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4주 인문학을 왜 배워야 하는가? 2. 왜 인문학을 배워야 하는가?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2

Share "4주 인문학을 왜 배워야 하는가? 2. 왜 인문학을 배워야 하는가?"

Copied!
5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4주 인문학을 왜 배워야 하는가?

2. 왜 인문학을 배워야 하는가?

인문학의 대상은 인간의 인간성이고, 인문학의 본질은 그러한 인간성을 탐구하는 데 있다고 했다. 그 리고 인문학의 기능은 인문정신을 가진 인간, 즉 정신적 주체성과 비판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일구어 갈 수 있는 지성인을 생산하는 데 있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인문학을 왜 배워야 하는지는 기본적으로 제 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왜 인문학을 배워야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인문학의 본질과 그 기능 이외에 인문학을 배워야 하는 또 다른 진짜 이유가 있는가 하고 되묻게 된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해 보면 어떨까? 인문학이 주는 기본적인 중요성 이외에 우리가 인문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대략 “시대적 이유”와 “근원적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라는 시대가 과거에 비해 인문학을 더욱 요청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이러한 시대적 이유로는 우선 “전문화의 한계”를 들 수 있는데, 전문화가 자신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이상 전문화로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한계를 드러냈고 그 극복을 인문정신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디지털-사이버 문화는 인간이 매개 되지 않는 정보체계를 만들어 내는데, 그 속에서도 인간을 존중하고 그 인간성을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서 인문학이 더욱 요청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과학기술이 가져온 여러 가지 위기들 속에서, 예컨대 환경파괴라든지 생명공학에 이르기까지의 위기들 속에서 과학에 대해 반성하는 인문정신이 절실해졌다. 이 런 점에서 인문학은 현대라는 시대적 요구 앞에서 이전보다 더 그 소명이 요구되고, 그 때문에 지금 이 시 대에 인문학이란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으로 요청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근원적 이유에서 인문학이 인간에게 요구된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간답게 살고 싶 다는 욕구가 있다. 이러한 인간다운 삶에는 먹고 사는 형이하학적인 욕구 이외에도 정신적인 차원의 형이 상학적인 욕구와 관계된 부분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신약의 말씀처럼 인간에게는 근원적으로 형이상학적인 욕구가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보다 인간답고 보다 행복한 어떤 삶의 질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형이상학적인 욕구란 인간이 근원적으로 행복을 추 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인간의 행복이란 근원적으로 타인의 행복도 고려하는 공동체적인 삶, 즉 사랑의 삶에서 완성된다고 생각된다. 즉 인간의 행복은 사랑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과 사랑을 추구 하는 인간의 형이상학적 욕구 때문에 인문학은 인간에게 근원적인 욕구와 관계된 것이고, 인간은 근원적으 로 인문학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시대적 요구로서 첫째 “전문화의 한계”가 있다. 근대화는 산업화를 중심으로 시작되었 고, 산업화의 핵심은 분업화와 전문화를 축으로 한다. 이는 대량생산으로 이어져 이른바 포트주의나 테일 러주의를 낳았다. 즉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매일 자동차 나사만 돌리는 직공 은 집에 가서 밥을 먹을 때에도 그 동작이 반복될 만큼 그렇게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조건 속에서 일한다.

그러나 이는 대량생산이라는 생산성은 향상시켰는지 모르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었다.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환경 속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으로부터도 그리고 노동 생산물로부터도 소외된다. 즉 노동자 는 생산과정으로부터, 생산물로부터 그리고 노동 그 자체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생산의 전 체 과정에서 노동자는 분업화된 조건에서 일부분의 노동만 반복하기 때문에 생산의 전체 과정으로부터 유 리되어 그로부터 소외되고, 그렇게 해서 생산된 생산물에 대해서도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가 판매에 관계하 기 때문에 그로부터도 유리되어 소외되며, 이렇게 해서 노동자는 노동 그 자체로부터 소외된다고 할 수 있 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노동에서 실현되기 때문에 노동에서 소외된다는 것은 곧 인간의 본 질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이다. 즉 한 인간으로서 노동하는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으로부터도 소외된다.

(2)

그렇게 소외된 인간은 자신의 소외감을 다른 곳에서 보상받고자 하는데, 그것이 TV나 영화와 같은 대 중문화들, 이른바 문화산업들(Kulturindustrie)이다. 근대의 산업사회의 기계화 속에서 TV나 영화, 라디오 와 같은 매체가 발달하게 되었고, 이러한 매체들은 기존에 귀족들과 같은 특권층만 누렸던 문화를 문화산 업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이 누릴 수 있는 문화를 만들었다. 대중문화는 이렇게 근대의 산업사회의 소외된 노동조건 속에서 태어났고, 이것은 노동자가 자신을 달랠 수 있는 오락문화로서 기능을 했다. 그러나 노동 자는 이러한 문화를 생산하는 생산 주체가 아니라 단지 그것을 소비하는 소비 주체일 뿐이고, 더욱이 이러 한 문화의 생산자들은 기득권층의 자본가들이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문화를 이식하여 대중이 사회에 더 잘 순응하도록 그들을 세뇌하는 측면이 있다. 즉 문화산업은 노동자의 소외를 달래는 오 락문화를 위주로 하여 대중을 문화의 주체로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 체제에 순응하는 사회적 시멘트로서 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1)

그리고 전문화를 통한 대량생산도 그 생산성에 있어 한계가 생기게 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산업사회는 디지털-사이버 구조를 갖는 초-산업사회로 나아가고 있고, 그에 따라 기존의 산업사회의 생산 방식이나 사고방식으로는 그 생산성의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즉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산업사회의 대량 생산 체제는 최첨단 IT기업과 같은 초-산업사회의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따라 최첨단 IT기업들은 기존의 산업 시스템의 기능적 사고와는 다른 방식, 예컨대 인문적 사고나 예술적 사고를 도입 하여 생산성의 한계를 극복하려 하고 있다.2) 스티브 잡스를 비롯한 세계의 유수 IT 기업들이 인문적 사고 를 새로운 생산성의 영역으로 보고 거기에 투자를 하는 것이 그러한 예이고, 2000년대 중반으로 오면서는 일반기업들도 인문학 전공자들의 채용 비율을 늘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문학에 대한 시민의 수요를 충 당할 인문강좌나 인문 아카데미 시장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둘째로 “디지털-사이버 문화”는 인간을 가상과 만나도록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직접 만나는 아날로 그적 체계가 아니라 인간이 디지털 정보화된 가상 체계를 만남으로써 인간의 소통방식이 변화했다. 이러한 소통방식의 변화로 소통의 규모는 지구촌 영역으로 확대되었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 반해서 인간이 인간과 직접 만나는 아날로그적 소통이 줄어들고 그로 인해 인간의 소 통능력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즉 디지털-사이버 문화 속에서는 가상이 진짜(실재)보다 더 진짜로 통하 는 ‘시뮬라시옹’(simulation) 현상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이버 상에서 인간은 ID나 패스워드 를 가지고 의사소통하기 때문에 가상의 아바타가 진짜처럼 기능하고 심지어 진짜를 대체하는 것처럼 보인 다. 이러한 시뮬라시옹 현상은 사이버 공간뿐만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의 소비구조에서 그대로 반영되어 나 타난다고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보드리야르는 지적했다. 즉 자본주의의 소비구조 속에서 인간은 물건을 구 매할 때 그 물건의 사용가치 자체보다도 그것이 갖는 광고 이미지를 선호하여 선택하고, 심지어 상품의 가 격 또한 그 광고 이미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상이 진짜보다 더 실제적인 파워를 갖는 것 이 후기 산업사회의 디지털화된 사이버 문화와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가상 아바타에 의한 소통방식은 사이버 공간상에서 여러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참된 공동체성을 지니지 못하고 유사-공동체 혹은 의사-공동체로 머문다. 사회학자 퇴니스에 따르 면 인간의 사회집단은 두 가지로,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로 나뉘는데, 후자는 기업이나 회사에서 보듯이 이 익을 중심으로 한 이해관계로 움직이는 사회라면 전자는 가족 공동체와 같이 그러한 것을 초월해서 정의 적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인간은 결국 이익사회로부터 공동사회를 지향하고 거기서 참된 만족을 느낀 다. 그런데 인터넷 사이버 공간에서 등장하는 여러 공동체들은 얼핏 그러한 정의적 가치를 존중하는 공동

1)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사회문화연구소 내의 하버마스, 마르쿠제, 아도르노, 벤야민 등의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 한 문화산업의 이데올로기 이식기능을 지적하면서, 문화산업의 문제점을 비판할 수 있는 정신을 기르는 것이 중요 하고, 그러한 비판정신을 통해 인간은 문화생산의 주체가 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2) 교재 49-52쪽 참조.

(3)

사회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 본인이 그 공간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아바타가 그 공간 속에서 행세 하기 때문에 서로의 진심이 교류되는 그런 소통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는, 그래서 의사-공동체 (pseudo-community)인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사이버 공간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가상 아바타 속으로 숨어서 원자화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원자화된 개인주의는 실제로 존재하는 가족 공동체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즉 가족이 모여 오순도순 서로의 정의를 나누는 게 아니라 각자의 컴퓨터와 스마 트폰으로 들어가 버리는 원자화된 개인주의 때문에 가족 간의 의사소통이 단절되고, 나아가 가족 공동체를 해체시키는 데 이러한 사이버-공동체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이버 상에서의 의사소통은 익명성을 갖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익명성 때문에 상대에 대한 인 격성을 간과하기 쉬워서 손쉽게 상대에게 모욕을 주거나 무책임한 발언을 하는 등의 도덕적 불감증을 야 기하고 있다. 이러한 도덕적 해이는 사이버 모욕죄나 정보통신 관련법으로 제약하는 데 한계가 있고, 오직 성숙된 넷트 문화만이 이러한 사이버 폭력(flaming)을 방지할 수 있는 처방일 것이다. 나아가 디지털화된 정보체계는 우리의 모든 삶에 침투되어 있어서 학교나 회사 혹은 시장이나 도서관 등에서 우리가 사용하 는 정보가 데이터베이스화된다. 이로 인해 네트 상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정보는 네트의 정보 눈에 의해 감 시되고 있으며, 이는 명백한 사생활 침해일 뿐만 아니라 이렇게 디지털화된 감시체계는 권력을 가진 빅 브 라더에 의해 악용될 소지를 남기고 있다.3)

셋째는 “과학기술의 위기”이다. 과학기술로 인한 환경파괴는 지구온난화를 비롯하여 이상기후 그리고 사막화 현상을 야기하고 있다. 최근 100년 동안 지구의 온도가 대략 0.2도 정도 올랐는데 북극의 빙하가 녹고 그로 인한 생태계의 교란, 나아가 그러한 지구 온난화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이상기후 현상 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이미 1980년대부터 아프리카 사막화 현상은 심각하게 진행됐고, 19세기 말과 2 차 대전 때에만 해도 에티오피아는 열강들을 쳐부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진 나라였지만 몇 년 동안 지속 된 가뭄 때문에 세계의 구호물자에 의존하는 죽음의 땅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베트남 유학생 난(Nahn) 은 한국의 가을하늘과 겨울의 눈을 아쉬워하며 고국으로 귀환했는데, 작년(2013년) 베트남에 눈이 왔고, 같은 해 미국 뉴욕에서는 겨울에 영하 15도 이하로 내려가 남극보다 추운 겨울을 맞았으며, 중부유럽 체 코에는 겨울이 너무 따뜻하고 눈이 오지 않아서 스키장이 취소되는 사태를 빚었다. 이렇게 지구 곳곳에서 지구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 등으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 지구의 이러한 병적 징후는 물리학의 열역 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를 거론하며 지구의 종말을 예언하는 논의로 비화되기도 했다.4) 현재는 국제적 협 약을 통해 지구 온난화를 막고자 지구촌 차원에서 노력을 기하고 있으나 국제협약은 국제법 수준의 강제 력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실효성에 있어서 문제가 제기된다. 더욱이 지금과 같은 환경문제 혹은 지구파괴는 선진국이 일으켜놓고서는 개발도상국이 경제발전하려 하니 환경협약을 맺으려 한다는 개발도 상국의 반발이 있어서 사막화 방지협약이나 남아메리카 아마존 개발에 대해서는 국제적 논의가 파행을 계 속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의료-생명공학의 발달은 인간의 죽음을 심장사에서 뇌사로 변화시켰으나 이로 인해 안락사 문 제와 장기이식의 문제와 같은 또 다른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1960년대부터 뇌사를 인정 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의학적으로는 1980년대부터 뇌사를 인정하고 있지만 법률적으로는 장기이식에 한해서만 뇌사를 인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 김할머니 문제로 최초로 존엄사가 인정되기는 했지만 (2010년) 아직도 안락사에 대한 법률적 논쟁은 진행 중이다. 다른 한편 생명공학의 발달로 유전자 조작식 품(GMO)이 상용화되게 됐고-이미 콩이나 옥수수에 대해서는 GMO를 사용하고 있다(한국: 콩 50%, 옥수수

3) 조지 오웰의 소설『1984』은 실크 스크린을 통해 인간의 모든 삶이 감시하는 빅 브라더, 그리고 그러한 사회가 도래 할 거라고 예언하고 있다.

4) Jeremy Rifkin,『엔트로피』. 김용정 역, 원음사, 1991.

(4)

25%)-, 이는 인간과 가축에 대한 안정성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 생태계 교란과 생물 다양성의 파괴 및 다국적 기업의 식량독점에 대한 문제점 등을 안고 있다. 더욱이 생명공학은 동물복제에 이어 인간복제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대표적으로 핵치환 방법을 이용한 체세포 배아 복제를 통해 환자 맞춤형 배아줄기 세 포를 만들겠다는 황우석 박사의 연구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생명공학은 이미 1995년 영국의 월머트 박사가 복제양 돌리를 성공한 데서 시작되어 황우석 박사의 복제소 영롱이와 복제개 스너피에 이 르러 미래의 대체 의학으로서 열렬히 지지를 받았다. 또한 이미 1990년부터 10년 간 영국과 미국의 과학 자들에 의해 게놈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그리는 데 성공했고, 이는 99.99%까지 성 공하여 32억 쌍에 달하는 인간의 유전자를 그려내었다. 그러나 유전자들의 조합이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 그 방식이므로 그것들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고, 따라서 인간복제의 문제는 아직도 미지의 영역을 남기고 것이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달은 우리의 전통적 가치관, 특히 종교적 세계를 무너뜨렸고, 이로써 우리의 윤리 의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비단 윤리의식의 변화가 아니라 윤리의식의 해이를 가져왔는데, 특히 성과 사랑 에 대한 자유로운 의식은 현재의 원나잇 스탠드에서 보이는 한탕주의 내지는 성 상품화와 같은 윤리적 파 괴를 야기했다. 그리고 환경파괴나 생명공학의 문제도 단지 법률적 제도로써 처리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우리의 윤리적 가치의식을 고양하는 데서 그 완전한 해결을 바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에 한스 요나스와 같은 기술철학자 내지는 환경철학자는 책임의식을 통해 존재에 대한 경외를 회복하는 “책임윤리” 혹은

“경외의 윤리학”을 주장한다.5) 특히 존재세계에 대한 종교적 감수성을 회복하여 과학기술에 의해 대상화 되고 물화된 존재세계에 대한 가치를 다시금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에 중세에 몰락한 종 교세계가 다시 현대 과학기술문명 속에서 요청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남기는데, 이는 단순한 종교의 부활 이라기보다는 과학주의에 의해 도구화된 인간의 이성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문정신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을 필요로 하는 시대적 요구가 이러하다면, 인문학을 배워야 하는 근원적 이유를 알아보자. 인 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 고대에는 그것이 “이성”이라고 생각되었다. 즉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 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금언처럼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라고 생각되었다. 근대에 오면 데카르트에 의해 각성 된 자의식, 즉 개인의 자기의식이 문제되었고, 이에 따라 이성이 아니라 (자기)의식이 인간의 본질로서 간 주되었다. 즉 인간은 자기 의식적 이성이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이후에 인간은 더 이상 이성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욕망”인 것이다. 즉 이성보다도 더 근원적인 인간의 본질 이 곧 욕망이고, 욕망은 이성마저도 좌지우지하는 인간성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은 본질적으로 쾌락을 추구한다. 프로이드는 이를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 등으로 정식화했는데, 쾌락추구를 본질로 하는 욕망은 현실적으로 그것을 마음껏 추구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치게 되고 그럼으로써 억압된다. 즉 욕망은 반드시 억압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억압은 교육이나 문화와 같은 제도화된 인문학에 의해 이차, 삼차로 재차 억압된다. 이렇게 욕망의 인간은 필연적으로 억압 속에 살도록 조건 지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근원적으로 억압된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자유가 가능할 까? 외적 억압은 직접적으로 그것을 해체시킴으로써 그로부터 해방될 수 있지만, 욕망과 같은 내적으로 구조 지어진 억압은 그러한 해체나 파괴가 가능하지 않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그러한 욕망을 해체하거나 파괴하려 들면 그것은 더 큰 억압이 되며 이후에 거대한 괴물이 되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러 한 욕망의 억압은 그것을 이해하고 나아가 수용하며, 급기야는 욕망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그로부터 해방 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억압의 이해와 수용 그리고 욕망의 내려놓기란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성숙’을 통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성숙이란 생물학적인 개념으로 어떤 존재가 “익는다”는 의미를

5) H. Jonas,『책임의 원칙』. 이진우 역, 서광사,

(5)

갖는다. 일차적으로 성숙이 어떤 존재가 생물학적으로 익는다는 의미라는 것은, 존재의 획득이 아니라 존 재의 완성에 관계된다. 존재의 완성이란 어떤 존재가 본인 외부에서 진리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 스로 진리가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성숙은 존재가 물리적으로 외부로 팽창하는 개념이 아니라 내적으로 깊 어지는 개념이고, 인간존재의 내적 성숙에 관여하는 데 그 본질적 역할이 있는 것이 인문학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러한 성숙을 통해서 욕망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획득하고자 하는 존재, 즉 인간은 근원적으로 성숙을 지향하는 인문적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러한 성숙에 이를 수 있을까? 인문학 책만 읽는다고 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삶을 인문적으로 살아야 할 것인데, 의사처럼 그 처방을 말하라고 한다면 대략 다음과 같은 정도가 아닐까 한다. 우선 소유의 세계로부터 존재의 세계로 이행해 와야 한다. 소유의 세계는 욕망을 절대긍정하기 때문 에 그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고, 욕망 간의 싸움이 진흙탕처럼 진행되기 때문에 그러한 소유의 세계로 부터 나와서 자기 존재가 가진 있는 그대로의 가치, 그 본래적 존재성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그와 더불어 즉물적 가치, 대상적 가치를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 소유의 세계는 주로 즉물적으로 대상적인 가치에 골 몰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부정적 조건들, 가난이나 약점 혹은 장애 등을 활용해서 존재세계와 그 초월된 존재성을 확고하게 다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내 다시 소유의 세계로, 즉물적이고 대상적 가치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세계와 초월된 존재성의 의미와 가 치를 바로 볼 수 있는 내적 힘을 지닐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는 데는 부정적 조건이 좋은 약이 된다. 왜 냐하면 부정적 조건은 고통스럽지만 인간의 존재를 깍아내고 연마해서 다듬에 내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부정적 조건만큼 나를 괴롭히는 게 없지만 그것만큼 내 모난 것을 깍아내서 나를 다듬어 내가 내 자 신이 되게끔 성찰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그리고 기다려야 한다. 시간을 가져야 한다. 성숙은 제비 한 마 리가 왔다고 봄이 오지 않듯이 그렇게 단기간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통해서 영글어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인생이란 그러한 성숙의 수행과정이 아닐까 한다.

참조

관련 문서

총론에서는 자유무역에 찬성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이에 반대 하는 또 다른 사례는 자유무역협정 (FTA) 속에 든 소위 독소조항 에 관한 것이다 자유주의 비판자들

추구하기 위하여 경쟁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이런 질서가 자생적으로 성립되었다는 것 이다.. 왜 정직한 행동을 반복하며 반대로 왜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반복하게

•이러한 공단 임차료 인상추세는 투자기업의 진출 증가로 인해 향후에도 지속될 전망임. 수요 증가로 인해 기존에 제공하던 임차료 할인이나 각종 인센티브 제공도

어떻든 고용보호가 OECD 회원국 가운데 미국, 영국 다음으 로 약하다는 것은 뉴질랜드 노동시장이 얼마나 유연한가를 보 여주는

그 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빈곤 의 문제와 진지한 씨름을 시도했던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헨리 조 지가 그 당시의

이와 같이 동화의 임직원 역시 동화를 가구브랜드 또는 목재브랜드라고 보지 않고 장기적인 관점에서‘생활을 풍요롭고 즐겁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브랜드’ 라는 정신을

„ While stirring vigorously, add (preferably dropwise, but really doesn't matter) sodium borohydride.(NaBH4); the colour should change from orange to white to purple

When appropriate, include a statement that the research could involve unforeseeable risks to the embryo or fetus or to the subject if the subject is or becomes pregn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