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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의 관점에서 본 역사교육의 문제에 관한 연구 -고조선을 중심으로-김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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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글

(1)

Ⅰ. 들어가는 글

Ⅱ. 그간의 선행 연구결과와 교과서 내용의 문제점

Ⅲ. 고조선에 관한 현 교과서 기술내용 요지

Ⅳ. 새로운 연구 결과에 근거한 역사교육 내용

1. 우리 역사의 근거

2. 고조선의 강역과 도읍지 3. 건국 시기와 국호

4. 고조선 시대의 유적과 유물 5. 건국(建國) 신화의 뜻

Ⅴ. 맺는말

-〔국학의 관점에서 본 역사교육(2014.6.14, 홍역학회 흥사단 4층)발표문1

국학의 관점에서 본 역사교육의 문제에 관한 연구

고조선을 중심으로

김진경1)*

* 국립부경대학교 겸임교수

(2)

【국문요약】

우리나라 역사교육은 엄청난 오류 속에 빠져 있다. 왜냐하면, 명 (明)대 1421∼1512년 기간 중에 중국 25사(史)의 역사적인 지명들의 위치를 북쪽과 동북쪽방향으로 변이시켰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조선도 1512년(중종 7년)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뜯어고 쳤으므로, 현재의 우리나라 역사는 사료상의 위사(僞史)에 근거하여

‘꾸며진 역사’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더욱이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국민들은 중국과 한국의 역사가 왜 곡되었음을 알고 있으며, 그 왜곡된 역사를 한국인들은 믿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은 그대로 ‘꾸며진 역 사’에 불과한 조선시대 사관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사료 중에 삽입되어 있는 위사들을 과감히 걷어내고 남아 있는 원본(原本)의 기록에 근거하여 우리나라 역사를 다시 서술해야 만 할 것이다.

국학의 관점에서 볼 때, 올바른 역사를 바르게 교육하는 것만큼 국 학의 정신을 바로 세울 수 있는 방법도 따로 없을 것이다.

즉,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고조선의 건국이념은 홍익인간의 이념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 는 바와 같이 현묘지도(玄妙之道)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 홍익인간의 이념을 구현하며 인류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역사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주제어 : 󰡔삼국사기󰡕, 󰡔삼국유사󰡕, 역사교육, 국학, 홍익인간, 현묘 지도, 고조선, 역사왜곡, 중국 25사, 21세기 대한민국 사관

(3)

. 들어가는 글

일제강점기 이후, 그간 약 70년에 걸쳐 우리 민족의 역사에 관하여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비록 전란 등을 통하여 많은 사료들이 없 어지기도 했지만, 환웅과 단군시대를 거쳐 삼국시대, 신라⋅발해 남 북국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 관한 대강의 역사 줄거리가 형성 되어 있다.

그간의 연구결과에 근거하여 현재의 초중고 국사 교과서가 서술되 었다고 볼 수 있으며, 교과서에 서술된 내용들은 가장 보편적으로 인 정할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역사 줄거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간 많은 연구 활동을 거쳐서 형성된 우리 민족의 역사 줄거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고려사󰡕 등 선조들이 남겨놓은 사료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대사에 관한 사료가 워낙 부족하여 도저히 알 수 없는 부분들이 많으므로, 고대에 서로 인접하고 있었던 한(漢), 진(晉), 수 (隋), 당(唐), 송(宋), 요(遼), 금(金), 원(元), 명(明) 등 중국 25사(史)의 기록을 참조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편, 현재 초중고 한국사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들 중에서 대부분의 내용들이 일제강점기 중에 제작된 󰡔조선사󰡕(고대사를 모두 포함하고 있음)와 상당히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일제강점기 중에 제작된 󰡔조선사󰡕도 상기한 사료들에 근거를 두고 편집되었기 때문이다.

또 현재 초중고 한국사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들이 일제강 점기 이후 국내의 연구결과에 근거하여 서술되었다고 하더라도, 일 제강점기 중에 제작된 󰡔조선사󰡕의 내용과 유사한 이유는, 일제강점 기 중에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에도 역사연구와 교과서 서술활동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4)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중에 제작된 󰡔조선사󰡕가 우리가 알고 있는 역 사 줄거리와 상당부분 유사하더라도, 󰡔조선사󰡕는 일제가 조선을 지 배하기 위한 관점에서 썼으므로 완전히 폐기시키든지 다시 서술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를 고대사부터 조선사까지 모두 다시 서술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근거자료들에 심대한 문제 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고려사󰡕 등뿐만 아니라 중국 25사에는 수많은 위사(僞史)들 이 포함되어 있음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1)

다시 말해서 그간 수많은 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밝히려 고 노력했지만, 과거의 사료들에 결코 위사(僞史)란 있을 수 없다는 전제 아래에서 연구했음을 의미한다.

또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역사는 상기한 사료 중에 삽입되어 있 는 위사들에 근거하고 있는 ‘꾸며진 역사’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료에 삽입되어 있는 위사(僞史)들을 걷어내고 우리 역사 를 다시 연구해야 하며, 그 연구결과에 따라 국사 교과서를 다시 써 서 올바른 역사를 교육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 그간의 선행 연구결과와 교과서 내용의 문제점

그간 우리나라 고대사의 가장 근간이 되는 사료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라고 할 수 있다.

1) 김진경, 󰡔고대 요수(遼水)의 위치 비정(比定)에 관한 연구󰡕, 국제뇌교육종합 대학원대학교, 2012. 2.

(5)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두 사서의 기록을 신뢰하지 않는 경향도 있 으며, 심지어 4세기 이전 기록은 지리적 위치가 맞지 않으므로 믿을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사에 관해서는 상기한 두 사서만큼 근거가 될 만한 사료가 따로 없으므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의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고구려 평양성은 고려의 서 경이 있었던 곳이었으며, 패수는 대동강임이 틀림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후한서󰡕 군국지에 따르면, 낙랑군이 낙양에서 동북으로 5,000 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당서󰡕 지리지에 따르면, 고구려 (평양)가 서안에서 동쪽으로 5,000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그간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고대 국가의 역사적 지명 의 위치를 󰡔삼국사기󰡕, 󰡔삼국유사󰡕, 󰡔후한서󰡕, 󰡔신당서󰡕 등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간에 우리나라 역사의 다수설을 주도해 왔다고 볼 수 있 는 이병도,2) 신석호,3) 권오중,4) 노태돈,5) 한영우,6) 서영수,7) 송호정8) 등은 고조선과 고구려 평양성 등이 현재의 이북 평양 지역에 있었으

2) 이병도, 󰡔한국사(고대편)󰡕, 을유문화사, 1959.;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3) 신석호, 󰡔한국사론󰡕, 국사편찬위원회, 1986.

4) 권오중,

중국사에서의 낙랑군

」 󰡔한국고대사연구󰡕 제34권, 2004.

5) 노태돈, 󰡔단군과 고조선사󰡕, 사계절, 2000.; 󰡔고조선과 고구려: 과연 우리 한 민족의 역사인가?󰡕, 경상대학교 출판부, 2005.

노태돈 등, 󰡔시민을 위한 한국역사󰡕, 창작과 비평사, 1997.

6)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 역사󰡕, 경세원, 2004.

7) 서영수,

「고조선의 대외관계와 강역의 변동」 󰡔동양학󰡕 제29권 1호, 단국대학

교 동양학연구소, 1999.

8) 송호정,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역사교육󰡕 제87집, 2003.; 「先秦文獻 에 기록된 古朝鮮 사회와 주민집단」 󰡔역사와 담론󰡕 제61권, 2012.

(6)

며, 패수⋅압록수⋅요수 등이 현재의 이북 평양에서부터 현재의 요 령성 요하에 이르는 지역 일대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반면에 윤내현9) 등은 요수와 패수가 현재의 북경시 동쪽에 있 는 난하 주변 지역 일대였을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소수설이 유지되 어 왔다.

그러나 상기한 설들은 모두 상기한 사료들에 삽입되어 있는 위사 (僞史)들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위사들을 걷어내 고 남은 기록에 근거하여 고대 지명들의 위치를 추정하면 <그림 1>

과 같기 때문이다.10)11)

고대 고대 지명의 지명의 위치 위치 비정 비정 결론 결론

}} 고구려고구려평양성은평양성은 산동성산동성덕주시덕주시

}

} 고구려고구려마지막마지막수도수도장안성은장안성은하북성하북성 탁주시탁주시

}

} 패수는패수는산동성산동성오경하오경하

}

} 압록수는압록수는 하북성하북성호타하호타하

패 수 평양성 환도성

압록수 국내성

장안성

요동성 요 수

대동강 압록강 요 하

부여성 부여부

중경 동경

남경

장령부 회원부 동평부

정리부 상경

철리부 압록부

<그림 1> 고구려와 진국(발해) 주요 지명들의 위치 추정지역

9) 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일지사, 1986.

10) 김진경, 󰡔고대 요수(遼水)의 위치 비정(比定)에 관한 연구󰡕, 국제뇌교육종합 대학원대학교, 2012. 2.

11) 김진경, 󰡔조선 600년간의 비밀 요동과 부여󰡕, 어드북스, 2013. 1. 10.

(7)

그런데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역사적 지명의 위치가 올바르게 추정될 수 있어야만 하는 이유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위치가 사건 의 성격과 의의를 적나라하게 대변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간의 연구결과들은 중국 25사에 가필된 위사(僞史)들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고대 지명의 위치가 현재의 이북 평양에서부터 요령성, 길림성, 하북성 난하 등지로 둔갑되어 있는 실정이다.

즉, 예를 들어 󰡔후한서󰡕 군국지에 따르면, 한(漢) 대의 유주에 속했 다고 하는 요서요동현도낙랑 등의 위치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다. 또 󰡔신당서󰡕 지리지에 따르면, 고구려 요동성에 있었던 안동도호부(요동)와 평양성(낙랑)의 위치를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림 2>

󰡔

후한서

󰡕

󰡔

신당서

󰡕

에 근거한 요동과 낙랑 등(모두 위사임)

그런데 요서, 요동, 현도, 낙랑 등의 의치를 <그림 2>에서 보는 바 와 같이 추정할 수 있는 이유는 한척(漢尺) 1리(里)는 약 420m이며, 당척(唐尺) 1리는 540m이기 때문이다. 또 <그림 2>에 보이는 리(里)

(8)

단위의 거리수치들은 직선거리가 아니며, 실제이동거리이기 때문에 굴곡지수(x)가 1.725임을 밝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12)

그런데 <그림 2>에서 보면, 󰡔후한서󰡕 군국지에 기술되어 있는 요 동과 낙랑의 위치가, 󰡔신당서󰡕지리지에 기술되어 있는 요동과 낙랑 의 위치가 사로 다르다. 즉, 최소한 둘 중에 하나는 틀린 기록일 수밖 에 없다

그러나 둘 다 명(明) 대에 삽입시킨 위사들임을 알 수 있다. 왜냐 하면 명(明)이 황하 이북의 하북성, 산동성, 산서성 등지의 땅을 차지 하고 1421년에 남경에서 현재의 북경으로 수도를 옮길 수 있었기 때 문에, 비로소 역사 왜곡과 지명변이를 시도할 수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요동성과 평양성 등의 본래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다시 말해서 명과 조선이 1421∼1512년 기간 중에 역사를 왜곡시 켜 놨으므로 국사 교과서의 내용들을 모두 다시 서술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 시대의 ‘꾸며진 역사’에 근거한 조선시대 사관으로 역사를 가리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체성과 역량을 바르게 이해하고 미래 비전을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서는 ‘21세기 대한민국 사관’을 시급히 바르게 세워야만 할 것이다.

. 고조선에 관한 현 교과서 기술내용 요지

현재의 국사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 중에서 고조선에 관한

12) 김진경, 󰡔고대 요수(遼水)의 위치 비정(比定)에 관한 연구󰡕, 국제뇌교육종합 대학원대학교, 2012. 2. 실제이동거리=직선거리×굴곡지수(x)임.

(9)

내용의 요지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으며 밑줄 친 부분은 검토를 위한 주 관점이다.

1.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서기전 2333년에 건국 2. 고조선의 강역은 만주 랴오닝 지방과 한반도 서북 지방(대동강

유역)

3. 역사적 근거로서 󰡔삼국유사󰡕 발췌 인용

4. 고조선(청동기 시대) 유물과 유적: 비파형 동검, 탁자식 고인돌 등 5. 기원전 3세기 경: 왕위 세습

6. 위만이 왕검성을 공격해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됨(서기전 194년) 7. 위만조선은 철기문화 본격 수용, 농업생산성 증대, 상업과 무역

도 발달

8. 중국의 한(漢)과 동방의 예, 남방의 진 사이에서 중계 무역 9. 왕검성이 한(漢)에게 함락되어 멸망(서기전 108년)

10. 한(漢)의 군현은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소멸(313년) 11. 󰡔한서󰡕 지리지를 인용하여 8조법 소개

12. 고조선은 계급사회였음을 주장

현재 고교 국사 교과서는 7∼8종(천재교육, 두산동아, 금성출판사, 지학사, 비상교육, 미래엔, 교학사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고조선에 관한 내용은 2∼6쪽에 불과하다. 그 앞에 한민족의 기원과 선사시대 는 2∼10쪽, 고조선 이후의 부여 등 열국시대는 2∼4쪽,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는 각각 대략 18쪽이 배정되어 있다.

비록 사료가 부족하여 고조선에 관하여 상세한 내용이 없으므로 기술할 내용이 2∼6쪽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런데 상기한 요지 12건 중에서 본 연구원이 옳다고 동감할 수 있는 내용은 3번밖에 없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사료로서 고조선

(10)

에 관한 유일한 근거는 󰡔삼국유사󰡕이므로, 고조선의 건국신화 관련 부분을 발췌하여 인용함으로써, 역사의 근거를 명백히 제시하여 직 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 사실에 대한 판단근거와 논리가 제시될 수 있어야 다양 한 의견들을 수렴하기 용이하며, 단순히 암기하는 역사교육의 문제 점을 해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를 별도로 발췌하여 인용한 교과서는 <표 1>에 서 보는 바와 같이 천재교육, 두산동아, 비상교육 등 3종이다.

1 2 3 4 5 6 7 8 9 10 11 12 천재교육 ○ ○ ○ ○ ○ ○ ○ ○ ○ ○ ○ ○ 두산동아 × ○ ○ ○ × ○ ○ × ○ ○ ○ ○ 금성출판사 ○ ○ × ○ ○ ○ ○ × ○ ○ ○ ○ 지학사 × ○ × ○ × ○ ○ ○ ○ × ○ × 비상교육 ○ ○ ○ ○ ○ ○ ○ ○ ○ × ○ ○

미래엔 ○ ○ × ○ ○ ○ ○ ○ ○ × ○ ○ 교학사 ○ ○ × ○ ○ ○ ○ ○ ○ ○ ○ ○

<표 1> 교과서 출판사별 고조선에 관한 기술 내용 요지

다른 3종의 교과서들은 비록 󰡔삼국유사󰡕를 별도로 발췌하지는 않 았지만, 󰡔삼국유사󰡕를 인용하여 기원전 2333년 또는 기원전 24세기 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고 서술하고 있고, A 교과서는 ‘기원전 시기’

라고만 서술하였다.

또 이중에서 B 교과서는 ‘기원전 24세기는 과장된 것이고 기원전 10세기경에 설립’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A 교과서와 B 교과서는 ‘환웅이 곰에서 사람으로 변한 웅 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또는 ‘…낳았다는 기록이 있 다.’고 본문에 서술하고 있다.

(11)

따라서 별도로 설명이 없다면 어떤 학생은 우리 민족이 곰의 자손 인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상기한 요지 12건 중에서 3번을 제외한 나머지 내용들은 모 두 옳다고 볼 수 없다.

물론 이제까지 연구결과에 따라 고조선에 관한 다수설을 형성하면 서 그렇게 인식해 왔다고 볼 수 있으나, 앞서 논한 바와 같이 고조선 의 강역과 역사적인 지명의 위치가 올바르게 추정되지 않았으며, 중 국 25사의 조선전 또는 동이전의 내용들이 가필되거나 창작되지 않 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중국 25사 중에서 위사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논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들은 지명(地名)의 위치에 관한 내용들이다.

왜냐하면 수치로 기록되어 있는 거리를 km단위로 환산하여 지명 의 위치를 추적해 보면,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거의 모든 역사 적인 지명들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바로 숫자 자체의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또 역사적인 지명들의 올바른 위치를 확인하고 나면, 단순히 고대 국가의 강역이 드러나는 것뿐만 아니라, 지명의 위치로부터 고대 국 가들 간의 위상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중국 25사의 조선전과 동이전 등에 기록되어 있는 바 와 같이 ‘조공을 바쳤다’든지, ‘관직을 임명했다’든지, ‘노략질을 했는 데 항복시켰다’든지 하는 내용들도 모두 위사(僞史)일 수 있음을 확 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사료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지만, 대부분의 사료에 위사(僞史)들이 삽입되어 있으므로, 위사들을 분별 해서 걷어내고 남는 원본(原本)의 기록에 근거하면, 올바른 역사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한편, 역사적 사건에 관하여 교과서에 서술한 내용이 옳고 그르고

(12)

를 떠나서 교과서를 서술한 일부 저자들의 역사관이 모호하거나 표 현상의 내용으로 볼 때 어설픈 부분들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A 교과서와 B 교과서의 경우, ‘위만은 중국의 우수한 철기문화를 받아들였다.’ 또는 ‘중국 대륙의 발달된 철기 문화’라고 서술하고 있다.

도대체 중국이 어느 나라를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제(濟)인지, 연 (燕)인지, 아니면 한(漢)인지 알 수 없으며, 그 중국의 철기 문화가 언 제부터 왜 우수한지 근거가 없다.

그런데 위만조선이 한(漢)과 전쟁을 했다면 무기를 만드는 철기기 술 수준에 있어서 비슷했든지, 오히려 위만조선이 중계무역을 활발히 하면서 부를 축척하여 더 우수한 철기기술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다.

또 󰡔사기󰡕 조선전에 따르면, 왕검성이 점령되지 않았다고 기록되 어 있으며, 한(漢) 무제는 전쟁에 진 장수들을 참수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철기가 우수했다.’고 교과서에 서술하 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또는 그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잘못된 역사교육이 수 십 년간 누적되면서 정신적으로 자기 비하 하는 습성이 몸에 밴 것이 아닌지 통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역사적 지명의 올바른 위치 를 확인하고 나면, 고대시기에 국가 간의 위상 관계를 바르게 추정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 새로운 연구 결과에 근거한 역사교육 내용 1. 우리 역사의 근거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은 󰡔삼국유사󰡕라고 할 수 있다.

(13)

따라서 󰡔삼국유사󰡕의 내용을 발췌하여 교과서를 통해서 역사적인 근 거를 직접 확인하게 할 필요가 있다. 만약 교과서에서 직접 소개하지 않 는다면, 학생들이 󰡔삼국유사󰡕를 별도로 구입하여 읽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3종의 교과서는 󰡔삼국유사󰡕를 발췌 하여 소개하고 있으나, A 교과서와 B 교과서의 경우, ‘곰이 여자로 변해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또는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본문 에 서술하고 있다.

도대체 조상이 곰이었다고 믿으라는 것인가?

즉, 󰡔삼국유사󰡕에 역사적인 사실에 관한 기록과 건국신화의 내용 이 혼재되어 있으니 그대로 번역문을 인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고 분명히 기 록되어 있으며, 나라가 건국되었으니 건국신화가 딸려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사건 기록과 신화적인 내용을 구분하여 역사에 관한 바른 이해를 도모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삼국유사󰡕에서 단군과 고조선, 그리고 환웅에 관한 기록이 매우 함축적이며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 충분하다고 볼 수는 없다.

(14)

<그림 3> 환웅의 태백산, 단군의 평양성, 백악산 아사달 등의 추정지역 그런데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삼국시대의 역사적 지명들 의 본래 위치를 추정하고 보니,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건국신 화의 내용을 좀 더 실제적으로 근접하게 추론할 수 있게 되었다.

즉, 고조선의 위치는 압록수가 있었던 고구려 강역 속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환웅의 태백산, 단군의 도 읍지 평양성, 백악산 아사달 등의 위치를 추론할 수 있었다.13)

다시 말해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근거한 고대국가들이 현 재의 하북성, 산서성, 산동성 등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고려 이후에 조선이 동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지와 한반도 지역에 고 조선이나 삼국과 다른 문화권, 또는 다른 나라가 있었던 것으로 추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 어떤 나라가 있었는지, 또는 어떤 문화 권이 존재하고 있었는지 사료상의 근거 기록이 전혀 없다.

13) 김진경,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 󰡔선도문화󰡕

제16권,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출판부, 2014. 2.

(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많은 유적과 유물이 남아있으므로 이 주해 온 그룹과 원래 이 땅에 살던 그룹간의 역사를 구분해서 연구 해야 할 것이다.

2. 고조선의 강역과 도읍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조선 중종 7년 (1512년)에 뜯어 고쳐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사서를 편찬한 것이 아니라 일부분이 부분 적으로 고쳐졌기 때문에, 본래 원본(原本)의 기록으로 추정할 수 있 는 내용들에 근거하여 고조선의 강역이 명확히 밝혀져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올바른 역사를 밝히기 위해서는 우선 지명의 위치가 우 선적으로 확인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삼국시대 지명들의 위치가 밝 혀질 수 있었으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비교해 봄으로 써, 󰡔삼국사기󰡕에서 압록수가 있는 곳의 태백산(太白山)이 󰡔삼국유사󰡕

에서 인용한 󰡔고기(古記)󰡕의 태백산(太伯山)인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즉, 압록수가 있는 곳의 태백산이 환웅의 태백산이며, 단군의 평양 성 및 백악산 아사달을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추론할 수 있다.14)

3. 건국 시기와 국호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기(古記)󰡕를 인용하면서, 환국(桓國)의 환 웅(桓雄)과 단군왕검(檀君王儉)의 건국(建國) 신화가 아래와 같이 기 록되어 있다.

14) 김진경, 󰡔만천년 역사의 비밀 태백과 압록󰡕, 어드북스, 2014. 6. 10.

(16)

환웅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중략)

단군왕검은 당요(唐堯)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庚寅)년(당요의 즉위원 년이 무진년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다.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 사실이 아닌 듯하다.)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궁홀산(弓忽山)이라고도 하며 금 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 후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의 호왕(虎王, 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 어 살면서 산신(山神)이 되었으니 수(壽)가 1,908세였다.

상기한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이 1,500년 동안 조선을 다스린 후, 주(周)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주(周)가 은(殷)을 멸망시키고 기자를 조선에 봉한 해가 기 묘(己卯)년이므로 서기전 1122년, 1062년 또는 1002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15) 또는 주(周)가 은(殷)을 멸망시킨 해를 서기전 1046년 경이라고도 한다.16)

따라서 단군이 조선을 세운 때는 서기전 2622∼2502년 또는 서기 전 2546년경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는 해가 당요(唐堯) 즉위 50년 (정사년, 서기전 2284년) 또는 경인년(당요 즉위 23년임, 서기전 2311 년) 또는 요 즉위 원년(무진년, 서기전 2333년)17)이 아니라, 이보다

15) 󰡔사기󰡕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에 따르면, 기원전 841년이 경신(庚申)년 이고 837년이 갑자(甲子)년이므로, 기묘(己卯)년은 서기전 1122년, 1062년, 1001년 또는 941년이 된다.

16) 󰡔위키백과󰡕: 주(周, 서기전 1046∼256년)

17) 김동환,

단기(檀紀) 연호(年號) 성립의 역사적 배경」 󰡔선도문화󰡕 제12권, 국 제뇌교육종합대학원출판부, 2012. 2., ‘홍대용(1731∼1783년)은 단군이 임금으 로 추대된 해를 요임금 무진년이라고 인식하였으며, 󰡔동국통감󰡕의 견해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17)

169∼338년 더 앞서서 조선이 건국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 단군왕검이 요 즉위 50년(정사년, 서기전 2284년) 또는 경인년(당요 즉위 23년임, 서기전 2311년)에 조선을 건국 했다는 기록과, 기자를 조선에 봉하기 전에 단군왕검이 1,500년 동안 조선(서기전 2622∼2442년 또는 서기전 2546년경에 건국)을 다스렸다는 기록은, 고조선의 건국년도가 기록상 서로 상충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만약 단군이 서기전 2333년(무진년)18)에 조선을 세웠다면, 1500년이 지난 때는 서기전 833년이 된다. 즉, 주(周) 무왕이 은(殷)을 멸망시킨 해가 기묘년으로서 서기전 1122년이라면, 기자가 조선에 온 해는 은이 망하고 289년 후에 온 셈이 된다. 또는 주(周) 무왕이 은(殷)을 멸망시킨 해가 서기전 1046년경이라면, 은이 망한 후 213년 이 지난 뒤에 기자가 조선에 온 셈이 된다.

따라서 상기한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단군이 1,500년 동안 조선 을 다스린 후, 주(周)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라고 하는 부분이 위사가 아니라면, 당요(唐堯)가 즉위한 지 50년(또는 23년) 또 는 당요 즉위 원년(무진년)에 조선을 건국한 것이 아니라, 단군이 2333년보다 109∼289년 앞서서 조선을 세운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삼국유사󰡕를 조선 중종 7년(1512년)에 다시 간행하 면서, 단군이 조선을 세운 건국년도를 바꿔치기 하지 않았는지 의심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상기한 󰡔삼국유사󰡕의 기록에 ‘당요(唐堯)가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庚寅)년’에 특별히 주석을 붙여서 ‘경인(庚寅)년’이 아니고

‘정사(丁巳)년’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단순히 60갑자(甲子)를 잘못 셈해서 기록이 틀렸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역사책을 편찬하면서 이런 기본적인 내용이 틀린다는 것

18) 󰡔삼국사기󰡕에 따르면, 요 즉위 원년을 무진(戊辰)년이라고 하지만, 󰡔청장관 전서(靑莊館全書󰡕 권제25에 따르면, 단군이 당요(唐堯) 25년 무진년에 왕검 이 되었다고 한다. 즉, 요 즉위 원년이 갑진(甲辰)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8)

이 한편 우습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조선의 개국년도가 바 꿔치기 되었음을 후손들에게 귀띔해 주려는 의도가 있지는 않았는지 고려해 볼 수도 있다.

즉, 조선의 사관들이 어쩔 수 없이 󰡔삼국유사󰡕를 뜯어 고치게 되 었으나, 고조선의 개국년도가 바꿔치기 되었음을 후손들에게 알려주 기 위한 비밀코드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여지가 없지는 않다.

특히 명(明) 대에 역사적인 지명들의 위치를 동쪽 또는 동북쪽으로 변이시켰으며, 조선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뜯어 고쳤으므로, 고대 국가(고조선, 부여, 고구려 등)의 건국년도를 바꾸지 않았는지 의심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또 단군이 아사달에서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수(壽)가 1,908세였다 고 한다. 그런데 단군이 1인이 아니라 대(代)를 이어서 나라를 다스 렸던 것으로 해석해 보면, 고조선이 서기전 2622∼2502년에 건국되 어 서기전 714∼564년에 망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 따르면,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졌으며 연 (燕)이 진번조선을 침략해 차지한 이후,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진번 조선을 차지했는데,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도읍지인 왕검성(王儉城) 주변에 패수가 인접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위만조선과 왕검성의 위치가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왕검 조선)의 평양성이 될 수 없으며, 더욱이 현재의 이북에 있는 평양이 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위만조선의 위치와 고조 선(왕검조선)의 위치가 서로 같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위만조선과 왕검성은 옛 은(殷)의 땅에 있었으며 은허(殷墟)의 유적이 발견된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소둔촌 주변 인근지역으로 볼 수 있는 반면에, 고조선(왕검조선)은 옛 숙신(肅愼)의 땅에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

<그림 5>

󰡔

사기

󰡕

화식열전

<그림 4> 고조선(왕검조선)과 은(殷)의 추정지역

다시 말해서 은(殷)의 신하였던 기자(箕子)가 봉해졌다는 ‘조선’은 기자가 살던 고향인 옛 은(殷)의 강역에 속하는 지역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주(周) 무왕(武王)이 남의 나라(고조선)에 신하를 둘 수도 없으며, 기자가 도망간 것이 아니라 석방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 󰡔사기󰡕 화식열전에 근거하여 춘추전국시대 연(燕)의 주변지역 을 그리면 <그림 5>와 같다. 즉, 주(周) 대에 해당하는 춘추전국시대 에 연(燕)의 동쪽에 예맥(穢貊)⋅ 선(朝鮮)⋅진번(眞番) 등이 위치하 고 있었는데, 바로 옛 은(殷)의 강 역과 일치한다.

다시 말해서 연의 도읍지 연경 (燕京)은 계현(薊縣)이라고 불리기 도 했으며, 그 지역이 당(唐) 대에 는 유주(幽州) 대도독부가 있었고, 요 대에는 남경(南京, 연경), 금 대에는 중도(中都)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19)

(20)

그 반면에 󰡔금사󰡕에 따르면, ‘숙신(肅愼)’이 주(周) 대 이전에 있었 는데, 즉, 은(殷) 대에 이미 ‘숙신(肅愼)’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바로 숙신의 땅을 고조선(왕검조선)의 강역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숙신(肅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 . 단순한 지명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나라명인지, 부족명인지 명 확하게 알 수는 없다. 또는 사람이름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흠정만주원류고󰡕에 ‘숙신씨’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한서󰡕 동이열전에서 읍루를 ‘옛 숙신의 나라’라고 설명 하고 있으며, 그 위치는 <그림 4>와 같이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 면 󰡔요사󰡕지리지에 따르면, 읍루가 고구려 요동성(안동도호부)에서 북쪽으로 270리(당척) 거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읍루는 거리로 볼 때 요동 지역에 포함될 수 있다.

또 󰡔요사󰡕지리지에서 요동(遼東)을 ‘옛 조선의 땅’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므로, ‘숙신의 땅’이 바로 ‘조선’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숙신의 땅’이 바로 환웅, 또는 단군이 도읍한 곳으로 추 론할 수 있다.20)

그러나 기자를 봉한 ‘조선’과 단군이 세운 ‘고조선’이 같은 시기에 나란히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즉, 단군이 세운 ‘고조선’이 본래 ‘조선’이 아니고 ‘숙신’이 아니었는 지 고려해 볼 수 있다.

또 󰡔사기󰡕 오제본기(五帝本紀)에 따르면, 순(舜)이 동방의 군장(君 長)을 만났는데, ‘단군’이 ‘단국(檀國)의 군장(君長)’이 아니었는지 고 려해 볼 수도 있다.

그 반면에 단군이 세운 나라가 본래 ‘조선’이었다면, 기지를 봉했

19) 김진경, 󰡔고대 요수(遼水)의 위치 비정(比定)에 관한 연구󰡕, 국제뇌교육종합 대학원대학교, 2012. 2.

20) 김진경,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 󰡔선도문화󰡕

제16권,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출판부, 2014.02,

(21)

다는 ‘조선’이 위사라고 볼 수 있다.

즉, 사료 원본이 없어지고 위사가 가필됨으로서 그 당시 상황을 확 증할 수는 없으나, 역사적인 지명의 본래 위치가 밝혀짐으로써 국호 가 바뀌었을 수 있음을 추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4. 고조선 시대의 유적과 유물

현 고교 교과서에 따르면, 고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과 유적으 로서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을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앞서 논한 바와 같이 고조선의 강역은 현재의 요령성과 대 동강 유역이라고 볼 수 없다. 즉, 현재의 요령성과 대동강 유역에는 고조선이 아닌 다른 문화권 또는 다른 나라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비파형 동검, 고인돌, 또는 현재의 압록강과 대동강 지역의 수많은 돌무지무덤 등을 고조선 또는 고구려의 유물과 유적이라고 볼 수 없다.

또 어떤 교과서에는 울산 대곡리 반구대 바위그림을 고조선 시대 에 삽입시킴으로서 그 당시 고래 사냥이 마치 고조선 시대의 생활상 인 것으로 이해하게 하는 교과서 서술상의 오류가 있다.

그러나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소재 반구대 바위그림(암각화)은 약 8천 년 전 유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조선은 서기전 2622∼2502 년에 건국된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약 3,500년의 시대 차이가 있다.

또 명도전(明刀錢)이 연(燕)의 화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燕)의 위치는 황하 북 안으로서 현재의 산서성 남부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도전이 요령성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었으므로 그 지역에 어떤 문화권 또는 알려지지 않은 어떤 나라가 있었다고 볼

(22)

수 있다.

그런데 앞서 논한 바와 같이 고조선의 도읍지를 평양성 또는 아사 달(읍루 지역으로 추정), 숙신의 땅 등으로 추정할 수 있으므로, 명도 전이 고조선의 화폐라고도 볼 수 없다.

그러나 명도전을 고조선의 도읍지인 읍루(아사달) 또는 고구려 평 양성 등지에서 발굴하여 요령성 지역으로 갖다 묻은 것으로 의심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중국 25사에 위사를 삽입시키면서 역사적 지명들을 변이 시켰는데, 지명뿐만 아니라, 고대 국가 간의 위상관계 등에 관하여 위사를 삽입시켰거나, 유물을 옮겨 묻고서 새로 발견된 것처럼 꾸민 경우도 고려해야하기 때문이다.

실제 중화인민공화국은 만리장성의 길이를 주기적으로 마음대로 늘이고 있으니 앞으로 상당한 기간에 중화인민공화국과 공동연구는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측에서 이미 발굴해서 전시하고 있는 유적 과 유물들을 관찰해 보면, 고조선 시기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또는 신 발해 남북국시대 등의 유물과 유적들을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5. 건국(建國) 신화의 뜻

󰡔삼국유사󰡕에 따르면, 실제 역사적인 사건 기록과 건국신화가 혼 재되어 기록되어 있으나, 그것은 고려시대에 사서를 서술하는 표현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고조선 건국에 관한 실제 역사적인 사건과 상징적인 신화 부분을 나누어 고려해 볼 수 있다.

즉, ‘단군이 최초로 조선을 건국했다’는 기록은 역사적 사실을 기 록한 것이며,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내용은 건국

(23)

신화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환웅이 ‘홍익인간(弘益人間)한다’는 건국이념을 갖고 나라를 세웠으므로, 단군이 그 건국이념을 이어받았으며, 고조선 건 국신화의 내용도 건국이념에 상응하는 상징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한편, 고조선 건국신화의 내용은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건 국이념으로서 사람의 도리를 알고 지켜나가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즉, 호랑이와 곰이든, 개와 고양이든지 간에 홍익인간(弘益人間)하 기 위해서는 사람이 지켜야 할 가르침을 이어받아야 하며, 가르침을 지켜나간다면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또 서로 싸우지 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그 당시 대표되는 두 부족(또는 종족) 간에 큰 전쟁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요령성 지역에 홍산문화 유적이 발굴된 것을 고려해 볼 때, 그 지역에서 남하하는 종족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헌원과 치우의 전쟁을 고려해 볼 때, 서쪽에서 동진하려 했던 종족이 있었던 것으로 추론해 볼 수도 있다(<그림 3> 치우 탁록 참조).

그러나 호랑이와 곰이 반드시 특정한 종족 또는 부족을 가리킨다 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작은 부족 간에도 항상 서로 갈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호족과 웅족을 대표하는 두 부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삼국 시대와 고려시대, 수⋅청 등을 거치면서 이미 많은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호족과 웅족은 이미 섞여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홍익인간의 이념은 민족의 정신을 의 미하며, 현재의 교육법 제2조에도 규정되어 있는 바와 같이, 홍익인

(24)

간의 이념이 역사교육의 중요한 과제로서 올바르게 가르쳐져야만 할 것이다.

. 맺는말

국학이 바로 역사라고 말할 수 있으며, 역사가 바로 국학 자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간 우리가 알고 있었던 역사는 조선 시대에 꾸며놓은 역 사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이미 망한 조선 시대의 역사를 그대로 답 습할 것인지, 아니면 진실에 맞는 역사를 부단히 찾을 것인지 많은 고민이 있었으리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조선이 망한지 약 10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불구하 고, 21세기 정보화 사회에서 거짓인줄 빤히 알면서 ‘꾸며진 역사’를 교육시키거나, 꾸며진 역사관으로 미래 비전을 바르게 찾으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겠지만, 올바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 체성과 역량을 바르게 이해하고, 인류사회에서 기여하고 역할을 해 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나라를 만들고 우리나라가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앞서 논한 바와 같이 사서에 삽입되어 있는 위사들을 과감 히 걷어내고 지나간 역사를 올바르게 밝혀서 진실에 바탕을 둔 역사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국학의 관점에서 국학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홍익인간의 이념을 바르게 연구하고 알리는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역사적인 지명의 본래 위치가 들어남으로써 국학이 태동하 게 된 시원이 밝혀지게 되었으므로, 앞으로 국학이 다루어야 할 과제

(25)

는 무한히 넓어졌다고 볼 수 있다.

즉,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리 민족에게 현묘지도가 있었는데 유 불선의 가르침을 모두 포괄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유불선이 발생한 지역이 바로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 의 여러 사상들이 태동한 지역과 같은 지역에 해당하며, 단군과 환웅 이 홍익인간(弘益人間)하며 재세이화(在世理化)하던 지역과 근접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산해경󰡕에 따르면, 해내(海內)21)지역 북쪽에 조선천독(朝鮮 天毒)이 있었으며, 곽박(郭璞, 276∼324년)은 천독(天毒)이 천축국(天 竺國)이라고 하였다.22)

즉, 해내지역은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은(殷)과 연(燕)이 있었던 지역이며, <그림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이 있었던 지역 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지명의 본래 위치에 관하여 좀 더 연구가 진행되 어야 하나, 국학의 관점에서 볼 때, 지명의 올바른 위치가 밝혀짐으 로써 이제까지 국학에서 다루어 온 것보다 더 넓은 시각에서 더 자 유롭게 사유(思惟)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끝>

21) 김진경,

「갈석산(碣石山)의 위치 비정(比定)에 관한 연구」 󰡔선도문화󰡕 제15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출판부, 2013. 8.

22)

郭璞云 天毒天竺國 貴道德 有 文書 金銀 錢貨 浮屠出此國中也 晉大興四年

天竺胡王獻珍寶

(26)

【參考文獻】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규원사화(揆園史話)󰡕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위서(魏書)󰡕

󰡔수서(隋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통전(通典)󰡕

󰡔요사(遼史)󰡕

󰡔금사(金史)󰡕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

󰡔대명여지도(大明輿地圖)󰡕

김진경, 󰡔고대 요수(遼水)의 위치 비정(比定)에 관한 연구󰡕 (박사학위논문),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2012. 2.

김진경, 󰡔고구려 평양성에서 바라보는 초주(椒州)와 해주(海州)󰡕, 어드북스, 20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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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 󰡔만천년 역사의 비밀 태백과 압록󰡕, 어드북스, 2014. 6. 10.

김진경, 「탁록(涿鹿)의 위치 비정에 관한 연구」 󰡔선도문화󰡕 제13권, 국제뇌 교육종합대학원출판부, 2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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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제뇌교육종합대학원출판부, 201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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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내현 ,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 󰡔한국고대사신론󰡕, 1686.

(28)

【Abstract】

A Study on the Problem of the History Education from a Viewpoint of the National Studies

-On the Focus of Gochosun(古朝鮮)-

Kim, Jin-Kyoung (Ph. D. of National Studies, National Uni. of Pukyong)

The education on the countries history is being fall down in a terrible deep fault. Because we know that the location of the historical places recorded on the Chinese 25 historical books were distorted to the directions of north or northeast in the period of 1421∼1512 during the Ming(明) Dynasty.

And the Chosun Dynasty has changed the ‘SAM-GUK-SA-GI(三國史 記)’ and the ‘SAM-GUK-YU-SA(三國遺事)’ on the year 1512, and we know that present countries history is nothing but a ‘made-up history’

based on the fabricated historical books.

Furthermore the Chinese People are knowing that their history and Korean history are distorted and Korean people are believing that the fabricated history is correct.

So the education on the countries history is now actually circumstance to be made process by the historical view of the Chosun Dynasty being nothing but a ‘made-up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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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fore we should gather up and remove the fabricated histories which were inserted in the historical books, and should describe correctly the countries history on the base of the original records which are yet left over.

To see from the viewpoint of the national studies, there were not any other method to elect the spirit of national studies except to educate correctly the upright history.

Namely as we can see on the ‘SAM-GUK-YU-SA(三國遺事)’, the ideology to found the Gochosun(古朝鮮) could be the idea to promote the public welfare of human mankind. Also the root and original form of the profound ideas(玄妙之道) where were written on the ‘SAM-GUK-SA- GI(三國史記)’, could be sought, and the education on the countries history could be processed in order to realize the idea to promote the public welfare of human mankind and to contribute to the world human societies.

Key Words : ‘SAM-GUK-SA-GI(三國史記)’, ‘SAM-GUK-YU-SA(三國 遺事)’, history education, national studies, public welfare of human beings, profound ideas(玄妙之道), Gochosun (古朝鮮), history distortion, Chinese 25 history books, the 21th century’s Republic of Korean historical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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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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