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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John Sandler 敎授를 追慕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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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EP Special Issues J Korean Psychoanalytic Study Group Vol. 9, No. 2, page 165~171, 1 9 9 8

Joseph John Sandler 敎授를 追慕하며

趙 斗 英

*

In Memory of Professor Joseph John Sandler

Doo-Young Cho, M.D.,*

1998년 10월 6일 우리의 존경하는 스승 Joseph Sandler교수가 London에서 영면 (永眠)하셨다. 그 일주일 전 미국 San Diego의 Robert Tyson 선생에게서 온‘응급입 원이다. 위태롭다’라는 전갈을 鄭道彦선생에게 들어 李武石회장에게도 알리고 쾌유를 비는 전문을 보내려고 있었는데, 하루 후에 다시‘위급사태는 넘겼다’는 제2신이 날라 들어 안심하고 있던 터 였기에 그 분이 서거(逝去)하였다는 비보(悲報)는 나와 우리 모두에게 충격에 뒤잇는 슬픔을 안겨 주었다. Sandler교수는 그간 한국을 세번이나 방 문하여 그때마다 1주일간 8~10시간의 쎄미나와 증례토론을 주재하여 주었던데다 우 리 한국정신분석학회를 국제사회로 화끈하게 끌어주었던 분이기에 우리에게는 스승이 요, 은인(恩人)이다.

Sandler교수는 1927년 1월 10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Cape Town 유태계 가정에 서 출생하여 1945년 그곳 Cape Town대학에서 심리학과 사회인류학 전공 학사(學 士)학위를 받았다. 그때가 18세였으니 그는 월반(越班)을 거듭한 수재였을 것이다. 그 는 1년만에 다시 심리학 석사학위를 그 대학에서 받고 곧바로 영국 London으로 가서 그곳 정신의학연구소(Instistute of Psychiatry)의 임상심리 박사과정에 들어와 Ma- udsley병원에서 임상수련을 받고 1950년에 심리학박사학위를 받았다. Maudsley병원 이란 지금도 그렇지만 영국과 영연방제국 최고・최대의 정신과병원으로, 여기서 수련 을 끝내고 곧바로 Cairo대학 정신과 주임교수로 발령받은 적이 있을 정도인 만인이 동경하는 정신과 최고의 교육병원이다. 영국 토박이 의사들은 대개 이 병원 전공의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Department of Psychiatry, Seoul National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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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만 근무하지만, 외국과 영연방 출신 의사거나 임상심리수련생이라면 반드시 정신의 학연구소에도 등록하여 심도있는 학과강의를 낮 일부시간에 들어야 하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다. 한편 Sandler교수는 1948년, 영국정신분석연구소에 정식입학하여 4년 뒤 인 1952년 졸업함으로써 영국 정신분석학회 회원이 되었다. 그는 심리학박사가 되자 또 곧바로 London대학교 University College Hospital Medical School에 입학하여 5년 뒤인 1955년에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의학박사학위는 네덜란드 Leiden대학에서 같은 해인 1955년에 받았다. 그는 잠시 London의 Belmont병원(1948~1950)과 Tavistock Clinic(1950~1956)의 임상심리학자로 파트타임 근무를 한 적도 있었다.

그는 29세인 1956년부터 교육분석가가 되어 자기 보다 나이 든 분석연구소 학생들을 교육시켰으니 아마도 영국 정신분석역사상 가장 연소한 교육분석가였을 것이다.

그는 의대를 졸업하자 다시 Hamstead Clinic에서 치료와 연구에 전념하였고, 이때 Anna Freud와 함께 그 유명한 Hamstead Index 연구작성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그 리고 틈틈이 Middlesex의대와 정신의학연구소 외래교수생활, Leiden의대 정신분석담 당 교수생활도 함께 하였다. 그는 1969~1979년의 10년간 국제정신분석학회지 편집 장을 맡아 보았고, 1974년 부터는 국제정신분석리뷰(The International Review of Psychoanalysis)를 창간하여 편집장을 첫 4년간 맡아 키웠다(이 학회지는 주로 미국 과 영국을 제외한 나라 출신의 분석가들이 쓴 논문을 게재하였던 바, 2년전인 1996년 국제정신분석학회지와 합병되는 바람에 없어졌다. 추세는 미국정신분석학회지는 미국 출신 분석가들의 논문을 선호하고, 국제정신분석학회지는 영국출신 분석가들 것을 선 호하였었다).

Sandler교수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가 이스라엘에 가서 정신분석을 전파한 것이다. 그 는 1979년부터 1984년까지 Jerusalem의 Hebrew대학 초대(初代) Sigmund Freud Professor of Psychoanalysis로 가서 그곳에 상주하면서 대학강의와 더불어 분석가 들을 키워 낸 것으로, 이에 힘 입어 이스라엘에 비로서 국제학회가 인정하는 정신분석 학회가 서게 되었다. 한편 Anna Freud 사망 후 1982~1984년의 2년간 그는 London 의 Anna Freud Center(구 Hamstead Clinic)의 소장(所長)직을 맡아 이스라엘과 영 국을 오가는 고달픈 생활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공로 때문에 그는 University College of London의 Freud Memorial Professor of Psychoanalysis로 1984년부터 1992 년까지 8년간 있었다. 이 교수직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임은 역대 교수들을 보면 안 다. 즉 London대학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고, 가장 권위있는 것이 University College이다. 이 Freud추모 석좌는 1974년, 당시‘The Observer’지 편집장이었 던 거부(巨富) Astor가 기증한 돈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역대교수들은 초대에 Harvard대학 Erik Erikson(1974~1975), 2대에 Yale대학 Roy Schafer(1975~

1976), 3대에 Maudsley병원의 William Gillespie, 4대에 Klein학파 대모(代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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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na Segal(1978~1979), 5대에 프랑스의 Andre Green(1979~1980), 6대에 영국분석학회 회장 John Kleuber(1980~1981), 7대에 Paris분석학회 회장인 Janine Chasseguet-Smirgel여사, 8대에 Yale대학의 Albert Solnit(1983~1984)였다. 이 자리를 모두가 1년씩 가졌지만 Sandler교수만이 8년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그는 영 국학회를 건너 뛴 채 곧바로 유럽정신분석학회 부회장(1967~1975)과 회장(1975~

1979)직을 역임하고, 국제분석학회 부회장(1983~1989)을 거쳐 회장(1989~1993) 으로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었다. 그는 또 스웨덴의 Lund대학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 와 미국 Clark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Freud를 미국으로 초빙했던 곳이 바로 Clark대학으로, 정신분석가로서는 Frued, Anna Freud, 그리고 Sandler교 수 세사람만이 학위를 받았다).

이 분에게는 스위스 Geneva출신의 부인과 1남2녀가 있다. 부인 Anna-Marie Sa- ndler여사 역시 저명한 교육분석가로, 남편을 동반하여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그녀 는 현재 유럽분석학회 회장으로 활동하는 맹렬 노부인으로, Piaget교수 문하생으로 있 다가 영국에 건너가 Hamstead Clinic에서 소아분석가 수련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부부가 만났다. 이들의 장녀 역시 분석가가 되었다.

Sandler 교수는 2백여편의 논문과 44권의 책을 공저・편찬하여 내었다. 나는 이 분 의 정확한 학문적 위치는 모른다. 나 보다는 개인적으로 직접 사사(師事)받은 李武石회 장이나 우리 학회‘학술지도위원’(academic supervisors)으로 있는 분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내가 열심히 너댓번 정독한 것은 그의「환자와 분석가」(1973)라는 책과「정 신분석적 심리학 기본참고서」(1973~1978)라는 12편 논문이다. 이것은 우리 학회 예비회원 교육서의 필독서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좀 더 있고, 최근작으로 부부 공저인「Internal Objects Revisited」는 지난 여름 London에 갔을 때 사 왔었다.

이 분의 영어문장은 우선 쉽고 간결하다. 또 쉬운 단어를 주로 썼기 때문에 사전을 뒤적일 수고를 덜 해 준다. 임상경험을 기초로 쉽게 풀이 해주고 증례까지 꼬박 꼬박 집어넣어 주어 다른데서 써 먹기도 좋다.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정통정신분석과 대상 관계이론의 중간에 서서 둘을 비교하고, 조화시키며, 손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을 바꾸면서 드믄 드믄 자기 견해를 집어 넣고 있다고들 한다.

접해서 알 수 있던 것은 이 분이 학문적 여러 제파(諸派)를 함께 모아가는 입장을 취한다는 것 이었다. Klein학파와도 그렇고, 신(新)Freud학파와도 그렇고, 함께 이야 기 해보면 용어가 다를 뿐 거의 같은 내용이라고 여기는 것 같아 그는 두 팔을 벌리고 다닌다. 그는 심지어 분석심리학 관계자들과도 친분을 돈독히 해서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합친‘새롭고도 낡은’ 이론체계가 세워지리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회장’을 이 곳 저곳 많이, 그리고 오래 해보아서 나온 포용력에서만은 아니 것으로 나는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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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Sandler교수를 알게 된 인연은 이렇다. 1985년 7월 말, 吳承煥당시회장, 金二 泳회원과 나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국제정신분석학회 학술대회에 참석하였었다. 독 일 Hambourg시에서 였는데, 5일간 열린 대회 마지막 날 오후에 조직위원회 학술분과 위원장이 한 시간에 걸쳐 이번 대회에서 발표한 논문들의 요점을 정리해주는 시간이 있었다. 이때 등장한 발표자가 바로 Sandler교수였는데, 언제 어떻게 준비하였는지 그 많은 발표자와 지정토론자, 현장 공개토론자들의 발언내용을 쉬운 말로 기막히게 정리 해주는 것이었다. 영・독・불・스페인어인 4개국어를 쓰는 사람들의 말을 몽땅 일목 요연하게 정리한 것이어서 우리 한국인 참석자들은 눈이 둥그래질 수 밖에 없었다. 50 대 후반의 대머리 신사로 꼭 영화「흑기사」에 나왔던 영국배우 죠지 쌘더스 같은 용 모와 말씨로 조용하고 침착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밀고 나가는 그의 구연력에 나는 경 탄을 금할 수 없었다. 물론 흥분과 주눅의 범벅 속에 있던 우리들로서는 감히 그에게 직접 말을 부쳐 볼 처지가 못되었었다.

그 다음해인 1986년, 마침 Normund Wong선생이 서울에 와서 우리 학회원들을 위한 세미나를 주재할 때 Wong선생은 내가 영국 단기연수를 희망한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Sandler교수에게 나를 부탁한다는 편지를 써 보내 주었고, 그래서 그 뒤 나는 Sandler교수 초청으로 London대학 심리학과 정신분석 분과(unit)에 2개월간 가 있 게 되었다. 그때란 1987년 8월과 9월인데, 8월은 Sandler교수가 유럽대륙으로 휴가 를 떠나 만나보지 못하였었다. 그러던 9월 중순, 우리에게 다녀갔던 그곳 여류 교육분 석가 Dinora Pines선생이 자기 집으로 나를‘茶대접’ 초대를 했었는데, 그 자리로 Pines선생이 Sandler교수 부부를 모셔왔던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한국을 도와 줄 분 이라고 귓뜸을 해 주었다. 약 한 시간 동안 Sandler교수는 주로 내 말을 듣는 입장을 취하면서 간간히 질문도 하였었고, 뒤에 나는‘한번 모셨으면 한다’는 말을 하였다. 꼭 사위 후보자가 장인・장모될 사람에게 선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Sandler교수는 1989년 여름의 Roma대회때 국제정신분석학회 새 회장에 취임하였고, 당장 그때 참석한 우리 한국회원들을 위한 특별강좌를 만들어 주었다. 그 때의 강사들이 Otto Kernberg(미국), Egle Moser(영국), Nikolas Treurniet(네덜란 드), Inga Villarreal(콜롬비아) 같은 모두 저명한 교육분석가들로서, 이들은 매일 2시 간씩 따로 점심시간에 우리를 교육시켰었다. 그리고 Tavistock Clinic에 가 있던 河惠 卿회원을 열심히 도와주었다. Sandler교수는 세 번 한국을 방문하였다. 첫번 방문은 1990년 4월 15~24일 9일간 이었다. 쎄미나 외에도 金顯宇당시회장과 柳太烈 섭외 간사가 뛰어 중앙일보와 한국일보에 Sandler 교수 부부 각각의 인터뷰기사가 크게 실 리기도 하였다. 나도 그때 한번 경복궁 관광을 안내한 적이 있었는데, 조선조 관복을 빌려 입고 크게 웃으면서 사진찍던 그 분 모습이 생각난다. 경회루를 거닐면서는‘이것 과 중앙청 르네상스식 석조건물과의 조화가 참으로 그럴 듯 하다’면서‘언제 한번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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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여기서 국제정신분석학회를 열자’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을 하기도 하였다(그런 날이 과연 내 생전에 올까?). 이 첫방문에서 우리에게 좋은 인상을 받은 그는 뒤에 柳 太烈회원을 적극 추천해 미국 정신분석연구소 입학 길을 터 주는데 큰 몫을 들었다.

두번째 방문은 1992년 8월 27일부터 9월 2일 까지 였는데, 이때는 李武石현회장 부부와 내가 교수 부부를 안내해 1박 2일로 설악산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권금성 산 장에서 잠깐 둘만이 앉아있던 순간이 있었는데, 이때 그 분이 불쑥“혹 실례가 아니라 면 당신에 관한 분석 하나 해주어도 되겠오? 당신이 며칠전 학회 공개강연때 老의사 를 소개하며 잠깐 목이 막혀 머뭇거렸는데, 나는 왜 그런지 아오. 얼마전 당신은 왜 내 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지 않소 … (생략) … 바로 그 감정이요”라고 말하면서 쑥스 러운 듯 내 눈치를 살폈다. 공짜 분석도 때로는 이렇게 천금을 주고도 못 살 정도로 가 슴속 핵심을 찌르는 것 이었다. 덕분에 나는 인생의 한 함정에서 기어 나올 수 있었다.

그의 세번째 한국방문은 1996년 9월 초순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쎄미나 외에 따로 만날 시간이 없었고, 李憙당시회장이 주로 수고하였었다. 다만 공항까지 전송나가는 자리에 동승하였었는데 그때 유달리‘초자아’에 관한 말을 많이 해주었다. 내게는 짚 이는 것이 있었다.

한국정신분석학회가 이제까지 가장 감명깊었던 날은 아마도 1991년 8월 1일일 것 이다. 그날, 국제정신분석학회 이사회는 세계도처의 14개 신참연구회들 가운데 일차 로 Moscow그룹과 Korea그룹을 공인‘객원학회’(guest study group)후보로 뽑은 후 결심(結審)에서 한국을 최종낙점하였다. 그래서 그날, 대회 처음으로 태극기가 회 원국 국기들 틈에 끼어 연단에 나부끼게 되었다. 이 일을 주도한 분이 당시 국제학회 회장이었던 Sandler교수였다. 입이 찢어질 듯 환하게 웃으면서 우리 金振國 당시회장 이 국제학회 임원들을 위해 베풀었던 Buenos Aires 힐튼호텔 소연장(小宴場)에서의 파티가 생각난다.

나 개인적으로도 영광스러운 자리가 있기는 있었다. 국제학회 회장으로서 우리를 두 번째 방문교육하고 두 달 뒤엔 1992년 11월 5일에 Sandler교수가 65세 정년을 맞 아 London대학 Freud추모석좌교수를 후계자 Peter Fonagy선생에게 물려준다는 소 식과 함께 송공(頌功)학술대회로「문학과 정신분석」이라는 국제학술대회를 연다는 편 지가 왔다. 보은(報恩) 반, 취미 반으로 나는 영국에 가서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대회 가 끝나는 날 Sandler교수 부부는 국제학회 직전회장인 Robert Wallerstein선생부부, 국제학회 부회장인 Arnold Cooper선생 부부와 나 만을 따로 저녁만찬에 초대하였는 데, 아주 유명한 고급식당으로 원래는 왕족의 저택이었다가 지난 50년간 정재계(政財 界) 인사들을 위한‘금녀’(禁女)의 사교클럽으로 있었고, 영화「80일간의 세계일주」

에서의 주인공 출발장소와 귀환장소로 나왔던 집이다. 그런데 바로 1년전부터 금녀규 정이 풀렸다 하였다. 말이 식당이지 서재로 꾸민 큰 방 마다 테이블 하나씩만 배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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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고 손님을 받고 있어, 내 평생에 그런 대접받기는 꿈에서도 생각 못할 그런 것이었 다 하겠다. 물론 내가 잘 나서 이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동양 유일의 참석자인데다 그만큼 국제학회에서 한국학회를 소중히 키우려는 뜻을 보인 것이라 하겠다.

우리 회원 가운데 특히 Sandler교수와 친분이 돈독했던 사람들이 몇 있다. 李武石 회장은 그 분께 1987년 9월부터 6개월간 매주 1시간씩 정신분석 이론과 임상에 대 해 개별적으로 사사받는‘역사적인’ 기회와 영광을 가졌고, 그 뒤로도 간간이 전화와 팩스를 통하거나 직접 만나 개인지도감독을 가졌던 것으로 알고 있다. 부인끼리도 무 척 친해서, Sandler교수부부는 한국방문 때면 어떻게든 틈을 내어 광주(光州)를 들리 곤 하였다. 李회장 부인이 직접 손으로 쌈을 싸서 Sandler교수 부부에게 건네주는 모 습도 설악산에서 본 적 있으며, Sandler부인은 중요한 학술대회 구연 때 마다 李회장 부인이 만들어 드린 우아한 옷을 입고 나왔었다. 李회장은 Sandler교수에 대한 회고 담을 한 묶음 엄청나게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鄭道彦회원은 처음부터 그 분 눈에 들었는데, 그러면서도 상호 거리를 두고‘어렵게’

지낸 듯 하다. 이‘어려운’ 처지와는 반대가 薛玹旭회원 경우인데, 삼원가든 불갈비파 티에서 두 분 관계가 무르익어 Sandler교수가 흉허물 없이 마음껏 웃음을 보였던 상 대가 薛회원이다. 薛회원은 또한 그 특유의 유우머로 어리광 부리듯 달겨들어 앗찔한 농담도 턱턱 걸었다. 두 사람은 키, 피부, 얼굴, 코가 닮아 꼭 큰아버지・조카 사이 처 럼 보였고, 또 정서적으로 가장 잘 맞지않았던가 생각한다. 나도 그래서 薛선생 뒤를 쿡쿡 쑤시며‘앞장 서 달라’는 부탁을 자주 하였었다.

1998년 7월 27일은 내가 Sandler교수를 마지막으로 본 날 이다. 나는 그때 Lo- ndon서 열렸던 국제정신분석역사학회 참석을 끝내고 있었고, 며칠전 전화로 자택방문 을 약속해 둔 터 였다. London의 여름은 밤 10시에야 해가 지는 고로 약속시간 저녁 5시는 그저 오후 같았다. 늦지않으려고 택시를 탔더니 의외로 20분이나 시간이 남았 다. 자택은 시내 서북부 중상층의 주택가인 Circus Road 35번지다. 집 주인 피부색같 은 뽀얀 칠 2층에 반 지하층을 가지고 있는 단독주택으로, 큰 나무들에 쌓여 있었다.

바로 대문 앞이 뻐스정류장이고, 거기에는 앉아 기다리는 긴 나무의자가 있었다. 십년 전 李회장도 첫 방문때는 미리 와서 나 처럼 여기 앉아 기다렸으려니 하면서 나도 거 기 앉아 골목풍경과 집 외모를 즐겼다. 차는 가끔 다니지만 사람통행은 거의 없었다.

안마당에 차가 두 대 서 있는 것을 보니 부부가 다 있는 듯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4 시 57분에 초노기 신사 한 사람이 자택 현관문에서 나왔다(이제 여러분들은 내가 왜 밖에서 기다렸는지를 눈치챘을 것이다). 나는 정확히 3분을 기다려 벨을 눌렀다.

일층은 부부 각자의 상담실(consulting room)과 큰 응접실, 그리고 주방이 뒤에 숨 어 있었고, 침실과 살림은 이층에 있는 듯 하였다. 부부가 함께 나를 맞아 주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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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ler교수는 걸음걸이가 다소 느릴 뿐 건강하게 보였다. 약이 잘 들어 몸은 괜찮다 면서 오히려 부인이 한 달 전 한쪽 신장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았다는 것과 회복이 순 조로워 일 시작한지도 꽤 되었다는 것이다. 부부는 한국사정을 잘 아는 듯 IMF사태 도 조만간 풀리지 않겠느냐고 격려해 주었으며, 정신분석운동의 근황도 물었다. 이제 는‘젊은’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학회를 주도한다는 우리 근황을 듣고서 그는 매우 뿌 듯해 하였다. 당신이 키워 주기로 작정했던 것이라 애착이 유난하다. 河惠卿회원의 발 전에 기뻐하고, 李회장의 활약상에 더 없이 뿌듯해 하였고, 나의 가족안부도 알고 싶어 하였다. 신간저서를 주겠다 하여서 나는 이미 그것을 사서 한국으로 부쳤다면서,‘돈 내고 사는 것이 마땅한 것 아니냐?’는 모범답안으로 그 분의‘초자아’에 맞장구를 쳤 었다. 국제학회‘직전회장직’을 물러나서 국제학회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은 이제 부인 쪽 보다 좀 떨어지는 듯 하였다.

나는 콜라와 과자 몇 개, 그분들은 맹물과 차(茶)를 들으며 어느덧 시간이 45분 흘 렀다. 눈치껏 자리를 비워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나오는 길에 나는 Sandler교수의 상담실을 열고 들어가 보았다. 큼직하고 천정이 드높은 방, 햇볕이 환히 쏟아져 들어 오는 넓직한 서향(西向)창과 엷은 오렌지색 커튼, 동쪽과 남쪽 벽을 천정까지 메운 서가 (書架), 북쪽 벽의 그림, 7척 장신을 눕혀도 남을 동쪽 벽 가까이 놓인 카우치 ….“이 카우치에 한 번 누워보고 싶은데요?”라는 나의 얼띤 말에 교수는 그저 씩 웃었을 뿐 이다.

현관을 나섰다. 그리고 나는 비스듬한 커브길을 돌아 그저 걷고 또 걸어 나왔다.

故人의 冥福을 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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