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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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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1)

(1783년 12월호 516쪽 참조)2)

글쓴이: 임마누엘 칸트 옮긴이: 김창원 공개날짜: 2017.4.16.

(수정본: 2017.4.19.) 공개장소: 김창원칸트철학연구소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잘못하여 처하게 된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다면 미성숙한 것이다. 만일 지성의 결함 때문이 아 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려는 결심이나 용기의 부족 때문에 미성숙 하다면 그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다. ‘감히 생각하라!’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 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의 모토다.

어째서 그렇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미 나이가 들어 (자연적인 성년) 타인의 지도로부터 벗어날 자유를 얻었음에도 평생토록 기꺼이 미성숙하게 머물러 있는가? 또 어째서 타인들이 주제넘게 그들의 후견인인 척하는 일이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것인가? 그 이유는 게으름과 비 겁함에 있다. 미성숙하게 있는 것은 아주 편안하다. 나를 대신하여 생각해줄 책이 있다면, 나 를 대신하여 양심을 지켜줄 성직자가 있다면, 나를 대신하여 음식을 조절해줄 의사가 있다면 기타 등등, 나는 스스로 힘쓸 필요가 없다. 돈을 지불할 수만 있다면 나는 생각할 필요가 없 다. 짜증나는 일은 이미 나 대신 다른 이들이 떠맡게 되어 있다. 현저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여기에는 여성 전체가 포함된다) 성년 상태로 내딛는 발걸음을 — 이 발걸음이 부담이 된다는 점 말고도 — 매우 위험하게 여긴다는 점은 친절하게도 그들을 감독하는 일을 떠맡은 저 후견 인들에 의해 벌써 배려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가축들을 우선 멍청하게 만든 후에, 그리고 가두어 놓은 보행기 밖으로 이 온순한 생물들이 감히 나가지 못 하도록 세심하게 방지한 후 에, 혼자서 걸어가려고 시도할 경우 이들에게 닥칠 것 같은 위험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위험 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몇 번 넘어지고 나면 결국 걸을 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 다. 하지만 그런 식의 예는 이들을 소심하게 만들고 또 겁을 주어 앞으로의 모든 시도를 습관 적으로 못 하게 만든다.

1) Berlinische Monatschrift[= 󰡔월간 베를린󰡕] 1784년 12월호의 481~494쪽에 실린 칸트의 글이다. 내 가 이 글을 번역할 때 인터넷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이 퍼 나르고 있는 정지인과 강유원의 번역(다운로 드한 주소: 2008new.tistory.com/attachment/ok0.pdf)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Mary J. Gregor가 번역한 The Cambridge Edition of the Works of Immanuel Kant, Practical philosophy(1996)에 들어 있는 번역도 간간이 참조하였다.

2) 󰡔월간 베를린󰡕 1783년 12월호의 516쪽을 참조하라는 칸트의 표시다. 목회자이자 신학자인 요한 프리 드리히 쬘너(Johann Friedrich Zöllner, 1753~1804)는 「종교가 앞으로도 계속 혼인결합을 재가해주 어도 괜찮은가?」라는 제목의 기고문에 다음과 같은 주를 달았다: “계몽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계몽을 시작하기에 앞서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거의 똑같이 중요한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 대답을 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

Retrospektive Digitalisierung wissenschaftlicher Rezensionsorgane und Literaturzeitschriften des 18. und 19. Jahrhunderts aus dem

deutschen Sprachraum

, 빌레펠트 대학도서관 2000-2017, http://

www.ub.uni-bielefeld.de/diglib/aufkl/berlmon/berlmon.htm 참조) 그러니까 쬘너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칸트가 이 글을 발표한 것이다. 이 글의 맨 마지막에 표시했듯이 칸트가 탈고한 날짜는 1784년 9월 30일이다.

(2)

그래서 거의 본성이 되어버린 미성숙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은 각각의 개별적인 사람들에게 는 어렵다. 그는 심지어 그 상태를 좋아하게 되었고 또 당분간 실제로 자신의 생각하는 능력 을 사용할 능력도 없다. 그런 시도를 하도록 그를 놓아둔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규 칙들 그리고 공식들, 즉 자신의 자연적인 소질을 이성적으로 사용할 때 ― 심지어 잘못 사용 할 때도 — 쓰는 이 기계적인 도구들은 미성숙을 계속 이어가게 만드는 족쇄인 것이다. 설령 어떤 이가 이 족쇄를 내던졌다손 치더라도 그는 가장 작은 도랑 하나를 위태롭게 넘은 것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그와 같은 자유로운 움직임에 익숙해 있지 않기 때문이 다. 그런 까닭에 자신의 정신을 스스로 검토함으로써 미성숙으로부터 풀려나는 데에 성공한 사람, 그럼에도 또한 안전하게 나아가는 데에도 성공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독자 대중3)이 스스로를 계몽하는 것은 오히려 가능하다. 정말이지 독자 대중에게 자 유만 용인된다면 그것은 거의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는 언제나, 심지어 큰 무리의 후견인으로 앉혀진 이들 가운데서도 스스로 생각하는 몇몇이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며, 또 이 들이 직접 미성숙의 굴레를 벗어 던진 뒤에 스스로 생각하는 각각의 인간들의 가치와 소명을 이성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정신을 자기 주변에 퍼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묘한 것 은 스스로는 전혀 계몽할 능력이 없는 후견인들 몇몇이 선동했을 때 지금까지 이들에 의해 굴 레가 씌워졌던 독자 대중이 나중에는 이들조차 그 굴레 아래에 있도록 강요한다는 점이다. 편 견을 심어 놓는 것은 그처럼 해롭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그것을 처음 생기게 했던 장본인 이나 그 추종자들에게 직접 보복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독자 대중은 단지 천천 히 계몽에 이를 수 있다. 혁명에 의해서는 사적인 전제 정치나 이익을 탐하고 권력을 탐하는 압제가 무너질 수는 있겠지만 결코 사고방식의 참된 개혁이 실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낡은 편견들이 그랬던 것과 똑같이 새로운 편견들도 생각하지 않는 거대한 무리의 사람들을 지도하는 가이드라인으로 쓰일 것이다.

이 계몽을 위해서는 자유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요구되지 않는다. 더욱이 단지 자유라고만 칭할 수 있을 그 모든 자유 가운데 가장 해롭지 않은 자유, 즉 모든 점에 있어서 자신의 이성 을 공적(公的)으로 사용할 자유가 요구될 뿐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사방에서 “토론하지 마 라!”4)는 소리를 듣는다. 장교는 “토론하지 말고 훈련해라!”, 재정 관료는 “토론하지 말고 지불 3) 원문의 “Publikum”이다. 우리말로 옮기기에 참으로 어려운 단어다. 어원이 되는 라틴어 “publicum”

은 광장과 같은 공적인 장소를 뜻하기도 하고 또한 그런 곳에 모여 정치적인 토론과 결정을 하거나 연극을 관람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하는 공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 전체를 뜻한다. 나중에는 공연을 보러 온 관객이나 예술이든 학문이든 특정한 주제에 관심을 갖고 강연을 보러 온 청중이나 책과 간행 물을 읽는 독자들 전체를 뜻하기도 한다 (표제어: “Publikum”,

Duden – Das grosse Wörterbuch der deutschen Sprache

, 2000 참조). 보통 “대중”으로 옮긴다. 물론 이 번역어가 틀리다고 볼 수는 없지만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칸트의 이 글에서는 그 단어에 들어 있는 중요한 의미를 살려내질 못 한다. 첫째는 Publikum에 속한 사람들에게 있을 수밖에 없는 ‘관심’이나 ‘자발성’이다. 대중이라는 단어에는 그런 자발성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칸트가 이 단어를 통해 이 글을 읽고 있을

󰡔월간 베를린󰡕의 독자를 직접 지칭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독자 대중”이라는 잘 사용 하지 않는 표현을 선택하였다.

4) 원문은 “räsoniert nicht!”다. 보통 “räsonieren”을 “따지다”라고 옮긴다. 그러나 이 경우 따짐을 당 하는 자는 도외시되고 오직 따지는 자의 행위만 부각되고 만다. 이와 달리 “수다”로 번역한 경우도 있다 (칸트, 󰡔실천이성비판󰡕, 백종현 옮김, 2002, V 153쪽[쪽 번호 앞에 “V”는 학술원판 칸트 전집의 책 번호를 뜻한다]). 18세기 당시의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현대적 의미로만 번역한 경우다 (표제어:

“räsonieren”, 󰡔NAVER 독일어 사전󰡕, http://dedic.naver.com 참조). 칸트가 이 단어를 통해 표현 하려 했던 의미를 잘 알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있다. 앞서 언급했던 󰡔실천이성비판󰡕 V 153쪽과 󰡔실 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 VII 280쪽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칸트는 지인들을 식사에 초대하여 밥 먹으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심지어 칸트는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에서 그 이야기 가 세 단계로 진행된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첫 번째 단계는 “Erzählen / 이야기하다”이다. 있었던

(3)

해라!”, 성직자는 “토론하지 말고 믿어라!”라고 말한다 (결단코 오직 단 한 명의 지배자만이

“토론하라! 너희가 원하는 만큼, 또 너희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 하지만 복종하라!”라고 말하 고 있다). 여기서는 어디에나 자유가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제한이 계몽에 방해가 되는 가? 어떤 제한이 방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촉진이 되는가? ― 내 대답은 이렇다: 자신의 이성 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언제나 자유로워야 하고 또 그런 사용만이 사람들 가운데에서 계 몽을 가져올 수 있으며, 반면에 자신의 이성을 사적(私的)으로 사용하는 것은 종종 매우 좁게, 물론 그로 인해 계몽의 진행에 특별히 방해됨이 없이, 제한되어도 좋다. 그런데 내가 자신의 이성의 공적인 사용이라고 말하는 것은 누군가가 식자(識者)로서5) 독서계의 전체 독자 대중 앞에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사적인 사용이라는 말은 그가 맡고 있는 어떤 일정한 시민적인 직위나 관직에서 허용되는 이성 사용을 뜻한다. 어쨌든 국가의6) 이해관계로 이어지는 여러 일들에는 적지 않은 구성원들로 하여금 오로지 수동적으로 처신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어떤 정해진 기계적인 체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인위적인 의견일치를 통해 통치 가 공적인 목적을 향하게 하거나 적어도 이 목적이 와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 런데 당연히 여기서는 토론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대신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기계의 그 구성원이 동시에 국가 전체의 일원으로, 게다가 세계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생각되는 한, 따 라서 본래 의미대로의7) 독자 대중에게 글로써 문의하는 식자의 자격에서 생각되는 한, 그 구 성원은 당연히 토론할 수 있고, 또 이로 인하여 그가 일부 수동적인 일원으로서 투입되어 있 는 일들은 해를 입지 않는다. 그래서 상관으로부터 무엇인가 명령을 받은 장교가 근무하면서 이 명령이 목적에 들어맞느냐 또는 소용이 있느냐 하면서 떠들썩하게 토론하려든다면8)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는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식자로서 전시 복무에서 발견되는 잘 못된 조치에 대하여 논평하는 것, 또 이 논평을 그의 독자 대중이 판단하도록 공개하는 것은 당연히 허용되지 않을 수 없다. 시민은 자신에게 부과된 세금의 납부를 거부할 수 없다. 게다 가 부과된 것이 그에 의해 이행되어야 할 때 그것에 대해 주제넘게 흠잡는 것은 (사방으로 번 지는 반항을 야기할 수도 있을) 물의를 일으키는 사건으로서 처벌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 도 불구하고 바로 그 똑같은 시민이 식자로서 그런 세금공고의 부적절함이나 부당함에 반하여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발표한다면 그는 시민의 의무에 반하여 행위를 한 것이 아니다. 마

일에 대하여 단순히 기술하는 단계다. 친구들끼리의 술좌석 대화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우리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일로 대화를 시작한다. 두 번째 단계는 “Räsonieren”이다. 특정한 주제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며 묻고 대답하기를 반복하는 토론이다. 심지어 말다툼으로까지 진행되기도 한다. 세 번째 단계는 “Scherzen / 농담으로 말하다”이다. 토론에는 긴장이 있기 마련이 다. 이 긴장을 농담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을 고려할 때 “räsonieren”을 “토론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제일 좋을 듯싶다.

5) “Gelehrter”를 옮긴 것이다. 보통 “학자”로 옮긴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여기서는 뜻이 너무 협소 해진다. “가르치다 / lehren”라는 동사의 과거분사형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점만을 고려하여 그렇게 옮겼다. 즉, 학자가 아니어도 글을 쓸 수 있는 모든 사람이 의미 범위에 들어온다 (표제어:

“Gelehrt”,

Deutsches Wörterbuch von Jacob Grimm und Wilhelm Grimm

[= 󰡔그림 사전󰡕], Leipzig 1854-1961, www.woerterbuchnetz.de 참조).

6) “das gemeine Wesen”을 옮긴 것이다. 18세기에 이 표현은 라틴어 “res publica”의 독일식 번역어 다 (표제어: “Wesen”, J. Chr. Adelung,

Grammatisch-Kritisches Wörterbuch der Hochdeutschen Mundart

[= 󰡔아델룽 사전󰡕], Leipzig 1793-1801, www. woerterbuchnetz.de 및 표제어: “gemeinwesen”, 󰡔그림 사전󰡕 참조). 따라서 이 표현에는 ‘국가’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7) 앞의 각주 3)번 참조.

8) 원문의 “vernünfteln”이다. 현대적 의미는 “궤변을 부리다”이지만 칸트의 경우 “räsonieren”의 동의 어로 생각될 수 있다 (󰡔실용적 관점에 본 인간학󰡕, VII 200쪽 참조).

(4)

찬가지로 성직자는 자신이 맡은 교리 수업의 학생들과 교구 구성원들에게 그가 근무하는 교회 의 종파적 신조에 따라 설교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그가 이 조건으로 채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자로서 그는 완전히 자유로우며, 게다가 저 종파적 신조에 있을 수 있는 결함에 대해 면밀히 검토하여 얻은, 물론 선의를 지닌 그의 모든 생각들을, 그리고 종교 및 교회와 관련된 것들을 개선하기 위한 제안들을 독자 대중에게 알려줄 소명 또한 갖고 있다.

이때 양심에 짐이 될 만한 것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가 교회의 관리자로서 자신의 직무에 따라 설교하는 것이 있을 텐데, 그와 관련하여 그는 자기 마음대로 가르칠 자유로운 권력을 갖고 있지 않고 오히려 지침에 따라서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강론하게끔 채용되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설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교회는 이러저러한 것들을 가르친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그 교회가 사용하는 논거들인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 자신 완전히 확신하면서 동의하지는 않을 교리들, 그럼에도 그 안에 진리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기 때문에, 또 어떤 경우라도 최소한 그 안에서 내적인 신앙에 모순되는 것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가르치겠다고 한 그 교리들로부터 교구민들에게 실제로 도움이 될 만한 모든 것들을 끌어낼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모순되는 것이 있다고 믿었었더라면 양심을 지닌 채 자신의 직무를 맡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 일을 내려놓아야 했었을 것이기 때 문이다. 따라서 채용된 교사가 자신의 교구민 앞에서 행하는 이성 사용은 단순한 사적인 사용 이다. 왜냐하면 그 교구민 모임은 아무리 인원이 많을 지라도 언제나 단지 사사로운 모임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성직자로서의 그는 자유롭지 않고 또 자유로워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타인이 위탁한 임무를 이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원래의 독 자 대중에게, 즉 온 세상 사람들에게 글로써 말하는 식자로서의 그는, 따라서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때의 그 성직자는 자기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그리고 개인적으로 발언할 무 제한의 자유를 누린다. 왜냐하면 인민의 후견인이 (종교적인 것들에서) 개인적으로 다시금 미 성숙하게 있어야 한다는 것은 결국 불합리함을 영원히 지속시키게 되는 불합리함이기 때문이 다.

그러나 공의회(公議會)9)나 (네덜란드 사람들이 칭하는 것처럼) 존귀한 클라시스10)와 같은 성직자들의 결사는, 자신들의 모든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이들 구성원의 힘을 빌려 인민도 끊 임없이 후견하기 위하여, 더욱이 이 후견을 영원히 지속하기 위하여, 맹세를 통해 어떤 불변 의 종파적 신조를 지키기로 약속하는 것이 당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내 대답은 전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인류에게 일어날 앞으로의 모든 계몽을 영원히 막기로 결정하는 그와 같은 계약은 전적으로 무효이며, 설령 그것이 최고 권력에 의해, 제국 의회와 가장 엄숙한 평화조 약에 의해 비준되어 있다고 해도 그렇다. 인식을 (무엇보다도 매우 절박한 인식을) 넓히며 또 오류를 씻어내며 또 게다가 계몽하는 가운데 계속 나아가는 일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상태 에 다음 시대가 처하도록 만드는 것을 이전 시대가 작당해서 서약할 수는 없다. 이는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범죄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의 근원적인 규정은 바로 그와 같이 진보 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손들이 그런 결정들을 아무런 권한이 없이 모욕적인 방식

9) 원문의 “Kirchenversammlung”이다. 카톨릭의 고위 성직자 회의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 “공의회”로 옮겼다. 이 단어에 대한 󰡔Naver 국어사전󰡕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교황이 온 세계의 추기경, 주교, 신학자들을 소집하여 진행하는 공식적인 종교 회의. 교회 전체에 해당하는 교리나 규율에 관하여 토 의하고 규정한다” (표제어: “공의회”, http://krdic.naver.com).

10) 원문의 “Classis”를 그대로 음역했다. 󰡔Naver 영어 사전󰡕에 따르면 “(개혁파 교회의) 종교 법원, 장 로 감독회”로 설명되어 있다 (표제어: “classis”, http://endic.naver.com). 아마도 칸트가 카톨릭의 공의회에 짝을 맞추어 개신교 쪽의 고위 성직자 회의도 언급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5)

으로 취해진 결정으로 여기면서 거부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어떤 것이든 그것이 인 민에 대하여 법으로 정해질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를 알아보는 데 쓸 수 있는 시금석은 ‘인민 이 스스로에게 그와 같은 법을 강요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있다. 그런데 그 법은, 마치 더 나은 법을 기대하고 있는 중일 때처럼, 모종의 질서를 도입하기 위해 일정 정도의 짧은 기 간 동안 정해져 있는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와 동시에 모든 개개의 시민들이, 특히 성직 자가, 식자의 자격으로서 공적으로, 즉 글을 통해 그 당시 있었던 법제정의 잘못된 점에 대하 여 논평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용인되어 있어서, 시민들이 의견을 통일하여 (비록 모든 시민 이 아닐지라도) 군주에게 제안 하나를 내놓을 수 있을 만큼 그 사안의 특성에 대한 통찰이 공 적으로 확대되고 또 입증되었을 때까지만 이미 도입되었던 질서가 계속 지속될 수 있는 것이 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그 제안은 어쩌면 더 나은 통찰이라고 파악된 것들에 따라 종교제도 를 변경하기로 합의하였던 사람들의 교구를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시민들이 내놓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옛 제도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그 정도에서 끝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방 해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공적으로 의문시되어서는 안 되는 강경한

― 비록 한 사람의 생존기간 이내에 한정된 것일지라도 ― 종교체제를 합의하는 일,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개선을 향한 인류의 진보에서 흡사 한 시대를 없애버리고 또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게 만들어 후손들에게 참으로 몹시 해가 되게 만드는 일은 단연코 허락되지 않는다.

물론 한 인간은 그 사람 개인으로서, 또 그럴 경우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만, 자신이 알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과 관련해서 계몽을 미룰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계몽을 포기한다는 것 은, 그 사람 개인으로서든 더 나아가 후손에 대해서든, 사람다움의 거룩한 올바름을 해치고 짓밟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인민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결코 결정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한 군주가 인민에 대해 결정한다는 것은 더더욱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입법자로서의 군주의 권위는 그가 전체 인민의지를 자신의 의지와 합일시킨다는 바로 그 점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만일 군주가 참된 개혁이든 오인된 개혁이든 간에 모든 개혁이 시민적 질서와 함께 이루어진 다는 것만을 중히 여긴다면 자신들의 영혼 구제를 위해서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을 그저 스스로 하게끔 신민들을 내버려두어도 좋다. 그런 것은 군주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지만 한 신민이 그런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정하고 또 조성하는 일에 힘이 닿는 데까지 노력 하는 것을 다른 신민이 폭력적으로 방해하지 못 하도록 방지하는 것은 당연히 군주와 상관이 있다. 만일 신민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잘 정리하여 쓴 글들을 정부검정을 받게 함으로써 군주 가 개입한다면, 또 만일 군주가 자신이 최상의 견해를 갖고 있다는 생각에서 이 일을 행한다 면 — 이때 그는 ‘황제라 해도 문법학자를 초월해 있지는 않다’는 비난에 노출된다 — , 또 더 나아가 만일 군주가 국가의 몇몇 전제적인 제후들이 나머지 신민들에게 종교적인 폭정을 저지 르는 것을 지지할 만큼 자신의 최고 권력을 깎아내린다면, 이는 그가 가진 제왕적 위엄마저 무너뜨릴 것이다.

자, 그렇다면 “현재 우리는 계몽된 시대에 살고 있는가?” 그 대답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계몽의 시대에는 살고 있다”일 것이다. 현재의 사정이 그렇듯이 전체적으로 볼 때 사람들이 종교문제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스스로의 지성을 안전하게 또 잘 사용할 수 있다 고, 또는 단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말하기에는 매우 많이 부족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렇게 되기 위해 자유롭게 노력할 수 있는 영역이 현재 사람들에게 열려는 있으며, 또한 보편적인 계몽을 방해하는 것들이나 또는 스스로 잘못하여 처하게 된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을 방 해하는 것들이 점차 적어진다는 것을 알려주는 분명한 공시들을 우리가 접하고 있다. 이점에 서 지금 시대는 계몽의 시대 또는 프리드리히 왕의 세기이다.

(6)

종교적인 일과 관련하여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고 전적인 자유를 허용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긴다고 말한다 해서 자신의 위엄이 손상된다고 여기지 않는 제후는, 그러니 까 관용이라는 거만한 표현조차 스스로 거부하는 제후는 스스로 계몽되었으며, 적어도 통치의 차원에서 최초로 인류를 미성숙에서 벗어나게 한 제후로서, 그래서 누구나 양심에 관련된 모 든 사항에서 자기 자신의 이성을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해 주었던 제후로서 은혜를 느끼고 있 는 세상 사람들과 후세들로부터 칭송을 받을 만하다. 그런 제후 아래에서는 존경받는 성직자 들이 자신들의 직책에 따른 의무와 상관없이 자신들이 받아들인 종파적 신조에 이곳저곳 어긋 나는 판단과 견해를 식자의 자격에서 자유롭게 또 공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검사하도록 제시해 도 되며, 또 직책에 따른 의무에 전혀 제한받지 않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더더욱 그럴 수 있 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유의 정신은 외부로 퍼져나간다. 심지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곳 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고 있는 정부가 벌이고 있는 외적인 방해에 맞서 싸워야 하는 곳으로조차 퍼져나간다. 왜냐하면 자유가 있더라도 국가의 공적인 안녕과 화합에 대해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선례가 이런 정부가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듯 앞에서 반짝이 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야만적인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조작하지 않는 한 인간 은 야만성으로부터 점차 스스로 빠져 나온다.

나는 인간이 스스로 잘못하여 처하게 된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 즉 계몽의 주안점 을 주로 종교적인 사안에 두었다. 왜냐하면 예술 및 학문과 관련해서 우리의 지배자들은 자신 들의 신민에 대한 후견인 역할을 하는 데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고, 게다가 종교적인 미성숙 이, 가장 해로운 것이 그렇듯, 모든 미성숙 가운데 인간의 명예를 가장 많이 더럽히는 것이기 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과 학문을 지원해 주는 국가 원수의 사고방식은 훨씬 더 진전 할 것이고 또한 자신의 법 제정과 관련해서조차 신민들이 스스로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도 록 허락하는 것이, 또한 법 제정이 더 낫게 작성되는 것에 대하여 ― 게다가 이미 발표된 법 제정에 대한 솔직한 비판과 함께 ― 자신들의 생각을 세상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제시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아무런 위험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선례로서 이제껏 그 어떤 군주도 앞지르지 못 하게 했던 빛나는 선례가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받드는 군주다.

그러나 오직 스스로 계몽한 군주, 겁내지 않는 군주, 또 동시에 공공의 안녕을 보증하기 위 해 잘 훈련된 수많은 군대를 준비해 놓은 군주만이 자유국가11)가 감히 말해서는 안 되는 것 11) 원문의 “Freistaat”다. 보통 “Republik”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단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공화국”

으로 옮긴다. 그러나 “공화국”으로 옮기면 이 문장은 잘 이해되질 않는다. 왜냐하면 칸트가 이제껏 했던 말들은 공화국의 이념을 옹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반면 여기서 “Freistaat”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모순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Zum ewigen Frieden. Ein philosophischer Entwurf von Immanuel Kant

[= 󰡔영구 평화론󰡕]에서 칸트가 제시한 “공화적 체 제 die republikanische Verfassung”와 ‘민주적 체제 die demokratische Verfassung’의 구별을 고려한다면 그 문장은 모순 없이 이해될 수 있다 (B24). 왜냐하면 칸트는 공화적 체제에는 긍정적인, 그러나 민주적 체제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같은 책 B25 참조). ‘공화적 체제’는 통치 방식에 따라 분류되는 국가형태로서 “독재적despotisch” 체제와 구별된다 (같은 쪽). 이와 달리 “민 주정체Demokratie”는 최고 통치 권력의 소유자에 따라 분류되는 국가형태로서 “군주정체 Autokratie”, “귀족정체Aristokratie” 등과 대비된다 (같은 쪽). 그러니까 칸트에서 ‘독재국가’의 반 대는 ‘민주국가’가 아니라 ‘공화국’인 것이다. 더욱이 칸트는 문자 그대로의 ‘민주정체’, 즉 모든 개개 의 인민들이 최고 통치 권력을 갖고 있는 국가는 필연적으로 독재적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쪽 참조).

따라서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Freistaat”를 “공화국”으로 옮기는 것보다 차라리 “민주정체”로 옮 기는 것이 칸트에 더 적합해 보인다. 더군다나 칸트가 출판한 글 전체에 걸쳐서 단지 두 번만 등장하 는 “Freistaat”의 나머지 용례도 “Demokratie”와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

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ßen Vernunft

[=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VI 102쪽). 하지만 그렇게 옮

(7)

을 말할 수 있기도 하다: “토론하라! 너희가 원하는 만큼, 또 너희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 다 만 복종하기는 해라!” 이처럼 여기에 인간사의 기이하고도 예기치 못 한 진행 과정이 드러난 다. 인간사의 진행 과정을 큰 틀에서 보면 늘 그렇듯 거기에 들어 있는 거의 모든 것은 역설 적이다. 더 큰 시민적인 자유는 인민의 정신적인 자유에 유리하게 보이지만 이 자유에 넘을 수 없는 제한을 가한다. 그에 반해 더 작은 시민적인 자유는 인민의 정신에게 자신의 모든 능 력에 따라 넓혀 나갈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준다. 언젠가 자연이 이 단단한 껍질 아래에서 가장 정성스럽게 돌보는 싹을, 즉 자유로운 사고를 향한 성벽과 소명을 틔워내었다면 이 싹은 점차 다시 인민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이에 의해 인민은 점차 행동의 자유와 관 련해서 더 능력 있게 될 것이다) 종국에는 이제 기계 이상의 존재자인 인간을 그의 존엄에 맞 게 대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여기는 통치의 원칙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1784년 9월 30일

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 임마누엘 칸트

°12) 9월 13일자 뷔슁의 주간 소식지에서13) 나는 같은 달 30일인 오늘 동일한 질문에 대한 멘델스존 씨의 대답이14) 열거되어 있는 이번 달 󰡔월간 베를린󰡕의 광고문을 읽었다. 나는 아직 그 간행물을 받아 보지 못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제 우연이 어느 정도까지 생각의 일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보는 처지에 놓이게 될 뿐인 이 기고문을 자제했을 것이다.

길 경우 현재 우리말의 맥락에서 볼 때 칸트가 민주주의에 반하는 인물이라는 또 다른 오해가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Freistaat”를 의미가 조금 모호한 단어인 “자유국가”로 옮겼다.

12) 칸트 자신이 달아놓은 각주다.

13) 원문은 “Büschingschen wöchentlichen Nachrichten”이다. 당시에 그런 명칭의 간행물이 있었는 지 아니면 신학자이자 지리학자였던 Anthon Friedrich Büsching(1724~1793)과 관련된 어떤 간행물 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표현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14) 모세스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 1729~1786)은 󰡔월간 베를린󰡕 1784년 9월호에 <계몽이란 무 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라는 기고문을 실었다. 칸트의 기고문이 같은 해 12월호에 실렸으니까 칸 트보다 3달 앞서 발표한 것이다. 당시에 멘델스존은 독일 계몽주의를 대표할 만큼 유명한 사람이었 다. 반면 칸트를 아는 사람들은 아직 거의 없었을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을 발표한 지 3년 밖에 지 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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