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인문학칼럼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2

Share "인문학칼럼"

Copied!
3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40

공업화학 전망, 제25권 제2호, 2022

동지(冬至), 시간(時間)이 처음 열리다

전 성 운 교수 (순천향대학교)

3월이 가까워지면 늘 정돈되지 않은 설렘을 경험한다. 얼어붙었던 날이 풀리기 시작하며 덩달아 긴장감도 풀어지기 때문인지, 다가올 개강에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기대감으로 인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따뜻해지는 날씨나 새 학기의 기대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일 수도 있다. 이유가 뭐든 3월이 다가오면 뭔가 새롭게 시작한다는 생각이 가득해진다. 그런데 이런 기대감이나 설렘과 함께 뜬금없는 생각을 한다. 도대체 ‘시작(始 作)이 시작’이 될 수 있던 까닭은 무엇일까.

하루의 시간을 재는 시계가 없다면, 한 달과 일 년을 순차적으로 나열한 달력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시작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하루의 시작은 0시, 한 달의 시작은 1일, 일 년의 시작은 1월 1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필자가 뜬금없이 떠올린 ‘시작’은 바로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기준으로의 출발점을 가리킨다. 연속되는 시간의 흐름에서 특정 지점을 기준으로 삼아 규칙적으로 분할하여 시작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루의 시작은 특정하기가 비교적 쉽다. 일상적 경험에서 규칙적 패턴을 찾아 그 패턴에 의미 있는 획정(劃 定)을 하면 된다. 경험상 태양은 규칙적이면서도 반복적으로 뜨고 진다. 그것을 하나의 바탕으로 삼을 수 있다.

태양이 뜨고 지는 규칙을 이해하게 되면 ‘하루[日]’를 획정할 수 있다. 다만 하루의 시작은 다양하게 정할 수 있다. 태양이 처음 보일 때[=일출(日出)]를 시작으로 삼을 수도 있고, 해가 다 사라졌을 때[=일몰(日沒)]를 시 작으로 삼을 수도 있으며, 해가 떠 있는 동안의 한 가운데[=정오(正午)]나 해가 완전히 사라진 동안의 한 가운 데[=자정(子正)]를 시작으로 삼을 수 있다. 물론 현재 우리는 해가 진 동안의 한 가운데인 ‘자정(子正)’을 하루 의 시작으로 이해한다.

그럼 한 달은 어떻게 정해졌는가. 한 달은 ‘달의 변화와 움직임’을 바탕으로 한다. 없던 달이 눈썹처럼 가늘 게[=초승달] 생겨나 점점 자라 둥근 원[=보름달]처럼 되었다가, 다시 점점 가늘게 변하여 없어지는 동안을 한 달로 정했다. 이때 달이 둥근 상태인 보름을 시작으로 정하지 않고, 전혀 보이지 않았다가 처음 생겨나는 날[=

초하루]을 시작으로 정했다. 물론 현재 한 달의 시작은 해의 움직임만을 반영한 것이나, 전통 사회에서는 달의 변화에 더 관심을 기울여 정했었다. 음력(陰曆), 이른바 태음력(太陰曆)의 사용이 그것이다.

그런데 일 년의 시작을 정하는 것은 하루나 한 달의 바탕을 찾고, 시작을 특정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해나 달과 같은 움직임과 변화의 규칙이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세계 여러 지역의 일 년의 길이나 시작 이 같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마야에서는 금성(金星)의 움직임을 근거로 한 260일을, 이집트에서는 태양과 달의 움직임에 근거한 360일과 이를 보정한 365일을 시작의 바탕으로 삼았다. 우리 전통 사회에서는 달의 움직임을 근간으로 한 354일과 태양의 움직임을 반영한 24절기의 360일을 바탕으로 삼았다.

이렇게 일 년의 길이가 다른 것은 해당 지역 사람들의 삶이 어떠한가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예컨대 태양은 작물의 파종과 성장, 수확 과정을 파악하는 데 적합한 날씨 변화를, 달은 어업과 해상 운송과 유관한 밀물과

인문학칼럼

http://www.ksiec.or.kr

(2)

KIC News, Volume 25, No. 2, 2022

KIC News, Volume 25, No. 2, 2022

41

썰물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적절한 준거(準據)가 된다. 그리고 금성(金星)의 움직임은 옥수수 등의 작물 재배 나 인간의 수태 기간과 유관하다.

환경 및 생활 방식과 시작 설정의 관계는 이집트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 다. 이집트는 태양의 움직임을 기반으로 하되 그 기준을 시리우스(Sirius) 란 별의 출현으로 삼았다. 늑대의 푸른 눈처럼 빛난다는 것에서 동양에서 는 천랑성(天狼星)이라 불리는 시리우스는 일명 ‘나일의 별’이다. 이집트의 하늘에서 약 70일 동안 보이지 않다가, 지평선에 태양과 동시에 시리우스 가 다시 출현하면 나일강은 그 며칠 후부터 은혜로운 범람을 시작한다. 이 런 나일강의 범람은 작물의 파종과 함께 농사의 시작, 그리고 한 해의 풍요 를 가져온다. 그렇기에 이집트 사람들은 지평선에 시리우스가 출현한 때를 일 년의 기준으로 정하고, 그 별의 이름을 ‘나일의 별’이라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옛사람들은 일 년의 시작이 언제이며, 그것이 어떤 의 미를 지닌다고 생각했을까.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의 <동짓날 눈 내 리는 것을 읊조리다(至日雪偶吟)>란 시(詩)를 보자.

건곤(乾坤)이 오가는 것, 진실로 고리와 같아 乾坤來往信如環 동정(動靜)이 따르는 것, 이 날을 보게 되었네. 動靜須從此日看 만물이 처음 잉태하니 양의 기운 처음 돌아오고 萬物始胎陽始復 동지(冬至)가 마침 이르러 눈도 처음 잦아드네. 一冬初至雪初殘 오묘하고 아득하여 시변(時變)을 알기 어려우니 難將眇眇知時變 면면히 바라보나 선(善)의 단서를 누가 알아 체득하리오. 誰體綿綿認善端 종에게 지나가는 장사치 응대하지 말라 경계하고 戒僕莫應商旅過

나는 집에 머물며 사립문 닫았네. 自家猶得閉柴關

신광한은 신숙주(申叔舟)의 손자로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다. 그는 동짓날 눈 내리는 것을 보고 그 의미를 시 로 노래했다.

첫째 구와 둘째 구에서 신광한은 하늘과 땅으로 대변되는 우주적 순환질서의 진실함을 말했다. 우리가 존재 하는 세계는 끊임없이 순환하는데, 그것은 반복해서 돌아가는 고리처럼 확실하다. 즉 음(陰)과 양(陽), 동(動)과 정(靜)이 상호작용하며 다시 동짓날에 이르게 되었다. 우주적 순환질서가 정연하여 한 치도 어긋남 없이 다시 금 동짓날이 되었다고 했다.

이런 순환의 시작이자 기준이 바로 동지(冬至)다. 동지는 “만물이 처음 잉태하고 양의 기운이 처음 돌아”온 시점이다. 그런 시작의 날에 마침 눈이 내렸으니, 시로 노래할 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천지만물 의 정연한 변화를 알지 못한다. 이른바 시변(時變; 때에 맞는 변화)은 “오묘하고 아득하여” 언제가 시작이고 그 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알기 어렵다. 게다가 우주적 순환질서의 변화에서 드러나는 “선(善)의 단서”를 헤아 리기는 더욱 어렵다. 세속적 욕망과 거짓에 길들여질 경우 선(善)한 본질을 더더욱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번잡스레 장사치를 상대하거나 물(物)을 탐해서는 안 된다. 장사치는 이익을 위한 ‘거짓’을 행한다. 장사치를 가리키는 ‘상(商)’에는 거짓이란 뜻이 담겨 있다. 그렇기에 신광한은 종에게 장사치를 응대하지 말라고 말하고, 자신은 사립문을 닫고 고요히 침잠했던 것이다.

옛사람들은 동지(冬至)를 양의 기운이 처음 태동하고 만물이 비로소 잉태하는 때로 여겼다. 동지는 태양이

<시리우스와 오리온 벨트>

(3)

http://www.ksiec.or.kr

42

공업화학 전망, 제25권 제2호, 2022

가장 낮게 뜨는 날이고 밤이 가장 긴 날이다. 밤이 가장 길다는 것은 이날부터 차츰 낮이 길어진다는 의미다.

이른바, “양의 기운이 처음 돌아온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흡사 자정(子正)이 하루의 시작인 것처럼, 동지 는 순환질서의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동지가 한 해의 시작으로 인식됨으로써, 동지와 동짓날 해가 뜨는 방향 또한 적잖은 문화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새로운 열림, 부활, 시작 등의 의미와 상징성을 띠게 되었다.

동짓날을 ‘아세(亞歲)’, 즉 ‘작은 설’이라 부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생명력과 광명, 부활의 날, 설날이 라 여긴 것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날인 동짓날에 붉은색의 팥죽을 먹고 그것을 사방에 뿌리며 사악한 것을 물 리치는 벽사(辟邪) 의식을 행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동지가 태양이 다시 태어나는 날, 새롭게 시작하는 날이 고 보니, 그날 태양이 뜨는 것과 그 방향은 광명 세계의 열림과 열리는 방향을 상징하게 되었다. 백제의 미소 로 알려진 서산 용현리의 마애여래삼존상(磨崖如來三尊像)이 동짓날 해가 뜨는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이나, 첨 성대 방위각이 동지의 일출선(日出線)과 일치하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이것들은 동짓날 뜨는 해처럼 온누리를 빛으로 가득 채울 구세주의 출현을 염원한 상징적 표현이다. 마애여래삼존상을 만든 이는 광명 세상을 위해 미 륵불이 세상에 내려오는 형상을 아로새겼고, 첨성대를 세운 선덕여왕은 첨성대의 방위각과 자신의 무덤, 사천 왕사를 동지 일출선과 일치시킴으로써 세상의 구원자로 자임(自任)했다. 물론 동지가 갖는 시작으로서의 의미 가 우리 문화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성탄절 역시 동지 축제의 일종이다. 크리스마스는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이자 농경신의 축일(祝日)로 4세기 경 로마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일과 결합한 데서 기원하였다.

동지 축제가 그리스도의 탄생 축하와 결합하여 바뀐 것이다.

<마애여래삼존상>

<첨성대 평면도>

세상의 모든 것들은 연속적으로 존재한다. 사람들은 연속하여 존재하는 세상 모든 것에 기준을 설정하고, 그 시작을 정하여 의미를 부여한다. 혼돈된 세계에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이다. 이처럼 과 거 동지(冬至)는 시간이 처음 열린 날이다. 그런 날의 태양이 뜨는 방향으로 축조된 첨성대나 마애여래삼존상 을 마주했을 때, 처음 열린 시간을 맞아 광명 세상이 오기를 고대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보기를 권한다. 그러면 3월이 올 때마다, 필자가 겪는 설렘과 기대 이상의 감동이 밀려올 것이라 확신한다.

참조

관련 문서

1) Global coordinate origin은 Centerline과 LCF, 그리고 수선면이 만나는 점에 위치한다... 미소 자세와 미소 힘,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2018년 새롭게 시작하는 전주대학교 부동산대학원은 부동산과 국토정보 분야의 이론 과 실무를 균형 있게 학습하고 연구함으로써 각

이것은 다시 말해 불가지론(agnosticism)입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세계의 어느 다른 종교나 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하고도 독특한 세계관입니다.. 나아가

고객중심의 열린 기업을 만들어가기 위한 수단 고객중심의 열린 기업을 만들어가기 위한 수단. 기존의 관념을 탈피하고

밀림지대(열대습윤기후대) Tropical climate... 북극권

그 리고 세계의 여러 언어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또는 그렇 다고 여기는) 법칙을 언어보편성(linguistic universals)이 라고 한다. 세계의 여러 언어를 대조함으로써

임의의 모양을 가진 물체와 입자 사이에 작용하는 만유인력을 구하려 면 물체의 미소 질량이 입자에 작용하는 미소 힘을 구한 후 이들의 합

곧 태양이 표준 자오 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