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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중후반 무성영화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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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사 1 제6강 : 1920년대 조선 무성영화의 경향, 카프영화

1920년대 중후반 무성영화의 전성기

1. 시대적 배경과 영화 환경

- 1920년대 중후반 조선에서의 정치사회적 상황 및 영화제작의 흐름 등에 대해 미리 생각 해보기.

- 1926년부터 1929년까지 조선에서는 약 20여 개의 영화사가 생겨났고, 약 40~50편의 영 화가 만들어졌다. 실질적으로 무성영화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2.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1926)

- 조선총독부는 1926년 7월 5일 총독부령 제59호로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을 제정․공포하 였다. 전문 13조로 구성된 이 규칙을 계기로, 그때까지 각 지방 경찰서에서 관할하던 영화 상영허가 사무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경찰과 도서실 주관으로 전국적으로 일원화되었다.

그런데 이는 1925년 일본에서 제정된 동명의 규칙을 그대로 가져와 조선에 적용한 것이었 다. (※내용확인 : 제3조, 제4조, 제5조)

3.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설립

-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은 일본인 요도 도라조(淀虎藏)가 설립하였다. 여기서는 이경손, 이규 설 등 계림영화협회 영화인들을 영입하여 활발한 영화활동을 하였다. 이 회사의 제작실무자 는 쓰모리 슈이치(津守秀一)였다.

- 제1회 작품은 1924년 일본 데이코쿠(帝國)시네마에서 제작하여 경성에서도 상영한 바 있 는 <농중조>(1926. 6)였다. 감독은 이규설, 주연은 복혜숙, 나운규, 이규설이었다.

- 이영일이 소개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1) 명문가의 딸 마화숙(복혜숙 분)에게는 부모가 일찍이 정해준 약혼자가 있었으나 우연히 대학생 양안식(이규설 분)을 알게 되어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약혼자와 아버지의 방해에 부딪쳐 곤경에 처하게 되지만 안식의 친구 공진삼 (나운규 분)의 도움을 받아 사랑을 이루려고 애를 태운다.

- 5권이라는 짧은 길이의 이 영화는 자유연애와 대담한 애정표현을 다루어 화제가 된 반면 동명의 일본작품의 모작이라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4. <아리랑>(1926.9)의 히트

-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제2회 작품 <아리랑>(8권 1,599피트)의 히트로 조선에는 무성영화 전성기가 찾아 왔다. “800여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하여 3개월 만에 만들어진”2) “<아리랑>

1) 이영일, 『한국영화전사』, 소도, 2004, 88쪽.

2) 김종원 외, 『우리 영화 100년』, 현암사, 2001, 114쪽.

(2)

이 개봉되자 단성사 앞에는 조국상실의 민중이 운집하여 장사진을 이루어 문짝이 부서졌고 전국 방방곡곡의 극장마다 전무후무한 흥행을 기록했다. 이 때뿐만 아니라 <아리랑>은 오 랫동안을 두고 계속해서 극장이 없는 벽촌에서도 상영했다.”3)

(1) <아리랑>의 줄거리

(2) <아리랑>의 기법적인 특징

(3) <아리랑>의 감독에 대한 논란

(4) 나운규의 생애와 <아리랑>

(5) <아리랑>의 영화사적 의의

5. <아리랑> 이후 1920년대 나운규의 영화활동

- 나운규는 1937년 36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17편의 영화를 연출하였고 20편의 시나 리오를 창작, 또는 각색하였으며 24편의 작품에 출연하였다. 그의 작품활동은 크게 1920년 대와 1930년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중에서 전자의 시기에 보다 자신 있고 박력 있는 모습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고 볼 수 있다.

(1)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의 영화활동

① <풍운아>4)(1926.11)

- 러시아 용병에 가담했다가 귀국한 청년 니콜라이 박(나운규 분)이 옛 애인(김정숙 분)이 이미 출가한 차가운 현실에 직면하자 좌절감을 안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의 작 품이다. 이 영화는 조선총독부의 필름검열에서 1,000피트 가량이 삭제되었다.

3) 이영일, 앞의 책, 102쪽.

4) 자세한 줄거리는 발표내용 참조.

(3)

- 한편, 이 영화의 조선극장에서의 상영이 끝난 후 나운규는 이 작품과 <아리랑>의 프린트 를 들고 변사 우정식 등과 함께 고향 회령에 가서 순회상연을 하였는데, 이때 <아리랑>이 크게 환영을 받았으며 동시에 나운규의 고향 친구인 윤봉춘으로 하여금 영화계 입문의 결심 을 하게끔 하였다고 한다.

② <들쥐>(1927)

- 결혼을 약속한 여자(신일선 분)가 어느 악덕 부자(윤봉춘 분)의 덫에 걸려 그의 손아귀에 들어갈 뻔 하지만 이때 ‘들쥐’로 통하던 ‘정의로운’ 부랑자(나운규 분)가 나서 그녀를 애인 (주삼손 역)에게 돌려준다는 내용의 활극조의 신파극이다.

③ <금붕어>(1927.7)

- 남편(나운규 분)은 현대문화사에서 모집하는 현상 작품에 ‘금붕어’라는 소설로 당선이 된 다. 부인(신일선 분)과는 나날이 행복한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어느 날 두 부부 사이에는 사소한 오해가 일어난다. 부인이 집을 뛰쳐나간다. 남편은 어항에서 놀고 있는 금붕어를 바 라보는 것으로 유일한 낙을 삼으며 고독을 달랜다. 그 사이에 오해는 풀렸다. 부인이 잘못 을 뉘우치고 돌아온다. 두 부부는 다시 행복해진다.

④ 나운규의 탈퇴

- <풍운아>와 <금붕어>는 흥행에 성공한 반면, 친구 윤봉춘이 출연한 영화 <들쥐>는 흥행 에 실패하였고, 이를 계기로 나운규, 윤봉춘과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요도 도라조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그리하여 결국 1927년 9월 나운규는 윤봉춘, 이금룡, 신일선, 김정숙, 이창 용, 이명우 등을 포함하여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하였다.

- 한편,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남게 된 감독 김태진 및 배우 주인규, 남궁운, 이월화 등은

<뿔 빠진 황소>5)(1927.11)를 제작하였으나, 이를 마지막으로 조선키네마주식회사는 문을 닫게 되었다.

(2) 나운규프로덕션에서의 영화활동

- 나운규프로덕션은 약 2년 반 동안 5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해산하였다. 이 프로덕션의 총 간사는 단성사 지배인 박정현이었고, 단성사주 박승필은 지속적으로 나운규프로던션에 지원 을 아끼지 않았다.

① <잘 있거라>6)(1927.11)

- 이 작품은 나운규가 원작, 각색, 감독, 편집, 출연 등 1인 6역을 맡았고, 10일 동안 북간 도 현지 촬영을 강행하여 완성되었다. 연기는 물론이고 촬영 이창용, 스틸 이명우 등 스태 프도 모두 조선키네마프로덕션 출신이었다.

② <옥녀>(1928.1)

- 형제가 한 여자 옥녀를 사랑하다가 결국 형이 동생의 죄를 뒤집어쓰고 희생한다는 내용 의 영화로, 나운규, 주삼손, 전옥, 이경선, 박정섭 등이 출연하였고 이창용이 촬영하였다.

5) 어느 농촌에 두 친구가 살고 있었다. 한 친구는 지주의아들이요, 또 한 친구는 가난한 집 아들이다. 그들 두 친구는 꼭 같이 소작인의 딸을 사랑한다. 소작인의 딸은 지주의 아들보다도 가난한 집 아들을 사랑했다. 그러 나 지주의 권세에 못 견디어 소작인의 딸은 지주의 아들과 결혼한다. 그 후 소작인의 딸은 마음을 주지 않았 다. 지주의 아들은 할 수없이 가난한 집 아들에게 소작인의 딸을 돌려준다.

6) 자세한 줄거리는 발표내용 참조.

(4)

- <잘 있거라>와 더불어 <옥녀>도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③ <사랑을 찾아서>(1928.4)

- 박승필의 지원과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경영주였던 요도 도라조의 출자를 받아 제작된, 14권이라는 장대한 분량의 작품이었다. 검열로 인해 <두만강의 건너서>→<저 강을 건너서>

→<사랑을 찾아서>로 제목이 바뀌었다. 만주로 유랑하던 많은 사람들 중에 몇 명의 인물이 서로를 알아가다가 결국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는 내용의 영화이다.7)

④ <사나이>(1928.9)

- 채석장을 배경으로 주인공 사나이가 동지를 규합하여 그들을 착취하는 악덕 주인을 물리 치고 채석장을 꾸려 나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부잣집 아가씨 역으로 류 신방이라는 인천 기생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감독은 홍개명이, 촬영은 손용진이 담당하였고, 나운규, 윤봉춘, 주삼손, 이금룡, 박정섭 등이 연기하였다.

⑤ <벙어리 삼룡>8)(1929.1)

- 봉건적 지주 밑에서 일하는 머슴 삼룡이 주인집 며느리(류신방 분)을 사랑한다는 내용의, 나도향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나운규, 주삼손, 윤봉춘 등이 출연하였고 손용진이 촬영을 담당하였다.

- 조선극장에서 개봉되었으나 흥행에는 실패하였고, 이를 계기로 나운규프로덕션은 위기를 맞이하였다. 결국 나운규는 나운규프로덕션을 해산하고 영화계를 떠나 몇 개월간 일본에 머 무르게 되었다.

6. 여타 상업 무성영화들

(1) 1926년~1927년의 제작경향9)

- 당시 조선영화계에서는 <장한몽>, <산채왕> 등의 신파적 흥행물이 유행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정기탁프로덕션 제작, 이경손 각본 및 감독, 신일선, 정기탁 주연의 <봉황의 면 류관>(1926), 토성회 제작, 서월영 각본, 이규설 감독, 김소진 주연의 <불망곡>(1927), 토 성회와 덕영상회 제작, 복혜숙, 이규설, 김원보 주연의 <홍련비련>(1927) 등이 있었다.

- 이때 크게 흥해한 작품으로는 <낙화유수>(1927)가 있었다. 이 영화는 기생과 화가의 슬 픈 로맨스를 그린 창작 신파극으로, 변사 출신 김영환 원작, 이구영 각본 및 감독, 복혜숙, 이원용 주연의 작품이었다.

- 이 시기 극동키네마는 두 편의 특별한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그것은 첫째 김철산 감독, 김철산, 신일선 주연의 <괴인의 정체>(1927)이라는 오락활극물이었고 둘째 극동키네마 제 작, 전옥 및 주인규 각본, 황운 감독, 임운학 주연의 <낙원을 찾는 무리들>이라는 사회비판 적인 작품이었다.

- 한편, 이필우는 <흑과 백>(1927)과 연쇄극 <낙양의 길>(1927)을 감독, 촬영함으로써 영 화활동을 지속해나갔다. 이 중에서 <낙양의 길>의 출연진은 모두 조선권번의 기생이었다.

7) 자세한 내용은 이영일, 앞의 책, 123~124쪽 참조.

8) 자세한 줄거리는 발표내용 참조.

9) 각 작품의 줄거리는 발표내용 참조.

(5)

(2) 심훈의 <먼동이 틀 때>10)

- <장한몽>과 <산채왕>의 부진 이후 계림영화협회는 주식회사 체제로 변환하고 <월남 이 상재 장례식 실사>를 찍은 후에 심훈 각본 및 감독의 <먼동이 틀 때>를 제작하였다. 주연 은 강홍식, 신일선, 한병룡 등이었고, 미술은 안석영이 담당하였다.

- 이 작품은 1920년대 사회상을 리얼하게 묘사하였다는 이유로 <아리랑> 못지않은 호평을 받았다. 연출과 촬영의 참신함과 내용의 충실함이 비평가들에게 각광을 받았던 것이다.11) (3) 1928년~1929년의 제작경향12)

- 당시 조선에서는 비교적 많은 편수의 영화가 제작되었으나, 동시에 다수의 영화사가 난립 하였다. 덕영상회의 <순정은 신과 같다>(1928), 고려영화제작소의 <혈마>(1928), 금강키네 마의 <삼걸인>(1928)과 <종소리>(1929), 중앙키네마의 <약혼>(1929) 등이 이 시기에 만들 어진 작품들이다.

- 대륙키네마는 오락영화를 표방하며 유장안 감독의 <나의 친구여>(1928)와 <지나가의 비 밀>(1928)을 제작하였다. 특히 <지나가의 비밀>은 지나가에 인질로 잡혀간 조선 여인(복혜 숙 분)을 조선 청년이 신고 끝에 구출한다는 내용의, 만주를 배경으로 하는 활발한 템포의 활극이었다.

- 한편, 이경손은 정기탁프로덕션에서 알렉산더 듀마의 원작인 <춘희>13)(1928)를, 이경손 프로덕션에서 조선시대 소설인 <숙영낭자전>14)(1928)을 감독하였다.

7. 경향영화 (1) 카프의 발족

- 1917년 러시아혁명의 여파로 1922년 이적효, 이호, 김홍파, 김두수, 최승일, 심훈, 송영, 김영팔 등이 조선에서 염군사(焰群社)를 조직하고 1923년에는 김기진, 박영희, 안석주, 이익 상, 김복진, 이상화 등이 파스큘라(PASKULA)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925년 8월 23일, 이 두 조직이 합하여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카프(KAPF)’를 발족하였다.

- 1927년 카프는 ‘무기로서의 예술’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카프전국대회’를 개최함으로써

10) 감옥에서 풀려나온 한 사나이가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감옥에서 받아 나온 돈을 떨어뜨린다. 식당에서 일하는 여종업원의 아편쟁이 오빠가 그돈을 주워서 달아난다. 여종업원이 돈을 마련하여 갚자 사나이는 고마 움을 느낀다. 어느 날 여종업원의 애인과 그녀를 짝사랑하던 불량배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다. 그때 감옥에서 갓 나온 그 사나이가 나타나서 여종업원의 애인이 위기에 처하자 불량배를 살해하고 그녀와 애인의 행복을 빌면서 다시 감옥으로 끌려간다.

11) 영화의 줄거리는 이영일, 앞의 책, 116~117쪽 참조.

12) 각 작품의 줄거리는 발표내용 참조.

13) 한 남자가 술집에 나가는 여자와 사랑을 한다. 그의 아버지는 그들의 만남을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그녀를 찾 아가서 진실로 자신의 아들을 사랑한다면 단념해달라고 간청한다. 그녀는 그의 아버지의 부탁을 받아들여 그 를 외면하며 만나지 않는다. 그녀는 오랜 지병인 폐결핵을 앓다가 외롭게 죽는다.

14) 부부가 행복하게 살아가던 중 남편이 과거를 보러 떠난다. 아내는 시부모의 학대에 시달리다가 견디지 못하 고 가슴에 칼을 꽂고 자살을 한다. 그녀의 가슴에 꽂힌 칼은 아무리 힘을 주어 뽑으려 해도 뽑히지 않는다.

남편은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여 돌아와 죽은 부인을 통탄하면서 그녀의 가슴에 있는 칼을 뽑는다. 그때 파랑 새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오르고 남편은 파랑새가 부인의 영혼이라고 여기고 파랑새와 함께 여생을 보낸다.

(6)

적극적인 노선을 채택하였고, 문학동맹, 연극동맹, 미술동맹, 영화동맹 등을 조직하였다. 영 화동맹 대표 및 연맹서기장은 윤기정이 맡았다.

(2) 조선영화예술협회

- 1927년 안종화, 이경손, 김을한, 이우 등이 지식을 갖춘 신인 발굴, 영화촬영소 설치, 각 본가 육성, 영화동호인회 조직 등을 목적으로 조선영화예술협회를 설립하였다. 여기서는 연 구부를 두고 신인 연구생을 모집하였는데, 이때 김유영, 임화, 서광제, 박영호, 조경희 등 20명이 선발되었다. 그런데 당시 카프의 맹원들이던 이들은 기존의 인원들을 물러나게 하고 협회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3) 경향영화의 작품들15)

① <유랑>(1928)

- 조선영화예술협회의 1회이자 마지막작품이다. 김영팔 각본, 김유영 감독, 임화, 서광제, 조경희 주연이었다. 농촌을 무대로 하여 지주 대 가난한 농민이라는 구도와 사랑하는 남녀 를 훼방하는 지주의 횡포를 다루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신인들만으로 만들어진데다가 기술 적인 결함도 보임으로 인하여 흥행에는 참패하였다.

② <혼가>(1929)

- 카프 영화인들의 두 번째 거점이던 서울키노 제작, 김유영 감독, 임화, 이영희, 박영호, 남궁운 출연, 손용진 촬영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고향을 등졌던 세 청년이 새로운 이데 올로기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이다.

③ <암로>(1929)

- 진주의 남향키네마 제작, 강호 감독, 강호, 박영옥 주연의, 방앗간이 정미소로 변하는 등 봉건시대의 생활이 날로 몰락해 가는 모습을 담은 영화이다.

④ <지하촌>(1931), <화륜>(1931)

- 1930년대 들어 서울키노는 각각 강호, 김유영 감독의 <지하촌>과 <화륜>을 만들었다.

<지하촌>은 한강 다리 밑의 빈민들의 생활을 묘사한 영화이고, <화륜>은 어느 사건의 희생 자로서 10년간 복역을 한 남자가 영웅적인 행동으로 다시 감옥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과정 을 그린 작품이다.

(4) 경향영화의 실패 원인

- 첫째 극심한 일제의 검열과 경찰의 인사 구속, 둘째 이념과 시류에 편승한 노선 간의 갈 등, 셋째 대중의 외면과 흥행 부진으로 인한 제작 기반의 취약 등16)을 거론할 수 있다.

8. 1920년대 중후반 무성영화의 전성기의 특징 및 의의 - 생각해보기

15) 각 작품의 자세한 줄거리는 발표내용 참조.

16) 김종원, 앞의 책, 15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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