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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문화사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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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문화사고고학

19세기 말 유럽에서는 문화변화는 일련의 단계들로 발전되었다는 주장이 비판을 받게 되면 서 문화사고고학이 나타나게 되었다. 문화사고고학은 고고학기록에서 유물의 분포에 대한 지 리적 다양성에 대한 것이었다. 즉 문화는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발전하였고 각각의 문화들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또한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기 때문에 문화를 만드는 종족들의 존재를 인 정해야했다. 그래서 종족성은 인류역사를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생각되었다.

1. 종족성에 대한 초기의 관심

·민족주의의 등장

민족의식은 16세기와 17세기에 북부 및 서부유럽에서 중세시기가 지나가고 르네상스가 퍼질 무렵에 애국심이 확산되면서 시작되었다. 애국심은 민족주의로도 설명되었는데 모든 것 을 포괄하는 집단 정체성의 감정 및 공통의 고국에 대한 충성으로 정의된다. 민족성이 강조되 면서 국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려하고 국가들은 민족의 통일을 목적으로 영토를 확장하 기도 하였다.

민족주의는 인종주의를 강화하는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프랑스 귀족 출신인 고비노는 문명 은 인종적 구성에 따라 결정되며 우월한 인종이 적을수록 국가는 황폐해져 간다고 서술하였 다. 이는 유럽의 인종은 우월하다는 인종주의적인 특징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유럽이라는 민족 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초기 고고학과 민족주의

영국에서는 영국인의 조상이 침략에서 들어온 종족들과 원래 지역에 있던 종족 중에서 우월 한 종족과 결합되어 혼혈민족을 낳게 되고 현재 가장 훌륭한 민족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 한 다윈의 진화론이 적용되어 자연선택의 결과로 영국의 종족들은 현재 살고 있는 지역에 잘 적응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북부와 중부 유럽에서는 19세기 동안 선사시대 연구가 민족주의와 연관성이 있었다. 스칸디 나비아에서는 민족에 대한 관심은 있었으나, 주로 각 나라들의 선사시대에 대한 관심과 이를 통해 편년을 만들어내는데 주로 연구를 하였다. 독일은 1871년에 통일이 되었지만 독일의 역 사 연구는 아주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당시의 보수층들은 역사 연구에 크게 관심을 가지 지 않았기 때문이다.

18세기 동안 독일에서는 역사적접근 방식으로 고대 독일의 영광을 보여주었다. 요한 헤르더 는 이러한 역사적접근적인 연구를 통해서 역사는 그 민족이 발달하는 과정을 알려준다고 하였 다. 이러한 주장들은 호고가들과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강조되었고 1871년 독일의 통일에 영향 을 미쳤다.

동부유럽에서는 고고학자들이 강대국인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러시아의 지배 아래 살고 있 던 민족들의 정체성을 고취시켰다. 이것은 강대국의 한 민족만을 위하는 것이 아닌 그 지배하 에 있던 약소국들의 민족까지 강조하는 것으로 제국의 쇠락을 가져오고 몇몇 민족국가들의 등 장에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고고학이 강대국의 지배하에 있는 체코나 폴란드의 계층들에게 지원을 받게 되었다.

19세기 동안 유럽고고학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면서 박물관 및 연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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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등이 많이 설립되고 대학의 학과개설이 이루어지면서 각 대학에 고고학 교수들이 배치되었 다. 고고학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편년보다는 유물 자체를 연구하는 쪽으로 관심이 기울 어지기 시작하였다. 유물을 연구하면서 유사한 형태나 기술적인 유물이 분포되어 있는 지리적 부분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것은 종족성과도 연결된다. 지리적으로 그 지역에서 나온 것은 그 지역의 민족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되었다.

2. 전파론

19세기 문화진화론자들은 문화변화를 독자적인 발명뿐만 아니라 전파와 이주의 측면에서도 생각하였다. 원주민들의 문화를 설명하면서 그들의 문화는 유럽민들에게서 들어온 것이고 자 체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즉 문화변화를 전파와 이주의 측면에서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창조력을 배제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문화변화에 대한 생각들은 산업혁명의 결 과로 인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산업혁명이 기술발달에는 상당한 발달을 가져다주었지만 혁명 들과 운동들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이 커지게 되었다.

그래서 진보라는 것에 반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문제점들은 당시에 진화론으로 인해 생물학적차이까지 원인으로 여겨졌다.

·라첼과 보아스

라첼은 독일의 지리학자이자 민족학자였다. 라첼은 계몽주의의 심적동일성을 거부하면서, 민족학자들은 인류역사상 발명이 한 번 이상 일어나서 반복된다는 사실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또한 라첼은 활이나 화살과 같은 물건들은 분명 하나의 공통된 원천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이 기술이 한 인간집단에서 전파와 이주로 인해서 유사성이 나타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라첼은 기술의 전파가 장기간 이어져 문화영역을 형성한다고 주장하였 다.

라첼의 주장은 보아스에게 영향을 미쳤다. 보아스는 라첼의 주장에서 더 발전하여 각 집단 의 문화는 그 자체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문화에서 발명은 한 번 이상으로 이루어 지지 않았기 때문에 각 문화들은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보아스의 주장을 이해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개념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보아스의 주장은 문화상대주의와 역사특수주의를 포함한다.

비엔나학파의 인류학에서도 이루어졌다. 프리츠 그레브너와 빌헬름 슈미트는 중앙아시아에 서 문화들이 발달하였고 거기에서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게 되었다며 라첼과 보아스의 전파론 에 동의하였다.

·극단전파론

영국에서 전파론는 케임브리지대학의 학자 리버스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그래프턴 엘리엇 스 미스에 의해 더 확산되었다. 그는 미라의 시신처리가 이집트에서 발명되어 세계 각지로 확산 되었고, 다른 지역에서 기술이 퇴보하게 되어 이집트와는 다른 방식의 시신처리가 보인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미라의 전파론에서 멈추지 않고 모든 초기의 문화 발달이 이집트에서 이루 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을 극단전파론자라고 부른다.

스미스의 극단전파론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은 거석묘가 이집트 피라미드의 기술적으로 퇴보 한 형태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파론의 영향으로 인해서 인류역사상 기술적으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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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은 한 번 이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보았다.

3. 몬텔리우스와 유럽 선사시대의 종합

·몬텔리우스와 형식 편년

몬텔리우스는 톰센의 연구법을 따라 유물들을 분류하였다. 유적 내에서도 동일한 유구에서 나온 것들을 분류하고 동일한 형태의 유물들을 분류하였다. 톰센과는 다르게 그 시대 안에서 도 세부적으로 여러 시기로 나누어지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 유물들에서 보이 는 제작기법, 형태, 장식성 등의 유사성을 파악하여 편년들을 배열하였다. 몬텔리우스는 자신 의 연구를 통해서 배열한 유물들에서 진화적경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전파론적 해석

1880년대가 되면 몬텔리우스는 스칸디나비아 청동기시대에 대해서 자신의 순서배열법을 적 용하였다. 자신의 접근 방법이 모든 지역에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실제로는 지역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문화는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게 발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 였다. 그래서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어, 기술들이나 유물들이 무역으로 교환되거 나 이동해갔다고 생각되는 지역들에는 자신의 시기를 대응시키려 하였다. 몬텔리우스는 자신 의 해석이 유럽에서 선사시대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전파론에 입각하여 인간의 창의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19세기 말 러시아 고고학의 발전

그러나 러시아는 몬텔리우스의 순서배열법보다는 스칸디나비아의 고고학에 영향을 받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고고학자들은 북부 및 중부 유럽의 선사고고학의 영향을 받았 다. 그 중에 바실리 고로드초프는 몬텔리우스의 연구법 말고 다른 스칸디나비아 형식학자들의 연구에 영향을 받아서 러시아고고학의 형식주의학파라 불리는 학파를 만들었다. 또한 그는 전 파와 이주를 통해 문화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러시아의 고고학은 몬텔리우스의 순서배열법이 크게 영향을 준 것은 아니지만 스칸디나비아 의 고고학이 영향을 준 것은 틀림없다. 또한 가장 주목할 점은 여러 강대국들은 부족사회의 부족민들의 지역을 점령하고 이들을 인종주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아 식민화를 정당화하려 했 지만, 러시아는 그러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4. 고고학 문화의 개념

19세기 말 종족성에 대한 관심이 고고학 문화의 개념을 많이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화 라는 용어는 처음에 이탈리아와 스페인어에서 사용되었던 듯하다. 본래 뜻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수양을 의미하는 것이다. 17세기가 되면 어떤 한 민족의 특정한 생활양식을 지칭하고 18세기가 되면 이러한 민족들은 특징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대부분 19 세기의 단선진화고고학자들은 문화라는 용어를 자신들의 나라에서만 아니면 특정 민족에서만 사용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선사시대의 고고학 유적과 유물을 고고학 문화나 문명으로 보았던 것은 몇몇 고고학자들의 관점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들 고고학자들도 문화라는 개념을 정확히 언급하지 못했다.

그리고 학자들마다 고고학 문화에 대한 해석도 달랐다. 왜냐하면 당시 문화사적 접근 방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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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이 동일지역에서 동일하게 발생하는 것이기 아니기 때문이고, 심적동일성의 성격을 거부 하고 전파와 이주가 문화변화 원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5. 문화사고고학의 탄생 : 구스타프 코시나

·구스타프 코시나

구스타프 코시나는 독일의 애국주의자였다. 애국주의자였던 그는 독일의 고고학자들이 고대 독일인들 외에 고전고고학과 이집트고고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의 성향은

<독일인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보인다.

또한 문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코시나는 전파론보다 사람들의 이주를 통해서 문화가 변화되었다고 보았다. 전파는 단지 문화변화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하였 다고 보았다. 전파는 아이디어가 옮겨가는 것이지만 이주는 사람이 이동하는 것이다. 그는 종 족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주를 강조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코시나의 학사적 의의

코시나의 연구에는 너무 애국주의에 치우쳐 정작 고대인들의 생활양식은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문화적 접근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종족성을 중심으로 문 화를 설명하려 했다. 전파보다는 이주를 문화변화의 원인으로 보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각 종족들이 가지는 특성들로 이웃한 문화들을 연구하려 하였다.

6. 차일드와 「유럽문명의 여명」

영국의 고고학자들은 외국 고고학자들의 영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코시나의 접근법은 아니지만 몬텔리우스의 접근법을 받아들였다. 영국의 고고학자인 존 마이어스는 몬텔리우스의 접근법과 더불어 극단 전파론의 영향을 받아들였다. 그는 <역사의 여명>이라는 책에서 이집트 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럽으로 기술이 확산되었다고 보았고 위계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종족들 은 자신들보다 열등한 있는 종족들을 점령하면서 발달하였다고 보았다. 마이어스는 민족들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고 있지만 고고학 문화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이후에 다른 학자들에 의해서 문화와 문명이 다루어지기도 하였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다루는 학자는 고든 차일드가 <유럽 문명의 여명>에서 다루기 이전까지 없었다.

·「유럽 문명의 여명」

그는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모은 자료들을 토대로 「유럽 문명의 여명」, 「선사시대의 다뉴브 지역」이라는 두 권의 책을 출간하였다. 「유럽 문명의 여명」은 유럽 선사시대의 청동기시대 말 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고 「선사시대의 다뉴브 지역」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지방의 내용을 담 고 있다.

그는 「유럽 문명의 여명」에서 영국의 고고학자들은 외국의 고고학 접근법에 대해서 긍정적 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고 했는데 코시나의 접근법보다는 몬텔리우스의 접근법을 채택하였 다. 차일드 역시 초기 문명 기술이 서아시아에서 발생하여 유럽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에 동의 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고학 문화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되풀이 출토되는 어떤 형식들의 유존 물-토기, 도구, 장식물, 매장 의례, 집자리 형태-”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그는 단선진화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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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고고학을 해석하는 방법보다는 유물 자체에 대한 측면에서 문화변화들이 설명되어야 한 다고 하였다. 즉 편년이나 시기를 설정하는 것보다 유물의 형태나 형식분류를 통해서 문화는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코시나가 문화는 모자이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 것처럼 차일드 역시 문화들은 모자이크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차일드는 두 권의 책에서 고 고학 유존물에 대한 공간적 분포에 대해서 다루었다.

차일드는 유물들을 기능적인 면을 중요시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서로 다른 형태를 가진 유 물들은 선사시대에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 생각해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지역의 특징적인 유물로 종족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유물들을 두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토기나 장식물은 잘 변화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고 무기들은 교환과 무역을 통해서 다른 지역으로 빠르게 확장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문화변화를 전파와 이주의 결과로 보았다. 전파는 다른 학자들과 의견이 비슷하지만 이 주는 본래 존재하던 문화가 유입하여 온 문화로 인해 문화적 혼합으로 다른 문화로 대체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였다.

차일드의 이러한 연구법은 이후에 다른 고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고고학자들이 단선 진화론적인 해석보다는 알려지지 않는 민족들을 확인하고 이동하는 것이나 그 기원에 대해 연 구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다. 그리고 차일드의 이러한 연구는 문화는 일련의 단계를 거치면서 발달하였다는 문화진화론의 반대 입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의 의견과는 반대로 인간의 창의성에 대해서 인정을 하는 것이다.

7. 유럽 고고학과 민족주의

스칸디나비아, 독일, 영국에서 문화사고고학은 선사고고학이 유럽에서 자리를 잡게 되면서 나타나는 과정 중에 발달하게 되었다. 모두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발달한 것은 아니었다. 민 족주의는 유럽에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고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저술 들에 의해서 민족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북부, 중부, 동부유럽

민족주의는 국가 간에 대립을 유발하기도 하고,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감정들은 변하기 쉬운 것이어서 국가 간의 대립뿐만 아니라, 국가 내에서의 지역이나 지방적인 범위 안에서도 발생 한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대립 안에서 고고학은 정치적이나 경제적인,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몇몇 유럽 국가들에서는 정치, 사회적인 이유로 인해서 정부가 고고학 조사 를 중단하거나 이어가기도 하였다.

러시아에서는 나치의 팽창으로 인해서 민족성에 대한 관심이 커져갔다. 나치에 의해서 러시 아가 위협을 받고 있을 때, 독일인들의 우월성을 무시하고 슬라브족 이미지를 고양시키라고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러시아에서는 중세 마을에 대한 연구의 일환으로 노브고 로드 유적발굴이 이루어졌다. 이는 러시아에서 도시 고고학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이 러한 마을 연구로 인해서 러시아인들은 유럽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수공업, 요역, 문화를 발 달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마을들이 식민지이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민족의 형성에 대해서 전파와 이주를 통해서 문화변화를 해석하려고 하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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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의 민족주의 고고학

서유럽에서도 다른 유럽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사건들이 고고학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19세기에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단선진화론의 영향으로 문화사고고학의 발달이 이루어 지지 못했다. 당시에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야만인으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유럽의 국가들을 대부분 로마와 그리스 전통을 이어받아 세계를 주도하는 국가라는 것을 입증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품들을 사들이고 수집하는 것으로 입증하려 하 였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진화적 접근이 문화사 접근으로 대체된 것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이 다. 프랑스에서는 조셉 드셸레드가 골족에서 로마에 이르는 토기편년을 수립하면서 유물의 형 식을 분류하였다. 앙리 브뢰이는 프랑스 구석기고고학의 진화적인 틀을 보여주었다. 그는 석 기를 통해서 프랑스에서 아주 이른 시기부터 두 집단의 오미니드가 같이 살았을 것이라고 주 장하였다. 그것들은 석기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한 집단은 양면석기를 제작, 다른 집단은 격 지석기를 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들 간에 혼혈이 있었다고도 주장하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유럽의 고고학자들은 중동의 선사시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은 저술들을 통해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대표적으로 하인리히 슐리만 의 트로이 발굴을 예로 들 수 있다. 1920년대와 30년대에 중동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는데 대부분 유럽의 선사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서아시아의 선사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발굴 을 하였다. 이들의 연구 목적은 중동의 선사시대의 기원과 영향을 정의하려 하였다. 이러한 중동의 고고학 발굴조사로 인해서 서아시아가 유럽 문명의 요람이라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다.

라첼과 보아스의 주장과 유사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유럽인들의 관심 범위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확장을 이룩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에서 정치적으로 고고학을 이용하는 일은 사라졌다. 즉 고고학을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이용하는 것이 줄어든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에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이 개발되기 이전에 차일드의 연구법은 큰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문화변화를 전파와 이주로 설명하는 것 외에 문화변화 요인을 찾는 것에 도 열정적이었다. 또한 민족주의적 감정이 줄어들면서 유럽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시도도 줄 어들었다.

영국에서는 선사시대의 거석기념물과 남아있는 석조유구들에 대한 관심이 폭팔적으로 일어 났다. 이러한 잔재들은 환상 속의 외계인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아일랜드의 고고학에서는 이주가 아직까지도 고고학 문화를 해석하는 적용되고 있었다.

세계대전 이후에 고고학은 전처럼 정치적으로 마음대로 이용되지는 않았고 유럽의 국가들은 이제 근대성에 관심을 돌렸다.

·전후 독일의 고고학

문화사고고학은 독일어권 국가들보다 서독에서 더욱 완전해졌다. 고고학 문화라는 개념은 코시나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코시나가 주장하였던 특정한 민족이나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과 일치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은 거의 폐기되기 시작하였다. 고고학 문화에 대한 민족적 접근의 해석이 아니라 경제적이나 정치, 사회구조가 더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고고 자료를 해 석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역사적 접근을 이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한스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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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 에거스에 의해서 이론적인 작업이 역사학의 비판과 동등하다고 판단하였는데 독일고고학은 코시나의 연구로부터 시작하여 종족성에 심취되어 제대로 된 고고학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하 였다.

·최근의 흐름

민족주의는 애국심과 그 나라나 지역의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면에서는 공통점을 가지 지만 여러 나라에서 다른 특성으로 발달하였다. 몬텔리우스나 차일드와 같이 유럽을 전 세계 의 중심으로 보고, 그 문명 기원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은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몬텔리우스 와 차일드는 문화변화를 전파론적인 관점으로 해석하였는데 콜린 렌프류는 그들의 전파론과는 반대의 입장을 밝혔다. 야금술이 더 발달된 문화로부터 들어온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서아 시아에서 발달하였다고 주장한 것을 근거로 들 수 있다. 이안 호더는 『유럽 농경의 기원』에서 고고학적 기록들을 연구함으로써 이 유물들에는 유럽의 특성들을 가지고 있어서 신석기 시대 또는 구석기 시대까지 연구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들에 대해서 몇몇 고고학자들이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유럽에서 문화유산 관리에 대한 관심은 19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현재 고대의 거 석기념물이나 위대한 건축물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에만 관리를 하고 다른 것에는 소홀히 하였 다. 20세기 말 국가들은 문화유산 관리에 적극적으로 후원을 하였다. 그래서 고고학 지표조사 나 발굴조사는 활발히 이루어졌다. 국가가 후원을 하면서 지역적인 관심도 커지게 되었다.

8. 아시아의 민족주의 고고학

유럽의 문화사적 접근은 전 세계 민족주의 고고학이 표본이 되었다. 문화사적 접근법은 특 정 선사시대 민족을 연구하는 것으로 민족주의 고고학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할 가능성이 있다. 약소국들에서는 이러한 문화사적인 접근법이 국가적인 통일이나 민족의 단일 성으로 위해서 이용되기도 한다. 유럽에서는 유럽민들의 기술적인 우월성이나 특정한 시기의 역사를 강조하고자 할 때 이용된다.

·일본의 문화사 고고학

일본에 서양의 고고학 접근법이 들어온 것은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이다. 그 중에서 가 장 중요한 인물은 에드워드 모스이다. 모스는 동물학자로서 동부에서 조개더미 조사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일본 최초의 패총연구인 오오모리 패총이다. 이 패총을 계기로 일본 고고학이 근 대로 넘어가게 된다.

일본의 문화사고고학은 1895년에 설립된 고고학회에서 정의되었다. 학회의 목적은 “일본 역사 여러 시기에 대한 문화의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하여 일본의 고고학”을 연구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 고고학자들은 문화사적인 틀을 지지하였는데 전쟁 이후 패망한 일 본은 전쟁의 패배를 지우기 위해 과거를 연구하려 하였다. 이때부터 일본에서 민족주의가 활 발히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1940년대 이후에는 일본 고고학이 큰 발전을 하였다. 왜냐하면 고고학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들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지표조사와 구제발굴이 의무화가 되었기 때문에 발굴 조사도 많이 이루어져 발견물들이 전시가 많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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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문화사고고학

중국에서 첫 야외조사는 서양학자들이 실시하였고 중국인 최초 야외조서는 리지가 발굴하였 다. 리지는 은허에서 상나라 후기 유적을 발굴하였다. 안양 은허에서 발굴된 자료들은 후기 상 왕조와 관련된 자료들로서 중국이 자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의 고고학이 국가의 지도를 받은 것은 1949년 공산당이 승리한 이후이다. 그리고 고고 학을 중국 정부에서 지원을 하고 관리를 하면서 고고학적인 유물들이 정부가 원하는데로 해석 되었다. 또한 중국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인도의 문화사고고학

인도의 고고학은 식민지화에서 이루어졌다. 유물에 대한 체계적인 관심은 17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시작되었고 19세기 영국의 고고학자들은 인도의 기념물들을 조금씩 조사하기 시작하 였다.

독립 이후에 고고학 발굴조사에 정부가 적적하게 재정을 지원해 주었다. 중국에 비해서 인 도는 고고학자에게 발굴을 억압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도의 고고학자들은 자유롭 게 발굴조사를 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고고학자들은 문화의 과정을 설명하기보다는 특정 문화에 대한 종족이나 언어를 확인하는 일에 그치고 말았다.

인도의 정치가 힌두민족주의가 강해지면서 고고학에도 변화가 생겼다. 힌두민족주의를 주장 하는 사람들은 인도 내부의 자체적인 발달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인도 내부에서 의 문화가 변화하였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은 인도의 문화가 외부에서 기원하지 않았다는 것과 인도 자체 내의 창의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랍의 고고학

아랍에서의 고고학은 각 지역의 고대 문명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20세기 초 이집 트의 중간계급들은 고대 이집트문명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다. 고대 이집트는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모두에게 영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상징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중간계급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이 때 파라오의 모티브를 가진 것들은 독립의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 되었기 때문이다.

이란에서는 페르시아 민족성이 아직도 남아있어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미쳤다. 이슬람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이란의 고고학 발굴조사는 외국의 조사단들이 행하였다. 이슬람 혁명이 일 어난 이후에는 고고학 조사가 거의 쉬고 있었고 이후에 다시 수행되었을 때는 이슬람시기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고고학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문화사고고학은 다른 아시아의 고고학보다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19세기 말부터 팔레스타인에서의 고고학이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주로 성경에 입각한 발굴조 사가 이루어졌다.

이스라엘 고고학은 팔레스타인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면을 가졌지만 성서가 고고학의 주된 목적은 아니고 국가지향적인 성향이 많았다. 즉 종족성에 목적을 두고 국가를 더 굳건히 다지 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고고학은 시온주의자들에 의해서 주로 유대인의 취락과 문화를 연구하는데 관심을 두었고, 기독교나 이슬람의 문화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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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아프리카와 멕시코의 고고학

·아프리카 고고학의 어제와 오늘

1960년대에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이 식민에 해방되면서 고고학에도 변화를 가져왔 다. 아프리카의 고고학자들은 다른 지역의 고고학자들과 같이 구석기고고학보다는 문헌기록이 남는 역사시대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아프리카의 고고학자들은 고고 자료를 통해서 민족의 통일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할지도 생각하였다. 민족학은 사회학으로 재정립되면서 아프리카인들은 구비전승 이나 역사언어학에 대한 관심을 더욱 많이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아프리카인들은 문헌자료 를 이용할 수 없는 시기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고 고고학은 식민주의적이라고 보다는 아프리카적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멕시코의 고고학

멕시코 고고학은 1910년 스페인에서 레오폴도 바트레스의 테오티우아칸 보존 프로젝트에서 시작하였다. 멕시코에서 오랜 독재정치가 원주민들이 혁명을 일으키면서 끝나게 되었다. 그래 서 정부는 식민지 시기동안의 원주민들과 높은 계급들 간의 불평등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원 주민들을 국가에 통합시켰다. 또한 선 히스패닉 문화유산에 대한 연구를 후원하며 이 문화유 산을 멕시코의 일부로 인정함으로써 원주민들에 대한 존엄성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멕시코 정부는 대중 박물관을 만들고 주요 지역의 고고학 유적을 발굴하는 작업을 하였다. 멕시코 고고학은 멕시코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을 통합하여 국가적 통 일성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지역적인 문화의 연구로 인해서 재정 부족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민족주의 고고학

일본, 중국, 아랍,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등의 민족주의 고고학은 문화사고고학과 관계를 보여준다. 모두 고고학적 기록에서 특정 국가나 민족에 대해서 추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의 국가들에서 보여지는 고고학 유물들은 정치적인 수단으로 바뀔 수 있는 것도 보여주었다.

또한 발견물에 대한 관심은 당시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10. 미국의 문화사고고학

문화변화가 한 집단의 문화가 다른 집단의 문화를 단순히 대체하게 되었다는 고고학적 해석 은 계속적인 고고학 발굴 조사를 통해서 한계가 드러났다. 1927년 뉴멕시코 주의 폴섬 유적 의 플라이스토세 말 퇴적층에서 고 인디언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 유물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믿었던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곳에서 살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는 과정을 겪었다는 것이 분명해 졌다. 그래서 기술이 발달되어 있던 문화가 덜 발달된 문화가 있는 지 역을 점유하면서 그 문화를 대체했다는 관점은 문화변화를 이해하는데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유적을 통해서 문화는 한 지역에서 다른 문화가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서도 발달이 이루어 질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당시 고고학은 보아스 학파의 문화인 류학에 영향을 받았는데 위와 같은 이유로 보아스 학파의 문화상대주의가 주목을 받게 되었 다.

·서남부의 문화사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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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서남부 지역에서 북아메리카 문화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넬스 넬슨과 앨프리드 키 더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넬슨은 층위발굴을 진행하였고, 키더는 폐기층을 발굴하였는데, 퇴적 단위에 따라서 유물을 수집하였다. 넬슨과 키더는 이러한 퇴적층을 통해서 유적들이 상층에서 하층으로 가면서 규칙성을 가지고 변화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토기의 변화는 점차적으로 발달한 결과라고 하였다. 토기의 변화가 문화가 연속된다는 것과 내부적인 곳에서 도 문화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증거가 되었다. 이러한 넬슨과 키더의 발굴 조사는 미국에서 문화사고고학이 발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글래드윈 체계와 중서부분류체계

글래드윈과 그의 부인인 위니프레드 글래드윈은 서남부지역에 대해서 알맞은 체계를 제안하 였다. 글래드윈의 체계의 세 가지 분류는 미국 서남부 북쪽의 베스킷메이커, 남쪽의 호호캄, 그리고 그 사이의 산악지대인 카도안으로 나누었다. 이 세 가지 분류를 뿌리라고 부르고 뿌리 는 다시 줄기로 세분화하고 가지와 단계로 나누어서 더 구제적인 지리적 명칭을 부여하였다.

글래드윈은 이 나무분류를 통해서 뿌리는 줄기보다 먼저 앞선 것이고 줄기는 가지보다 앞선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먼저 선행되었다고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고고학자들과는 다르 게 집단이 그 지역에서 내부적으로 기술이나 문화가 계속적으로 발달하여 변화하였다고 생각 하였다.

글래드윈의 체계보다 더 영향력이 컸던 것은 윌리엄 맥컨이 제안한 중서부분류체계이다. 미 국의 중부와 동부 전역에서 오랜 시간동안 점유하는 것을 보여주고 층위를 가진 유적들이 드 문 지역에서 유물들을 형식 분류하였다. 형식 분류를 하는 기준은 맥컨이 정의한 성분, 초점, 양상, 단계, 유형들로 정의되었다.

이 두 분류체계는 한 지역에서 보이는 형태적인 차이는 시간의 차이로 나타난다고 보았는데 여기서 보이는 문화들은 동시기에 광범위하게 분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체계를 채택하였 던 많은 고고학자들은 많은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성은 공통적인 기원, 역사, 종족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전파와 이주를 통한 문화변화의 설명

글래드윈 체계와 중서부분류체계의 일부 시기들은 폐기되고 고고학 문화는 모자이크처럼 구 성되었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유물 형식뿐만 아니라 문화도 전통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문화에 서 특정 지역에서 유지되거나 많은 지역에서 문화들이 공통되게 형성되면서 확산되었다고 생 각되었다. 각 지역의 문화 편년들이 수립되었고, 각 문화안의 물질문화들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고고학은 유럽에서 이미 체계화된 방법론을 전적으로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부 분을 만들어 내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낼 수 있었던 것은 기존에 있던 편년의 변화들을 지 리적인 변화들로 대체되면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유럽에서는 문화사고고학이 지역 마다 다르 게 나타났지만 인종주의적인 관점은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11. 기술 발전: 발굴법과 방법론의 성장

선사시대의 고고학적 기록을 해석하는데 문화사접근방법론을 채택하면서 고고학 발굴 방법 에도 많은 발달이 있었다. 이것은 층서법, 순서배열법, 형식 분류에서 확실히 나타났다.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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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선사고고학자들이 역사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문화뿐만 아니라 편년의 변화에 대한 것에 세부적인 고찰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발굴법의 발달

선사고고학에서는 세밀한 방법은 피트리버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고고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선사시대 자료에까지 확장을 시키 고 싶어 했다. 그는 영국의 유적들이 한 시기 이상의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발굴 조사할 때 서로 다른 시기들을 확인하면서 발굴 조사를 해야 유물들을 제대로 고찰할 수 있다고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직각으로 도랑을 파고 수직으로 파내려가면서 층위를 기 록하고 유물들을 층위별 맥락을 파악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방법을 사촌에서 물려 받은 크랜본 체이스지역의 땅을 물려받고 그 지역에 있던 많은 유적들을 이 방법론을 이용해 서 발굴하였다.

피트리버스의 발굴법을 채택하면서 자신의 발굴법은 완성한 고고학자는 모티머 휠러이다.

그는 1921년에서 1937년까지 이어진 발굴조사를 통해서 자신의 발굴법을 완성시켰다. 그는 유적에서 사각형 그리드를 설치하고 발굴 둑을 남기고 그것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휠러의 발굴법은 평면적인 것보다 수직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을 아는데 중요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순서배열법의 개발

순서배열법은 페트리에 의해서 발달하게 되었다. 페트리는 이집트 유적에 대해 명문 기록을 통해서 연대를 추정하였는데, 이집트 남부에서 명문이 없는 공동묘지들을 발굴하게 되었다.

그는 서로 다른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양식적인 변화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러나 무덤들이 층위도 존재하지 않고 장기간 사용되었다면 확장된 증거가 있을 만도 한데, 그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페트리는 이 공동묘지에서 나온 토기를 다섯 개 이상의 형식을 포함하고 있는 무덤에서 어떤 형식들을 포함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가장 많은 형식이 있는 것 을 순서 배열하였다. 페트리는 절대연대를 정확히 알기 어렵기 때문에 “계기연대”를 이루도 록 50개로 구분하여 배열을 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페트리는 자신들이 분류한 토기의 분 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유행이 되었다가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하였다. 즉 토기들이 발생하고 그 토기의 기형이 많이 만들어지는 시기가 있었고, 다른 족속이 들어오면서 유행하 던 토기가 감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페트리의 분류를 표로 그려보면 전함형을 그리 고 있다고 하여 전함형곡선을 이룬다고 말하기도 한다.

·형식분류의 발달과 고고학 문화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더 체계적인 순서배열법이 발견되면서 유물의 형식 분류에 있어서도 발전을 하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몬텔리우스가 수립한 형식 분류를 대부분 고고학자들이 받아 들였다. 형식 분류는 선사시대의 삶의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편년을 수립하기 위한 수단 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고도르초프에 이어서 프랑수와 보르드에 의해서 유물에 대한 형식 분 류가 편년을 세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유물 자체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미국에서 유물에 대한 형식 분류는 글래드윈 부부는 무역이나 교환 같은 과정이 있기 때문 에 유물은 문화는 별개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제임스 포드는 형식 이란 단지 문화사를 해석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때만 인정될 수 있고 시공간적으로 비교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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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면 형식들을 나눌 수 없다고 말하였다. 포드는 형식을 단지 역사적인 해석을 위해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이후 토기 형식이 이를 제작하고 사용한 사람들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 기능성과 유용성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라우즈는 토기 형식 중에서 가장 밀집되어 있는 부 분에서 내재적인 형식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이후의 조사에서도 규칙적으로 보였다. 이러한 형식들은 포드가 생각했던 형식들보다 인간생활과 문화변화에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고고학 문화 개념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다른 특성을 가지고 발달하였다. 미국에서는 중 서부분류체계를 토대로 하여 개별 특성의 빈도수가 아니라 공유하고 있는 특성의 수에 근거하 여 분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분류체계는 유물에 대한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그저 편년을 수립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되었다.

·문화복원에 대한 관심

문화복원에 대한 관심은 스칸디나비아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스칸디나비아는 선사시대 사람 들의 생활양식에 관심을 두고, 영국과 프랑스에서 패총이나 야영지에 대한 연구에는 관심이 없을 때 덴마크에서는 패총에 대한 연구가 이미 이루어지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 생활양식에 관심은 취락 유적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층위발굴이 아닌 대규모 발 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발굴조사에는 피트리버스의 발굴법이 도움이 되었다. 취락 유적의 기둥구멍을 통해서 나무 구조를 복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물들이 유적 어디에서 출토되었는지 더 자세하게 기록을 하였고 유물이 출토되는 유구들과 관련시킬 수 있었다. 그 리고 점차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에 관심을 가지면서 파편이나 동식물의 유체도 연구를 하였 다.

유럽과 미국의 문화사고고학의 다른 특성을 가지고 지역적으로 발전하였지만, 연구 경향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 문화사 접근이 이루어지는 동안에 인종주의 경향은 폐지되었지만 아직까지 원주민의 창의성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편년법과 발굴법, 형식 분류에서 체계적인 방법으로 더 발전을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편년에 집중하던 과학 적인 것에서 역사학적인 것으로 고고학에서의 학문적 목적이 변화한 것에 큰 의의를 둘 수 있 다.

12. 고고학 이론과 문화사고고학

·콜링우드와 관념론적 접근

콜링우드는 관념론을 옹호하였다. 그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단순한 것에서부터 인간의 안 에 이미 존재하는 감성, 생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각 개인들은 각 사물들에 대해서 기존에 이해하고 있던 방식과는 다르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사물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있고 그 기준을 벗어나서는 이해를 할 수 없다는 것 이다.

콜링우드에게 과거는 사라져 없어져 버린 것이 아니라 현재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과 거에 대한 것들은 현재 남아있는 문헌기록과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 각하였다. 그리고 과거는 현재의 문헌기록과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기 때문에 선사시대 사람 들의 행위의 목적과 생각들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행하였던 행동들이나 유물들을 충분히 모 사를 해 봄으로써 이해를 해야 된다고 하였다. 콜링우드에 의하면 고고학자들이 과거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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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알려면 경험적 접근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고고학 문화와 종족성

문화사고고학자들은 고고학 문화는 공통의 생활양식을 가진 종족들이 남긴 것이라고 생각하 였다. 그래서 고고 자료를 해석하는 것이 종족성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1950 년이 되어서 맥화이트, 윌리와 필립스를 비롯한 고고학자들은 그러한 공통의 언어나 생활양식 을 가진 종족들의 문화가 고고학 문화와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셸리안과 아슐리안 문화는 아프리카, 서아시아, 유럽 등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하고 꽤 오랫동 안 존속한 것을 근거로 보면 공통의 양식을 가진 종족들이 남긴 고고 자료라고 보기에는 어렵 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셸리안과 아슐리안은 문화보다는 ‘공작’으로 불리게 되 었다.

이러한 셸리안과 아슐리안의 근거뿐만 아니라 다른 근거를 통해서도 고고학 문화가 종족성 을 알 수 있다는 것에 논리가 있는지에 대해서 제기되었다. 수렵채집민들의 문화에서 나타나 는 계절적인 양상들은 서로 다른 고고 자료와 관련될 수 있고 모든 고고학 문화들이 정확한 경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고학 문화와 종속성에 관한 비판 들은 문화사고고학이 쇠퇴하게 되면서 과정고고학자들의 기본관념에 영향을 받아 나타나게 되 었다.

이러한 비판들을 통해서 고고학자들은 문화변화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원인들 중에서는 종족성 뿐만 아니라 시간적 차이도 존재하고, 환경적인 원인과, 종교, 자원 등에서 나타난다고 알게 되었다. 프레더릭 바스는 종족성이란 개인과 집단들이 서로 다른 맥 락에서 서로의 문화들을 조정하는 주관적인 정체성이라고 하였는데, 종족성이라는 것이 고고 학적 기록에 의해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문화사고고학의 한계

문화사고고학의 가장 큰 한계는 발굴법이나 체계적인 형식분류가 발달하게 되었는데도 여전 히 문화변화의 원인을 전파나 이주라는 외부적인 요인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또한 이에 대해 서도 왜 전파나 이주가 행해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 은 오래전부터 인식되어 왔지만 여전히 내부적인 요인에서가 아니라 외부적인 면에서 찾고 있 었다.

13. 결론

유럽의 고고학자들은 고고 자료가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단선진화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고고학 문화라는 개념을 정의하고 이것의 기원을 전파와 이주의 결과로 받아들였다. 유럽에서 는 고고학이 역사학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면서 과거 선사시대 사람들의 일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유럽에서 고고학은 민족의 통일성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유럽 의 고고학 성향은 다른 나라에서도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러한 종족성에 대한 관심은 유럽 이나 다른 나라에서 자신들의 집단들이 인정되고 자신들의 역사를 찾기 위한 연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화사고고학을 지지하는 학자들과 아닌 학자들의 연구의 문제점은 고고학을 종족성에 대한 정보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종족성은 고고학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고고학에 서 문화변화를 설명하는 하나의 이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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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문화사고고학은 한계를 드러내면서 과정고고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게 되었는데 캐나다 에서는 고고학 문화의 개념뿐만 아니라 물질문화의 시공간적인 변화에 대해서도 서술할 수 있 게 되었다. 그리고 과정고고학은 캐나다 원주민들이 어떻게 환경에 적응하게 되었는지를 설명 하게 도와주어, 문화사고고학과 과정고고학이 혼합된 양상을 보여주었다.

문화사적 접근의 가장 큰 의의는 과거의 과학적 학문에서 역사적 학문으로 변하였다는 데 있다. 크게 인종주의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지만 고고 자료를 통해서 과거 선사시대 사람들의 역사를 추정하려 하였다. 민족주의로 인해서 고고 자료 자체에 대한 연구가 소홀하게 된 경향 도 보이지만 이후에 발굴법과 형식 분류의 체계적인 발달로 인해서 지역을 ‘문화’라는 공통된 것으로 묶기도 하였다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있다.

7장. 초기 기능과정고고학

시간이 흐르면서 문화변화를 전파와 이주로 보는 문화사접근 방법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되 었다. 그래서 과거 선사시대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더 체계적이고 새로운 접근을 채택하였다.

이 새로운 접근은 기능적이고 과정적인 성격을 가진다. 기능주의는 변화를 알아보기 이전에 한 체계가 일상생활에 어떠하게 적용하는지를 먼저 이해하려고 하였다. 과정적 접근은 체계가 왜 변화를 겪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1. 환경적 기능과정주의

최초의 과정적 접근 방법으로 스칸디나비아의 스틴스트룹의 후빙기 포플러 숲의 연구를 예 로 들 수 있다. 19세기 말에 스칸디나비아 고고학자들은 문화사 접근방법에 열중하였는데 실 제로는 환경변화나 생물학과 관련된 연구를 더 많이 하였다. 1905년에 지질학자 게라르드 드 기어는 빙하의 앞 호수에 매년 생기는 빙퇴석층을 통한 빙하층위 연구와, 레나르트 본 포스트 의 꽃가루 분석을 예로 들 수 있다. 라파엘 펌펠리는 물이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정주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오아시스 설을 제안하였다.

이와 같은 자연 환경과 함께 인간행위에 대한 해석은 기능적이고 과정적인 접근에 대한 관 심을 증가시켰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당시 지리학자인 폴 비달 드라 블라쉬가 주장하였던 기 능주의적 접근이 주도 하고 있었다. 그가 주장한 지리적 가능주의란 자연 환경이 문화를 결정 하는 것이 아니라 각 문화에서 적응하는 개체들을 제한한다고 보는 것이다. 즉 지리적인 것이 문화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는 개인들의 성향이나 전통에 의해서 단지 지리적으로 옮겨 갈 수 있다는 것이다.

2. 사회인류학

1920년대 영국 인류학에서 민족학자인 브로니슬로 말리노프스키와 래드클리프브라운은 모 든 인간행위는 상호 의존할 수 있는 요소들로 이루어진 체계들과 관련지을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말리노프스키와 래드클리프브라운은 야외조사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직접역사적 접근법을 강조한 영국의 사회인류학은 프랑스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켕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뒤르켕은 사회는 상호 의존하는 체계들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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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말리노프스키와 래드클리프브라운이 주장하였던 것과 같은 것이다. 뒤르켕은 사회관계 의 기원은 외적인 것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부분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덜 진화된 사회는 복합성을 기본 특성으로 가지고 있고, 더 진화된 사회는 사회체계가 정리되 었기 때문에 복합성이 없는 조건에서 사회의 행위들을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뒤르켕은 사회체계는 통합된 개념일 수 있지만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서로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3. 차일드의 경제적 접근

차일드는 선사시대의 경제적인 변화의 흐름을 찾아서 경제학자들의 연구를 모방함으로써 경 제적 흐름에 관한 구체적인 사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고대의 동방에 대한 새로운 지식』에서는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처럼 선사시대에도 두 가지의 혁명이 일어 났다고 보았다. 그것은 신석기혁명과 도시혁명이다. 두 혁명들을 통해서 선사시대에 기술과 인구의 증가를 가져왔다고 보았다. 또한 서아시아에서의 인구의 증가로 인해, 교역, 전문가의 수 증가로 인해서 외부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 유럽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였 다. 즉 문명의 시작은 서아시아에서 발달하게 되었고 두 가지 혁명을 통해서 유럽으로 확산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차일드의 선사시대의 경제적인 관심은 차일드가 선사시대의 중요한 혁명을 두 가지로 정의 할 수 있게 하였고 문화변화를 전파론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기술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경 제적으로 접근을 하였다. 그래서 동일한 기술의 기원이라도 서아시아와 유럽에서 다른 양상을 띠면서 발달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일드의 경제적 접근의 해석은 초기 차일드의 문화사 접근의 한계에서 벗어나 문화변화의 요인을 외부적인 것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것에 서 찾는 것으로 변해갔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4. 소비에트 고고학

·소비에트 고고학의 시작

러시아에서 고고학의 시작은 두 번의 흐름으로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레닌의 신경제정책이 다. 이 정책으로 인해서 고고학에서도 많은 양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러시아는 몬텔리우 스와 다른 스칸디나비아의 고고학자들의 형식 분류 체계에 영향을 받아 문화사 접근 방법을 채택했는데 신경제정책으로 인해 이것이 더욱 강화되어갔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서는 고민족학적 접근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고고학이 민족학에 포함되는 즉, 고고학이 민족학의 분과라고 생각하고 고고 자료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직접 역사적 접근 방법 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하나의 문화 일반화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경 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두 번째는 스탈린이 권력을 가지게 된 이후이다. 20년대 말에 문화혁명이 일어나면서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인 고고학자들에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태토를 촉구 하였다. 문화혁명으로 인해서 기성세대의 고고학 접근 방법을 비판하고 마르크스주의 접근 방법을 찬양하였다. 고도 르초프와 이전의 학자들이 채택하였던 몬텔리우스의 접근방법들은 유물에 너무 집중한다는 것 에 비판을 받았다. 거기다가 고민족학적 접근방법을 취하였던 학자들은 더욱 엄밀하게 다루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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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와 변화의 설명

마르크스는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를 경제라고 주장하였다. 경제적인 것이란 사회를 구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르크스는 기술의 변화를 인간의 의식으로 인해 발달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저 사회적 맥락의 한 일부분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들은 서로 다른 계급을 가진 이들의 이익과 충돌은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고 이러한 것은 사회 안에서 발생하는 특징이며 사회가 변화하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역사적 사건들을 설명하고 인류역사에서 시간적 흐름에 따른 변화에 대해 일반 화를 만들려고 하였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프랑스의 계급투쟁』에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그는 경제적 토대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집단들의 충돌에 근거해 설명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기술변화는 사회적 맥락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이 저술들 에서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사회를 재생산할 수 있다고 보았고 사회는 하나의 통합된 것이 아 니라, 각각 그 자체의 역사적 산물로 인정하고 경제적 변화 흐름에 따라 적응한 것이라고 보 았다. 따라서 경제 흐름의 변화는 일정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화변화 또한 예측 불가능하여 일반화의 법칙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초창기 소련 고고학의 양상

라프도니카스와 그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고고학을 이용해서 마르크스주의의 개념을 밝히고 자 하였다. 문화사 접근 방법에서는 기술이 문화변화의 주된 요인이었다면 이제는 문화변화의 주된 이유는 ‘사회’적인 요인에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주의 접근방법은 기술변화만이 아니라 사회까지도 연구하면서, 생활유적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취락이나 다른 야영 지시설과도 같은 유적을 구성하는 유물들에도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소련의 고고학자 들은 전파와 이주에 대한 문화변화를 무시하였다. 전파는 인간의 창의성을 훼손한다고 거부하 였고, 문화변화에서 종족의 이동을 무시하면서 종족성에 따른 문화적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였 다.

소련의 고고학은 문화변화에 있어서 기술발달로 선사시대를 해석하는 관점을 거부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몬텔리우스나 다른 학자들의 접근 방법인 유물들의 형식 분류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문화변화의 요인을 ‘사회’적인 것으로 해석하면서 유물의 형식 분류에 대한 관심을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형식 분류를 무시한 소련은 형식학, 문화편년, 문화 단위 의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유럽 중부 및 서부지역의 연구에 비해 뒤처지는 결과를 초래하 였다.

·20세기 중반의 소련 고고학

정부에서 소련 고고학이 정치적으로는 잘 발달이 되었다고 하였지만 학문적으로는 아직 기 술이 부족하였다. 학문적인 발달을 위해서 이전의 문화사적인 고고학과 구별하기 위해서 소비 에트 고고학이라는 말로 불렀다. 소비에트 고고학자들은 전통적인 역사학적 접근 방식으로 고 고 자료를 통해서 역사적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역사지, 미술사, 민속학 등의 과거를 연구하는데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정보들과 결합하였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소비에트 고고학자들에게 문화 혁명기동안에는 고고학을 마르크 스주의적 용어로서 해석을 해야 했는데 이를 거부하는 이들은 없었다. 몇몇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의 이러한 해석 때문에 고고학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소련 의 고고학자들은 고고 자료를 분석하면서 형태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용어를 붙여 사용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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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고고 자료들은 사회적 산물이 아니라, 각 문화마다 다양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5. 마르크스주의 고고학자로서의 차일드

·차일드와 소련고고학

차일드는 소련을 방문한 이후에 자신의 경제적 접근 방식에 마르크스주의적인 해석을 하였 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사회를 보았을 때, 그는 진보적 사회와, 보수적 사회로 구분하였 다. 진보적 사회는 생산관계가 생산성을 늘리고 사회제도와 신앙 간에 체계가 존재한다고 했 던 반면에 보수적 사회는 사회 정치적인 요인들이 사회변화를 가로막고 있다고 보았다. 차일 드는 초기의 문명에서 지배계급들은 부를 축적하고, 이를 독점하고, 부를 사용하여 장인 집단 들이 새로운 지식을 축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들을 관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과정 과 같이 서아시아 문명이 유럽 문명에 비해 덜 발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였다. 차일드는 이 연구를 통해서 역사를 형성하는데 경제적 접근 방식과 상부구조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믿 었다.

차일드는 원주민들이 미개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사회는 사 회의 기술발달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차일드는 두 가지 사회진화를 제안한다. 첫째는 진보적인 것으로 사회, 경제적인 이데올로기와 함께 기술이 발달한 상태이 고 둘째는 보수적인 것으로 정체된 사회, 경제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발전을 하지 못하고 이 데올로기에 묶여져 있는 사회라고 하였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천착

차일드는 마르크스주의의 사회변화에 대한 해석에 대해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의 저술들을 읽으면서 ‘인지’라는 것에 주목을 하였다. 마르크스의 해석은 인간행위는 사회라는 맥락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차일드는 인간행위는 ‘인지’적으로 중재되었다고 보 았다.

차일드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을 따르면서도 다른 관점을 완벽히 배제하지 않았다. 문화변화 의 주된 요인을 사회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변화의 시작에는 기본의 문화유형과 교역이나 접촉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진화』에서 차일드는 시간이 흐르게 되면 동 일한 문화적 특성을 가지는 사회가 나타나게 되는데, 사회들은 경제적인 배경에 따라 사회체 계가 발전하게 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사회체계들은 지리적, 환경적 차이에 따라서 주변에 있는 다른 문화들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가지며 발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차일드는 마 르크스주의 적인 관점에서 경제적 토대와 상부구조만이 사회변화를 구성하고 있다고 보지 않 고 다른 많은 방식들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차일드의 후기 저술들

차일드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에 대해 해석을 하려고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마지막 저술에서 는 문화사적 접근 방법의 한 방식이었던 형식 분류에 시간을 쏟았다. 도구들에 해당하는 고고 자료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취락유형이나 매장들을 활발히 조사하지 못하여 제대로 적용 하지 못하였다. 즉 차일드의 자신의 초기 연구방법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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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레이엄 클라크

클라크는 세 가지 영향으로 인해서 기능주의적 연구 방법을 시도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스 칸디나비아의 고고학자들의 연구방법, 두 번째는 영국 사회인류학자의 구조기능주의와 마지막 은 사회와 인간행위에 주목해야한다는 관점에 영향을 받았다.

클라크는 『고고학과 사회』에서 고고학에 대해서 정의를 하였다. 고고학이란 과거의 사람들 이 어떻게 살았는지 연구해야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고고학적 기록과 유물들을 기능 주의적인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고학자들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경제, 사회, 신앙 등을 할 수 있는 한 재구성해야하고, 이러한 것들이 문화 안에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기능주의적인 관점으로 인간이 어떻게 생활하였는지를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후에 클라크는 유럽 선사시대의 생활양식에서 보여지는 인간들의 생계행 위에 대해서 논문들을 쓰기도 하였다. 클라크는 이러한 논문을 통해서 자신의 생태학적 접근 방법을 발달시키고자 하였다. 클라크는 경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스타가 유적을 통해서 빙하시 대 말부터 역사시대까지 유럽의 경제적 발달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클라크는 고고 자료를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였다는 점과 문화를 환경과 관련하여 과 거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양식에 대해서 경제적 토대를 중심으로 세부적으로 재구성하려고 하였다면 문화변화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클라크는 고고 자료가 사 회에서 어떤 기능을 하였는지를 파악하여 생활양식을 재구성하려고 하였기 때문이 유물들의 기술발달에는 문화사고고학에서의 형식 분류 접근 방법만큼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7. 미국의 초기 기능주의

미국 고고학에서 기능주의적인 관점은 19세기에 적용되었다. 기능주의적인 관점은 고고학자 들이 유물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기능을 하는지 의문을 가지면서 발달하게 되었다. 고고 학에서의 기능주의적인 관점은 미국 인류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유럽에서의 인류학은 보아 스학파의 문화인류학의 영향을 받았는데, 보아스학파는 문화는 전파와 이주로 인해서 한 곳으 로 보여 집합을 이룬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보아스 학파의 의견들은 미국의 고고학자들 에게도 영향을 미쳐 과거 선사시대 사람들의 행위를 알기 위해서는 고고 자료를 형식 분류로 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 다. 미국 고고학에서 이러한 접근 방법들이 아주 일시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해도 1943년이 되면 미국에서 이러한 접근 방법들은 당시의 고고학 흐름을 주도할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8. 연결적 접근: 월터 테일러

테일러는 미국의 고고학자들은 고고 자료를 지리적 분포로 분류하고 고고자료를 바탕으로 한 문화변화를 전파와 이주의 측면에서만 해석하였다고 보았다. 미국 고고학자들은 생활양식 을 복원하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그거 실내에서의 작업만 했다고 보고, 고고학자들의 야 외조사에 있어서 침체기라고 하였다. 그래서 선사시대 사람들의 식생활이나 주거생활에 대한 것은 알지 못했고 출토된 유물의 맥락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테일러는 이러한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연결적 접근을 제안하였다. 테일러는 유물 과 유적이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지 연구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유물이나 유적의 기능을 세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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