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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제9강 화신미용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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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강 화신미용부

1. 오엽주 미용실

오엽주는 한국 최초의 미용사로 알려져 있다. 최초로 미용실을 개 업한 미용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실명으로 전해지는 최초이고 그 이전에도 미용실이나 미용인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그녀는 평양 태생으로 대판으로 건너가 여고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를 거친 후 일본 영화계에 진출했으나 실패한 후 돌아와 한국인 이 처음 개업한 화신 백화점 이층에 미용실을 개업했다. 오엽주는 집 념과 추진력이 강한 여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 갔던 것은 어릴 적부터 꿈이 영화배우였기 때문이며 그것이 안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았을 때 곧 미용을 배워 귀국해서 개업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모두 당시 잡지의 취재기사에 실려 있는 것이다. 잡지는 월간 『삼천리』로 파인 김동환이 창간해서 주관하고 있던 종합잡지로 1930년대엔 한국을 대표하는 잡지였다. 특히 문화면의 기사는 지금도 귀중한 자료로 취급되고 있다.

이 잡지에는 1933년 5월호와 1934년 8월호, 두 번에 걸쳐 오엽주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첫 번째는 개업 바로 전날 여기자가 오엽주를 인터뷰한 것이고, 두 번째는 미용실을 직접 찾아가 취재한 기사이다.

따라서 이 기사들에는 오엽주의 당시 사진도 실려 있고, 미용실 안 사 진도 실려 있으며 고객층, 미용실 내부의 광경 등이 짧지만 사실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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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되어 있다. 오엽주 미용실은 이층 서편쪽, 구석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미용실 안은 어떻게 생겼을까? 취재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 다.

실내장치는 길게 모로 된 양식 방안 리발소 모양으로 아조 큰 체경을 삼사대 놓았고, 가로 눕는 긴 의자를 그 앞에 모다 놓았다. (중략) 내가 뒤따라 왔던 아까 그 간부씨는 늙은 청춘의 체면도 돌아볼 결 없이 한 모퉁이에 노인 응접 테불에 가서 앉더니 책상 위에 놓인 서양 미인들 의 알밤을 보고 있다.

지금의 어느 동네 미용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 양 미인들의 알밤’이 비치되어 있는 것까지 똑같다. 그렇다면 고객들은 어떤 사람들이 주로 올까?

이 화장실에 드나드는 여성은 하로에도 사오십 명, 그중에는 학교 교 사, 여배우, 여가수 또 아모개하는 사회명사, 또 모모씨 등의 여류문사 간혹은 여학생들도 끼인다. 나이는 대개 삼십 내외가 대부분이다. 가는 날을 붙잡으려 늙게 되려는 구월 국화들이라 할련고. (중략) 화장술은 점점 발달되어 지금은 웬간한 가정부인들도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씩 오는 이가 많다던가.

한 증언에 의하면 이때 고객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은 왕족들 이었다고 한다. 평소 몸치장을 다른 사람들이 해주었던 그들은 왕조 가 막을 내리자 머리를 빗고, 감고, 치장하는 일 자체가 매우 번거롭 고 힘겨운 일이 되었다. 그때 미용실이 생기자 단골로 찾아와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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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맡겼는데 대부분 빗는 일조차 하기 싫어해 비듬부터 털어내는 게 기본 순서였다는 것이다.

매스컴에는 그녀에 관한 기사가 이따금 실리곤 했다. 대부분 화제성 기사였다. 그 기사 중에는 처음으로 쌍꺼풀 수술을 받은 사실도 실려 있고, 고쟁이 대신 코르셋을 입고 다닌다는 기사도 있는가 하면, 검정 통치마에 선글래스 차림이 화제에 오르기도 하고, 다양하고 화려한 남 성 편력에 대해서도 믿거나 말거나식의 기사가 실려 있다.

오엽주 미용실은 개업 직후 화신 백화점의 화재로 말미암아 지금 신 세계 백화점인 동화 백화점으로 이전 개업했다. 한국 최초의 미용실 원 장으로 숱한 화제를 뿌렸던 오엽주는 하와이로 이민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2. 한국의 미용실: 일본서 기술 배워 1933년 종로에 첫선, 파마비 쌀 두 가마 값

사람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요소의 하나가 헤어 스타일이다. 자신의 개성을 잘 표현하는 것이 점차 중요하게 되면서 헤어 스타일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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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1980년대 이후 한국의 미용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 중심에 미용 실(美容室)이 있다. 머리를 가꾸는 곳에서 동네 사랑방으로, 복합 문화공간으 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미용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동안 두 달에 세 번꼴로 편도 한 시간 반을 들여 머리를 깎으러 다녔다. 이사를 한 후에도 이전에 다닌 단골 미용실을 찾은 것이다. 그가 8년 넘게 한 미용실만 고집한 이유는 다른 미용실에 가는 것이 귀찮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미용실에 가면 머리 길이와 가르마의 위치 를 알려주고 ‘수염은 깎지 말고 샴푸는 대충 한 번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설 명해야 하는데 그러고 나면 지친다고 했다. 설명한다 해도 그대로 깎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문을 열고 ‘안녕하세요’ 한마디하고 의자에 앉으 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단골 미용실로 향했다.

미용실은 머리 하는 곳이다. 자신을(머리 모양을) 기억한다는 것만으로 무라 카미에게 단지 머리만 깎는 곳이 아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가 된 것처 럼, 우리 삶에서 미용실은 ‘머리 하는 곳’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소문의 진 원지이자 유통의 허브가 미용실’이라는 말이 있다. 미용실에는 주부들을 위 한 여성 잡지가 완비돼 있고 여성들은 마실 가듯 편하게 미용실에 들러 수 다를 떤다. 20년 경력의 한 미용사는 “미용실에 오면 연예인이건 일반인이건 꾸미지 않은 원래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맨 얼굴에 샴푸를 하고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1~2시간 동안 미용사와 함께하다 보면 솔직한 대화가 많이 오 간다. 그러다 보니 고민 상담도 하고 다른 사람을 욕하거나 흉보기도 한다”

고 말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용실은 일본에서 미용을 배운 한국의 1호 미용사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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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주 여사가 1933년 서울 종로 화신백화점 안에 개원한 화신미용원이다.

유행을 주도하던 기생들이 주 고객이었다. 당시 여성들은 한 달에 한 번 머리 감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화신미용원의 중요한 메뉴 중 하 나는 ‘삼푸’였다. 요금은 1원50전~2원으로 당시 파마 가격이 쌀 두세 가마 값인 20원이었던 것을 고려해 보면 일반 여성에겐 샴푸만 하는 것도 부 담이었다.

광복과 6·25전쟁을 지나 70년대는 기술 경쟁이 화두였다. 미용기술만 뛰어나 면 미용실 경영이 가능한 시기였지만 대부분의 미용실은 영세했고 미용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낮았다. 경제성장으로 고객의 소득 수준이 올라가면서 미용업계가 호황을 맞은 80년대에는 로레알·웰라 같은 해외 유명 브랜드가 국내 미용시장에 진출했다. 미용실 경영에 마케팅 개념이 도입되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고객을 유치하려는 미용실이 나타났다. 90년대는 국내외 대형 프랜차이즈가 등장한 시기다. 미용실 원장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던 방식 에서 탈피해 고객관리·마케팅·인사관리 등이 전문화되고 전문대학에서는 미 용 관련 학과를 만들어 미용사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 다양한 개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고객의 요구를 충족시켜 가 는 과정에서 미용실은 남성 전용·컬러링 전문·클리닉 전문 등 세분화·전문화 됐다.

국내 미용실의 해외 진출도 활발해진다. 2005년 중국에 1호 점을 연 이훈 헤어는 현재 중국에서 140개 가맹점을 운영하며 ‘미용의 한류’를 불러일으 키고 있다. 2015년까지 중국에 1000개 점포를 여는 게 목표라는 이재규 대표 는 “한국 미용실이 외국에 진출하면 간판만 가는 게 아니라 미용 전문제품, 잡지, 언어, 가요 등 문화가 함께 진출하게 된다. 세계 최대 시장 중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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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용의 세계화를 이룰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3. 최초로 쌍꺼풀 수술을 받은 한국 여성, 오엽주 [중앙일보] 2010.10.21

오엽주는 최초로 쌍꺼풀 수술을 받은 한국인 여성이다. 그녀가 쌍꺼풀 수술을 받은 1930년 즈음에는 일본에서도 여배우 몇 명이 겨우 쌍꺼풀 수술 을 할 정도인 때였다. 동경에서 ‘퍽 예쁘게’ 수술에 성공하고 돌아온 그녀를

‘공(孔)안과’에서 특별 초빙해 자세한 얘기를 듣고 쌍꺼풀 수술을 시작했다고 한다(‘고국의 여름을 찾아온 개화기 최초의 미용사’, 조선일보, 1972. 4. 20).

 그런데 그녀의 ‘최초’ 타이틀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한국 최초의 미용 사이기도 하고(‘본정에 있는 여자미용원-금월 말에 동원을 졸업하는 오엽주 양’, 동아일보, 1926. 6. 25), 일본에 건너가 영화배우로 활약한 최초의 ‘한류’

배우이기도 했다(‘오엽주-일본 영화계에 조선 여류스타’, 동아일보, 1927. 7.

19). 미용술을 배우기 전에는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인텔리 여성이기도 했다.

 1933년에 문을 연 그녀의 미용실에는 당대 유명인사들의 출입이 끊이질 않았다. 문예봉·김연실·신일선 같은 배우들, 허영숙·모윤숙·전숙희·박인덕 등 의 신여성들, 그리고 부호 민규식의 부인이나 이강공(의친왕)의 가족들까지 그녀에게 머리 손질을 맡겼다. 법조인 장후영, 소설가 심훈 등도 이곳 단골 이었다(『모던 걸, 치장하다』, 국사편찬위원회, 2008). 그녀는 또한 신문에 미용법, 헤어스타일의 트렌드 등에 대한 칼럼을 싣기도 하는 등 미용계의 중 심인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오엽주의 이와 같은 화려한 이력의 이면에는 나름의 굴곡진 삶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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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일본에서 영화배우 생활을 하던 시절 그녀는 돌연 배우 일을 그만두 고 잠적했었다. 이 시기 그녀는 몰래 아이를 낳기도 했으며, 카페 여급으로 일하기도 했었다.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녀가 꿋꿋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화의 논리를 잃지 않았기 때문 이었다. 성형수술로 자신의 몸을 바꿀 때에도, 자신의 몸을 상품화할 때에도, 다른 여성들의 몸을 아름답게 꾸며줄 때에도 그녀는 늘 당당했다. 모든 것은 스스로의 의도와 선택이었다고 말하면서(‘오엽주씨의 미용원’, 『삼천리』, 1933. 4).

 “조선 부인들을 건강하고도 어여쁘게 만드는 것이 나의 목적이요, 또 반드 시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나는 미용사도 한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자처합니다.”(‘색다른 직업여성과 그들이 본 세상’, 동아일보, 1936.

1. 6)라고 말하며 그녀는 자신의 몸으로 그리고 기술로 여성들 스스로가 ‘미 (美)’의 주체가 되는 법을 보여주었다.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

한국 최초의 성형미인 오엽주가 ‘엽주미용실’을 개업하며 광고용으로 찍은 홍보엽서 사진. 왼쪽에서 넷째 색안경을 쓴 여성이 오엽주다. 1933년 경성 화신백화점에 미용원을 차렸다가 35년 1월 화재로 문을 닫게 되자 그해 12 월 종로 영보빌딩에 엽주미용실을 새로 개업했다. [사진 출처: 『모던 걸, 치 장하다』, 국사편찬위원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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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수정(2005). 「한국미용100년」. 동서교류.

문화원형 백과사전(2011). 다음백과사전. 다음케뮤니케이션.

브리태니커(2011). 다음백과사전. 다음케뮤니케이션.

손미경(2005). 「한국 여인의 髮 자취」. 이환.

손미경(2009). 고전머리따라하기. 미디어뷰.

중앙일보(2011). 중앙일보사

정현진(2005). 「미용문화사」. 광문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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