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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 : 도시유형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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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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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 : 도시유형의 변화

사회는 언제나 생성과 변화의 과정을 겪는 유기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사회의 동적과정을 표현하고 또한 그 바탕이 되는 도시형태 역시 언제나 생성과 변화의 과정을 겪 게 된다. 이런 이유로 한 사회의 도시형태는 그 사회의 독특한 가치체계를 나타내게 된다.

중세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도시의 변화과정은 네 가지 유형으로 구별되고 있다. 첫 번 째 유형인 ‘폐쇄형’은 중세도시에 관련된다. 이러한 유형의 몇몇 도시들과 그러한 도시들의 일부가 오늘날까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두 번째 유형인 ‘구조형’은 르네상스도시와 바 로크도시에 관련된다. 초기 그리스 및 로마도시의 개념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은 이러한 유형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많은 도시의 구성적 원리를 제공하였다. 세 번째 유형인

‘실용형’은 산업도시에 관련된다. 이러한 유형은 특히 미국의 여러 도시의 기본이 되고 있 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유형인 ‘개방형’은 근대 및 오늘날의 도시에 관계된다. 특히 이 유 형은 오늘날의 도시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소위 근대운동(modern movement)의 개 념과 원리에 의하여 나타난 것으로, 다음 장에서 그 배경 및 내용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이 다.1)

여러 도시유형과 그 변천과정을 우선 살펴보고자 하는 이유는 획일적이고 무성격해진 오늘날의 도시에서 벗어나 바람직한 도시형태 및 그 공간구성을 추구함에 있어 여러모로 비 교해 볼 수 있고 그리고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 여기서의 네 가지 도시유형은 R. J. Curran이 그의 책 <Architecture and the Urban Experience>에서 분류 한 도시유형에 의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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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1> 네 가지 도시유형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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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폐쇄형 : 중세도시

(10-15C) a. 내세지향적 가치

중세는 봉건제도에 의해 절대적인 권한과 지배력을 행사했던 영주 그리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라고 하는 두 세력이 지배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당시의 농민들은 매우 어렵고 고달픈 생활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당시의 농민들은 농노로서 각종 세금 및 노역에 시달려야 했고, 모든 것은 영주나 교회의 소유물이었기 때문이다.2)

이러한 생활 속에서 사람들은 점차 서로 뭉쳐 그들의 힘으로 자신을 지키는 것이 영 주나 교회에 전적으로 보호를 의지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임을 깨닫고 성벽을 쌓게 된다.

성벽 내에서의 삶은 이전에 비해 훨씬 더 질서가 있고 안전하기 때문에 여러 장인들과 상인 들이 그 곳으로 모이게 되었고 그리하여 마침내 새로운 도시, 즉 전형적인 중세도시가 탄생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시민이라는 계층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 러나 이러한 과정은 이로 인해 부와 권력의 위협을 느낀 영주와 교회와의 오랜 투쟁의 과정 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중세의 도시인들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만이 그들이 살 수 있 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공동체는 힘이 있었고 개인은 상대적으 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은 개별적인 주거가 아니라 당시의 정신 적 생활의 지주이며 도시생활의 여러 활동을 담당했던 교회(즉 고딕성당)이었다. 도시정신 의 상징이자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장소로서의 고딕성당은 그 규모에 있어 주위를 압도할 만한 크기였으나 친밀하고 인간적인 교회가 되게 하는 장인들의 솜씨가 있었다. 즉 성경의 내용, 도시의 역사, 또는 주민들의 삶을 나타내는 여러 장식과 조각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식과 조각들 대부분은 인간의 감정이나 재료에 대한 장인의 애정 또는 그들의 두 려움이나 소망 등을 나타내는 매우 비현실적이고 공상적인 것들이었다. 즉 중세의 석공이나 장인들은 사실적 표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의 현실적인 삶 자체가 힘들었 기 때문에 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내세지향적이었기 때문이다.

현세의 모든 여건을 주어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오직 내세의 구원을 갈구했던 이러한 내세지향적 가치의 추구는 중세도시의 전형적인 특징인 주어진 물리적 환경에의 적응과 순 응, 공동체적 분위기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또한 오랜 기간에 걸쳐 서 서히 이루어진 중세도시는 비록 전체에 대한 구성체계가 사전에 계획되어진 것은 아니었지 만, 내세지향적인 중세인의 삶에 깊숙이 자리 잡은 교회의 물리적 및 정신적 위치는 도시의 통일성과 조화를 부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b. 물리적 환경에의 적응을 통한 지역성의 표현

방어적 측면에서 볼 때, 도시의 입지는 매우 중요하였다. 따라서 높은 언덕 위나 강으 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 이상적인 도시의 터로 여겨졌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교차로와 같은 교통의 요지를 중심으로 발전된 중세도시도 볼 수 있다. 여하튼 중세도시는 그 도시가

2) 당시엔 신분의 변화가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역시 ‘그리스도는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 이 땅 에 왔지 인간의 생활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해 온 것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당시의 농노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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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해있는 곳의 지형적 특질을 최대로 이용해야만 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따라서 중세도시는 주어진 자연경관에 잘 맞을 뿐만 아니라 도시전체가 자연경관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되었다. 즉 가로는 높은 언덕의 등고선이나 도시를 감싸고도는 강의 굴곡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도시경관의 특질은 언덕, 강, 개울, 다리 및 교차로와 같은 자연적 특징들로부터 끌어내었다. 그리하여 중세도시는 주변 환경과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 었는데, 이는 도시전체의 형상과 가로패턴이 그 지형적 조건에 잘 맞게 이루어졌을 뿐만 아 니라 가로에 면하여 열지어 있는 건물들이 그 지역에서 나는 재료를 사용함으로써 지역적 특성을 또한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c. 불규칙한 가로체계와 치밀한 도시조직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세도시는 매우 조밀하였다. 도시의 주거와 기념물들은 복잡하게 얽힌 좁은 가로를 따라 촘촘히 박혀있었다. 둥그런 형태의 이 도시들은 분명히 그 어떤 사 전의 계획안에 의해서가 아니라 긴 세월을 통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되었다. 그렇지만 자 연세계의 그것처럼 우연과 필요에 의해 지배되는 보이지 않은 엄격한 규칙을 따르고 있었 다.

조밀하고 자연발생적인 건물의 배치 그리고 불규칙한 가로체계 및 광장의 형태 등이 그 특징인 중세도시는 비록 기하학적 구성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중세도시들의 공적 영역 (즉 길과 광장)은 그 도시가 처해있는 기후나 지리적 조건에 잘 맞게 되어 있을 뿐만 아니 라 그 지역 수준에서의 접근이 용이하게끔 잘 짜여진 접근체계 위에 근거하고 있었다. 전형 적인 중세도시의 예를 살펴보면, 도시공간은 강한 폐쇄감을 주는 작고 친밀한 인간적인 스 케일(hunan scale)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공간구조는 보행인이나 수레 그리고 마차 등 과 같은 것의 통행에 잘 맞는 수동적인 도시공간구조를 나타낸다. 동질적인 건물들에 의해 정의되어지는 치밀한 도시공간은 강하고 활기있는 도시의 삶을 잘 표현해 주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삶이 잘 이루어지게 하는 도시의 맥락을 제공하고 있다.

d. 공동체적 분위기와 세포적 특성

비록 중세의 도시경관을 이루는 각 부분들이 개별적으로 처해있는 상황에 맞게끔 이루 어졌고 또 건물들은 불규칙하게 배열되어 있었지만, 적어도 중세도시는 주민들이 공통적으 로 지니고 있던 가치를 표현하고 있었다. 즉 주민들은 구성원으로서의 각기 필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중세도시의 가로 는 이러한 소속감을 잘 나타낸다. 중세도시의 가로공간에서는 보다 큰 도시공동체 뿐만 아 니라 작고 친밀한 이웃공동체가 시각적으로 잘 나타나고 있는 바, 분수나 우물이 있는 자그 마한 옥외공간 및 광장들은 이웃들이 모이고 정담을 나누는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음 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즉 도시공간은 기능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강한 접착제로서 작용하 고 있었다.

이러한 공간들은 공동체적 분위기를 갖는 짧은 가로로 연결되어, 보다 큰 도시공동체 내에서 작은 독립적인 공동체의 망을 이루고 있다. 대체로 상호 연결된 이러한 공간들은 자 연유기체의 세포처럼 그 중요성과 위상에 있어서 비교적 같았다. 이는 오랜 기간에 걸친 자 연적 성장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세포적 특성은 중세도시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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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즉 집과 집들이 열지어 모여 가로를 이루고, 가로와 가로 그리고 광 장과 광장이 모여 도시를 이루며, 길드와 길드가 모여 도시공동체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리 하여 이러한 특성은 중세적 사고방식의 일부분을 이루게 되었다. 게다가 도시의 크기가 걸 어서 10-20분 정도면 도시를 가로질러 갈 수 있는 정도의 크기이기 때문에 도시의 경계가 명확할 뿐만 아니라, 도시공간은 개인의 사적영역의 적극적인 확장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 였기에 도시공동체는 마치 하나의 가정이 확장된 것처럼 작용하고 있었다.3)

<그림 2-2> 중세도시의 예 : 방스, 프랑스

<그림 2-3> 중세도시의 예 : 말린느, 벨기에

중세도시는 그 모양이 세포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처럼 되어있다. 이러한 현상은 사전에 계획되어진 것이 아닌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형성되어 온 결과이다.

3) 중세도시의 이러한 공동체적 특성을 르네상스 건축가 Alberti는 “도시는 큰 집, 집은 작은 도시”라고 함축성 있게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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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조형

1) 르네상스도시 (15-17C)

4)

a. 현실직시적 가치

화약, 나침반, 그리고 활자의 발명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초래하였다. 즉 대포의 등 장으로 중세도시의 성벽은 방어벽으로서의 그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도시는 이 제 밖으로 확장하게 되었다. 나침반의 등장은 항해술의 발달을 가져왔고 이어서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활발한 교역으로 많은 부를 누리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신흥 부호들이 등장하 게 되었다. 또한 인쇄술의 발달은 그때까지 수도원의 승려들이나 소수 지배계층에 한정되었 던 제반 지식이나 정보를 일반 사람들까지도 공유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젠 일방적인 통제 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세상은 한층 넓어졌으며 사람들의 사고도 현실적이 되었다.

도시가 발달하고 무역으로 인해 부유한 상인들의 등장과 함께 물질적 부를 누리게 되 자 중세사회는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정신적 의미는 약화되고 모든 것이 사치스러워지면 서 물질적인 면이 그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이제 사람들은 세상을 이전처럼 상상적인 그 어떤 것으로 여기기보다는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즉 이제 사 람들은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생각하게 됨으로써 상징적, 감성적이라기보다는 보다 현실적이고 개별적이며 독립적으로 되었다. 당연히 중세도시는 이러한 새로운 변화를 수용 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하였음으로 그 어떤 변화를 하여야만 했다.

b. 공간감과 조화로운 관계의 표현

중세도시는 그것을 이루게 되는 세포와 같은 개적 단위의 집합체로서의 결과일 뿐 전 체에 대한 사전의 그 어떤 개념은 없었다. 특히 내세지향적인 삶의 태도는 사물을 있는 그 대로 직시하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전체를 파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세의 조각은 사실적이 아닌 상징적, 은유적이었고 중세의 회화에서는 원근이나 명암이 표현되지 않음으로써 전체적인 사실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시대에서는 현실을 직시하고자 하는 태도가 대두되면서 정신적인 면보 다는 물질적인 면이, 그리고 상징적인 표현보다는 사실적인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중세의 정신을 상징하였던 고딕성당의 수직성은 약화되었으며, 회화 역시 평면적 인 것에서 벗어나 이제는 원근법과 명암에 의한 거리감 및 공간감을 표현함으로써 전체적인 사실적 관계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즉 공간개념의 도입과 하나의 통일체로서의 전체구조에 대한 생각은 르네상스의 대단한 발견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선을 유도하고 공간의 깊이를 느낄 수 있으며 전체적인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총체적인 시각경험을 갖게 하고자 하는 노력이 일어났는바, 수학적으로 공간관계를 규 명하고자 했던 소위 투시도법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조화롭고 아름다운 관계를 나

4) 이 시기를 불어에서 ‘부활 또는 재생’을 의미하는 르네상스(renaissance)라고 부르는 이유는 고대 아테네의 철 학자들이 추구했던 ‘조화와 균형’이라는 정신을 이 시기에 부활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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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내는 비례에 대한 관심이 높았는데, 황금비율(대략 1 : 1.618)은 좋은 예이다. 이는 각 부 분은 전체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것과 모든 부분들은 하나의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도록 결합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의 건물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의 구성에 이르기까지 스며들게 되었 다.5) 특히 광장같은 공적공간의 구성에 이러한 생각이 반영되었다. 르네상스는 조화롭고 균 형잡힌 새로운 현실을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공간에 대한 의식을 창조함으로써 시각구성원 리 및 공간구성기법이 발달하였다.6)

<그림 2-4> 르네상스 도시의 예 : 팔레르메, 이탈리아

5)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상으로 하였던 르네상스의 정신은 이 시기에 고도의 기하학적 형태를 한 많은 이상도 시계획안(ideal city)들을 출현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실현된 것은 Palmanova가 유일하다.

6) 기념물이나 분수 등과 같은 광장내의 시각적 초점요소의 효과, 그리고 도시에서의 위치파악이 용이하도록 도 시수준의 가로에서 광장으로 접근할 때 광장 밖에서 보일 수 있는 전략적인 위치에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것 과 같은 것은 르네상스 공간구성기법의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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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5> 질서와 전체적인 공간감을 보여주는 르네상스 도시

<그림 2-6>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투시도법을 이용하여 구상한 르네상스의 이상도시 계획안

2) 바로크도시 (17-18C)

a. 권위주의적 가치

조화와 균형이라는 르네상스의 특성은 그러나 후기에 와서는 왜곡현상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현상은 르네상스의 천재적인 거장들에 의해 이루어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정 도로 완벽한 수준에 대한 반발과7) 함께 종교개혁, 전쟁, 그리고 동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인 한 당시의 사회혼란 및 경제위기 그리고 종교 및 정치 불안이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침으 로써 야기된 것이다.

그리하여 왜곡과 모호함이 이성과 균형을 대신하게 되었으며 교묘함과 우아함이 그로 인하여 나타난 주된 분위기였다. 즉 불안, 긴장, 어수선함, 논리와 조화의 결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적당히 덮어 가리는 우아함과 교묘함이 당시의 정신적 풍토를 정확하게 비추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건축과 도시에서의 자연스런 관계, 조화 및 비례는 깨지게

7) 이는 르네상스말기에 등장한 소위 ‘매너리즘(mannerism)’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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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이제 균형잡힌 공간구성보다는 강조나 과장에 의한 시각적 효과가, 그리고 목적보 다는 수단이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 결국 르네상스는 종말을 고하고 바로크로 넘어가게 된 다.

긴장되고 어수선한 사회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강력한 힘과 권위가 필요하게 마련 이다. 따라서 교회는 추락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강한 인상을 통한 감정에의 호소가 필요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개인이 위축감을 갖게 될 정도의 거대하고 화려한 교회가 물질적인 부의 상징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제 교회는 신앙심의 표현으로서의 정신적인 대상이라기보 다는 힘과 권위를 강조하는 물리적 대상으로 되었고, 이 시기의 조각, 동상 등의 인물상은 과장되고 아름답고 화려하게 되었다.

바로크 초기의 도시공적공간의 계획과 설계는 통제된 사회질서의 반영과 공공의 참여 를 위한 바램을 반영하였으나, 말기의 공적공간은 시민들의 모임을 위한 곳이라기보다는 군 대행렬 같은 절대군주의 힘의 과시를 위한 곳으로 변질되었다. 특히 통제와 권위의 표현은 당시의 절대군주의 취향에 잘 부합함으로써 그들의 힘과 권위 및 호사스러움을 과시하기 위 한 거대하고 화려한 궁궐, 커다란 도로, 광장, 그리고 거대한 기념물 등이 건설되었고, 가로 에 면한 건물의 정면이 강조되었으며, 축과 대칭을 강조하면서 시각적 초점에 거대한 궁궐 을 위치시킴으로써 궁궐이 과거 교회의 권위를 차지하게 하였다.8)

b. 시각적 환상에 근거한 총체적 극적효과

이제 모든 것은 지배적인 중심공간이라고 하는 주된 개념에 종속하게 된다. 그리고 거 대함과 집중화는 바로크의 지배적인 특징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건물의 스케일은 점점 더 커지게 되었고, 교회의 경우 내부는 커다란 중앙 돔의 도입과 함께 하나의 커다란 공간으로 인식되게 처리하였으며, 외부형태 역시 내부구조를 반영하지 않고 굴곡을 주었는데, 이는 건물의 외부에 리듬과 긴장을 줌으로써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 호소를 하기 위해서였다.

바로크의 이 같은 감정적 분위기는 새로운 표현방식을 모색하게 하였다. 즉 절대적인 힘과 권위의 상징인 무한성의 개념을 창조할 수 있는 총체적인 극적효과가 그것이다. 따라 서 건축, 회화, 조각 간의 구별이 모호해진다. 강조, 과장, 움직임, 빛의 효과 등과 같은 수 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이러한 극적 효과는 결국 시각적 환상이 그 주된 수단이 된다.

c. 움직임의 개념 도입

단지 공간관계를 발견하고 살피면서 공간을 연구하였던 르네상스와는 달리 바로크에서 는 우리가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삼차원적 공간에서의 복잡한 움직임을 비로소 고려 하였다. 이제 도시의 구성 및 공간 체험에 있어서 삼차원적 움직임은 중요한 고려사항이 되 었다. 이러한 개념의 변화는 건물의 계단처리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중세 건축에서 계 단은 단순히 오르내리는 통로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계단은 좁고 어둡고 답답했다. 르네

8) “짐은 곧 국가이다”라고 한 바로크 시대의 절대군주 루이 14세의 말처럼, 바로크시대의 힘과 권위는 인간세상 뿐만 아니라 자연까지도 지배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베르사이유궁의 정원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것이 인공 적이며 거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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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스 건축에서의 계단은 단순한 통로 이상으로 주위를 볼 수 있는 정도이었다. 그러나 바로 크 건축에서의 계단은 이전의 계단보다 훨씬 더 크고 복잡하고 화려하며 내부의 공간감을 읽을 수 있는 수단이 되며, 공간구성에서 극적효과를 낼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외부 계단 역시 커지고 화려해지고 그 형태도 다양해지면서 건물 및 도시공간(특히 광장) 구성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중세 도시는 일련의 주거건물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았다. 르네상스 도시는 여기에 보 다 큰 통일성과 공간개념을 도입하였다. 바로크 도시는 여기에 움직임을 더하였다. 그리하 여 바로크 도시에서의 가로는 이제 더 이상 세포 같은 개적 건물의 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움직임이 일어나는 트랙이 되었던 것이다. 움직임을 위한 통로로서의 가로의 개념은 바로크 도시의 외양에 통일적 효과를 가져왔고, 따라서 T자형 및 十자형 교차로가 새로운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크적 의미에 있어서의 움직임이란 결코 자유로운 움직임이 아닌 권위에 의 해서 통제되는 움직임이었다. 따라서 움직임의 방향이 변하게 되거나 다시 지시되는 교차로 에서는 그 어떤 권위를 나타내야만 했다. 그리하여 광장은 권위를 효과적으로 표출하는 교 차로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즉 르네상스의 광장이 공간에 대한 시각적 서술이었다면, 바로 크의 광장은 통제와 권위의 표현으로서의 움직임에 대한 서술이었던 것이다.9) 특히 고도의 기하학적으로 짜여진 바로크 도시의 넓은 가로와 광장은 자연의 지배와 동시에 자연과의 보 다 강한 교감을 하고자 하는 바램을 나타냄으로써 도시공간의 확장 및 연속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림 2-7> 바로크 도시의 예 : 파리, 프랑스

고도의 기하학적 형태로 짜여진 넓은 가로와 광장 그리고 시각적 초점에 거대한 기념물의 배치는 자연의 지배와 극적인 구성이라고 하는 바로크적 도시구성의 특징을 나타낸다

9) 이 시기의 공적공간의 계획과 설계는 통제된 사회질서의 반영과 공공의 참여를 위한 장소로 만들기 위한 의식 적인 바램을 반영하였다. 그러나 말기에 대규모로 이러한 개발원리의 적용은 적극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위 한 컨텍스트로서의 공적영역의 쇠퇴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점차 도시의 공적공간(특히 광장)은 모임을 위한 곳이라기보다는 행렬과 과시를 위한 곳으로 변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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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8> 바로크 도시의 예 : 성 베드로 광장, 로마

<그림 2-9> 절대군주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거대하고 기하학적 형태의 바로크의 공간구성 : 베르사이유,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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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10> 바로크 도시의 공간구조: 파리, 프랑스

<그림 2-11> 파리 오페라의 내부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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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12> 로마의 스페니쉬 계단 광장

중세와 르네상스와는 달리 바로크 건축과 도시에서 계단은 움직임과 극적효과를 나타내는 중요한 공간구성요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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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도시 르네상스도시 바로크도시

1. 가치체계 내세지향적 현실직시적 권위와 집중

2. 표현양태 은유적, 상징적 사실적

우아함, 교묘함, 과장, 왜곡, 환상적

3. 도시형태 유기적 기하학적 기하학적

4. 공간의 인식

평면적(2차원적), 원근 및 명암의 표현이 없음

입체적(3차원적), 거리감, 공간감 및 투시도법의 등장

3차원의 공간에 움직임의 도입(4차원적)

5. 스케일 인간적인 스케일 인간적인 스케일 압도적인 스케일

6. 물리적 환경과의 관계

주어진 지형, 기후에 잘 적응함으로써 동질성 및 지역성이 잘 나타남

조화와 균형에 의거한 이상적인 형태 추구

인위적, 지배적

7. 부분과 전체와의 관계

전체에 대한 사전의 고려가 없음(세포적 특성)

부분과 전체에 대한 조화로운 비례관계 추구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총체적인 극적효과 추구

8. 가로와 광장

불규칙한 형태로 다양하고 재미있는 경관 연출

시각적

구성원리에 의해 설계됨

고도의 기하학적 형태로 과시적인 거대한 도로, 교차로 및 기념물의 등장

이제까지 살펴본 중세, 르네상스 그리고 바로크 도시의 특성을 비교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 실용형 :

산업도시(18-19C)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공장이 새로운 요소로 등장하였으며 동시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소위 도시화, 산업화가 급속히 일어나면서 도시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또한 자유방임주의로 인해 어떤 사람한테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반면에, 어떤 사람에게는 오히려 매우 비참한 일이 벌어지게 하였다. 여하튼 19세기의 도시발전은 과거와는 달리 능력있는 사업가 또는 개인기업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생산위주의 편의주의 로 인해 자연경관 및 도시경관이 마구 파괴되어 그 모습이 추하게 되었고 또한 공해문제가 대두되었다.

산업혁명 이전의 도시는 주어진 지형, 기후, 재료 등의 조건에 의한 그 어떤 자연적 리듬에 의해 규정되고 수식되었으나, 산업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인위적인 것이 됨으로써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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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한 패턴과 리듬이 현저히 결여된 상태로 되었다. 또한 이 시기의 삶의 모든 부문에서의 특징은 저속함과 평범함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창조적 정신은 무디어지고 성공의 척도는 질 (質)이 아닌 양(量)으로 되었다. 그리하여 산업도시는 대량생산이라고 하는 생산방식이 지배 적이자 거의 절대적 가치를 지녔던 시기의 산물이자 표현이며, 본질적으로 무성격한 격자형 가로망을 따라 반복적으로 건물단위들이 나열되는 가장 초보적이고 실용적인 수준으로 되었 다.

산업도시에서의 전형적인 가로체계는 앞에서 살펴 본 폐쇄형 및 구조형 도시와는 대조 적으로 노동자의 숙소로 가는 접근로의 제공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구상되어졌다. 그러 므로 그러한 공간은 스케일과 성격에 있어서 과거도시에서 볼 수 있었던 다양한 기능이나 활동을 유발하고 수용하기에는 미흡한 것이었다.10) 특히 이러한 공간체계는 19세기말 인구 및 차량이 증가함에 따라 문제가 되었다. 즉 공공 및 개인교통수단이 발달함에 따라 다수의 사람들이 도시교외지역으로 도피하였는데, 이는 산업도시의 열악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에 기 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전의 도시들이 지니고 있었던 많은 특질들의 상실로 인한 도시형태 의 취약함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림 2-13> 단순한 단위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산업도시의 예

10) 격자형 평면과 고도로 무성격한 반복적인 가로의 사용은 도시에서의 복잡한 사회적 역할을 앗아갔다.

Richard Sennett는 그의 책 <The Fall of Public Man>에서 ‘적극적인 주역으로서 그리고 창조가로서의 인간 이 소리없고 수동적인 관찰자로서의 인간으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용형 도시에서의 공적영역은 적극적인 인간상호작용을 위한 장소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다.

(16)

4. 개방형 :

근대 및 오늘날의 도시(20C~)

도시가 그 사회의 거울이라고 한다면 19세기말의 현상에 비추어 볼 때, 산업도시의 구 속적인 경직성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음은 명백한 일이었다. 이에 따라 20세기의 도래와 함께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과 꿈에 대한 이미지가 출현하였다. ‘전원도시(garden city)’

와 광활한 교외지역(suburb)에서부터 ‘빛나는 도시(radiant city)’ 및 ‘신도시(new town)’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것들은 새로운 생활양식과 새로운 자유를 담고자 한 것들이었다.11) 그 결과 개인적인 공간과 이에 따른 실제적인 혜택이 대단히 증가된 반면에 산업도시 이전의 도시들에서 지니고 있었던 집단적인 삶의 잇점과 이에 따른 다양한 도시공간은 대중들의 기 억 속에서 점차 사라져 갔다. 핵가족화와 자동차지향적 문화로 대표되는 근대도시는 사람과 활동의 고립뿐만 아니라 사람과 활동을 담는 건물까지도 고립을 초래하였으며 끝없는 범위 에 걸쳐 그러한 건물들을 흩뿌려 놓았던 것이다.

도시개발에 대한 근대적 접근방법의 기본적인 특징은 건축을 독자적이고 고립된 대상 물로 되게 한 점이다. 건물의 설계는 이제 더 이상 주어진 여건에 잘 들어맞게 하는 작업이 거나 주어진 커뮤니티의 사회적 이미지와의 상호관계 속에서의 복합적인 비젼의 표현이 아 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원도시에서처럼 처음에는 자급자족적 농촌주택이나 시골의 오두막 집에 대한 향수에 근거했던 근대건축은 기능과 생산성을 우선하는 소위 근대운동에 의해 지 배되고 말았다.

기술적인 이미지와 근대예술의 여러 사조에 영향을 받은 근대건축은 점차 기계같은 작 품이거나 추상적인 조각품 또는 복잡한 거대한 산업구조물처럼 구상되어져 갔다. 그리하여 근대도시환경은 근대 이전의 도시에서 볼 수 있었던 건물들 간의 이유있는 관계 속에서 형 성된 다양한 도시공간에서의 경험은 사라지게 되고, 단지 추상적인 조형작품을 볼 때 갖게 되는 경험이외에는 아무것도 호소하지 못하게 되었다. 점차 근대도시는 온갖 크기와 모양을 갖는 고립되고 무관한 그리고 단지 인간의 경험에 매우 모호하게 관련되기만 하는 조각난 건물들의 집합체처럼 되었다.

11) ‘전원도시’는 Ebenezer Howard가 ‘Garden Cities of Tomorrow(1898)’라는 글에서 제안한 인구 3만정도의 자족도시(自足都市)로, 최초의 전원도시는 Letchworth(1903)이다. ‘빛나는 도시’는 Le Corbusier의 도시계획 안으로 고층수직정원도시를 만들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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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14> 개방형 도시의 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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