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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비올라(Bill Viola)의 비디오 작품에 대한 현상학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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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적 고찰

: 통합적 환경과 실존적 주제

안 선 미*

1)

Ⅰ. 머릿말

Ⅱ. 현상학으로 이해되는 비디오 매체 1. 현상학의 시간성과 신체 지각

2. 비디오의 시간 매체성과 지각적 체험

Ⅲ. 비올라 작품의 현상학적 특징

1. 후설의 ‘내적 시간의식’과 비올라의 시간조작 2. 하이데거의 ‘시간의 통합’과 비올라의 실존적 주제 3. 메를로 퐁티의 ‘감각의 통합’과 비올라의 설치 공간

Ⅳ. 결론

*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 졸업

* DOI http://dx.doi.org/10.17527/JASA.49.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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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릿말

비디오는 다른 매체에 비해서 뒤늦게 미술에 도입되어 불과 60년이 채 안되 는 역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미술에서의 영향력은 점차 증대하는 추세 이다. 비디오의 다양한 기능으로 작품 제작이 가능해지면서, 현대 사회에서 이슈 가 되고 있는 주체의 문제, 신체의 문제, 거대 소비 시장의 문제들을 비디오 작품 들이 드러내거나 또는 대변하기도 한다. 오늘날 비디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는 것은, 이 매체가 인간의 인식에 어떤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 한다. 이러한 영향력에 상응하여 비디오 아트에 관한 연구도 계속 증가하는 추세 이나, 다른 매체에 비해서 비디오 아트 분야는 아직도 미개척된 영역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비디오는 그 성격상 시간을 매개로 하는 매체이면서 또한 시각적 청각적 결 과물을 낳기 때문에, 작가와 관객 모두에게 시간적이고 신체 지각적인 영향을 주 게 된다. 따라서 초기 비디오 작가들은 비디오의 여러 가지 가능성들, 예를 들어 세계화의 수단 또는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스펙터클 등의 가능성들 가운데 특히 이 매체의 시간 조작 가능성과 신체 체험성에 주목하였다. 빌 비올라도 그러한 작가 중의 하나이다.

빌 비올라는 오늘날 상당히 주목 받는 비디오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작가 활동이 40년이 넘어가는 이 중견 작가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보여 주고 있다.1) 초기의 단순한 작업에서 벗어나서, 최근에는 오페라의 요소를 도입하 는 작품이나 영화 촬영장을 방불케 하는 현지 세트장을 마련하여 제작하는 작품 들도 선보이고 있다. 그의 영향력과 명성에 맞추어 그의 작품에 관한 연구도 증 가하는 추세에 있다.2) 비디오 아트 전반을 메를로 퐁티의 신체적 감각으로 설명

1) 빌 비올라는 1951년 뉴욕의 퀸즈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자랐다. 1973년 시라큐스 대학 에서 순수 예술 분야 학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시라큐스 대학의 교수인 이 작가는, 오 늘날 현대미술을 주도하는 비중 있는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2) 기존의 비올라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으로는, 국내에서는 비올라 작품에서 드러나는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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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연구들이 등장하고 있으나, 비올라를 현상학의 주요개념들과 연관시키는 연 구들은 아직 미미하다. 연구자는 비올라의 작품이 관객들에게 현상학적 체험을 유발한다고 생각하여, 그의 작품들을 현상학의 개념들과 접목시켜 읽고자 한다.

본 연구는 비올라의 작품을 살펴보기 앞서, 우선 현상학의 주요한 특징과 비디오 매체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고찰은 비디오 매체가 어떻게 현 상학으로 설명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필수적인 과정이 되리라 생각한다. 현상학을 주창한 후설과 그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하이데거의 현상학은, 존재의 중요한 토 대를 시간성으로 본다. 따라서 연구자는 현상학을 해명하려는 시도는 시간에 관 한 탐구로부터 출발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은 시간성과 신체를 연계시키면서 현상학의 중심점을 신체에 의한 지각으로 옮기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시간성과 더불어 신체에 의한 지각의 측면에서 현상학을 고찰하고자 한다.

비디오 작품이 현상학으로 설명될 수 있기 위해서는, 비디오의 특성이 현상 학과 어떠한 지점에서 맞닿아있는가를 밝히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따 라서 Ⅱ장의 2절에서는 비디오 매체의 특성인 시간성과 신체적 체험을 살펴보려 한다. 비디오가 사진, 영화와 차별성을 갖는 지점을 살펴보면서, 이 매체가 어떤 점에서 시간성을 자신의 특징으로 삼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또한 비디오의 신 체 체험적 특성을 작가와 관객의 입장으로 구분해서 구체적인 비디오 작품들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Ⅲ장에서 비올라의 구체적인 작품들과 현상학의 주요 개념들을 연계시켜 설

체의 상징적 의미를 다룬 박사논문(윤보숙, 빌 비올라와 게리 힐에 있어서 인간 이미 지의 표현 : 신체이미지의 파편화와 서사를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2006)이 있 고, 국외 박사 논문으로는 게리 힐과 비올라의 비디오 작품에서 관객의 수동적 참여를 문제 삼은 스탠포드 대학교의 박사학위 논문(Merrill Brooke Falkenberg, “Circuits of exchange: The Myth of Interactivity in Video Art”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h.D), 2002])이 있다. 이들 논문들은 비올라의 작품을 현상학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전자는 신체의 표상 문제, 후자는 관객의 허구적인 참여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춘 연구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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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하고자 한다. 비올라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동작의 정지, 클로즈 업, 슬로모 션 등의 시간 조작 작업은 관객의 내적인 의식에 영향을 주게 되는데, 이러한 지 점을 후설의 ‘내적 시간 의식’ 개념으로 설명하려 한다. 또한 스크린을 시제에 상 관없이 나란히 병치시키거나 또는 시간을 역행시키는 비올라의 작업은 하이데거 의 ‘탈자’에 의한 ‘시간 통합’과 접목시키고자 한다. 주제의 측면에서 비올라는 죽 음과 고통에 대해 집착을 보이고 있는데, 종교나 동양 사상에 대한 작가의 심취 라는 접근보다는 현상학의 존재론적 해명인 실존성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마지막 으로 비올라의 설치공간은 시각, 청각, 촉각적 요소들과 심지어 공감적 요소들이 관객을 자극하여 설치공간과 일체감을 느끼게 만드는 특징이 있는데, 이러한 점 을 메를로 퐁티의 ‘감각의 통합’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특히 이 지점에서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개념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Ⅱ. 현상학으로 이해되는 비디오 매체

1. 현상학의 시간성과 신체 지각

후설에게는 내적 흐름으로서, 하이데거에게는 존재의 기반으로서, 메를로 퐁 티에게는 신체와 세계를 통합시키는 매개로서, 시간의 개념이 각각 다르게 정의 된다 하더라도, 현상학이 의미하는 시간은 존재의 내부에서 형성된다는 공통성을 갖는다. 존재 외부의 물리적 세계에서 객관적으로 측정되는 시간이 아닌, 존재와 더불어 얽힌 시간의 구조로 이해되는 시간성으로서의 현상학적 시간 개념을 고찰 해 보겠다.

후설의 문제의식은, 한편으로는 자연에 대한 물질화와 수량화가 인간의 사 고까지 침범하는 상황에 대해,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주관적 의식과 경험에 대 한 철학적 방관에 대한 우려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후설의 작업은 이중으로 진 행되는데, 인간의 내면적 영역을 수치화하려는 근대적 방법론에 저항하였고,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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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는 분석 철학을 비판하면서 인간의 주관적 경험을 탐구하고자 하였다. 갈릴 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수학의 방법론을 자연세계의 이해에 도입한 이래로, 근대 학문들은 인간 탐구의 영역에까지도 실증적인 방법을 사용 해왔다. 심지어 심리학의 영역에도 실험적 방식이 도입되었다.3) 수학적 개념으로 세계를 모두 해명할 수 있다는 신념이, 과연 인간 삶 전체를 해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 후설이 품은 의문이었다. 즉 생활 세계와 객관적 세계는 그 토대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접근 방법이 필요한 것인데, 근대 과학의 발달은 우리의 생활 세계 에까지 객관적이며 실증적인 방식을 강요한다는 것이 후설이 비판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후설에게 시간이 중요한 이유는, 의식이 대상을 향해 ‘지향성’을 갖고 대상 의 본원성을 지각할 때 직관적인 내적 체험은 존재 내의 시간의 흐름과 시간의 지평에서 통일되기 때문이다. 후설에 따르면, 주체 안에 들어온 모든 직관적 체험 은 내적 시간의 흐름 위에서 통일된다는 것이다. 의식의 흐름은 방금 전에 체험 한 것을 현재 지각하는 ‘과거지향(Retention)’, 생생한 인식인 ‘현재(Gegenwart)’, 그리고 미래를 예상하는 ‘미래지향(Protention)’으로 이어지는 통일체를 이룬다고 그는 주장한다.4) 그는 멜로디를 예로 들면서 설명하는데, 개별 음들은 전체적인 멜로디 안에서 존속된다고 설명한다. 지나간 음이라 할지라도 멜로디의 마지막 음이 끝날 때까지, 특정한 음들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계속 지속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과거도 잠시 동안 과거지향 속에서 의식되다가 계속 변양을 겪고 또 다시 새로운 의식 안에서 지속되는 흐름으로 남게 되는데, 멜로디가 끝날 때까지 개개 의 음들은 전체적인 선율 안에서 의미를 가지듯이 개개의 지각은 시간의 지평에 서 의식된다고 후설은 주장한다. 즉, 후설의 시간성은 내적인 의식의 흐름이라고 3) 독일의 생리학자이자 철학자, 심리학자인 빌헬름 막시말리안 분트(Wilhelm Maximilian Wundt, 1832-1920)가 1879년에 모교인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에 심리학 실험실을 개설 하면서 실험심리학(experimental psychology)은 시작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심리를 자 극과 반응 과정으로 관찰하면서, 처리 속도나 감각 및 지각에 대한 실험을 수행하는 것이다.

4) 에드문트 후설, 시간의식, 이종훈 옮김 (한길사, 1996), p.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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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다.5)

현상학의 출발이 후설에서 시작되나, 시간성의 개념은 하이데거에 의해 본 격적으로 다루어진다. 하이데거의 시간성은 ‘마음씀(Sorge, care)’의 구조로 볼 수 있다. 우리 존재는 과거의 모든 시간들을 무차별적으로 기억하진 않는다는 것인 데, 과거의 시간을 현재의 입장에서 소환할 때 그 순간은 존재에게 의미 있는 시 간으로 살아온다는 것이다. ‘마음씀’ 개념은 존재의 의식적 태도를 지칭하는 것으 로, 이는 실존성(선구), 피투성(이미 존재), 퇴락(현실적 조건에의 몰입)이라는 세 가지 계기를 갖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세 가지 계기가 “시간성에 근거하여 하나의 전체성을 갖게 된다”고 언급한다.6) 따라서 이러한 시간의 구조가 하나로 통합될 때, 존재는 자신의 근거를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시간성은 현존재의 존재 기반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메를로 퐁티에 이르면 시간의 의미는 분명하게 정의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 다. 그 이유는 시간의 정립이 오히려 시간의 현상을 파괴한다고 메를로 퐁티는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는 대상 속에도 그리고 인간의 의식 속에도 시간은 존재하 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그는 시간이란 대상과 나와의 관계 양식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은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존재 속에서 “태동되는 상태의 시간, 나타나고 있는 중의 시간”으로 설명되어야 하며 우리 존재의 차원에서 해명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7) 즉, 시간은 우리 내부에서 현상되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과거는 정의되는 시간이 아니라 나의 새로워지고 있는 지각에 의해 밀려간 흐름 으로서의 과거이고, 또한 흐름으로서의 시간은 주체와 절대 분리될 수 없다는 것 이 메를로 퐁티의 시간 개념이다. 따라서 메를로 퐁티에 이르면, 현상학의 중심점 은 시간성에서 신체의 체험성으로 옮겨진다. 메를로 퐁티는 시간 자체의 문제보 5) 시간을 흐름으로서 정의했다는 점에서는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과 후설은 공통점이 있으나, 베르그송의 ‘순수 지속(durée pure)’은 존재의 내부와 외부에 서 모두 객관적으로 지속되는 시간성인 반면, 후설의 시간성은 존재의 의식상에서 진 행되는 성격을 지닌다.

6) 이선일,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해제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3), p. 245.

7) 메를로 퐁티,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2), p.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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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시간의 흐름에서 매순간 새로워지는 존재의 지각이 더욱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감각에 의해 외부에서 들어오는 현상이 자신의 신체 속에서 통합 되어 지각작용이 일어나고, 이러한 지각적 인식은 시간에 의해 매순간 새로워진 다고 보았다. 따라서 메를로 퐁티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신체에 의해 지 각되는 체험이었다.

시간 자체를 매체로 삼는 비디오의 등장은 현대미술과 현상학을 본격적으로 접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되는데, 다음 절에서는 비디오가 지니는 시간적 특성과 신체 체험적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2. 비디오의 시간 매체성과 지각적 체험

비디오는 전자(電子) 신호만으로 색채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이것은 물 질성을 갖지 않고 따라서 공간적 연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진이 인화지를, 영화가 필름 카트리지를 매개로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과는 다르게 비디오는 이미 지를 창출하는 매개로서 어떠한 물질성도 갖지 않는다. 또한 전자의 송출은 일정 한 형태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불안정한 상태를 띠게 된다. 전자의 흐름이라는 비물질성과 비공간성이 이미지의 불안정성과 가변성을 가져오는데, 비디오의 이 러한 특성이 비디오를 사진 또는 영화와 구별되게 한다. 이러한 특성들은 시간 자체만을 조작하는 매체로서의 비디오를 부각시킨다고 할 수 있다. 1981년에 백 남준(Nam June Paik)은 “비디오는 본질적으로 시간이다”라고 언급했는데, 그 이 유로 그는 장 뤽 고다르(Jean Luc Godard)가 영화에 대해서 말한 초당 24프레임 은 비디오에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8) 다시 말해, 비디오는 프레임 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즉, 비디오는 시간에 따른 전자의 송출에

8) Nam June Paik, “L'Arche de Nam June”, in: Art Press, Vol. 47 (April 1981), pp.

7-9; Christine Ross, “The Temporalities of Video: Extendedness Revisited”, in: Art Journal, Vol. 65, No. 3 (Fall, 2006), pp. 82-99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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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해 이미지와 색채를 만드는 매체이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양차대전 이후의 현대영화, TV, 비디오는 시간 성과 관련된다고 자신의 저서 시네마 Ⅱ, 시간-이미지 Cinéma 2, L'Image-temps(1985)에서 언급했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2차 대전 종전(終戰)이 후 등장한 현대영화에서 주목할 점은, ‘운동-이미지(L'image-mouvement)’에서

‘시간-이미지(L'Image-temps)’로의 전환이라고 주장한다.9) 들뢰즈는 ‘운동-이미 지’가 시간의 간접적 재현인 반면, 시각적 기호와 음향적 기호는 시간의 직접적 현시라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흐름으로서의 시간은 프레임의 연속인 ‘운동-이미 지’로 나타나는 반면, 총체성으로서의 시간은 ‘순수한 상태로 스스로 현전’하기 때 문이라는 것이다.

비디오는 현대 영화의 ‘시간-이미지’에서 시각적 성격마저도 배제해버린 순 수한 시간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들뢰즈는 텔레비전, 비디오, 디지털 이미지들 은 영화의 죽음을 선언했다고 언급하면서, 이러한 새로운 이미지들은 스크린 밖 에도 스크린 안에도 있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여 앞선 이미지의 모 든 지점에서 새로운 이미지가 생겨날 수 있는 지속적인 재조직화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그림과 같은 인간적 형태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대체하는 표나 정보를 기입하는 표면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들 뢰즈는 전자기적 이미지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시각적인 한계에 이르면서, 새로운 심리적 자동기계로 귀착된다고 설명한다.10) 그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비디오의 이 미지는 이제 유기체적인 시각성으로부터 해방된 불투명한 표면을 구성하여 순수 한 시간성만을 남길 여지가 있게 되는 것이다.

린다 벵글리(Lynda Benglis)의 작품 <지금 Now>(1973)은 과거에 촬영된 이미지와 현재 진행되는 이미지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시간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 다고 할 수 있다[도 1]. 벵글리는 커다란 모니터를 배경으로 자신의 옆얼굴을 보 여주는 퍼포먼스를 하는데, 모니터에는 이전에 이미 촬영을 해놓은 그녀의 옆얼

9) 질 들뢰즈, 시네마Ⅱ, 시간-이미지, 이정하 옮김 (시각과 언어, 2005), p. 531.

10) 질 들뢰즈, 시네마Ⅱ, 시간-이미지, pp. 52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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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린다 벵글리, <지금>, 1973

굴이 영사되고 있다. 그 이미지는 좌우가 바뀐 채로 재생되기 때문 에, 현재 그녀의 퍼포먼스와 거울 처럼 공시적으로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Now!)” 또는 “지금 이야?(Is it now?)”라는 작가의 음 성이 퍼포먼스 중에 간헐적으로 들린다. 로잘린드 크라우스 (Rosalind Krauss)는 이 작품이 두

개의 스크린을 동시에 사용하면서, 그리고 작가의 ‘지금’이라는 음성의 출처가 어 느 쪽 이미지에서 온 것인지 구별할 수 없게 만들면서, 시간적 지표에 문제를 제 기한다고 설명한다.11)

한스 벨팅(Hans Belting)은 ‘비디오 아트의 시간성 The Temporality of video Art’(2003)에서, 비디오 아트는 관객에게 시간적 지각을 제공한다고 주장했 는데, 그에 따르면 비디오 작가들은 시간의 조작을 사용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시 간 자체’에 대하여 반성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비디오 는 관객이 자신의 ‘내적 시간’에 침잠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익숙한 일상의 시간 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반영의 시간을 갖도록 촉구한다고 부연한다.

지금까지 비디오의 시간성을 고찰해 보았다면, 지금부터는 비디오가 갖는 두 번째 특징인 신체적 체험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작가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작가의 신체는 카메라와 모니터 사이에 위치하는 독특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비 디오는 촬영되는 카메라와 영사되는 모니터가 하나의 본체에 속해 있어서 이미지 를 모니터에 즉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데, 이 때 작가의 신체는 촬영과 영사 사 이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크라우스는 이러한 상황을 “예술가의 몸은 괄호 묶 음의 시작(카메라)과 끝(모니터) 사이에 놓이게 되는데, 이 때 모니터는 대상의 11) Rosalind Krauss, “Video: The Aesthetics of Narcissism”, in: October, Vol. 1

(Spring, 1976), p.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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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비토 아콘치, <중심들>, 1970

[도 3] 댄 그레이엄 <현재 진행하는 과거>, 1974

이미지를 마치 거울 반영처럼 직접적으로 투사한다”고 설명한다.12) 이러한 그녀 의 설명은 촬영하는 주체로서의 작가의 몸이 동시에, 촬영되는 대상을 영사하는 모니터를 응시하는 몸이 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아콘치의 작품 <중심들 Centers>(1971)은 20분 동안 작가 가 손가락으로 카메라의 중심을 가 리키고 있는데, 이 때 작가는 카메 라에 촬영되는 동시에 모니터를 바 라보는 자기 폐쇄적인 상황에 놓인 다[도 2]. 이 작품은 작가의 신체가 촬영되는 객체인 동시에 바라보는 이중의 입장에 놓여 있는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음으로 관객의 측면에서 비디오의 체험성을 살펴보고자 하는데, 카메라- 모니터 구조와 카메라-프로젝션 구조로 구분해서 전개하려한다. 먼저 카메라-모 니터의 구조에서 관객 역시 실시간 폐쇄 회로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보게 된다.

댄 그레이엄(Dan Graham)은 <현재 진행하는 과거 Present Continuous Past>(1974)에서 시간차에 의해 과거 이미지를 계속 보게 되는 관객의 체험을 실 험했다[도 3]. 작가는 전시장 한쪽 벽에 카메라와 모니터를 설치하고 그 정면과 옆면의 벽에 거울을 배 치한 뒤, 촬영 시간과 모니터 영사 시간 사이에 8초의 시간지연 (time-delay)을 설정하였다. 따라서 카메라에 찍힌 관객의 모습은 8초 뒤에 새롭게 바뀌는데, 그 이미지 12) Rosalind Krauss, “Video: The Aesthetics of Narcissism”, p.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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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앤소니 맥콜, <원뿔을 그리는 선>, 1973

는 이미 8초전의 자신의 모습이고 그 이미지 속에서 거울에 반사된 모니터에는 16초 전의 자신의 이미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관객은 8초, 16초, 24초의 간격으로 과거에 찍한 자신의 모습을 반향적 방식에 의해서 보게 된다. 즉 관객 은 과거화되는 자신의 현재 이미지를 보면서 자신 속으로 회귀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시간차에 의한 비디오 작업은 관객의 지각 작용에 영향을 주는 시도라고 언급하고 있다.13)

모니터를 대체한 비디오 프로젝션에서도 관객의 신체 체험적 상황은 여전히 발생한다. 프로젝션 스크린은 관람자에게 새로운 종류의 공간성과 신체적, 심리적 체험을 유발시킨다고 할 수 있다. 리즈 코츠(Liz Kotz)는 비디오 프로젝션에 관한 자신의 연구에서 “(프로젝션은) 2차원 평면과 3차원 공간 사이에 일정한 수의 대 응점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투영은 합리적인 조응일 수도 있지 만, 왜곡이나 착각을 일으키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라고 언급한다.14)

앤소니 맥콜(Anthony McCall)의 작품 <원뿔을 그리는 선 Line Describing a Cone>(1973)은 30분 동안 빛이 만든 호(arc)가 점점 원으로 자라나고 완전한 빛의 원뿔이 전시장에 그려지는데, 관객들은 그 빛이 마치 고형의 물질인 양 만 져보고 살펴보는 체험을 한다[도

4]. 그의 프로젝션 작품들은 관객에 게 환영적 체험을 발생시킨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비디오는 현대영 화의 시각적 ‘시간-이미지’에서 시 각적인 부분을 배제하면서 시간성

13) Dan Graham, “Essay on Video, Architecture and Television”, in: End Moments (New York : self-published, 1969), p. 69.

14) 리즈 코츠, 비디오 프로젝션: 스크린사이의 공간 , 1985년 이후의 현대미술 이론 Theory in Contemporary Art since 1985, 조야 코커, 사이먼 릉 편집, 서지원 역 (두산동아, 2010), p.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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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을 남기는 순수한 시간 매체로 볼 수 있고, 또한 작가와 관객 모두에게 있어서 신체적 체험을 발생시키는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연구자는 이러한 두 가 지 성격이 현상학의 시간성과 신체 지각으로 비디오 아트를 설명할 수 있는 지점 이라고 생각한다.

Ⅲ. 비올라 작품의 현상학적 특징

1. 후설의 ‘내적 시간의식’과 비올라의 시간조작

비올라의 작품에서는 시간이 정지되기도 하고 느리게 가기도 한다. 작가는 이러한 시간 조작 작업을 자주 시도하는데, 존재의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흘러가 는 시간이 아닌 존재에 의해 인지되는 시간을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수직선상에 일정한 간격으로 표시되는 수치상의 시간이 아니라, 비올라의 시간성은 작가가 느끼는 또는 관객에게 전달하고자하는 주관적인 시간 으로 생각된다.

후설 또한 일정한 간격과 속도로 진행되는 객관적인 시간 개념에 반대했다.

후설에게 시간은 자연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시간의 통각 (Apperzeption)이 바로 시간성이다. 즉, 의식 내적의 시간형식 안에서 체험되는 시 간 자체가 시간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화된 지각은 대상이 변화하거나 또 는 불연속적으로 출현한다하더라도, 내적 시간 의식 속에서 새롭게 통일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지각파악은 비록 그것이 사념된 것이 아니라 할지 라도, 그 자체는 현재성(Gegenwärtigkeit)의 통일성 속에 현존하고 있는 내재적- 시간적으로 구성된 어떤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15) 따라서 후설의 시간성은 통일적인 내적 의식(inneres Bewußtsein)으로, 이것은 자신의 내재적 지속을 갖는 15) 에드문트 후설, 시간의식, 이종훈 역 (한길사, 1996), p.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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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5] 빌 비올라, <반사하는 수영장>, 1977-1979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비올라는 순간적으로 동작을 정지시키거나 시간을 단축시키는 조작을 사용 하는데, 이러한 시도는 작가가 중요한 순간이라고 인지한 지점을 강조하려는 것 으로 생각된다. 즉, 작가는 내적으로 의식되는 시간을 관객에게 표현하려고 한다.

그의 작품 <반사하는 수영장 The Reflecting Pool>(1977-1979)은 수 영장 한쪽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 고 그 건너편에서 비올라가 나무들 사이에서 걸어 나와 수영장 안으로 다이빙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도 5].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다이빙하는 작가의 몸은 웅크린 채

공중에 정지되어 있지만 주변 다른 사물들은 계속 움직인다는 점이다. 정지한 작 가의 몸과 움직이는 사물들의 대비는, 이들이 마치 다른 시간 영역에 존재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이 작품은 일정한 간격으로 진행되는 객관적 시간 개념에 저항하는 후설의

‘내적 의식으로서의 시간’을 미술작품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1989년 비 올라는 “나의 작품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는 미술관 전시장이나 스크린이 걸려있는 방이 아니다. 심지어는 비디오 자체의 스크린도 아니다. 나의 작품을 보 고 있는 관객의 마음속이 가장 중요한 곳이다. […] 필연적으로 비디오 프레임은 개인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러한 역설이 비디오 매체에 인간 의식의 흐름 이라는 생생한 역동적인 성질을 부여 한다”라고 언급했다.16)

시간의 주관적 체험은 오브제의 정지뿐만 아니라, 카메라의 클로즈업 기법 을 사용한 작업에서도 시도되고 있다. 카메라를 대상 쪽으로 급속히 클로즈업하 거나 갑자기 멀어지는 방식은 시간이 단축되는 느낌을 주게 된다. 즉, 급격한 달 16) Bill Viola, “Statement 1989”, in: Reasons for Knocking at an Empty House

writings 1973-1994 (Massachusetts: The MIT, 1987), p.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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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인(dolly in)과 달리 아웃(dolly out)이 주는 효과는, 관객이 대상으로 향해가면 서 느끼는 점진적인 시간의 흐름을 생략하여 일상적인 시간의 개념을 흔들어 놓 는다. 작가는 <이 사이의 공간 The Space Between the Teeth>(1976)에서 이러 한 기법을 사용하는데, 이 작품은 화면에 등장한 작가의 비명 소리에 따라 카메 라의 급격한 이동이 이루어진다. 카메라는 갑자기 반대편 복도 끝으로 급히 후퇴 하고, 다시 비올라 쪽으로 급속히 클로즈 업하여 그의 얼굴과 그의 입속, 마지막 으로 세 개의 이를 보여주고는, 갑자기 다시 복도 쪽으로 후퇴하기를 반복한다.

관객은 마치 순간이동을 해서 복도 끝에서 비올라의 입 속까지 갔다가 다시 복도 쪽으로 돌아온 느낌을 받는다. 이 작품에서 고요한 정지와 갑작스런 순간 이동의 효과는 극대화되고 있다.

<이 사이의 공간>의 구조에 대해 작가는 비명을 지르는 한 사람의 ‘심리적 인 역동성(psychological dynamics)’에 기초하였다고 설명하는데, 이처럼 클로즈업 기법을 통해 비올라가 의도하는 효과는 주관적 시간성으로 보인다.17) 작가의 주 요 관심은 인지되는 시간, 즉 ‘내적 시간 의식’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비올라의 작품은 관객의 의식적 집중을 요구하는데 이것은 작가의 시간 조작 작업으로 가 능하다”는 런던 대학교의 크리스 타운센드(Chris Townsend) 교수의 언급은 동일 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18)

비올라의 시간조작은 1995년 이후에는 슬로모션을 사용하면서 더욱 정교해 진다. 급속한 카메라의 초점 이동이 주는 충격적인 체험과는 달리, 슬로모션 방식 은 느리게 움직이는 인물을 바라보면서 관객에게 유사한 감정의 체험을 유도한다.

이 방식은 제46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한 작품 <인사 The Greeting>(1995)에 서 선보인다[도 6]. <인사>를 통해 비올라가 표현하려는 것은 세 여성 사이의 미 묘한 감정, 즉 세 여성의 만남에서 포착되는 소외감이었다. 중앙의 젊은 여성은

17) Bill Viola, “The Space Between the Teeth 1976’”, in: Reasons for Knocking at an Empty House writings 1973-1994 (Massachusetts: The MIT Press, 1987), p. 51.

18) Chris Townsend, “Call Me Old-fashioned, But…”, in: The Art of Bill Viola (London: Thames & Hudson, 2004), p.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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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6] 빌 비올라, <인사>, 1995

포옹하는 두 여성 사이에서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자신이 소외되는 상황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중앙에 위치한 여성의 얼굴 표정에 순간적으로 스치는 소외감과 어색함 은 정상적인 영사 속도로는 관객들이 놓치기 쉽지 만, 느린 화면 속에서는 훨씬 쉽게 알아채게 된다.

느린 화면은 영화나 스포츠 중계 등에서는 익숙한 방식이지만, 인간의 얼굴을 관찰하거나 감 정을 전달하기에는 낯선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시간을 늘려버리는 낯선 방식이 오히려 전

시장의 관객에게는 감정을 숙고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 온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슬로모션에 의한 감정의 표현도 역시 후설의 ‘내적 의식으로서 의 시간’에 의해 설명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정리하면, 화면의 정지, 클로즈업, 슬로모션을 사용한 비올라의 시간 조작은 관객들로 하여금 더 깊은 공감을 느끼고, 배우의 감정을 관객의 내면으로 가져가 는 체험을 하게 한다. 즉 관객이 작품과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체험을 하는 ‘내적 지각’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후설에게 있어서의 시간성은 내적 지각 에 의해 체험되고 내면적으로 통일되는 시간의식이었다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비올라의 시간조작 작업은 관객에게 내적 체험을 일으키는 현상학적 결과를 가져 온다고 볼 수 있다.

2. 하이데거의 ‘시간 통합’과 비올라의 실존적 주제

비올라는 의도적으로 시간을 병치시키거나 도치시키는 방식을 사용한다. 스 크린을 병치시키는 작품 안에서, 사건들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배치 된다. 또는 시간의 흐름을 도치시키는 작품에서는 미래, 현재, 과거 순서로 보여준 다. 비올라는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여 현존재 안에서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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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될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시간성을 구현시켰다고 할 수 있다.

현상학의 출발이 후설에서 시작되나, 시간성이라는 개념은 하이데거에 의해 본격적으로 다루어진다. 하이데거의 시간성은 후설이 제시한 내적 흐름으로서의 시간과는 다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시간적 구조는 ‘기존(Gewesenheit)’, ‘현재 (Gegenwart)’, ‘장래(Zukunft)’의 세 가지 양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시간성 은 ‘탈자(Ekstatikon)’에 의해서 현상된다고 한다. ‘탈자’란 자신을 벗어난다는 의 미인데, 벗어난다는 것은 자신을 잊는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향해 탈출한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방향성을 갖는 ‘탈자’에 의해 존재는 시간의 지평을 얻게 되는 것이고, 이 세 개의 지평이 펼쳐진 것이 세계이다. 따라서 세계도 시간 성에 기반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개략이라고 할 수 있다.

‘탈자’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탈자’에 의해 시간의 세 가지 지평이 통합되고 이것이 존재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나간 ‘탈자’는 근원적 시간인 ‘장래’를 직면하여 ‘이해’하고, ‘기존’의 자기에게로 복귀하면서 ‘현재’에서 시간의 통합이 이 루어진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기존하면서-현전화하는 장래’라는 통일적 현상을 시간성이라고 부른다.19)

[도 7] 빌 비올라, <낭트 삼면작>, 1992

19)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소광희 옮김 (경문사, 1998), p. 462; 이선일, 하이데 거 존재와 시간 해제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3), p.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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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라의 작품 <낭트 삼면작 Nantes Triptych>(1992)은 이러한 ‘기존’, ‘현 전’, ‘장래’의 시간적 지평을 보여준다[도 7]. 이 작품은 중세 제단화의 형식을 빌 어서 세 개의 스크린을 나란히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왼쪽의 스크린에 선 지금 막 출산하려는 산모가 보이고, 오른쪽 스크린에는 병상에 누워 호스를 목에 끼운 한 노파가 보인다. 이 작품은 과거, 현재, 미래를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시제를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또한 작가는 특히 가운데 스 크린을 흑백으로 처리하면서 과거 또는 미래와 차별화된 의미를 현재에 부여하고 있는데, 이 점은 현존재 내에서 통합되는 하이데거의 시간성과 연계시킬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시간인식은, 사건들이 연달아 배열되는 누적되는 시 간의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미래 또는 과거와의 연계 속에서 현존재가 구성되는 시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작가와 관객의 현재 의식 속에서 미래와의 연계와 과거의 소환으로 통합되는 시간성이고, 하이데거의 ‘탈자’ 개념에 의한 ‘시 간 통합’과 접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짤즈부르그 대학의 오토 노이마이어 (Otto Neumaier) 교수는 이 작품은 삶의 통합을 보여준다고 언급한 바 있다.20) 노이마이어는 만약 관객이 이 작품을 충분히 느끼고 싶다면, 존재의 시간성과 생 의 순환을 인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한다고 조언하는데, 이러한 언급은 하이데 거의 주장과 상당부분 일치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이데거의 시간의 지평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장래’가 ‘기존’이나 ‘현재’

보다 선행한다는 점인데, 이 구조는 사건의 발생 시점이 선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의미상 선행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는 ‘탈자’하여 ‘장래’를 미리 이해하고, 다시 ‘현재’로 복귀해야만 ‘시간의 통합’이 가능하고, 이러한 시간성은 존재의 기반 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의 기반을 갖기 위해서, ‘장래’는 언제나 ‘기존’이나

‘현재’보다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장래’는 이미 ‘현전’으로의 복귀를 전제하기 때 문에, ‘현전’ 안에는 ‘장래’를 내포하고 있고, 또한 ‘장래’가 ‘현전’으로 복귀하듯이, 20) Otto Neumaier, “Space, Time, Video, Viola”, in: The Art of Bill Viola (London:

Thames & Hudson, 2004), p.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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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은 이미 복귀한 ‘장래’이다. 따라서 ‘기존’도 ‘장래’를 내포하게 된다.

작품 <태고인 Ancient of Days>(1979-1981)은 하이데거의 선행하는 ‘장래’

라는 시간성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의자와 책상이 완전히 불타버리는 화면으로 시작하여 그 다음에 작가가 등장하여 책상과 의자를 만든다. 이것은 촬영한 순서 를 거꾸로 재생시킨 것인데, 창조의 모습이 아니라 파괴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작품은 계속해서 레이니어 산(Mount Rainier)을 배경으로 한 어린 소년이 나뭇가지들을 모아서 무언가를 만들려는 장면을 등장시킨다. 그러나 이 화면은 결국 일본 번화가에 걸려있는 대형 전광판의 이미지가 되면서, 관객이 ‘현 재’라고 생각하면서 본 화면이 과거에 촬영된 ‘기존’이 되고 만다. <태고인>은 ‘장 래’를 먼저 이해하면서 ‘현전’으로 복귀하고, 이미 복귀한 ‘장래’로서 ‘기존’을 규정 하면서 통합을 이루는 하이데거의 시간의 흐름과 일치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비올라는 1992년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카메라, 모니터, 비디오 레코더보다 더 근본적인 기반, 즉 나의 작품의 실제적인 순수한 자료는 시간이다.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시간의 창조물이다. 그런 데 의식을 통해서 시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이다. 특히 예기 (anticipate)시키고 상기(recall)시키는 능력을 통해서, 자아를 시간 속으로 확장시 키는 능력으로 말이다.”21) 여기서 말하는 ‘예기’를 미래에 자아를 투사시킨다는 의미로 본다면 하이데거의 ‘장래’의 개념이 되고, ‘상기’를 과거 속으로 자아를 투 사시킨다는 의미로 본다면 하이데거의 ‘기존’의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비올라 작품의 주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비올라 작품의 주제 에 대해서, 기존의 연구들은 주로 작가의 종교적 심취나 동양 사상과의 접촉으로 설명하였다.22) 그러나 연구자는 비올라 작품이 인식론적으로는 현상학으로, 주제 21) Bill Viola, “Putting the Whole Back Together: In Conversation with Otto Neumaier and Alexander Pühringer”, in: Reasons for Knocking at an Empty House writings 1973-1994 (Massachusetts: The MIT Press, 1987), p. 278.

22) 삶에 대한 비올라의 접근이 동양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뉴욕현대미술관의 전시 기획자 바바라 런던(Barbara London)에 따르면, 비올라는 중 국의 음/양 사상을 비롯한 동양 사상에 영향을 받았는데 특정 사상을 고수하기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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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어서는 종교적 영향으로 각각 분리해서 설명되는 부분에 의문을 제기한다.

물론 작가 자신이 인간 내면의 문제에 관한 해답을 종교나 동양사상에서 찾으려 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가 그런 방식을 선호했다 는 사실과 그의 작품을 반드시 그런 접근으로만 읽어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 라고 생각한다. 연구자는 현상학적 접근으로 비올라의 주제적 측면을 해명하고자 한다.

비올라는 작품 속에서 탄생, 죽음, 존재와 같은 다소 진지하고 묵직한 주제 들을 다루어 왔다. <죽음 The Passing>(1991), <상승의 호 The Arc of Ascent>(1992), <교차 The Crossing>(1996)들에서 화면 속 인물들은 물에 익사 하거나 불 속을 걷고 또는 거꾸로 끝없이 하강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비올라의 죽음의 표상에 대한 집착을, 연구자는 하이데거의 ‘선구적 결의(Vorlaufende Entschlossenheit)’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연구자는 하이데거의 현상학이 존 재론적 측면에서 실존주의로 귀결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비올라의 죽음의 표상은 실존성의 측면에서 조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이데거의 ‘선구적 결의’는, ‘탈자’에 의해 ‘장래’로 나아간 존재가 ‘죽음’을 바라보면서 결의를 한다는 개념이다. 이러한 과정은 반드시 죽음을 대면해야 가 능한 것인데, 죽음이 인간의 어떤 조건으로도 넘을 수 없는 ‘한계 상황’이기 때문 이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죽음’은, 키에르케고르(Soören Aabye Kierkegaard)의

‘신’과 유사한 상황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에 의하면 죽음을 바라보는 이러한 순간은 우리의 실존이 회복되는 순간이다. 하이데거의 ‘시간의 통합’은 죽 음을 바라보는 실존적 행위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현상 학이 결국 존재론적으로 실존주의와 맞닿는다는 점은, 비올라 작품의 주제를 하

는 여러 사상을 섭렵했다 (Barbara London, Video Space: Eight Installations [exh.

cat.] [New York: The Museum of Modern Art, 1995], p. 26). 존 한하르트는 비올라 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선사상에 심취되어 있었고 그 뒤에도 힌두사상이나 불교 사상 을 연구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 밖에도 비올라는 기독교와 수피(Sufi)파 신비주의도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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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8] 빌 비올라, <정신>, 1994

이데거의 실존주의로 읽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1991년 작가의 어머니의 죽음 이후 제작된 <죽음 The Passing>은 죽음, 실 존적인 막연한 불안과 고통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어두운 공간 속 에 해변을 천진하게 걸어가는 아기, 침대에 누워있는 노인, 어두운 통로의 낡은 예배당 등 의미가 모호한 이미지들로 스크린이 채워진다. 이 작품은 단지 개인사 에 한정된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작가는 가족의 죽음이라는 개인사를 넘어 서 인간조건으로서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고 보인다. 비올라의 주요 전시를 기획 했던 존 한하르트(John G. Hanhardt)는 작가의 관심이 신비주의자들의 텍스트로 부터 죽음의 나레이션으로 옮겨가는 전환점을 이 작품으로 보고 있다.23)

비올라는 죽음의 표상이외의 다른 방식으로도 관객들을 실존적 조건 앞에 노출시킨다. 그의 작품은 모호한 불안감을 유발시키면서, 관객이 실존을 깨닫게 만드는 계기로서 작동한다. 왜냐하면 실존적 불안은 그 정체의 모호성에서 시작 되는데, 비올라는 몽환적인 화면의 흐름으로 관객의 막연한 불안을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작품 <정신 Pneuma>(1994) 에서는 흑백의 스크린에 등불을 쥐고 뛰고 있는 어린아이가 등장한다[도 8].

흐릿하고 흔들리는 이미지들은 아이의 동작에 따라 긴 줄들의 흔적을 남긴다.

이런 이미지들 자체는 전혀 공포스럽지 않고 평범한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표 현방식이 모호하고 희미하게 처리되었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의 설치방식이 독특한데, 스크린은 전시 공간의 중앙이 아닌 한쪽 구석에 설치되어 있다. 한쪽 구석에서 희미하게 부유하는 이미지들을 보면서 관 객의 불안감은 더욱 고조된다.

실존주의에서 언급하는 삶의 불안은 ‘던져졌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고, 하 이데거는 이러한 두려움을 보지 않으려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 23) John G. Hanhardt, Bill Viola (London: Thames & Hudson, 2015), p.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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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두려움을 견지하는 것만이 현존재를 개시(erschließen)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 다고 주장한다.24) 연구자는 비올라의 죽음의 표상이 인간의 조건을 해결하려한다 거나 해답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관객들에게 두려움을 그 냥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작품 <정신> 뿐만 아니라, <한계점 Threshold>,

<작은 죽음들 Tiny Deaths>, <간격 Interval> 등에서도 작가는 모호한 불안감을 일으켜서 예측 불가능한 실존적 과정들(existential processes)을 유발시킨다.

정리하자면 비올라의 주제들은 이렇게 폭로적 측면을 갖는데, 이것은 작가 가 관객들에게 확실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두려움과 불안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의도를 가졌다고 이해될 수 있다. 작가는 자신과 관객을 부조 리한 상황 속에 계속적으로 위치지우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작가가 답변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 상황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작가의 이러한 작 업 방식은 실존주의가 제시하는 해결책, 즉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그것을 이 해하면서 바라보는 것이라는 것과 동일한 맥락에 있다고 생각된다. 비올라의 작 품을 현상학적으로 접근했을 때 죽음에 대한 이미지를 부활이나 환생 보다는, 불 안의 요소로서 또는 인간의 한계로서 관객에게 제시한다는 실존적 의미로 이해되 어야 한다고 연구자는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하이데거의 시간성은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 르는 통합적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적 통합은 우리가 죽음을 바라보는 본래적 존 재이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인식론상의 현상학은 결국 존재론적으 로 실존철학이 된다는 지점을 가지고, 연구자는 비올라의 계속되는 죽음의 표상 을 이러한 맥락으로 고찰했다. ‘죽음에 이르는 존재(Sein zum Tode)’만이 현존재 의 시간의 통합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비올라의 심오한 주제들 또한 현상학 적 설명으로 이해될 수 있다.

24)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소광희 옮김 (경문사, 1998), p.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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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메를로 퐁티의 ‘감각의 통합’과 비올라의 설치 공간

비올라의 설치 공간은 단순히 작품을 전시하는 장소가 아니라 관객의 모든 감각을 자극하는 공간으로 볼 수 있다. 어두운 설치 공간 안에는 거대한 스크린, 스크린 위에서 흔들리는 이미지, 포효하는 굉음 소리, 그리고 이리저리 관객을 움 직이게 만드는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밀폐된 공간 내에서의 시각, 청각, 촉각적 자극들은, 관객이 자신의 신체적 감각에 집중하여 세계를 받아들이 고 이러한 감각들이 통합되어 관객의 지각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존재의 모든 감각들이 외부대상을 향해 개방적으로 열리고, 다시 존재 내부 로 들어와 ‘감각의 통합’이 일어난다는 것이 메를로 퐁티의 ‘지각’ 개념이다. 그에 의하면, 시각, 청각, 촉각 등의 감각은 몸의 내부에서 각각 다른 감각의 소여를 갖 고 있는데, 역설적으로 이 감각들은 몸의 내부에서만 통합될 수 있다. 즉 감각의 통합은 신체 내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존재가 자신의 감각을 세 계 전체를 향해서 개방적으로 열어 놓을 때 감각의 통합, 즉 지각이 신체 내부에 서 일어난다는 것이다.25) 감각들이 대상에 개별적으로 대응할 때가 아니라, 감각 들이 대상을 향해 전체적으로 그리고 전면적으로 대응하고 다시 고유한 신체의 종합적 운동 가운데 감각은 통합되는 것이다.

1983년부터 비올라는 외부와 독립된 설치 공간을 마련하여 관객의 시각, 청 각, 촉각을 자극하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 공간은 관객의 모든 자극을 동원시키 는 효과를 낳게 되었다. 연구자는 관객을 몰입시키고 결국 그들의 감성적인 공감 도 이끌어 내는 비올라의 설치 공간은, ‘감각의 통합’으로 그리고 결국 세계와 통 합된다는 메를로 퐁티의 개념과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작품 <십자가의 성 요한의 방 Room for St. John of the Cross>(1983)은 관객에게 시각, 청각, 촉각적 체험뿐만 아니라 공감적 감성도 제공한다[도 9]. 관 객이 설치 공간에 들어서면, 먼저 상하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는 대형 프로젝션 위의 이미지가 관객의 시각을 자극한다. 이러한 시각적 이미지와 더불어, 공간을 25)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 pp. 35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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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9] 빌 비올라, <십자가의 성 요한의 방>, 1983

가득 메우는 바람소리는 관객의 청각 에 호소한다. 흔들리는 이미지와 포효 하는 소리는, 밀폐된 어두운 공간이라 는 조건에서 더욱 관객을 압도하는 효 과를 준다.

이 작품에는 관객의 촉각을 유도 하는 장치도 있다. 설치 공간의 중앙에 는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방이 있다.

16세기의 십자가의 성 요한이 갇혀있던 감옥을 재현한 이 방에는 창문이 하나 있 다. 관객은 그 작은 창을 통해서 내부의 구조를 들여다 볼 수 있는데, 이 창문은 관객이 허리를 굽혀서 안을 들여다 봐야할 정도의 높이에 있다. 따라서 관객은 허리를 구부려서 방의 내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또한 그 안의 작은 모니터에 나타나는 나뭇잎의 미세한 흔들림을 보기 위해서 관객은 한참을 주시하게 된다.

따라서 관객은 계속 허리를 구부리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데, 이렇게 자연스럽 게 관객의 촉각적 체험을 유도하는 장치에 대해 크리스 타운센드(Chris Townsend) 교수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작은 창은 우리가 실내 공간을 볼 수 있게 해주는데, 우리는 어설프게 허리를 구부려야 했다. […] 그러나 그런 신체 의 불편은 효과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신체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우리의 행 동은 한 개인의 삶의 공간을 살펴볼 뿐만 아니라 그가 겪었던 공간에 대한 경험 을 이해하는 것이다. […] 이러한 설치의 구조는 우리가 더 이상 관객이나 시청자 가 아닌 한명의 참여자가 되는 경험을 압축시켜 놓았다”26)

마지막으로 이 공간은 관객의 감성적 일치감도 요구한다. 이곳에는 성 요한 이 느꼈던 신체적인 불편뿐만 아니라, 그의 정신세계에 대해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장치가 있다. 바깥 공간의 시끄러운 음향 효과와는 대조적으로 이 작은 공

26) Chris Townsend, “In My Secret Life : Self, Space and World in Room for St. John of the Cross, 1983”, in: The Art of Bill Viola, (ed.) Chris Townsend (London:

Thames & Hudson, 2004), p.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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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은 너무도 고요하다. 그러나 주의를 기울이면 관객은 성 요한의 시를 읊고 있 는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여기서 관객은 성 요한의 공간에 대해 자신의 모든 감각을 개방시키고, 다시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와서 성 요한의 정신세계를 공감하게 된다. 즉 관객은 <십자가 성 요한의 방>을 지각하는 것이다. 연구자는 관객의 이러한 체험 과정이, 메를로 퐁티의 ‘감각의 통합’ 그리고 ‘세계의 통합’과 접목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부터는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개념을 알아보고자 하는데, 연구자는 지 각이 현상학과 비디오 작업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지각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메를로 퐁티는 지각은 감각과 다르다고 주 장한다. 지각은 신체에 의해 감각들이 통일될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지각은 감각의 통일성, 대상의 통일성 그리고 신체의 통일성에 의해 비로소 가능한 것이 다. 그의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살펴보면, 감각의 소여는 각각 다른 곳에서 발생 하지만 감각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재미있는 사례를 제 시한다. 메스칼린(mescalin) 중독 환자는 소리에서 색을 본다고 말한다.27) 이러한 감각의 혼선을 단지 병리적인 문제로 처리하고 넘어가버리기엔 석연치 않은 면이 있는데, 왜냐하면 정상인들도 감각을 혼합해서 표현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문학에서 소리의 시각화나 색의 청각화 시도를 자주 보곤 하는데, 이러한 공감각적 표현은 우리 내부에 이와 같은 표현을 가능하게 만드는 소여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감각의 통합에 대해서는 마틴 제이(Martin Jay)도 지지하는 언급을 한다. 그 는 인상주의 회화에서 느껴지는 색채와 진동 사이의 연계, 스테판 말라르메 (Stéphane Mallarmé, 1842-1898)의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공유를 언급한다.28) 27) 이 환자들은 플루트 소리를 들으면 청록색이 보인다고 말하고 메트로놈 소리는 회색 반점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또한 소리의 강도를 높이면 색면의 크기를 크게 묘사한 다. 쇠조각을 창문틀에 내리치고는 틀의 나무색이 더 푸르러졌다고 한다 (메를로-퐁 티, 지각의 현상학, pp. 348-349).

28) Martin Jay, Downcast eyes (Berkeley, Los Angeles, Lond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4), p.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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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에게 이러한 감각들 간의 소통이 없다면 공감각적인 표현은 가능하겠냐는 것이 마틴 제이의 의문점이다. 만약 이러한 감각들 간의 소통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 능한가를 메를로 퐁티는 설명한다. 그는 감각들이 오로지 자기만의 감각의 소여 속에 집중할 때, 우리는 감각의 통일을 얻지 못한다고 말한다. 감각이 대상의 구 조를 향해 열릴 때, 그리고 다시 존재로 돌아와 반성할 때에만 감각들은 유기체 내부에서 통합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감각의 통합’, 즉 ‘지각’ 작용은 존재와 세계 와의 일치감을 느끼는 ‘세계 통합’으로 이끌어지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지각 과 신체가 메를로 퐁티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신체가 중요한 이유는 존재는 신체를 통해서만 세계와 통합을 이룰 수 있기 때문 이고, 이러한 통합의 출발점이 감각의 통합, 즉 지각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이 다.29)

작품 <십자가의 성 요한의 방>은 감각의 통합과 관객의 지각을 깨운다는 점에서, 그리고 설치 공간에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내어 결국 관객이 설치 공간에 공감한다는 점에서 메를로 퐁티의 ‘감각의 통합’과 ‘세계의 통합’으로 설명 가능하 다고 생각한다.

비올라의 <멈추고 싶은 마음 The Stopping Mind>(1991)도 관객을 감각의 통합으로 이끄는 작품이다. 어두운 공간에 설치된 네 개의 큰 스크린들은 천정에 서 아래쪽으로 매달려 있고, 이 스크린 위에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이 작품은 순간적인 충격 효과로 관객을 자극하는데, 갑자기 스크린 위의 모든 이미 지들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하고 엄청난 굉음과 금속을 긁는 소리가 공간을 가 득 메운다. 네 개의 스크린이 동시에 흔들리기 때문에 관객들은 전시 공간 전체 가 흔들리는 느낌을 받는다. 시각적 이미지의 흔들림으로 공간 감각에 혼동을 겪 는 관객들은, 청각적 충격과 촉각적 자극도 받게 된다. 다시 조용해진 설치 공간 에서, 무언가를 읽고 있는 남자의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관객들은 이 속삭이는

29) “나의 신체가 병존 기관들의 총합이 아니라 그 모든 기능들이 세계-존재의 일반적인 운동에서 회복되고 결합되는 협력 작용 체계인 한에서고 나의 신체가 실존이 응결된 모습인 한에서이다.”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 p. 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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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알아듣기 위해 자신의 감각을 또 다시 동원한다. <멈추고 싶은 마음>은 관객의 시각, 청각적 체험을 끌어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설치 작품에도 역시 촉각적인 요소가 기획되어 있다. 작가는 공간의 가 운데에 대형 스피커를 설치하고, 그 주변을 포물선 모양의 음향 반사판으로 둘러 쌌다. 그래서 작가의 속삭이는 독백 소리는 관객이 그 공간의 가운데 서있을 때 에만 들린다. 이 지점을 벗어나면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귀를 기 울이면서 어둠 속에서 그 지점을 찾으려고 애쓰게 된다. 이러한 효과는 작품 <십 자가의 성 요한의 방>에서 작은 방을 들여다보려고 신체를 구부리는 관객의 행 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작품 <십자가의 성 요한의 방>과 <멈추고 싶은 마음>은 관객의 시각, 청각, 촉각적 감각을 모두 자극하며 마침내 관객을 작가가 의도하는 경험, 즉 설치공간과 일체감을 느끼는 단계에 도달하게 만든다. 이것은 메를로 퐁티의 지각에 의한 ‘세계의 통합’ 과 맞닿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올라의 설치 공간 속에서 관객은 자신의 모든 감각들을 개방하여 설치공간과 함께 상호작용하고 관 객의 몸 안에서 다시 통합되어, 설치공간이라는 세계와 통합을 이루게 된다. 따라 서 비올라의 설치 공간은 메를로 퐁티의 ‘감각의 통합’, ‘세계의 통합’ 개념이 발생 하는 공간으로 볼 수 있다.

Ⅳ. 결론

비디오 작품을 현상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시간성과 신체 체험에 있 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성격은 현상학에서도 그리고 비디오 매체에서도 공 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후설은 객관적인 세계인식과는 상반되는 직관주의 적인 현상학을 출발시키고, 시간개념에 있어서도 시간은 ‘내적 의식’이라는 직관주 의적인 의식 흐름으로 설명한다. 후설을 계승한 하이데거는 ‘탈자’를 통한 ‘시간의 통합’을 제시하고, ‘시간의 통합’은 실존적 선구에 의해 ‘존재의 통합’으로 나아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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