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전작가와 작품세계 5>
읍취헌 박은과 요절시인 담당교수 : 하정승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천재: 김시습, 박은(朴 誾 ; 1479-1504).
호 : 읍취헌(揖翠軒).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어렸을 때부터 유명한.
박은은 4세 때에 글자를 읽고 8세 때 독서한
책의 대의를 알았으며 15세 때에는 문장에
능통한 수재였음.
성장해서도 단순히 머리만 영리한 신동이 아닌 조선조 500여년 최고의 시인으로 불리 어 졌으니, 박은을 천재시인으로 부르는 것 은 결코 과장된 일이 아닌 것이다.
박은은 영특한 신동답게 17세가 되던 1495
년 (연산군 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 이듬
해에는 18세의 젊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
여 환로에 오르게 되었으며, 그 해 12월 ‘사
가독서 (賜暇讀書)’를 받게 된다.
‘사가독서’: 인재를 기르고 문풍을 진작시키 기 위해서 왕이 특별히 문신들 중에서 뽑아 휴 가를 주고 학문에 전념하게 했던 제도로, 요즈 음으로 치면 일종의 연구년 제도임.
박은은 사가독서를 마치고 1501년 23세의 나
이로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이 된다. 홍문
관 수찬은 문서의 편찬과 왕이 명령한 글을 짓
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니 글재주가 뛰어난 문신
이 주로 맡는 보직이었다.
박은의 말년: 젊은 나이에 출세 가도를 달리던 박은 은 1501년 11월에 유자광(柳子光)을 논박하고 대신 들의 비행을 상소한 사건으로 파직을 당하고 하옥된 다 . 이 사건을 계기로 항상 다른 이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그의 일생에 기나긴 어둠의 그늘이 드리워지 기 시작한다. 1년이 조금 더 지난 1503년 3월, 그의 나이 25세 되던 해에는 파직 후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내던 남편을 대신해 집안을 꾸리던 부인 신씨가 세상을 하직한다.
박은의 죽음: 부인상을 당한 지 1년이 지난 1504년
(연산군 10) 소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터져 4
월에 동래현으로 유배된 뒤 6월에 사형을 당하게 되
었다 . 이 때 그의 나이 불과 26세였다.
다음에 살펴볼 시는 불행했던 천재시인 박은의 진면 목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수작이라 할만하다.
깊은 가을에 낙엽은 문 앞에까지 이르고
들창문 너머로 한가득 산만 들어오네
술잔과 술병이 있은들 누구와 함께 마시겠나
비바람이 추위를 재촉할 것이 걱정스럽네
하늘이 나에게 곤궁함을 주셨으니
국화조차도 사람에게 좋은 모습이 아니구나
근심을 떨쳐 버려야 참으로 현달한 선비라지만
병든 눈에 속절없이 눈물이나 흘리지 마시게
深秋木落葉侵關 戶牖全輸一面山
縱有盃尊誰共對 已愁風雨欲催寒
天應於我賦窮相 菊亦與人無好顏
撥棄憂懷眞達士 莫敎病眼謾長潸
인용시는 박은이 평생의 절친이었던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에게 준 것이다. 시제(詩題)의 ‘擇之’는 이행의 자이다. 그는 박은과 함께 소위
‘해동강서시파’로 불리어 졌던 시단의 중심인물이었으며, 1504년 갑자사 화 당시 박은의 사건에 연좌되어 곤욕을 치를 정도로 박은과는 정치적 동지이 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박은의 문집인 읍취헌유고에는 이행과 주고받 은 시가 여러 수 보인다. 박은과 이행의 우정은 박은 사후 그의 문집을 이행이 주도가 되어 간행한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행은 문집의 서문과 묘지명(墓誌銘)까지 쓸 정도로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고 또 그리워하였 다. 비록 박은의 몸은 더 이상 세상에 없지만, 그의 시만큼은 영원히 회자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두 사람의 우정은 위의 인용시 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어느 가을에 쓴 것인데, 박은이 1501년 11월 에 파직되었다가 1504년 6월에 죽었음을 상기해 볼 때, 이 시는 파직된 이듬해인 1502년 가을이나 또는 부인상을 치른 후인
1503년 가을 무렵 지어졌을 것이다. 실제로 박은은 1501년 파직 이후 죽기 전까지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그의 많은 작 품들이 이 시기에 창작되었다. 위의 인용시는 서두부터 심상치 않게 시작된다. “깊은 가을에 낙엽은 문 앞에까지 이르고”라고 함으로써 고즈넉한 가을의 분위기와 아울러 낙엽이 쌓일 정도로 아무도 시인을 찾는 이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재미 있는 표현은 낙엽이 문 앞에 쌓여있는 것을 침노한다는 의미의
‘侵’자를 사용한 것이다. 다분히 공격적인 어감의 시어를 통 해 지금 시인의 상황이 매우 수동적이고 궁지에 몰려 있음을 나 타내고 있는 것이다. 제 2구 “들창문을 열면 한가득 산”이라는 말은 시인이 있는 공간이 바로 어느 산 밑의 한적한 공간임을 암 시한다.
이처럼 한적한 시골에서 낙엽을 쓸어낼 필요도 없을 정 도로 시인은 홀로이고 또 외롭다. 그도 그럴 것이 파직을 당한 후에 박은을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시절 박은 의 말벗은 용재 이행 정도가 유일했던 것 같다. 박은에게 술잔과 술병은 있었지만 정작 함께 마실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홀로 술을 마시고 시를 쓴다. 박은이 처한 상 황을 고려하면 제 4구의 “비바람”은 인생의 시련을 상 징한다고 볼 수 있다. 비바람이 분 뒤 큰 추위가 닥치듯이 시인은 지금 겪고 있는 시련 후에 찾아올 더 큰 고난을 걱 정하고 있다. 영특한 시인의 감수성과 예감대로 불행하 게도 시인의 걱정은 머지않아 현실로 다가왔으니, 그는 이 시를 쓰고 난 뒤 얼마 후에 갑자사화에 걸려 죽음을 맞 이하게 된다.
마지막 7-8구는 거대한 현실의 벽 앞에 놓여진 초라한 시 인의 자화상이다. 세상 사람들은 근심 걱정을 떨쳐버려 야 진정한 선비라고 할 수 있다지만, 지금 20대 젊은 청 년 문사인 박은과 이행 앞에 놓여진 현실은 가혹하리라 만큼 잔인하다. 말처럼 근심 걱정을 떨쳐버릴 상황이 아 니었다. 파직과 투옥 그리고 이어진 부인의 죽음 앞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우는 것 외에 달리 없었 다. 시인은 평생의 벗에게 시를 주면서 속절없이 눈물 흘 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이 말은 이제 더 이상 허망 하게 울지 않겠다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하 다. 조선 최고의 천재시인은 닥쳐올 죽음 앞에서 이렇게 울고 있다. 신동과 천재로 살아온 그의 삶의 비극성은 어 쩌면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