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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칼럼] 팔만대장경을 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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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C News, Volume 24, No. 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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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을 알아보다

전 성 운 교수 (순천향대학교)

문화유산에 대한 설명은 흥미로울 것 같지만 이해하기에 어려운 내용이 되곤 한다. 뭔가 의미 있는 지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그 이야기가 난해해지기 일쑤다. 그것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과 관련돼서도 그렇다. 팔만대장경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소개된다.

팔만대장경의 정식 명칭은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으로 국보 32호이다. 본래는 ‘고려대장경판(高麗大藏經 板)’이나 ‘재조대장경판(再雕大藏經板)’으로 불러야 마땅하다. 다만 글자를 새긴 나무판, 장경판(藏經板)이 81,258매(枚)라는 엄청난 양이어서 팔만대장경으로 불리게 되었다. 팔만대장경의 나무판은 세로 24 cm, 가로 68~78 cm, 두께 2.5~4 cm, 무게 3~4 kg 정도로 크기가 일률적이지 않다. 여기에 당시까지 존재하는 불교 의 경(經; 석가모니의 설법), 율(律; 지켜야 할 계율), 논(論; 관련 논문) 등 1,516종, 6,815권의 불교 경전을 망 라하였다. 무게만 무려 280 t이 넘는 장경판에 5200만 자를 초벌새김, 재벌새김, 마무리새김의 과정을 거쳐서 꼼꼼하게 새겼다.

이런 엄청난 작업을 위해 고려 조정에서는 2개의 관청을 설립 운영하였다. 전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총괄 하는 대장도감(大藏都監)과, 산지에서 나무를 베어 적당한 크기로 잘라 다듬고 판하본(板下本) 작성이나 실제 판각 등을 진행하는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이 그것이다. 분사대장도감에서는 나무판이 변형될 것을 염려 하여 나무를 소금물에 찐 후 그늘에서 천천히 말렸다. 그리고 글자를 새길 때는 일획 삼례(三禮; 세 번 절하는 예법. 삼배)를 행했다고 한다. 글자를 새긴 후에는 2번의 옻칠을 하고 장경판의 양쪽에 마구리[= 경판의 끝에 대는 나무]를 한 후, 네 귀퉁이에 금속판을 부착하여 마무리했다. 이런 복잡하고 꼼꼼한 작업은 준비에만 4년, 판각 작업에는 12년의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고려는 유일무이하고도 방대한 불교 경전의 조조(雕造) 사업을

해인사 대장경판의 글자 해인사 장경판전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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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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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화학 전망, 제24권 제5호, 2021

통해 몽고의 침입을 물리치고 국가의 평안을 이루고자 했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설명의 뒤에 가끔은 곤혹스런 질문이 따른다. “그 많은 돈과 시간, 인력을 들여 글자를 나무에 새긴 것이 그렇게까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었나요?”, “몽골이 침입한 상황에서 돈과 인력을 쓸모 없는 곳에 지출하지 말고 군대를 양성하여 그들에게 대항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지 않나요?” 이런 질문은 제 법 그럴듯하다. 그러나 팔만대장경에 대해 알뜰한 설명을 했다고 자부하는 경우에는 곤혹스럽기 그지없는 질 문들이다. 사실 실효적인 측면에서 보면,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군인의 양성과 전쟁 경비의 마련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고려의 조정은 왜 팔만대장경을 조조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고려와 몽골의 전쟁 과정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몽골과의 전쟁은 1231년 시작되어 1270년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 도할 때까지 약 40여 년간 계속되었다. 실질적으로는, 1259년 고려 조정이 강화 태도를 보일 때까지 약 30년 동안의 진행된 9차례의 전쟁이다. 그리고 팔만대장경 조조 사업은 전쟁 초기인 1237년에 시작됐다.

그런데 고려 조정에서 팔만대장경의 조조를 결정하게 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1232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부인사(符仁寺)에 보관하고 있던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불에 타버린 일이다. 초조대장경은 현종 1년(1010)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부처님의 힘으로 적을 물리치고자 청주 행궁에서 1011년에 발원(發願)하여 18년에 걸쳐 완성한 대장경이다. 고려 조정에서 초조대장경 사업을 발원한 후 거란군은 스스로 물러갔다. 그래 서 당시 사람들은 초조대장경을 ‘진병대장경(鎭兵大藏經)’이라 불렀다. 이는 “적병을 물리친 대장경”이라는 뜻 이다. 그런데 몽골군이 침입하여 초조대장경을 불살랐으니, 그것을 복원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게다가 1238년에는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이 몽골군에 의해 불에 타버렸다. 황룡사는 신라 선덕왕 때에 건 축된 사찰로 왕이 몸소 나가 설법을 듣고 예불(禮佛)한 유일한 곳이었다. 이런 황룡사에 대한 존숭은 고려 조 정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광종 5년(954)에 벼락으로 황룡사의 목탑이 무너지자 1012년 재건을 시작하여 9년 만에 완공했고, 현종 3년(1012)에는 조유궁(朝遊宮)을 헐어 그 자재로 목탑을 수리하기도 했다. 고려 조정이 황 룡사 목탑을 귀중하게 여긴 데는 그 건립 배경과도 연관이 있다. 황룡사 목탑 사리함(舍利函) 내면의 금동찰주 본기(金銅刹柱本記)에 “해동(海東)의 아홉 나라가 모두 신라에 항복할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황룡사 목 탑의 건립이 주변 나라를 통일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해준다. 황룡사 목탑의 상징적 의미와 그 에 대한 믿음은 초조대장경을 새겨 거란을 물리치려는 사고와 일맥상통한다. 요컨대 황룡사 9층 목탑이 외적 으로부터 고려를 지켜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몽골군에 의해서 초조대장경과 황룡사 의 목탑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러니 진병(鎭兵) 의 상징물을 복원하여 적을 물리치려는 뜻을 세 운 것은 당연했다. 실제로 대장경판을 다시 만들 기 위한 고려 민관(民官)의 노력은 각별했다. 엄 청난 경비의 지출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일에 매 달린 개개인의 열정 또한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나무를 베고 다듬는 기계도 없던 시절에 적당한 크기의 산벚나무와 돌배나무 등을 산속에서 골라 벤 후 소금물로 일일이 찌고 천천히 그늘에서 말린 다음, 8만 장이 넘는 나무판으로 만들어

5,200만 자를 한 획씩 새겼다. 한자(漢字)를 써 황룡사 및 9층 목탑[추정 높이 66m] 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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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진땀나는 일인지 알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을 했던 사람들의 열정은 그 누구도, 그 무 엇으로도 쉽게 평가할 수 없다. 이런 노력과 정성으로 새겼기에 조선 최고의 명필인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는, “육필(肉筆)이 아니라 신필(神筆)”이라고 했다. 사람의 손으로 써서 새긴 것이 아니라 신의 힘 으로 새겨진 것이라고 칭송했다. 최고의 열정과 노력으로 만들었기에, 고려 사람들은 팔만대장경이 몽골군을 물리칠 힘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이 국보 32호에 지정된 것이나 2007년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등록된 것도 이런 열정과 노력을 인정한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팔만대장경의 가치는, ‘북송(北宋)의 관판대장경(官板 大藏經)이나 거란판대장경(契丹板大藏經)을 뛰어넘는 방대한 성취’ 혹은 ‘대장경 가운데 내용이 가장 정확하고 완벽한 것’으로 ‘일본의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을 비롯한 이후에의 대장경들이 팔만대장경을 모본 (母本)’으로 했다는 점에만 있지 않다. 나아가 ‘몽골을 야만시하고 고려의 문화적 긍지를 드러낸 유산’ 혹은

‘고려인의 굳은 신앙심의 결과’라는 사실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그것의 진정한 가치는 고려인을 비롯한 그 시 대의 모든 사람, 인류 전체의 열정과 노력을 고스란히 담아낸 문화적 성취라는 점에 있다. 즉 유네스코는 팔만 대장경에서 그것을 간행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과 그들의 삶, 그리고 인류 보편의 가치를 확인하고 인정했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은 어느 순간에 돌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거인어깨 짚기와 같이 기존에 이 루어 놓은 인류 보편의 문화적 자산을 토대로 한 움큼 더 쌓고, 한 걸음 더 나아감으로써 만들어 낸 결과다.

그러니 거대하게 쌓인 문화적 토대를 전제로 개별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고 보아야 한다. 팔만대장경을 알아보 는 것 역시 그러해야 한다. 현대인의 실효적 관점에서만 바라 볼 것이 아니라, 그것에 스며있는 고려인의 열정 과 노력, 인류 보편의 지향을 알고 보아야 한다.

사족(蛇足)이지만 대장경판은 국보 32호이고 그것을 보관하는 건물인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藏經板殿)”은 국보 52호다. 또한 장경판전은 1995년 12월에, 대장경판은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각각 지정 등록되었다. 유네스코에서는 대장경판만이 아니라 그것을 보관하는 건물의 단순하면서도 과학적인 건축 기법 의 뛰어남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보아야 할 것은 팔만대장경만이 아니었던 셈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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