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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삼 국 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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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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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 삼 국 시 대

- 여러 小國 들의 각축장 -

(2)

1. 시대 개념

1) 김원룡

(1) 1972,『韓國考古學槪說』1판 : Proto-three kingdom period, 原初삼국시대또는 原史시대의 삼국시대 ⇒ 지표 : 청동 기소멸, 철생산 성행(철기의 발달과 보급), (철제 농구와 牛耕 의한) 도작 농경의 발전, 지석묘 소멸(3판에서는 빠짐), 타날문경도(김해토기) 출현 ← 낙랑군을통한 漢文化 자극

(2) 1977,『韓國考古學槪說』2판 : 청동기(초기철기포함) –원삼국시대

(3) 1986,『韓國考古學槪說』3판 : 삼국시대의 原初期 또는 原史 단계의삼국시대

-초기철기시대 : BC 3세기, 철기 현지생산, 청동 利器 실용성상실하면서 청동제품 급증하고청동기술은 크게 전하지만, 실질적 문화 단계는 철기사용단계

- 원삼국 : 순수고고학적구분명칭이 아니라 문헌사와의 정합성을고려(규모작다하더라도 소위 ‘國’ 출현하고 있으므로, 동일 시대에 국사학과고고학이별개 칭호 것은부적절), 삼국사기에는 BC 1세기부터 삼국시대 기술하였지만대개실질적 삼국시대는 4∼7세기로 기술하는모순, 正史 삼국사기를 따르면서고고학과 국사학이같이 있는 용어로서제안

(4) 2000,「원삼국시대

재론」: 북쪽은 낙랑군을통한 한문화와의 직접접촉 고구려의왕국화, 남쪽은 청동기 소멸 야철의 발전·문토기 쇠퇴와 와질토기라는 회색토기출현

1) 김원룡

(1) 1972,『韓國考古學槪說』1판 : Proto-three kingdom period, 原初삼국시대또는 原史시대의 삼국시대 ⇒ 지표 : 청동 기소멸, 철생산 성행(철기의 발달과 보급), (철제 농구와 牛耕 의한) 도작 농경의 발전, 지석묘 소멸(3판에서는 빠짐), 타날문경도(김해토기) 출현 ← 낙랑군을통한 漢文化 자극

(2) 1977,『韓國考古學槪說』2판 : 청동기(초기철기포함) –원삼국시대

(3) 1986,『韓國考古學槪說』3판 : 삼국시대의 原初期 또는 原史 단계의삼국시대

-초기철기시대 : BC 3세기, 철기 현지생산, 청동 利器 실용성상실하면서 청동제품 급증하고청동기술은 크게 전하지만, 실질적 문화 단계는 철기사용단계

- 원삼국 : 순수고고학적구분명칭이 아니라 문헌사와의 정합성을고려(규모작다하더라도 소위 ‘國’ 출현하고 있으므로, 동일 시대에 국사학과고고학이별개 칭호 것은부적절), 삼국사기에는 BC 1세기부터 삼국시대 기술하였지만대개실질적 삼국시대는 4∼7세기로 기술하는모순, 正史 삼국사기를 따르면서고고학과 국사학이같이 있는 용어로서제안

(4) 2000,「원삼국시대

재론」: 북쪽은 낙랑군을통한 한문화와의 직접접촉 고구려의왕국화, 남쪽은 청동기 소멸 야철의 발전·문토기 쇠퇴와 와질토기라는 회색토기출현

(3)

2) 시작 획기

(1) 영남지방( 이희준)

- 한사군 설치 이전 철기 ( 제작) 도입, 설치 이후 철기 생산 본격화 : 잔존 청동기 는 의기로서 기능하여 명실상부한 철기시대로 돌입

- BC 100 년 전후 각 지역 목관묘 군집 조영 : 각 지역 國 성립의 지표

- BC1 세기 전엽 말 와질토기 출현 : 國 사이의 연합체 혹은 연맹체로서 진변한 성립을 가리키는 요소로 해석 ⇒ 삼한 성립기점은 BC1 세기 말이지만, 斯盧國 이 原新羅 인 점을 고려하면 삼국시대 원초기는 國 의 성립시점인 BC100 년 무 렵까지 소급되어야 함)

- 낙랑의 설치

- 고구려 : BC100 년경 고대국가로의 중요한 1 차적 통합 [BC2 세기 중엽 초기철 기와 적석묘 문화 배경으로 那集團(≒ 삼한 읍락) 형성 ⇒ 한군현 설치 계기로 통합 진전되어 那國(≒ 삼한의 國) 형성

(2) 중( 서) 부지방 - 낙랑설치

- 경질무문토기 출현

3) 시기 : 기원 전후∼AD300 년 ⇒ BC1 세기 ∼ AD3 세기 중엽?

⇒ 300 년 : 고총, 낙랑멸망 등

⇒ 3 세기 중엽 : 백제 도성 축조, 고총 고분 출현, 백제토기양식 성립 2) 시작 획기

(1) 영남지방( 이희준)

- 한사군 설치 이전 철기 ( 제작) 도입, 설치 이후 철기 생산 본격화 : 잔존 청동기 는 의기로서 기능하여 명실상부한 철기시대로 돌입

- BC 100 년 전후 각 지역 목관묘 군집 조영 : 각 지역 國 성립의 지표

- BC1 세기 전엽 말 와질토기 출현 : 國 사이의 연합체 혹은 연맹체로서 진변한 성립을 가리키는 요소로 해석 ⇒ 삼한 성립기점은 BC1 세기 말이지만, 斯盧國 이 原新羅 인 점을 고려하면 삼국시대 원초기는 國 의 성립시점인 BC100 년 무 렵까지 소급되어야 함)

- 낙랑의 설치

- 고구려 : BC100 년경 고대국가로의 중요한 1 차적 통합 [BC2 세기 중엽 초기철 기와 적석묘 문화 배경으로 那集團(≒ 삼한 읍락) 형성 ⇒ 한군현 설치 계기로 통합 진전되어 那國(≒ 삼한의 國) 형성

(2) 중( 서) 부지방 - 낙랑설치

- 경질무문토기 출현

3) 시기 : 기원 전후∼AD300 년 ⇒ BC1 세기 ∼ AD3 세기 중엽?

⇒ 300 년 : 고총, 낙랑멸망 등

⇒ 3 세기 중엽 : 백제 도성 축조, 고총 고분 출현, 백제토기양식 성립

(4)

2. 기존의 시대구분 틀

1) 부족국가론 2) 성읍국가론

3) 웅천문화기, 김해기

4) 삼한시대론 (신경철 등 영남 지역 고고학, 이현혜 등)

5) 철기시대 / 삼국시대 전기론 : 최몽룡, 최성락, 이종욱, 이청규

3. 전사론과 전기론

: 『 삼국사기』 초기기록과 『 삼국지』 기록상의 충돌과 역사인식 문제

1) 前史論 : 원삼국시대, 『삼국사기』수정론 (이희준, 박순발, 성정용, 이남규, 최병현...)

2) 前期論 : 삼국시대전기,『삼국사기』초기기록과 기년 신빙론(최몽룡, 최성락, 이종욱, 이형 구, 신희권...)

2. 기존의 시대구분 틀

1) 부족국가론 2) 성읍국가론

3) 웅천문화기, 김해기

4) 삼한시대론 (신경철 등 영남 지역 고고학, 이현혜 등)

5) 철기시대 / 삼국시대 전기론 : 최몽룡, 최성락, 이종욱, 이청규

3. 전사론과 전기론

: 『 삼국사기』 초기기록과 『 삼국지』 기록상의 충돌과 역사인식 문제

1) 前史論 : 원삼국시대, 『삼국사기』수정론 (이희준, 박순발, 성정용, 이남규, 최병현...)

2) 前期論 : 삼국시대전기,『삼국사기』초기기록과 기년 신빙론(최몽룡, 최성락, 이종욱, 이형 구, 신희권...)

(5)

4. 문화적 양상

1) 새로운 製陶 기술(환원소성) 출현과 원삼국시대 토기 계통

(1) 현세 최고의 발명품은? : 토기 - 반도체 - 산화소성

- 환원소성 (2) 기원

- 戰國灰陶 기원설 : 중국 전국시대의 타날문호 등을 만들던 제도기술이 일찌기 고조선지역에 들어와 있다가 위만조선(BC 2세기 초∼108년)을 거쳐 낙랑지역에 남아 있던 것이 다시 남쪽 지역으로 확산되었다는 것

- 낙랑토기 영향설 : 중국 漢代의 제도기술이 낙랑군을 통해 유입

4. 문화적 양상

1) 새로운 製陶 기술(환원소성) 출현과 원삼국시대 토기 계통

(1) 현세 최고의 발명품은? : 토기 - 반도체 - 산화소성

- 환원소성 (2) 기원

- 戰國灰陶 기원설 : 중국 전국시대의 타날문호 등을 만들던 제도기술이 일찌기 고조선지역에 들어와 있다가 위만조선(BC 2세기 초∼108년)을 거쳐 낙랑지역에 남아 있던 것이 다시 남쪽 지역으로 확산되었다는 것

- 낙랑토기 영향설 : 중국 漢代의 제도기술이 낙랑군을 통해 유입

(6)

(3) 와질토기론

- 영남지역의 회색토기 : 최종규, 신경철 제기 ⇒ 김원룡은 분묘용 특수토기로 주장

- 초기 토기질을 주로 가리키는 개념이었으나, 여기에 주머니호·조합식우각형파수부 장경호·

원저옹(장란형토기)·대부장경호·노형토기 등과 같은 전형적인 기종의 토기들이 포함되면 서 하나의 지역적 특징을 갖는 토기문화로 확대

- 기존의 삼각형점토대토기문화 계승하면서 새 문화와 결합 - BC 1세기 후엽 : 대구 팔당동유적, 청원 다호리 토광묘 등 (4) 중서부지역

- 경질무문토기 출현 : 중부 지역 경질무문토기 단순기 설정하기도 함(박순발), BC1세기 (3) 와질토기론

- 영남지역의 회색토기 : 최종규, 신경철 제기 ⇒ 김원룡은 분묘용 특수토기로 주장

- 초기 토기질을 주로 가리키는 개념이었으나, 여기에 주머니호·조합식우각형파수부 장경호·

원저옹(장란형토기)·대부장경호·노형토기 등과 같은 전형적인 기종의 토기들이 포함되면 서 하나의 지역적 특징을 갖는 토기문화로 확대

- 기존의 삼각형점토대토기문화 계승하면서 새 문화와 결합 - BC 1세기 후엽 : 대구 팔당동유적, 청원 다호리 토광묘 등 (4) 중서부지역

- 경질무문토기 출현 : 중부 지역 경질무문토기 단순기 설정하기도 함(박순발), BC1세기

(7)

三國志 魏書 卷30 烏丸鮮卑東夷傳 韓條

삼국지 : 晋 陳壽 私撰(魏書 30, 蜀書 15, 吳書 20권), 위는 本紀 촉오는 列傳에 서술

[韓의 위치]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 之辰國也. 馬韓在西

[마한]

1. 생활 :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緜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散在山海閒 無城郭.

2. 마한 小國(54개) : 有爰襄國 牟水國 桑外國 小石索國 大石索國 優休牟涿國 臣濆沽國 伯濟國速盧 不斯國 日華國 古誕者國 古離國 怒藍國月支國 咨離牟盧國 素謂乾國 古爰國 莫盧國 卑離國 占 離卑國 臣釁國 支侵國 狗盧國 卑彌國 監奚卑離國 古蒲國 致利鞠國 冉路國 兒林國 駟盧國 內卑 離國 感奚國 萬盧國 辟卑離國 臼斯烏旦國 一離國 不彌國 支半國 狗素國 捷盧國 牟盧卑離國 臣 蘇塗國 莫盧國 古臘國 臨素半國 臣雲新國 如來卑離國 楚山塗卑離國 一難國 狗奚國 不雲國 不斯 濆邪國 爰池國 乾馬國 楚離國凡五十餘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3. 진왕과월(목)지국, 관작 : 辰王治月支國.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 支廉之號. 其官有魏率善 邑君 歸義侯 中郞將 都尉伯長.

삼국지 : 晋 陳壽 私撰(魏書 30, 蜀書 15, 吳書 20권), 위는 本紀 촉오는 列傳에 서술

[韓의 위치]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 之辰國也. 馬韓在西

[마한]

1. 생활 :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緜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散在山海閒 無城郭.

2. 마한 小國(54개) : 有爰襄國 牟水國 桑外國 小石索國 大石索國 優休牟涿國 臣濆沽國 伯濟國速盧 不斯國 日華國 古誕者國 古離國 怒藍國月支國 咨離牟盧國 素謂乾國 古爰國 莫盧國 卑離國 占 離卑國 臣釁國 支侵國 狗盧國 卑彌國 監奚卑離國 古蒲國 致利鞠國 冉路國 兒林國 駟盧國 內卑 離國 感奚國 萬盧國 辟卑離國 臼斯烏旦國 一離國 不彌國 支半國 狗素國 捷盧國 牟盧卑離國 臣 蘇塗國 莫盧國 古臘國 臨素半國 臣雲新國 如來卑離國 楚山塗卑離國 一難國 狗奚國 不雲國 不斯 濆邪國 爰池國 乾馬國 楚離國凡五十餘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3. 진왕과월(목)지국, 관작 : 辰王治月支國.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 支廉之號. 其官有魏率善 邑君 歸義侯 中郞將 都尉伯長.

(8)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條

4. 고조선 준왕의남천 :

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 以尊 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後 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 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 時 朝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 屬秦 不肯朝會. 否死 其子準立.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 西方.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溴(浿)水. 及綰反 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溴水 詣 準降. 說準求居西界 故(收)中國亡命 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黨衆稍多 乃詐遣人告準 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魏略曰:其子及親 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4. 고조선 준왕의남천 :

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 以尊 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後 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 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 時 朝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 屬秦 不肯朝會. 否死 其子準立.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 西方.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溴(浿)水. 及綰反 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溴水 詣 準降. 說準求居西界 故(收)中國亡命 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黨衆稍多 乃詐遣人告準 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魏略曰:其子及親 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9)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漢時屬樂浪郡 四時朝謁.

魏略曰:初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 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 民隨出居者 二千餘戶 亦與朝鮮貢 蕃不相往來. 至王莽地皇時 廉斯鑡爲辰韓右渠帥 聞樂浪土地美 人民饒樂 亡欲來降. 出其邑落 見田中 驅雀男子一人 其語非韓人. 問之 男子曰「我等漢人 名戶來 我等輩千五百人 伐材木 爲韓所擊得 皆斷 髮爲奴 積三年矣.」鑡曰「我當降漢樂浪 汝欲去不」戶來曰「可」辰鑡因將戶來來出 詣含資縣 縣言 郡 郡卽以鑡爲譯 從芩中乘大船 入辰韓 逆取戶來. 降伴輩尙得千人 其五百人已死. 鑡時曉謂辰韓「汝 還五百人. 若不者 樂浪當遣萬兵 乘船來擊汝.」辰韓曰「五百人已死 我當出贖直耳.」乃出辰韓萬五千 人 弁韓布萬五千匹 鑡收取直還. 郡表鑡功義 賜冠幘 田宅 子孫數世 至安帝延光四年時 故受復除.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漢時屬樂浪郡 四時朝謁.

魏略曰:初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 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 民隨出居者 二千餘戶 亦與朝鮮貢 蕃不相往來. 至王莽地皇時 廉斯鑡爲辰韓右渠帥 聞樂浪土地美 人民饒樂 亡欲來降. 出其邑落 見田中 驅雀男子一人 其語非韓人. 問之 男子曰「我等漢人 名戶來 我等輩千五百人 伐材木 爲韓所擊得 皆斷 髮爲奴 積三年矣.」鑡曰「我當降漢樂浪 汝欲去不」戶來曰「可」辰鑡因將戶來來出 詣含資縣 縣言 郡 郡卽以鑡爲譯 從芩中乘大船 入辰韓 逆取戶來. 降伴輩尙得千人 其五百人已死. 鑡時曉謂辰韓「汝 還五百人. 若不者 樂浪當遣萬兵 乘船來擊汝.」辰韓曰「五百人已死 我當出贖直耳.」乃出辰韓萬五千 人 弁韓布萬五千匹 鑡收取直還. 郡表鑡功義 賜冠幘 田宅 子孫數世 至安帝延光四年時 故受復除.

(10)

5. 韓濊의강성과 군현과의 충돌 :

1) 한예의 강성과대방군 설치 : 桓靈(환제 147~167년, 영제168~188년)之末 韓濊彊盛 郡縣不能制 民多 流入韓國.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 爲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 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 出 是後 倭韓遂屬帶方.

2) 군현과마한의 충돌 :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 樂浪太守鮮于嗣 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 加賜邑 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 皆假衣幘 自服印綬衣幘 千有餘人. 部從事吳林 以樂浪本 統韓國 分割辰韓八國 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臣濆沽國)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 樂 浪太守劉茂 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6. 풍속과 생활

1) 습속및 주거 :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無跪拜之禮. 居處作草屋土室 形 如冡 其戶在上 擧家共在中無長幼男女之別.

2) 장례및 귀중품 : 其葬有槨無棺 不知乘牛馬 牛馬盡於送死. 以瓔珠爲財寶 或以綴衣爲飾 或以縣頸垂耳 不以金銀錦繡爲珍

5. 韓濊의강성과 군현과의 충돌 :

1) 한예의 강성과대방군 설치 : 桓靈(환제 147~167년, 영제168~188년)之末 韓濊彊盛 郡縣不能制 民多 流入韓國.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 爲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 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 出 是後 倭韓遂屬帶方.

2) 군현과마한의 충돌 :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 樂浪太守鮮于嗣 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 加賜邑 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 皆假衣幘 自服印綬衣幘 千有餘人. 部從事吳林 以樂浪本 統韓國 分割辰韓八國 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臣濆沽國)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 樂 浪太守劉茂 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6. 풍속과 생활

1) 습속및 주거 :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無跪拜之禮. 居處作草屋土室 形 如冡 其戶在上 擧家共在中無長幼男女之別.

2) 장례및 귀중품 : 其葬有槨無棺 不知乘牛馬 牛馬盡於送死. 以瓔珠爲財寶 或以綴衣爲飾 或以縣頸垂耳 不以金銀錦繡爲珍

(11)

3) 성격 : 其人性彊勇 魁頭露紒 如炅兵. 衣布袍 足履革蹻蹋. 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 諸年少 勇健者 皆鑿脊皮 以大繩貫之 又以丈許木鍤之 通日嚾呼作力 不以爲痛 旣以勸作 且以爲健.

4) 농경과 의례 : 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群聚歌舞飮酒晝夜無休. 其舞 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 昂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信鬼神. 國邑各立一人 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 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 縣鈴鼓 事鬼神.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好作賊. 其立蘇 塗之義 有似浮屠 而所行善惡有異.

5) 기타 : 其北方近郡諸國 差曉禮俗 其遠處直如囚徒奴婢相聚. 無他珍寶. 禽獸草木略與中國同. 出 大栗 大如梨. 又出細尾雞 其尾皆長五尺餘. 其男子 時時有文身. 又有州胡 在馬韓之西海中大 島上 其人差短小 言語不與韓同 皆頭如鮮卑 但衣韋 好養牛及猪. 其衣有上無下 略如裸勢. 乘船 往來 市買韓中.

3) 성격 : 其人性彊勇 魁頭露紒 如炅兵. 衣布袍 足履革蹻蹋. 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 諸年少 勇健者 皆鑿脊皮 以大繩貫之 又以丈許木鍤之 通日嚾呼作力 不以爲痛 旣以勸作 且以爲健.

4) 농경과 의례 : 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群聚歌舞飮酒晝夜無休. 其舞 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 昂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信鬼神. 國邑各立一人 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 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 縣鈴鼓 事鬼神.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好作賊. 其立蘇 塗之義 有似浮屠 而所行善惡有異.

5) 기타 : 其北方近郡諸國 差曉禮俗 其遠處直如囚徒奴婢相聚. 無他珍寶. 禽獸草木略與中國同. 出 大栗 大如梨. 又出細尾雞 其尾皆長五尺餘. 其男子 時時有文身. 又有州胡 在馬韓之西海中大 島上 其人差短小 言語不與韓同 皆頭如鮮卑 但衣韋 好養牛及猪. 其衣有上無下 略如裸勢. 乘船 往來 市買韓中.

(12)

[ 진변한]

1. 진한 위치와 유래

韓 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自言古之亡人 避秦役 來適韓國 馬韓 割其東界地與之. 有城柵. 其言語不 與馬韓同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有似秦人. 非但燕 齊之名物也. 名樂 浪人爲阿殘 東方人名我爲阿 謂樂浪人本其殘餘人. 今有名之爲秦韓者.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2. 변진 24국과 규모

弁辰 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濊 次有殺奚 次有邑借. 有 已柢國․ 不斯國․ 弁辰彌離彌凍國․ 弁辰接塗國․ 勤耆國․ 難彌離彌凍國․ 弁辰古資彌凍國․ 弁辰古淳 是國․ 冉奚國․ 弁辰半路國․ 弁樂奴國․軍彌國․ 弁軍彌國․ 弁辰彌烏邪馬國․ 如湛國․ 弁辰甘路國․

戶路國․州鮮國․ 馬延國․ 弁辰狗邪國․ 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

中)國. 弁․辰韓合二十四國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 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 魏略曰 明其爲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

[ 진변한]

1. 진한 위치와 유래

韓 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自言古之亡人 避秦役 來適韓國 馬韓 割其東界地與之. 有城柵. 其言語不 與馬韓同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有似秦人. 非但燕 齊之名物也. 名樂 浪人爲阿殘 東方人名我爲阿 謂樂浪人本其殘餘人. 今有名之爲秦韓者.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2. 변진 24국과 규모

弁辰 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濊 次有殺奚 次有邑借. 有 已柢國․ 不斯國․ 弁辰彌離彌凍國․ 弁辰接塗國․ 勤耆國․ 難彌離彌凍國․ 弁辰古資彌凍國․ 弁辰古淳 是國․ 冉奚國․ 弁辰半路國․ 弁樂奴國․軍彌國․ 弁軍彌國․ 弁辰彌烏邪馬國․ 如湛國․ 弁辰甘路國․

戶路國․州鮮國․ 馬延國․ 弁辰狗邪國․ 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

中)國. 弁․辰韓合二十四國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 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 魏略曰 明其爲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

(13)

3. 농경과장례풍속

土地肥美 宜種五穀及稻 曉蠶桑 作縑布 乘駕牛馬. 嫁娶禮俗 男女有別 以大鳥羽送死 其意欲使 死者飛揚.

魏略曰 其國作屋 橫累木爲之 有似牢獄也.

4. 생산및 풍속

國出鐵 韓․濊․倭 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俗喜歌舞飮酒. 有瑟 其形似筑 彈 之亦有音曲. 兒生 便以石厭其頭 欲其褊. 今辰韓人皆褊頭. 男女近倭 亦文身. 便步戰 兵仗與馬韓同. 其俗 行者相逢 皆住讓路.

5. 변진의주거와 언어, 위치 등

弁辰 與辰韓雜居亦有城郭. 衣服居處 與辰韓同. 言語法俗相似 祠祭鬼神有異 施竈皆在戶西. 其瀆盧國 與倭接界. 十二國 亦有王 其人形皆大. 衣服潔淸 長髮. 亦作廣幅細布. 法俗特嚴峻.

3. 농경과장례풍속

土地肥美 宜種五穀及稻 曉蠶桑 作縑布 乘駕牛馬. 嫁娶禮俗 男女有別 以大鳥羽送死 其意欲使 死者飛揚.

魏略曰 其國作屋 橫累木爲之 有似牢獄也.

4. 생산및 풍속

國出鐵 韓․濊․倭 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俗喜歌舞飮酒. 有瑟 其形似筑 彈 之亦有音曲. 兒生 便以石厭其頭 欲其褊. 今辰韓人皆褊頭. 男女近倭 亦文身. 便步戰 兵仗與馬韓同. 其俗 行者相逢 皆住讓路.

5. 변진의주거와 언어, 위치 등

弁辰 與辰韓雜居亦有城郭. 衣服居處 與辰韓同. 言語法俗相似 祠祭鬼神有異 施竈皆在戶西. 其瀆盧國 與倭接界. 十二國 亦有王 其人形皆大. 衣服潔淸 長髮. 亦作廣幅細布. 法俗特嚴峻.

(14)

사기 조선열전

}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 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云浿水出遼東塞外, 西南至 樂浪縣西入海. 浿普大反.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 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險.

}

會孝惠․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 諸蠻夷 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眞番․

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 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云浿水出遼東塞外, 西南至 樂浪縣西入海. 浿普大反.屬燕.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 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險.

}

會孝惠․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 諸蠻夷 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眞番․

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15)

} 진나라가연나라를 멸하고, 요동의 바깥으로 나갔다. 한나라가 일어서자그곳이 멀고 지키기 어려워 요동의옛 요새를 고치니, 경계가 패수로 [정의: '지리지'에, '패수'는, 요동의 요새밖에서나오며, 서남 으로흘러, 낙랑현서쪽에 이르러, 海로 들어간다.] 연나라에속한다. '연왕노관'이 반하여 흉노로도 망가고,'만'이 명령을 버리고[정의: 命은 敎令이라한다.] 그무리 천여명과 상투를 틀고 '만이'의 복식 으로바꾸고 동쪽으로 달아나요새를 벗어났다.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공지'인 '상하장' 땅에살 다가[색은: 지리지에보면 낙랑에 '운장'이 있다.] 차츰 '진번조선'에속하게 되고, 만이,연,제나라의 망명자들의왕이 되어 '왕검'에도읍을 하였다

} 이때가 孝惠 高后의 시기로서마침 천하가 처음 평정되었다. 요동태수가 '만'과약속하기를 “(漢의) 外臣이되어 塞外의 蠻夷를 보호하고변경을 침범하는 일이없도록 하라. 만약여러 蠻夷의 군장들 이천자를 알현하고자 할 경우이를 막지

말라”고하였다. 요동태수가이를 보고하니 황제가 허락하 였다. 이렇게 하여병기와 재물을 얻은 滿이주변의 작은 나라를 침략하여항복받으니, 진번과임둔 등이모두 복속되어 그 땅이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 진나라가연나라를 멸하고, 요동의 바깥으로 나갔다. 한나라가 일어서자그곳이 멀고 지키기 어려워 요동의옛 요새를 고치니, 경계가 패수로 [정의: '지리지'에, '패수'는, 요동의 요새밖에서나오며, 서남 으로흘러, 낙랑현서쪽에 이르러, 海로 들어간다.] 연나라에속한다. '연왕노관'이 반하여 흉노로도 망가고,'만'이 명령을 버리고[정의: 命은 敎令이라한다.] 그무리 천여명과 상투를 틀고 '만이'의 복식 으로바꾸고 동쪽으로 달아나요새를 벗어났다.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공지'인 '상하장' 땅에살 다가[색은: 지리지에보면 낙랑에 '운장'이 있다.] 차츰 '진번조선'에속하게 되고, 만이,연,제나라의 망명자들의왕이 되어 '왕검'에도읍을 하였다

} 이때가 孝惠 高后의 시기로서마침 천하가 처음 평정되었다. 요동태수가 '만'과약속하기를 “(漢의) 外臣이되어 塞外의 蠻夷를 보호하고변경을 침범하는 일이없도록 하라. 만약여러 蠻夷의 군장들 이천자를 알현하고자 할 경우이를 막지

말라”고하였다. 요동태수가이를 보고하니 황제가 허락하 였다. 이렇게 하여병기와 재물을 얻은 滿이주변의 작은 나라를 침략하여항복받으니, 진번과임둔 등이모두 복속되어 그 땅이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16)

}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元封二年, 漢使涉何譙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 臨浿水, 使御刺殺送何者. 鮮 裨王長, 渡馳入塞, 歸報天子曰殺朝鮮將. 上爲其名美, 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 何, 發兵襲攻殺何.

} 天子募罪人擊朝鮮. 其秋, 遣樓船將軍楊僕從齊浮渤海 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 討 右渠. 右渠發兵距險.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 敗散, 多還走, 坐法斬. 樓船將軍將 齊兵七千人先至王險. 右渠城守, 窺知樓船軍少, 卽出城擊樓船, 樓船軍敗散走. 將軍楊 僕失其衆, 遁山中十餘日, 稍求收散卒, 復聚.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

}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右渠見使者頓首謝:「願降, 恐兩將詐殺臣 今見信節, 請服降.」 遣太子入謝, 獻馬五千匹, 及饋軍糧. 人衆萬餘, 持兵, 方渡浿水, 使者及 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降, 宜命人毋持兵. 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山還報天子, 天子誅山.

}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元封二年, 漢使涉何譙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 臨浿水, 使御刺殺送何者. 鮮 裨王長, 渡馳入塞, 歸報天子曰殺朝鮮將. 上爲其名美, 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 何, 發兵襲攻殺何.

} 天子募罪人擊朝鮮. 其秋, 遣樓船將軍楊僕從齊浮渤海 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 討 右渠. 右渠發兵距險.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 敗散, 多還走, 坐法斬. 樓船將軍將 齊兵七千人先至王險. 右渠城守, 窺知樓船軍少, 卽出城擊樓船, 樓船軍敗散走. 將軍楊 僕失其衆, 遁山中十餘日, 稍求收散卒, 復聚.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

}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右渠見使者頓首謝:「願降, 恐兩將詐殺臣 今見信節, 請服降.」 遣太子入謝, 獻馬五千匹, 及饋軍糧. 人衆萬餘, 持兵, 方渡浿水, 使者及 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降, 宜命人毋持兵. 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山還報天子, 天子誅山.

(17)

} 전하여 손자'우거'[정의: 그손자의 이름이다.]에 이르러, 한나라의망명자들을 불러 유인하니, 그 숫자 는 많았다. 또한 입견하지않고 '진번'지역의 여러나라에서, 글을 올려 천자를뵙고자 하였으나, 역시 가로막아 만나게하지 못하게 하였다. 원봉2년, 한나라 사신 '섭하'[색은: 설문에, '초'는꾸짖다,諭는 권 유하다,는의미라 했다. '초'음은 웃게 만드는것의 반대이다.]가,'우거'를회유하고 꾸짖었으나, 끝내, 말을 듣지않았다. 섭하가, 돌아가는길에 '패수'에이르니, 길잡이[색은: 즉 섭하를따라온 길잡이 이다 .]가마중나온 '조선비왕' '長'[정의: 안사고는, '長'은 비왕의이름이며, 섭하를보내러 패수까지 나왔다 가 죽었다. 생각컨데 비왕은장사급에 미치나 감히 안사고는알지 못한다 했다.]을찔러 죽였다. 달려 요새로 들어가,[정의: 들어간곳이 평주 유림관이다.] 왕[한무제]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보고 하니,왕이그 명예를 부추겨[색은: 살해한 장수의이름이 있다.], 힐책하지 않고, 섭하를'요동 동부도위 '에 임명하였다.[정의: 지리지에, 요동군무차현은,동부도위가 다스린다.] '조선'이 섭하에게,원한을 품 고 병사를일으켜, 습격하여섭하를 죽여버렸다.

} 전하여 손자'우거'[정의: 그손자의 이름이다.]에 이르러, 한나라의망명자들을 불러 유인하니, 그 숫자 는 많았다. 또한 입견하지않고 '진번'지역의 여러나라에서, 글을 올려 천자를뵙고자 하였으나, 역시 가로막아 만나게하지 못하게 하였다. 원봉2년, 한나라 사신 '섭하'[색은: 설문에, '초'는꾸짖다,諭는 권 유하다,는의미라 했다. '초'음은 웃게 만드는것의 반대이다.]가,'우거'를회유하고 꾸짖었으나, 끝내, 말을 듣지않았다. 섭하가, 돌아가는길에 '패수'에이르니, 길잡이[색은: 즉 섭하를따라온 길잡이 이다 .]가마중나온 '조선비왕' '長'[정의: 안사고는, '長'은 비왕의이름이며, 섭하를보내러 패수까지 나왔다 가 죽었다. 생각컨데 비왕은장사급에 미치나 감히 안사고는알지 못한다 했다.]을찔러 죽였다. 달려 요새로 들어가,[정의: 들어간곳이 평주 유림관이다.] 왕[한무제]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보고 하니,왕이그 명예를 부추겨[색은: 살해한 장수의이름이 있다.], 힐책하지 않고, 섭하를'요동 동부도위 '에 임명하였다.[정의: 지리지에, 요동군무차현은,동부도위가 다스린다.] '조선'이 섭하에게,원한을 품 고 병사를일으켜, 습격하여섭하를 죽여버렸다.

(18)

} 왕[한무제]이죄인들을 모아 '조선'을쳤다. 그해 가을, 누선장군'양복'을보내어, '제<齊>'를 따라 '발해'를 건너가게하였다. 병사가 오만이었다. 좌장군 '순체'는요동으로 나가, '우거'를 쳤다. '우거'가 병사를 일으 켜, 험준한 곳에서 대항하였다. 좌장군 이요동의 병사를 거느리고 먼저갔으나, 패하여흩어지고, 대부분 되돌아서 도망나오므로, 죄를물어 참수했다. 누선장군이제나라 병사7000명을이끌고, 왕검성에 먼저 도 착하니, '우거'가 성을지키고 있다가, 누선군의규모가 작음을 보고,즉시성을나와 공격하니, 누선군이 패 하여 달아나고, 장군'양복'은, 그 병사를 잃고산속에서 10여일을 숨어지내며, 패잔병을 수습했다. 좌장군 이,조선의 '패수서군'을 공격했으나, 지난번과 같이 패하고말았다.

} 왕[유철]이 2장군의 불리함을보고,'위산'을 사신으로보내어,'우거'에게 군세로위협하여 달래었다. '우거' 가 사신을보내어,사죄하기를, "항복코자하나,2장군이신하를 죽이려함이 두려워,이제믿음의 징표를 보 이는것이니, 항복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하고, 태자를 보내어,사죄를하고, 말5000필을주니, 군량으로 사용하고, 백성1만명으로특별군을 만들어 패수를 건너려하니, 사자와,좌장군이 그 돌변한정세에 의심 하며, 태자에게,이미항복했으면, 마땅히 특별군은, 없어야 한다하니, 태자 역시,사자와 좌장군이, 속여서 죽이려하는것으로 알고, 패수를건너지 않고, 되돌아왔다. '위산'이돌아와, 왕에게보고하니, 왕이위산을 주살했다.

} 왕[한무제]이죄인들을 모아 '조선'을쳤다. 그해 가을, 누선장군'양복'을보내어, '제<齊>'를 따라 '발해'를 건너가게하였다. 병사가 오만이었다. 좌장군 '순체'는요동으로 나가, '우거'를 쳤다. '우거'가 병사를 일으 켜, 험준한 곳에서 대항하였다. 좌장군 이요동의 병사를 거느리고 먼저갔으나, 패하여흩어지고, 대부분 되돌아서 도망나오므로, 죄를물어 참수했다. 누선장군이제나라 병사7000명을이끌고, 왕검성에 먼저 도 착하니, '우거'가 성을지키고 있다가, 누선군의규모가 작음을 보고,즉시성을나와 공격하니, 누선군이 패 하여 달아나고, 장군'양복'은, 그 병사를 잃고산속에서 10여일을 숨어지내며, 패잔병을 수습했다. 좌장군 이,조선의 '패수서군'을 공격했으나, 지난번과 같이 패하고말았다.

} 왕[유철]이 2장군의 불리함을보고,'위산'을 사신으로보내어,'우거'에게 군세로위협하여 달래었다. '우거' 가 사신을보내어,사죄하기를, "항복코자하나,2장군이신하를 죽이려함이 두려워,이제믿음의 징표를 보 이는것이니, 항복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하고, 태자를 보내어,사죄를하고, 말5000필을주니, 군량으로 사용하고, 백성1만명으로특별군을 만들어 패수를 건너려하니, 사자와,좌장군이 그 돌변한정세에 의심 하며, 태자에게,이미항복했으면, 마땅히 특별군은, 없어야 한다하니, 태자 역시,사자와 좌장군이, 속여서 죽이려하는것으로 알고, 패수를건너지 않고, 되돌아왔다. '위산'이돌아와, 왕에게보고하니, 왕이위산을 주살했다.

(19)

} 左將軍破浿水上軍, 乃前, 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遂堅守城, 數月未能下

} 左將軍素侍中, 幸, 將燕代卒, 悍, 乘勝, 軍多驕. 樓船將齊卒, 入海, 固已多敗亡; 其先與右渠戰, 困 辱亡卒, 卒皆恐, 將心慙, 其圍右渠, 常持和節. 左將軍急擊之, 朝鮮大臣乃陰閒使人私約降樓船, 往來言, 尙未肯決. 左將軍數與樓船期戰, 樓船欲急就其約, 不會; 左將軍亦使人求閒郤降下朝鮮, 朝鮮不肯, 心附樓船: 以故兩將不相能. 左將軍心意樓船前有失軍罪, 今與朝鮮私善而又不降, 疑 其有反計, 未敢發. 天子曰將率不能, 前(及)[乃]使衛山諭降右渠, 右渠遣太子, 山使不能剸決, 與 左將軍計相誤, 卒沮約. 今兩將圍城, 又乖異, 以故久不決. 使濟南太守公孫遂往(征)之, 有便宜得 以從事. 遂至, 左將軍曰: 「朝鮮當下久矣, 不下者有狀.」 言樓船數朝不會, 具以素所意告遂, 曰: 「 今如此不取, 恐爲大害, 非獨樓船, 又且與朝鮮共滅吾軍.」 遂亦以爲然, 而以節召樓船將軍入左將 軍營計事, 卽命左將軍麾下執捕樓船將軍, 幷其軍, 以報天子. 天子誅遂.

} 左將軍破浿水上軍, 乃前, 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遂堅守城, 數月未能下

} 左將軍素侍中, 幸, 將燕代卒, 悍, 乘勝, 軍多驕. 樓船將齊卒, 入海, 固已多敗亡; 其先與右渠戰, 困 辱亡卒, 卒皆恐, 將心慙, 其圍右渠, 常持和節. 左將軍急擊之, 朝鮮大臣乃陰閒使人私約降樓船, 往來言, 尙未肯決. 左將軍數與樓船期戰, 樓船欲急就其約, 不會; 左將軍亦使人求閒郤降下朝鮮, 朝鮮不肯, 心附樓船: 以故兩將不相能. 左將軍心意樓船前有失軍罪, 今與朝鮮私善而又不降, 疑 其有反計, 未敢發. 天子曰將率不能, 前(及)[乃]使衛山諭降右渠, 右渠遣太子, 山使不能剸決, 與 左將軍計相誤, 卒沮約. 今兩將圍城, 又乖異, 以故久不決. 使濟南太守公孫遂往(征)之, 有便宜得 以從事. 遂至, 左將軍曰: 「朝鮮當下久矣, 不下者有狀.」 言樓船數朝不會, 具以素所意告遂, 曰: 「 今如此不取, 恐爲大害, 非獨樓船, 又且與朝鮮共滅吾軍.」 遂亦以爲然, 而以節召樓船將軍入左將 軍營計事, 卽命左將軍麾下執捕樓船將軍, 幷其軍, 以報天子. 天子誅遂.

(20)

} 좌장군이 浿水上軍을 격파하고, 지난번처럼 성아래 이르러, 그 서북을 포위하고, 누선군도 역시 성의 남쪽에 와서 진을 쳤다. 우거가 성을 굳게지키니, 수개월동안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 좌장군은, 천자를 모신적이 있고, 다행히 장군 '연대'의 군사가 사나워 승리하곤 했으나, 군이 교 만해졌다. 누선장'제'의 병사들이 海로 들어갔으나, 고립되어 패망했다. 그전에 '우거'와 싸워서 패하였던 군사들이라, 모두 공포에 질려있었으며, 장수들은, '우거'를 포위하고 있으면서도 항상 화친사절을 보내야함을 매우 수치스러워했다. 좌장군이 급히 공격하니,'조선'의 대신이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약속하고, 누선과 왕래하며 대화했으나, 항상 결론은 없었다. 좌장군이, 수 차례 누선과 함께 공격하고자 했으나, 누선은,그 약속을 얻고자 욕심을 부려, 협공을 하지 못했 다. 좌장군 역시 사람을 보내어,조선의 항복을 권했으나, 조선은 듣지 않고, 누선과만 연락했다.

이리하여, 2장군은, 서로 협력하지 못했다.

} 좌장군이 浿水上軍을 격파하고, 지난번처럼 성아래 이르러, 그 서북을 포위하고, 누선군도 역시 성의 남쪽에 와서 진을 쳤다. 우거가 성을 굳게지키니, 수개월동안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 좌장군은, 천자를 모신적이 있고, 다행히 장군 '연대'의 군사가 사나워 승리하곤 했으나, 군이 교 만해졌다. 누선장'제'의 병사들이 海로 들어갔으나, 고립되어 패망했다. 그전에 '우거'와 싸워서 패하였던 군사들이라, 모두 공포에 질려있었으며, 장수들은, '우거'를 포위하고 있으면서도 항상 화친사절을 보내야함을 매우 수치스러워했다. 좌장군이 급히 공격하니,'조선'의 대신이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약속하고, 누선과 왕래하며 대화했으나, 항상 결론은 없었다. 좌장군이, 수 차례 누선과 함께 공격하고자 했으나, 누선은,그 약속을 얻고자 욕심을 부려, 협공을 하지 못했 다. 좌장군 역시 사람을 보내어,조선의 항복을 권했으나, 조선은 듣지 않고, 누선과만 연락했다.

이리하여, 2장군은, 서로 협력하지 못했다.

(21)

} 좌장군은 속으로 누선의 지난번 패전을 생각하고, 지금은 조선과 몰래 통하여 항복치 않게 하 니, 그 배반을 의심했으나, 밖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유철이 말하기를, '장수로서의 통솔력이 없다. 지난번에 '위산'을 보내어, '우거'에게 항복하기를 회유하여, 우거가 태자를 보냈으나, 위 산이 결말을 못짓고 좌장군의 오판이 겹쳐, 약속이 어그러졌다, 지금 2장군이 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또다시 의견이 어긋나니,오래도록 결말이 없다.'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내어, 바로잡 게 하면 마땅히 섬기어 그 말을 따르리라. 공손수가 이르니, 좌장군이 말하기를, '지금 조선을 이기기는 시일이 많이 걸리고, 함락치 못하는 것 역시 그와 마찬가지 이다'하고, 누선과 수차 약속하고도 시행치 못한 것과, 그로 인해 가지게 된 뜻을 말하니, '지금 이리하여 함락치 못한 다면, 큰 손실이 될까 두렵고, 더더구나, 조선과 우리의 군사가 같이 멸한다면, 누선 혼자의 잘 못이 아닐 것이다,' 공손수 또한 그러할 것이라 하여, 누선장군을 좌장군의 진영으로 불러들 일 계획을 세우고, 누선장군을 좌장군 휘하에 붙잡아 두게 하고 그 군사 역시 병합하여, 왕[유 철]에게 보고하니, 왕이 공손수를 주살하였다.

} 좌장군은 속으로 누선의 지난번 패전을 생각하고, 지금은 조선과 몰래 통하여 항복치 않게 하 니, 그 배반을 의심했으나, 밖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유철이 말하기를, '장수로서의 통솔력이 없다. 지난번에 '위산'을 보내어, '우거'에게 항복하기를 회유하여, 우거가 태자를 보냈으나, 위 산이 결말을 못짓고 좌장군의 오판이 겹쳐, 약속이 어그러졌다, 지금 2장군이 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또다시 의견이 어긋나니,오래도록 결말이 없다.'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내어, 바로잡 게 하면 마땅히 섬기어 그 말을 따르리라. 공손수가 이르니, 좌장군이 말하기를, '지금 조선을 이기기는 시일이 많이 걸리고, 함락치 못하는 것 역시 그와 마찬가지 이다'하고, 누선과 수차 약속하고도 시행치 못한 것과, 그로 인해 가지게 된 뜻을 말하니, '지금 이리하여 함락치 못한 다면, 큰 손실이 될까 두렵고, 더더구나, 조선과 우리의 군사가 같이 멸한다면, 누선 혼자의 잘 못이 아닐 것이다,' 공손수 또한 그러할 것이라 하여, 누선장군을 좌장군의 진영으로 불러들 일 계획을 세우고, 누선장군을 좌장군 휘하에 붙잡아 두게 하고 그 군사 역시 병합하여, 왕[유 철]에게 보고하니, 왕이 공손수를 주살하였다.

(22)

}

左將軍已幷兩軍, 卽急擊朝鮮. 朝鮮相路人․相韓陰․尼谿相參․將軍王唊相與謀 曰 「始欲降樓船, 樓船令執, 獨左將軍幷將, 戰益急, 恐不能與, (戰)王又不肯降 . 」 陰․唊․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BC108)夏, 尼谿相參乃使人殺 朝鮮王右渠來降. 王險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 復攻吏. 左將軍使右渠 子長降 相路人之子最 告諭其民, 誅成巳,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封參爲澅淸 侯, 陰爲狄苴侯, 唊爲平州侯, 長[降]爲幾侯. 最以父死頗有功, 爲溫陽侯.

}

左將軍 徵至, 坐爭功相嫉, 乖計, 弃市 . 樓船將軍 亦坐兵至洌口, 當待左將軍, 擅先 縱, 失亡多, 當誅, 贖爲庶人.

}

太史公曰: 右渠負固, 國以絶祀. 涉何誣功, 爲兵發首. 樓船將狹, 及難離咎. 悔失番 禺, 乃反見疑. 荀彘爭勞, 與遂皆誅. 兩軍俱辱, 將率莫侯矣.

}

左將軍已幷兩軍, 卽急擊朝鮮. 朝鮮相路人․相韓陰․尼谿相參․將軍王唊相與謀 曰 「始欲降樓船, 樓船令執, 獨左將軍幷將, 戰益急, 恐不能與, (戰)王又不肯降 . 」 陰․唊․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BC108)夏, 尼谿相參乃使人殺 朝鮮王右渠來降. 王險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 復攻吏. 左將軍使右渠 子長降 相路人之子最 告諭其民, 誅成巳,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封參爲澅淸 侯, 陰爲狄苴侯, 唊爲平州侯, 長[降]爲幾侯. 最以父死頗有功, 爲溫陽侯.

}

左將軍 徵至, 坐爭功相嫉, 乖計, 弃市 . 樓船將軍 亦坐兵至洌口, 當待左將軍, 擅先 縱, 失亡多, 當誅, 贖爲庶人.

}

太史公曰: 右渠負固, 國以絶祀. 涉何誣功, 爲兵發首. 樓船將狹, 及難離咎. 悔失番

禺, 乃反見疑. 荀彘爭勞, 與遂皆誅. 兩軍俱辱, 將率莫侯矣.

(23)

} 좌장군이 이미 양군을 합하고 '조선'을 급히 공격하니, 조선의 승상 '로인','한음',이계상 '삼',장군 ' 왕겹',[집해: 한서음의에,相은, 5인이다. 융적(戎狄)은, 관직의 위차를 몰라서, 모두, 相이라고한다.

음은 頰(jia)이다] [색은: 응소는, 相은, 5인이다. 융적(戎狄)은, 관직의 위차를 몰라서, 모두, 相이라 고한다. '로인<路人>'은, 어양현<漁陽縣>사람이다. 여순은, 相은 그나라 재상이며, '로인'은 이름이 다, '겹'은, 겹, 協,으로도 발음한다.]등이 서로 모의하여 말하기를, '처음 누선에게 항복하고자 했으 나,지금은 누선이 붙잡혀있고, 좌장군이 홀로 군을 지휘하니, 전쟁이 점점 급해지므로 대항치 못 할까 두렵고, 왕께서도 항복을 허락치 않습니다'하고, 한음,왕겹,로인등이 모두 한나라에 항복했 으며, 로인은 길에서 죽었다. 원봉3년, 여름, 니계상 '삼'이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해왔으나, ' 왕검성'은 항복치 않았다. 즉 ‘우거'의 대신인 성사(成巳)가 반기를 들고 다시 공격해 왔다. 좌장군 이, 우거의 아들, 장항(長降),집 재상 '로인'의 아들, '최'[색은: '최(最)'는,'로인'의 아들이다.]를 보내 어, 그 백성을 회유하여, '성사'를 죽이고 조선을 정복하여, 4군으로 하였다. '삼‘은 화청후, '한음‘은 적상후,왕겹은 평주후, 장항은 '기후’. 최는 죽은 아비의 공으로 온양후에 봉했다.

} 좌장군이 이미 양군을 합하고 '조선'을 급히 공격하니, 조선의 승상 '로인','한음',이계상 '삼',장군 ' 왕겹',[집해: 한서음의에,相은, 5인이다. 융적(戎狄)은, 관직의 위차를 몰라서, 모두, 相이라고한다.

음은 頰(jia)이다] [색은: 응소는, 相은, 5인이다. 융적(戎狄)은, 관직의 위차를 몰라서, 모두, 相이라 고한다. '로인<路人>'은, 어양현<漁陽縣>사람이다. 여순은, 相은 그나라 재상이며, '로인'은 이름이 다, '겹'은, 겹, 協,으로도 발음한다.]등이 서로 모의하여 말하기를, '처음 누선에게 항복하고자 했으 나,지금은 누선이 붙잡혀있고, 좌장군이 홀로 군을 지휘하니, 전쟁이 점점 급해지므로 대항치 못 할까 두렵고, 왕께서도 항복을 허락치 않습니다'하고, 한음,왕겹,로인등이 모두 한나라에 항복했 으며, 로인은 길에서 죽었다. 원봉3년, 여름, 니계상 '삼'이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해왔으나, ' 왕검성'은 항복치 않았다. 즉 ‘우거'의 대신인 성사(成巳)가 반기를 들고 다시 공격해 왔다. 좌장군 이, 우거의 아들, 장항(長降),집 재상 '로인'의 아들, '최'[색은: '최(最)'는,'로인'의 아들이다.]를 보내 어, 그 백성을 회유하여, '성사'를 죽이고 조선을 정복하여, 4군으로 하였다. '삼‘은 화청후, '한음‘은 적상후,왕겹은 평주후, 장항은 '기후’. 최는 죽은 아비의 공으로 온양후에 봉했다.

(24)

}

좌장군은 먼저 잘못된 계책으로 병사를 잃고 전쟁을 실패하였으므로, 기시의 형에 처하고, 누선장군 역시, 전쟁실패로, ' 열구’ 로 끌려와, 서인이 되었다.

}

태사공이 말하기를,' 우거' 는 고립된 것이 부담이 되어, 나라가 망했으며, ' 섭하' 의 거짓된 공은, 병사를 잃케 하였다. 누선장군의 좁은 안목은[ 집해: 서광은, 누 선장군의 통솔력이 폭좁은 것이라 하였다.], 급기야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자 초했다. ' 번우' 를 잃은 후회는, 결국 서로를 의심케 되었고, ' 순체' 의 노력도, 결 국 공손수와 함께 주살당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양군이, 모두 치욕을 당하니, 이것은 차의 교훈으로 남게 되었다.

}

좌장군은 먼저 잘못된 계책으로 병사를 잃고 전쟁을 실패하였으므로, 기시의 형에 처하고, 누선장군 역시, 전쟁실패로, ' 열구’ 로 끌려와, 서인이 되었다.

}

태사공이 말하기를,' 우거' 는 고립된 것이 부담이 되어, 나라가 망했으며, ' 섭하'

의 거짓된 공은, 병사를 잃케 하였다. 누선장군의 좁은 안목은[ 집해: 서광은, 누

선장군의 통솔력이 폭좁은 것이라 하였다.], 급기야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자

초했다. ' 번우' 를 잃은 후회는, 결국 서로를 의심케 되었고, ' 순체' 의 노력도, 결

국 공손수와 함께 주살당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양군이, 모두 치욕을 당하니,

이것은 차의 교훈으로 남게 되었다.

(25)

[ 분묘]

1. 영남지역

- 木棺墓 단계 : BC1세기∼AD2세기 전반, 다호리, 팔달동,사라리..

- 木槨墓 단계 : AD2세기 후반∼4세기, 김해 양동리 160호분 2. 중(서)부지역 : 無槨有棺 (三國志 魏書 東夷傳)

1) 점토대토기 단계 토광묘(기원전) : 노은동, 궁동, 수당리 등 2) 周溝墓 系 : 두 유형 관찰됨

a. 관창리유형 (주구묘=>성토분구묘) : 서해안 및 호남 지역 일대, 매장주체부 기본적으 로 토광묘,

b. 청당동유형(주구토광묘) : 목관묘가 主+대형묘는 木槨墓, 이혈과 병혈, 동혈합장 3) 墳丘墳 : 기본적으로 분구를 먼저 만들고 되파기하여 매장주체부를 안치 ó 봉토분

계열

a. 확장추가형 : 서울 가락동2호분, 천안 두정동 분구묘..

b. 분구되파기형 : 익산 율촌리?→서산 부장리, 나주 복암리고분군)

[ 분묘]

1. 영남지역

- 木棺墓 단계 : BC1세기∼AD2세기 전반, 다호리, 팔달동,사라리..

- 木槨墓 단계 : AD2세기 후반∼4세기, 김해 양동리 160호분 2. 중(서)부지역 : 無槨有棺 (三國志 魏書 東夷傳)

1) 점토대토기 단계 토광묘(기원전) : 노은동, 궁동, 수당리 등 2) 周溝墓 系 : 두 유형 관찰됨

a. 관창리유형 (주구묘=>성토분구묘) : 서해안 및 호남 지역 일대, 매장주체부 기본적으 로 토광묘,

b. 청당동유형(주구토광묘) : 목관묘가 主+대형묘는 木槨墓, 이혈과 병혈, 동혈합장 3) 墳丘墳 : 기본적으로 분구를 먼저 만들고 되파기하여 매장주체부를 안치 ó 봉토분

계열

a. 확장추가형 : 서울 가락동2호분, 천안 두정동 분구묘..

b. 분구되파기형 : 익산 율촌리?→서산 부장리, 나주 복암리고분군)

(26)

부 장 부

[ⅠA형] [ⅡA형]

묘광 묘광

부 장

묘광 [ⅠB형]

장 부

장 부

묘광 묘광 묘광

[Ⅰ형] [Ⅱ 형] [Ⅲ형]

부 장 부장

부 장

부 장

부 장 부

장 부

[ⅡB형] [ⅢA형] [ⅢB형]

[ⅤA형]

[ 부장방식과 주체부 형태에 의한 관, 곽의 형식 구분]

부 장

[Ⅳ형]

묘광 묘광

묘광 묘광

묘광

묘광 부

[ⅤB형]

(27)

거석

거석 고인돌에서 고인돌에서 토광묘문화로 토광묘문화로

초기철기시대의

초기철기시대의 토광묘 토광묘

(28)

안성 반제리유적 : II 형 위석토광묘

(29)
(30)

금산 수당리 위석토광묘(2기)

(31)

위석토광묘( 요동 윤가촌,

함평 초포리, 논산원북리)

(32)

장수 남양리유적(좌:3호묘, 중:2호 3호 출토 금속기, 우상:4호 출토 철기, 우히:2호와 5호출토 토기)

(33)

공주 수촌리1 대전 괴정동

[ I 유형 토광묘]

(34)

완주 신풍유적 : 초기철기, 고조선 준왕 내려왔을까?

나지구 나지구

가지구 가지구

(35)

Ⅱ군군

Ⅲ군군 가지구 초기철기시대토광묘 51

Ⅰ군군

Ⅳ군군

(36)

19 18

21

26 50

51

29

27 28

30

31

49

24 20

22 23 19

18

24 20

251X84X(81)cm 251X84X(81)cm

III

III

2222

19 18

21

26 50

51

29

27 28

30

31

49

24 20

22 23 21

26 50

51

29

27 28

30

31

49

24

22 23

251X84X(81)cm 251X84X(81)cm 251X84X(81)cm

(37)

19 18

21

26 50

51

29

27 28

3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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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0

22 23 19

18

24 20

III

III

31

1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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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7 28

30

31

49

24

22 23

236X51X(33)cm 직경 18cm

(38)

과 - - 나지구 나지구

(39)

완주 갈동유적

(40)

갈동 3호

(41)

3호 출토 양익청동촉

(42)

원삼국시대의

원삼국시대의 무덤 무덤

1. 주구가 있는토광묘 : 주구토광묘와 성토분구묘

2. 적석묘문화 : 적석분구묘

(43)

천안 청당동유적 토기편년안( 함순섭)

(44)

1期 : 天安 淸堂洞5,8號墳

2期 : 天安 淸堂洞18號墳 3期 : 天安 新豊里6號墳

4期 : 淸州 松節洞93-B4號墳

5期 : 梧倉 松垈里25號墳

6期 : 梧倉 松垈里7-1號墳 7期 : 梧倉 松垈里13號墳

[ 中西部內陸地域 의 3~4世紀 馬韓在地系土器 編年]

1期 : 天安 淸堂洞5,8號墳

2期 : 天安 淸堂洞18號墳 3期 : 天安 新豊里6號墳

4期 : 淸州 松節洞93-B4號墳

5期 : 梧倉 松垈里25號墳

6期 : 梧倉 松垈里7-1號墳 7期 : 梧倉 松垈里13號墳

[ 中西部內陸地域 의 3~4世紀

馬韓在地系土器 編年]

(45)

중서부 지역 II 단계 원삼국∼ 한성백제 초기 주요 유구 편년안( 성정용)

(46)

중서부지역 원삼국

시대∼ 한성백제 초

기 주요 유적 편년

안 비교

(47)

성토분구묘 : 서산 부장리고분군, 백제 5 세기

1호 2호

3호 5호

10호 12호

13호

4호 5호

7호 6호

9호 8호 11호

(48)

2호 분구묘

3호 4호

유구배치도

1호 2호

3호 4호

5호 7호

2 대상부 장축 : 41.0m

1차대상부 장축 : 18.2m 1차대상부 단축 : 13.4m

(49)

[ 관창리형 => 성토분구묘]

지상에 매장시설 위치

[ 청당동형 => 주구토광묘]

지하에 매장시설 위치

(50)

보령 관창리 KM437호

(51)

영광 군동유적 18호묘(주구토광묘)

서천 당정리유적

(52)

서산 예천동유적

(53)
(54)

유구배치도

21 호

20 호 17 호

22 호묘

740cm

976cm

19 호

20 호

(55)

22 호묘 매장주체부

284cm 162cm

214cm

유구배치도

284cm 214cm

102cm

(56)

예천동 출토 토기류 일괄

(57)

예천동 출토 철기류 일괄

유구배치도

(58)

김포 운양동 1-11지점 6호분구묘 3주체부

(59)

대전 궁동 연기 응암리

(60)

연기 응암리 공주 하봉리

연기 응암리 공주 하봉리

(61)
(62)

1주구묘

2구역4호

1 구역 2 구역

2주구묘 3주구묘

1토광묘

4토광묘

1토광묘

고창 남산리

(63)

아산

아산 명암리 명암리 밖지므레 밖지므레 유적 유적 ((2-1 지점)

2

2- -1 1 지점 지점

(64)

주구토광묘 3 호

359cm

4 호 주구토광묘

116cm

74cm

312cm 359cm

(65)

[ 미호천 유역권의 토광묘 문화]

진천 신월리

진천 송두리

청원송대리 천안청당동

천안 신풍리

청주 송절동

청주 산남동

연기응암리

(66)

경주 사라리130호

진천 송두리1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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