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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치차오(梁啓超)의 합방과 조선 ‘국망(國亡)’에 대한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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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치차오(梁啓超)의 합방과 조선 ‘국망(國亡)’에 대한 인식*

1)김명희**

< 목 차 >

1. 들어가며

2. 량치차오의 합방(合邦)에 대한 인식 3. 량치차오의 조선 ‘국망(國亡)’에 대한 인식 4. 나오며

1. 들어가며

191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1911년 청(淸)나라 는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봉건왕조체제가 막을 내린다. 조선(朝鮮)은 대한 제국으로 국호가 바뀐 지 14년 만에 일본에 강제 병합되었고, 청나라는 1912 년 입헌공화제의 중화민국(中華民國)시기로 진입한다. 한국과 중국은 이전 과는 전혀 다른 정치체제의 변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동아시아 3국(한국・중국・일본) 중에서 일본은 미국과 <미・일 화친조 약>(1854년), <미・일 수호통상조약>(1858년)이라는 불평등조약을 맺은 후,

* 이 논문은 2018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8S1A6A3A01045347). 이 논문은 2020년 8월 27일 “‘국망’과 ‘합방’ 그리고 유교적인 것”이라는 주제로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가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발표 한 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HK연구교수. wanxia923@hanmail.net December 2020. Vol.42, No.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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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明治維新)(1868년)을 통해 막번체제(幕藩體制)를 무너뜨리고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의 기치아래 구미(歐美)근대국 가를 모델로 삼아, 학제・징병제・지조개정(地租改正)등 대대적인 개혁을 추 진하였으며, 이 유신으로 일본의 근대적 통일국가가 형성되었다. 경제적으 로는 자본주의가 성립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입헌정치가 개시되었으며, 사 회・문화적으로는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천황제적 절대주의를 국가구조 의 전 분야에 실현시키게 되었다. 유신을 이룩한 일본은 구미에 대한 굴종적 태도와는 달리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강압적・침략적 태도로 나왔 다. 이런 침략정책은 일본 근현대의 정신적 지도자이며,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이기도 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쇼인은 “미국에 게서 입은 손해를 조선과 대만, 필리핀에서 되찾아 와야 한다”(김세진 2018:

71-72)1)고 주장하였으며 “한반도를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집대 성한 인물이었다. 요시다 쇼인은 1853년 미국 함대를 이끌고 온 페리

(Matthew Calbraith Perry)제독의 개항 요구에 자극받아, 천황을 받들고 외국 세력을 물리치자는 ‘존황양이론(尊皇攘夷論)’을 전개했다. 그리고 서양 열강 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종속 대상으로 조선과 아시아를 겨냥한 침략사상을 체계화하였다(이기용 2015: 29-31).

1893년 일본에서 출판된 한 권의 책,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2)의 뺷대동합 방론(大東合邦論)뺸은 조선을 강제 병합시키는 나침반으로 작용하였다. 한 권 의 책이 한 국가를 병탄(倂呑)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1) “군함과 포대를 서둘러 갖추고 즉시 홋카이도를 개척하고,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빼앗 고, 조선을 정벌해 원래 일본의 영토를 되찾아야 한다. 북쪽으로는 만주를 얻고 남쪽으 로는 대만과 필리핀제도를 확보해 진취적인 기세를 드러내야 한다....무역에서 러시아 와 미국에게 입은 손해는 조선과 만주의 토지로 보상받아야 한다.”

2)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의 또 다른 이름은 모리모토 도키치(森本藤吉)이다. 뺷대동합 방론(大東合邦論)뺸에는 저자의 서문이외에 다른 두 명의 서문이 두 편 실려 있는데, 이 두 명의 서문을 쓴 사람은 저자를 ‘모리모토(森本)’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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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예이다. 다루이 도키치가 한문(漢文)으로 쓴 뺷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뺸을 량치차오(梁啓超)가 1898년에 상하이(上海)의 대동역서국(大同譯書局)에서 뺷 대동합방신의(大東合邦新義)뺸라는 제목으로 재출간하였다.

올해(2020년)는 조선의 강제병합 110주년이 되는 해이다. 조선의 망국(亡 國)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고 배울 것인가?

본고는 격동의 중국 근대 전환기, 유신파(維新派)계몽주의 지식인이었던 량치차오가 뺷대동합방신의뺸를 재출간하던 시기에 량치차오의 ‘합방(合邦)’에 대한 인식은 어떠했으며, 또한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이후의 조선 ‘망 국’에 대한 량치차오의 인식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량치차오의 합방(

合邦

)에 대한 인식

량치차오(梁啓超)가 뺷대동합방신의(大東合邦新義)뺸를 출간(1898년)할 때,

‘합방(合邦)’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였는가를 말하기 전에, 다루이 도키치(樽井 藤吉)의 뺷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1893년)은 어떤 책인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2.1. ‘연대’와 ‘침략’으로 나타난 뺷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뺸의 양면성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의 뺷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1893년 초판, 1910년 재 판)은 평가가 일정치 않은 문제의 책이다. 한편으로는 본서가 일본과 한국의 대등한 형태의 合邦을 주장한 점에 착안하여, 본서에는 韓日 連帶思想의 萌 芽가 있다고 해서 樽井을 한일 연대운동의 선구자라고 칭찬한다. 다른 한편 으로는 본서가 일본의 한국倂合 때에 韓日合邦論者들에게 애독되어 한국병 합에 한몫을 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한국침략의 무기가 되었음을 비난한다(旗 田巍 1983: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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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다 다카시(旗田巍)는 뺷日本人의 韓國觀뺸이라는 책에서, 뺷대동합방론뺸 이 한국과 일본의 ‘연대사상’을 이끌었는지, 아니면 ‘한국침략의 무기’가 되 었는지, 이처럼 양극단을 달리는 평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다루이 도키치의 뺷대동합방론뺸은 원래 1891년 잡지 뺷일본인(日本人)뺸에 연 재한 글을 1893년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으로 “일본과 한국이 먼저 ‘합방’한 다음 중국과 ‘연대’해야만 서양 열강들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3)는 주장을 내 용으로 하고 있다. 저자의 서문에 의하면 초고는 1885년에 썼는데, 이것은 출 판할 겨를도 없이 저자의 투옥으로 초고를 잃어버렸다. 그 후 1893년에 다루 이 도키치가 쓴 뺷대동합방론뺸은 일본어가 아닌 한문(漢文)으로 썼는데, 한국인 과 중국인들에게 읽히기 위하여 한문으로 고쳤다고 한다(旗田巍 1983: 27).

다루이 도키치가 뺷대동합방론뺸을 쓴 동기는 서구(西歐)열강의 아시아침략 에 대한 심각한 위기감이었다. 뺷대동합방론뺸의 요지는 백인종(白人種)인 서 구열강의 아시아침략에 대항하기 위해서 황인종(黃人種)이 단결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한국과 일본이 대등한 형태로 ‘합방(合邦)’하여 ‘대동(大東)’이라는 새로운 합방국(合邦國)을 만들어, 그 대동국(大東國)과 중국(淸國)은 긴밀하게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과 한국과의 대등한 형태의 연대(連帶), 한 국이 독립국임을 인정하고 그 위에 ‘대등한 형태로 합방’하고자 하는 것이었 다. 이것은 자유민권론자로서 다루이 도키치가 가지고 있던 아시아 연대의 식이었다(旗田巍 1983: 27-28). 또한 동시에 다루이 도키치는 팽창론・침략론 의 반대자는 아니었으며, 침략을 본질적으로 부당한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 았다.

다루이 도키치는 뺷대동합방론뺸에서 “합방의 이로움은 조선이 많다”라고 하며, 합방을 하게 되었을 때, 일본과 한국 양국의 공통의 이익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 뺷대동합방론뺸에 관한 자료는 旗田巍(1983), 배경한(2016), 韓明根(2002), 雷家聖 (20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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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양국의 합방은 하나의 적국을 감소시킨다. 둘째, 합동하여 강대해지면 타국이 경외하게 된다. 셋째, 정치는 가장 공평한 것이다. 합방하여 공평하지 않으면 합동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넷째, 양국은 더욱 친밀해진다. 다섯째, 대 마도 해협의 수비가 더욱 공고해진다. 여섯째, 공사 영사를 두는 비용을 절약 할 수 있다. 일곱째, 양국 간에 무역 여행 운송 등이 편리해진다. 여덟째, 중국 과 러시아의 경외를 받게 된다.(森本藤吉 1893: 122)4)

1893년에 출간된 다루이 도키치의 뺷대동합방론뺸은 한국과 일본, 아시아 연방의 성립이라는 ‘연대’와 ‘합방’을 표면에 드러내고 있지만, 그 이면에 ‘침 략’이라는 야심을 숨기고 있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다루이 도키치는 사 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요시다 쇼인의 제자)의 정한론(征韓論)을 본질적으로 부 정하는 것이 아니며, 시기가 오면 정한론 주장자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旗田 巍 1983: 52-55)5)

뺷대동합방론뺸은 1910년 6월 다시 발간되는데, 다루이 도키치는 재간(再刊) 요지(要旨)에서 몇 가지를 말하고 있다.

본서의 제목을 합방론이라 칭한 것은 연합 諸法을 개괄하여 말하는 것뿐이 다. 특히 합방제도를 채택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이즈음 韓人이 합방을 제의 한다. 나는 생각건대 韓人의 이른바 합방은 우리 일본천황을 奉戴하여 합성국 의 統君으로 삼는다고는 해도, 그래도 韓室의 鼎命으로 하여금 의연히 변하지 않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합방제가 아니라 연방제이다. 그리고 이를 합 방이라 칭하는 것은 또한 이를 개괄해서 말하는 것뿐이다(韓明根 2002: 243)

4) “合邦之利, 以朝鮮爲多. 擧兩國通有之利, 則更有可言者焉. 一曰, 兩國合同, 則是减一 敵國也. 二曰, 合同致大, 則爲他邦所畏敬也. 三曰, 政治最公平者. 爲合邦, 不秉公, 則合 同不成也. 四曰, 兩國益致親密. 五曰, 對馬海峽之鎖鑰, 自然鞏固. 六曰, 省公使領事之 費. 七曰, 開貿易旅行通運等便. 八曰, 最受淸俄二國之敬畏.”

5)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 1850~1922년)는 “1878년부터 1881년까지 만 3년간 한국 近 海에서 無人島를 찾아다녔다. 그간 한국에도 갔다. 무인도가 있을 리가 없어 탐험은 헛수고로 끝났다. 그 무인도 탐험은 무인도를 점령하여 동지를 집결, 그곳을 征韓의 근거지로 삼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西鄕(隆盛)의 征韓論의 계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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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서술에서 보듯이 다루이 도키치는 “韓人이 합방을 제의한다”고 말하 고 있다. 뺷대동합방론뺸은 원래 백색인종인 구미열강의 아시아침략은 아시 아 전체의 위기이며 동시에 일본의 위기이다. 일본은 열강에 침략당할 위기 에 있으니, 아시아 諸國이 단결하여, 열강에 저항해야 한다”는 주장이 1893 년 당시 다루이 도키치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1910년 6월의 재판(再版)에 첨가된 저자의 서문인 ‘재간 요지’에서, 다루이 도키치는 “한국 인은 參政시키지 말 것을 주장”하고 있다.

비록 日韓聯合의 약정이 이뤄진다 해도 韓人으로 하여금 당장 그 合成國의 大政에 참여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은 우리 보호 아래 있어 매년 1천 여만원의 보조를 받는다. 그 富力이 아직 합성국의 정치비용을 분담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적어도 정치비용을 분담할 능력이 없는 자로 하여금 大政 에 참여시킨다고 하면 곧 우리 스스로가 國權을 손상시킬 뿐 아니라, 어쩌면 헤아릴 수 없는 弊習을 남기게 되지나 않을까. 고로 연합의 條規를 협정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그 富力을 충실히 하여 정치비용을 분담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려, 비로소 그 국민으로 하여금 정권에 참여시킨다는 약속을 해야 할 것이 다(韓明根 2002: 244)

뺷대동합방론뺸의 초판(1893년)과 재판(1910년 6월)의 본문에는 변함이 없 다. 그러나 난외(欄外)의 주(註)나 여러 사람들의 의견, 부록 등에는 상당한 변화가 있다(旗田巍 1983: 58). 주목할 것은 재판에 첨가된 저자의 서문인 ‘재 간 요지(再刊要旨)’인데, 위에 제시한 대로, “韓人으로 하여금 당장 合性國의 大政에 참여시킬 수는 없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일본이 청일전쟁・러일전 쟁에서 승리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를 확립하는 단계, 즉 한일병 합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다루이 도키치의 생각이 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뺷대동합방론뺸은 대한제국 침략의 무기가 되었다. 1910년 6월 뺷대동합 방론뺸의 재간행 시기에 다루이 도키치는 일본의 일방적인 지배를 인정하는 것이고, 예전의 ‘대등한 형태의 합방’과는 현저히 다른, 심지어 “한인을 參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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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키는 것은 일본의 국권을 손상시키는 일이며, 헤아리기 어려운 폐습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뺷대동합방론뺸의 이면에 숨겨져 있던, ‘합방’과 ‘침 략’, ‘정한론’의 본질이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라는 정세 변화 에 따라 표면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루이 도키치의 뺷대동합방론뺸은 일진회(一進會)의 합방구상에 영향을 끼 쳤고,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는 1906년 10월, 우치다 료헤이와의 대화에서

“나의 본디 뜻 역시 丹邦(樽井藤吉)의 이른바 大東合邦論에 있다”라고 하여, 일진회의 ‘일한일체화(日韓一體化)’구상은 뺷대동합방론뺸에서 영향을 받은 것 임을 피력하였으며(韓明根 2002: 131), 뺷대동합방론뺸은 대한제국 병탄의 관념 적・이론적 무기가 되었다. 결국 뺷대동합방론뺸은 ‘연대’의 가면을 쓴 ‘침략’ 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2.2. 뺷대동합방신의(大東合邦新義)뺸출간과 량치차오(梁啓超)의 ‘합방(合 邦)’에 대한 인식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의 뺷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1893년 출판)은 1898 년에 상하이(上海)의 대동역서국(大同譯書局)에서 뺷대동합방신의(大東合邦新 義)6)라는 이름으로 제목을 바꿔 재출간 되었다. 뺷대동합방신의뺸에는 량치

6) 뺷대동합방신의(大東合邦新義)뺸는 두 가지 판본이 있다. 하나는 1898년 상하이(上海) 의 대동역서국(大同譯書局)에서 간행된 것으로, 량치차오의 서문이 붙어있는 것인데, 베이징(北京)의 국가도서관(國家圖書館)과 상해도서관(上海圖書館)에 소장되어 있다.

본고에서 참조한 량치차오(梁啓超)의 「대동합방신의 서문(뺷大東合邦新義뺸序)」은 夏曉 虹(2005)이 編한 뺷<飮冰室合集>集外文뺸(北京大學出版社)을 참조했다. 다른 하나는 량 치차오의 서문이 붙어있지 않은 상하이역서국(上海譯書局) 간행본인데, 출판년도의 서 지사항이 불분명하다. 상하이역서국 판본의 뺷대동합방신의(大東合邦新義)뺸에는 다루 이 도키치의 뺷대동합방론뺸에 있던 두 개의 서문(岡本監輔와 香月恕經의 서문(1893년 씀)) 중에 香月恕經의 서문만이 있고, 이 서문을 쓴 시기를 ‘明治30년(1897년)’으로 수정 해 놓은 것으로 보아, 상하이역서국 판본의 뺷대동합방신의(大東合邦新義)뺸는 1897년 이후에 출판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고에서는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六堂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판본을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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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의 서문(序文)이 있고, 량치차오의 문하생인 천가오디(陳高第)가 교정(校

定)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일본에게 패배한 중국의 지식인들은 서양의 무기를 배우는 양무운동(洋務運動)만으로는 중국을 개혁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중국의 무술개혁운동(戊戌改革運動:1898년 6월 11일~9월 21일)을 진행하였다. 캉유웨이(康有爲)와 량치차오(梁啓超)를 비롯한 개혁파가 자신들의 개혁의 목 표로 삼은 것은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식의 근대화 모델, 곧 입헌군주제 정치체제 수립과 함께 황제 중심의 하향적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것이었다.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국민에 대한 계몽을 목표로 하여 근대적인 학교의 설립, 잡지의 발행과 함께 근대지식을 담고 있는 서양과 일본의 저술들을 번역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1897년 추동간(秋冬間)에 설립된 대동역서국

(大同譯書局)은 이러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번역 출판기구였다. 대동역서국에 서는 뺷지구십오대전기(地球十五大戰紀)(賴鴻翰 譯, 1897년), 뺷러시아전기(俄土

戰紀)(湯叡 譯, 1897년)등 서양서적들을 번역하는 것과 동시에 뺷신학위경고

(新學僞經考)(1897년), 뺷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1897년), 뺷남해선생칠상서 기(南海先生七上書記)(1898년)등 캉유웨이의 저서들을 재간행 하는 등 적극 적인 번역・출판 사업을 추진하였다(배경한 2016: 10).

무술개혁파의 중심 지도자인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제도적 개혁을 위한 국제정세, 정치제도 분야의 저술들에 대한 번역이 더욱 필요하다고 보고 이를 위한 국가적 번역기구의 설립을 청원하는 상소문을 황제인 광서제(光緖帝)에게 올렸다. 또한 “총리대신 이쾅(奕劻)은 1898년 5 월 10일, 「논의에 따라 역서국을 개관하기 위한 상소문(遵議開館譯書切)」을 올 려 어명을 받들고 역서국을 개관하겠다고 청을 올리면서, 역서국 일은 “전적 으로 적임자가 관리하기에 달렸으므로 관직의 대소(大小)에 얽매여서는 안된 다”라고 하면서, 바로 이어서 아래와 같이 량치차오를 추천하였다.

이번에 광둥(廣東) 거인(擧人) 량치차오를 조사해보니, 서양학문에 마음을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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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상하이에서 자금을 모아 역서국을 설립하여 먼저 일본어를 번역하고 있었습 니다. 규모는 이미 갖추어졌지만 경비가 충분하지 못해 (역서국을) 오래 지속할 방법은 없을 듯합니다. 상하이는 중국과 서양의 상품이 모두 모여드는 곳이라 외국서적을 구입하기도 매우 편리하고 좋은 판본을 인쇄하여 간행하기도 비교 적 적당한 곳입니다. 이 거인에게 역서국 사무를 처리하게 하면 절반의 노력만 들이고도 갑절의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뺷무술백일지(戊戌百日志)뺸: 91, 셰 시장(解璽璋) 2015: 222).

이 상소문에 대해 광서제는 당일(5월 10일)군기대신(軍機大臣)에게 다음과 같은 어명을 내렸다.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 지금의 北京大學)을 조만간 개교 하고, 아울러 역서국도 설립하여 새로운 기풍을 열도록 하라.” 1898년 5월 14일(양력 7월)에 광서제는 량치차오를 접견하고 아울러 그가 쓴 뺷변법통의

(變法通議)뺸를 바치게 했다. 또 이렇게 어명을 내렸다. “거인 량치차오에게 6품 관직을 상으로 내리고 역서국(譯書局)사무를 담당케 하라”(셰시장(解璽璋) 2015: 221)

6월 29일에는 량치차오가 「역서국 장정 10조(譯書局章程十條)」를 기초해 상소문을 올렸고, 광서제는 당일 바로 내각에 어명을 내렸다. “거인 량치차 오가 기초한 장정 10조는 모두 절실한 내용이니 논의하여 시행토록 하라”(뺷 무술백일지뺸:292, 셰시장(解璽璋) 2015: 226 재인용) 게다가 광서제는 요청한 개 설 경비로, 은(銀) 1만량도 2만량으로 증액하게 했고, 매월 경비 1,000량도 3,000량으로 증액하게 했다.(셰시장(解璽璋) 2015: 222) 이런 어명을 내린 것 을 보면, 광서제가 사회의 새로운 기풍을 열기 위해, 경사대학당을 중시하고 역서국 개설에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1898년 양력 7월, 광서제는 량치차오가 역서국(譯書局)일을 담당할 것을 명령하는데, 대동역서국에서 다루이 도키치의 뺷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뺸을 뺷대 동합방신의(大東合邦新義)뺸라는 이름으로 재간행한 것은 1898년 2월이었다. 량치차오는 뺷대동합방신의뺸를 재간행 할 때, <서문>을 덧붙인다. 량치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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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문하생인 천가오디(陳高第)가 본문 내용의 몇 군데를 수정을 가했는데, 중국인의 입장에서 눈에 거슬리는 표현들을 고치고, 청조의 입장에서 받아 들이기 민감한 부분들을 삭제하거나 다른 표현으로 대체하였다7).

그렇다면 뺷대동합방신의(大東合邦新義)뺸를 출간할 때, 량치차오의 ‘합방’에 대한 인식은 어떠하였는가? 그 당시 량치차오는 다루이 도키치가 말한 대동 국(大東國:한국과 일본이 합방한 국가)과 중국의 진정한 ‘연대’가 가능하다고 본 것인가? 량치차오는 뺷대동합방론뺸에서 ‘합방’의 이면에 숨어있는 일본의 조 선에 대한 ‘침략’과 ‘병탄’의 의도를 보아내지 못한 것인가?

량치차오는 뺷대동합방신의(大東合邦新義)뺸 서문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황인종과 백인종 두 종족은 그 기세가 얼음과 불을 뛰어 넘는다...그러므 로 부강책을 마련하려면 변법을 시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같은 종족을 보존하 려면 연맹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합방”이란 대개 국교를 보호하는 구실 이며, 인민을 보존하는 규칙일 따름이다... (합방은)동방이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있는 방책이다.(梁啓超 1898, 夏曉虹 2005: 15-16)8)

량치차오가 여기서 언급한 ‘연맹’이란 바로 일본과의 연맹이다. 다루이 도 키치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합방’이다. 량치차오는 이 <서문>에서 이 책의 내용이 공자(孔子)가 대동사상을 말한 것처럼, 만물이 하나가 되는 것은 좋 은 전략이라고 말하며, ‘합방’에 반대하지는 않고,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렇다면 당시 중국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무술개혁운동은 어찌하여 103 일만에 서태후와 수구파의 무술정변(戊戌政變)으로 실패하게 되는가? 여기에 는 당시 개혁파(무술유신파)의 영국・일본과 연합론(聯英日論--‘합방론(合邦論)’

과 ‘인재영입론(借才論)’)과 관련이 있다.

7) 천가오디(陳高第)가 수정, 삭제한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배경한(2016: 12-16) 참조.

8) “黃白兩種, 勢逾冰炭...故欲策富强, 非變法不可; 欲衛種類, 非聯盟不可. “合邦”云 者, 蓋護敎之庸廧, 保民之規矩焉爾...亦東方自主之長策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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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러시아의 이리(伊犁)지역9) 점령 이후, 연이은 남하정책의 추진으 로 1870년대 이래로 중국인들에게 러시아는 최대의 위협세력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개혁파 외교관 황쭌셴(黃遵憲)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하여 중국, 한국, 일본, 미국 사이의 ‘연대를 강조’하고 그것을 조선 의 대외 전략으로 적극 추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니, 그가 작성하여 조선사 절단에게 전달함으로써 조선의 대외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뺷조선책략

(朝鮮策略)(黃遵憲 2007: 14-15)10)은 바로 러시아에 대한 방어책의 일환으로 제기되었던 것이다.(배경한 2014: 323-329)

이 무렵, 캉유웨이를 비롯한 무술개혁파는 광서제에게 세 가지 개혁을 요 구하고 있었다. 첫째는 시안(西安)으로 천도(遷都)할 것, 둘째는 인재를 영입

(借才)할 것, 셋째는 연방(聯邦)론이었다. 1898년 7월 하순에 형부주사(刑部主

事)홍루충(洪汝冲)이 올린 상소문이 서태후를 비롯한 반변법파(反變法派, 수구 파)에게 강한 위기감을 조성하였다. 그것은 합방론(合邦論)과 인재영입론(借 才論)때문이었다. 인재영입론에서는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초빙 하여, 중국의 정책결정에 참여시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합방론(合邦

論)은 러시아의 위협에 대비하여, 당시 베이징에 와있던 영국 선교사 티모시 리차드(Timothy Richard)가 제의한 중국・영국・미국・일본 4국의 ‘연합’주장 을 실천에 옮기자고 주장한 상소문이었다. 그 구체적 내용은 4국에서 100명 의 인원을 차출하여 4국의 병정(兵政)・세칙(稅則)・외교(外交)・병사훈련(練 兵)을 같이 처리하는 기구를 만드는 형태의 합방이라는 것이다, 이는 실질적 으로는 영・미・일이 중국을 공동관리(共同管理)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閔 斗基 1990: 228-231)

쏭보루(宋伯魯)는 티모시 리차드가 캉유웨이를 찾아와 분할의 위기를 극

9) 지금의 신쟝(新彊), 위구르 자치구 서북부.

10) 황쭌셴(黃遵憲: 1948~1905)은 자신이 저술한 뺷조선책략(朝鮮策略)뺸을 김굉집(金宏 集)에게 주면서, “중국과 연대하고(親中國), 일본과 (우호관계를)맺으며(結日本), 미국 과 연합하여(聯美國) 러시아에 대항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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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하는 방법으로서 4국 ‘연합’주장을 제의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캉유웨이는 1898년 말에 쓴 「자편연보(自編年譜)」에서 일본 공사(公使:矢野文夫)와 더불어 북경(北京)과 각 성(省)에서 중일인사(中日人士)를 모아 ‘양국합방대회의(兩國 合邦大會議)’를 개최하려 하였다(閔斗基 1990: 231)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홍루충(洪汝冲)과 무술개혁파는 모두 러시아 와 영국 사이에 전쟁이 임박했거나 이미 전쟁이 시작됐다는 정세판단 또는 정보를 전제로 하여, 러시아와의 동맹관계를 유지하게 될 경우의 불리함을 극복하는 방안으로서 ‘합방’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광서제에게 올린 홍루 충(洪汝冲)의 상소문의 내용이 서태후에게까지 전해졌고, 어사 양숭이(楊崇 伊)는 서태후에게 “광서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등용하면 조상이 물려준 강산 이 멸망의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고 진언하였다. 이허위엔(頤和園)에 거주하 고 있던 서태후는 변법파의 ‘합방’계획을 발견하자, 국가 존망의 위기와 문 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8월6일(양력 9월 21일) 즉시 정변을 일으켜(雷家聖 2009: 206-209)11) 광서제를 유폐시켰다.

이런 정황을 보면, 량치차오와 캉유웨이를 비롯한 무술개혁파(유신파)의 합방론은 중국・영국・미국・일본 4국이 ‘연합’하여, 러시아의 위협에 대비 하자는 주장이며, 마찬가지로 량치차오의 합방의 의미는 “황인종인 조선과 일본이 연맹하여야만, 백인종인 서양 종족에게서 동방이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있는 방책”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량치차오는 뺷대동합방신의뺸를 상하이 에서 출간하던 1898년, 그 당시에는 일본의 조선 합방 이면에 숨어있는 ‘침 략’과 ‘병탄’의 의도를 보아내지 못했고, 일본과 조선의 합방은 “공자가 대동 사상을 말한 것처럼 좋은 전략”이라고 피상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11) 이 논문에서 대만의 연구자인 雷家聖은 “서태후는 단점이 많은 인물이지만, 무술정변 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서태후는 나라의 운명을 수호하였고, 중국을 분할과 병탄의 위기로부터 구해냈으며, 캉유웨이 등 유신파 인사들은 중국을 분할과 병탄의 위기에 처하게 했으므로 과오가 크다고 했다.” 이는 기존의 전통학설과 완전히 다른 해석과 평가를 도출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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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량치차오의 조선 ‘국망(

國亡

)’에 대한 인식

무술정변(戊戌政變)을 일으킨 서태후는 변법자강운동과 새로운 정치개혁 을 시행하려던 광서제를 유폐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무술개혁파 인사였 던 탄쓰퉁(譚嗣同)을 처형하였다. 량치차오는 일본 공사(하야시)의 비호아래 일본 군함을 타고 일본으로 망명(1898년 9월)을 떠났는데, 스승인 캉유웨이 보다 앞서 일본에 도착하였다. 일본으로 망명을 떠난 량치차오는 1898년 10 월에 도쿄(東京)에 도착하였고, 11월에는 요코하마(橫濱)에서 《청의보(淸議

報)》를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중국을 떠난 량치차오는 1912년 중화민 국(中華民國)이 성립을 선포한 후, 그해 10월에 중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 니, 그의 일본 망명생활은 14년이나 되었다.

량치차오는 조선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졌고, 또 당시 조선이 멸망해가 는 상황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했다. 중화 제국의 위기가 심화하면서 장래에 중국도 조선과 같은 운명에 처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으로 조선에 대 한 복잡한 감정을 표출했다. 량치차오가 조선에 대해 논의한 글들은 대략 10여 편으로,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목 간행물명 등재일

조선망국사략(朝鮮亡國史略) 뺷신민총보(新民叢報)뺸 (제53호, 54호)

1904년 9월 24일, 10월 9일 일본의 조선(日本之朝鮮) 뺷신민총보뺸(제60호) 1905년 1월 6일 지난 1년 동안의 세계 대사건 기록:조선의

멸망(過去一年間世界大事記第六朝鮮之亡國) 뺷신민총보)뺸(제60호) 1906년 2월 아! 한국, 아! 한국 황제, 아! 한국

국민(嗚呼韓國嗚呼韓皇烏呼韓民) 뺷정론(政論)뺸 1907년 10월

가을바람이 등나무를 꺾다(秋風斷藤曲) 1909년 10월

한일합병문제(韓日合倂問題) 1910년 7월

조선 멸망의 원인(朝鮮滅亡之原因) 뺷국풍보(國風報)뺸 1910년 9월 일본병탄조선기(日本倂呑朝鮮記) 뺷국풍보뺸(제22호) 1910년 9월

조선애사(朝鮮哀詞) 뺷국풍보뺸 1910년 9월

조선 귀족의 장래(朝鮮貴族之將來) 뺷국풍보뺸 1911년 3월 여한십가문초서(麗韓十家文抄序) 뺷국풍보뺸 19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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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개혁운동은 청일전쟁 패배 이후, 유럽의 무기・기술만을 힘써 배우려 는 양무운동의 한계를 깨닫고, 전통적인 정치체제・교육제도의 개혁으로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실현해야만 중국이 근대세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음 을 주장한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이었다. 량치차오는 격동의 중국 근대 전환기에 유신파(維新派)계몽주의 지식인의 대표 이론가이자 실천가 역할을 수행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서구열강의 침략 앞에 위기의식을 느꼈고, 적 극적으로 생존과 구국(救國)을 위한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1898년 서태후의 무술정변(戊戌政變)으로 광서제와 무술개혁파의 변법유 신(變法維新)운동이 끝났지만, 량치차오는 정치적 실패를 교훈삼아 국민개혁 을 위해 학술・사상 및 문화전반에 걸쳐 계몽 운동을 전개해 당시에 이미 커다란 호응을 얻었으며, 현대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쳤다. 량치차오가 조선 에 관해 쓴 10여 편의 위의 글들은 「여한십가문초서(麗韓十家文抄序)」 한 편을 제외하고는 1904년부터 1911년 사이에 망명지 일본에서 쓴 글이었다.

초기에 량치차오는 일본에 대하여 극찬하였지만, 일본의 부강(富强)이면 에 숨겨진 대외확장의 욕망을 이해한 다음부터는 사상에 변화가 발생하였으 며, 일본의 아시아 침략야심을 폭로(강수옥, 장희월 2019: 108)하기 시작하였 고, 기존에 경시하였던 조선 국민들에 대해 동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조선 ‘망국(亡國)’에 대한 량치차오의 인식은 어떠했는가? 량치 차오가 조선에 관해 쓴 10여 편의 글 중에서도 「조선망국사략(朝鮮亡國史略)

」, 「조선 멸망의 원인(朝鮮滅亡之原因)」과 「일본병탄조선기(日本倂呑朝鮮記)」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멸망하게 되었는가를 매우 객관적으로 깊이 있게 분석해 내고 있다.

조선 ‘망국’에 대한 량치차오의 인식은 세 가지 측면으로 파악할 수 있다. 첫째, 속국을 잃은 상실감과 중국 외교정책의 실패 인식이다. 량치차오는 조선 망국에 대한 깊은 동정을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조선지식인들로 하여금 량치차오에 대해 감정적으로 큰 호감을 갖게 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동정 이면에 중국이 속국을 잃었다는 데에 대한 깊은 상실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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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중국이 외교적으로 속국에 대한 정책에 실패가 있었음을 인식하고 있 다. 둘째, 조선 멸망의 내적 원인을 비판하였다. 셋째, 조선망국에 대한 량치 차오의 이해는 중국인을 계몽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러한 인식들은 결국 중국인을 계몽시키기 위한 교훈으로 활용되었다. 이제 위에서 서술한 세 가 지 측면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3.1. 속국을 잃은 상실감과 중국 외교정책의 실패 인식

청일전쟁 전의 조선과 청일전쟁 후의 조선을 비교해 볼 때, 더구나 청일전쟁 후의 조선과 러일전쟁 직후의 조선을 비교해볼 때, 나는 눈물이 넘쳐흐름을 금 치 못하겠다. 이제 조선은 끝났다. 지금부터 세상에 조선의 역사가 다시 있을 수 없고, 오직 일본 번속 일부분으로서의 역사만 남아있을 뿐이다. 지금 삼천 년이 된 이 오래된 나라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멸망하는데 그와 친속의 관계를 가진 이로서 어찌 그 종말을 장식하게 된 사실에 대해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 는가? 아! 이로써 비애를 생각하니 가히 그 비애를 알겠다.(량치차오 1904, 최형 욱 역 2014: 14)

위의 글은 량치차오가 1904년 9월과 10월, 2회에 걸쳐 쓴 「조선망국사략

(朝鮮亡國史略)」이라는 글의 서문이다. 량치차오는 1904년에 이미 조선 ‘망국

(亡國)’의 역사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청나라로부터 조선의 독립권을 가져오고, 1904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후, 러시아로부터 조선의 지배권을 쟁탈한 뒤에 쓴 글이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병합(1910년 8월 29일) 되기 6년 전인데도, 조선이 이미 “나라를 잃어버 렸다(亡國)”고 판단한 것이다. 그것은 러일전쟁의 목적이 만주와 조선의 지 배권을 쟁탈하기 위해 일어난 전쟁이며, 러시아의 패배로 인해 조선의 지배 권이 일본에 넘어갔다는 애석함과 비애의 감정이 복잡하게 섞여있는 것이 다. 량치차오는 「조선망국사략」에서 “국가행정기관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일은 바로 재정권, 군사권, 외교권이다. 이 세 가지를 잃으면 나라는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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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한다”(량치차오 1904, 우림걸(牛林杰) 2002: 169 재인용)12)라고 보았으며, 한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다고 여겼다. 그가 보기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에서 승리한 일본은 재정권, 군사권, 외교권을 일본이 맡는다는 <내정 개혁 안(25개조)>을 고종에게 제출하여 승인을 얻어냈고(량치차오 1904, 최형욱 역 2014: 39-42), 마침내 조선의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조선은 나라를 잃 은(亡國) 국가가 되었으니, 량치차오는 이 일은 청나라(중국)의 입장에서는 매우 애석한 일임을 통탄하고, 조선의 망국에 깊은 동정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유람하다가 하얼빈 역에 도착 했을 때,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그가 죽은 일에 대해서 량치 차오는 「조선애사(朝鮮哀詞)」 18수에서, “삼한의 수많은 인물 중에, 내게는 두 남아만 보인다(三韓衆十兆, 吾見兩男兒)”라고 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와 국치에 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충청도 금산 군수 홍범식(洪

範植)을 기절(氣節)이 쇠하지 않은 조선의 두 남아로 찬양하며 그 순국을 애 통해 하기도 했다.(량치차오 1910, 최형욱 역 2014: 218)

량치차오에게 있어 조선은 서구와의 대비 속에서 중국을 비춰볼 수 있는 또 다른 특수한 타자였고, 또 아쉽게 잃어가는 속국(최형욱 2014: 261)이었다. 중화제국의 민족적 위기가 심화되면서 장래에 중국도 조선과 같이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과 인식하에 조선에 대한 관심은 심 화되어 갔다.

청국은 국제법상의 속국에 대한 권리를 알지 못해서 조선이 외국과 조약을 체결할 권한을 허락함으로써 일본에게 구실을 주고 말았으며, 또한 청일전쟁에 서 일본이 열강들의 동정을 크게 얻도록 했다. 이른바 전 중국의 일대 실수였 다. 톈진조약은 조선으로 하여금 청일 공동의 보호의 지위에 서게 했다.(량치차 오 1904, 최형욱 역 2014: 21)

12) “余觀以上諸約, 則韓之爲韓, 從可知矣. 國家行政機關最重要者三事, 曰財政權, 曰軍政 權, 曰外交權. 三者亡則國非其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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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조선망국사략」에 서술된 량치차오의 조선에 대한 인식이다. 량치차오의 의식 속에서 조선은 중국(청나라)의 속국이었는데, 청일전쟁의 배상문제를 처리하는 <톈진조약(天津條約)>을 중국과 일본이 맺은 결과로 조 선이 ‘청일 양국의 보호국이 됨’으로써, 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하게 되고, 중국의 속국의 지위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중국 외교정책의 큰 실수’라고 인식하고 있다. 즉 오랜 세월 동안 중국의 보호아래 있었던 조선이라는 속국 을 잃어버린 상실감을 표현하고 있다.

「일본병탄조선기」라는 글은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 된 후인 1910년 9월 14일에 발표된 글이다. 이 글은 「조선망국사략」보다 더 세세하게 조선의 역 사상황을 덧붙여 놓았으며, 일본과 대한제국 황실과의 관계, 일진회의 문제 까지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병합 시킨 전 과정에 대 해 서술하고 있다.

「일본병탄조선기」의 맨 뒷부분에, 량치차오는 왜 「조선의 중국에 대한 관 계의 변천」이라는 부록(附)을 덧붙여 놓았을까? 이 글은 서구열강이 조선과 충돌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조약을 맺으려 할 때, “조선이 우리의 속국이므 로 먼저 우리 정부(청나라)에 따졌다. 우리 정부는 조선을 대신하여 허물을 뒤집어쓰는 것을 꺼렸다. 태연스럽게 프랑스 사신에게 거부하며 말하기를,

“우리(청나라)와 조선은 결코 관계가 없다”고 했다. 이에 프랑스 제독 로즈(羅 士,Rose)씨가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나라

(청나라)정책 실패의 제1착이 되었다.”(량치차오 1910, 최형욱 역 2014: 171-176)

량치차오가 보기에 청나라 정부는 프랑스에 말했던 방식으로 미국과 일본 에게도 똑같이 말하여, 중국이 얼마나 어리석게 조선의 보호국의 위치를 상 실했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또한 “조선이 중국을 저버렸고, 중국이 조선을 저버렸다. 눈을 크게 뜨고 프랑스와 한국이 난을 벌인 이후부터 중국과 일본이 강화하기 이전까지의 교섭사를 살펴보노라니 뜨거운 눈물이 속눈썹에 흐름을 금하지 못하겠다” (량치차오 1910, 최형욱 역 2014: 182)라고 하여, 조선이 중국의 속국에서 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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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과정을 묘사하며, 애석하고 애통해하며, 중국의 외교정책 실패가 세 차례나 되풀이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량치차오는 중화주의 또는 제국주의적 입장에서 조선에 대해 일종의 속국이탈로 인한 상실감과 함께 중국의 외교정책의 실패를 깊이 있게 파악했다.

3.2. 조선 망국의 내적 원인 비판

량치차오는 조선 멸망과 망국의 원인으로 우선 주권자인 조선 황제와 대 원군의 무능 및 실정을 들었고, 또한 귀족・관리를 비롯한 양반 사대부계층에 국가의식이 없어 정치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점을 들었다. 그리고 가장 근본 적으로는 조선인의 ‘국민성’이 열악한 데서 기인한다는 논의로 발전했다.

한국 정부가 경질되고, 한국 황제가 양위하고, 한국 군대가 해산하고, 한일 신협약이 성립되었다. 아! 한국이 망했다. 아! 한국이 완전히 망했다.

온 세상이 바삐 돌아다니며 서로 알리기를 일본인들이 한국을 망하게 했다 고 한다. 일본인들이 어찌 한국을 망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한국이 망한 것은 한국 황제가 망하게 한 것이요, 한국 인민이 망하게 한 것이다.(량치차오 1907, 최형욱 역 2014: 82)

량치차오는 「아! 한국, 아! 한국황제, 아! 한국국민(嗚呼韓國嗚呼韓皇嗚呼韓 民)(1907년 10월 7일)이라는 글에서 “한국이 망한 것은 한국 황제가 망하게 한 것이요, 한국 인민이 망하게 한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기는 했지만, 한 국가가 멸망하기까지는 대한제국 내부에 국 가가 멸망에 이르게 된 많은 문제가 있었음을 시사한 것이다.

량치차오는 “한국 황제는 기지가 조금 있으나 독단으로 처리하기를 좋아 하고 정해진 의견이 없으며, 늘 외국에 기대어 그 지위를 보존하고자 했다. 10년 동안 개혁 조칙들을 내렸으나 정치는 전에 비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런 황제가 있어서 한국은 망했다”고 고종을 평가하였으며, 대원군은 “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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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이 각박한 사람이다. 그 음험하고 사나운 성질은 온 한국 조정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교만하고 흐리멍덩하면서도 조급하고 시샘이 많으니 주권자의 그릇이 못 된다”(량치차오 1910, 최형욱 역 2014: 87)고 평가하였다. 특히 조선은 “주권이 한군데서 나오지 않았고, 한 나라에 두 군주가 있었으 니, 한국정세의 혼란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대원군에 대해서는

“세계의 대세가 어떠한 것인지 모르고, 쇄국정책으로 경복궁을 중수(重修)하 고, 천주교도들을 10만 명이나 몰살시켰다”고 평가하였다. 멀리 일본에서 대 원군을 만나본 적도 없는 량치차오가 대원군의 성질이 어떻다고 평가하는 것이 타당한지의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세계의 대세와 흐름을 파악하지 못 하고 쇄국정책을 편 점이나 경복궁 중수로 인한 백성의 피폐해짐에 대한 비 판은 온당해 보인다.

한국 인민은 양반관리들을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여, 미천한 관직이라도 더없 는 영광으로 여기며, 조정의 벼슬하는 자는 오직 사당(私黨)을 키워 서로 밀치 며, 자기 자신만 알고 국가가 있음은 몰랐다. 그리고 일반 백성은 국사를 자신 과 아무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며,(중략)권세와 이익에만 우르르 달려들어, 외국 사람이라도 세력 있는 자를 보면 숭배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였다. 한국에 이런 인민이 있음으로 인해 한국은 마침내 망했다.(량치차오 1907, 최형욱 역 2014:

82-84)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량치차오는 조선 멸망의 내적인 원인은 한국 황제 와 한국인민(양반과 백성)들에게 있다고 말하면서, 특히 이익을 위해 외국인 을 숭배하듯 하는 양반관리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으나, “일반 백성은 국 사와 자신을 아무 관계없는 것으로 여긴다”는 평가는 조선인의 저항정신을 모르는 것이며, 지나치게 피상적인 평가이다.

마지막으로 조선 멸망을 촉진시킨 정당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일진회(一 進會)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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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멸망시킨 것은 일본이요. 일본을 도와 한국을 멸망시킨 것은 한국의 일진회이다. 일진회라는 것이 무엇인가? 정당의 이름을 사칭하고 적에게 아부 함으로써 부귀를 얻은 자들이다. 일진회의 영수는 송병준(宋秉畯)이요, 이용구 (李容九)인데, 병준이 특히 주동이었다.(중략) 일본 메이지 37년(1904년) 8월 한 성에서 일진회가 열렸고, 그 第1 政綱은 바로 일본에 대한 찬조를 명시한 것이 었다. 몇 달 되지도 않아 전국적으로 호응하여, 회의 참가자가 수십만이 되었 다. 공정한 입장에서 논하자면, 일진회가 아니었다면 일본은 사실 아직 한국을 멸망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일진회가 있었기에 일본은 한국을 멸망시키는데 더 힘을 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진회의 성립은 한국을 망하게 한 일대 사건 이라고 해도 안 될 것이 없다.(최형욱 2015: 311-312)

위의 글을 통해 일진회가 일본을 도움으로써, 한국의 강제병합이 결정적 으로 이루어졌으며, 량치차오는 “일진회의 성립은 한국을 망하게 한 일대 사 건”으로 보았다. 그는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은 조선이지 일본이 아니다”(량치 차오 1910, 최형욱 역 2014: 104)라고 역설하였는데, 이는 표면적으로는 일본이 조선을 망하게 했지만, 조선 멸망의 내적원인은 조선내부에 잠재되어 있었 다고 본 것이다.

3.3. 중국인을 계몽하기 위한 목적

옛날에 한()나라 육가(陸賈)가 뺷신어(新語)뺸를 지었는데, 그 뜻은 진()나 라가 망한 까닭을 추론하여 한나라를 위한 경계로 삼는 데 있었다. (중략) 조선 이 멸망한 원인을 논하여 나의 후손, 나의 대부 관리들 및 나의 국민 친구 여러 분에게 고한다. 옛사람이 말했거늘, 다스려짐과 같은 길은 흥성이요, 어지러움 과 같은 길은 멸망이다. 나의 후손, 나의 대부 관리들 및 나의 국민 친구 여러 분이여 한번 자기반성을 해볼지어다. 또한 한둘 조선과 같은 길을 가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만약에 있다면 나는 조선을 위해 슬퍼할 겨를이 없지 않을까 두 렵도다.”(량치차오 1910, 최형욱 역 2014: 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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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치차오는 <조선멸망의 원인(朝鮮滅亡之原因)>(1910년 9월 14일)이라는 글 에서, 위와 같이 말하였다. 그가 조선의 망국에 그토록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는 조선이 망한 까닭을 추론하 고 분석하여, 중국을 위한 본보기와 경계로 삼아 중국인을 계몽시키기 위한 교훈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량치차오는 만약 중국이 조선과 같은 망국의 길을 가게 된다면, 너무 두려워서, 조선의 망국에 대해 슬퍼할 겨를이 없을 까봐 두렵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망국이라는 표현은 감히 표현 하지 않았지만, 조선과 같은 길이라는 의미 속에서 그의 깊은 두려움이 내포 되어 있다.

내가 일찍이 3년 전 「멸국신법론(滅國新法論)」을 지어 근 100년 이래로 이미 폐허가 된 사직들에 대해 옛 자취를 추모한 바 있는데, 점차 그리된 바를 더듬 어 생각하면 땀으로 등이 축축해지고 눈물이 턱으로 흘러내리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또 조선을 잃었다. (중략) 나는 내가 조선을 애도하지만, 장차 조선으로부 터 동정을 받게 되지는 않을까 두렵다. 아!”(량치차오 1904, 최형욱 역 2014: 46)

위에서 언급한 “지금 또 조선을 잃었다”라는 문장 맥락을 보면, 량치라오 는 조선이 중국의 것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애석하게도 우리 것(중국의 속국)

을 일본에게 잃어버렸다는 느낌이든다. 그리고 동정은 무엇으로부터의 동정 인가? 량치차오는 중국도 일본에게 나라를 잃어버리게 될까봐 염려가 되는 것이다. 량치차오의 조선 망국에 대한 인식은 일본에 대한 분석을 하면서, 조선이라는 국가가 어떻게 멸망해 갔는가를 설명하지만, 그의 내심 깊은 곳 에서 중국은 일본을 경계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중국이 각성하지 않으면 일본에게 나라를 잃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게 된다면 조선이 장차 중국을 동정하게 될 것이니 참으로 두렵다는 의미이다.

량치차오의 조선 망국에 대한 관심은 결국은 조선을 반면교사로 삼아 중 국이 망국의 위기에 처할 수도 있음을 중국사회에 일깨우고, 중국인을 계몽 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조선의 망국을 중국인은 본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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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아, 똑같은 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각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의 조선망국사에 대한 연구는 중국의 계몽을 위한 교훈으로 활용되었다.

다음은 「일본병탄조선기」의 결론 마지막 부분인데, 일본의 침략행위를 바 라보는 량치차오의 궁극적 인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우승열패(優勝劣敗)가 거짓이 아님을 믿으면, 성공은 자연히 있게 된다. 무릇 그들은 조선에서 이미 승리하고 돌아왔다. 저들이 우승(優勝)의 기술을 지니고, 마음으로 도모하고 눈으로 집중하는 것이 어찌 조선 하나 뿐이겠는가? 이에 나 는 조선의 멸망을 보며 춥지도 않은데 전율을 느낀다.(량치차오 1904, 최형욱 역 2014: 170)

역시 진화론에 입각한 민족 제국주의의 경쟁논리를 수용하며 일본의 침략 행위와 조선의 불행을 평가하고, 아울러 이를 중국인을 계몽시키기 위한 교 훈으로삼고자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량치차오는 부강해진 일본의 이 면에 숨겨진 침략의 야욕을 간파하였고, 중국이 일본을 경계해야 함을 환기 시켰다. 즉, 조선 망국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합방’이라는 것이 동등한 연대 가 아니라, 사실 다른 나라를 강제 병탄하는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량치차오의 조선망국과 망국사(亡國史)에 대한 관심은 결국은 조선을 반 면교사로 삼아 중국이 망국의 위기에 처할 수도 있음을 중국사회에 일깨우 고, 중국인을 계몽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4. 나오며

량치차오가 1898년 뺷대동합방신의뺸를 발간했을 때는 ‘합방’에 대해 반대 하지도 않았고, 지지하는 입장이었는데, 조선 망국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중 국도 변화와 개혁을 지속시켜나가지 않으면, 조선처럼 망국의 나락으로 떨 어질 수 있음을 자각하고, <시무보(時務報)>와 <신민총보(新民叢報)>를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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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끊임없이 중국인을 계몽시키기 위한 실천을 계속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선 ‘망국’에 대한 량치차오의 인식은 세 가지 측 면으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속국을 잃은 상실감과 중국 외교정책의 실패 인식이다. 둘째, 조선 멸망의 내적 원인을 비판하였다. 셋째, 중국인을 계몽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결국 량치차오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중국인이 조선망국을 본보기로 삼아 일본을 경계해야하며, 중국인의 ‘국민성을 개조’시키고, 중국인의 정신을 환 기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근 10년 동안 조선 망국에 대한 연구와 사유를 기 반으로 조선의 상황을 주시했고, 결국 조선이 멸망에 이르게 되자 의타성을 비롯한 열악한 국민성을 멸망의 원인으로 제기하여 중국을 위한 반면교사로 삼아, 중국인을 계몽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대한제국시기 량치차오의 다방면의 글들이 조선에 유입되었고, 조 선지식인들은 각자의 선호에 따라 량치차오의 사상을 수용하고 영향을 받았 다. 1900년을 전후한 약 10년 동안 조선에서 발행된 거의 모든 계몽잡지에 량치차오의 글은 빠지지 않고 실렸다.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 현채

(玄采), 장지연(張志淵)등 조선의 정신적 지도자들은 량치차오의 글을 번역 하고 읽으면서 구국(救國)의 방법을 모색하였으며, 량치차오의 열렬한 독자 들이었다. ‘조선지식인들의 량치차오 수용 태도는 어떠했는지’에 대해 비판 적 검토는 다음 과제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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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 ]

191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1911년 청(淸)나라는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봉건왕조체제가 막을 내린다. 조선(朝鮮)은 대한제국으 로 국호가 바뀐 지 14년 만에 일본에 강제 병합되었고, 청나라는 1912년 입헌공 화제의 중화민국(中華民國)시기로 진입한다. 한국과 중국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정치체제의 변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893년 일본에서 출판된 한 권의 책, 다 루이 도키치(樽井藤吉)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은 조선을 강제 병합시키는 나침반으로 작용하였다. 한 권의 책이 한 국가를 병탄(倂呑)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한 예이다. 다루이 도키치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 論)을 량치차오(梁啓超)1898년에 상하이(上海)의 대동역서국(大同譯書局)에 서 대동합방신의(大東合邦新義)라는 제목으로 재출간하였다. 본고는 량치차오 가 대동합방신의(大東合邦新義)라는 제목으로 재출간하던 시기에 량치차오의

합방(合邦)에 대한 인식은 어떠했으며, 또한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이후의 조선 망국에 대한 량치차오 조선인식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주제어 : 합방, 국망, 연대, 량치차오, 조선인식, 중국계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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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stract >

Liang qi qiao’s annexation and Perception of Joseon’s “Ruinend”

KIM Myounghee(Jeonju University)

In 1920, Korean Empire was annexed to Japan, while in 1911, Qing Dynasty of China having the feudal royal was overthrown due to the Xinhai Revolution. Fourteen years after Joseon changed its name to Korean Empire, it was forcefully annexed to Japan, while China entered into the era of the constitutional republic system of the Republic of China in 1912.

Korea and China entered into political systems that were completely different from before. A book titled “Da dong he bang lun” authored by Darui Tokichi and published in Japan in 1893 was used as a compass for Japan’s forced annexation of Joseon. It was one of the examples by which a book acts as an ideology for the annexation of a country. “Da dong he bang lun,” authored by Darui Tokichi, was re-published by Liang qi qiao as a book titled “Da dong he bang xin yi” through Shanghai’s “Datong Yishuju” in 1898. This paper discusses how Liang qi qiao perceived the

“Annexation” and how he perceived Joseon’s end after he was forcefully annexed to Japan at the time when the book was re-published with the title “Da dong he bang xin yi”.

Keywords : Annexation, ruin, coalition, Liang qi qiao, perception of Joseon, Chinese Enlightenment

이 논문은 2020년 11월 10일에 접수 완료되어 2020년 11월 27일에 심사가 완료되고 2020년 12월 10일 편집회의에서 게재가 확정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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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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