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으로 읽는 고전작품
<한국의 고전작가와 작품세계 9>
염정시(艶情詩)의 세계 담당교수 : 하정승
염정시의 세계
염정시의 정의및 명칭들: 중국이나 우리나라 한시 사에서는 특별히 사랑을 주제로 한 한시를 ‘염정시 (艶情詩)’·‘애정시(愛情詩)’․‘향렴체시(香奩體詩)’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러왔다.
염정시의 문학적 매력: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고 애 틋한 사랑의 감정을 노래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시인이 느끼는 사랑의 감정과 동일한 사랑의 황홀함이나 쓰라림 등을 경험케 해준다는 데 에 있을 것이다. 일종의 감정이입 효과이다.염정시의 세계
더구나 간결함과 고도로 정제된 압축미가 생명 인 한시를 통해서, 해도 해도 다 못할 사랑의 복 잡하고 오묘한 감정을 읊조리는 것은 얼핏 불가 능해 보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 문에 사랑노래는 서구의 연애시나 현대시보다 오히려 한시가 더 매력적이고 절절할 수 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짧은 노래에 한없이 긴 여운이 담겨서 미학적 효과를 극대화 시키는 것 이라 해도 좋겠다.염정시의 세계
염정시의 작가는 크게 남성과 여성으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숫적인 면만 놓고 보면 여류시인보 다는 남성시인의 작품이 훨씬 많다. 남성작가 시 의 경우에도 남성화자의 시와 여성화자의 시로 나누어지는데, 대체로 여성화자의 시가 남성화 자 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은 양을 차 지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남성화자와 여성 화자의 변화에 따라 ‘시점(視點)’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즉 시적화자의 차이가 시점의 차이가 된 다.염정시의 세계
필자가 따져본 바로는 남성화자의 시는 대체로 3인 칭 시점으로 기술되고, 여성화자의 시는 1인칭 시점 으로 기술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 소설에서 말하는 시점을 빌려서 좀 더 세분화 해보면, 남성화자의 시 는 3인칭시점 중에서도 시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심 적 상태와 모든 정황을 화자(話者; narrator)가 다 알고 있는듯한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서 ‘전지적 작 가 시점’이라 할 수 있다. 여성화자의 시는 대체로 화자가 시의 내용[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서술하 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소설로 치면 ‘1인칭 주인공 시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이제 고 려시대의 대표적인 사랑 노래 한 수를 살펴보자.염정시의 세계
문에 기대어 석양을 바라보니
정녕 외딴 마을의 나무에 걸려있구나
눈물 젖은 눈은 침침한데 새는 멀리 날아가니
서울이 어디인지 비로소 알겠구나
한 번 이별한 것이 천 년 같은데
이 한스러움 누구를 의지하여 말할까
온 산을 향하여 눈을 크게 떠봐도 또다시 첩첩산중뿐
그 어디가 님께서 돌아오는 길인가
倚戶望斜陽 正在孤村樹
淚眼昏昏鳥 遠飛京國知何處
一別似千秋 此恨憑誰語
極目千山又 萬山底是郞歸路
염정시의 세계
인용한 시는 고려후기의 시인 김구용(金九容, 1338-1384)의 작품으로 시의 제목 「복산자(卜 算子)」는 송나라 때 유행했던 쟝르인 송사(宋詞) 의 사패(詞牌)중 하나로, 쉽게 말하면 노래의 곡 조라고 생각하면 된다. 제목을 통해 시인이 송사 의 형식을 빌려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의시적화자는 떠나간 님을 기다리는 여인이다. 여 인은 님이 떠나간 뒤에 저물녘이면 매일같이 집 앞에 나와 동구밖을 바라본다.
염정시의 세계
이 시는 시작부터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데, 집앞에 나와 문에 기대어 하염없이 저 멀리 바라 보고 있는 여인과 뉘엿뉘엿 서산으로 지면서 나 무에 걸려있는 저녁 해, 외딴 마을 등이 시각적 조화를 이루며 시의 의상(意象)을 더욱 침통하 게 만들어 준다. 눈물 젖은 눈으로 먼 곳을 응시 하던 여인은 마침 저 멀리로 날아가는 새를 목격 한다. 그제야 님이 떠난 곳이 새도 쉽게 날아갈 수 없는 먼 서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염정시의 세계
제 5구의 “한 번한 이별이 천 년같다”는 말은 그 만큼 이별의 고통이 크다는 것을 암시한다. 님이 과연 돌아오기나 할 지, 또 온다면 그 때는 언제 인지, 여인에게는 이 모든 것이 불안하고 걱정이 다. 마지막 7-8구,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첩첩산중뿐이니 그 어디가 님이 돌아오는 길인 가라는 독백은 불안하고 걱정스런 여인의 그러 한 심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