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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자유적 납돈(鉛貝)에 나타난 고대 해상교류의 인식범위--송옥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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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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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전자유적 납돈(鉛貝)에 나타난 고대 해상교류의 인식범위 86). 송 옥 진*. Ⅰ. 서 론 Ⅱ. 고대 동아시아 교류에 대한 기존 인식 1. 서기전 7세기 발조선의 문피(文皮)교역 2. 한반도내 일본 규슈 및 동남아시아와의 교류 3. 고조선시대 주변문화와의 교류 Ⅲ. 대전자유적 납돈(鉛貝)의 고고학적 의미 1. 하가점 하층문화의 개요 2. 대전자유적의 개요 3. 대전자유적 개오지조개 출토현황 Ⅳ. 고조선시대 해상교류 인식범위 1. 개오지조개로 본 교역의 가능성 2. 고조선시대 해상교류 능력 Ⅴ. 결 론. * 사단법인 대한사랑 학술국장.

(2) 222 仙道文化 제 30 권. 【국문요약】 한국문화는 오랜 기간동안 주변 문화와의 교류를 통해 전통적인 유불선 삼교의 유입과 발전을 거듭함은 물론, 고조선 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문화 사상인 한국선도의 유출 및 확산이 오늘날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 전 세계에서 부는 K-food, K-fashion, K-style 및 각종 K-culture 역시 전통문화와 함께 끊임없이 주변 문화와 교류한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그러 나 고대 동아시아의 교류에 대한 인식, 특히 기록이 소실되어 다양한 문헌 자료로 증빙되지 않는 고조선 시대의 교류에 대해서는 외부로부터 일방적 문화유입을 전제하고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지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컨 대, 고조선시대 해상교역이라 한다면 대부분의 연구결과물에서는 뺷관자뺸에 나오는 발조선과의 모피교역을 그 상한으로 보고 있고 이조차도 뺷관자뺸가 집필된 시기와의 시간적 괴리감을 들어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고대 동아시아교역에 대한 인식을 먼저 살펴보고 고조선문화로 추정되는 하가점하층문화의 대표 유적인 대전자유적에서 출토된 납돈을 가지고 고대 해상교역의 인식범위가 기존 연구의 인식범위보다 훨씬 광범위 함을 설명하고자 한다. 주제어 : 대전자유적, 하가점하층문화, 고조선, 해상교류, 개오지조개.

(3) 대전자유적 납돈(鉛貝)에 나타난 고대 해상교류의 인식범위 223. Ⅰ. 서 론 한국사에서 주변국과의 교류 역사는 인간이 경제생활을 영위한 시간만큼 오래되었다. 어느 나라든지 외부와의 교류없이 독립적으로 국가 생활을 지속적으로 영위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경제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상호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개개인이나 집단이나 비슷한 양상을 보인 다. 가깝게는 중국과 일본, 더 나아가서는 그 너머의 국가와 지속적인 교류 관계를 하고 상호 영향을 미친 기간은 문헌에 적혀 있는 것보다 훨씬 오래되 었다. 활발한 교류는 국가간 국경문제와도 밀접하게 관계하는데 이러한 점은 최근 각국의 고고학 자료들이 공유되면서 더욱 그 연구가 활발히 진행 되고 있다. 예컨대, 최근 한국 고대사에 있어서 고려와 고구려의 북계연구 나 고구려와 위만조선의 경계에 관한 연구에서 그동안 한반도 내에 비정되 었던 평양의 위치나 국경문제를 문헌 및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새롭게 해석 하고 있다.1) 세계적으로 한류가 유행하고 이에 동반하는 복식, 음식, 노래 및 영화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화 전반에 대한 재평가가 새로이 이루어지는 데 비해 한국 전통문화가 가진 특별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이루어지 지 않은 실정이다. 한류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선도문화를 빼놓고서는 충분 한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을뿐더러 이는 고조선시대부터 지속되어온 주변 국과의 교류형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본고에서는 수많은 고조선 관련 연구에도 불구하고 기존연구에서 문헌기록을 위시하여 고고학 성과를 첨 부자료로만 제시한 것에서 더 나아가 고조선문화로 인식되고 있는 하가점 하층문화, 특히 이 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인 대전자유적의 고고학적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특히 대전자유적에서 다량 발굴된 개오지조개가 가진 상징성 및 화폐성을 검토하여 기존에 인식되어온 고대 해상교류의 시간적 01) 복기대 외, 고구려 평양과 그 여운, 주류성, 2017; 윤한택 외, 압록과 고려의 북계, 주류성, 2017; 임찬경, 고구려와 위만조선의 경계, 한국학술정보, 2019..

(4) 224 仙道文化 제 30 권. 공간적 범위를 재고해 보고자 한다. 실제로 최근 지속적으로 발표되는 중국 동북지역 하가점하층문화대의 고고발굴사실들에 대한 해석과 제주도 및 오키나와, 규슈 지역의 고대 교역에 대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서기전 7세기, 산동반도와 요동반도의 교역범위를 넘어선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인의 해상교류의 한 면을 보여주는 유물로써 개오지조개 (cowries, 보배조개, 海貝)가 가진 의미와 주변 문화와의 교류범위를 고려 하여 고조선시대 새로운 해상교류 범위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Ⅱ. 고대 동아시아 교류에 대한 기존 인식 1. 서기전 7세기 발조선의 문피(文皮)교역 고대의 한국 교류사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언급되는 교류는 뺷관자 (管子)뺸 「규도(揆度)」와 「경중갑(輕重甲)」의 기록을 언급한 발조선(發朝 鮮)과 제나라의 문피(文皮)교역이다. 대체로 이들 연구는 뺷관자(管子)뺸의 서술자인 관중(管仲, 서기전 719년∼서기전 618년)의 시기에 조선이라는 국가가 있어 이들과 제(齊)가 문물교류를 하였다는 주장이다.2) 음산(陰山)에서 나는 연민을 이용하는 것이 한 방책입니다. 연(燕)나 라 자산(紫山)의 은(白金)을 이용하는 것이 한 방책입니다. 발조선(發 朝鮮)에서 나는 문피(文皮)를 이용하는 것이 한 방책입니다. 여수와 한수에서 나는 황금을 이용하는 것이 한 방책입니다. … 이는 귀한 것을 이용하여 부유함을 통제하고 좁은 지역을 이용하여 넓은 지역을 통제하는 방법입니다.3) 02) 서영수,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일조각, 1988; 이청규, 「청동기를 통해 본 고조선과 주변사회」, 북방사논총, 2002; 송호정,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푸른역사2003; 오강원, 「동북아시아 속의 한국 청동기 문화권과 복합사회의 출현」,동양학, 2011; 김정 렬, 「요서지역 청동기문화와 복합사회의 전개」, 동양학, 2012..

(5) 대전자유적 납돈(鉛貝)에 나타난 고대 해상교류의 인식범위 225. 고대 교역사 연구에 있어 뺷관자뺸의 기록을 언급하며 교류사의 시작을 서기전 7세기로 서술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삼국시대 이전의 국가체계에 대하여 뺷삼국유사뺸, 뺷동국통감뺸, 뺷조선왕조실록뺸등에 언급된 서기전 2300년 경 고조선의 건국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때문 에 교류사라고 하면 습관적으로 북쪽에서의 유입을 말하거나 ‘한중일 국가 적 차원의 대외교역은 위만조선으로부터 시작되어 중국 한나라 때 중국으 로부터 외신(外臣)의 지위를 받아 중국의 문물을 활발하게 수용하면서 반대 급부로 주변 종족들의 대 중국교역을 중개하는 역할이 시초’라는 설명을 하기도 한다.4) 게다가 뺷관자뺸 「경중갑」편 등의 문헌은 작성 시기가 서한 (西漢) 무제(武帝, 서기전 145년∼서기전 87년) 시기로 추정될 수 있으므로 이 문헌을 근거로 조선이란 국가가 서기전 7세기 무렵 중원 국가들과 교류 하고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5) 그러나 이러한 사서들에 서 서술 시기와 편찬 시기의 상이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 인근 지역 및 타국과의 경제활동 물품에 차이가 존재하고 이것들의 교류를 통한 상호 관계가 경제정책에 꼭 필요하다는 인식이 존재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오나라와 월나라가 조공을 오지 않으면 청컨대 거기서 나는 진주, 상아를 화폐로 만듭니다. 발조선이 조공을 오지 않으면 청컨대 거기서 나는 아름다운 모피와 갓옷을 화폐로 만듭니다. 우씨가 조공을 오지 않으면 청컨대 거기서 나는 흰 옥을 화폐로 만듭니다. …한장의 표범 가죽은 천금보다 귀합니다. (그것을 화폐로 만든 뒤에야) 8천리 밖의 발조선이 조공을 올 것입니다. …이러한 보물을 주관하는 사람이 없고 이러한 경제활동을 하여 연결하는 사람이 없고 멀고 가까운 나라가 서로 통하는 것이 없으면 사방의 나라에서 조공을 오지 않을 것입니다.6) 03) 김필수 외 옮김, 관자, 소나무, 2006. 925쪽. 04) 김태식, 「한국 고대제국의 대외교역」, 진단학보, 2006. 2쪽. 05) 임찬경, 고구려와 위만조선의 경계, 한국학술정보, 2019. 312쪽. 06) 김필수 외 옮김, 관자, 소나무, 2006. 963쪽..

(6) 226 仙道文化 제 30 권. 뺷관자뺸 「경중갑」편에서 보이는 “조공을 오게 하는 방법”은 사실상 주변 국의 주요 생산품을 이해하고 그곳에서 비교우위에 있는 상품을 거래하는 경제활동을 해야 하며 이러한 경제활동을 연결하는 사람이 없거나 서로 통하는 나라가 없으면 조공 오지 않는다, 즉 교류가 없을 것이라고 조언하 는 것이다. 고대의 교역에 관한 연구에 있어 대부분의 연구에서 언급하듯이 뺷관자뺸 고조선-제나라 간 문피교역 내용이 반복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그마저도 주로 화폐주조국인 중국과 고조선의 물품교역을 일반적인 현상 으로 보고 있다. 권태원7)(1989) 한창균8)(1992), 박순지⋅이춘규9)(1994), 정징원⋅하인수10)(1998), 서영수11)(1999), 김병곤12)(2000), 박선희13) (2002), 강봉룡14)(2004), 이도학15)(2004), 박준형16)(2004), 박선미17) (2005), 김태식18)(2006), 윤용구19)(2007), 박선미20)(2008) 등의 연구에 서 대부분 고조선의 존재와 교역의 여부를 말하고 있으나 ‘관자’, ‘강상유 적’, ‘보배조개’의 키워드로 교역을 설명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반면, 다음 절에서는 고대 교역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고조선과 제나라의 문피 07) 권태원, 「고조선의 문화강역문제」, 백제연구, 1989. 08) 한창균, 「고조선의 성립배경과 발전단계 시론」, 국사관논총, 1992. 09) 박순지⋅이춘규, 「고대부터 고려까지의 모피물에 관한 고찰」, 복식, 1994. 10) 정징원⋅하인수, 「남해안지방과 규슈지방의 신석기시대 문화교류 연구」, 한국민족문화, 1998. 11) 서영수,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일조각, 1988. 12) 김병곤, 「고조선 왕권의 성장과 지배력의 성격 변화」, 동국사학, 2000. 13) 박선희, 「복식자료와 복식형체를 통해 본 고조선의 영역」, 인문과학연구, 2002. 14) 강봉룡, 한국 해상세력 형성과 변천,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2004. 15) 이도학, 「삼국의 문화와 문물 교류과정」, 신라문화, 2004. 16) 박준형, 「고조선의 대외교역과 의미- 춘추 제와의 교역을 중심으로」, 북방사논총, 2004. 17) 박선미, 「전국∼진한 초 화폐사용집단과 고조선의 관련성」, 동북아역사논총, 2005. 18) 김태식, 「한국 고대제국의 대외교역」, 진단학보, 2006. 19) 윤용구, 「삼한⋅삼국의 교역」, 한국 고대사 연구의 새동향, 2007. 20) 박선미, 「고조선의 교역과 화폐사용에 대한 시론적 검토」, 동북아역사논총, 2008..

(7) 대전자유적 납돈(鉛貝)에 나타난 고대 해상교류의 인식범위 227. 교역 내용 이외에 다른 교역 내용을 이야기하는 연구결과들이 있어 일부 연구를 언급하고자 한다.. 2. 한반도내 일본 규슈 및 동남아시아와의 교류 한반도 남부의 해상교류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들은 한반도가 기본적으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형적 특성에 주목한다. 한반도는 대륙보다는 바다를 통해서 문물교류가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주장이다.21) 앞 서도 말했듯이 교역사를 이야기할 때 항상 북쪽에서의 유입을 말하는데 방위로 따져 볼 때 대륙문화가 한반도 문화형성에 끼친 영향은 1/4이고 나머지는 바다를 통해 들어온 해양문화라는 것이다.22) 이러한 해상교류 및 해양활동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동북아시아와의 문화 유입뿐 아니라 바닷길을 통한 동남아시아 계통과의 교류를 통한 문화유입이 이미 선사시 대부터 한반도와 동남아시아, 인도에 이르기까지 항해나 표류의 방법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23) 이 외에도 신석기시대 이래 해양교역을 주장하 는 연구자로는 최광식24)(2004), 최성락25)(2005), 윤명철26)(2005), 방민 규27)(2012)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한반도를 위시하여 일본, 오키나와 등 인근지역과의 교류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최광식은 200km 이상 떨어진 너른 지역에 고고학적으로 같은 시기라고 해도 좋을 유적에서 동일산지의 21) 송화섭, 「고대 동아시아 문화와 한반도 교류-관음의 바닷길을 중심으로」, 문화콘 텐츠기술연구원 학술대회, 2010. 12쪽. 22) 송화섭(2010) 3쪽. 23) 조흥국, 「고대 한반도와 동남아시아 및 인도의 해양교류에 관한 고찰」 해양도시문 화교섭학, 2010. 94쪽. 24) 최광식, 「한국고대무역사에 관한 고찰」 한국무역학회세미나, 2004. 25) 최성락, 「고고학에서 본 고대 동아시아의 해상교류」 도서문화, 2005. 26) 윤명철, 「한국의 고대문화와 해양 남방문화」 국사관논총, 2005. 27) 방민규, 「사천 늑도 유적으로 본 한반도 남해안 지역의 대외 교류」 해양도시문화교섭 학, 2012..

(8) 228 仙道文化 제 30 권. 흑요석이 발견된 것으로 고인류의 행동양식을 시사하였다. 신석기시대 이 후 한국 남부지역과 일본지역의 교류가 해안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며 창녕 비봉리 유적에서 발견된 배를 일본 조몬시대 독목주(獨木舟)와 비교하여 선박을 이용한 문화교류를 말하였다. 윤명철은 동아지중해에 선 사시대부터 해양활동이 활발했으며 특히 환황해권은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하여 지역간 교류가 일어난지 오래되었다고 주장한다. 시기적으로 차 이가 많이 나기는 하지만 방민규의 연구는 늑도유적에서 발견된 각종 漢 대 화폐와 낙랑계 및 야요이식 각종 유물출토를 근거로 중국(한군현)과 일본(왜)와의 해상교류사에서 중간교역로의 거점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파악하고 한 해상세력집단들이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연해주에 이르기 까지 원거리 항해를 할 정도로 활발하게 대외 교류를 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최근 국립제주박물관은 한국과 일본 오키나와의 조개 제품을 통해 선사 시대 문화를 재발견하는 주제로 해양문물교류전을 열었는데 제주와 오키 나와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보면 한반도와 제주도, 일본과 오키나와 간의 유사성을 넘어 선사시대의 문화 비교함으로써 오키나와산 조개가 류큐 열. [그림 1] 오키나와산 조개의 교역과 분포28) [그림 2] 동아시아 해양교류 네트워크29) 28) 국립제주박물관, 선사시대 문화의 재발견, 통천문화사, 2005. 141쪽 29) 이진민, 「고고학 자료로 본 섬문화 비교 연구 시론」, 국립제주박물관, 2005. 255쪽.

(9) 대전자유적 납돈(鉛貝)에 나타난 고대 해상교류의 인식범위 229. 도와 일본 본토를 거쳐 한국으로 유입된 교역의 경로를 나타내고 있다.30) 이러한 예는 일본의 박물관 및 교류사에 조개길이라는 명목으로 개오지조 개의 이동 루트를 설명하는 것과 같다.. 3. 고조선시대 주변문화와의 교류 최근 중국의 고고학 발굴성과 및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고조선시대 문화 가 중국 동북지역 하가점하층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이 많이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연구자로는 윤내현과 복기대를 들 수 있으며 교역과 관련해서는 정경희, 김연성의 연구를 꼽을 수 있다. 윤내현은 다수의 논문과 저서에서 일관되게 만주지역의 고고발굴성과를 예로 들면서 이 지역의 청동기 개시연대를 서기전 2500년으로 말한다.31) 이는 뺷삼국유사뺸와 뺷동국통감뺸등 사서기록 시기와도 일치하는 것으로 고 조선의 표지유물인 비파형동검 등이 중국 하북성(河北省)지역에서 출토되 는 것이나 장강(長江) 이남의 남쪽 바다에서만 생산되는 보배조개가 만주지 역에서 출토되는 것 등은 고조선과 중국지역 사이에 교역이 있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고조선과 중국지역 사이의 교역은 춘추시 대 초기인 서기전 7세기 이전부터 이미 있어왔던 사실이 중국 문헌 뺷관자 (管子)뺸, 뺷일주서(逸周書)뺸, 뺷시경(詩經)뺸에 기록되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이러한 견해는 앞선 첫 번째에서 보이는 다른 논문보다 앞선 연구결과로 이 이후의 다수의 논문에서 보배조개가 교역의 산물이고 이 내용이 뺷관자뺸 에 있었음을 서술하는 시초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복기대는 대전자유적이 속해 있는 하가점하층문화의 선대문화인 홍산문 화시기에서도 이웃 문화와의 교류가 있었음을 강조하였다.32) 일반적으로 30) 국립제주박물관, 선사시대 문화의 재발견, 통천문화사, 2005. 140~141쪽 31) 윤내현, 「명도전-고조선은 외화를 많이 보유한 부유한 나라였다」 수필한국사 제 11회, 1989; 윤내현, 고조선연구, 2004, 일지사; 윤내현, 「고조선의 실존문제-상 식적 탐색」 고조선단군학, 2011..

(10) 230 仙道文化 제 30 권. 황하 중류 유역의 문화가 홍산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보편적 견해의 오류 를 지적하면서 대문구문화의 역할과 교류, 혹은 그 사이의 진강영 문화와의 비교 연구 등을 통해 홍산문화 시기에서도 앙소문화에서 발견된 옥기가 홍산 문화 지역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였다.33) 더불어 홍산 문화 지역의 후대문화인 하가점 하층문화의 시기 교역에 대한 문제를 고찰하면서 동시대 존재하던 각지의 문화와 모두 교류하고 있었다고 보았다.34) 나아가 직접교 류인지 간접교류인지의 여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인근의 고태산문화에서부 터 저 멀리 북방 대초원지문화까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35). [그림 3] 발해만 연안 전기 청동기문화 교류관계36). 김연성은 서기전 16세기 유적인 대전자유적에서 출토된 개오지조개가 교역과 관련 있음을 언급하였다. 고대 교역은 일반적으로 인접한 지역간 32) 복기대, 요서지역 청동기시대 문화연구, 백산연구원, 2002. 97쪽. 33) 복기대, 홍산문화의 이해, 우리역사연구재단, 2019. 272쪽 34) 복기대, 「고고학성과로 본 동북아시아 고대문화-환발해만 전기청동기시대 문화 중 심으로」 동아시아고대학, 2008. 65쪽. 35) 복기대, 앞의 논문, 2016, 268쪽. 36) 복기대, 앞의 논문, 2008, 66쪽..

(11) 대전자유적 납돈(鉛貝)에 나타난 고대 해상교류의 인식범위 231. 거래이며 장식물이나 도구 제작을 위해 흑요석처럼 고가의 물품에 제한된 거래에도 불구하고 몇몇 고가물품이 “릴레이교역”의 형태로 꽤 먼 거리까 지 이동되기도 한다고 했다. 미 워싱턴 주 북서부 푸젯 사운드만부터 북부 캘리포니아까지 해안가를 따라 이동된 뿔조개껍데기(Dentalium shell)의 경우처럼 중원과의 사이에 조개화폐(子安貝, 개오지조개) 역시 같은 예로 설명하였다.37) 정경희는 하가점하층문화가 중원지역으로 구체적인 전파 흐름이 있다고 하면서 하가점하층문화와 동시대에 발전하였던 경진(京津) 지구의 대타두 문화(大垞頭文化)나 산동성 일대의 악석문화(岳石文化), 또 황하 중류의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로 퍼져나갔다고 설명한다. 더불어 본격적인 은⋅ 상문화(殷商文化)인 이리강문화(二里崗文化)로 확산되어 갔다는 것에는 중국측이 하가점하층문화를 은상문화로 연결하는 과정이 결국 홍산문화에 서 시작된 중국문화 기원에 대한 탐색을 ‘홍산문화 → 하가점하층문화 → 은상문화’로 귀결하여 중원의 강성한 고대국가 은상의 문화였고 따라서 홍산문화, 하가점하층문화는 모두 은상계 문화로 인식되는 결과를 낳아 선상(先商) 문화라는 개념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38). Ⅲ. 대전자유적 납돈(鉛貝)의 고고학적 의미 대전자유적이 위치한 요서지역은 구석기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계속 살아왔고 집단을 이루며 살기 시작한 기간 역시 지금으로부터 만년 전후의 시기일 만큼 오래되었다. 그만큼 다른 지역보다 앞선, 우월한 사회 체제가 출현할 가능성이 높아지며 이러한 사회체제의 집단적 성격은 형성 37) 김연성, 「동북아 고대교역과 명도전의 관계」, 인하대학교 석사논문, 2013; 김연성, 「만 주지역과 황하 유역의 교역에 대한 일고찰」, 만주지역 고문자연구, 2014. 38) 정경희, 「홍산문화의 제천유적 유물에 나타난 한국선도와 중국 선상문화적 해석」 고조 선단군학, 2016. 140쪽..

(12) 232 仙道文化 제 30 권. 된 무덤에서도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반영하게 된다.39) 대전자유적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무덤 형식 등은 해당 시대 사람들의 사회관이 그대로 투영된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전자유적 대표유물인 채색 삼족기의 경우, 토기에 그려진 그림의 색감이나 디자인, 토기의 형태 등은 미술전문가의 과학적 분석을 묻지 않더라도 전시품을 보는 사람이라 면 누구나 감탄할 만한 기술력의 산물이다. 다만, 대전자유적이 하가점 하층문화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많은 유물을 제공하고 해당문화의 대표사 례가 된다고 하더라도 대전자유적 하나, 그 중에서도 단 한점만이 출토된 납돈(鉛貝)만을 가지고 교류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침소봉대의 위험을 가진 다는 점은 있다. 그러나 화가점하층문화의 다른 유적에의 접근이 쉽지 않은 데다가 대전자유적 발굴보고서 역시 발굴 후 2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단편 적으로 제공된 자료라고 할지라도 고조선 시대 연구에 있어서 다양한 가능 성을 제시할 수 있다면 무의미한 작업은 아닐거라고 판단된다. 이번 장에서 는 대전자유적에 대한 개요와 이 유적이 속한 문화대인 하가점 하층문화의 개요를 살펴보고 대전자유적에서 출토된 개오지조개와 납돈(鉛貝)이 가진 의미를 서술하기로 한다.. 1. 하가점 하층문화의 개요 중국의 동북지역은 한국사를 비롯한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중요하게 인식 되었다. 특히 요서40) 지역의 역사적 변화는 동북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는 지역인데 이러한 요서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기 문화가 하가점 하층문화이다.41) 이 문화의 기원연대는 서기전 24세기로 추정되고 39) 복기대, 요서지역 석제무덤의 특징연구,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2015. 19∼20쪽. 40) 요서(遼西)의 개념에 있어서 복기대는 중국에서의 요서 개념은 두 가지 의미이다. 첫째 는 지리적으로 요녕성 서부지역을 요서라고 부르는 것이고 둘째는 문화적인 개념으로 요녕성 서부지역과 내몽고 동남부지역, 길림성 서남부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일반 적으로 후자의 의미로 사용한다고 밝혔다. 본고에서도 이러한 문화적 개념의 요서지역 을 ‘요서(遼西)’로 지칭하기로 한다. 복기대(2002)..

(13) 대전자유적 납돈(鉛貝)에 나타난 고대 해상교류의 인식범위 233. 와해된 시기는 서기전 15세기를 전후하며 그 분포범위는 내몽고 동남부 지역과 요녕성 서부지역을 아우르는 매우 넓은 지역이다.42) 매우 넓은 지역에 분포한 하가점하층 문화는 집, 무덤, 성(城)등에서 뚜렷한 특징이 나타나며 최근 연구결과에서는 상당히 많은 수의 유적들이 조밀하고 광범 위하게 분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4] 하가점하층문화 유적분포도43). 현장 조사 및 발굴된 하가점하층문화의 대표 유적지는 위 그림처럼 발해 만을 끼고 북쪽으로 넓게 분포하고 있다. 이들이 분포한 지역은 구릉 산지 41) 복기대, 「중국 요서지역 청동기시대 문화의 역사적 이해」 고조선단군학 2001. 387쪽. 42) 복기대, 「남만주지역 청동기시대 문화와 민족 문제에 관하여」 만주연구, 2005. 32 쪽; 윤내현(1994) 125쪽; 요서지역 청동기문화 개시연대에 대하여 위 논문에서 윤내현 과 복기대는 서기전 25세기에 시작하였을 것임을 명시하였다. 하가점 하층문화 유적들 의 분포범위는 동쪽으로 요녕성 중부의 의무려산 이서(以西), 서쪽으로는 내몽고 적봉시 칠로도산 산맥, 남쪽으로 하북성과 내몽고 및 요녕성의 경계를 이루는 연산산맥, 북쪽 으로는 내몽고 동부와 요녕성 북부 및 길림성 남부를 가로질러 흐르는 서랍목륜하 유역 에 다다르는 범위이다. 43) 박진호, 「하가점하층문화 취락⋅경제⋅사회형태연구」, 중국 사회과학원 박사학위논문, 2020. 15쪽..

(14) 234 仙道文化 제 30 권. 가 많고 커다란 평원이 아니더라도 강과 그 지류 대부분에 하천지대가 있는 데 크고 작은 하천부근의 낮은 대지와 구릉에 입지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적봉시 오한기 일대에 조사된 하가점하층문화의 유적수는 약 2200여개로 집계되었고(오한기의 면적은 18,000평방킬로미터로 남한 면적의 1/5크기) 최근 적봉시 반지전하(半支煎河) 중류지역에서도 140여개의 하가점하층문 화 유적이 확인되었다.44) 이러한 유적의 분포밀집도와 70여개의 하가점 하층문화의 성(城)은 대형 집단 문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본조건을 구비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45) 고대 인구 증가의 원인은 일반적으로 농업으로 이야기되고 있는데 실제로 하가점 하층문화 유적에서는 농업생 산 전 과정에 걸쳐 사용된 다양한 석제 및 목제 농기구가 출토되었고 탄화된 곡물도 발견되었다.46) 이러한 것들은 하가점하층문화가 발달한 집약적 농업을 배경으로 성장하였음을 알려주는 지표임과 동시에 전반적으로 두 껍고 출토유물도 풍부하게 발견되는 문화층으로 보건대 이 문화의 주민이 농업을 기본으로 오랜 기간 동안 한 곳에 정착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판단된다.47) 농업의 발달은 전문적 수공업의 탄생과 원거리 교역 개시의 배경이 되고 청동 제품과 옥기 및 토기류를 전문적 수공업의 산물로 꼽을 수 있다. 원거 리 교역은 이 지역에서 제작된 바 없는 특정한 형태의 유물이나 생산되지 않는 물자의 존재를 통해 추정되는데 대표적인 유물로 대전자 유적에서 출토된 화(盉), 작(爵), 규(鬹) 등이다. 이들은 정교하게 제작된 회백색 토기 로써 고도의 숙련된 중원지역의 전업 기술자에 의해 제작된 것이다.48) 게다가 무덤에서 대량으로 발견되는 개오지 조개(海貝)는 하가점하층문화 44) 文物编辑委员会编, 文物工作十年, 1990, 文物出版社. 45) 복기대, 「한국 상고사와 동북아시아 청동기시대 문화」 단군학연구 14, 2006. 82쪽. 46) 복기대, 「하가점하층문화의 기원과 사회성격에 관한 시론」 한국상고사학보, 1995. 423쪽. 47) 복기대, 앞의 논문, 425쪽. 48) 김정렬, 「요서지역 청동기문화와 복합사회의 전개」 동양학, 2012. 88∼89쪽..

(15) 대전자유적 납돈(鉛貝)에 나타난 고대 해상교류의 인식범위 235. 의 권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자로 이미 이 시기에 근교에서 생산되지 않는 조개의 유통이 이루어져 있음을 방증하는 자료다. 요서 지역은 서기전 6000년대 흥륭와문화 사람들이 정착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서기전 5000년 대에 들어 조보구문화와 홍산문화기를 거쳐 취락이 집체화되고 계층화되 는 현상을 보이며 소하연문화 이후 서기전 3000년기에 들면 돌연 급속한 인구증가 현상을 보인다.49) 적봉시 서남부 일대 각 시대의 수량화 지수50) 를 보면 흥륭와문화 시기부터 한(漢) 시대 전후까지 약 7000년간 조사 결과 에서 각종 통계수치의 급격한 변화는 서기전 3000년 하가점하층문화의 출현과 함께 일어났다. 이 문화의 유적 수는 홍산문화에 비해 약 2.3배 증가, 유물 산포면 면적 역시 약 4배가량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51) 유적 의 개체수만을 따지자면 홍산문화의 유적은 평균 약 4.8㎢마다 하나씩 발견 되는 것에 비해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은 평균 2㎢에서 하나씩 확인된다는 것이다.52) 지표조사 과정상 조사자의 자의성과 주관성 등을 고려한다 하더 라도 통계에서 보이는 점은 하가점 하층문화기에 들어 폭발적인 인구증가 가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53) 이러한 급격한 인구증가가 곧 생산성의 증대를 야기하고 잉여생산물과 노동력 증대로 인 한 전문화, 분업화를 촉발시켜 경제적, 기술적 발전을 견인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바이다. 이렇듯 하가점하층문화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을 살펴보면 그 종류가 다양하고 수량도 많아 이 시기에 상당히 발전된 사회가 형성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다음 절에서는 주거지뿐 아니라 800여기의 49) 김정렬, 앞의 논문, 87쪽. 50)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중국과 미국의 학술연구기관 및 대학으로 구성된 적봉 中美연 합고고연구팀이 내몽고 적봉시 서남부과 서북부 일대, 7564㎢의 면적에 걸쳐 계통구역 조사를 진행하였는데 광역에 걸친 지표조사를 통해 유적의 위치와 유물 산포면의 면적 을 측정한 것이다. 출처: 赤峰中美聯合考古硏究項目, 內蒙古東部(赤峰)區域考古調査階段 性報告, 2003, 科學出版社 51) 김정렬, 앞의 논문, 88쪽. 52) 김정렬, 앞의 논문, 88쪽. 53) 김정렬, 앞의 논문, 10쪽..

(16) 236 仙道文化 제 30 권. 무덤군의 발견으로 하가점하층문화를 가장 잘 대변한다고 평가되는 대전 자유적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대전자유적의 개요 대전자유적은 하가점 하층문화를 이해하는데 가장 완전한 자료를 제공한 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대량의 유물이 발견되어 해당 시기 문화 양상을 설명하는데 자주 등장하는 유적이다.54) 대전자유적은 적봉시 오한기 남동 부에 위치하는데 발굴보고서에는 서기전 1,600년 전후의 유적으로 기록되 어 있다. 적봉시에서 동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져 있는 망우하(牤牛河, 대릉하의 지류) 유역으로 남쪽은 요녕성 북표(北票)에서 직선거리로 약 55km 떨어져 발굴보고서상 북위 42° 18", 동경 120° 36"로 표시되어 있다. 대전자유적이 발견된 1974년 이전에도 현재 적봉시(옛 昭乌达盟) 지 역 안에서는 다수의 하가점하층문화가 발견되었고 오한기 지역 내에 일부 지점(대전자촌)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망우하 유역 에 위치한 이 유적과 마을 집 사이 골벽의 깊이는 10m 정도로 당시 그 지역 주민의 말에 의하면 빗물에 씻겨 유물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고 한다.55) 유적지 근처 중학교에서 1973년 확장공사를 하던 중에 몇 차례 인골과 온전 한 토기가 발견되었고 이들 유물 중 몇 점이 기문화관에 진열되었다.56) 이후 76년과 77년, 83년에 발굴을 하였으며 당시 대전자유적은 지상에서 유적 주변을 둘러싼 성벽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2019년 1월 현지 답사 당시에는 대전자유적이라는 현판 뒤로 흙더미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 기 위함인지 최근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가벽이 있다. 이 가벽 주변으로는 토기 조각들이 흙벽 속에 박혀 있거나 주변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54) 곽대순⋅장성덕, 동북문화와 유연문명, 동북아역사재단, 2008. 542쪽. 55)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大甸子 - 夏家店下層文化遺址與墓地發掘報告, 科學出版社, 1998. 56)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1998).

(17) 대전자유적 납돈(鉛貝)에 나타난 고대 해상교류의 인식범위 237. 흙벽 위로 올라가 너른 유적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토기 쪼가리 등이 널려 있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대규모의 유물이 출토된 것이라는 발굴보고서의 내용과는 다르게 유적지 위에서는 농작물을 수확하고 남은 줄기 등이 널려 있으며 유적지 표지판 이외에는 이곳이 하가점 하층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지로서 수많은 유물이 출토된 곳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되어 있다. 보고서에서 언급된 중학교 건물터였다는 것은 인근에 이제 는 사용하지 않는 폐건물 몇 개를 보고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림 5] 대전자유적 전경. 대전자유적은 원각방형 성벽이 남북 약 350m, 동서 약 200m이고 성에서 8m 정도 떨어진 인근에 보존이 잘 된 묘지가 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대전자유적에서 발굴된 804기의 무덤은 규모가 큰 일부 무덤에서 채색된 토기가 매우 풍부하게 나와 하가점 하층문화를 이해하는 다양한 자료를 제공한다. 또한, 원시 문자 형태의 부호가 새겨진 그릇이 있으며 고밀도로 옷감을 짤 수 있는 편직기와 1㎜ 가늘기의 바늘이 출토된 것 외에 대량의 조개(cowries, 개오지 조개)가 발견되었다. 대량의 개오지조개의 발견에.

(18) 238 仙道文化 제 30 권. 대한 것은 절을 바꾸어 기술하고자 한다.. 3. 대전자유적 개오지조개 출토현황 대전자 유적에서 발견된 개오지 조개는 전체 804기의 무덤 중에 약 5%인 43개의 무덤에서만 출토되었고 자연패 뿐 아니라 다양한 모조패(仿貝) 1000여점이 기록되었다. 게다가 한 점뿐이긴 해도 납으로 주조한 개오지조 개 모양 금속화폐가 출토되어 화폐를 사용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금속화폐(납돈, 鉛貝) 때문이 아니라 전체 무덤군의 5%에서만 발견되었다는 점은 당시 개오지조개가 자연패이든 모조패이든 귀중품의 영역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시기 이 지역 사람들의 경제력 혹은 기술 수준이 꽤 높았다는 것을 추론해 볼 수 있게 한다. 출토된 조개화 폐는 모두 1,211점이고 이중에 자연패(海貝)가 659점, 모조패(방제패仿製 貝)가 552건으로 보고되었다. 보고서 내에 제시된 개오지 조개의 그림이 몇 건뿐이어서 형태를 명확하게 규정할 수는 없으나 개오지 조개가 가진 특수성으로 보자면 자연패나 모조패의 크기와 형태가 거의 균일하기 때문 일 것으로 파악된다. 자연패 및 모조패가 출토된 43개의 무덤 중에서 유물 위치도를 확인할 수 있는 것 역시 번호 371, 612, 672, 677, 726, 905, 이렇게 6개뿐이다. 발굴보고서 상 자연패 659개와 모조패 552매가 무덤에 서의 용도는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중에서 패(貝, 자연패)는 모두 등 부분 (볼록하게 나온 부분)이 없어서 넓은 구멍이 있는 형태로 되어있다고 설명 하고 있는데 뉘앙스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부러 없앤 것이 아니라 완전히 마모되어 미적으로 균일한 상품으로 보이는 것들만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부장된 위치는 무덤 중 벽감에 저장하거나 다른 물건과 함께 진열된 경우가 가장 많고 그 이외에는 장신구로서 몸에 착용된 위치에 따라 머리 장식, 몸 옆이나 허리 근처, 다리 쪽 무릎 아래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다. 몸에 착용된 장식품으로 사용된 것을 보면.

(19) 대전자유적 납돈(鉛貝)에 나타난 고대 해상교류의 인식범위 239. 가장 많이 출토된 M726(265개)와 한 부분에서 대량 출토된 M672(226개) 의 경우 대량의 패(貝)가 ‘위과소퇴(围裹小腿, 종아리 둘레를 감싸는 것)’의 형태로 발견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발굴보고서의 내용대로라면 아마도 옷의 하단부에 달린 장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림 6] 대전자유적 개오지조개 출토현황(512번에서 납돈 출토). 대전자유적에서 납으로 만들어진 제품은 두 개가 발견되었다. 두 납 제품 에 대해 발굴보고서에서는 “중국의 야금 역사에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는 중국이 지금으로부터 약 3600∼4000년 전에 이미 성공적으로 금속 납을 정제할 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고 발표하였다.57) 이들 납 제품 중에서 한 점이 개오지 조개 모양을 본떠서 만든 납돈(鉛貝)인데 이것이 실제로 화폐의 역할을 하였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자연패-도 기-금속의 과정으로 진행되는 화폐의 발전단계를 생각해 본다면 이미 이 시기에 자연패의 유통을 넘어 금속으로 만든 물건을 교환수단으로 사용했 57) 趙匡华, 「金屬貝帀与金屬包套檢測報告」, 大甸子, 1998..

(20) 240 仙道文化 제 30 권. 음을 알 수 있다. 납돈이 출토된 512번 무덤은 유물위치도조차 없어 어떠한 형태로 위치하 는지에 대해 알 수 없다. 다만, “회백색에 표면에는 녹이 나서 광택이 없는 데 외범 및 내범주조법으로 만들었으며 형태는 구멍이 뚫린 패와 같다”는 설명이 있을 뿐이다.58) 대전자유적 납돈(鉛貝)의 출현으로 중국은 이전까 지 동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금속화폐의 출현을 서주 시대로 본 것에서 벗어 나 500년 이상 빠른 시기에 금속화폐가 존재한 것으로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59) 또한 하가점하층문화의 금속제품은 금, 동, 납 제품이 있는데 그중 에 대전자 묘지에서 출토된 납돈(鉛貝, 납) 1점과 연질(鉛質)의 덮개를 성분 분석한 결과 함유량이 85∼90%에 달하는 것으로 나왔다.60) 이것은 지금까 지 알려진 중국 최초의 제품으로 이를 두고 대전자유적에서 출토된 납돈(鉛 貝)은 중국학자들 사이에서 하가점하층문화에서 금속제품이 이미 상당히 광범위하게 주조,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단면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Ⅳ. 고조선시대 해상교류 인식범위 1. 개오지조개로 본 교역의 가능성 고고학에서는 물건을 만든 원재료가 어느 곳에서 나는지 확실하게 밝혀 진다면 교역이 있었다는 신뢰할 수 있는 증거가 제시되었다고 한다. 예컨 대, 특성 변별법 혹은 산지 추정법이란 구성 소재가 지닌 특징적인 성질들 을 식별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 소재의 산지를 판정할 수 있는 검사기법 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특히 유럽 선사 유적에서 출토되는 홍해 원사 조가. 58) 彤泽, 「大甸子遺址与墓地中的貝与仿貝」 钱币文集, 2006. 268쪽. 59) 복기대, 앞의 논문, 268쪽. 60) 趙匡华, 앞의 논문, 334쪽..

(21) 대전자유적 납돈(鉛貝)에 나타난 고대 해상교류의 인식범위 241. 비처럼 어떤 종이 그 자연 서식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다면 이는 교역의 증거를 찾은 셈이 된다.61) 그런데 개오지 조개는 열대 혹은 아열대 지역 산호초 지대에서 서식하는 종이다. 현재도 필리핀 해변에서는 쉽게 직접 채집이 가능하고 여름철 오키나와 해변에서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대량의 자연 개오지 조개가 발견된 대전자 유적은 개오지 종이 서식하지 않는 발해만 연안에서도 북쪽으로 직선거리 170km 이상 떨어진 곳이다. 요서, 요동지역 및 한반도 지역에서는 직접 채취가 전혀 되지 않는 개오지 조개가 출토된 것이다. 적어도 오키나와까지는 가서야 채집할 수 있는 종이 한두 개도 아니고 수백 개가 나왔다는 것은 산지가 분명한(아열대산) 재화를 이동시켜 유통 혹은 교환하였음을 보여준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이는 해당 시기에 고대 주민들의 교역 가능 거리에 대한 인식 범위를 한참이나 상회하는 수준의 것으로 볼 수 있다. 교환이나 저장 가치를 가진 조개껍데기가 매우 넓은 지역에서 화폐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화폐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다. 대전자유적 발굴보고서에서는 출토된 1,000여 개의 패(貝)를 자연패와 모조패(鉛貝 포함)는 차이가 없이 위세품 혹은 장식품으로, M512에서 출토된 개오지조 개 모양 납제품을 납돈, 즉 금속화폐(鉛貝)로 규정하였다. 물론, 그 어떠한 교류의 내용이나 재화의 이동에 대한 추가 증명 없이 “하나라 시기 현패(玄 貝)가 있었다”62)는 문장을 가지고 대전자유적의 개오지 조개를 하나라 시 기 화폐로 규정짓는 것은 성급한 면이 있어 보인다. 물론 이러한 연구가 화폐의 출현이 단순 재화 이상의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는 것 때문임은 분명 해 보인다. 그러나 하나라의 현패의 경우 하나라의 것으로 비정되는 이리두 문화에서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개오지조개가 출토되지 않았을 뿐더러 관 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던 유물 설명에서 역시 사용된 조개화폐가 하나라 61) 콜린 렌프류⋅폴반, 현대고고학의 이해, 사회평론, 2006. 364쪽. 62) 서한 시기 桓宽, 盐铁论⋅错布 ‘夏后以玄貝, 周人以紫石, 後世惑金錢刀布(하나라 때 는 현패를 화폐로 쓰고, 주나라 때 자색 돌이 화폐로 쓰였다. 그 후의 시기에는 금속도 를 사용하였다)’.

(22) 242 仙道文化 제 30 권. 강역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옥을 방국으로부터 수입하여 이를 결제수단으 로 사용하였는데 그 해패(海貝)는 하나라에서 채집되지 않는다고 적었다. 옥을 수입하여 만들었거나 옥으로 만든 조개화폐를 수입한 상황 모두 공교 롭게도 하가점하층문화의 선대문화인 홍산문화의 옥제품, 그중에서도 옥 으로 만든 다량의 조개화폐를 떠올리게 하고 실제 공개된 이리두유적의 조개화폐는 자연패와 모조패 모두 그 양이 많지 않다. 반면, 하가점하층문 화대의 유적에서는 대전자유적에서 대량의 개오지조개가 출토되었을 뿐 아니라 고조선 시대 문화를 설명하고 있는 뺷단군세기뺸에는 4세 단군 오사 구 때 “주원공패전(鑄圓孔貝錢)”이라고 하여 둥근 구멍을 뚫어 금속으로 조개화폐를 모방하여 주조하였음을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 은 이미 고조선시대 인근의 해안가가 아닌 원거리의 해안에서 채집할 수 있는 개오지조개의 유통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이것의 일부가 위세품이나 장식품의 역할 뿐 아니라 화폐의 기능을 일부 수행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더욱이 현지에서 생산되지 않은 물품이 대량 발견되었다는 것은 릴레이 교역 등을 통한 재화의 이동과 그로 인한 교류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2. 고조선시대 해상교류 능력 생산지와 멀리 떨어져서 발견된 대전자유적의 개오지조개의 경우 스스로 이동할 가능성은 없으므로 서식지와 유물 발견지를 기점과 종점으로 한 기-종점(Orient-Destination, OD) 분석의 개념을 적용하면 교류가 있었 다는 것을 개오지 조개 유통 루트를 통해 알 수 있다.63) 더불어, 스스로 이동할 수 없는 개오지 조개가 이동한 데는 분명한 인적교류의 동반이 명확 하므로 고조선 시대 발견된 개오지 조개의 유통 루트는 차치하고라도 당시 해상 교류 네트워크의 범위를 대략이나마 추정해 볼 수 있다. 개오지조개의. 63) 송옥진, 대전자유적 개오지조개와 고대 교역네트워크 범위에 대한 연구, 인하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0..

(23) 대전자유적 납돈(鉛貝)에 나타난 고대 해상교류의 인식범위 243. 유통에는 한반도 남부와 남중국 해안가에서부터 북쪽으로 올라와 발해만 북쪽 내륙 깊숙이 위치한 대전자 유적까지의 이동에 릴레이교역 혹은 각 집단 간 상호 인적교류로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다. 하가점하층문화에 속하는 발해만 북쪽 요서 지역은 양옆으로 산동반도와 요동반도로 둘러싸인 형태이다.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에는 신석기시 대부터 해로를 통한 문화전파와 주민이주가 이루어져 왔음이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 고찰되어 있고 고대인들이 육로보다 해로를 많이 이용했음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이기도 하다.64) 뺷산해경뺸에서 고조선 사람들이 주로 물가에 산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내륙의 중원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이 지역 사람들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것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신석기시대부터 고조 선 시대까지 이 지역 사람들은 바다도 생업과 교통의 공간으로 활용했던 주민이었음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다.65) 해양력의 중요도는 비단 서구열강 의 이야기거나 근대의 해양 세력의 이야기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바다에서 자원을 찾고 원거리 항해를 시작하면서부터 해양력을 가 진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 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것의 적절한 예가 본고에서 이야기하는 개오지 조개의 획득과 활용이라 생각하기에 육 로를 활용한 교류뿐 아니라 해양활동을 통한 릴레이 교류 역시 당시 사람들 의 교류 활동의 일부분을 차지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한편, 뺷국어(國語)뺸 「노어(魯語)」에는 숙신이 화살촉을 얻는 내용이 등장 하는데 중국 문헌에 기록된 자료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경제 수준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들은 일찍부터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의 교류를 했는데 그들의 사회와 경제 수준이 결코 단편적이지 않다는 64) 佟偉華, 「膠東半島與遼東半島原始文化的交流」, 考古學文化論文集, 文物出版社. 1989; 이청규; 王錫平, 「從出土文物看膠東半島與遼東半島史前時期的海上交通」 海交史硏究 2004; 王子今, 「秦漢時期渤海航運與遼東浮海移民」, 史學集刊 2010. 65) 남창희, 이인숙, 「환발해만 제해권과 고대 동북아 국제관계」 한일군사문화연구, 2013. 4쪽..

(24) 244 仙道文化 제 30 권.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중국의 고대 문헌인 뺷일주서(逸周書)뺸 「왕회(王會)」 편에서도 숙신(肅愼), 양이(良夷), 발인(發人), 고이(高夷), 고죽(孤竹) 등이 성주대회(成周大會)에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뺷일주서뺸에 언급된 태공 망(望)은 주 무왕이 상나라를 공격할 때 선봉대장 으로서 큰 공로를 세운 개국공신으로 제국(齊國)에 봉해졌던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이 모임에 참석했던 것으로 보아 성주대회는 주나라가 건국된 후 오래지 않은 시기에 개최되었음을 알 수 있고 상나라의 멸망과 주나라의 건국이 서기전 12세기경이므로 성주대회의 개최 시기는 서기전 11세기보다 아래로 내려오지는 않는 것으로 본다.66) 또한 이 모임에 숙신 등 일부 집단에만 사신을 파견한 것은 이들이 지금의 요서지역에 위치하여 중국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이며 사신 파견의 행사는 당시에 이미 중국 지역과 상당히 깊은 교류를 가지고 있었음을 가늠케 해주는 일례이다.67) 뺷시경뺸 「한혁」편에는 고조선이 농토를 정리하여 세금을 매겼다는 기록이 있고 뺷맹자뺸에는 고조선의 세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있는데 「고자(告 子)」편에 고조선에서는 수확의 20분의 1을 세금으로 징수했던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는 점이나 고조선의 법률인 <범금8조>에는 남의 물건을 훔친 사 람은 노예로 되어 50만의 돈을 배상하면 노예 신분으로 떨어지는 것을 면할 수 있다는 규정 역시 당시 여러 상황에서 화페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방증하 는 자료로 볼 수 있다.68) 최근 왕립신, 왕청, 서소봉 등 중국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하가점 하층문 화의 선진 기술이 중원지역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발굴보고서와 관련 논문들은 대부분 중원을 중심으로 하거나 자신이 속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어 발달된 문명은 대부분 중원에서 발원하여 최고의 절정을 이루었다고 인식하는데 실제로 는 중원과 주변의 여러 문화들이 상호 교류하여 상대방의 선진기술을 수용 66) 윤내현, 앞의 논문, 159쪽. 67) 윤내현, 앞의 논문, 159쪽. 68) 윤내현, 고조선 우리 역사의 탐색, 만권당, 2016. 155쪽..

(25) 대전자유적 납돈(鉛貝)에 나타난 고대 해상교류의 인식범위 245. 해 좀 더 발전된 문화유산을 창출해 낼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69) 발해만의 강 하구와 한반도 바닷가에서 발굴되는 빗살무늬 토기와 패총 을 살펴보면 신석기시대부터 이 지역 사람들이 강가와 바다를 삶의 터전으 로 삼았음70)을 보여주면서 발해만이 동중국해나 서해와 달리 태풍의 영향 이 작고 입구가 좁은 만의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고대인들이 이 바닷길을 일찍부터 안정된 해상교통로로 활용한 것을 볼 수 있다.71) 청동기 개시연대 역시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황하유역보다 빠른데 황하 유역에서 가장 빠른 청동기문화인 이리두문화는 서기전 2200년경이고 한 반도와 만주의 청동기시대 유적인 경기도 양수리의 지석묘와 전남 영암군 장천리의 집자리 및 요서 지역의 하가점하층문화는 서기전 2500년경으로 확인된 점 등을 사례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서 문화의 발전이나 사회의 발전이 뒤지지 않았음을 알게 한다. 따라서 고대에 한반도와 만주의 거주민이 다른 지역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이 었다고 단언할 수 없고 문화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도 일반적이지 않다. 유골이나 유물 등의 고고 자료가 증가함에 따라 한민족의 체질과 그 기원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결과들에 의해서 이들은 한반도와 만주의 구석기 시대 사람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그 사람들의 후손들이 계 속 성장하여 한민족을 출현시켰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72) 이렇게 형성된 집단에서 조를 비롯한 곡식들과 낙랑단궁(활), 과하마(키 작고 날랜 말), 문피(범 또는 표범가죽), 돈피, 반어피 등 특산물들과 그 밖의 수공업 제품들, 수산물들을 중국에 수출하였으며 노예소유자 귀족들과 지배계급 들의 사치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사치품을 주로 수입하였다고 보고 있다.73) 69) 박재복, 「중국 북방지역의 갑골 점복에 관한 고찰」 중국고중세사 연구, 2014. 101쪽. 70) 이형구,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김영사, 2004. 71) 남창희⋅이인숙, 앞의 논문, 2013. 72) 윤내현, 앞의 논문, 159쪽..

(26) 246 仙道文化 제 30 권. 하가점하층문화에서 보이는 여러 사실들, 예컨대 부호가 있는 질그릇, 화폐경제의 존재, 편직기를 이용한 섬유제조기술과 집단거주성의 특징을 고려해봤을 때 이미 해당 사회는 국가 단계로 볼 수 있고 사서 기록과 비교해 보면 하가점하층문화부터 릉하문화까지 모두 하나의 문화권으로 볼 수 있으 며 우리 사서에서 말하는 최초의 국가 기록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74). Ⅴ. 결 론 한국사에 있어서 고조선이 갖는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 유불선으로 대표 되는 외래문화의 유입 이전의 시대라는 점도 그렇지만 단군을 위시한 홍익 인간 정신을 바탕으로 한 최초(最初), 최고(最古)의 건국이라는 점을 들어 대몽항쟁기나 대일항쟁기 시기 민족정신 부활의 수단으로 구심점 역할을 하게 한 영향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일부에서는 고조선과 단군은 역사적 전통성을 내세우기 위한 수단일 뿐 실존하지 않다는 주장을 현재까지 하고 있으나 뺷조선왕조실록뺸을 비롯하여 고조선에 대한 우리 기록과 생활 곳곳 에 스며든 문화, 고고학적 발견과 부합되는 사실들은 더이상 고조선의 존재 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다만, 상당히 많은 고조선 관련 연구에도 불구하고 고조선 사회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부족한 편인데 이는 문헌기록 을 중시한다는 명목 아래 고고학 성과를 연결시켜 해석하지 않거나 중국사 서 등 타인의 기록을 우선시하여 뺷삼국사기뺸 뺷단군세기뺸등의 기록물을 무 시한 행태에서 비롯한 편협함 때문이라 생각된다. 더욱이 대일항쟁기를 거치면서 일본이 조선사편수회를 앞세워 정립해 놓은 고조선의 세력범위 가 아직까지 국사교과서에 그대로 재인용 되고 있어 “만주와 한반도 서북 부”의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75) 때문에 비파형 동검과 탁자 식 고인돌의 분포지역으로 고조선의 세력범위를 알 수 있다고 적어놓고도 73) 사회과학원역사연구소, 조선전사, 백산자료원, 1991. 102∼106쪽. 74) 복기대, 앞의 논문, 272쪽. 75) 박정학 외, 왜 아직도 배워야 합니까, 리치미디어, 2020..

(27) 대전자유적 납돈(鉛貝)에 나타난 고대 해상교류의 인식범위 247. 같은 유물 분포를 가진 제주도와 남한 지역, 중국하북성 지역은 고조선 영토에서 제외되고 있다. 개오지조개가 화폐로 사용될 당시 동반 유물의 흐름이라던지 화폐의 사 용 빈도 등의 심층적인 연구가 추가로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생산지가 분명 한 물품이 소비지에서 발견된 사례연구로 대전자유적 개오지조개를 분석 해 볼 때 이 두 지점 사이에 분명한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생산지역과 사용지역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조개화 폐의 유통 및 조달에는 활발한 경제활동의 주체가 있었으며 대전자유적(서 기전 1600년대)의 시기에 아열대 지방과는 한참 동떨어진 만주지역에서 다량의 자연패가 출토되었다는 점은 당시 그 지역의 세력이 생각보다 광범 위한 교역을 이루고 있었을 가능성을 충분히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더욱 이 자연패(海貝) 뿐 아니라 납으로 주조한 방제패(鉛貝)가 출토되었다는 것에서 자연패의 조달과 유통 시기가 훨씬 더 이전부터 있어왔다면 해당 지역은 이미 활발한 교역네트워크를 영유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그간 고조선 교역에 있어 적극적 교류를 나타내는 교류관계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하가점하층문화 대전자 유적 공동체의 교역 네트워크의 범위는 그보다 확장해서 인식해야 해당 시기 경제행위와 세계관, 문화생활 의 실체에 보다 정확히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7] 고대 해상교류의 범위.

(28) 248 仙道文化 제 30 권. 【참고문헌】 뺷管子뺸, 뺷國語뺸, 뺷詩經뺸, 뺷山海經뺸, 뺷逸周書뺸 곽대순⋅장성덕, 뺷동북문화와 유연문명뺸 동북아역사재단, 2008. 국립제주박물관, 2005 뺷선사시대 문화의 재발견뺸 통천문화사, 2005. 김필수, 뺷관자(管子)뺸 소나무, 2006. 박정학, 뺷왜 아직도 배워야 합니까뺸 리치미디어, 2020. 복기대, 뺷요서지역 청동기시대 문화연구뺸 백산연구원, 2002. 복기대, 뺷요서지역 석제무덤의 특징연구뺸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2015. 복기대 외, 뺷고구려 평양과 그 여운뺸 주류성, 2017. 복기대, 뺷홍산문화의 이해뺸 우리역사연구재단, 2019. 사회과학원역사연구소, 뺷조선전사뺸 백산자료원, 1991. 서영수, 뺷고조선의 위치와 강역뺸 일조각, 1988. 송호정, 뺷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뺸 푸른역사, 2003. 윤내현, 뺷고조선연구뺸 일지사, 2004. 윤내현, 뺷고조선 우리 역사의 탄생뺸 만권당, 2016. 윤한택 외, 뺷압록과 고려의 북계뺸 주류성, 2017. 이형구, 뺷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뺸 김영사, 2004. 임찬경, 뺷고구려와 위만조선의 경계뺸 한국학술정보, 2019. 콜린 렌프류⋅폴반, 뺷현대고고학의 이해뺸 사회평론, 2006. 文物編輯委員, 뺷文物工作十年뺸 文物出版社, 1990. 赤峰中美聯合考古硏究項目, 뺷內蒙古東部(赤峰)區域考古調査階段性報告뺸 科學出版社, 2003.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뺷大甸子-夏家店下層文化遺址與墓地發掘報告뺸 科學出版社, 1998. 강봉룡, 「한국 해상세력 형성과 변천」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2004. 권태원, 「고조선이 문화강역문제」백제연구, 1989..

(29) 대전자유적 납돈(鉛貝)에 나타난 고대 해상교류의 인식범위 249. 김연성, 「동북아 고대교역과 명도전의 관계」 인하대학교 석사논문, 2013. _______, 「만주지역과 황하 유역의 교역에 대한 일고찰」 만주지역 고문자연구, 2014. 김병곤, 「고조선 왕권의 성장과 지배력의 성격 변화」 동국사학, 2000. 김정렬, 「요서지역 청동기문화와 복합사회의 전개」 동양학, 2012. 김태식, 「한국 고대제국의 대외교역」 진단학보, 2006. 남창희⋅이인숙, 「환발해만 제해권과 고대 동북아 국제관계」 한일군사문화 연구, 2013. 박선미, 「전국-진한 초 화폐사용집단과 고조선의 관련성」 동북아역사논총, 2005. _______, 「고조선의 교역과 화폐사용에 대한 시론적 검토」 동북아역사논총, 2008. 박선희, 「복식자료와 복식형체를 통해 본 고조선의 영역」 인문과학연구, 2002. 박순지⋅이춘규, 「고대부터 고려까지의 모피물에 관한 고찰」 복식, 1994. 박재복, 「중국 북방지역의 갑골 점복에 관한 고찰」 중국 고중세사 연구, 2014. 박준형, 「고조선의 대외교역과 의미-춘추 제와의 교역을 중심으로」 북방사논 총, 2004. 박진호, 뺷하가점하층문화 취락⋅경제⋅사회형태연구뺸 중국사회과학원 박사 학위논문, 2020. 방민규, 「사천 늑도 유적으로 본 한반도 남해안 지역의 대외 교류」 해양도시문 화교섭학, 2012. 복기대, 「하가점하층문화의 기원과 사회성격에 관한 시론」 한국상고사학보, 1995. _______, 「중국 요서지역 청동기시대 문화의 역사적 이해」 고조선단군학, 2001. _______, 「남만주지역 청동기시대 문화와 민족 문제에 관하여」 만주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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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대전자유적 납돈(鉛貝)에 나타난 고대 해상교류의 인식범위 251. 국민족문화, 1998. 최광식, 「한국고대무역사에 관한 고찰」 한국무역학회세미나, 2004. 최성락, 「고고학에서 본 고대 한일 문화교류의 쟁점」 북방사논총, 2005. _______, 「고고학에서 본 고대 동아시아의 해상교류」 도서문화, 2005. 한창균, 「고조선의 성립배경과 발전단계 시론」 국사관논총, 1992. 彤 泽, 「大甸子遺址与墓地中的貝与仿貝」 钱币文集. 2006. 佟偉華, 「膠東半島與遼東半島原始文化的交流」 뺷考古學文化論文集뺸, 文物 出版社. 1989 王錫平, 「從出土文物看膠東半島與遼東半島史前時期的海上交通」 뺷海交史 硏究뺸 2004. 王子今, 「秦漢時期渤海航運與遼東浮海移民」, 뺷史學集刊뺸 2010. 趙匡华, 「金屬貝帀与金屬包套檢測報告」大甸子, 1998..

(32) 252 仙道文化 제 30 권. 【Abstract】. A Study on Expansion of Recognition of Maritime Exchanges in Gojoseon about Dadianzi Site Song, Ok Jin (Secretary General Daehansarang). The Dadianzi is a representative community site of the 1600 B.C. period located in the Chinese city of Aohanqi Chifeng of Inner Mongolia where 1,200 pieces of cowrie shell were excavated. In the Dadazian Site, both natural cowrie shell and replica currency shell were excavated. Also a relic similar to cowrie shell, which is made of lead(鉛貝) was unearthed. Chinese archaeological community recognizes to some extent the possibility that the lead currency-shaped cowrie shell was not only used as an ornament or a prestige in the community at the time, but also served as a currency. After applying various experimental methods applied to cowrie shells collected from shell habitats of coastal area of East Asia, the author tested validity of arguments raised by Chinese scholars, adding a new finding. The cowrie shell relic found in the Dadianzi were easy to carry with and can be preserved for a long time due to their ability to resist corrosion. It is also widely recognized by Chinese archaeologists that it had usage of quantification which satisfies requirements of currency. This finding raises a need to correct our traditional view on.

(33) 대전자유적 납돈(鉛貝)에 나타난 고대 해상교류의 인식범위 253. the isolated scope of trade network of the ancient people of the Northeast Asian community. The commercial or ritualistic trade practices between Lower Xiajiadian communities and it neighboring cultures and remote cultures during the Bronze Age were not extensively studied so far. The customary conception has been that the trade netwok was limited within the immediately surrounding areas. The author investigated Moneta cowrie shell’s habitat throughout in continental and maritime East Asia of both ancient times and today. As a result, shellfish from that period until now were found to habitat in coral reef areas of Jeju Island, Okinawa, and south of Taiwan and the Philippines. The finding and confirmation raise us a need to expand the trading scope of people in the Dadianzi community at the time and the existing perception of the their inter-cultural activities. The existing perception should be extended to add wide-area trade practices beyond the hundreds of kilometers of confined networks with communities including such nearby cultures as. Gaotaishan culture(高殆山文化), Machengzi culture(馬城子文化), Daetuotou culture(大坨頭文化), Shuangtuozi culture(雙砣子文化), Yueshi culture(岳石 文化). The finding further demands us to extend the remote trading network between Lower Xiajiadian and Erlitou culture(二里頭文化) in the Yellow River basin. With a more accurate assessment of their wide world view, inter-cultural interaction and active trading practices, we can have a better understanding of the characteristics of trade, economy, and culture of people in the 1600s before A.D. Keyword : Dadianzi Site, Gojoseon, Cowire Shell, Lower Xiajiadian Culture, Trade Range. 논문투고일 : 2021년 01월 15일 게재확정일 : 2021년 02월 06일. 심사완료일 : 2021년 0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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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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