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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화학 전망, 제24권 제1호, 2021황종희, 천하의 흥망에 필부도 책임이 있다
❙이 상 은 교수 (상지대학교)
황종희(黃鍾羲, 1610-1695)의 자는 태충(太沖)이며, 호는 남뢰(南雷) 또는 이주(梨洲)를 썼는데, 황이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명나라 말 신종(神宗) 황제가 다스리던 만력(萬曆) 38년에 절강성(浙江省) 여요현(餘姚縣)에 서 황존소(黃尊素, 1585-1626)의 다섯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기 전에 태몽으로 기 린을 보았다고 해서 어릴 때는 이름을 기린 ‘린(麟)’ 자를 썼다. 황종희는 양쪽 관자놀이 주변에 붉은 점이 있 었으며, 생일이 공자의 탄신일과 하루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장차 크게 될 인물이라고 기대가 컸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약간의 언어장애가 있었고, 대학자들에게 자주 등장하는 ‘신동전설’ 같은 것이 없다. 두 동생이 과거에 급제한 반면 본인은 몇 차례 걸쳐 과거에 도전했으나 끝내 급제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흔히 말하는 명 석한 두뇌는 아니었던 것 같다. 요즘 방식으로 말하자면 요령 있게 학습하고, 효율적으로 점수를 잘 따는 그런 공부에 능한 수재형 인간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그는 경학과 역사를 아울러 공부하며 시험문제가 아니라 세상 의 문제를 고민하고 그 핵심을 간파해 내는 다른 머리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의 아버지 황존소는 청렴하고 강직한 선비로 법집행도 엄격해서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공정하게 처리 했다. 그가 북경으로 떠날 때 백성들이 길에 늘어서 전송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백성들의 신임을 얻은 관리 였음을 잘 보여준다. 이런 모습은 훗날 황종희의 처신과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준 살아있는 교육이었다. 북경 으로 간 황존소는 당시 환관들로 이루어진 탁류인 엄당(閹黨)에 맞서고 있던 청류인 동림당(東林黨) 인사들에 게도 신임을 얻어 감찰어사라는 주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자연히 그는 동림당과 엄당이라는 첨예한 대결구 도에서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황제의 칙서조차 위조해낼 수 있는 환관들의 막강한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무고한 동림당의 지식 인들이 수없이 투옥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황종희가 15세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 황존소도 엄당의 모략으로 벼 슬에서 쫓겨나 귀향했다. 그리고는 2년 뒤에 환관의 우두머리였던 위충현(魏忠顯)을 죽이려고 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했다. 어린 황종희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으며,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드리기 위해 백 방으로 노력하던 중 그가 19세 되던 해 숭정(崇禎) 황제가 즉위한 후 일시적으로 개혁이 이루어져 기회가 왔 다. 엄당의 대부분이 축출되었고, 황존소도 명예가 회복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부터 황종희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부친의 가까운 친구이자 뛰어난 양명학자였던 즙산(蕺山) 유 종주(劉宗周, 1578-1645)를 스승으로 모시고 본격적인 학문의 길에 들어섰다. 유종주는 양명 우파계통의 기철 학자이다. 그는 이지(李贄), 나여방(羅汝芳) 등 양명좌파(陽明左派)의 학자들은 왕양명의 본뜻에서 너무 멀리 나가 “자신의 욕망에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것”을 주장하여 나라가 어지럽고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지 는데 기여했으며, 그것이 결국 명나라의 패망에 이르는 한 원인이 되었다고 비판한 사람이다. 황종희도 스승의 학문적 경향을 이어받아 양명좌파의 급진적인 면을 따르지 않고, 양명학과 주자학 그리고 고증학을 절충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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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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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C News, Volume 24, No. 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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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시도를 하고 있다.황종희의 학문의 기본 틀이 양명학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어려서부터 경전과 역사 공부를 함께 했다. 경전을 공부해서 치세의 근본원리를 알아야 하지만, 역사를 공부하지 않으면 현실인식을 제 대로 못하고 그것을 올바로 적용시킬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 그는 절동사학(浙東史學)의 창시자가 되었다. 절동사학은 절강성 동쪽의 역사학파를 일컫는 말이다. 이 절동사학파에서 만사동(萬斯同)이 나 장학성(章學誠), 기라성 같은 사학자를 배출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황종희는 부친의 사후 학문에 열중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참여도 활발히 하였다. 동림당의 정신을 이어받아
‘소동림(小東林)’으로 불리기도 했던 ‘복사(復社)’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남경에서 여러 지식인들과 교유하며 학술, 문학 모임을 만들어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런 연유인지는 몰라도 두 동생은 과거에 합격하였지만 황종희는 33세까지 무려 네 번이나 과거에 응시했지만 끝내 합격하지 못했다. 황종희가 35세 되던 해(1644년) 에 이자성(李自成)이 일으킨 농민반란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었다. 겨우 궁을 빠져 나온 숭정 황제는 자금성 (紫禁城) 뒤 쪽의 경산(景山)에서 옷자락에 조상들 뵐 면목이 없다는 글을 남기고 나무에 목매달아 자결했다.
이로써 277년을 이어온 명나라 왕조가 멸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자성의 반란군은 오래 못가서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밀고 들어온 청나라 군대에게 항복한다. 청 나라가 계속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 항주(杭州)까지 함락시켰다. 이 때 황종희의 스승 유종주는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키기 위해 오랜 단식 끝에 숨을 거두었다. 이런 스승 밑에서 공부한 황종희도 반청구국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된다. 당시 청나라가 명나라 땅의 대부분을 점령했지만, 워낙 국토가 넓은 중국 남부의 일부지역에서 는 여전히 명나라 왕족을 떠받들고 저항하는 조직들이 있었다. 황종희도 전 재산을 처분하여 그를 따르는 제자 300여명으로 ‘세충영(世忠營)’이라는 무장조직을 만들어 청나라에 항거하는 투쟁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약 5년여의 무장투쟁을 끝냈을 무렵인 그의 나이가 40세 때부터 황종희는 지명수배를 받는 몸이 되었다. 그 러나 그는 숨어 지내는 동안에도 학문의 끈을 놓지 않았고, 틈틈이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황종희가 본격적으 로 학문 활동을 하며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53세부터였으니 오늘날로 봐서도 상당히 늦은 셈이 다. 하지만 당시로는 대단히 장수했다고 할 수 있는 86세까지 살면서 약 33년 간 실로 많은 저작을 남겼다.
그의 관심은 경학과 역사는 물론 천문학, 역법(曆法), 노장이나 불교 및 문학과 음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였 으며 두루 깊이 통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의 저술은 경학, 역사, 정치, 천문, 지리, 역법, 전기(傳記) 및 시문(詩文) 등에 걸쳐 다양하다. 특히 역사방면의 저작이 두드러지게 많다. 그의 대표 저서라 할 수 있는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은 정치제도사에 관한 저술이다. 《송원학안(宋元學案)》과 《명유학안(明儒學案)》은 송나라와 원나라 그리고 명나라의 뛰어난 철 학자를 선정하여 그가 속한 학파의 학술사상의 특징을 요약하고, 관련된 원전자료를 소개하면서 저자의 견해 와 평가를 곁들인 중국 최초의 철학사라고 일컬어진다. 특히 이러한 문체를 ‘학안체(學案體)’라고 하는데, 그것 은 황종희가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이다.
경학(經學) 즉, 철학에 관한 저술로는 《역학상수론(易學象數論)》과 《맹자사설(孟子師說)》이 대표적이다. 천 문역법에 관한 저술이 매우 많은데, 이는 경세치용에 많은 도움이 되는 실용적 학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 이다. 황종희는 1647년에는 《수시력(授時曆)》에 주석을 달고, 역법과 관련한 다수의 저술을 하였는데, 《춘추일 시력(春秋日食曆》), 《수시력고(授時曆考)》, 《대통역추법(大統曆推法)》, 《기운산법(氣運算法)》, 《개방명산(開方命 算)》 등이 있다. 1652년에 그가 《율려신의(律呂新義)》를 저술했을 때는, 조정에서는 시어(侍御)인 왕중위를 보 내 그 책을 가져갔다고 한다.
이처럼 황종희는 혼란한 시기를 살면서 암담한 현실과 맞서 의연하게 싸우고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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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화학 전망, 제24권 제1호, 2021범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도 실망하지 않고 학문과 저술 활동을 통해서 현재의 실패 원인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던 바람직한 지식인의 모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명나 라의 멸망과 과거 역사의 교훈을 통해서 체득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은 현실 정치와 미래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주는 그의 핵심저작이다.
원래 명이(明夷)란 말은 《주역(周易)》의 64괘 가운데 하나인 명이괘(明夷卦)에서 따온 말이다. 명이괘는 땅 을 상징하는 곤(坤)이 위에 있고, 불을 상징하는 이(離)가 아래에 있는 형상이다. 즉, 태양이 땅 속에 묻혀버린 암흑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주역》에서는 이 괘를 어진 사람이 못난 임금을 만나 해를 입는 괘라고 풀이 한다. 그리고는 “어두운 세상에 처한 것은 괴로운 일이지만, 마음을 바르게 가지는 것이 이롭다.”고 덧붙이고 있다. 황종희는 명나라가 멸망하게 된 원인을 어진 백성들이 못난 임금을 지속적으로 만나서 생긴 폐해라고 생 각하고, 이 어둠을 견디고 기다리면 훗날 누군가 이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것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이 책 을 쓴 것이다.
중국 근대의 개혁사상가인 양계초(梁啓超, 1873-1929)는 그의 《중국근삼백년학술사》라는 책에서 《명이대방 록》을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비유하면서 황종희를 중국의 루소 혹은 유교의 루소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 나 실제로는 황종희의 《명이대방록》이 루소의 《사회계약론》보다 100년 이상이나 앞선 책이다. 아무튼 중국 근 대의 개혁운동가들은 이 책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그들의 활동에 활용했다. 손문은 일본 망명 시절에 혁명 단체인 흥중회(興中會)의 선전 유인물에 이 책을 넣었다. 또한 무술변법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일본으로 망명 했던 양계초나 강유위(康有爲, 1858-1927)와는 달리 중국의 혁명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피를 흘린 사람이 없 었기 때문이라며, 의연히 죽음을 맞은 담사동(譚嗣同, 1865-1898)은 이 책을 전제군주를 배척하고 인간의 기 본 권리를 존중한 가장 뛰어난 책으로 꼽고 있다.
그러면 《명이대방록》은 과연 어떤 책인가? 이 책의 내용은 원군(原君)⋅원신(原臣)⋅원법(原法)⋅치상(置相)
⋅학교(學校)⋅취사(取士) 2편⋅건도(建都)⋅방진(方鎭)⋅전제(田制) 3편⋅병제(兵制) 3편⋅재계(財計) 3편⋅
서리(胥吏)⋅엄관(奄官) 2편의 13목 21편으로 되어 있다. 이를 풀어보면 임금, 신하 그리고 법이란 무엇이고 어 떠해야 하는 가에 관한 논의, 재상의 설치에 관한 것, 학교의 기능과 위상 문제, 인재의 선발, 도읍의 설치, 국 방, 토지제, 재정, 관리 및 환관에 관한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황종희는 이 각 항목을 통하여 명나라 전제군 주 체제의 악폐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바른 정치가 실현되기 위한 자신의 구상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그는 맨 첫 번째 장 〈임금이란 무엇인가?(原君)〉에서 옛날의 훌륭한 임금들은 백성들을 주인이라고 생 각하고 자신은 손님이라고 생각했기에 평생을 백성들을 위해 노력했는데, 지금은 임금이 주인이고 백성을 손 님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임금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힘쓸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어지러워지 는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황종희는 백성이 임금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백성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국가가 다음이고, 임금이 가장 가볍다.”고 한 맹자의 민본사상 을 더욱 심화하고 강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장 〈신하란 무엇인가?(原臣)〉에서도 그의 관점이 잘 나타나 있다. 신하는 임금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결국 임금과 신하는 서로 협력하여 세상을 다스려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군주의 법도에 맞지 않는 주장은 따를 필요 가 없다고 주장했다.
세 번째 장 〈법이란 무엇인가?(原法)〉에서는 황종희는 임금이나 신하가 백성을 위해 일을 제대로 잘 하게 하 는 구체적인 방법은 올바른 제도의 확립에 있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법이 군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백성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학교제도를 강조했다. 학교는 단순히 교육기능만이 아니라 공론의 장이 되어 비판의 기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토지제도는 정전제(井田制) 를 부활할 것을 주장하며, 그러기 위해서 황실과 국가소유의 토지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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