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제1장 경제체제와 체제전환의 기초이론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2

Share "제1장 경제체제와 체제전환의 기초이론"

Copied!
21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제1장 경제체제와 체제전환의 기초이론

제3절 체제전환의 이론

1. 체제전환의 개념

러시아와 동유럽, 그리고 중국과 동남아시아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전환에 관한 연구와 토론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정작 ‘체제전환’이라는 개념을 어떻 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한다. 여러 문헌이나 토론들에 서 유사한 용어들이 때로는 동일한 의미로, 때로는 미세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가지 고 사용되다 보니 개념상의 혼란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여전히 자신들의 체 제를 사회주의로 부르는 중국에서는 체제전환이라는 표현보다 체제개혁, 더 단순하 게는 개혁개방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체제전환, 체제개혁, 체제이행 등의 개념을 정 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그 하위개념으로서 단일전환과 이중전환, 동시적 개혁과 순차적 개혁, 위로부터의 개혁과 아래로부터의 개혁 등에 대해서도 더 명료 한 정의가 필요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개념들의 사용법은 개인이나 집단에 따라 관습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일정한 수준의 합의에 이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1)

체제의 '전환'(transformation)이라는 용어는 스탈린에 의해 숙청된 옛 소련의 정 치가 부하린(Nicholas Bukharin, 1988~1938)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다.(팽 성철, 2013, 7쪽.) 부하린이 사용한 체제전환의 의미는 자본주의 사회가 공산주의 사회로 변형하는 과정을 의미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변형을 가리키는 용어로 그 때까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이행(transition)’이다. 그런데도 부하린이 굳이 이행이라는 용어를 피하고 전환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회주의의 목적의식성을 강조 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앞에서도 서술한 것처럼 하이에크의 예를 따라 어떤 사 회경제체제를 자생적 질서와 인위적 질서로 구분해 본다면, 자본주의는 자생적 질

1) 여기서 ‘동유럽’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해 둘 필요가 있겠다. 이 책에서도 지 금까지 써 온 것처럼 우리가 관행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동유럽이라는 용어는 냉전 시기에

‘서유럽’과 구분하기 위하여 만든 개념이다. 그러나 동부 유럽의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 니아 등과 중부 유럽의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은 역사와 문화는 물론 정치체 제와 사회구조 및 경제발전의 수준 등에서 확연히 다르므로 구분해야 옳다는 지적도 있 다.(윤대규, 2012, 182-83쪽.) 이 책에서는 필요와 편의에 따라 동유럽이라는 표현과 중 부 유럽 및 동부 유럽이라는 표현을 변용하기로 한다.

(2)

서이며 사회주의는 인위적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자생적 질서의 변형 즉 고대로부 터 중세로, 봉건제로부터 자본제로의 변형에 대해서는 이행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 다. 자본주의로부터 사회로부터의 변형에 대해서도 그 당시에도 이행이라는 표현이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지만, 부하린은 이 변형은 인위적이고 목적의식적으로 이루 어져야 하므로 전환이라는 용어가 더 적확하다고 본 것이다. 옛 사회주의 국가들에 서 일어나고 있는 개혁과 변화도 인위적인 과정이므로 체제전환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겠다.2)

한 경제체제로부터 다른 경제체제로의 인위적 변화는 크게 체제개혁과 체제전환 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사회주의로부터 자본주의로의 또는 계획경제로부터 시장 경제로의 변형을 두고 정의할 때, '개혁(reform)'이란 분할되지 않은 공산당의 권력 독점과 지배적인 공식 이데올로기와 국가적 또는 전인민적 소유형태 그리고 관료적 조정기구의 지배에 대해 역방향에서의 지속적이고 본질적 변화를 의미한다. 개혁은 또한 이 역방향에서의 변화가 깊어야 하며 적당히 급진적이어야 하지만 다른 한편 체제의 완전한 변화를 포함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혁명(revolution)‘과 구분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르면 본래의 의미에서 혁명은 하나의 사회구성체에서 다 른 사회구성체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즉 봉건제로부터 자본주의로의 부르주아 혁명,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등과 같은 변화가 그것이다. 따라 서 혁명은 체제전환과 거의 동일한 의미이다. 혁명과 개혁은 서로 대비되기는 하지 만 반드시 대립하는 개념들은 아니다. 가령 어떤 체제전환은 개혁을 거쳐 혁명에 이르지만 다른 경우에는 개혁 없이 직접적으로 혁명에 이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혁명이라는 용어는 신속하게 갑작스레 폭발적으로 아래로부터 일어나는 정치적 변 화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다. 이에 반해 개혁은 점진적이고 꾸준한 진보를 이루는 과정이며, 현재의 체제에 불만을 가진 정치세력에 의해 위로부터 평화롭고 비폭력 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중국과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사회주의 국가들에서처럼 사회주의의 기본 틀이 유지되는 가운데 이루 어지는 경제체제의 변화를 체제개혁으로, 소련 및 동유럽과 같이 정치․경제․사회체제 는 물론 국가의 지도이념으로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 급격한

2) 다만 어떤 이들은 사회주의로부터 자본주의로의 공식적인 제도 변화를 ‘이행’으로, 정치 체제나 경제제도의 변화를 포함한 공식적․비공식적 연결망구조와 문화 및 지배적 신념체 계의 변화까지를 망라하는 개념을 ‘전환’으로 구분하기도 한다.(김영진, 2012, 10쪽.) 이 경우에는 전환이 이행을 포함하는 상위개념이 된다. 또 다른 이들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를 최종 목표로 하는 변화의 과정을 ‘체제전환’으로, 다양한 형태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를 조합하는 변화들을 ‘체제변형’으로 부르기도 한다.(박형중, 1997, 141쪽.) 이는 현실에 서 나타나는 체제전환(체제변형)의 다양한 형태들을 고려한 개념이다.

(3)

변화를 위한 시도를 체제전환이라고 구분할 수 있겠다.

앞에서 정의한 것처럼 경제체제는 소유제도와 자원배분방식을 포함한 서로 정합 성을 가진 다양한 제도들이 유기적으로 결함된 총체를 가리킨다. 사회주의로부터 자본주의로의 체제전환이 해결해야 할 주요한 과제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 된다.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소유구조의 변화 즉 생산수단의 국유 및 공유제 를 사유제로 전환하는 것과, 자원의 배분과 수요공급의 조절방식을 계획기구로부터 시장기구로 전환하는 것이다. 시장기구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생산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하위조직으로서의 기업이 아닌 영리기업의 창출이 필요하다.

또한 정부가 통제해 온 금융부문을 자율화하고, 정부가 계획의 수단으로 활용해 온 재정을 건전화할 필요가 있다. 한편 대부분의 옛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대부분의 무역이 같은 사회주의권 국가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경제개혁 을 위해서는 해외자본의 도입도 필요하다. 따라서 대내적 개혁조치들과 함께 대외 적 개방도 체제전환의 주요한 과제가 된다.

마지막으로 체제전환의 성과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동유럽의 체제전환에 관한 최근의 연구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과제들을 주요한 분석 대상으로 하고 있다. 즉 거시경제의 안정화와 경제성장의 관계, 초기조건의 경제성 장에 대한 영향, 경제자유화 정책과 구조개혁의 경제성장에 대한 효과, 그리고 제도 정비와 경제성장의 관계 등이 그것이다.(김영진, 2012, 14쪽.) 유럽부흥개발은행 (EBRD)은 체제전환의 성과를 평가하기 위하여 소규모 사유화, 대규모 사유화, 기업 개혁, 가격자유화, 무역 및 외환제도, 경쟁정책, 은행개혁과 이자율 자유화, 증권시 장과 비은행 금융기관, 인프라스트럭처의 개혁 등 아홉 개의 지표를 제시하고 있다.

각 지표에는 아무런 개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1점부터 선진 시장경제 수준인 4점 또는 4.33점까지가 부여된다. 따라서 체제전환 국가들은 9점에서 38.97점 사 이에 위치하게 되는데, 체제전환을 완료한 것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29.97점 이상 을 획득하여야 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28개 조사 대상국들 가운데 헝가리와 폴란 드를 포함한 8개 국가는 체제전환을 완료하였다고 평가되지만 나머지 국가들은 그 렇지 못하다.(김영진, 2012, 29-31쪽.) 다만 이들 나라에서 제도개혁의 진척 정도 가 반드시 경제성장이나 사회발전의 수준과 조응한다고 결론짓기는 어렵다.

2. 체제전환의 유형

옛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발생한 변화는 혁명의 정의에 있어 양면적이라는 점에

(4)

주의해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 어떤 국가에서는 신속하게 이루어졌지만 또 다른 국가에서는 상대적으로 천천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둘째, 위로부터 그리 고 아래로부터의 다양한 조합이 변화의 주체가 되었다. 셋째,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비폭력혁명이 이루어졌지만 헝가리와 루마니아에서는 유혈적이고 폭력적인 혁명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팽성철, 2013, 8쪽 이하.) 따라서 보다 진전된 논의를 위해서 는 옛 소련과 동유럽은 물론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여러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진행 된 체제전환의 과정과 내용을 좀 더 상세하게 비교해 보아야 한다. 체제전환의 유 형을 구분하는 기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개혁의 목적과 내용이 무엇인가 와 개혁의 과정 및 순서가 어떠한가 하는 것이다.

체제전환이라고 할 때 전환의 의미는 정치체제의 변혁과 경제체제의 변혁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전환 유형을 구분하는 데 가장 중요한 관점은 정치개혁 즉 공산당 권력독점체제의 개혁과 경제개혁 즉 계획 경제로부터 시장경제로의 전환이 동시적으로 진행되었느냐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느 냐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비슷한 문제의식을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이 동시에 이 루어졌는가 즉 이중전환인가, 아니면 정치개혁 없이 경제개혁만 이루어졌는가 즉 단일전환인가 하는 방식으로 제기하기도 한다.3) 가령 공산당 권력의 붕괴와 소비에 트연방의 해체가 전혀 예상되지 못한 채 급격히 진행된 이후에 경제개혁이 추진된 소련이나 역시 예상치 못한 베를린 장벽(Berlin Wall) 붕괴 이후의 동독, 그리고 차 우세스쿠(Nicolae Ceausescu 1918~1989) 정권의 파멸 이후의 루마니아 등에서 잘 보이듯이 소련과 대다수의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정치개혁이 선행하였다.

소련과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정치개혁과 동시에 혹은 정치개혁을 통하 여 급진적 경제개혁을 수행하는 이중전환이 이루어졌다. 정치적으로는 공산당의 일 당독재가 붕괴하고 보통선거를 통해 공화정과 의회민주주의체제가 도입되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공산당과 중앙정부에 의해 획일적으로 결정되고 집행되어 온 계획경 제체제에서 개별 경제주체들이 자신의 이익과 효율을 추구하는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이 진행되었다. 물론 체제전환 이전에 여러 사회주의 국가들의 정치경제체제가 동일했던 것은 아니다. 소련과 다수의 옛 사회주의 국가들은 흐루쇼프(Nikita Sergeevich Khrushchyov, 1894~1971) 이후 일정한 체제내 개혁을 꾸준히 추진 해 온 반면에 루마니아와 북한 등은 스탈린주의적 체제를 유지해 왔다. 그럼에도 북한을 예외로 한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체제전환과정은 그 근본적인 측면 에서 대체로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동유럽 국가들의 경우와 대조적으로 중국과 동

3) 단일전환과 이중전환의 개념과 보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김영진(2012)의 제4장, 특 히 182쪽 이하를 참조할 것.

(5)

남아 국가들은 대체로 기존의 정치체제가 지속되면서 경제개혁이 추진되었다. 경제 개혁이 정치개혁에 선행하면서 정치개혁은 순차적으로 또 점진적으로 추진되었다는 뜻이다.

체제전환의 유형을 구분하는 다른 관점은 개혁의 과정이 급진적이었는가 점진적 이었는가 하는 점이다.4) 일반적으로 급진적인 충격요법은 가격자유화, 거시경제의 안정화, 사유화 등으로 구성된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을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추진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점진주의는 이러한 체제전환을 단계적인 방식으로 조정을 거쳐 추진하는 방식이다. 사적 부문을 허용한다는 점에서는 두 방식 모두 공통적이 지만, 충격요법에서는 사적 부문의 자유화와 함께 국유부문에 대한 재정지원이나 보호제도는 철폐되는 반면, 점진적 방법에서는 국유부문을 온존한 채로 사적 부문 의 설립을 허용한다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 두 방식의 차이는 단순히 개혁의 속 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혁의 진행과 함께 국유부문에 대한 예산제약을 연성화 할 것인가 아닌가에 있다.(김영진, 2012, 15쪽.)

이미 서술한 것처럼 동유럽 국가들에서 시도된 충격요법이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 스 즉 재정개혁, 규제완화, 무역자유화 등으로 요약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추진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체제개혁은 모든 나라에 서 작용될 수 있고 또 동일한 결과를 산출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동유럽 국 가들에서 실제로 추진된 시장경제로의 전환과정과 내용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헝가 리의 경우에는 보수적인 ‘사회적 시장경제’의 이데올로기가 우세하였다. 체코슬로바 키아에서는 신자유주의적 대처리즘(Thatcherism)이 관철되었다. 폴란드는 이 두 가 지 경우의 중간에 위치한다. 헝가리의 사회적 시장경제 이데올로기는 시장경제를 체제전환 정책의 최종 목표로 상정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경제적 전환은 시장의 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지기보다 사회와 격리된 중앙집구너화된 관료집단에 의하여 더 효율적으로 수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되었다. 시장화 과정은 기존의 사회적 안정을 동요시킬 수도 있는 위험한 과정이기 때문에 집권화된 국가기구에 의해 공 급되는 사회복지에 의해 완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개혁은 국가 주도의 보다 급속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 전략은 시장이 체제전환의 결과일 뿐 아니라 시장 자체가 체제전환을 이끄는 강력한 수단으로 간주하였다. 이 러한 경우 국가의 역할은 변화에 대한 사회적 저항을 중립화시키는 방향으로 시장 화 과정을 조정하는 것이다.(박형중, 1997, 142쪽.)

체제전환의 내용이 단일전환인가 이중전환인가, 또 체제전환의 과정이 급진적인

4) 급진적 개혁과 점진적 개혁의 개념과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김영진(2012)의 제5장, 특 히 195쪽 이하를 참조할 것.

(6)

가 점진적인가 하는 문제는 개혁의 주도세력이 누군가와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공 산당을 비롯한 구체제에서의 지배 엘리트계급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개 혁을 주도한 중국과 동남아 국가들의 경우는 대체로 경제개혁이 정치개혁에 선행하 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유형의 개혁을 ‘위로부터의 개혁’이라고 부 를 수 있겠다. 반면에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기존의 권력체제가 붕괴하거나 변형되면서, 정치개혁이 경제개혁에 선행하거나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그 과정도 급 진적이었다. 이처럼 이들 국가에서는 엘리트계급이 아니라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대 중들의 요구와 위력에 의하여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조금 더 세부적으로 관찰해 보면, 동유럽 국가들 안에서 도 체제전환의 성격과 정치개혁의 과정이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먼저 러시아는 지배세력 내부의 분열에 의하여 정치체제가 전환된 경우이다. 중 부 유럽 국가들에서는 대체로 기득권 세력 간의 타협에 의하여 정치체제가 전환되 었다. 다만 폴란드와 헝가리의 경우의 경우에는 이러한 구분이 매우 잘 들어맞지만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에는 민중봉기와 정치적 타협이 반복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지 않다.5) 중부 유럽 국가들과 대조적으로 동부 유럽에서는 민중봉기를 통한 정 치체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체제전환 유형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예가 루 마니아에서 차우세스쿠 정권의 붕괴이다. 그러나 불가리아와 알바니아의 체제전환 은 루마니아에서처럼 폭력적이거나 충격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서독과의 통 일에 의해 체제전환이 진행된 동독이나 여러 극심한 민족갈등을 겪으면서 여러 국 가들로 분열된 유고슬라비아의 경우는 또다른 유형으로 구분되어야 옳다.(윤대규, 2008, 80쪽.)

소련 및 동유렵 국가들과는 대조적으로 중국은 물론 동남아 사회주의 국가들 가 운데 경제규모가 가장 큰 베트남의 도이머이(Đổi mới) 정책도 공산당을 비롯한 기 존의 국가기구들과 지배 엘리트계급의 주도적인 역할에 의해 추진되었다. 캄보디아 와 라오스, 미얀마 등에서도 경제개혁의 속도와 무관하게 사회주의 체제가 유지되 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시아의 체제전환국들에서는 정치체제의 개혁이 전 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들 국가의 체제개혁은 동유럽 및 옛 소련의 급진적인 개혁에 비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중앙계획경제를 지지하는 기존체제의 틀과 지배 엘리트계급의 기득권을 위협하지 않고 새로운 경제

5)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동유럽 국가들의 연이은 체제붕괴에 영향을 받은 공산당과 지배 엘리트계급이 반대파의 요구에 항복하였다. 헝가리에서는 공산당이 선거를 통하여 반대파를 물리칠 수 있으리라는 오판에 따라 타협을 받아들였다. 사회주의 체제의 포기에는 공산당 냐부의 분열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폴란드에서는 강력한 야당 세력에 직면한 공산당이 타협을 시도한 경우이다.(박형중, 1997, 141쪽.)

(7)

조직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데 공통된 특징이 있다. 굳이 분류하지만 쿠바의 경우도 단일전환과 위로부터의 점진적 개혁 유형으로 분류해 볼 수 있고, 아직 체제전환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북한의 경제개혁도 역시 같은 유형의 개혁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6)

마지막으로 체제전환과 경제성장의 관계이다. 앞에서도 여러 차례 인용한 코르나 이는 경제체제를 전환하면 일정한 기간 동안 불황을 피할 수 없다는 ‘전환 불황 (transformation recession)’ 이론을 주장하였다.(김영진, 2012, 197쪽.) 물론 전환 불황은 장기적이거나 항구적인 현상은 아니며, 체제전환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극복된다. 말하자면 전환 불황은 체제전환에 따르는 학습비용인 셈이다. 그런데 코 르나이가 관측한 것은 주로 동유럽 국가들의 경험이다. 그러나 좀 더 넓게 여러 사 회주의 국가들의 체제전환과정을 비교해 보면 어떤 나라에서는 시장경제로의 개혁 이 경제성장을 선도한 반면에 어떤 나라에서는 오히려 경기후퇴를 야기하였음을 볼 수 있다. 중국과 베트남 등의 체제전환 유형에서 가장 주요한 특징은 주로 비국유 부문의 급속한 성장에 기초한 지속적인 경제성장이다. 반면에 소련과 동유럽 국가 들의 체제전환은 생산의 대대적인 감소와 경기후퇴를 동반하였다.(박형중, 1997, 134-35쪽.)

이러한 경제적 성과의 다양성을 초래한 요인으로는 첫째 초기조건(initial conditions)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초기조건이란 체제전환국들의 정책 당국에 주어 지는 몇 가지 조건들을 의미한다. 세계은행은 체제전환국의 초기조건을 구조 (structure), 왜곡(distortions), 제도(institutions)라는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하고 있 다. 구조는 국내총생산에서 공업의 비중, 도시화, 사회주의권에 대한 무역의존도, 소 득수준 등을 가리킨다. 왜곡에는 억압된 인플레이션, 암시장 환율, 사회주의권과의 교역조건, 개혁의 역사, 체제전환 이전의 성장률 등이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제도에 는 시장의 경험, 지리적 위치, 신생국가 여부 등이 속한다. 세계은행은 이 가운데 왜곡이 체제전환 초기의 저조한 경제적 성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하였 다.(김영진, 2012, 199-200쪽.)

그러나 다양한 체제전환국들의 경험을 조사한 다른 학자들은 초기조건이 동일하

6) 소련 및 동유럽형의 체제전환에도 중국형의 체제전환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이 인도의 체 제전환이다. 인도의 경우는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었으므로 체제전환이라는 개념이 반드시 적절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네루(Pandit Jawaharlal Nehru, 1889~1964) 총리가 인도가 지향하는 사회체제를 ‘사회주의 유형의 사회(Socialistic Form of Society)’로 규 정한 이후부터 1991년의 경제개혁 이전까지 인도의 경제체제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사 적 소유)와 계획경제의 결합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유지해 왔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인도 의 경우를 체제전환의 세 번째 유형으로 정의한다.

(8)

거나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정치제도의 개혁이나 국유기업의 사유화 같은 조치들에서 다양성이 나타나거나, 반대로 초기조건의 차이에도 불구하 고 정치경제적 제도화에서 수렴의 경향이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래서 이들 은 그 이유를 사회주의 체제의 제도적(물질적)․문화적(비물질적) 유제의 현재적 구 속력, 즉 체제전환의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도 자칫 현재를 과거의 유제들로부터 단선적으로 설명 하는 역사적 결정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체제전환 의 결과를 경로의존적 규정력과 집합적 행위 주체의 전략적 선택의 결합에 따른 복 합적 산물로 설명하고 있다.(김영진, 2012, 16-19쪽.)

단일전환과 이중전환의 개념은 체제전환과 경제적 성과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에 도 유용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체제전환과 개혁의 주도세력이 누구인가에 관 한 문제이다. 체제전환은 체제내의 개혁과 달리 정부의 경제운용과 민간 경제주체 들의 경제활동방식에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체제전환은 당 연히 엄청난 혼란과 상이한 경제체제들 간의 충돌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공산당 중심의 정치체제와 기존의 권력엘리트 집단이 과연 개혁의 대상인가 개혁의 주체인가 하는 문제는 잠시 접어 두고, 진정한 문제는 과연 이러한 혼란을 누가 효 율적으로 수습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소련의 경우를 보면 공산당 권력의 해체보다 그 후에 새로운 권력체제가 제대로 수립되지 못하였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비유하자면 시장경제란 일정한 질서에 따라 개인들의 이기심이 발휘되는 질서인데, 소련과 일부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질 서는 없고 이기심만 극대화되었다.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업고 등장한 옐친(Boris Nikolayevich Yeltsin, 1931~2007) 정부는 지극히 무능력하여 그러한 혼란을 수습 할 수 없었다. 소련에서의 경기회복은, 비록 정치적 논란은 있지만 강력한 리더십을 추구한 푸틴(Vladimir Vladimirovich Putin, 1952~ ) 정부 이후에야 비로소 나타 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체제전환 이후의 경제적 성과가 정치적 리더십과 매우 밀 접하게 관련된 문제임을 보여 준다.

요컨대 여러 나라의 체제전환을 비교하는 데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왜 어 떤 공산권 국가에서는 기존의 정치체제가 경제개혁과 함께 해체되는 단일전환이 이 루어지고 다른 국가에서는 국가와 공산당 중심의 경제개혁이 추진되는 이중전환이 이루어지는가이다. 중국과 소련의 경우를 비교해 보면 체제전환 당시의 경제상황을 비교해 보면 중국보다 소련의 경제상황이 훨씬 안정적이었다. 당시의 중국은 문화 혁명의 후유증으로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개혁의 절실함도 당연히 중 국보다 소련에서 덜 심각하였다.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 )의 개혁

(9)

러시아․동유럽형 중국․동남아시아형 인도

정치개혁의 방식

러시아 형

동부 유럽형

중부 유럽형

중국․동남아시

아 쿠바․북한

정치개혁 지배세 없음

력의 분열

민중봉 기

정치세 력간 타협

기존의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개혁

기존의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개혁 개혁의

주도세력 아래로부터의 개혁

위로부터의 개혁

위로부터의 개혁

위로부터의 개혁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의 관계

단일전환: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이 동시에 진행됨

이중전환:

경제개혁이 정치개혁에

선행함

이중전환:

경제개혁이 정치개혁에

선행함

정치개혁 없음

개혁의

속도 급진적 점진적 점진적 점진적

경제개혁의

성과 경기후퇴적 경기진흥적

경기진흥의

효과 미미함 경기진흥적 도 실은 이 때문에 지나치게 낙관적이었고, 그래서 결국에는 실패했던 것인지도 모 를 일이다. 다른 한편에서 보면 개혁의 필요성이 훨씬 심각했던 것만큼 개혁에 대 한 저항은 소련에서보다 중국에서 훨씬 제한적이었다. 바꿔 말하면 중국에서는 개 혁의 필요성이 공산당 지도부와 일선 관료들 그리고 인민대중들 사이에서 비교적 광범하게 공유되어 있었다는 뜻이다.(박형중, 1997, 135-37쪽.) 발전된 시민사회는 민주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공산권 국가의 체제전환의 사회요인에서 시 민사회가 발달된 국가에서는 단일전환보다는 이중전환으로 체제전환이 이루어진 국 가가 많다. 반면, 시민사회가 성숙하지 못한 국가에서는 단일전환이 이루어진 국가 가 많다. 그런데 시민사회의 성숙은 민주화가 확산되는 국제적 분위기와 시민사회 의 자율성을 부여하거나 위축시킬 수 있는 정부통제의 정도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팽성철, 2013, 4-5쪽.)

<표 1-4> 체제전환의 유형

여러 나라에서의 체제전환의 유형과 성과를 비교하다 보면 자칫 경제개혁의 성과 를 단선적으로 성공과 실패로 평가하는 흑백논리에 빠질 위험성이 크다. 가령 소련 과 동유럽의 개혁은 모두 실패이고 중국의 개혁은 모두 성공이라는 도식적 논리가

(10)

바로 그것이다. 최근 들어 동유럽 국가들이 개혁 초기의 혼란을 어느 정도 극복하 면서 완화되기는 하였지만, 이런 도식화에서 생기기 쉬운 몇 가지 오류 또는 편견 이 있다. 첫째는 중국의 경제개혁을 아무런 모순 없는 순수하게 긍정적인 경험으로 묘사하려는 태도이다. 이런 편견은 더 나아가 중국의 경험을 섣불리 일반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쟁점은 좀 더 복잡한데, 그렇다면 중국의 성공에 국가와 시장은 서로 어떤 역할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경제개혁의 초기에는 시장이 효율적으로 국가의 통제 아래 있다 하더라도, 일정 한 자기순환의 구도에 올라서면 시장은 그러한 통제로부터 자율적이고자 하는 경향 이 있다. 따라서 중국의 성공을 오로지 국가의 적절한 통제에서 찾으려는 것은 명 백히 오류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중국의 성공이 오로지 중국의 개혁조치들이 시장 주의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역시 일변적인 오류라고 해야 옳을 것이 다. 과거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신흥공업국emf(Newly Industrializing Countries)의 성취에 대해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등의 국제기구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시장친화적(Market-Friendly)’ 개입이라는 다분히 형용모순적인 개 념으로 일반화하고자 하였다.(World Bank, 1993.) 하지만 동아시아의 경험을 그와 같이 평가하는 데 일정하게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중국의 경험을 그와 같이 단선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중국의 체제전환 성과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넘어 중국의 경험을 어떻게 일 반화할 수 있을 것인가는 체제전환의 연구에서 남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서술한 것처럼 여전히 워싱턴 컨센서스를 추종하는 몇몇 경제학자들은 중국의 성공을 시장 친화적 개혁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역시 워싱턴 컨센서스를 추종하는 다른 경제학자들은 반대로 중국의 성공을 다만 체제전환의 예외적인 사례일 뿐이라고 주 장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중국의 성공은 단지 일시적인 현상일 뿐 조만간 추락하 거나 붕괴하고 말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개혁이 막 시작되던 시기에도 이미 이런 주장들이 숱하게 나왔다는 사실은 이들이 스스로 의 편견에 집착하고 있을 뿐인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렇다 고 중국의 경험이 다른 체제전환국이나 개발도상국들에게 얼마나 보편적으로 적용 될 수 있을까도 여전히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11)

참고문헌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엮음, 『대안적 경제체제의 이론과 역사』, 한울, 2007.

경제교육연구회, 『역사와 쟁점으로 읽는 자본주의』, 시그마프레스, 2009.

김광수, 『비교경제체제론』, 구민사, 1986.

김영봉, 『경제체제론』, 박영사, 1987.

김영진 엮음, 『유라시아의 체제전환과 경제발전』, 한울아카데미, 2012.

大冢久雄, 조용범 옮김, 『사회과학의 방법과 인간론』, 풀빛, 1982.

大河內一男, 노태구 옮김, 『사회사상사』, 백산서당, 1982.

돕, M., 이선근 옮김, 『지본주의 발전 연구』, 광민사, 1980.

돕, M. 외, 김대환 엮음, 『자본주의 이행 논쟁』, 광민사, 1980.

레닌, V. I., 김영철 옮김, 『국가와 혁명』, 논장, 1988.

레닌, V. I., 남상일 옮김, 『제국주의론』, 백산서당, 1986.

마르크스, K. H., 강신준 옮김, 『자본』, 이론과실천, 1987.

마르크스, K. H., 김태경 옮김, 『경제학-철학 수고』, 이론과실천, 1985.

마르크스·엥겔스, 김재기 옮김,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 거름, 1997.

마르크스․엥겔스, 남상일 옮김, 『공산당선언』, 백산서당, 1989.

무어, T., 김현욱 옮김, 『유토피아』, 동서문화사, 2008.

박기혁, 『경제학사』, 법문사, 2001.

박천익, 「시장경제제도의 비윤리성과 제도적 한계」, 대구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사회과학연구』, 제7집 제2호, 1999.

박현채, 『자본주의 발달사 연구 서설』, 한길사, 1987.

박형중, 「구소련·동유럽과 중국의 경제체제전환의 비교 : 북한의 체제전환과 통일 한국 건설을 위한 교훈」, 유럽학회, 『유럽연구』, 제5권, 1997.

박형중, 「독일 ‘통일’의 교훈: 남북한 ‘통일’의 비-독일적 전망」, 성균관대학교 사 회과학연구소, 『사회과학』, 제37권, 1993.

박형중, 「루마니아와 북한: 사회주의 주변부의 스탈린체제에 대한 비교연구」, 평 화문제연구소, 『통일문제연구』, 제9권 1호, 1995.

배진영, 「경제질서, 경제체제, 경제제도, 경제헌법의 개념적 비교」, 한국제도경제 학회, 『제도와 경제』, 제1권 제1호, 2007.

배진영, 『경제질서의 이론과 정책』, 비봉출판사, 2006.

브레너, R. 외, 이영석 외 옮김, 『신자본주의 이행논쟁』, 겨레, 1985.

샤방스, B., 양준호 옮김, 『제도경제학의 시간과 공간』, 한울, 2009.

(12)

스미스, A., 김수행 옮김, 『국부론』, 동아출판사, 1993.

스티글리츠, J. E., 강신욱 옮김, 『시장으로 가는 길』, 한울아카데미, 2009.

엥겔스, F., 김민석 옮김, 『반듀링론』, 새길, 1987.

엥겔스, F., 박준식․전병유․조효래 옮김,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 세계, 1988.

월러스틴, I., 나종일․백영경 옮김,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창비, 1999.

윤대규 엮음, 『사회주의 체제전환에 대한 비교연구』, 한울아카데미, 2008.

이근식, 『서독의 질서자유주의: 오이켄과 뢰프케』, 기파랑, 2007.

이근식, 『신자유주의: 하이에크․프리드먼․뷰캐넌』, 에크리, 2008.

이근식, 『애덤 스미스의 고전적 자유주의』, 기파랑, 2006.

이지순, 「경제체제와 제도의 선택과 그 변화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경제연구 소, 『경제논집』, 제39권 제3․4호, 2000.

이해주․김호범, 『신경제사개설』, 박영사, 1999.

정건화, 「대안적 경제체제의 모색을 위한 제도경제론적 검토」, 한국사회경제학회,

『사회경제평론』, 제23호, 2004.

조용범, 『경제체제론』, 한울, 1989.

조준현, 『경제사상사』, 빅북, 2014.

주무현, 「시장사회주의 모델과 마르크스주의적 해석」,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엮음, 『대안적 경제체제의 이론과 역사』, 한울, 2007.

캄파넬라, T., 임명방 옮김, 『태양의 나라』, 이가서, 2012.

케인스, J. M., 조순 옮김,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 비봉출판사, 1995.

최종식, 『서양경제사론』, 서문당, 1984.

코리아컨센서스 유라시아연구회, 『중국과 러시아의 현재』, 한울아카데미, 2011.

팽성철, 「공산권 국가의 체제전환 요인에 대한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과 석사학위논문, 2013.

平井俊彦․德永恂 엮음, 고영대 옮김, 『사회사상사』, 사계절, 1983.

하멜, H. 엮음, 안병직․김호균 옮김, 『사회적 시장경제, 사회주의 계획경제』, 아카 넷, 2001.

하이에크, F. A., 김균 옮김, 『자유헌정론』, 자유기업센터, 1998a.

하이에크, F. A., 김이석 옮김, 『노예의 길: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진실』, 나남, 2006.

하이에크, F. A., 민경국 옮김, 『법, 입법 그리고 자유』, 자유기업센터, 1997.

하이에크, F. A., 박상수 옮김, 『개인주의와 경제질서』, 자유기업센터, 1998b.

(13)

하이에크, F. A., 신중섭 옮김, 『치명적 자만: 사회주의의 오류들』, 자유기업원, 2005.

하트-랜즈버그·버킷, 임영일 옮김, 『중국과 사회주의』, 한울아카데미, 2005.

헌트, E. K., 변형윤 외 옮김, 『경제사상사』, 풀빛, 1995.

헌트, E. K., 유강은 옮김, 『자본주의에 불만 있는 이들을 위한 경제사 강의』, 이 매진, 2015.

Przeworski, A., 包雅鈞 外 옮김, 『民主與市場』, 北京大學出版社, 2005.

World Bank, The East Asian Miracle: Economic Growth ans Public Policy,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14)

제2장 러시아의 체제전환과 경제개혁

제1절 러시아의 체제전환

1. 옛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

소련은 1917년 레닌이 주도한 볼셰비키 혁명에 의해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하였 다. 혁명 당시의 러시아에는 사회주의자들로 결성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ussian Social-Democratic Workers’ Party) 이외에도 인민주의자들의 사회혁명당(Social Revolution Party)과 무정부주의자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혁명세력들이 있었다. 사 회주의자들 가운데도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이 지도하는 ‘볼셰비 키(Bolsheviki)’와 이들과 경쟁관계인 ‘멘셰비키(Mensheviki)’라는 당파들이 있었다.

러시아어로 볼셰비키는 ‘다수파’, 멘셰비키는 ‘소수파’라는 의미이다. 볼셰비키와 멘 셰비키의 분열은 1903년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회 대회에서 당 규약과 당원의 자격을 둘러싼 대립에서 빚어졌다. 이 때 표결에서 이긴 레닌파가 스스로를 '볼셰비키(다수파)'라 부르면서, 반대파를 '멘셰비키(소수파)'라고 이름 붙 였다. 그러나 이 대회를 제외하면 1917년 10월의 혁명 이전까지 거의 대부분의 기 간 동안 실제로 다수파였던 것은 멘셰비키였다. 1912년 볼셰비키는 독자적으로 당 을 구성하였으며, 1917년 10월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는 1918년의 제7회 대회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당의 이름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변경하였 다.

러시아의 여러 혁명세력들 가운데 1917년의 혁명 당시까지도 대중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정당은 사회혁명당이었다. 사회혁명당은 인민주의자들을 중심으 로 1901년 결성되었는데,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과 함께 러시아의 혁명운동을 주도 하였다. 인민주의자(Narodniki)라는 이름은 1873~75년 많은 청년 지식인 (intelligentsia)과 학생들이 “인민 속으로(v nardo)”라는 슬로건을 외치며 농촌으로 가 계몽활동을 벌인 데서 나왔다. 러시아어로 ‘nardo’는 ‘인민’이라는 뜻이다.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사회혁명당 내의 좌파는 볼셰비키에 합류하였다. 무정부주의자들 의 세력도 인민주의자들에 못지 않았다. ‘무정부주의의 아버지’로 불린 바쿠닌 (Michael Alexandrovich Bakunin, 1814~1872)이나 자서전 『한 혁명가의 초상 (Memoirs of a Revolutionist, 1899)』을 남긴 무정부주의 철학자 크로포트킨 (Pyotr Alekseyevich Kropotkin 1842~1921) 등은 모두 러시아 출신이다.

(15)

인민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포함한 여러 혁명세력들은 러시아 혁명의 성격과 주도 계급을 놓고 논쟁하였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사회주의 혁명은 자본주 의가 최고의 단계로 성숙한 사회에서 일어난다. 러시아의 자본주의는 1861년의

<농노해방령>을 계기로 시작된 ‘위로부터의 개혁’에 의해 만들어진다. 러시아의 농 노해방은 유럽에서도 가장 늦은 편이었다. 게다가 1917년 당시까지도 인구의 대부 분은 사실상 농노 상태나 다름없는 농민들이었으며, 노동자계급은 아직 성장하느 과정에 있었다. 따라서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당시의 러시아가 아직 그러한 단 계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당면한 혁명의 성격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레닌과 볼셰비키는 러시아가 이미 충분히 성숙한 자본 주의 사회이므로 당장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7)

1917년 2월의 혁명으로 황제 니콜라이 2세(Aleksandrovich Nikolai II, 1868~1918)가 퇴위하고 사회혁명당 당수인 케렌스키(Aleksandr Fyodorovich Kerenskii, 1881~1970)가 주도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레닌이 지도한 볼셰비키는 군사 행동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 다. 1917년 10월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는 1918년 당의 이름을 러시아공산당 (Russian Communist Party)으로 바꾸고 1922년에는 공식적으로 소비에트사회주 의연방공화국(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을 출범시키면서 사회주의 적 개혁조치들을 추진하였다. 소비에트(Soviet)라는 말은 평의회 또는 대표자회의를 의미하는 러시아어이다. 1905년 혁명의 과정에서 여러 공장의 동맹파업운동을 조 정하고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기관으로서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등 대도시를 중 심으로 노동자대표소비에트가 선출되었다. 1917년 2월 혁명 때는 노동자·병사대표 소비에트가 성립하여 군사력을 장악하고 임시정부와의 사이에 이른바 이중권력을 만들어냈다. 10월 혁명 이후 농민대표소비에트가 합류하여 노·병·농대표소비에트가 인민권력기관으로 출범하였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소련 경제는 전시 공산주의 시기와 신경제정책(NEP) 시기 를 거쳐 스탈린(Joseph Stalin, 1879~1953) 집권의 국유화와 공업화 시기, 흐루쇼 프(Nikita Sergeyevich Khrushchev, 1894~1971) 시기, 브레즈네프(Leonid Ilyich Brezhnev, 1906~1982) 시기 및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 ) 시기로

7) 흔히 1917년 혁명 당시의 러시아는 아직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러시아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은 당연히 선진 자본주의 공업국가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한 마르크스의 이론과 다른 유형의 혁명이라고 이야기하는 역사가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레 닌은 자신의 첫 번째 주요 저작인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The Development of Capitalism in Russia, 1899)』에서 이미 러시아의 자본주의가 빠르게 발전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레닌, 1988.)

(16)

구분된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당시에는 아직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진행중이었다. 국내적으로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받은 반혁명 시도들과 내전 이 계속되었다. 이런 이유로 공산당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과 국내외의 반혁명 시도들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보다 급진적이고 적극적인 정책들이 필요하 다고 주장하였다. 1918년부터 1921년 사이의 기간은 흔히 ‘전시 공산주의(voennyi kommunizm)’ 시기로 불린다. 혁명 정부는 1918년 11월 노동국방회의를 창설하여 교통·산업·자원을 통제하고 국민경제를 전시체제로 편성하였다. 이미 대공업의 국유 화를 포고한 상태였지만, “모든 것을 전선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중소공장까지 국 유화하였다. 또한 사적 상업의 금지와 함께 그 때까지 농산물에 대해 적용되던 공 정가격에 의한 수매제를 강제적인 징발제로 전환하였다. 생산물의 분배는 배급제도 로 바뀌었고, 인플레이션으로 인하여 화폐의 가치는 현저하게 하락하였다.

전시 공산주의 정책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지속되었다. 공산당 정부는 인위적 인 정책들을 통해 소련이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 즉 사회주의 단계를 뛰어넘어 단번 에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경 제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국유화와 생산물 징발 등의 과격한 정책은 노동자와 농민 등 직접생산자들의 자발성과 생산성을 저하시켰고, 경제는 심각한 수준으로 정체되 었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생산량은 전쟁 전인 1913년의 수준에 못 미쳤고, 특히 곡물의 강제징발제로 인해 농업생산량은 50% 수준에도 못 미쳤다. 소비에트 정권 에 대한 불만과 불신의 증대는 많은 농민반란과 공장노동자들의 저항을 가져왔고, 특히 1921년 3월 크론슈타트 해군기지에서 일어난 반란사건으로 혼란은 절정에 달 하였다. 같은 해 3월 공산당 제10차 대회는 시장경제적 요소들을 도입하기로 결정 함으로써 전시공산주의에 종지부를 찍고, 이른바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lan)’으로 이행하였다. 전시 공산주의 정책의 실패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그 가운데 특히 주요한 것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당시의 러시아 는 혁명과 내전이라는 국내적 요인에 전쟁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내전 개입으로 엄 청난 혼란과 무정부 상태에 빠져 있었다. 둘째, 전쟁과 내전으로 주요 공업지역과 농업지역을 상실한 데다 교통과 수송체계마저 마비됨으로써 공급부족 사태가 심각 하였다. 셋째, 이처럼 열악한 객관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공산당과 정부 지도자들은 사태해결에 대해 비현실적일 만큼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적절한 대책을 수립하지 못하였다.(노브, 1998, 51-52쪽.)

소련 공산당이 전시 공산주의 정책의 후유증으로 나타난 생산성 저하와 경기침체 의 해결을 위하여 추진한 신경제정책 즉 NEP의 핵심내용은 제한적으로 이윤동기의 생산 및 상업 활동을 인정하고 중소규모의 자영업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행정, 대외

(17)

무역, 은행과 보험, 대기업, 철도의 5개 부문은 중앙당국이 관장하고 농업과 유통 업, 중소기업 등은 민간부문에 자율적으로 위임되었다. 이에 따라 강제적으로 이루 어지던 식량의 징발제는 현물세로 전환되었고, 이어서 화폐에 의한 세금화 과정을 거쳐 화폐세로 전환되었다. 농민들은 세금 납부 후에 남는 곡물을 시장에서 다른 물품과 교환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공산당이 NEP를 시행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도가 있었다. 첫째는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상품과 화폐가 없이 중앙 계획당국에 의해 운영되는 전혀 새로운 경제체제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생산력에 대한 자료의 수집과 분석이 필요하였다. 이는 상당한 기간의 준비가 필요한 작업이었다. 둘째는 서유럽 국가들로부터의 원조와 해외자본의 도입 및 서유럽 사회주의 정당들과의 협 력을 위해서 일정한 양보가 필요했다는 점이다.(한종만, 2009, 21-22쪽.)

그러나 NEP의 추진은 공산당 내에서 심각한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트로 츠키(Leon Trotsky, 1879~1940)와 부하린(Nikolai Ivanovich Bukharin, 1888~1938) 등 공산당 내 좌파는 NEP가 공산주의로부터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으 로 간주하고 격렬하게 빈대하였다. 이들에 맞서 레닌을 비롯하여 스탈린과 지노비 에프(Gregory Zinoviev, 1883~1936), 카메네프(Lev Borisovich Kamenev, 1883~1936) 등 당의 주류는 NEP의 시행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레닌은 “어떠 한 방법으로든 또 어떠한 대가를 치루든 경제회복과 공급의 확대는 이루어져야 하 고, 자본주의적 조치들을 도입하는 데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말로 NEP를 지지하였다.(한종만, 2009, 20쪽.)

NEP의 실시 이후 3년이 지난 1924년 말에 소련 경제는 전쟁 이전의 수준을 회 복하였다. 그러나 네프맨(Nepman)으로 불린 신흥 부자들과 노동자를 비롯한 일반 인민들 사이에서 경제적 격차가 심화되고, 인플레이션과 같이 성장에 따른 부작용 들이 새로운 경제문제로 대두하였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하면서 공산당 내의 정책 대립은 권력투쟁으로 전환되었다. 트로츠키와 부하린 등 정적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1928년을 전후하여 농업 집단화와 부농 축출, 대규모 공업기업의 국유화 등의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이는 공산당이 NEP를 종식하고 다시 공산주의 경제체제의 건설을 추진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NEP에 대한 소련 공산당의 공식적인 평가는 “과도기 속에서 인민 독재의 경제정책은 시장적 요인과 화폐를 통 하여 사회주의 건설의 공고화를 목적으로 하며, NEP 시대에서는 자본주의적 요소 들을 인정하고 인민국가의 주요 부문을 지령식으로 관리․통제함으로써 사회주의의 우월성과 함께 착취계급을 제거하고 사회주의의 경제적 기초를 달성하려는 목적”이 라고 정리하였다. 또 영국의 역사학자로 『볼셰비키 혁명(The Bolshevik

(18)

Revolution, 1958)』의 저자인 카(Edward Hallett Carr, 1892~1982)는 NEP를

“혁명 이후 전시 공산주의 체제의 개혁 시초로서 하나의 ‘조그마한 개혁’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하였으며, 미국의 저명한 러시아 연구자인 코언(Stephen Frand Cohen, 1938)은 NEP를 “계급간의 사회적 조화와 협조체제를 이룩하였으며, 테러 나 투쟁이 아닌 새로운 유연한 방법과 인내로써 정치적 중앙집권과 경제․문화․지적 다양성에 의한 정책”이라고 평가하였다.(한종만, 2009, 21쪽 및 41쪽.)

한동안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NEP에 대한 관심과 재평가가 새롭게 제기된 것은 고르바초프에 의해 개혁과 개방정책들이 추진되면서부터이다. 고르바초프의 경제고 문인 아간베기얀(Abel Gyozevich Aganbegyan, 1932~ )은 소련의 역사를 조명하 면서 1920년대의 NEP 시대가 경제사적으로 주는 교훈은 너무나 많다고 언급하였 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추진한 ‘페레스토로이카’ 정책을 ‘제2의 혁명’이라고 불렀 는데, 이는 명백히 NEP를 염두에 둔 슬로건이었다. 다만 여기에는 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스탈린이 NEP를 추진하면서 공산당 내의 좌익 반대파들을 제거하였듯이,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파를 견제하는 데 이용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도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같은 이유에서 고르바초프는 스탈린이 NEP를 폐기한 데 대해 비판하 였으며, 스탈린에 의해 숙청된 부하린과 그이 동료들을 복권시키기도 하였다.(한종 만, 2009, 41쪽.)

스탈린 집권 시기에 추진된 소련의 공업화는 매우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41년 독일의 침공으로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게 되면서, 노동 력과 생산물의 상당 부분이 군수용으로 배분되었기 때문에 인민들의 경제여건은 매 우 어려워졌다. 특히 농업 부문은 노동력의 생산수단의 부족으로 심각한 곤란을 겪 어야만 했다. 이차대전이 소련 경제에 끼친 영향은 국부의 3분의 1에 달하였다. 전 쟁 이후 제4차 5개년계획(1946~1950) 동안 6천 개 이상의 공업기업들이 복구되거 나 신설되었지만, 소비재 생산은 전쟁 전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다. 농업 부문의 회복은 더욱 지체되었다. 전쟁 이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과학기술혁명의 성과 를 생산에 도입하는 데 착수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명령성 계획경제는 창의성과 진 취성의 부족으로 과학기술을 군수부문 이외의 부문에 도입하는 데 무능력하였다.

특히 1945년에서 1950년 사이에 서방 국가들과의 무역은 35% 감소하였는데, 이로 인해 소련 경제는 선진 기술을 도입하는 데 중대한 애로를 겪게 되었다. 바로 이 점이 1950년대 중반에 소련이 심각한 사회경제적 및 정치적 변혁의 필요성에 직면 하게 된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찌모쉬나, 2006, 378-79쪽.)

스탈린 사후 집권한 흐루쇼프 시기의 소련은 대내적인 개혁과 대외적인 평화공존 정책을 추진하였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자 매우 짧은 기간 동안 공산당

(19)

제1서기에 취임한 말렌코프(Georgy Maksimilianovich Malenkov, 1902~1988)는 같은 해 8월의 최고소비에트회의에서 예산안 심의와 관련한 연설에서 식량공급 상 황을 호전하기 위해 종래 일방적으로 중공업만 장려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소비재 생산을 활성화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특히 농업부문의 심각한 정체를 극복하기 위해 농업세 인하,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의 부채 탕감, 농산물 조달가격의 인상, 축산물 강제 공출의무의 감소, 사적 부속지 규모의 확대 등의 조치가 뒤따랐고, 농민들이 사적 부속지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집단농장 시장에서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한편 1956년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흐루쇼프는 스탈린주의를 비판 하고 나섰다. 스탈린주의에 기초한 행정․명령 경제체제는 그것을 구성하는 주된 요 소인 전체주의적 강제와 통제가 효력을 상실하면서 더 이상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 었다. 소련은 전후 빠른 속도로 국민경제의 물적 토대를 회복하고 과학기술의 진보 와 중공업의 발전을 이룩했지만 경제자원의 낭비구조와 비효율적인 관리체제로는 생산의 집약적 발전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성원용, 1998.)

흐루쇼프 시기 경제개혁의 핵심은 중앙권력을 지방으로 이전할 것과 외연적 성장 보다는 내연적 성장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정책방향으로는 경공업과 농업 및 주택건설을 강조하면서 생활필수품의 생산증대, 경공업에 대한 대규모 투 자 등이 제시되었다. 흐루쇼프는 이러한 개혁을 통해 1980년대에는 미국을 추월하 고 1990년대에는 마르크스와 레닌이 주장한 높은 수준의 공산주의에 도달할 수 있 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개혁 초기의 성과들은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 1958년의 국민소득은 12.4%나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성과들이 모두 개혁으로 나타난 결 과들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시기의 개혁은 성급하게 이루어진데다가, 장 기계획에 따라 추진되지도 못하였다. 발전을 위한 자극과 명령체계는 양립하기 어 려웠다. 하지만 소련의 지도부는 지령과 동원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하는 위지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개혁의 문제점들이 나타나자 오히려 과거의 관리 체제가 빠르게 회복되었다. 인플레이션과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는 노동자들의 희생을 요구하였고, 이에 항의하는 자발적인 시위들이 각지에서 일어났 다. 흐루쇼프의 개혁은 노멘클라투라(Nomenclatura) 즉 특권층과 인민대중들 양쪽 모두로부터 불만을 불렀고, 결국 1964년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자의적 정책결정 과 주관주의에 대해 비판받고 흐루쇼프는 모든 권력에서 퇴진하고 말았다.(찌모쉬 나, 2006, 380쪽 이하.)

흐루쇼프의 실각 이후 소련은 한 사람이 당과 국가권력을 동시에 장악하는 것을 불법화하였다. 이에 따라 브레즈네프가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코시긴 (Aleksey Nikolayevich Kosygin, 1904~1980)이 총리를 각각 맡게 되었다. 새로

(20)

운 지도부는 다양하고 광범한 개혁조치들을 추진하였다.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하 여 인센티브제도가 도입되었고, 임금결정체계와 가격결정체계도 개혁되었다. 흐루쇼 프 시대의 개혁은 제8차 5개년계획을 앞둔 1965년부터 시작되지만, 그 이론적 배 경은 이미 몇 해 전 흐루쇼프 집권 시기에 하르코프기술경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인 예브세이 리베르만(Evsey Grigorievich Liberman, 1897~1983)이 발표한 「계 획·이윤·프리미엄(Plan, benefit and prisms, 1962)」이라는 논문에서 제시한 경제 개혁이론에 있다. 그래서 이 시기의 개혁정책은 ‘리베르만 방식(Liberman‘s system)’ 또는 '하르코프 방식(Kharkov system)'이라고 불린다. 또 총리로서 개혁 정책을 주도한 코시긴의 이름을 따 ‘코시긴 개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코시긴 개혁의 핵심은 국영기업의 독립채산제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우선 중앙 에서 기업들에게 하달되는 의무적 계획지표의 수는 급격히 축소되었고, 과거 기업 들이 이행해야 할 국가계획의 주요 지표가 총생산량에서 총처분량으로 대체되었다.

또한 기업 경영자들의 경제적 권한이 확대되었고, 관련 기업 및 소비자들과의 수평 적인 연계를 발전시키는 데 일정한 독립성을 획득했다. 특히 기업들은 인센티브 지 급을 목적으로 사용하거나 투자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해 자신들의 이윤 중에서 더 많은 몫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고, 투자의 1/5은 기업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다. 이 에 따라 인센티브기금, 상여금기금, 사회문화조치 및 주택건설기금, 생산발전기금을 조성할 수 있었다. 수익성, 인센티브, 책임 등과 같은 용어들이 경영자와 정치권의 일상화된 용어가 되었고, 모든 기업들의 제품에 대한 가격은 기업들에게 이익이 돌 아갈 수 있는가 하는 방식으로 재검토되었다.(성원용, 1998)

그러나 브레즈네프 시기의 개혁정책들에도 불구하고 물적 자원의 부족을 인적 자 원으로 충당하는 근본적인 문제점 때문에 소련 경제의 비효율성은 그다지 개선되지 못하였다. 과학기술 부문의 성과도 여전히 서방 국가들에 비해 크게 낙후되었다. 반 면 비대화한 관료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점점 늘어갔다. 집단지도체제이던 권력구조가 브레즈네프에 의해 독점되면서 행정 및 경제관리가 다시 중앙정부로 집 중화된 것도 개혁의 성과를 제약하였다. 1968년에 일어난 체코의 민주화운동 즉

‘프라하의 봄’에 대한 무력 탄압도 소련이 다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강화하게 만든 한 요인이었다. 1970년대 들어 브레즈네프는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데탕트 (détente)’ 즉 긴장완화를 추진한다. 이를 이용하여 브레즈네프는 서방 국가들과의 무역을 확대하고 경제성장을 촉진시키려는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개혁 시도 또한 1979년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개입과 1980년 폴란드 자유노조운 동에 대한 소련의 간섭으로 다시 서방 진영과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이러한 시도마 저도 좌절하고 말았다.

(21)

브레즈네프의 사후 안드로포프(Yuri Vladimirovich Andropov, 1914~1984)와 체 르넨코(Konstantin Ustinovich Chernenko, 1911~1985) 등이 짧게 집권하였으나 경제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82년 서기장에 취임한 안드로포프는 비교적 적극적이고 과감한 개혁안들을 제시하였으나 불과 2년만에 갑자기 사망하였고, 이 어서 취임한 체르넨코의 재임 기간은 그보다 더 짧았다. 그 결과 본격적인 개혁정 책의 추진은 젊고 새로운 지도자인 고르바초프 정부에게로 넘겨지지 않으면 안 되 었다.

참조

관련 문서

• 미국 독립 혁명(American Revolution)은 18세기 중엽에 13개 식민지가 초대 대통령이 된 조지 워싱턴을 중심으로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으로부터

∘복지 발달에 영향을 미친 주요 사건과 그로 인한 사회복지 제도화 과 정을 설명할 수 있다.. History

07.10-11 Institutional affairs | Employment and social rights - European Economic and Social Committee. European Economic and Social

As stated in its contribution to the preparation of Europe 2020 2 , reinforcing the Open Method of Coordination in the field of social protection and social inclusion and

♥ Posting to social

 Characteristics of a human service organizations designed on the basis of classical principles ….  Major Contributions that classical theories offer to

 사회적 추론은 대상 인물이나 사회적 사건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단계, 추론에 사용할 정보를 결정하는 단계, 여러 정보를 통합하여 판단하는

“Social housing and private markets: from public economics to local housing markets”, in Social Housing in Europe Ⅱ, Edited by Scanlon, Kathleen and Whitehead, Christ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