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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국어학의 미망-김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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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Ⅰ. 머리말

Ⅱ. 민족주의 국어학과 ‘과학적’ 국어학의 대립 1.‘과학적’ 국어학의 도입

2.국어학사 서술의 차이 3.한자 폐지 문제

Ⅲ. 일본에서 유행하던 ‘과학적’ 국어학 1.동경제대에 소개된 ‘과학적’ 국어학

2.일본의 ‘과학적’ 국어학과 조선어 학회 전통 3.‘과학적’ 국어학에 대한 비판-일본의 경우 4.‘과학적’ 국어학과 언어 정책

Ⅳ. 논란이 많았던 ‘과학적’ 언어학-유럽의 경우

Ⅴ. 맺음말

* 이 논문은 2017-2018년도 부경대 자율창의학술연구비의 지원을 받았음.

** 이 논문은 2016년 10월 15일 배달말 학회 전국학술대회(경남대)에서 발표한 원고를 많 이 고치고 기웠음.

*** 부경대 신방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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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요약】

경성 제국대학을 통하여 ‘선진’ 학문으로 소개된 ‘과학적’ 국어학은 주체 적인 학문적 자각에서 나온 흐름과 대결하였다. 일본에서는 ‘과학적’ 국어 학은 일본 국학파의 전통과 대결하였다. 조선에서는 이런 대립적 이분법 이 엉뚱하게도 비판의 방향이 조선어 학회의 전통으로 향하였다. 일본에 소개된 ‘과학적’ 국어학은 언문일치, 입말에 대한 적극적 관심, 고전 문헌 학에 대한 비판 등에서 주시경 학파와 여러 면에서 가까웠다. 조선어 학 회의 근대적 문제의식과 일치하였다. 한자 폐지, 말글 규범화, 표준말 제 정 등도 일본 국어학의 대부였던 우에다가 추구하던 과제였다. 언어학이 실증과학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유럽에서 역사비교 언어학에서 나왔는 데 이런 요구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이 많았고 지금은 한때의 유행 사조로 보고 있다. 이전의 언어학과 진정한 방법론적 단절이 있지 않으며 단순 히 현실적인 이해 관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과학적’-민족주의적, 실천 적-이론적, 내적-외적 언어학의 이분법적 대립은 설득력이 없다. 소쉬르 에서 비롯된 구조주의마저 ‘과학적’ 국어학에 포함시켰으나 소쉬르는 언 어학이 실증주의적 과학이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과학적’ 국어학 은 전통적 연구나 조선어 학회를 따르는 연구 가운데 서구 언어학과 일치 하는 부분은 ‘과학적’이라 평가하고 우리 역사와 문화에서 나온 많은 문제 를 학문적 탐구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실증주의적 편협함을 보였다.

민족주의적 국어학과 대결했던 ‘과학적’ 국어학은 무지와 오해, 비판없 는 태도의 되풀이가 낳은 우스꽝스런 희극이라 할 수 있다. 1945년 이후 에 ‘과학적’ 국어학은 실질적으로 서구 언어학을 들여온 것을 가리키며 구 호 또는 이데올로기로서 국어학계의 주도권 싸움에 이용되었다.

주제어: 우에다, 이희승, 역사비교 언어학, 경성제대, 국학파, 실증주의 적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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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머리말

학문 연구가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요구는 거의 동어반복이기 때문에 내용이 거의 없어 보이는 말이다. 그러나 그 요구가 엄밀하게 실증주의적 과학성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 정당성을 문제삼을 수 있다.

국어학이 ‘과학적’이 되려면 어떤 특성을 지녀야 하는가. 추상적인 맥락 에서 논의하는 ‘과학성’의 개념으로 논의를 확대하기보다 이와 대립되는 언어학 연구 사조와 대비하여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 ‘과학적’ 국 어학은 주시경과 조선어 학회의 전통으로 이어지는 민족주의적 국어 연 구에 대한 반대 사조이다. ‘과학적’ 국어학은 주시경 이래의 조선어 학회 전통과 대결하면서 그 구체적 의미를 띠게 된다. ‘과학적’ 국어학이란 사 조는 일본이 유럽의 역사비교 언어학을 도입하면서 엄밀한 실증주의적 과학성의 이념도 함께 들여왔다. 이는 곧 조선에도 소개되었다. 1910년대 부터 국어학에서 과학적 연구 방법이 강조되었는데 주로 일본 유학생들 이 당시 일본에 소개된 유럽 언어학을 소개하면서 주시경 학파에 대한 비 판으로 나타났다. 역사비교 언어학이 경성제대에 본격적으로 소개되면서 이희승의 「조선어학의 방법론 서설」 (1939년)과 같은 논문이 발표되었다.

‘과학적’ 국어학을 내세우며 그들이 주시경과 조선어 학회의 전통을 따르 는 연구자들과 대립각을 세우며 우월감을 갖고 있었다.01) 그들은 서구 언 어학과 일치하는 기존 연구를 ‘과학적’이라고 평가하면서 조선의 특수성 에 비롯하는 문제 영역인 주시경 학파의 한자 폐지, 말다듬기, 한글 맞춤 법 통일안 제정 등 실천적 문제의식과 역사 인식을 비과학적이라고 여겼 다. ‘과학적’ 국어 연구란 구호는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다. 어떤 맥락에서 나왔으며 또 어떤 기능을 했는가를 추적할 필요가 있다. 서구 언어학이 일본에서 어떻게 수용되었으며 이것이 또다시 한국에서 어떻게 변형 왜

01) 고영근, 「일석선생과 국어학 연구」, 『어문연구』, 226쪽, 정승철(2006), 「경성제국대학 과 국어학」, 1985, 태학사 14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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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되어 나타났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주시경과 조선어 학회의 전통에 대한 ‘과학적’ 국어학의 비판을 소 개한다. 이러한 비판의 일본적 뿌리는 일본 국학파에 대한 우에다의 비판 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런 비판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에다가 유학했 던 19세기 말 독일의 역사비교 언어학의 고전 문헌학 비판에 대한 비판에 다다른다. 고전 문헌학과 ‘과학적’ 언어학이 대립하던 역사적 맥락과 그 한계에 대한 최근의 연구를 따라 가면, 한국에서 전개된 ‘과학적’ 국어학 의 오류와 한계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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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민족주의 국어학과 과학적 국어학의 대립

1.‘과학적’ 국어학의 도입

우리 국어학사에는 두 가지 국어 연구의 태도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민족주의와 ‘과학적’ 국어학과의 대립이 그것이다.02) 민족주의적 국어학은 주시경과 조선어 학회의 전통이고 이러한 전통과 대결하는 태도도 일찍 부터 일본 유학생 출신인 안확의 주시경 비판에서도 나타났지만, 이것이 흐름이 되지는 못하였다.03) 경성제대에서 일본인 교수에게 배운 이희승 과 이숭녕이 ‘과학적’ 국어 연구 경향을 대표한다. 이희승은 역사비교 언 어학을, 이숭녕은 구조주의 언어학을 주로 받아 들였다. 그들은 역사비교 언어학과 구조주의 언어학을 배경으로 민족주의 국어학을 비판해 왔다.04) 1945년 이후에도 이 두 사람의 학풍은 이어져 서울대를 매개로 국어학계 의 주류로 이어지면서 ‘과학적’ 국어학을 구성한다.

조선어 연구의 과학화를 주장했다는 이희승의 논문 「조선어학의 방법론 서설」 (1939년, 『한글』 71)은 역사비교 언어학과 구조주의 언어학의 방법 론을 적용한 것으로 평가받는다.05)

이희승의 이 논문은 ‘과학적 국어학을 제창한 논문임에 틀림없다’는 평

02) 이준식, 「해방 후 국어학계의 분열과 대립」, 『한국근현대사학』 67호, 2013, 91-92쪽 03) 안확의 주시경 비판에 대해서는 김영환, 『한글철학』, 한국학술정보, 2012, 135-137쪽

참조

04) 이 사이에 ‘과학적’이란 이름으로 서구 언어학 방법론을 소개한 사람으로서는 권덕규, 최현배, 정렬모 등이 있다. 허재영(2015)에는 이들의 주장이 길게 소개되어 있다. 이들 은 구조주의를 포함한 서구 이론을 ‘과학적’이라 소개하였다. 과학적 연구와 민족적인 것은 대립할 수 있다. 이들의 논의는 이 논문에서 비판하고 있는 ‘과학적’ 국어학 연구 경향과 관련이 없다.

05) 최경봉, 『근대 국어학의 논리와 계보』, 일조각, 282쪽, 2016, ‘과학적’ 국어학을 지지하 면서 1945-1965년까지 연구사를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과학적’ 연구로 국어학을 재 정립하고 전환으로 서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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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를 받는다.06) 이런 흐름은 일본에 소개되었던 그때로서는 최신 언어학 이었는데 역사비교 언어학과 소쉬르의 언어학이 그 구체적 내용이었다.07)

‘과학적’ 국어학이 실질적 의미는 서구 언어학의 연구 방법론이 도입되었 다는 것을 가리켰다.

민족주의 국어학자의 연구는 어떤 점에서 이들 서구의 언어학에 어긋 났는가. 구조주의 방법론의 도입이 어떻게 ‘과학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이 있다. 역사와 문화에 대해 언어학이 적극적 관심을 보인다고

‘과학적’ 국어학과 어긋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08) 서구 언어학에서 중 요한 문제로 떠오르지 않았던 글자 문제, 말글 규범화, 표준화 문제 등 역 사적 실천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 ‘과학적’이지 못한 증거가 되지 않는다.

역사적 맥락이 달라 그 당시의 서구 언어학은 이런 데 관심이 없었을 뿐 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과학적’ 국어학의 외면과 냉대는 좁은 ‘과학적’

실증주의의 편견이 드러나는 좋은 사례이다.09) 또 외래 학문과 사상을 절 대시했다. 이런 학문이 생겨난 유럽이나 일본에서도 구조주의가 ‘과학적’

언어학으로 분류되는 일은 없었다. 이숭녕은 ‘과학’ 정신을 내세우며 조선 어 학회의 ‘쇼비니즘적’ 언어 연구를 반대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10)

‘쇼비니즘’에 대한 반대가 곧 연구의 ‘과학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역사 비교 언어학과 소쉬르의 학문이 ‘과학적’ 국어학의 내용으로 알려져 있으 나 이렇게 한 묶음으로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소쉬르는 과학을 내세운

06) 허재영, 「근대 국어학 과학 담론 형성과 일제 강점기 ‘과학적’ 국어학」,142쪽. 『코기토』, 부산대 인문학 연구소. 78호, 2015

07) 소쉬르 언어학 도입에도 일본에서 언어를 민족정신의 외화로 보고 그것에서 자연과학 적 법칙성을 발견하려는 태도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가라타니, 『네이션과 미학』, 도서출판b, 2009, 195쪽

08) 엄격한 실증주의가 이런 경향을 갖는다. 그러나 소쉬르와 일본 국학파와의 양립도 가 능하다. 가라타니, 『네이션과 미학』, 도서출판b, 2009, 196쪽

09) 허재영, 「근대 국어학 과학 담론 형성과 일제 강점기 ‘과학적’ 국어학」, 2015, 78쪽, 141, 142, 78쪽. 맞춤법 통일안과 ‘과학적’ 국어학의 정립을 이분법으로 전제하고 있 다. 『코기토』 부산대 인문학 연구소 78호

10) 이숭녕(1954), 「민족 및 문화와 언어 사회」, 1954, 46쪽. 『대학국어』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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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주의자가 아니었고 구조주의는 측정이나 관찰에 의미를 두거나 인과 적 설명도 추구하지 않는다.11) 그는 기존 언어학의 방법에 불만을 품고 자 율적인 학문으로서의 언어학을 새롭게 모색하였다. 역사비교 언어학자들 이 언어를 소리와 관념의 관계에 바탕을 둔 심리 물리적 행위로 보는 데 만족하였고 언어와 담화를 동일시하면서 이를 의문의 여지없는 이론으로 여겼다. 소쉬르가 말한 랑그는 경험적 관찰로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니었 다. 이 둘을 뭉뚱그려 ‘과학적’ 국어학이라 함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12) 역사비교 언어학과 소쉬르의 구조주의 사이에는 진정한 단절이 있으며 소쉬르는 내부로부터 혁명을 했다고 이야기된다. 그것은 언어 과학에서 하나의 혁명으로 간주되며 20세기 언어학의 발전에서 그 중요성에 대해 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13)

2.국어학사 서술의 차이

‘과학적’ 국어학의 관점에서는 근대 이후 국어학사를 사대주의와 모화 사상에서 벗어나 국어와 국문에 대한 민족적 자각을 이루는 관점에서 서 술하지 않는다.14) 과학적 국어학은 개화기의 우리말 연구에 대해 부정적 으로 평가한다.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민족주의 로 빠졌다는 것이다. 물론 서구 언어학과 일치하는 부분을 두고는 ‘과학

11) 가라타니, 『네이션과 미학』, 도서출판b, 2009, 199쪽. 결국 이 둘을 ‘과학적’이라 묶는 것은 경성제대에 고노와 고바야시가 같이 근무했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는 없어 보인 다.

12) 최경봉, 『근대국어학의 논리와 계보』, 일조각. 277쪽. 구조주의는 역사적 연원을 이성 주의 철학에 두고 있다. 볼로쉬노프, 송기한 옮김, 『언어와 이데올로기』, 푸른사상, 2005. 98-100쪽, 2016

13) 암스테르담스카, 임혜순 옮김. 『언어학파의 사상과 발달』, 아르케, 1999, 275쪽 14) 한문숭상의 오랜 전통은 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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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15) 이 부분은 주로 서구 언어학의 이론적 분석틀 을 가리킨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제대로’ 된 ‘학문적’ 연구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16) 이런 관점에서는 조선어 학회의 전통은 민족주의 이데올로 기에 지배되고 있으며 진정한 국어학이 아니다. 1910년 이후의 우리말 연 구의 중심 과제였던, 맞춤법 통일, 사전 편찬 등과 관련된 실천적 관심에 따른 연구가 그러하다.17) 식민지라는 특수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런 문제가 해결된 지금 국어학 연구는 그런 실천적 요구에서 벗어나 자유롭 지 않으면 안 된다.

국어학사에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역사관은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상징 되는 민족주의 사관이다. 식민지라는 어두운 시기에 독립을 기다리며 미 래를 준비하면서 한글 문화가 활짝 피어날 준비기로 보는 것이다. ‘과학 적’ 국어학은 저항과 모국어 수호 시기를 학문의 본령에서 벗어난 불행했 던 일시적 현상으로 보고 있다. 이어가야 할 전통이 아니며 이런 경향이 지속된다면 학문에 장애가 된다고 보고 있다. 이런 경향을 ‘실용적 연구’

라 보면서 경성제대의 졸업생이 나오기 시작한 1930년대 이후에 본래적 의미의 ‘과학적’ 언어학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 졸업생들의 학문적 경향은 이들을 교육한 오 구라 신페이, 고바야시 히데오, 고노 로쿠로 등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1930년대 조선어 학계에 부여된 조선어학의 과학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가장 예민하게 의식한 이들은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의 졸업생인 이희승, 이숭녕, 방종현 등이었다.”18)

15) 최경봉, 『근대 국어학의 논리와 계보』, 일조각, 127쪽에 있는 주시경에 대한 평가를 보 라. 2016

16) 여기서 ‘제대로’라는 표현은 이희승, 『딸깍발이 선비의 일생』, 창비, 1996, 61쪽. 정승 철(2006), 「경성제국대학과 국어학」, 태학사, 1479쪽의 표현이다.

17) 고영근, 「일석선생과 국어학 연구」, 『어문연구』 46-47합병호, 1985, 227쪽 18) 최경봉, 『근대 국어학의 논리와 계보』, 일조각, 2016,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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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대의 소개된 역사 언어학의 대두로) 인지적인 관점에서 설 때 한국의 국어학이 주시경 이후의 실용적 언어 연구를 바탕으로 한 관념론 과 서구의 역사 언어학의 영향을 받은 실증론으로 갈라질 수 있는 씨앗이 뿌려졌다고 말할 수 있다.”19)

해방 이후 어문 민족주의와 과학으로서의 언어학 연구를 강조한 실증론 의 대립과 갈등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국어국문학회의 조직은 이런 실증 주의 성향의 흐름이 표면화된 것이다. 김민수의 다음과 같은 회고록은 이 런 경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제 나라의 어문 연구를 국학운동이나 애국 실천의 부분으로 인식했던 지금까지의 거세기적 관점 내지 방법론을 일축하고 오로지 세계 문화에 기여하는 과학적 방법론 위에 견실하게 터잡은 진정한 국어 국문학을 수 립하려는 열의로 굳게 뭉쳐 나아가자는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기성 관념 에 구애되지 않고, 오히려 백지로 환원하여 과거를 모조리 재검토해야 한 다는 좀 건방진 태도로 의기가 높았다”20)

해방 후 이희승과 이숭녕이 한글학회와 결별하게 된 것은 1930년대 그 들이 국어연구의 ‘과학화’를 주장할 때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경성제대 출 신 이희승과 이숭녕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자리잡으면서 어문 민 족주의와 대결하는 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였다.

“해방 이후 국어 재정립 활동은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에서 볼 수 있듯 이 국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초점을 두고 진행되었다. 이처럼 어문

19) 고영근, 「일석선생과 국어학 연구」, 『어문연구』 46-47 합병호, 2001, 37쪽. 어문 민족 주의를 ‘관념론’이라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20) 김민수, 「학풍의 혁신」, 『국어국문학』 18호,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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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의 논리가 어문 정책의 논리가 되는 상황에서 국수주의적 국어 관을 경계하는 흐름이 형성되었고, 한자, 외래어, 학교문법 등과 관련한 문제는 양 진영이 치열하게 충돌하는 지점이었다.” 21)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국어 국문학과의 설립은 국어학의 과학화를 실 험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는 경성제대의 물적 기반을 그대로 계승하고 경성제대 졸업 생을 교수진으로 흡수하면서 교육 및 연구 체계를 갖추었다.”22)

식민지를 겪으며 잃어가던 조선어를 되찾자는 흐름을 ‘국수주의적 국어 관’이라 볼 수 있을까? 위와 같은 서술에는 이론과 실천의 이분법, 내적 언어학과 외적 언어학의 이분법이 전제되어 있다. 실천적 문제 의식에서 이론적 모색이 시작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또 내적-외적 언어학의 구분 은 소쉬르가 외적인 것을 내면화하고 있는 언어학을 비판하기 위해 도입 한 구별인데 언어가 오히려 압도적으로 외적 요소에 노출되어 있음을 드 러낸다.23) ‘과학적’ 국어학은 오랜 우리 지성사의 한문 숭상-한글 억압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24)

서울대학교는 경성제대를 계승하였는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해방 후의 국립 서울 대학교는 결코 일인의 경성 제국대학의 후신이 아니건마는 왜정 시대 경성 제국대학에서 오구라, 다카하시, 고노, 무리 에게 배운 몇몇 사람들이 서대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은연히 한 문벌을 이

21) 최경봉, 『근대 국어학의 논리와 계보』, 일조각, 2016, 323쪽 22) 최경봉, 『근대 국어학의 논리와 계보』, 일조각, 2016, 364-365쪽 23) 가라타니, 『네이션과 미학』, 도서출판b, 2009, 186-187쪽

24) 국어학계에서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없었다. 김영환, 「유학의 사대모화에 따른 동문 방언 의식에 관하여」, 『한글』, 284호, 2009, 203-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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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어 그 출신으로 하여금 국어 국문학회를 조직하게 하여 사회적 활동의 기반을 삼고…”25)

최현배의 관점에서는 ‘과학적’ 국어학이란 식민지 유산을 미화 왜곡한 것이고 청산해야 할 식민사관일 뿐이다. 학문적 대립에 기반한 것이 아니 라 패권 다툼이 그 문제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형식적으로는 서울대가 경 성제국대학과 결별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학풍이 답습되는 현실을 개탄 하고 있다. 친일파 청산이 미군의 개입으로 좌절되는 정치사와 평행함을 알 수 있다.

3. 한자 폐지 문제

이 문제는 우리 역사에서 상징성이 큰 문제이다. 동아시아에서 천하 체 제가 공식적으로 무너진 시모노세키 조약에 얼마 앞서 고종의 국문 조서 가 나왔다. 이는 전통적 동문(同文) 체제의 붕괴를 뜻한다. 한자 폐지는 대중의 글자 살이를 편리하게 한다는 차원을 넘어 근대의 말글 표준화 규 범화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한글 전용은 말글 규범화와 표준화의 완 성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국어학과 조선어 학회의 전통이 가장 격렬 하게 맞부딪친 곳은 한자 폐지 문제였다. ‘과학적’ 국어학자들은 이 문제 가 과학이 아닌 가치 문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보았다. 이 대 립은 대중에게도 잘 알려져 있고, 겉보기엔 단순히 글자살이의 편리성에 대한 논쟁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 뒤엔 우리 문화사와 사상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가 놓여 있다. 이제까지 오랫동안 한자만으로 글을 쓰 고 읽어온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한자 문화의 전통이 압도적 비중을 차지 한다. 오늘날 조선식 한문 쓰기는 너무나 철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배층 지식인은 쉽고 대중적인 글자를 450년 동안에나 돌아보지도 않고

25) 최현배, 「학교 말본 통일 문제」, 『앉으나 서나 겨레 생각』, 한글학회, 1993,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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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멸해 왔다. 이점에서 일본과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이런 전통을 비판적 으로 본다면 한글 전용론을 지지할 것이다. ‘과학적’ 국어학의 대표자인 이희승과 이숭녕은 한자 혼용 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다. 한글로만 쓰기를 민족적 감정에 기초한 것이라 보고 ‘과학적’ 국어학과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26) 이희승은 일찍이 「신어남조문제」(1932) 등의 논문에서 주시 경 학파를 비판한 적이 있다.27) 한글로만 쓰기는 새말을 만들 수밖에 없고 낡은 한자 어휘를 버릴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희승은 언어 연구는 ‘과학적’이어야 한다며 주시경 학파가 만든 여러 새말(배곧, 씨)을 비판하고 있다. 「권두언」『어문연구』 4권(1974)에서 한글 전용론은

‘민족적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며 ‘문자학적 법칙’에 따라 한자를 혼용해 야 한다고 말하였다.28) 한자 혼용론에 대한 이희승의 집착은 알려진 것보 다 훨씬 집요하였다. 그가 지은 『국어대사전』(민중서림, 1961)은 오랫동안 권위있는 사전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 사전을 엮은 의도는 주시경 학파와 대결하려는 데 있었다.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사전』이 완간되던 무렵부터 준비되어 60년대 초반에 나왔다. 이 사전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는 일찍 부터 지적되었다.29)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인이 낸 최초의 국어사전인 문 세영의 『조선어 사전』(1938)에 대한 이희승의 허위 증언은 우리를 놀라게 만든다.30) 그가 쓴 가장 대표적인 수필 『딸깍발이』는 한자 문화의 주역이 었던 선비를 예찬하고 있다. 이 수필은 ‘과학적’ 국어학과 긴밀히 연관되

26) 이러한 사실은 이희승이 조선어 학회 한글 맞춤법 제정에 참여하였고 조선어 학회 사 건으로 옥고까지 치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혼란스럽게 비칠 수도 있다. 김영 환, 『한글철학』, 한국학술정보, 2012, 220-221쪽

27) “이름씨, 날틀” 류의 새말을 인위적이라 배척하는 것이었는데, 이 주장의 배후는 언어 는 자연 발생적이라는 것이다. 역사비교 언어학에서 언어학을 자연과학을 모델로 삼은 것이 확대되어 적용된 사례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김영환, 「과학적 국어학의 유산」,

『선도문화』, 19호, 2015, 94-95쪽 참조

28) 감정을 배제하고 법칙을 중시한다는 실증주의적 표현이 나타나고 있다.

29) 김영환, 『한글철학』, 한국학술정보, 2012, 223-224쪽

30) 박용규, 「이희승의 문세영 『조선어사전』 비판에 대한 검토」, 2011, 427-453쪽. 『국학 연구』 18호.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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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있다. 여기에 나타난 선비상은 피상적인 생각에 기반을 두고 긍정적인 평가를 한 것으로 선비에 대한 비판없는 예찬에 지나지 않는다. 이희승의 딸깍발이 나타난 선비상은 한자혼용에 필요한 왜곡된 모습이지, 선비의 실상과 거리가 멀다.31)

한글 전용 운동은 단순히 한자가 외국 글자라는 민족 감정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라 보는 견해는 단선적인 생각이다. 지배층이 정보를 독점하 고 대중을 우민화하는 데 매우 효율적인 한자를 배척하는 것은 민주주의 운동의 중요한 고리이다. 이희승은 한글의 민중적 성격에 대해 눈을 뜨 지 못하였다. 근대 이후의 세계사적 흐름인 말글 하나됨에 한글로만 쓰기 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과학적’ 국어학이 국어학 연구의 주류를 이 루는 지금도 언어에 대한 관심을 이론 언어학적 문제에 좁게 한정하여 역 사적 실천적 문제 의식을 비과학적이라 배척하는 일반적 경향이 있다. 한 글로만 쓰기가 극단적 민족주의라며. 최현배는 한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 로 격하될 수밖에 없었다는 편견은 아직도 번져가고 있다.32) 지루한 논쟁 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현실적 글살이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본다면, 한자 폐지론의 승리다. 이런 변화가 어떻게 가능했으며 변화의 성격이 무 엇인지 학문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서구 언어학으로 그때까지 다루지 않 은 문제라고 비과학적이라 배제해서는 안 된다. 이론으로 보면 한글 전용 론은 1945년 이후 곧바로 완성되었고 글살이의 현실적 흐름으로 보아도 한자 혼용은 거의 사라졌다. 이것은 우리말의 현실적인 존재 방식의 큰 변화이고 우리말과 글의 근대적 표준화와 규범화를 이룬 큰 성취였다. 동 시에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룬 것이다. 독립을 방해하는 이론적 근거가 바로 경성제대의 ‘과학적’ 국어학이었다. 제국주의 유산이

‘과학’을 내세워 저항하여 북한보다 60년 이상이나 되는 기간을 허비하였

31) 김영환, 「이희승의 딸깍발이에 나타난 선비관 비판」, 『선도문화』 20권, 2016, 505-512

32) 최경봉, 『근대 국어학의 논리와 계보』, 일조각, 2016, 326-3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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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과학적’ 국어학을 따른다면 북한의 말글정책에서 민족주의 성향이 강 한 이유를 ‘어문민족주의와 길항할 수 있는 세력이 성장할 수 없었던 상 황’에서 찾을 수 있다.33) 이런 주장은 일방적이다. ‘과학적’ 국어학이 패권 을 쥔 남한을 기준으로 삼아 북한 정책을 평가하였지만, 북한의 눈으로는 남한에서는 식민지 유산이 청산되지 않고 계속 남았던 것일 뿐이다.34)

Ⅲ.일본에서 유행하던 ‘과학적’ 국어학

1. 동경제대에 소개된 ‘과학적’ 국어학

이희승의 스승이었던 경성제대 오구라 진페이는 우에다 카즈토시의 제 자였다. 우에다는 일본 근대 국어학의 선조였다. 일본인 가운데 처음으로 서양으로 유학간 어학자로 1890-1894에 걸쳐 독일의 베를린과 라이프찌 히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독일에서는 역사비교 언어학이 최신 분야 였다. 1892년부터 라이프찌히 대학에 유학했던 우에다는 자연스럽게 이 를 받아들여 ‘과학적’ 국어학을 내세웠다. 그는 귀국하여 1895년에는 과 학적 지식 및 방법에 의한 연구를 주장하고 1897년에 동경제국대학에 국 어 연구실을 설치하였다. 그에게 국어학은 우선 ‘과학’이지 않으면 안 되 었다.35) 여기서 우에다가 말하는 ‘과학’이란 유학 때 배운 비교 언어학이 었다. 그에게는 과학적 방법에 따라 다른 언어와 비교하여 다른 언어와 의 위치 관계를 확정하는 것이 언어 과학이다. 따라서 그에게 계통론이

33) 최경봉, 『근대 국어학의 논리와 계보』, 일조각, 2016, 338쪽, ‘과학적’ 국어학의 냉전 의식을 느낄 수 있다.

34) 북한의 한글 전용 정책에 대해서는 김영환, 『한글철학』, 한국학술정보, 2012, 49-53 쪽을 보라.

35) 야스다, 나공수 옮김, 『국어의 근대사』, 제이엔씨, 2009,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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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비중을 차지한다. 어족을 구성해 가는 것이 비교 언어학의 큰 역할이 었고, 일본어 계통의 탐색이 과제로 된다. 비교 연구야말로 국어학이 과 학임을 보증하는 것이었다.36) 동경제대 졸업생으로 대동아 공영권의 국어 사상가였던 호시나도 전통적 국어학을 비판하였다.

“과거에 있어서는 진정 과학적 연구 곧 언어학적 연구라 칭할 만한 것 은 실로 빈약했습니다. 과거에 있어서 우리나라 학예계는 일반적으로 과 학적 연구가 부족하고 국어 연구의 관계학과로 볼 만한 것은 거의 성립되 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따라서 국어의 연구도 불완전했던 것이겠지요.”37)

“국어의 과학적 연구의 필요성를 인식하고 메이지 19년 대학에 박언학 과를 설치한 이래 겨우 10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우리들이 희망하는 결 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과학적 지식으로써 크게 우리 국어를 연구하는 것은 우리들의 책임이라고 생각 합니다.”38)

우에다가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일본에서는 언어를 ‘언어 그 자체’로 취급하는 관점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39)

오스트호프와 부르크만 등의 소장 문법학자가 언어 연구가 대상으로 해 야 하는 것은 살아 있고 실제로 쓰이는 언어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고전 문헌학과 대결하였다. 이제까지의 연구는 오로지 ‘종이 위의 언어’에만 주

36) 야스다, 나공수 옮김, 『국어의 근대사』 제이엔씨, 2009, 75쪽

37) 이연숙, 고영진 외 옮김, 『국어라는 사상』, 소명출판, 2006, 219쪽 (호시나, 『국어학 소 사』 대일본도서 453-454면 재인용)

38) 이연숙, 『국어라는 사상』, 2006, 220쪽. (호시나 『국어학소사』 대일본도서, 1899, 455-456 재인용)

39) 이연숙, 고영진 외 옮김. 『국어라는 사상』, 소명출판, 2006, 133, 222쪽. 여기서 언어 그 자체란 의미나 문화, 이데올로기를 제외한 객관적 관찰 자료로 주어질 수 있는 언어 학의 대상을 말함. 오늘날에는 쓰지 않는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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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했다고 문헌학적 연구에 대하여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이런 대립 의식 은 우에다에게 전달되었다.

과학적 언어 연구는 먼저 음성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우에다는 확신 하였다. 우에다는 국어의 근거로 과거에 쓰인 문헌에서가 아니라 현재 사 용되는 언어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우에다는 전통적 국학으로는 ‘언어 그 자체’를 파악할 수 없으며, 그것 은 ‘과학적’ 국어학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시각은 실은 19세기 비교 언어학이 고전 문헌학에 대해서 취한 태도의 일본판이 라고도 할 수 있다. “언어와 문학의 구별”, 이것이야말로 우에다가 힘을 주어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확실히 우에다는 고전 문헌학의 권위를 깨기 위하여 19세기 비교 언어학이 사용한 표현을 일본어로 옮겨서 말했 다고 할 수 있다.40)

언어학이 ‘과학’이어야 한다고 했을 때, 자연과학적 방법을 존중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리스 로마의 문학 전통에 뒷받침된 고전 문헌학의 편견 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언어의 본체는 글말이 아니라 입말, 문자가 아니라 음성에 있으며 언어 발화의 규칙은 화자의 의지에는 의지하지 않는 질서에 따른다는 비교 언어학의 발견은 인문주의적 언어 관과 충돌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41)

2. 일본의 ‘과학적’ 국어학과 조선어 학회 전통

우에다에게 일본어에 관한 비교 언어학적 연구란 에도 시대 이래의 국 학에서 언어 연구를 하던 방법과 큰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19세기 유럽 에서 ‘과학적’ 언어학은 추상적인 대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었고, 언어 실

40) 이연숙, 고영진 외 옮김, 『국어라는 사상』, 소명출판, 2006, 137쪽 41)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이런 이분법적 대립은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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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란 심리-물리적 행위였다. 일본에 소개된 ‘과학적’ 언어학은 이런 측면 을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조선에서처럼 소쉬르 를 ‘과학적’ 국어학에 동원한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장 문법학파 가 언어학에 실증주의적 과학성을 요구한 까닭은 고전 문헌학이 갖고 있 던 인문학적 유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이런 그 당시의 풍조 에 영향을 받아 우에다도 국학파의 연구 경향을 배척하였다. 이런 우에다 의 사상이 오구라를 통하여 이희승에게 전달되어 ‘과학적’ 국어학이 나온 것이었다.42) 충실한 ‘비교 언어학을 위한 자료를 역사적으로 재구축해 가 는 것이야말로 ‘과학’으로 보았던 일본 제국대학 언어학을 오구라도 충실 히 따랐다.43) 이희승은 이런 일본의 연구 경향으로부터 ‘과학적’ 국어학의 비판 대상을 주시경을 따르는 연구 경향에서 발견하였다. 그러나 조선에 서는 일본 국학파가 소중히 여겼던 일본의 옛날 언어에 대한 기록 문화의 전통이 거의 없었다. 조선의 고전 문헌학은 한문에 국한되어 있었다. 모 화사상으로 고유문화 깎아내리기가 체질화되어 일본과는 상황이 매우 달 랐다. 이희승은 ‘과학적’ 국어학과 대립하는 학문 경향으로 새로 일어난 조선어 학회의 ‘민족주의’를 꼽았다. 고유문화나 민족문화를 강조하는 점 에서 일본의 국학파와 닮은 점이 없지는 않다. 이러한 짐작은 빗나간 것 이었다. 왜냐하면 주시경과 조선어 학회의 전통 그 자체가 민족어에 대한 근대적 자각에서 비롯된 근대화 운동이었고 전통에 대한 강렬한 비판 의 식을 보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국학파와 반대로 지켜야 할 전통이 없었 고 오랜 한문 숭상의 폐해가 컸다. 우에다가 추구했던 ‘과학적’ 국어학, 언 어학에 기초한 국어학은 주시경 이래의 학문적 추구와 공통성이 더 많다.

맞춤법 제정, 표준말 제정 등도 언어학에 바탕을 둔 체계화란 이상과 잘 어울렸다. 한글 전용을 지지하는 주시경과 조선어 학회의 국어 사랑, 입 말 중시, 한자 배격 경향도 언어학에 바탕을 둔 국어학을 연 우에다에서

42) 정승철, 1478쪽에 소개된 이병근의 오구라에 대한 평가를 보라. 2006 43) 야스다, 나공수 옮김, 『국어의 근대사』 ,제이엔씨, 2009, 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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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롯하는 일본의 근대 국어학과 일치한다. 다음과 같은 우에다의 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의 시골의 필부들 사이에 존재하는 일본어라도 그 일본어는 한 자어 혹은 서양어보다는 훨씬 귀중한 조상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다.”44)

“나는 한자를 배격하고 국어를 존중하며 동시에 그 국어를 로마자라는 옷으로 싸서 그것을 세계의 광장을 제공하고 싶다고 생각한다”.45)

‘과학적’이지 못한 한글만 쓰기 주장은 압말과 글말의 차이를 좁혀 준다 는 점에서 입말을 중시했던 역사비교 언어학의 정신에 더 가까웠다. ‘과학 적’ 국어학의 기본 정신은 주시경 학파와 더 잘 조화될 수 있다. 우에다의 발언도 민족주의라 볼 수 있다. 이희승은 일본 국학파에 대한 ‘과학적’ 언 어학의 비판에서 영향을 받아 조선어 학회의 전통으로 표적을 돌렸지만, 조선어 학회와 일본의 국학파는 성격이 판이하다. 일본에 소개된 역사 언 어학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주시경 학파에 반대할 측면보다 찬성해야 할 측면이 더 많았다, 다만 서구 언어학에서는 글자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은 이때까지 없었고 소쉬르에서도 글자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논의가 많았 다. 소쉬르는 『일반언어학강의』에서 언어학의 대상을 랑그로 한정하고 문 자 체체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였다.46) 이런 언어학의 추세가 실천적-민족 주의적인 국어학에 대한 편견을 더욱 부채질한 것으로 보인다. 한글 맞춤

44) 이연숙, 고영진 외 옮김, 『국어라는 사상』 소명출판, 2006, 195쪽 (우에다, 『국어학 십 강』 통속대학회, 경화당 1916년, 185쪽, 재인용)

45) 이연숙, 고영진 외 옮김, 『국어라는 사상』, 소명출판, 2006, 195쪽 (우에다, 『국어학 십 강』 통속대학회, 경화당 1916년 186-187쪽, 재인용)

46) 글자에 대한 소쉬르의 태도는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만 이때는 소쉬 르를 이렇게 이해하는 게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글자를 언어학에서 배제한 결과가 ‘과 학적’ 국어학의 한 축인 이숭녕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에 대해서는 김영환, 「‘과학적’

국어학의 유산」, 『선도문화』 19호, 2015, 99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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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이희승은 경성제대 출신의 ‘과학 적’ 국어학자로서는 예외적이었다. 이 점에서 이희승은 조선어 학회와 연 결될 수 있는 지점이 있었다.47)

3. ‘과학적’ 국어학에 대한 비판-일본의 경우

일본의 국어학사에서는 과학적 국어학의 공격에 반발하여 도리어 과학 적 국어학을 공격하는 경우가 있었다. 야마다 요시오(1873-1958)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국어학사요』(1935)에서 야마다는 호시나처럼 근 대 언어학을 기준으로 하여 국어사를 기술하는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였 다. 그는 이 책의 첫머리에서. “국어학사는 비단 국어학의 역사라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국민이 국어에 대하여 행해 온 자기 반성의 묘사”이며(8쪽)

“우리들의 현대의 지식으로써 그 비판의 기준으로 삼는 것을 삼가지 않으 면 안 된다.”(10쪽) 고 주장하였다.48)

이는 언어학자에 대한 문헌학자의 반감의 전형이다. 독일에서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인문주의적 전통을 신봉하는 고전 문헌학자에게 문헌학, 특히 언어학이 그리스나 라틴어가 아니라 ‘동양’의 언어인 산스크 리트어의 문법 조직을 인구어 연구의 틀로 잡은 것, 나아가 문학 전통을 갖지 않는 ‘야만적인’ 언어의 연구에 고전어의 연구와 대등한 가치를 두는 데 큰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이것들은 19세기 초에 비교 언어학이 출현했 을 때부터 항상 문제가 되었다.

“대체로 말하면 지금의 국어학이라는 것은 메이지의 중엽에 서양의 언 어의 학문이 수입되고 나서 그것들을 해설하는 바의 이법에 국어를 맞추

47) 김영환, 『한글철학』, 한국학술정보, 2012, 220-221쪽

48) 이연숙, 고영진 외 옮김, 『국어라는 사상』, 소명출판, 2006, 27쪽, (야마다, 『국어학사 요』 「自序」. 암파서점, 1935, 3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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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설명하려는 것이 주안이라고 생각한다.”49)

야마다에 따르면 이러한 학문은 진정한 국어학이 아니다. 근대 언어학 에 기초한 국어의 학문은 가공할 만큼 아나키스틱한 학문이었다. 애당초 존재해서는 안 되는 학문이었다. ‘과학적’ 국어학의 수립이란 전통적 국어 학을 뒷받침하는 국어의 외국어에 대한 우월성 등의 전통적 가치를 근저 에서 뒤엎는다고 여겼다. 역사 연구와 비교 연구라는 과학적 방법은 시간 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모든 언어 현상을 대등하게 다룬다. 따라서 역사 비교 언어학에서는 일본어 그 자체, 나아가서는 특정한 역사 단계의 일본 어에 특권을 부여할 이유는 없다. 물론 이것은 일본어 내부의 다양한 변 이형의 해석에 대해서도 해당된다. ‘과학적’ 국어학의 일본어에 대한 이런 접근법을 그들은 인정할 수 없었다.50)

“국어에는 선조 이래의 숭고한 피가 흐르고 있으며 그 속에는 국민 정 신이 깃들여 있으므로 그것을 고치려고 하는 것은 일본인으로서의 사고 방식의 개혁이자 국민정신의 개혁이 된다. 그러한 것을 태연하게 심의하 려는 행위는 미친 짓이라고 비난 받아도 어쩔 수 없다. …그것(국어 개혁) 은 국가에 대한 모욕이다”51)

우에다도 일본어를 일본인의 정신적 혈액이라 하여 메이지 시기 일본이 바라던 ‘국어’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그는 언어 유기체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언어 유기체설은 비교 언어학의 초기에 나타났던 사상인데 신문 법학파는 배척했던 주장이다. 신문법학파가 세력을 떨치던 시절에 독일

49) 이연숙, 고영진 외 옮김, 『국어라는 사상』, 소명출판, 2006, 227-228쪽 (야마다, 『국 어학사요』 「自序」. 암파서점, 2쪽에서 재인용)

50) ‘과학적’ 국어학이 이 원칙을 충실히 지켰다고 볼 수 없다.

51) 이연숙, 고영진 외 옮김, 『국어라는 사상』, 소명출판, 2006, 27쪽, (야마다, 『국어학사 요』 「自序」. 암파서점, 1935, 3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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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을 경험했던 우에다는 슬그머니 이 사상을 수용해 버렸다. 이리하여 우에다가 추구하던 ‘과학적’ 국어학과 어울리지 않는 ‘정신’이 끼어들었다.

사실상 일본어 애호로서는 우에다와 야마다의 차이는 거의 없어 보인다.

토키에다 모도기는 주로 소쉬르의 이론을 비판하면서 전통적인 일본 국학파의 언어 이론을 높이 평가하였다.52) 그러나 소쉬르 이론과 일본 국 학파의 이론도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이분법적으로 파악할 필요는 없 다.53) 이희승은 주시경 학파에서 이런 전통을 신성하게 보는 배타적 민족 주의를 보았다. 그러나 주시경 학파는 모화사상에서 고유문화를 부끄럽 게 여겼던 전통을 비판하면서 나온 근대적 자각 운동이자 글자살이의 근 대적 표준화 규범화 대중화를 기획하였다는 점에서 야마다식 배타주의와 전혀 달랐다.

4.‘과학적’ 국어학과 언어 정책

일본에서는 ‘과학적’ 국어학은 국가 정책과 밀접히 연관되어 전개되었 다는 특성이 있다. 이 점에서 유럽의 역사비교 언어학과 다르다. 우에다 가 과학적 국어학을 내세웠다고 국어 정책이나 국어 교육에 그냥 침묵했 던 것은 아니다. 우에다는 국민 사이에 올바른 말하기 올바른 읽기 쓰기 를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국어학의 종국 목표라 보았다. 이런 국어 이념의 실현을 위하여 말을 연구하며 국어학의 객관적 현실 분석은 수단에 지나 지 않는다. 국어학은 무엇보다도 규범 설정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며 따 라서 국어 교육 국어 정책이라는 실천을 빼고는 국어학이라는 학문 자체 가 성립되지 않는다.54)

52) 가라타니, 『네이션과 미학』 ,도서출판b, 2009, 199-200쪽 53) 가라타니, 『네이션과 미학』, 도서출판b, 2009, 200-201쪽

54) 이연숙, 고영진 외 옮김, 『국어라는 사상』, 소명출판, 185쪽, 야스다(2009) 나공수 옮 김, 『국어의 근대사』, 제이엔씨, 2006,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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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다는 서구의 ‘과학적’ 역사비교 언어학을 들여오면서 본 고장의 학 문 경향과 무관한 언어 정책 및 정치적 맥락과 일본어를 결부시켰다. 서 구 언어학을 도입하면서 일본적 맥락에 따라 변형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이다. 이런 결합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역사비교 언 어학에는 이런 뚜렷한 언어 정책적인 함의가 없었다. 물론 역사비교 언어 학도 정치적 함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함축은 의도적 이지는 않다.55) 한국에서 말글의 표준화, 근대화 작업을 한 것은 주시경 과 조선어 학회였고 이는 한국적 맥락에서 오랜 한문 숭배에 대한 반발이 라는 의의를 갖고 있다. 오랜 무관심과 냉대 속에 있던 우리말과 한글을 언어학적 원리에 따라 연구 및 정리야 말로 실천적 관심과 이론적 탐구가 잘 어우러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에다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면 조선에서 는 조선어 애호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56) 그러나 조선에 경성제대를 통하 여 소개된 언어학에 기초한 국어학, ‘과학적’ 국어학은 조선어 학회의 경 향과 투쟁하면서 그 존재 의의를 찾았다. 무엇보다도 그 대립과 투쟁의 표적은 오랜 문헌학, 문어의 전통을 지닌 한문으로 향해야 하는 것이었 다.

이희승은 일본에서 1949년에 설립된 국립 국어연구소와 같은 국립 국 어연구원의 설립을 주도하였고 이를 통하여 한자 혼용론으로 정책 전환 을 시도하였다.57) 일본에서 나타났던 ‘과학적’ 국어학과 권력과의 밀접한 관계를 조선서도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한자 혼용론은 한글을 일본 가나 와 같은 것으로 보고 있었고 한국의 한자문화가 일본의 그것과 같다고 여 겼다. 이희승은 ‘과학적’ 국어학을 내세웠으나 이와 일본에서 이와 대립했 던 야마다의 주장도 받아들였다. 1946년 2월부터 서울신문사에서 간행하

55) 가라타니, 『네이션과 미학』, 도서출판b, 2009, 182쪽. 주시경과 기본적으로 같은 태도 다.

56) 전후에 토키에다가 한 말. 가라타니, 『네이션과 미학』, 도서출판b, 2009, 195-197쪽.

토키에다 『국어연구법』 삼성당 1947, 197쪽, 재인용.) 57) 지금은 국립 국어원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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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시작한 잡지 『신천지』에 「국어강좌」를 연재했다. 여기에서 이희승은 국 어는 국가를 배경으로 하고 표준어라야 하고 구체적 언어라는 뜻매김을 하였는데 야마다 요시오가 1941년에 발표한 「국어란 무엇인가」에 나타나 는 정의와 비슷한 것으로 평가받는다.58) 야마다는 국어와 국체와의 불가 분한 관계를 설명하고 언제 어느 시대의 국어 개혁에도 정면으로 반론을 폈던 사람이다. 이희승은 ‘과학적’ 국어학을 말하면서도 이에 저항했던 야 마다의 국어 정의를 따라갔다.59) 이는 얼핏 보면 논리적 모순인 것 같다.

조선의 ‘과학적’ 국어학이 우에다 류의 언어학과 어긋나는 성격을 생각하 면 이런 결합이 이상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는 한자 혼용론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오랜 조선의 사대모화주의적인 문화 전통을 그대로 용인하고 말았다. 이점에서도 개혁에 반대한 야마다를 닮았다. ‘과학적’ 국어학이 언어 정책과 연관되는 경향에 대한 비판이 일본에서도 일찍 제기되었다.

우에다와 달리 토키에다는 이런 과학과 규범의 결합은 왜곡된 것이라 보 았다.

“언어학적 국어학은 국어에 대한 아속의 관념이나 가치관을 극력 배제 하려고 한 데 대하여 국어 정책은 국어의 장래에 대하여 규범을 설정하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에 이 양자는 물과 기름이다. 그러나 근대 국어학에 대한 무반성적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근대 언어학이 부여해 주는 것으로 사람들은 잘못 믿어왔다.”60)

그러나 이런 연관이 원론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론적 과학적 탐구는 여러 실천적 맥락과 결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특정 주장이

‘과학적’이라며 독단적으로 흐르는 것은 경계해야 마땅하다. 어떤 실천적

58) 야스다 도시아키, 나공수 옮김, 『국어의 근대사』, 제이엔씨, 2009, 208-211쪽 59) 최경봉, 『근대 국어학의 논리와 계보』, 일조각, 2016, 366-367쪽. 이희승의 국어 뜻매

김이 큰 의미를 갖는 양 서술하고 있다.

60) 이연숙, 고영진 외 옮김, 『국어라는 사상』, 소명출판, 2006, 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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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의식이나 언어관이 실제 연구 방법이나 결론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는 세세히 살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Ⅳ. 논란이 많았던 ‘과학적’ 언어학-유럽의 경우

역사비교 언어학파(신문법학파)와 문헌학적 비교 언어학자들의 논쟁은 1885년 1886년 무렵에 절정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이 논쟁의 성격에 대 한 최근 연구는 이 논쟁에 심각한 이론적 대립이 없으며 당시 독일의 대 학 제도 안에서 현실적 이해 관계의 대립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보고 있 다. 예외없는 음운 법칙은 신문법학파의 대표적인 주장으로 알려져 있다.

음운 법칙의 예외 없음이란 주장에서 ‘법칙’의 성격에 대한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 자연법칙과 같은 필연적인 인과 법칙으로 간주할 수도 없었다.

그들 내부에서도 견해 차이가 있었고, 그 결과 이 기계론적 음운 법칙에 대한 제한이 점점 뒤따르게 되었다.

“신문법학파 주장의 강력함은 광범위한 문헌학 분야의 연구에 대한 권 위를 그들 자신의 손 안에 집중시키려는 시도에 맞춘 것이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신문법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언어 발달 원리 의 중요성을 고집했으며 더 엄격하고 까다로운 방법론적 기준을 부과하 고자 했다. 예외없는 특징의 음운 법칙 원리는 모든 언어 연구 평가를 위 한 이러한 정확한 과학적 기준으로 이용되었다.” 61)

그러나 이 음운 법칙의 예외없음이란 원리는 현실적으로 따르기 어려웠 다.

61) 암스테르담스카, 임혜순 옮김, 『언어학파의 사상과 발달』, 아르케, 1999, 223-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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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론적 지침으로서 예외없는 음운 법칙 원리는 19세기 후반기의 모 든 언어학자들에게 암묵적으로 존중되었다. 그러나 연구의 타당성을 판 단하는 방법론적 기준으로는 어느 누구도 이를 따르지 않았다.”62)

요란했던 구호에도 현실적인 언어학 연구에서 변화가 거의 없었다.

“신문법학파의 방법론이 그들의 선임자 및 반대자들의 방법론과 비슷 하다는 주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63)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신문법학자들이 내세웠던 ‘과학적’ 언어학에 별 다른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 한때 유행했던 구호로 유럽과 일본에서는 희미한 자취만 남아 있을 뿐이다.

“신문법학파라는 사상학파의 형성을 제도적 맥락을 떠나서 순전히 인 지적으로만 관찰한다면, 이들이 추구하는 전략과 이론적 방법론적 주장 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논쟁에는 어떤 의미도 있을 수 없다.”64)

이런데도 ‘과학적’이란 말에 휘둘려 일본에서는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것 으로 받아들였다. ‘국가의 언어학’이 되고 담론을 지배하였다.65) 일본의 지 배적 담론은 경성제대를 통하여 조선에 소개되었고, 제대로 이해되지도 못한 채, 1945년 이후에도 남한의 담론을 지배하였다. 일본에서는 이런 지배 담론에 대한 비판적 논의의 전통이 있었다.

62) 암스테르담스카, 임혜순 옮김, 『언어학파의 사상과 발달』 아르케, 1999, 284쪽 63) 암스테르담스카, 임혜순 옮김, 『언어학파의 사상과 발달』, 아르케, 1999, 153쪽. 같은

곳의 다음 글을 보라. “요하네스 슈미트는 신문법학자들은 슐라이허의 추종자들이며 그들이 처음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은 실제로는 슐라이허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하였다.”

64) 암스테르담스카, 임혜순 옮김, 『언어학파의 사상과 발달』, 아르케, 1999, 225쪽 65) 가라타니, 『네이션과 미학』, 도서출판b, 2009,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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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법학파의 언어관이 기존의 언어관과 차이가 난다고 정당성이 저절 로 확보되지도 않는다. 관심과 언어관에 따라 언어를 달리 정의하더라도 실제적으로 다루는 연구의 주요 대상은 같을 수 있다.

“언어를 유기체로 정의하는 것을 거부하고 언어에 대한 심리 물리학적 개념을 채택했다고 해도 신문법학자들이 언어학 연구의 초점에 변화를 불러온 것은 아니다. 신문법학자들은 모든 언어학은 역사적이어야 한다 는 신념을 견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학자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 러한 선택을 정당화했다.”66)

유럽에서 살아있는 언어에 대한 연구에 따른 정보는 원시 인입말을 재 구성하고 그 발달 과정을 설명하는 데 적용되었다.67) 이러한 사상은 이희 승의 스승인 오구라에게도 나타난다. 주시경 학파와 달리 오구라는 조선 어의 표준어 선택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옛 형태로 거슬러가기 위한 실마리로 삼고 있었다.68) 즉 비교 언어학처럼 조선어 계통론의 확립 이 그의 목표였던 것이다. 신문법학자들과 그들에 대립한 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실제 연구에서는 모순이 거의 없었던 문제들에 집중되었다. 신문 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에서 그들이 권장했던 이론들을 무시하고 기존 의 연구 패턴을 따랐다. 예를 들면, 그들은 언어 변화에 대해서 인과적 설 명을 주장하면서도 이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마찬가지로, 그 들은 언어학자들은 살아 있는 언어와 구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 장하면서도 그들의 연구를 문서로만 보존되어 있는 거의 죽은 언어들에 만 한정시켰다.69)

한마디로 일본과 조선에서 금과옥조로 여기던 ‘과학적’ 언어학 자체가

66) 암스테르담스카, 임혜순 옮김, 『언어학파의 사상과 발달』, 아르케, 1999, 167쪽 67) 암스테르담스카, 임혜순 옮김, 『언어학파의 사상과 발달』,아르케, 1999, 286쪽 68) 야스다, 나공수 옮김, 『국어의 근대사』, 제이엔씨, 2009, 103쪽

69) 암스테르담스카, 임혜순 옮김, 『언어학파의 사상과 발달』, 아르케, 1999 ,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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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이 아니었다. 그 스스로도 지키지 못한 지나친 요구를 내세워 혁신이 라고 자랑했을 뿐이다. 다루는 주제나 방법론에서 연속성이 컸다. 외래 최신 학문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독일에서 보였던 맹렬한 대결 의식 이 일본에서는 국학파 비판으로 나타났고 조선에서는 주시경 학파 비판 으로 나타났다. 조선에서 비판은 일본에서보다 더 많은 부정적 효과를 낳 았다고 볼 수 있다. 일본과 달리 조선에서 지배적인 문헌학은 한문학이었 고 그 주제는 중국의 역사와 문학이었다. 조선에서는 말하자면 단순히 수 입된 이분법을 적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비판을 적용할 표적마저도 잘 못 잡은 것이었다.

Ⅴ. 맺음말

한국에서 전개된 ‘과학적’ 국어학은 여러 측면에서 왜곡되고 빗나간 학 술 운동이다. 경성 제국대학을 통하여 식민 종주국의 ‘선진’ 학문으로 소 개되었다. 엉뚱하게 구조주의 언어학마저 ‘과학적’인 것으로 소개되었다.

역사비교 언어학과 구조주의 언어학은 방법론적으로 불연속성이 크다.

이렇게 소개된 ‘과학적’ 국어학은 주체적인 학문적 자각에서 나온 흐름과 대결하려 하였고 이에 대한 우월감을 갖고 있었다. 독일에서 ‘과학적’ 국 어학은 고전 문헌학의 인문주의에 대한 반발이란 성격이 있는데, 이를 들 여온 일본에서는 ‘과학적’ 국어학은 고유문화를 절대시하던 국학파와 대 립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일본의 국학파에 맞먹는 자리에 있는 지적 전통은 고전 한문학이었다. 조선에서 ‘과학적’ 국어학은 그 비판의 표적을 민족주의적 국어학의 전통으로 잘못 설정하였다. ‘과학적’-민족적 이분법 에 기초한 경성제대-서울대의 ‘과학적’ 국어학은 일본에 소개된 ‘과학적’

국어학을 오해하였다. 일본에 소개된 ‘과학적’ 국어학은 조선어의 근대화 란 면에서 주시경과 조선어 학회와 여러 면에서 서로 가까웠다. 조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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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의 주요 사업과 우에다가 추구하던 언문일치, 말글 표준화, 입말에 대한 적극적 관심 등은 서로 일치한다. 일본의 ‘과학적’ 국어학의 정신에 따를 때 조선에서는 ‘과학적’ 조선어학은 조선어 애호에 앞장서야 했다.

일본에 소개된 ‘과학적’ 국어학에 대한 체계적 이해라는 측면에서도 조선 의 ‘과학적’ 국어학은 실패했다. ‘과학적’ 언어학의 사상과 운동의 진원지 인 유럽에서는 막상 이러한 이분법적 대립이나 방법론적 차이가 과장되 어 있었다는 논란이 처음부터 꾸준히 있었다. 이런 대립에 진정한 방법론 적 단절이 있지 않으며 현실적인 이해 관계의 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과학적-비과학적’이란 이분법 대립의 실질적 내용이 처음부터 있지도 않 았다. 그 본고장인 독일에서도 언어 연구가 엄밀하게 ‘과학적’이어야 한 다는 요구는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다. 이에 대한 반발도 거세었다. 반짝 유행하다가 사라져버린 흐름이었다. 따라서 일본에서 성립했던 이분법적 대립도 실질적인 내용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반대되는 학풍으로 알려진 우에다와 야마다는 현실적인 국어 애호와 민족주의란 면에서 차이가 있 다고 볼 수 없다. 이희승은 ‘과학적’ 국어학을 비판한 야마다의 국어에 대 한 뜻매김을 받아들이고 있다. 일본의 ‘과학적’ 국어학은 학문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수입될 때, 어떻게 오해되고 변형되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 례다. 20세기 한국에서 전개된 ‘과학적’ 국어학은 일본에 소개된 변형된

‘과학적’ 국어학에 다시 오해와 왜곡을 더 보태서 만들어졌다. 1945년 이 후에 서울대 중심의 제도권에서 우위를 차지하여 빠르게 확산되었다. ‘과 학적’은 구호 또는 이데올로기로서 특권화되었고 좁은 실증주의적 학문관 에 갇혀 서구 언어학과 다른 우리 역사의 실천적 문제 의식을 ‘과학적’이 지 못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라 배척하였다. 또 국어학계의 주도권 싸움 에 이용되었다. ‘과학적’ 국어학에 대한 요구는 중립적일 것이라는 인상과 달리 그 자체가 정당화되지 않는 이데올로기였다. 제국대학의 식민주의 유산이 ‘과학’을 방패로 삼아 패권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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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Illusion of the ‘scientific’ research of Korean language

Kim Yeong-Hwan (Pukyong National University, Department of Masscommunication)

The ‘scientific’ research of Korean language, which was introduced as a

‘advanced’ study through the Kyeongsung Imperial University, confronted nationalistic school of Ju Si-gyeng. In the case of the Japanese, ‘scientific’

study meant Historical Comparative linguistics in contrast with Kokugaku 國學 of Japan.

This ‘scientific-nationalistic’ distinction was made by Ueda of Tokyo University who studied in Germany in 1890’s. This distinction is modification of the confrontation between Classical philologist and Neo- grammarian of German universities. The Japanese ‘scientific’ language study that was introduced in Korea , in fact was close to the school of Ju Si-gyeong in many aspects. The abolition of Chinese characters, unification of spelling system, and standardization of Korean language, active interest in the spoken discourse, and critical attitude towards tradition. But Korean scholars who learnt ‘scientific’ linguistics criticised

‘nationalistic’ Ju Si-gyeong school. In Europe, which is the center of the ideas and movements of this linguistics, there is a strong criticism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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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logical-scientific’ distintion based on the Neogrammarian’s positivitic concept of science. It shows there is no true methodological discontinuity in this confrontation, and it is merely a product of a practical interests in that era. Therefore, it is difficult to see any reasonable grounds on the

‘scientific-nationalistic’ distinction in the study of the Korean language.

Even though ‘scientific’ school of Korean scholars regarded linguistics of Saussure as ‘scientific’, Saussure did not argue that linguistics should be a positive science. The ‘ scientific ‘ school, developed in Korea in the twentieth century, is a ridiculous comedy of ignorance, misunderstanding, and uncritical attitudes. After 1945, the ‘nationalistic-scientific’

confrontation became more apparent. ‘scientific’ was used as a slogan or ideology to obtain the hegemony of the Korean academic world.

Key words: Ueda, Lee Hee-seung, Historical Comparative Linguistics, Kyeongsung Imperial University, Kokugaku, Positivistic Prejudice.

논문투고일 : 2019년 01월 15일 심사완료일 : 2019년 02월 11일 게재확정일 : 2019년 0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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