미 화로부터 자유로운 정동 개념을 이론화함으로써 ‘정동적 전회’를 견인했다. 이 글 은 정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마수미와 정동의 자유로운 이동성을 강조하는 세즈 윅의 정동론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견지하면서 감정의 사회성과 공감의 한계를 환기시킨다. 이를 위해 이 글은 수치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어, 수치가 젠더에 따 라 어떻게 달리 작동하는지 고찰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백인 작가 쿳시 의 뺷치욕뺸은 수치의 감정이 젠더화되어 있으며 타자와 감정적 동일시를 경험하는 우리의 공감 능력이 무한하지 않다는 점을 숙고하게 해주는 소설이다. 뺷치욕뺸에서 수치는 (마수미와 세즈윅이 믿는 것처럼) 자유로운 이동성과 무제한의 전염성을 가지고 이데올로기와 문화를 초월하지 못한다. 뺷치욕뺸은 우리의 감정이 무한정으 로 자유롭고 유동적이며 개방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의미 속에서 작동하 는 것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뺷치욕뺸이 제공하는 통찰은 공감 능력이 타인과 의 경계를 허무는 데 필요한 전부가 아닐 수 있기 때문에 주체들이 감정과 맺는 관계에 차이를 만드는 사회․문화적 힘들을 세심히 살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주제어 : 수치, 젠더, 감정, 정동, 느낌, 공감, 쿳시, 뺷치욕뺸 * 조선대학교 영어교육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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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동적 전회’와 감정의 문제

최근 한국사회는 감정이 열렬히 표출되고 격렬하게 충돌하면서 사회를 재조직하고 문화를 변화시키는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우리는 특정 집단이나 개인을 향한 혐오와 분노, 불안, 공포, 절망, 기쁨, 혹은 사랑이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삶을 강력하게 추동하고 있음을 일상의 영역에서 목격한다. 학문의 영역에서도 근래 들어 정동(affect)과 감정(emotion)이 진지한 탐구의 대상으 로 부각되고 있다.1) 다양한 감정의 발생과 파열, 접합과 순환이 본격적인 학문적 관심사로 부상한 것은 1990년대 중반의 ‘정동적 전회’(affective turn) 에 힘입은 바 크다. 특히, 1995년에 나란히 발표된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의 「정동의 자율성」(“The Autonomy of Affect”)과 이브 세즈윅 (Eve Kosofsky Sedgwick)의 「인공두뇌학의 주름에 있는 수치 : 실번 톰킨스 읽기」(“Shame in the Cybernetic Fold : Reading Silvan Tomkins”)는 감정의 문제를 심리나 문화의 영역으로부터 물질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면서 ‘정동’으 로의 ‘전회’를 견인했고, 이후 다양한 갈래로 전개되고 있는 정동 연구와 감정 연구에 지속적인 영감을 주고 있다.

물론 감정에 대한 관심이 갑작스럽게 생겨났다고 할 수는 없다.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가 「느낌의 구조」(“Structures of Feeling”)를 발표한 것이 1970년대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가 뺷기나긴 혁명뺸(The

Long Revolution, 1961)과 같은 전작에서 이미 ‘느낌의 구조’를 자신의 이

론에서 핵심적인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있었다는 것만 떠올려 보더라도 그 렇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라 고 믿는 페미니즘과 젠더 연구는 전통적으로 여성과 결부되어 온 감정과

1) affect, emotion, feeling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의할 것인지에 대해 이견이 있는 것만큼이 나 이들의 우리말 번역에도 혼란이 있다. affect의 번역으로는 ‘정서’ 또는 ‘감정’이 사용되 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정동’이 통용된다. 유사한 의미로 이해되기도 하는 emotion은

‘정서’ 혹은 ‘감정’으로, feeling은 ‘감정’이나 ‘느낌’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각각 정동(affect), 감정(emotion), 느낌(feeling)으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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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문제에 오랫동안 천착해 왔다. 그러나 ‘정동적 전회’는 느낌의 문제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증폭시켰을 뿐 아니라 이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이전과는 구별되는 변화의 지점을 나타낸다.

이 변화는 거칠게 말해 문화에서 물질로의 이동이다. 페미니즘과 젠더 이론 은 감정을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의 관련성 속에서 살피면서 감정의 문제를 문화의 일부로 다루어 왔다. 또 윌리엄스가 ‘느낌의 구조’에 대한 생각을 개진 한 곳이 뺷기나긴 혁명뺸의 「문화의 분석」이라는 제목의 장(chapter)인 것에서 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윌리엄스에게 ‘느낌의 구조’는 “한 시대의 문 화”(93)와도 같은 것이다. 그는 ‘느낌의 구조’가 “‘구조’라는 말이 암시하는 바대로 견고하고 분명하지만, 우리 활동 가운데서 가장 섬세하고 파악하기 힘든 부분에서 작동하고 있다”(93)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이 의미하는 바는

「느낌의 구조」라는 이후의 글에서 보다 명확해 진다. 「느낌의 구조」에서 그는

‘세계관’ 혹은 ‘이데올로기’ 보다 비공식적이고 생생한 산(lived) 경험의 측면 을 강조하기 위해 ‘느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음을 밝히고 있다(132). ‘느낌의 구조’는 “실제로 살고 느낀 대로의 의미들과 가치들”이 서로서로와 그리고 보다 체계화된 신념들과 뒤엉키며 만드는 관계를 포괄하는 것으로, 이데올로 기가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미묘하고 유동적이며 역동적인 문화의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Structures” 132). 윌리엄스는 ‘느낌의 구조’를 통해 문화 분석이 이데올로기를 배제해서는 안 되지만 그것에 국한되어서도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는 셈이다. 요컨대, ‘느낌의 구조’는 사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의 사회성, 고유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보이는 의식들과 감정들의 상호 관계 성을 “한 시대의 문화”로 규명하기 위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수미는 우리가 지각하거나 의식하기 전에 효과로 드러나는 자율 신경계의 반응으로 정동을 개념화함으로써, 느낌의 문제를 문화와 분리한다.

마수미에게 정동은 자율적이면서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강렬도’(intensity)이 며 언어적 매개나 주체의 경험이 개입되지 않은 에너지 혹은 활력이다. 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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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면, 정동은 지각이나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으로, 사회적 의미화의 결과인 감정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정동이 사회․언어적으로 “제한되지 않 은”(unqualified) 강렬도로 존재하는 반면, “감정은 제한된 강렬도”(Massumi 88)이기 때문이다. 마수미가 보기에, 감정은 잠재성으로 존재하는 정동을 “포 착”(capture)하고 사후적으로 의미화해 “종결”(closure)시킨 사회․언어적 고착의 결과이다(96).

마수미는 이처럼 “정동과 감정의 차이를 이론화하는 것은 중요하다”(88) 고 주장한다. 마수미에게 정동과 감정의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정체성 정치학(identity politics)의 바깥에서 몸의 문제를 이해하고자 하기 때문이 다. 그는 사회 구성주의(social constructivism)가 ‘담론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는 “문화적 유아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는 한편(100), “이데 올로기 이후의 포스트모던 권력을 재고하기 위한 핵심어”로 정동을 제안한 다(104). 마수미는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권력의 작동을 포괄적으로 설명하 지 못한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정동 개념을 통해 사회적 의미망에 포획되지 않고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몸과 정동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정동의 자율성”에 대한 마수미의 강조는 몸과 느낌의 문제를 인식론의 영 역에서 존재론의 차원으로 가져온다. 즉, “정동적 전회는 담론, 인식론, 문 화와 같은 핵심적 개념에서 생각, 존재론, 물질성으로의 이동”(Pedwell and Whitehead 117)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마수미의 정동 개념이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의 정동론과 질 들 뢰즈(Gilles Deleuze)의 스피노자 해석에 정초해 있다면, 세즈윅의 정동론 은 미국 임상 심리학자인 실번 톰킨스(Silvan Tomkins)의 뺷정동, 이미지, 의식뺸(Affect, Imagery, Consciousness)의 재해석을 통해 발전된 것이다.2)

2) 톰킨스는 1962년부터 1992년까지 네 권에 걸쳐 뺷정동, 이미지, 의식뺸을 출판하면서 정동 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를 발표했다. 그러나 톰킨스의 정동 연구는 세즈윅이 재조명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인문학 연구자들의 관심을 비켜갔다. 세즈윅의 재조명 이후, 톰킨스는 정동 연구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특히 수치에 관한 연구에서 중요하게 참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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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이론가로 잘 알려진 세즈윅이 주목하는 것은 톰킨스의 정동과 충동 (drive)의 구분이다. 특히 그녀는 (예컨대 식욕-음식처럼) 충동과 그 대상의 결합이 한정적인 것과 달리, 정동이 어떤 대상과도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 다는 점을 강조한다. 세즈윅에 따르면, “정동은 다른 정동들을 포함해 사물, 사람, 관념, 감각, 관계, 활동, 야망, 제도, 그리고 많은 다른 것들과 결합할 수 있고 결합한다. 그래서 분노로 인해 흥분하거나 수치로 인해 혐오를 느 끼거나 기쁨에 놀랄 수 있다”(Touching 19). 달리 말해, 분노와 흥분, 수치 와 혐오, 기쁨과 놀라움 같은 정동들은 서로 결합할 수 있고, 내가 느끼는 기쁨이 타인과 결합해 그에게 전염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무제한적 인 결합력을 가진다는 점에서 세즈윅의 정동은 자유롭고 전염성이 있다.

“정동의 자유”(Touching 19)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세즈윅의 글에서 주목 할 또 다른 점은 그녀가 정동을 선척적인 것으로 보는 톰킨스의 입장을 옹호 하면서,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거부하는 사회 구성주의를 일종의 비평적 유 행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비판은 그녀가 대표적인 퀴어 이론 서인 뺷벽장의 인식론뺸(Epistemology of the Closet)의 저자라는 사실을 떠 올릴 때 다소 의외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세즈윅은 이론을 곧 반-생물학 주의와 동일시하는 학문적 풍토를 개탄하고, 어째서 비평이 이론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자연적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담론적으로 구성되었다’

고 주장해야 하는지 따져 묻는다(“Shame” 513). 문화연구의 대두와 더불어 본질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일종의 학문적 ‘상식’이 된 때, 세즈윅의 정동 이 해는 획일적인 반-본질주의에 대한 비평적 문제제기로도 읽힌다.

마수미와 세즈윅은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해 생리학적이고 생물학적인 것으 로서의 정동 개념에 도달한다. 이들의 정동 개념은 (자신들의 학문적 자양분 이기도 한) ‘문화적 전회’(cultural turn) 혹은 “후기구조주의가 대표하는 언어 로의 전회”에 대한 반발의 성격을 갖고 있다(Hemmings 554). ‘정동적 전회’

를 이끈 두 대표적인 이론가인 마수미와 세즈윅의 정동론을 북미 인문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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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과정 속에 위치시키는 것은 이들의 정동 개념 자체가 특정 시기의 학문적 풍토를 맥락으로 하는 문화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물론 정동으로의 ‘전회’(turn)가 문화 이전으로의 ‘회귀’(return)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수미와 세즈윅은 정동의 ‘자율성’과 ‘자유’가 담론과 이데올 로기에 완전히 갇히지 않는 주체와 주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보다 창조적인 이해의 지평을 열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마수미와 세즈윅은 새로운 방법론 보다는 새로운 학문적 태도를 옹호하고 있다”(563) 는 클레어 헤밍스(Clare Hemmings)의 해석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들 이 옹호하는 것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것 이외의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에 가까운데, “문화 바깥에서 무엇인가를 찾아야 찾아야 찾아야 찾아야 한다찾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문화 밖에 한다한다한다 무엇인가가 있다고 믿어야 믿어야 믿어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Hemmings 563).믿어야 한다한다한다한다

이들의 정동론은 주체와 몸을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설명하는 이 미 알려진 방식을 거부하고 정동의 ‘예측 불가능한’ 이동성을 선호한다. 그 런데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정동을 의미화 과정에 편입시키지 않고 분석 하는 것은 정말 가능한가? 전의식적(preconscious)이고 재현되지 않고 서 사화되지 않은 정동에 대해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사회․문화적 감정으 로 해석되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우리는 정동의 가치가 그것의 자율성이 아니라 비자율성에 있음을 직시하고 “사회적 의미 바깥에 있는 것으로서의 정동에 대한 동시대의 매료”(Hemmings 565)를 경계하라는 헤밍스의 충고 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3)만약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원초적인

3) 실제로, 근래에 와서 정동 연구는 다양한 정도로 문화 연구와 결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라 아메드(Sara Ahmed)는 뺷감정의 문화 정치학뺸(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에서 “감정의 사회성”(8)을 강조한다. 그런가 하면, 엘스페스 프로빈(Elspeth Probyn)은 정동은 “생물학적이고 생리학적 성격”을 갖는 반면, 감정은 “문화적 사회적 표현”이라고 구분해 설명하면서도(11), 둘 중 하나를 선호하기 보다는 피에르 부르디외 (Pierre Bourdieu)의 하비투스(habitus) 개념을 원용해 정동과 감정의 통합을 꾀하는 절 충적 입장을 취한다. 국내에서는, 지난 몇 년간 정동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던 것만큼이나 뺷문화과학뺸(2016년 여름호)이 ‘정동과 이데올로기’ 특집에서 개진한 것과 같은 정동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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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로서의 정동이 사회․문화적 감정으로 지각되고 해석되고 재현되는 이행의 과정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명호가 ‘문화연구의 감정론적 전 환’을 제안하면서 주장하듯이, “정동이 감정으로, 감정이 정동으로 이동할 때 발생하는 복합적 과정을 분석하는 것”(131)이야말로 오늘날의 문화 연 구에게 주어진 과제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정동 연구로부터 감정의 중요성 에 대한 통찰을 얻으면서도, 정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마수미와 정동의 자 유로운 이동성을 강조하는 세즈윅의 정동론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견지 하면서 감정이 사회․문화적으로 기입되고 해석되고 관리되는 방식에 초 점을 맞추고자 한다. 특히, 이 글은 존 쿳시(J. M. Coetzee)의 소설 뺷치욕뺸 (Disgrace, 1999)이 수치(shame)의 젠더화된(gendered) 작동을 이해하는 데 어떠한 통찰을 주는지 살펴볼 것이다.4) 이를 위해서는 우선 수치와 젠 더의 관계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 수치와 젠더

수치는 감정이 단지 한 개인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 개인과 사회가 뒤얽히는 복잡한 작용이라는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수치 에 관한 연구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것처럼, 수치는 무엇보다도 나도 모르 게 달아올라 화끈거리는 얼굴, 얼굴을 가린 두 손, 푹 숙인 고개, 혹은 시선의 회피와 같은 몸의 언어로 표현된다. ‘가리다’(to cover)라는 뜻의 ‘shame’의 어원(Norberg 180)이 알려주는 바대로, 수치심은 치부의 노출에서 비롯되며 자신의 몸을 세상으로부터 숨기고 싶은 마음으로 나타난다. 수치의 효과가

에 대한 비판적 점검도 눈에 띈다.

4) Disgrace의 우리말 번역본은 뺷추락뺸으로 출간되어 있고, 연구자들은 이 소설의 제목을

‘추락,’ ‘수치,’ 혹은 ‘치욕’ 등으로 옮기고 있다. 이 글에서는 disgrace의 의미와 ‘수 치’(shame) 사이의 유사성과 미묘한 차이를 함께 고려해 ‘치욕’으로 번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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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것은 수치에서 문제시되는 것이 주체와 자신과의 관계 자체이기 때문 이다. 즉, “수치에는 나의 행동 이상이 걸려 있다”(Ahmed 105). 수치심은 특정 행동의 실패로 인한 낭패감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에 대한 감정을 근본적 으로 바꾸어 놓는다. 수치에서는 내가 한 어떤 나쁜 행동이 곧 내가 나쁜 존재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적 “자기 인식”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Ahmed 105). 수치는 주체가 자신과 맺는 관계를 전면적으로 변화시키면서 스스로를 지우려는 자기 소거(self-effacement)의 몸짓으로 표현된다.

이처럼 수치는 들키고 싶지 않은 것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극히 내밀한 감정이지만, 또한 “가장 사회적인 감정”(Biddle 227)이기도 하다. 아메드, 프 로빈, 제니퍼 비들(Jennifer Biddle)을 비롯한 연구자들은 이와 같은 수치의 양가성, 즉 매우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감정이라는 점을 수치의 주된 특징으로 꼽는다. 사실, 수치의 양가성에 대한 강조는 톰킨스의 정동론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톰킨스는 정동을 9가지로 구분하고 수치를 “부정적 정동”(negative affects) 중 하나로 중요하게 분석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수치를 “부정적 정동”으로 분류하면서도 이를 관심(interest)과 짝을 이루어 연결된 감정으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톰킨스에 따르면, 수치는 “관심 이나 기쁨의 불완전한 감소”로 인해 활성화되는 정동으로, “관심이나 즐거움 이 활성화된 이후에만 작동한다”(123). 즉, 애초에 나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킨 대상만이 나에게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취약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세상과 단절되고 싶은 수치의 순간은 다른 한편으로 세상에 대한 나의 관심을 방증하는 것이 된다.

수치가 사회적인 감정이라는 점은 수치심에는 감추고 싶은 치부를 목격 하는 타인이 항상 연루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명확해 진다. 아메드의 표현을 빌면, 수치는 항상 ‘타인 앞의 수치’이다. “감정으로서의 수치는 목격자를 필요로 한다. 주체가 홀로 있을 때 수치를 느낀다 하더라도, 스스로와 관련 해 주체가 취하는 것은 타인의 상상된 시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Ahm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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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달리 말해, 나는 내 앞에 실재하거나 혹은 상상된 타인의 시선에 비추 어 수치스러운 존재로 발각된다. 아메드는 수치의 양가성에 대한 톰킨스의 통찰을 발전시켜 주체가 수치의 목격자와 맺는 관계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 니라고 설명한다. 주체에게 수치를 유발하는 목격자의 시선은 주체가 중요 시하는 (톰킨스 식으로 말하자면, 주체의 관심을 끄는) 시선이라는 의미에 서, “이상적인 타자의 응시”(Ahmed 106)라고도 할 수 있다. 수치심은 주체 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가치나 기준에 실패했을 때 유발되고, 자신이 수치스 러워한다는 것을 타인에게 들킬 때 한층 증폭된다. 따라서 수치는 주체의 실패를 통해 그(녀)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이처럼 수치의 감정에 핵심적인 목격자의 시선은 어떻게 젠더화되어 있는 가? 주체의 수치를 목격하는 타인의 시선이 “이상적인 타자”의 시선이라면, 이 시선은 무엇이 수치스러운 것인지를 규정하는 규범적인 시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캐서린 노르베리(Cathrine Norberg)의 언어학적 연구는 이 규범 적인 시선에 젠더가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뒷받침해 준다. 노르베리는 1984년부터 1994년까지 10년간 영국 국립 코퍼스 (British National Corpus)에 수집된 1억 개의 영단어(문어 90%, 구어 10%)를 분석한 결과, 수치와 그 파생어들(shame, ashamed, shameless, unashamed) 이 젠더에 따라 달리 사용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단어들이 여성에 관해 사용된 예(‘여성의 수치’)의 44%가 성(sexuality)과 관련된 의미인 반면, 남성 에 관해 사용된 예(‘남성의 수치’)의 경우 10.5%만 성과 관련되고 52.5%는 부도덕성과 관련된다는 것이 그녀의 핵심적인 연구 내용이다. 그녀의 연구는

‘여성의 수치’와 ‘남성의 수치’가 달리 유발되고 재현될 뿐 아니라 다른 기능과 효과를 갖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성의 수치’는 “영구적이고 보통 체화되어 있고(embodied) 성적으로 코드화”되어 있는 반면, ‘남성의 수치’는 “일시적이 고 몸과 분리되어(disembodied) 있다”(Norberg 180). ‘여성의 수치’가 몸에 각인되어 회복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남성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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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는 “불쾌하지만 사회적 삶의 정상적인 측면”으로서 도덕적 삶을 돕는 일종 의 순기능을 갖는다(Norberg 180).

노르베리의 연구는 수치의 이해에 젠더가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함을 시 사한다. 이 글의 남은 지면에서는 수치와 젠더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숙고하는 한 방편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태생의 백인 작가 쿳시의 뺷치욕뺸 이 제기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한다. 뺷치욕뺸은 뺷마이클 K의 삶과 시대뺸(Life and Times of Michael K, 1983)에 이어 당시로서는 전례 없이 한 작가에게 두 번째 맨 부커상(The Man Booker Prize)을 안겨준 소 설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종식 이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배경으 로 벌어지는 두 가지 수치스러운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그 하나는 52세 백 인 남자 교수인 데이비드 루리(David Lurie)가 자신의 수업을 수강하는 유 색 인종 여학생 멜라니(Melanie)와 강간으로 여겨질 수 있는 성관계를 가 진 결과로 겪게 되는 일련의 추락이다. 또 다른 하나는 루리의 딸이자 레즈 비언인 루시(Lucy)가 세 명의 흑인 남성들에게 윤간 당한 사건이다. 소설은 어느 정도 이 두 사건을 겹쳐 읽도록 유도하고 있지만, 루리의 추락과 루시 의 이야기를 나란히 놓는 독법에 저항하면서 먼저 루리의 수치와 침묵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3. 수치와 침묵

케이프 기술 대학(Cape Technical University) 교수인 루리는 원래 문학 을 전공했으나 대학구조조정의 여파로 주로 커뮤니케이션 관련 수업을 담 당하며 교수진의 사기진작을 위해 1년에 한 과목씩 개설하도록 허용되는 전공 수업으로 영국 낭만주의 시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이 수업을 수강하 는 멜라니를 유혹하고, 루리의 시각을 대변하는 서술자의 우호적인 묘사를 빌더라도 “딱히 강간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원치 않았던”(25) 것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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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분명한 성관계를 갖는다. 강간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이 사건은 그것 자 체로 여러 측면에서 문제적이지만, 소설이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명백하게 문제적인 루리의 성관계보다는 그가 이 사건의 결과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루리는 공개적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문을 발표하는 조건으로 교수직 을 유지시켜 주겠다는 대학의 타협안을 거부하고, 대신 “침묵할 자유”(188) 를 고집하면서 학교를 떠난다.

이와 같은 루리의 선택은 수치의 표현과 공적인 사과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 다. 뺷치욕뺸의 배경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맥락에서 보면, 그의 침묵은 공적 고백을 대가로 사면을 약속함으로써 정의 구현보다 진실 규명을 우선시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의 한계를 꼬집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5)사면을 전제로 한 수치의 고백이 갖는 문제에 대해서는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s)에 대한 호주 정부 의 사과와 잇따른 유감 표명에 관한 아메드의 논의에서 유용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6)아메드는 사과를 수행적 발화(performative utterance)로 이 해하면서, 사과는 단순히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질 것을 약속하는 일종의 “정치적 행위”이며, 그 행위는 사과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반응에 달렸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사과에 부합하는 행동 을 하겠다는 미래지향적인 결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113-20). 뺷집으로 데려오기뺸 보고서 서문에 표명된 것과 같은 사과에 대해 아메드가 비판하는 것은 잘못의 공적 고백을 통해 수치를 (과거에는 실패했으나 이 실패를 통해 더욱 분명해진) 이상에 대한 자부심으

5) 이러한 해석의 일례로 제인 포이너(Jane Poyner)의 「뺷치욕뺸에 나타난 진실과 화해」

(“Truth and Reconciliation in Disgrace”)를 참조할 것.

6) ‘도둑맞은 세대’는 1905년부터 1970년 경 까지 호주 정부에 의해 가족들에게서 강제로 분리되어 백인 가정에 위탁, 격리되었던 호주 원주민과 토레스(Torres) 해협 섬 아이들 을 가리킨다. 1997년 뺷집으로 데려오기뺸(Bringing Them Home)라는 이들에 대한 진상 조사 보고서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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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치환함으로써 사과를 현재에서 완결시키려는 시도이다.

루리의 침묵은 수치를 공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대신 사적인 속죄를 택하겠 다는 의사표현이다. 때문에, 뺷치욕뺸에서 “공적인 치욕 혹은 수치”와 “사적인 은총 혹은 구원”의 갈등에 주목하면서(Kossew 155), 루리의 추락에서 참회 의 윤리적 차원을 발견(Kossew 158)하는 평자들도 있다. 사실, 뺷치욕뺸은 진 실성과는 무관하게 사과문을 발표하라는 동료교수의 설득을 단호하게 거부 하고, 동물보호소에서 죽어가는 개들의 안락사를 도움으로써 “죽는다는 것의 치욕”(143)을 일상적으로 상기하며 살아가는 루리의 속죄 방식에 어떤 윤리 적인 의미를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모욕을 감내하는 사적인 방식의 참회와 속죄로 이루어지는 루리의 서사는 앞서 소개한 노르베리의 언어학적 연구에서 ‘남성의 수치’로 명명된 것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루리의 수치는 규범을 일탈한 대가로 치루는 일종의 “정동적 비용”(Ahmed 107)으로 경험되기 때문에 일시적이며 궁극적으로 회복 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

루리의 치욕은 멜라니와의 성관계에서 시작되기는 했지만 그것 자체에 의해 유발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루리가 느끼는 수 치는 멜라니와의 성관계 자체보다는 그로 인해 “그의 이름에 달라붙은 추 문”(149)과 명예의 실추와 관련되어 있다. 달리 말해, 루리가 멜라니와의 관 계의 결과로 겪는 치욕은 추상적이며 사회적인 성격의 것이다. 루리가 형식 적 사과라는 보다 쉽고 빠른 방식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부도덕적인 존재로 발각되었 다는 사실이고, 이는 사회적 추락을 감내하는 감정적 고행을 통해서만 회복 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여성적 수치’(feminine shame)와 ‘남성적 치욕/불명예’

(masculine disgrace)의 차이를 강조하는 까밀 누르카(Camille Nurka)의 구 분은 다소 도식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루리의 추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누르카는 통상적으로 유사어로 간주되는 ‘수치’와 ‘치욕/불명예’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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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매우 의미심장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에 따르면, 수치가 자아 자체의 손상을 동반하는 체화된 감정으로서 문화적으로 여성의 ‘성적 수치’

를 주로 지칭하는 반면, 치욕 혹은 불명예는 주로 ‘얼굴’의 문제와 관련되어 체면의 손상(losing face)이나 평판, 혹은 지위의 하락을 함의한다. 누르카 가 설명하듯이, 뺷치욕뺸에서 구원 혹은 회복의 가능성은 애초에 (일시적인)

‘남성적 치욕’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이다.7) 이런 점에서, 이 소설에서 의미 심장한 것은 “공적인 치욕”과 “사적인 은총”의 충돌이 아니라 “내재적인 여 성적 수치와 초월적인 남성적 치욕”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차이라 할 수 있다(Nurka 310).

수치는 뺷치욕뺸의 “젠더화된 플롯”(Nurka 321)을 추동하는 핵심적인 감 정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수치에서 주체는 실패를 통해 자신이 중요시하 는 가치를 드러낸다. 루리의 치욕은 도덕성의 실패에서 오는데, 그의 실패 에는 특정 종류의 남성성의 개념이 연루되어 있다. 뺷치욕뺸의 도입부에서 독 자들은 두 번의 이혼 후 혼자 살고 있는 중년 남성 루리가 불필요한 대화를 자제할 줄 아는 소라야(Soraya)라는 매춘 여성과의 정기적인 만남을 통해 사회가 묵인하는 범위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적절히 관리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 루리는 대학 위원회에서 멜라니와의 관계에서는 자신이

“에로스의 하인”(52)이 되었다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루리의 입장에서 멜라 니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실패한 것은 욕망의 억압이라기보다는 욕망의 순 치와 관리이다. 여성의 경우, 욕망의 노출 즉 욕망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것으로 의미화된다면, 루리의 치욕은 엄밀히 말해 그가 욕망한다는 것을 들켰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는 욕망을 통제하 고 용인된 (혹은 묵인된) 통로로 적절히 표출하고 순화하는 데 실패했기 때

7) 「수치 감정의 프레임으로 본 쿳시의 뺷치욕뺸」에서 김영미와 이명호는 루리의 수치의 핵심에 딸의 강간을 막지 못한 백인 가부장의 무력감이 있다는 설득력 있는 해석을 펼 친다. 그러나 소설 후반부에 보이는 루리의 변화를 수치심의 극복으로 읽음으로써, 수치 의 회복 자체가 ‘남성적 수치’의 내재적 속성임을 간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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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치욕을 겪게 된다.

루리는 “거세된 교육 기관”(4)으로 전락한 대학을 미련 없이 떠나면서,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Byron)의 삶과 시구를 인용해 자신의 욕망을 미화하 고 사과하지 않는 것을 “침묵할 자유”의 행사로 옹호한다. 그런데 그가 침 묵을 선택했기 때문에, 멜라니는 사과를 받지 못한다. 루리가 선택한 개인 적인 속죄의 방식은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정의롭지 않다. 소설의 후반 부에서 루리는 개인적인 사과를 하지만, 이 사과는 멜라니가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에게 이루어진다. 딸 루시가 집단 성폭행의 피해자가 된 후, 루리는 멜라니의 아버지 아이작 씨(Mr. Issacs)를 찾아가 자신이 멜라니에게 저지 른 잘못을 사죄하고 용서를 구한다. 이 사과 장면은 루리의 도덕적 회복을 독자들에게 설득하는 데 핵심적인 장면이다. 문제는 루리가 멜라니가 아닌 아이작 씨의 용서를 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루리의 사과 장면이 과오와 용 서에 관한 관념적인 대화를 나누는 성숙한 ‘남자 대 남자’의 만남처럼 묘사 되고 있다는 것이다.

루리의 치욕적인 이야기는 여러 모로 남성의 수치를 보여준다. 소설의 서 술자는 주로 루리의 의식을 통해 사건을 묘사하며 독자들에게 멜라니의 생 각과 감정을 좀체 들려주지 않는다. 루리가 멜라니의 육체를 탐할 때, 그녀 는 시선을 아래로 향하거나(12) 얼굴을 돌리거나(19, 25) 하는 수치의 몸짓 으로 해석될 수 있는 모습을 보이지만, 우리는 그녀의 감정에 대해 직접 듣 지 못한다. 대신 우리는 멜라니의 남자친구가 루리를 찾아와 조롱하고 분노 하는 것을 보고, 그녀의 신실한 아버지가 매일 치욕을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루리를 집 안으로 초대해 저녁을 나누며 신의 뜻에 대해 이 야기하는 것을 듣는다. 루리의 침묵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만, 멜라니의 침묵은 작가 쿳시의 누락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뺷치욕뺸에는 성폭행 당한 후 침묵을 선택하는 또 다른 여성이 있다. 이제 그녀의 수치와 침묵에 귀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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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녀의 수치와 공감의 한계

이스턴 케이프(Eastern Cape)에 위치한 농장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던 루 시는 추문에 휩싸인 아버지의 방문을 받고 그에게 지낼 방과 자잘한 소일 거리를 내어준다. 그런데 루리의 도덕적 회복의 공간이 될 것으로 보였던 농장에 세 명의 원주민 남성이 급습해 루리를 욕실에 가둔 채 루시를 집단 성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루시는 이 사건에 대해 루리로서는 도저히 납 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성폭행에 대해 함구하 도록 당부하고, 신변의 위험을 염려해 농장을 떠나야 한다는 그의 강권도 단호하게 물리친다. 게다가, 루시는 끔찍한 폭력으로 잉태된 아이를 임신한 채, 한 때 자신의 일꾼이었던 원주민 이웃 페트루스(Petrus)의 보호를 받기 위해 그에게 농장을 넘겨주고 그의 세 번째 아내가 되기로 결심한다. 자신 을 공격한 세 명의 남자 중 한 명이 페트루스의 친척이며 그의 집에서 지내 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루리는 루시의 침묵을 수치의 표현으로 해석하며, “치욕 때문에” 그리고

“수치 때문에” “그녀는 얼굴을 숨기고 싶을 것”이라고 짐작한다(115). 그러나 루시의 수치는 루리의 수치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녀는 자신에 게 자행된 끔찍한 폭력을 본래 자신들의 땅이 아니었던 아프리카에 “머무는 것에 대해 지불해야 할 값”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을 윤간한 원주민 남성들을

“빚쟁이”나 “세금 징수원”에 빗댄다(158). 엘리케 뵈머(Elleke Boehmer)가 주장하는 것처럼, 루시의 침묵은 루리의 침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루시의 침묵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책임”이라는 역사적 짐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인종적 과오에 대한 속죄라는 점에서 그렇다(Boehmer 349). 달리 말해, 그녀의 수치는 흑인 원주민과 백인 이 아프리카에서 공존하기 위해 온 몸으로 대신 치르는 희생이고, 그녀의 침묵은 일종의 사과이다. 루리의 인간성이 멜라니의 수치를 통해서 회복되는 것처럼(Nurka 324),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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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수치 위에서 재건된다. 이런 방식으로, 뺷치욕뺸은 여성의 수치와 침묵 위에 서 이루어지는 화해를 보여준다.

루리와 멜라니, 그리고 루시의 수치는 감정의 문제에 젠더 이데올로기가 강력하게 관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뺷치욕뺸에서 수치는 (마수미와 세즈윅 이 믿는 것처럼) 자유로운 이동성과 무제한의 전염성을 가지고 이데올로기 와 문화를 초월하지 못한다. 루리는 성추문으로 인한 수치에 더해 딸의 성 폭행을 막지 못한 아버지의 참담함을 느끼면서 루시의 감정에 공감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루시는 “아버지는 계속 저를 잘못 읽고 있어요”(112)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느끼는 수치의 감정이 반복적으로 오독되고 있다는 것 을 알려준다. 루리의 수치는 루시의 수치와 같지 않고, 공감은 종종 감정의 오독을 수반한다. 아메드가 전염 모델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적하는 것처 럼, “우리가 같은 감정을 갖고 있다고 느낄 때조차도 우리가 반드시 그 감 정과 같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니다”(10). 물론 이것이 공감하려는 노 력이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것은 감 정의 이동성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우리 각자가 감정과 맺는 관계에 차이를 만드는 사회․문화적 힘들을 여전히 중요하게 분석할 필요 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젠더는 우리가 수치의 감정과 맺는 관계에 차이를 만드는 강력한 정체성 범주이다. 루리가 동물보호소에서 일하는 베브 쇼(Bev Shaw)와 나누는 대 화는 루리가 여성의 수치를 느끼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미심장한 질문 을 제기한다. 루리는 “나는 거기에 있었습니다”(140)라고 말하며 자신이 루 시가 성폭행 당하는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수치를 이해할 수 있다 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베브 쇼의 반박 ― “하지만 당신은 거기에 없었어 요, 데이비드. 그녀[루시]가 말해줬어요. 당신은 거기 없었어요”(140) ― 은 루리의 머릿속에 맴돌며 다음과 같은 상념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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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당신은

당신은 당신은 거기에 거기에 거기에 거기에 없었어요없었어요없었어요없었어요. . . 당신은 당신은 당신은 당신은 무슨 무슨 무슨 무슨 일이 일이 일이 일이 있었는지 있었는지 있었는지 있었는지 몰라요몰라요몰라요몰라요...

당신은 거기에 없었어요. 당신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그는 당황한다. 베 브 쇼에 따르면, 루시에 따르면, 그가 어디에 없었다는 것인가? 침입자들이 모욕 적인 폭력을 범한 그 방에? 그들은 그가 강간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인가? 그들은 그가 자신의 딸과 함께 고통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 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무엇을 더 목격할 수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그 들은 강간에 관한 한, 어떤 남자도 여성이 있는 곳에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답이 무엇이든 간에, 그는 제 3자처럼 취급되는 것에 매우 화가 난다.

You weren’t there. You don’t know what happened

. He is baffled. Where, according to Bev Shaw, according to Lucy, was he not? In the room where the intruders were committing their outrages? Do they think he does not know what rape is? Do they think he has not suffered with his daughter?

What more could he have witnessed than he is capable of imagining? Or do they think that, where rape is concerned, no man can be where the woman is? Whatever the answer, he is outraged, outraged at being treated like an outsider. (140-41)

루리는 딸의 고통에 공감한다고 믿고 있지만, (베브 쇼가 전하는 바에 의 하면) 루시는 그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녀가 실제 느끼는 것은 아니라 고 믿고 있다. 이는 루리에게 당황스럽고 화나는 것이지만, 이후 그는 “루시 의 직관이 결국 옳다. 그는 이해한다. 집중한다면, 자신을 버린다면, 그 현장 에서 [루시를 강간한] 그 남자들이 되고 그들 안에 있으면서 그들을 자신의 영혼으로 채울 수 있다”고 고백한다(160). 그러나 그는 뒤이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즉 과연 “그가 여자가 될 수 있는가?”(does he have it in him to be the woman, 160)라는 의미심장한 질문에는 끝내 대답하지 못한다.

루시의 감정은 루리에게 그런 것처럼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이해하기도 공감하기도 힘든 것이다. 독자들은 루리와 마찬가지로, (소설 읽기를 중단 하지 않는다면) 루시의 감정을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한 채 ‘그녀의’ 선택 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감의 문제”가 이 소설의 핵심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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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임을 지적한 제프리 베이커(Geoffrey Baker)의 해석(40)이나 이 소 설이 “타인의 타자성을 경험하는 개인의 능력”을 심문한다는 로라 라이트 (Laura Wright)의 관찰(84)은 루리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독자들에게로 확 장된다. 루시의 윤간은 욕실에 갇혀 아무것도 목격하지 못한 루리에게나 이 사건에 관한 어떠한 직접적인 묘사도 제공받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궁극적 으로 접근할 수 없는 서사의 공백으로 남는다. 루리와 마찬가지로 독자들은 루시의 감정을 상상하려고 애쓰고 간혹 이해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곧 그것이 그녀의 감정을 오독한 것이라는 루시의 일갈에 부딪히게 된다.

윤간당한 루시의 감정에 공감하고 자신을 강간한 남성의 이웃으로 살겠다 는 그녀의 선택을 이해하기란 도무지 쉽지 않고, 이런 의미에서 루시의 몸 은 루리와 독자들의 공감 능력의 한계를 나타내는 지점이 된다.

5. 나가며

모호할 뿐 아니라 “확연히 불쾌한” 입맛을 남기는 소설(Attridge 316)인 뺷치욕뺸이 주는 것은 어쩌면 “불쾌한” 통찰이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이 존재론 적이고 인식론적인 한계를 규정하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힘들 속에서 작동 한다는 것이고, 상상력과 공감 능력이 당신과 나의 경계를 허물기에 충분치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루리의 낭만주의 시 강의는 소설의 독자들이 곱씹어 볼만한 메시지를 던진다. 루리는 바이런의 시 「라라」(“Lara”) 에 등장하는 루시퍼(Lucifer)가 “원칙이 아니라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미친 마음”을 갖고 있다고 설명한 후(33), 다음과 같이 강의를 이어간다.

우리는 미친 마음을 가진 이 존재, 무언가 체질적으로 잘못된 이 존재를 비난 하도록 요청받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세요. 반대로, 우리는 이해하고 공감하도 록 초대됩니다. 그러나 공감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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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살긴 하지만 그가 우리들 중 하나는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는 정확히 스 스로 이름 붙인 그것입니다. 어떤 사물사물사물사물, 즉 괴물이지요.사물

Note that we are not asked to condemn this being with the mad heart, this being with whom there is something constitutionally wrong. On the contrary, we are invited to understand and sympathize. But there is a limit to sympathy.

For though he lives among us, he is not one of us. He is exactly what he calls himself: a

thing

, that is, a monster. (33-34)

루리는 강의 도중 자신과 루시퍼의 유사성을 떠올리며 자조적인 상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넓게 보아 루시퍼는 “우리들 가운데” 있는 급진적인 차이를 가진 타자, 우리의 이해와 공감을 요청하면서도 동시에 공감의 한계 를 입증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해하기도, 공감하기도, 사랑하기도 힘든 이 “괴물” 같은 타자는 우리의 감정이 무한정으로 자유롭고 유동적이며 개 방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뺷치욕뺸이 “불쾌한” 소설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이 소설이 루리와 루시의 수치를 통해 감정의 비자율성과 공감의 한계를 환기시키기 때문일지도 모 른다. 마수미와 세즈윅이 각자 전개하는 정동의 자율성과 이동성에 관한 논 의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감정에 대한 해방적인 희망과 함께, 감정 의 자유로운 이동이 허락하는 무한한 공감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그 러나 뺷치욕뺸은 이러한 행복한 희망과 따뜻한 기대를 여지없이 좌절시킨다.

동시에, 뺷치욕뺸은 수치의 감정이 매우 내밀한 개인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사 회․문화적으로 의미화되고 재현되거나 침묵당하며 해석된다는 점을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뺷치욕뺸은 아직 시작 단계에 있는 감정 연구가 정동이 사회․문화적으로 어떻게 기입되고 증폭되고 (재)배치되는지 분석하기 위 해 권력관계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주체의 위치를 여전히 면 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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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Gender Politics of Shame : J.M. Coetzee’s Disgrace

8)Lee, Jung-hwa*

Brian Massumi and Eve Kosofsky Sedgwick significantly contributed to the 'affective turn,' which might be seen as a move from culture and epistemology to materiality and ontology. This article maintains a critical distance from Massumi's concept of affect as autonomous intensity and Sedgwick's emphasis on the free and contagious nature of affect. Responding to Clare Hemmings's call to "reject the contemporary fascination with affect as outside social meaning," I analyze shame as a gendered emotion by examining the different ways in which Lurie’s disgrace and Lucy’s shame function in J.M. Coetzee's Disgrace. The novel suggests that shame hardly transcends gender and our capacity for sympathy is limited. In Disgrace, shame, an exemplary emotion, is not infinitely free and autonomous;

instead, it functions within the constraints of social and cultural meanings.

Then, the insight that the novel offers us might be that we need to pay closer attention to the social and cultural forces that influence our varied relationships to feelings.

Key Words : shame, gender, emotion, affect, feeling, sympathy, J.M. Coetzee, Disgrace

* Chosun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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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이름 : 이정화

소속 : 조선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전자우편 : jhlee913@chosun.ac.kr

논문투고일 : 2018년 07월 08일 심사완료일 : 2018년 08월 06일 게재확정일 : 2018년 08월 20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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