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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quiry about 'The Theory of Brick-Copy' of the Stone Pagoda at Bunhuangsa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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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분황사 석탑 Ⓒ

신라 분황사탑의 ‘模塼石塔 說’에 대한 문제 제기와 고찰

이 희 봉

* (중앙대 건축학부 교수)

주제어: 모전탑, 모전석탑, 분황사탑, 적석탑, 전탑, 인도 스투파, 적판석탑

1. 서론

1)

국보 30호 경주 분황사 석탑은 AD. 634년 건축된 신라 탑 중 가장 오래된 현존 탑이다.

『삼국사기』를 바탕으로 선덕여왕 3년 분황 사와 동시에 완성된, 연대의 논란이 없는 탑이 다. 현재는 윗부분은 붕괴되어 높이 9.3m 3층 까지만 남아, 원래 5층, 7층, 9층의 추정이 있 지만 확실치는 않다.

분황사탑은 일제 강점기부터 선행연구자들 에 의해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명명되어 지 금까지 정설로 이어온다. 학술용어는 무엇보다 도 사실과 일치해야만 한다. ‘模塼’ 즉 벽돌 모 방 행위에 의한 탑이라는 용어가 사실과 부합 되는 지 여부에 대해 근본 고찰을 한다. 기존 설을 두 계열로 나누어 1)중국의 전탑 모방과 2)국내 전탑 모방 각각에 대해 검토한다. 논문 범위 상 일차 모전 명칭이 사실에 부합하지 않음을 입증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분황사 석 탑의 발생 원인을 추정하여 원조 인도 스투파 와의 관련성을 검토한다.

또한 모전탑 명칭 오류가 확대 재생산되어 석탑연구에 혼란을 일으킴을 고찰하고, 가능한

* 교신저자, 이메일: [email protected]

새로운 명칭을 예시한다.

연구방법으로 초기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현재까지의 문헌연구와 국내는 물론 인도, 중 국 현지 실물답사를 병행한다.1)

2. 기존 모전석탑설의 검토

2-1. 모전석탑 용어의 기원

건축사와 미술사 관련 교과서, 연구서, 논문

1) 직접 답사 촬영 사진은 Ⓒ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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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좌, 서안 천복사 소안탑 (한동수 외 역, 중국고건축 78쪽)

<그림 3> 우, 서안 자은사 대안탑 ⓒ 과 문화재청 정보에서 분황사탑의 ‘모전석탑’

호칭에 예외가 거의 없다. ‘모전석탑’ 용어의 시초는 일제 시 1902-04년 關野貞이 대대적으 로 조사한 한국건축 중 폐허 상태의 분황사탑 보고서 앞부분에 “거의 塼築과 같다.”(ほとん ど塼築のごとくである.)고 서술하다가 뒷부분 에는 “중국탑의 塼築을 모방하고 있다.”고 단 정한데서 비롯된다.2) 나아가 “西安의 薦福寺 小雁塔(그림2)과 慈恩寺 大雁塔(그림3)을 방 불케 한다.”고 본 인상을 중국탑에 빗대어 서 술한다. 또한 藤島亥治郞은 1932년 분황사탑 이 “支那(중국)의 塼塔을 黑안산암의 小석재 로 유사하게 模造한 것”이라고 근거는 없이 단정한다.3)

우현 고유섭이 다음과 같이 이어받는다.

2) 關野貞, “慶州における新羅時代の遺跡”『朝鮮の建築 と藝術』 2005, 660-61쪽. 원래는 조선건축조사보고 였 음. 고유섭은 『韓國美術史及美學 論攷』 124쪽에서 關 野貞의 ‘塼築’ 용어를 ‘煉瓦石造’(렝가=벽돌)로 번역한다.

3) 藤島亥治郞, “慶州お中心とせる 新羅時代 變形三層石 塔,五層石塔及び特殊型石塔”, 『建築雜誌』579호, 1933.

12월, 1634쪽

경주 분황사 탑에서 비로소 순전한 塼 모양의 탑파가 출현 하였으나, 이것도 진정한 전은 아니며 安山岩이라는 회흑 색의 석재를 塼과 비슷하게 長矩形으로 작게 자른 것을 塼 모양으로 쌓아 올려 서 전탑양식을 모방하고 있다.4)

분황사 塔材는 이미 甎(전)을 模한 것이 다.5)

전탑을 대표할 이 분황사탑도 실은 전 자체가 아니요 소안산암을 단절하여 塼 樣을 모방한 것이다.6)

關野와 藤島 두 일본인과 고유섭의 분황사

‘모전석탑설’은7) 해방 후 학계에서 별다른 검 증 없이 후학들에 의해 정설로 정착되었다.

2-2. 중국 전탑 모방설 검토

분황사탑이 중국 전탑을 모방해 만들었다는 정설의 일예로 현재 대표적 교과서인 김동욱 의 『한국건축의 역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경주 분황사의 모전석탑은 돌로 탑을 세우면서 중국식으로 전돌로 탑을 세우 는 형식을 모방한 것이다. 塼은 벽돌의 또 다른 명칭인데,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목탑과 함께 전으로 탑을 세우는 방식 이 널리 행해졌다. 분황사의 모전석탑은 석재를 전과 같은 모습으로 깎아 중국 의 전탑과 유사한 형태의 탑을 축조한 것이다. 이 탑은 신라가 당시 선진국인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는데 얼마나 적극 적이었나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라고 하 겠다. 전탑이라는 것이 중국에서는 일반 화되어 있었지만 아직 백제나 신라에서 는 거의 세워지지 않고 있었다.8)

4) 고유섭, 『한국탑파의 연구』, 동화출판, 1974, 84쪽 5) 고유섭, 위의 책, 탑파 각론 5. 분황사 석탑, 161쪽 6) 고유섭, 위의 책, 논고, 84쪽

7) 고유섭은 모전탑 용어와 더불어 “벽돌과 비슷한 탑”

이라는 의미의 ‘의전탑(擬塼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 다. 위의 책, 탑파 연구,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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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숭악사탑 평면, 입면

<그림 5> 숭악사탑 하부 상세 중국 전탑 모방설은 關野와 藤島를 이어받

은 고유섭이 확립한다. 즉 분황사탑을 전탑의 나라 “중국에서 바로 수입한 것으로 볼 수 있 다.”고 주장하며, “벽돌의 수법이 조선의 것이 아닌 중국에서 얻은 것으로 본다.”고 했다.9) 중국전탑 à 분황사석탑 à 신라정형석탑으로 연결되는 설을 세워 지금까지도 대부분 학자 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정설로 신봉된다.

한편 고유섭은 앞 절에서 關野貞이 형태상 분황사탑과 방불하다고 본 중국 천복사 소안 탑과 자은사 대안탑 두 전탑 모두 분황사탑보 다 수십 년(대략 70여년: 전자 AD. 704년, 후 자 AD. 707) 이후의 작품임을 언급한다.10) 先이 後를 모방할 수 없는 중국전탑 모방설의 모순을 이미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模塼石塔’ 호칭 분황사탑이 모방하 였다는 선례의 중국 전탑을 추적하기로 한다.

인도 스투파가 중국탑화 하면서 목조 다층누 각형으로 정착하였는데 화재의 교훈으로 인하 여 더 이상 고층으로 발전하지 못하고,11) 전탑 으로 바뀌게 된다. 특히 분황사탑을 중국 전탑 과 연관 지어 모방했다고 보는 이유를 추정해 보면 중국이 전탑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전탑 이 주를 이루는 반면 한국은 석탑의 나라로서 전탑(혹은 모전탑)이 희소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에서 분황사 탑보다 선행하는 현존 전 탑은 북위 시대의 숭악사탑(崇嶽寺, AD. 523, 그림 4)뿐이다. 이 탑을 제외하고는 현존 중국 의 전탑은 모두다 분황사탑보다 후대의 것이 다. 숭악사탑은 목구조 상세를 벽돌로 세밀 묘 사한 탑으로서 단순 형태의 분황사탑과는 너 무도 달라 선행연구자들도 분황사탑의 원조로

8) 김동욱, 『개정 한국건축의 역사』, 기문당, 2007, 54쪽 9) 고유섭, 앞의 책, 논고, 118-19쪽

10) 고유섭, 앞의 책, 탑파연구, 84쪽

11) 李允鉌, 이상해 외 역, 『중국 고전건축의 원리』, 시공사, 2000, 402쪽

들지 않았다. 숭악사탑 의 세부형태를 보면 12 각 평면으로서12) 기둥, 覆蓮형 주두, 아치 개 구부, 난간 혹은 眼像, 화반 장식등을 충실히 모사하고 있다.(그림5) 반면 분황사 탑은 정방 형 평면의 완전 무장식 평벽면 단순 추상형태 이다. 사면 감실의 개구 부도 대부분 중국 전탑 의 아치 구조가 아니라 평인방석의 수평직선이 다. 마치 숭악사탑이 서 양건축 의장상 화려한 바로크 건축이라면 분 황사탑은 절제된 엄숙 한 근대건축 형태로서,

너무나 다른 설계의장 상 숭악사탑이 연대가 앞선다고 해도 분황사탑의 선례가 되었다고는 도저히 보기 힘들다.

중국의 전탑은 발전계통상 목탑에서 시작되 어 전탑으로 이행되어, 조적식임에도 불구하고 충실하게 가구식 목조의 기둥, 보, 주두, 공포

12) 劉敦楨 편, 『中國古代建築史』, 中國建築工業出版, 1987, 92쪽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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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인도 스투파 상부 하미카의 층단내밀기, 카를리 석굴, AD. 1세기 Ⓒ

<그림 6> 신통사 사문탑 (사진, 維基百科 zh.wikipedia.org/zh-tw) 의 복잡한 상세를 그대로 사실적으로 재현하 는 경향이 있다. 그에 반해, 분황사탑은 목조 의 흔적을 전혀 가지지 않고 쌓기 방식에만 충실하고 있다. 따라서 선행 숭악사탑과 분황 사탑을 발생계통상 서로 연관시키기는 전혀 부적합하다.

따라서 고유섭은 목조를 충실히 모방한 중 국 전탑의 복잡성이 분황사 석탑의 조적 단순 성과 서로 맞지 않는 모순 해결책으로서, 중국 탑 중 현존 두 번째 오래된, 단순형의 산동성 神通寺 四門塔을 끌어 온다.13)(그림 6) 후학들 이 그의 설을 그대로 좇아 분황사탑의 모방 선례 중국탑으로 여긴다. 즉, 선덕여왕 대는 중국과 본격적 교류를 시작한 시기이므로 장 안으로 가기위한 첫발을 딛는 교통로 지점에 서 전래되어 분황사에서 재현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이 붙는다.14) 그러나 사문탑은 분황사 탑 과 같이 정방형 단순 추상형태이지만, 중국식

13) 고유섭, 앞의 책, 탑파연구, 83쪽. 고유섭은 사문탑 을 전탑이라 하였으나 실상은 드물게 석탑으로서, 돌을 규격 가공하여 쌓았다. AD. 611 수 시대

14) 강우방, 신용철, 『탑』, 솔출판, 2003, 121-122쪽.

그러나 당과 교류를 시작 한다는 선덕여왕 대에도 분황 사탑은 여왕 재위 불과 3년에 건설되므로 교류가능성은 높지 않다. 본격적 교류하는 신라통일은 분황사탑 42년 후인 AD. 676이다.

다층탑이 아닌 단층에 불과하다. 사문탑은 재 료상 일견 분황사탑같이 일정하게 가공한 돌 을 쌓은 탑이므로 서로 연관시키기에 적합한 듯 보이나, 단위 부재 크기가 오늘날 벽돌처럼 얇지 않고 훨씬 큰 덩어리로 오히려 블록에 가깝다. 오늘날 중국에서 사문탑을 아무도 ‘모 전탑’이라 호칭하지 않음에도, 굳이 ‘모전탑’이 라 하자면 당시 그 크기의 큰 벽돌이 보편적 으로 사용되었는지를 먼저 검토하여야겠지만, 역사가가 만약 오늘을 기준으로 과거를 호칭 한다면 오히려 역설적으로 ‘모블록탑’이 더 적 합할 것이다.

세계 조형역사상 특정 형태가 지리적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보면 한 지역의 ‘수 많은’ 선례 형태가 오랜 세월을 거쳐 타 지역 으로 전파되는 것이지, 신라 경주와 중국 산동 의 수 천리 떨어진 곳에 단 하나의 형태가 다 른 하나로 정확히 전파된다는 것은 확률상 가 능성이 거의 없다. 사문탑 원조설은 굳이 중국 에서 선례를 찾으려

는 강박적 노력의 하나로 추정된다.

중국 전탑과 연관시 키는 주 이유는 다 름 아닌 구조방식상 다층 구조의 지붕돌 옥개석의 상하면 층 단내밀기 방식, 적

출식(積出式)일 것이다.15) 이런 층단 내밀기 방식은 조적 방식의 구조상 필연적으로 나타 나게 되며 인도 스투파의 꼭대기 소위 평두라 불리는 ‘하미카’에서 거의 예외 없이 나타난 다.(그림 7) 즉 중국 전탑을 선례로 연관시킬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미 분황사탑보다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15) 關野貞, 위의 책, 666-6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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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대안탑 근경 세부 ⓒ

<그림 9> 흥교사 현 장탑 (사진 redsky0216.

eagloos.com) 판명되었지만, 분황사 탑과 형태상 가장 유사

한 전탑으로서 전술한 중국 서안 대안탑이 관 행적으로 예시된다.16) 평벽면의 탑으로 벽돌부 재의 ‘층단내밀어쌓기식’의 옥개석이 일견 유사 하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보면 대부분의 중국전탑이 목조 구조를 충실히 재현하는데 비해 대안탑에서는 조금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고는 하나 여전히 기둥, 주두, 창방, 화반이 나 타난다.(그림 8) 내부진입 가능한 中空式 전 층의 사방 개구부는 아치 구조이다. 특히 지붕 돌 층단내밀어쌓기의 제일 바닥에 중국식 표 현의 ‘斜角牙子’로 불리는 2열의 마름모식 쌓 기 수법이 나타난다.17) 두말할 것 없이 분황사 이후인 서안의 興敎寺 玄裝塔(669, 그림 9), 香積寺塔(681) 모두 이와 같은 수법으로, 중국 전탑의 전형을 이루나 우리 탑에는 전혀 없는 형태표현이다.

대부분의 중국의 고층 전탑들은 망루를 겸 하거나 불상안치 기능을 위해 내부를 사용하 는 속빈 中空式인데 비해 분황사 석탑은 원 인도 스투파와 같이 속찬 塊體式이다. 분황사 탑이 중국탑을 모방했다고 못박으려면, 전체

16) 예를 들면, 천득염, 「한국전탑에 대한 비교론적 연 구」, 건축역사연구, 1995. 12, 37쪽

17) 유돈정 편, 앞의 책, 141쪽

모양은 물론 구조수법, 세부상세까지도 모방가 능성을 입증해야 할 것 이다. 그러나 분황사 석 탑은 인도 스투파와는 다른, 동북아시아 원조 중국의 다층 지붕이라는 점 외에는 중국 전탑과 의 유사성을 거의 발견 하기 힘들다. 고구려, 백 제, 신라의 여러 폐사 탑지에서 나타나는 선행 다층 목탑이 분황사탑의 다층화를 가져왔을 것이 다. ‘모전석탑’ 용어처럼 중국 전탑을 형태 모방

한 것이 아니라, 다만 ‘다층 유형’의 전파로 보 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18)

검토한 바와 같이 사실과 다름에도 불구하 고 분황사탑의 기원을 굳이 중국탑에서 찾으 려는 것은 초기 일본인 연구자들이 먼저 인지 한 중국탑에 나중에 본 한국의 분황사탑을 대 입한, 중국 중심의 사고와, 또한 해방 후 한국 연구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중국에서 건축의 모 든 기원을 찾으려고 하는 사고로서, 결과적으 로 중국 사대주의와 일제 식민주의 잔재로 추 정할 수 있다.

우리가 중국불교를 도입하기는 했으나 활발 히 교류하기는 분황사탑 건립 후 자장(590 -658), 의상(625-702)의 시대가 지나서이다.

자장은 분황사탑 건립 2년 후 선덕여왕 5년 636년 왕명으로 제자 10명과 함께 당나라로 갔다가 643년에 귀국하여 646년 통도사를 창 건한다. 의상은 661년 종남산 지엄 문하에서

18) Quatremere de Quincy. ‘모델’은 직접 모방 가능하 나 ‘유형’은 참조 대상일 뿐이다. Giulio Argan, On the Typology of Architecture, 1963. 12, p.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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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종 구도 후 670년 귀국하여 낙산사를 세 운다. 각훈의 『해동고승전』을 보아도 분황사 탑 AD. 634년 이전 신라 승의 중국 유학은 아주 드물다.19)

백여 년 전 시작되어 확고하게 학술용어로 굳어진 ‘模塼塔’의 모방 원본 대상으로서 중국 의 전탑은 가능성이 거의 없다.

2-3. 국내 전탑 모방설 검토

안동지역에 집중되고 일부 경주, 청도와 여 주에 분포 흔적을 남긴 몇 안 되는 한국의 전 탑은20) 분황사탑보다 연대가 훨씬 후대이다.

즉 칠곡 송림사전탑(8세기초), 안동 신세동 7 층전탑(8세기중반), 동부동 5층전탑(9세기초), 조탑동 5층전탑(8세기중반), 여주 신륵사탑(고 려중기이후)이다.21) 따라서 후대의 것을 선대 가 모방할 수는 없으므로22) 전탑을 모방했다 는 ‘모전탑’이라는 용어는 학술용어로 성립하기 힘들다.

따라서 고유섭은 모전석탑설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분황사탑에 선행하는 전탑을 『삼국유 사』 ‘良志使錫조’에서 “작은 전탑을 하나 만 들었다.[又嘗彫磚造一小塔]”는 기록에서 찾는 다.23) 삼국유사 저자 일연은 양지 스님 신상에 대해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 대부분 미상이고 다만 善德女王 때 자취를 나타내었을 뿐”이라 고 쓰고 있다.24) 소탑이라고 기록한 바에 의하 19) 각훈, 『해동고승전』, 149쪽. 최초 당나라 유학승은 覺德으로 나오고 (입당 미상-549년 귀국). 智明(585입당 -602귀국) 圓光(589입당-600귀국) 安含(601입당-605귀 국)에 불과하다.

20) 박홍국, 『한국의 전탑연구』, 학연문화, 2000, 104쪽 21) 박흥국, 위의 책, 154쪽, [표 7]

22) 천득염, 「한국 전탑에 대한 비교론적 연구」, 건축 역사연구, 1995. 12, 31쪽에서, 또 신용철, 「통일신라 석 탑연구」, 동국대 박사논문, 2006, 82-87. 기존 연구 결 과를 토대로 국내 모전석탑보다 전탑이 오히려 후대임 을 이미 지적하고 있다.

23) 고유섭, 앞의 책, 탑파연구, 85쪽

면 분황사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아주 작은 규모의 봉헌탑일 가능성이 크다. 시기상으로도 선덕여왕 재위 총 16년 중 즉위 원년부터 분 황사탑 건립인 여왕 3년 불과 3년 사이는 확 률상 18%로(3/16) 양지가 소탑을 만들어서 분 황사의 모방 원본이 되게 하였을 가능성은 적 으며, 더구나 적어도 분황사 공사 기간이 수년 걸렸을 것으로 보면 선덕여왕시의 양지소탑이 분황사 착공 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더더 욱 없다.

기존 모전석탑설에서 분황사의 모전석탑이 모방한 국내 전탑의 선례가 없는 모순을 극복 하기 위하여, 박홍국은 폐사지에서 발굴된 몇 개의 탑상문전을 통하여 비슷한 시기에 錫杖 寺지에 전탑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과 그 시기 가 AD. 632-679년으로 추정한다.25) 그러나 막 연한 추정에 불과하지만 그것도 분황사탑 634 년보다 선행되지는 못한다.

또 그는 “분황사 모전석탑 이전에 적지 않 은 숫자의 전탑이 경주지역에 분명히 존재하 였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고26) 하나 불행히도 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즉 삼국유사의 진흥왕시 AD. 565년 “절들이 별처 럼 늘어섰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줄지었다” [寺 寺星張 塔塔雁行]는 기록의 탑들을 목탑이 아 닌 상당수 전탑으로 추정하고 있는데,27) 대규 모 전탑이라면 폐사지가 되어 아무리 파괴되 었다고 해도 경주 곳곳에 전탑의 기단을 포함 한 흔적을 상당수 남겨야만 한다. 결국 분황사 석탑보다 선행하는 국내 전탑의 근거는 없는

24) 一然 저, 박성봉, 고경식 역, 『삼국유사』, 서문문 화, 1987, 289쪽

25) 박홍국, 위의 책, 70, 124쪽, 석장사지 탑을 선덕여 왕 재위시(632-647) 『삼국유사』의 양지의 작품으로 보고 출토된 안압지와 보상화문전으로 보아 632-679사 이로 추정한다.

26) 박홍국, 위의 책, 54쪽 27) 박홍국, 위의 책, 48-51쪽

(7)

<그림 10> 분황사 폐 판석재.

미처 덜 분리된 판석 부재도 그 대로 사용. 1978년 필자 측정 Ⓒ 셈이다. 그러므로 분황사탑이 ‘국내 벽돌탑을

모방한 모전석탑’이라는 설도 성립하기 힘들다.

결론적으로 역사적 시간상 분황사 탑이 전 탑을 모방한 모전탑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의 전탑들이 분황사 석탑을 모방하였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28) 語義 논리상, 후에 나타난 한국의 전탑들은 분황사 석탑을 모방한 ‘模ž模 塼탑’이라 호칭해야 할 것이다.

3. 분황사 석탑 발생원인 추정

3-1. 벽돌과 돌의 생산 시공 용이성 비교 대부분 선행연구자들이 그러하듯 김동욱은

“비록 전돌은 아니지만 돌을 벽돌처럼 깎아내 면서까지 중국의 새로운 형식을 창출해내려고 한 적극성”이라는 표현으로29) 벽돌은 제작이 쉽고 돌 가공은 어렵다는 고정관념의 전제를 보인다.

이러한 견해는 탑 연구 선구자 고유섭의, 돌 가공이 매우 ‘비경제적’이라는 전제를 계승한 것이다. 고유섭은 그럼에도 당시 벽돌이 아닌 돌 재료의 탑이 축조된 이유는 당시 벽돌이 건축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까닭이라고 본다.30)

즉 암석을 이와 같이 절단하여 탑을 築 上한다는 것은 그 노력에서 보아 도저 히 塼을 사용하는 것과는 비할 수 없고 또 경제적으로 불리하였을 것임에도 불 구하고.... 명백히 塼의 비보편적 상황을 말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8) 신용철의 앞글 82쪽에서 오히려 명칭과는 달리 초 기스투파가 다듬은 돌(모전석)이고, 쉽게 시공하기 위해 후에 전탑으로 했다는 “전탑의 기원이 모전석탑에 있 음”을 지적한다.

29) 김동욱, 앞의 책, 54쪽

30) 고유섭, 앞의 책, 논고, 125-126쪽

즉 벽돌이 중국에서는 주 건축 재료로 발달 하였지만 한국 건축에서 보조 장식재에 불과 하였다고 지적하며, 그 원인으로 오히려 벽돌 의 ‘비생산성’을 언급하고 있다.

원래 조선에는 순전한 塼 건축은 없다.

기껏 담벽, 굴뚝 등에 장식적으로만 사 용되고 궁전, 사원에서는 부전(敷塼), 벽 전(壁塼)에 다소 사용되고 있다. 무릇 조 선의 토질상 ‘비생산적’이었던 것이 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31)

小石材를 塼樣으로 절취하여 전탑같이 축조한 것은 명백히 塼건축에의 지향을 표시한 것으로, 그것이 이 一塔에만 그 치지 않고 타 一塔이 있는 점으로 보아 塼이 얼마나 ‘비생산적’이었나를 알 수 있을 것이다.32)

반면, 일찍이 關野貞은 분황사탑 석재의 가 공을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보았다.33)

대개 이 석재는 안산암으로서 대략 4-5 푼 가량의 두께로 박리되기 쉬우므로 견치(堅緻)하지만 이와 같은 석재를 만 들기에 그다지 곤란을 느끼지 않은 것 같다.

본 논문에서, 분황사의 소위 모전석탑의 부 재는 벽돌처럼 따로 원 재료를 제작할 필요

31) 고유섭, 앞의 책, 탑파연구, 83쪽 32) 고유섭, 앞의 책, 논고, 125쪽 33) 關野貞, 앞의 책, 660쪽

(8)

<그림 11> 분황사 폐 판석재 Ⓒ <그림 12> 다양한 두께와 길이의 판석,

분황사 1층 탑신Ⓒ

없이 자연 상태 판상 결로 쉽게 쪼개지는 돌 을 잘라서 보이는 한 면만 다듬으면 되므로(귀 2면) 어렵지 않다고 판단한다.(그림 10) 기존 의 가공이 어렵다는 관점은 화강석같이 단단 한 돌을 두부모처럼 6면을 모두 잘라내어 가 공한다는 고정 관념에서부터 나오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에도 분황사 경내에 쌓인 폐 탑재의 판 석 두께를 실측한바, 최소 2.0cm에서부터 최대 9.5cm 로서 벽돌이 갖추어야 하는 균일한 두 께와는 전혀 다르게 차이가 심하다.(그림 11)34) 즉 암석의 쪼개지는 결대로의 두께일 뿐이다.

실제 분황사 탑신 입면의 개개 돌을 자세히 보면, 비슷한 두께의 돌 부재를 횡렬 띠로 가 지런히 맞추어서 쌓았을 뿐이다.(그림 12) 전 체적으로 비교적 아랫부분에는 두꺼운, 윗부분 에는 얇은 두께의 띠가 형성된다. 아마 최소 두께의 폐 판석재는 무너진 상층부에 주로 사 용 된 것으로 추정된다.

분황사 탑은 멀리서 얼핏 볼 때 전탑과 비 슷해 보이나, 가까이서 보면 돌 하나의 두께가 서로 최대 네 배 반까지 차이 나게, 판석재의 두께에 따라 얇거나 두꺼운 돌이 뒤섞여있고, 길이도 벽돌처럼 균질하지 않다. 즉 벽돌을 모 방한 것이 아니라 자연 결대로 쪼개지는 판석 을 있는 대로 두껍건 얇건, 길건 짧건 있는 대 로 다듬어 쌓은 것뿐이다.

34) 폐판석재 실제 측정치는 關野가 (앞의 책, 523쪽) 탑에서 측정한 7.5-9cm와 차이가 많음

벽돌은 균질성에 생명이 있는 바, 각 돌의 두께도 길이도 가지가지로 쌓은 분황사 석탑 을 ‘결대로 쪼갠 판석재 쌓기’ 탑으로 보면 될 것인데, 굳이 기존처럼 ‘벽돌을 모방한’ 탑으로 볼 이유가 없다. 용어 설정 당시 연구자가 사 물을 있는 그대로 자세

히 관찰하지 않고서 외 관상 현재 재료인 벽돌 형태와 닮았다는, “방 불케 한다.”는 인상에 의해 덮어씌운 명칭이 다. 또 역사가가 자신 의 시대의 벽돌이라는 재료를 기준으로, 과거 분황사 석탑이 벽돌을 모방했다거나, 벽돌 가 공작업은 쉽고 돌은 어 렵다는 판정함은, 현재 가 과거를 교란하는 왜 곡이 된다.

오류가 입증된 분황

사 ‘모전석탑’ 명칭의 하나의 대안으로서 보다 사실에 가깝게 돌 재료 판석과 쌓기 방식의 합성어 ‘板石蓄積塔’ 또는 ‘積板石塔’으로 제안 한다.

3-2. 積石塔 원조 인도 스투파 근래 일부 탑 연구자들이 선행연구의 불합 리한 중국탑 모방설에서 눈을 돌려 인도의 스 투파와 연관성을 찾는다.

분황사 모전 석탑은 인도의 석탑 양식 이 중국을 거쳐 신라에 수용된 결과로 보인다... 전적으로 전탑의 영향을 받 았다기 보다는 인도로부터 모전석탑이 라는 새로운 탑 문화를 수용해 기존의 목탑 양식과 절충해 건립한 것으로 생 각한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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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3> 나가르주 나콘다 대스투파 평 면. 동심원 및 방사형 구조심벽

<그림 14> 산치 대스투 파 적석탑 외장 표면 ⓒ

<그림 15> 간다라 대형 적석탑,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 분황사 모전석탑은 형태면에서는 중국

의 전탑을, 재료면에서는 인도의 탑을 본뜬 형식이라 할 수 있다.36)

근거 제시는 없는 위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인도 스투파와 연관을 추적한다. 탑의 원조 인 도 스투파는 원래 身骨을 넣고 토석을 누적한 봉분을 가리킨다.37) 梵語를 한자로 의역한 경 전에서, 쌓아 모은 모양으로[累積, 積聚] 대취 (大聚), 취상(聚相)이라 일컬었다.38) ‘Piled-up' 의 원 뜻이 있음이 잘 알려져 있다. 후에 발생 한 석굴사원에서 암석파내기로 조성된 덩어리 스투파를 제외하고는 인도 스투파는 예외 없 이 축적형이다.

즉, 인도 스투파는 본질적으로 ‘쌓기 탑’이 다. 쌓기 재료로는 막돌과 흙도 사용되었지만 벽돌 또는 돌을 가지런히 쌓아서 만들었다. 즉

‘積塼塔’ 또는 ‘積石塔’이다. 그렇다고 해서 반 구형 돔 전체를 그 재료로 쌓은 것이 아니라 동심원과 방사형의 구

조심벽을 만들고 그 사 이는 막돌, 자갈, 흙으 로 메워 넣었다.39)(그림 13) 다시 말해 외관상 외장만 정연하게 다듬 은 돌 혹은 균일한 벽 돌로 마감했다는 것이 다.

시골 외딴 지역에서

힌두와 무슬림의 파괴를 면하고 19세기 초 비 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재발견된40) 산치 스투 35) 박경식, 앞의 책, 180쪽

36) 강우방, 신용철, 앞의 책, 121쪽 37) 고유섭, 앞의 책, 탑파연구, 36쪽

38) 逸見梅榮, 『印度佛敎美術考-建築篇』, 26쪽 39) 나가르주나콘다 사원 대단지 스투파 대부분, Elizabeth R. Stone, The Buddhist Art of Nagarjunakonda, 도판 18. 평면

파도 적석탑이다. BC. 3세기 아소카왕 때 초 기 벽돌과 흙, 자갈로 쌓았었는데, BC. 2세기 후반 파괴되어 슝가 왕조 때 바로 확장 중건 된다. 인도에서 스투파 중건 시 원 스투파를 파괴하는 불경스러움을 피하여 반드시 옛 스 투파에 덧씌워 확장한다. 최초 벽돌외장 스투 파를 거의 두 배 크기로 확장해서 보다 영구 재료로 여겨진 돌로

쌓는다. 돌로 바깥을 쌓고 원 스투파와 사 이는 큰 덩어리 돌로 메워 재건된다.41) 치로 가지런히 다듬은 사암을 재료로 돌쌓기 한 글자그대로 적석 스투파이다.(그림 14) 외장 면 다듬은 돌 쌓 기한 분황사석탑과 같 은 개념이나 아무도

인도 산치 스투파를 분황사처럼 벽돌을 모방 한 ‘모전탑’이라고 호칭하지 않는다.

벽돌 재료로 쌓아진 인도 아대륙 평지 대형 스투파는 지금은 거의 다 허물어져서 원통부 바닥 흔적만 남기고 있는데 반해,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의 불교문명의 직접 통로 역할

40) James Fergusson, History of Indian & Eastern Architecture, p.67

41) Debala Mitra, Sanchi, Archaeology of India,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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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6>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적석 상세 Ⓒ

<그림 17> 싸이두 스투파, 사각 기단 위 파괴된 돔의 적석 모습 Ⓒ

<그림 18> 싸이두 스투파, 원통부 적석 편암 Ⓒ

<그림 19> 겹겹 증축 흔적의 스와트 붓카라 1 적석 스투파 Ⓒ 을 했다고 보는 현 파키스탄 북부인 간다라

지역의 평지 대형 스투파는 예외 없이 돌 재 료의 적석 스투파이다. 간다라 지역 최초이며 최대인 직경 50m의 탁실라의 다르마라지카 스 투파의(그림 15) 점판암(粘板岩: slate) 돌쌓기 외장은 간다라 독특한 방식의 사각 큰돌 사이 에 얇은 돌을 채워 넣어 줄눈을 만든 방식이 고 내부는 막돌을 쌓았다.(그림 16)

파키스탄 북서부주 말라칸드 고개 넘어 중국 통로에 더 가까운 스와트 지역의 싸이두 스투 파는 한 변 20m 사각 기단위에 놓인 원통부 바닥이 겨우 남아있고 그 위 돔 부분은 거의 다 파괴되었는데(그림 17), 기단부는 블록형 동 석(凍石: soap-stone)을 쌓아 가지런히 외장 마감하고 상부 원통부는 편암(片巖: schist) 판 석을 쌓았다.(그림 18)42) 결로 얇게 쪼개지는 편암은 인근 지역 붓카라 1 스투파와 마찬가지 다. 5차례나 증설 확장한 흔적이 있는 직경 11.4m의 붓카라 1 스투파의 원통부 외부는 편 암으로 쌓아 마감하고 내부는 자갈로 채웠 다.43)(그림 19)

인도 스투파를 정 리하면 원래부터 쌓 기 축적식이었다. 벽 돌 스투파가 점차 영구 재료인 돌쌓기 적석 스투파로 변한 다. 석탑 주재료인 돌은 실질적 견고함 과 더불어 영속, 안 정, 신뢰, 불멸, 불후 의 상징성을 갖기 때문이다.44) 불교의 경배 중심인 탑을

점차 영구재료인 돌로 쌓기를 했다는 점에서 분황사 석탑은 인도 스투파와 정확히 맥을 같 이 한다. 특히 인도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되는

출발점의 간다라 지역 스투파는 예외 없이 적 석탑이다. 인도 스투파 돌의 재질은 가공하기 쉬운 비교적 무른 성질의 돌인 사암, 동석, 활 석인데 비해, 중국 비단길로 바로 이어지는 파 키스탄 간다라 스와트 지역스투파는 결로 쪼 개지는 얇은 점판암, 판암을 주재료로 하는

‘판재 적석탑’이다. 간다라 스투파는 안산암 결

42) Ashraf Kahn, Buddhist Shrines in Swat, p.41 43) 위의 책, p.29

44) 조헌, 『한국석탑의 상징성 연구』, 한국문화의 전 통과 불교 - 홍윤식 교수 정년퇴임 기념 논총, 2000, 851쪽

(11)

의 판재를 쌓은 분황사탑과 축적 방식이 일치 한다. 외장은 결대로 쪼개서 한 면만 다듬고 내부는 잡석 채워넣기, 이 모든 특성이 정확히 분황사 석탑과 일치한다. 따라서 적석성을 비 롯한 모든 면에서 인도 스투파는 분황사 탑의 원조가 된다.

중국에서 인도 스투파가 도입되면서 누각목 조탑으로 바뀐 후, 다시 전탑으로 재료가 변화 함에도 목조탑의 상세를 가능한 한 그대로 가 져오고자 하였다. 그에 반해 신라 분황사 석탑 은 목조 건축 상세의 흔적을 전혀 가지지 않 고 오로지 인도 스투파의 원 뜻의 ‘축적성’만 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다만 선행 목탑의 다층 개념을 함께 차입한 것뿐이다.

신라 분황사 석탑은 영속재료로의 돌 사용, 판석 축적성, 그 결과로서의 순수형태적 단순 성이라는 관점에서 중국과는 달리 오히려 인 도스투파와 거의 같은 개념이라 할 수 있다.

3-3. 인도와의 직접 교류 가능성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 중 독특한 한국의 석 탑을 말할 때, 불교를 중국을 통하여 받아들이 긴 했지만 우리의 독창성을 반드시 언급한 다.45) 고유섭도 “일반 문물 전래의 역사를 보 며 係連의 관계를 볼 때, 사람들은 쉽게 중국 석탑파의 영향 밑에서 조선 석탑도 발생한 것 으로 단정한다.”면서도 “석탑의 건조 수법이나 양식은 조선 독자적인 것”으로 파악한다.46)

중국과는 차별되는 신라 석탑의 독창성의 원천을 본 논문에서 간접 전달된 불교를 넘어 서 발생지 인도로부터 직접적이고 더 본질적 인 불교를 받아들이려 했던 신라인의 열정에 서 비롯되었다고 추정한다. 불교를 가까운 중 국을 통해서만 받아들였다고 보고 지리적으로

45) 김동욱, 앞의 책, 53쪽, 83쪽 46) 고유섭, 앞의 책, 탑파연구, 95쪽

먼 인도와의 직접 접촉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는 통념을 다시 보고자 한다.

인도와의 직접교류에 대한 정황 증거는 무 수히 많다.47) 경주의 가야출신 김유신 묘를 비 롯 신라 왕릉 다수가 하부 호석과 수평 수직 돌난간으로 둘러싸인 능 돌이 길이 인도 초기 스투파 구조와 같다. 세계문화유산 석굴암 신 상 조각도 중국 석굴과는 달리 인도 브라만의 제신들을 알지 못하면 만들 수 없고, 특히 석 굴암 불상의 크기가 현장의 대당서역기의 인 도 보드가야 불상과 크기가 일치한다는 것도 밝혀졌다.48)

또한 가야국의 일찍 패망한 역사로 인해 고 구려를 통한 불교 최초 도입(AD. 375)설보다 무려 2백년 앞선 인도 불교 도입이 잊혀져있 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바다 배를 타고 와서 가야 김수로왕과 혼인한 인도 공주 허황옥 49) 싣고 온 파사(婆娑)석탑과50) 현재 지명

‘장유’로도 남아있는 그녀 오라버니 장유화상의 김해 長遊寺와 銀河寺의 창건기와 수로왕의 7 왕자가 그와 함께 성불했다는 하동 七佛庵의 창건기가 있다.

백제 침류왕 때 법성포로 상륙한 인도 승 마라난타가 최초 절 의미의 佛甲寺를 창건하 고(384) 검은 얼굴 墨胡子와 이름이 뒤섞인51) 阿道가52) 선산 桃梨寺를 창건한(440) 사적기

47) 신라는 당시 국제도시였다. 김옥순, 「4-5세기 경주 지역 외래유물을 통한 교환방식의 일고찰」, 신라문화 28집. 증거는 미추왕릉에서 나온 그리스, 로마에서 쓰던 보검, 황남대총의 로마, 페르시아 기원의 유리그릇, 원성 왕 추정 괘릉의 서역인상, 헌강왕 때 처용의 서역인설 등 상당히 많다.

48) 강우방, 『원융과 조화』, 열화당, 1990, 281쪽 49) 일연, 박성봉, 고경식 역, 『삼국유사』, 서문문화, 1987, 164-166쪽

50) 『삼국유사』, 204쪽, “金官城 婆娑石塔” 참조 51) 『삼국유사』, 179-181쪽

52) 김용옥,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통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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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0> 고대 인도와의 해상 교역로 외에도 전국적으로 사찰 창건을 주도한 인도 승의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분황사 창건 바로 직전 安含이 중국유학에 서 귀국 시(605) 인도 승 비마라진체, 농가타, 불타승가 3인을 모시고 귀국하여 황룡사에 머 물면서 경전 번역한 기록이 있다.53) 분황사 창 건 직전 시기 바로 옆 단지 대역사에 인도 승 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불교가 동북아시아 중국으로 전파된 경로로 현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북부 간다라 지 역에서 실크로드 육로로 생각하나 당시 오히 려 바람을 이용한 해로가 더 효과적이었다.(그 림20)54) 실제 신라승 포함 중국 구법승들은 육로 못지않게 해로를 이용하였다.55)

역사기록에서 보면 인도 포교승은 해로를

1990, 114-116쪽. 묵호자가 사람 이름이 아닌 외모 특징 의 보통명사, 그리고 ‘아도, 순도’ 역시 ‘아무개’라는 일 반명사에 불과하므로 기록이 여러 대에 걸쳐 혼합되어 나타난다. 각훈 『해동고승전』129-30쪽에 阿道는 墨胡 子, 黑胡子와 뒤섞여 나타난다.

53) 각훈, 앞의 책, 164쪽

54) Robert Fisher, Buddhist Art and Architecture, p.204-205 지도

55) 인도대륙 동쪽 인도양 벵갈만은 현 인도령 안다만 제도가 있는 인도 안마당이었고 이를 통해 인도차이나 와 인도네시아로 불교, 힌두교를 전파했다. 수마트라해 협을 지나면 바로 곧바로 중국 남부 해안으로 연결된다.

당나라 때 현장은(629-645) 육로를 통해 인도를 왕복하 지만, 그 2백년 전 법현은(399-414) 육로로 가서 해로로 귀국하며, 그 후 의정은(689-695) 왕복 모두 해로를 택 한다. 제켈 『불교미술』 69쪽, 순례자 지도

통하여 한국으로 직접 오기도 하고 중국을 거 쳐 오기도 한다. 삼국유사 “황룡사丈六”조에서 인도와의 해상로 관련을 보이며56) 또 해남 미 황사 사적비에57) 해상로를 통한 남방불교의 창건설화를 보인다.

중국은 인도로부터 불교도입 초기부터 중국 노장학의 틀 속에서 중국화한 格義불교로 받 아들였다.58) 비록 삼국이 중국으로 불교를 받 아들였다고는 하나 신라는 보다 인도 본래의 근원적 불교를 추구했던 경향이 강하다. 일예 로 탑의 사리 장엄을 보아도 사리 내외함의 용기나 공장품의 종류나 탑 중심 사리안치실 의 위치와 방법이 우리가 중국보다 오히려 인 도의 古制를 추구하였음을 지적되며, 고신라가 근원지 인도에의 강한 지향을 보여주는 것으 로 해석된다.59)

일제 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을 시작으로 한 국이 중국문화권 하에 있음을 들어 신라의 독 자성이 과소평가된 결과의 용어가 바로 ‘모전 석탑’이라 할 수 있다. 분황사 석탑은 중국처 럼 목탑에서부터 전탑화하는 것이 아니라, 동 북아 중국 다층 탑 유형의 큰 틀 속에서 인도 의 적석 스투파가 바로 분황사에서 적석탑화 에서 하는 것일 뿐이라 해석할 수 있다. 따라 서 중국의 전탑을 모방했다던가, 국내의 선행 전탑을 모방했다는 ‘모전석탑’ 용어는 명백히 사실과 다르므로 더 이상 학술용어로 설 자리 가 없어진다.

4. 모전탑 오류 호칭의 확대재생산

분황사탑 이후의 ‘다층 판석 적석탑’은 전부

56) 『삼국유사』, 206쪽

57) 숙종시 민암 작성, ‘미황사사적비’ 사찰문화연구원

『전통사찰총서6』, 1996, 498-499쪽

58) 鎌田茂雄, 정순일 역, 『중국불교사』, 경서원, 1985, 65쪽 59) 강우방, 『불사리장엄』, 국립중앙박물관, 1991, 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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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6> 죽장사탑, 낱 돌 아닌 층단 새김 덩어리 옥개석 Ⓒ

<그림 23> 군위 석굴암 모전석탑 Ⓒ

<그림 21> 좌, 영양 현리 5층 모전석탑 Ⓒ

<그림 22> 우,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 Ⓒ

<그림 24> 좌, 의성 탑리 5층석탑 Ⓒ

<그림 25> 우, 선산 죽장사지 5층석탑 Ⓒ

‘모전석탑’으로 호칭된다. 영양 봉감 5층 모전 석탑, 영양 현리 5층 모전석탑(그림 21),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그림 22), 군위 석굴암 모전 석탑(그림 23), 제천 장락동 모전석탑, 제천 교 리 모전석탑이 있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언어

‘模塼’이 의미하듯 벽돌을 모방했다는 실제 행 위로서 돌과 벽돌과의 관계에 대하여서는 어 느 누구도 구체적 언급이 없다.

무엇보다 문제는 의성 탑리 5층석탑같이(그 림 24) 탑신이 쌓기

식이 아닌 가구식 혹은 괴체식이고 또 한 옥개석도 덩어리 의 층단내밀기 ‘모양 만’의 탑도 ‘모전탑’

으로 호칭된다는 점 이다. 분황사탑처럼 개개 부재를 쌓아

옥개석을 만든 것이 아니라 옥개석 덩어리 돌 을 단순히 상ž하면 층단 모양으로 깎은 탑을

‘모전석탑’이라 호칭하는 것은 더욱 사실에 어 긋난다. 실제 ‘벽돌 쌓기 모방행위’와는 관련이 점점 더 멀어짐에도 불구하고, 관습적으로 모

전석탑으로 호칭된다.

고유섭은 의성 탑리 5층탑을 “확실히 석조 탑파이면서 양식적으론 전혀 전탑양식 그 자 체에 準則한다.”60)며 층단내밀기 積出 특성을 언급하였을 뿐이다. 해방 후 진홍섭이 한발 더 나아가 ‘모전탑 제2류’로 호칭하기 시작하여61) 그 후 탑 연구자 대부분 즉 장충식,62) 강우 방,63) 박경식64) 등 약간씩 분류에 차이는 있으 나 이 종류의 탑도 ‘모전석탑’ 호칭으로 굳어 졌다.

60) 고유섭, 앞의 책, 101쪽

61) 진홍섭, 한국 모전석탑의 유형, 문화재 3호, 문화재 관리국, 1967

62) 장충식, 『신라석탑연구』, 일지사, 1987, 85-94쪽.

감실, 기단 모양으로 5형식까지로 더 분류하나 결국 모 전석탑으로 분류

63) 강우방, 신용철, 앞의 책, 127-130쪽. 의성 탑리 5층 모전석탑으로 호칭

64) 박경식, 앞의 책, 368-369쪽. 통일신라기 특수형 석 탑 분류 중 ‘새로운 양식’으로서 ‘모전석탑’을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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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8> 강진 월남사지 3층석탑 Ⓒ

<그림 29> 월남사지탑 옥개석, 적석 모양 Ⓒ

<그림 27> 풍산 하리 3층석탑 Ⓒ 의성 탑리 5층석탑, 의

성 빙산사지 석탑, 선산 죽장사지 5층석탑(그림 25, 26), 선산 낙산동 3층 석탑, 풍산 하리 석탑(그 림 27), 경주 남산 동 석 탑, 경주 서악동 석탑 등 의 옥개석 덩어리탑 모두

‘모전석탑’이라 분류 명명 되고 있다.65) 사실적으로 표현하자면 덩어리 옥개석 상ž하면 ‘층단새김탑’이다.

‘模塼’ 글자대로의 ‘벽돌모

방’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구체적 모방행위 에 대해 입증도 없다. 재료와 구조 방식과는 무관하게 외관에만 치우친 미술사적 연구의 한계를 보여주는 피상적 분류라 할 수 있다.

첫 단추로 잘못 설정된 ‘모전탑’ 용어가 하나 의 기준으로 작용하여 추후 본질적으로 벽돌 과 전혀 무관한 덩어리 옥

개석 ‘층단새김탑’이 ‘모전 석탑’으로 오류 작명되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낱 돌 을 축적해 쌓은 옥개석의, 즉 ‘적석 옥개석 탑’인 강 진 월남사지 3층석탑까지 도(그림 28, 29) 외양상도 개개 부재도 벽돌과 전혀 닮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벽돌과 연관지어 모전석탑 으로 분류 호칭된다는 것 이다.66) 처음부터 잘못 작

65) 신용철은 앞의 책 84-86쪽에서 ‘변형 모전석탑’으로 지칭한다. 박흥국은 앞 글 27-33쪽 및 169-186쪽에서 이 유형을 대분류 ‘모전탑’ 아래에 ‘전탑형 석탑’으로 좀 더 합리적으로 분류한다. 그럼에도 ‘층단새김’이 왜 벽돌 과 관계 지어져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66) 장충식, 앞의 책 94쪽. 천득염은 『백제계 석탑연

명된 분황사 모전석탑 용어는 후학들에 의해 하나의 기준이 되어 지속적으로 오류 용어를 파생시키게 된다.

5. 결론

지금까지의 분황사 석탑의 근본 고찰을 통 하여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일제 시 선행연구자들이 분황사탑을 ‘모 전석탑’으로 명명, 학술용어로 굳어졌으나 語 義대로 전탑을 모방한 행위는 근거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모방 선례 중국 전탑들이 시 대적으로도 보다 후대이며, 세부 의장적으로도 목구조의 충실한 복잡 상세가 분황사탑의 무 장식 단순 의장의 모방 선례가 될 수 없음과, 또한 국내 전탑들이 분황사 탑보다 후대이므 로 모방선례가 될 수 없음을 밝혔다. 따라서 학술용어 ‘모전석탑’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오류용어임을 입증하였다.

2. ‘모전석탑’은 백여 년 전 당시 역사가들의 피상적 인상에 의해 발생한 용어임을 확인했 다. 객관적 사실 관찰을 바탕으로 분황사탑은 벽돌과는 무관하게, 결대로 쪼개진 두께의 판 석 한 면 다듬어 쌓은, 돌의 성질에 충실한 탑 이며, 기존설과 반대로 전탑보다 재료 시공에 서 더 용이한 방식임을 확인하였다.

구』 68, 148쪽에서 ‘모전석탑’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나, 한편으로는 벽돌 같지 않은 점에서 “잘못된 표현”이라 고 지적한다. 대안으로 제시한 ‘백제계탑’은 형상 명칭이 아니므로 역시 적합지 않다.

(15)

3. 분황사탑의 독자성은 인도의 스투파의 형 태적 단순성과 재료적 영구성과 본질적 판석 적석 방식과 상부 하미카의 층단내밀어쌓기[積 出] 모양과 관련있음을 밝혔다. 중국 모방이 아닌 인도와의 해상 통로를 통한 직접 교류로 보다 본질적 불교를 도입하여 신라 석탑이 성 립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4. 첫 단추 기준으로 잘못 설정된 모전석탑 용어는 추후 돌쌓기가 아닌 상하면 층단새김 모양만의 덩어리 옥개석 탑까지도 모전석탑이 라 명명하는 오류로 확대 재생산된다. 오류 시 발 모전탑 용어가 후학들에 의해 사물과 행위 와 용어간의 관계가 검증되지 않은 채 학술용 어로 굳어짐을 보았고, 이는 중국에서 모든 기 원을 찾는 중국 중심 사대주의와 일제 식민지 학문의 잔재로 추정하였다.

5. 분황사탑 오류 명칭 ‘모전석탑’을 더 이상 학술용어로 사용할 수는 없다. 대신 대안 명칭 으로 보다 사실에 가까운 ‘적판석탑(積板石塔)’

을 제시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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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2011. 2. 16) 수정(1차: 2011. 4. 11) 게재확정(2011.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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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quiry about ‘The Theory of Brick-Copy’

of the Stone Pagoda at Bunhuangsa Temple

Lee, Hee-Bong

(Professor, Faculty of Architecture, Chung-Ang University)

Abstract

The Bunhuangsa stone pagoda, constructed in AD. 634, National Treasure no. 30, has been named as 'brick-copied pagoda' since the Japanese-ruling period by scholars.

It is said that the Chinese brick pagoda was its precedent model, however the Bunhuangsa Pagoda is the oldest of all the Chinese-style brick pagodas except one, the Sungaksa Pagoda. The Chinese pagoda cannot have been a precedent model to copy due to its complex detail of wood vestige, as the Bunhuangsa pagoda is simple form without ornament. Domestic brick pagodas cannot have been a precedent model to copy as well, because all the domestic brick pagodas are younger than the Bunhuangsa Pagoda.

Therefore, the terminology 'brick-copied pagoda' is a fallacy; it is rather that later brick pagoda copied the precedent the Bunhuangsa stone pagoda.

The Bunhuangsa Pagoda is simply a piled-up pagoda of thick or thin, big or small slates of stone, facing only one smooth side and therefore needing nothing to relate to brick. The originality of the pagoda is more related to simple piled-up Indian stone stupa rather than Chinese brick pagoda. The roof form of its gradually stepped projection comes from the harmika of the summit of Indian stupa. Contrary to general history, old Silla Dynasty imported Buddhism directly from India by sea. From written national history and by temple foundation history, the Indian Buddhism evangelist possibly made influence to the erecting of temple and pagoda.

The original wrong terminology has made a harmful effect gradually to the naming of mass-styled stone pagoda of only carved stepped-roof form after brick-copied pagoda.

The false term 'brick-copied pagoda' should be discarded, which comes with superficial observation based on toadyism to China and colonialism to Japan. Instead of the fallacious term, this paper suggests multi-storied ‘piled-up pagoda with slate stone.' Keywords : Bunhuangsa Temple Pagoda, Brick-Copied Stone Pagoda,

Piled-Up Pagoda, Indian Stupa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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