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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지와 멀리 떨어져서 발견된 대전자유적의 개오지조개의 경우 스스로 이동할 가능성은 없으므로 서식지와 유물 발견지를 기점과 종점으로 한 기-종점(Orient-Destination, OD) 분석의 개념을 적용하면 교류가 있었 다는 것을 개오지 조개 유통 루트를 통해 알 수 있다.63) 더불어, 스스로 이동할 수 없는 개오지 조개가 이동한 데는 분명한 인적교류의 동반이 명확 하므로 고조선 시대 발견된 개오지 조개의 유통 루트는 차치하고라도 당시 해상 교류 네트워크의 범위를 대략이나마 추정해 볼 수 있다. 개오지조개의

63) 송옥진, 대전자유적 개오지조개와 고대 교역네트워크 범위에 대한 연구, 인하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0.

유통에는 한반도 남부와 남중국 해안가에서부터 북쪽으로 올라와 발해만 북쪽 내륙 깊숙이 위치한 대전자 유적까지의 이동에 릴레이교역 혹은 각 집단 간 상호 인적교류로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다.

하가점하층문화에 속하는 발해만 북쪽 요서 지역은 양옆으로 산동반도와 요동반도로 둘러싸인 형태이다.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에는 신석기시 대부터 해로를 통한 문화전파와 주민이주가 이루어져 왔음이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 고찰되어 있고 고대인들이 육로보다 해로를 많이 이용했음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이기도 하다.64)

뺷산해경뺸에서 고조선 사람들이 주로 물가에 산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내륙의 중원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이 지역 사람들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것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신석기시대부터 고조 선 시대까지 이 지역 사람들은 바다도 생업과 교통의 공간으로 활용했던 주민이었음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다.65) 해양력의 중요도는 비단 서구열강 의 이야기거나 근대의 해양 세력의 이야기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바다에서 자원을 찾고 원거리 항해를 시작하면서부터 해양력을 가 진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 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것의 적절한 예가 본고에서 이야기하는 개오지 조개의 획득과 활용이라 생각하기에 육 로를 활용한 교류뿐 아니라 해양활동을 통한 릴레이 교류 역시 당시 사람들 의 교류 활동의 일부분을 차지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한편, 뺷국어(國語)뺸 「노어(魯語)」에는 숙신이 화살촉을 얻는 내용이 등장 하는데 중국 문헌에 기록된 자료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경제 수준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들은 일찍부터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의 교류를 했는데 그들의 사회와 경제 수준이 결코 단편적이지 않다는

64) 佟偉華, 「膠東半島與遼東半島原始文化的交流」, 考古學文化論文集, 文物出版社. 1989;

이청규; 王錫平, 「從出土文物看膠東半島與遼東半島史前時期的海上交通」 海交史硏究

2004; 王子今, 「秦漢時期渤海航運與遼東浮海移民」, 史學集刊 2010.

65) 남창희, 이인숙, 「환발해만 제해권과 고대 동북아 국제관계」 한일군사문화연구, 2013. 4쪽.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중국의 고대 문헌인 뺷일주서(逸周書)뺸

「왕회(王會)」 편에서도 숙신(肅愼), 양이(良夷), 발인(發人), 고이(高夷), 고죽(孤竹) 등이 성주대회(成周大會)에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뺷일주서뺸에 언급된 태공 망(望)은 주 무왕이 상나라를 공격할 때 선봉대장 으로서 큰 공로를 세운 개국공신으로 제국(齊國)에 봉해졌던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이 모임에 참석했던 것으로 보아 성주대회는 주나라가 건국된 후 오래지 않은 시기에 개최되었음을 알 수 있고 상나라의 멸망과 주나라의 건국이 서기전 12세기경이므로 성주대회의 개최 시기는 서기전 11세기보다 아래로 내려오지는 않는 것으로 본다.66) 또한 이 모임에 숙신 등 일부 집단에만 사신을 파견한 것은 이들이 지금의 요서지역에 위치하여 중국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이며 사신 파견의 행사는 당시에 이미 중국 지역과 상당히 깊은 교류를 가지고 있었음을 가늠케 해주는 일례이다.67) 뺷시경뺸 「한혁」편에는 고조선이 농토를 정리하여 세금을 매겼다는 기록이 있고 뺷맹자뺸에는 고조선의 세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있는데 「고자(告 子)」편에 고조선에서는 수확의 20분의 1을 세금으로 징수했던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는 점이나 고조선의 법률인 <범금8조>에는 남의 물건을 훔친 사 람은 노예로 되어 50만의 돈을 배상하면 노예 신분으로 떨어지는 것을 면할 수 있다는 규정 역시 당시 여러 상황에서 화페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방증하 는 자료로 볼 수 있다.68)

최근 왕립신, 왕청, 서소봉 등 중국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하가점 하층문 화의 선진 기술이 중원지역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발굴보고서와 관련 논문들은 대부분 중원을 중심으로 하거나 자신이 속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어 발달된 문명은 대부분 중원에서 발원하여 최고의 절정을 이루었다고 인식하는데 실제로 는 중원과 주변의 여러 문화들이 상호 교류하여 상대방의 선진기술을 수용

66) 윤내현, 앞의 논문, 159쪽.

67) 윤내현, 앞의 논문, 159쪽.

68) 윤내현, 고조선 우리 역사의 탐색, 만권당, 2016. 155쪽.

해 좀 더 발전된 문화유산을 창출해 낼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69)

발해만의 강 하구와 한반도 바닷가에서 발굴되는 빗살무늬 토기와 패총 을 살펴보면 신석기시대부터 이 지역 사람들이 강가와 바다를 삶의 터전으 로 삼았음70)을 보여주면서 발해만이 동중국해나 서해와 달리 태풍의 영향 이 작고 입구가 좁은 만의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고대인들이 이 바닷길을 일찍부터 안정된 해상교통로로 활용한 것을 볼 수 있다.71)

청동기 개시연대 역시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황하유역보다 빠른데 황하 유역에서 가장 빠른 청동기문화인 이리두문화는 서기전 2200년경이고 한 반도와 만주의 청동기시대 유적인 경기도 양수리의 지석묘와 전남 영암군 장천리의 집자리 및 요서 지역의 하가점하층문화는 서기전 2500년경으로 확인된 점 등을 사례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서 문화의 발전이나 사회의 발전이 뒤지지 않았음을 알게 한다. 따라서 고대에 한반도와 만주의 거주민이 다른 지역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이 었다고 단언할 수 없고 문화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도 일반적이지 않다. 유골이나 유물 등의 고고 자료가 증가함에 따라 한민족의 체질과 그 기원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결과들에 의해서 이들은 한반도와 만주의 구석기 시대 사람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그 사람들의 후손들이 계 속 성장하여 한민족을 출현시켰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72) 이렇게 형성된 집단에서 조를 비롯한 곡식들과 낙랑단궁(활), 과하마(키 작고 날랜 말), 문피(범 또는 표범가죽), 돈피, 반어피 등 특산물들과 그 밖의 수공업 제품들, 수산물들을 중국에 수출하였으며 노예소유자 귀족들과 지배계급 들의 사치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사치품을 주로 수입하였다고 보고 있다.73)

69) 박재복, 「중국 북방지역의 갑골 점복에 관한 고찰」 중국고중세사 연구, 2014.

101쪽.

70) 이형구,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김영사, 2004.

71) 남창희⋅이인숙, 앞의 논문, 2013.

72) 윤내현, 앞의 논문, 159쪽.

하가점하층문화에서 보이는 여러 사실들, 예컨대 부호가 있는 질그릇, 화폐경제의 존재, 편직기를 이용한 섬유제조기술과 집단거주성의 특징을 고려해봤을 때 이미 해당 사회는 국가 단계로 볼 수 있고 사서 기록과 비교해 보면 하가점하층문화부터 릉하문화까지 모두 하나의 문화권으로 볼 수 있으 며 우리 사서에서 말하는 최초의 국가 기록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74)

Ⅴ. 결 론

한국사에 있어서 고조선이 갖는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 유불선으로 대표 되는 외래문화의 유입 이전의 시대라는 점도 그렇지만 단군을 위시한 홍익 인간 정신을 바탕으로 한 최초(最初), 최고(最古)의 건국이라는 점을 들어 대몽항쟁기나 대일항쟁기 시기 민족정신 부활의 수단으로 구심점 역할을 하게 한 영향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일부에서는 고조선과 단군은 역사적 전통성을 내세우기 위한 수단일 뿐 실존하지 않다는 주장을 현재까지 하고 있으나 뺷조선왕조실록뺸을 비롯하여 고조선에 대한 우리 기록과 생활 곳곳 에 스며든 문화, 고고학적 발견과 부합되는 사실들은 더이상 고조선의 존재 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다만, 상당히 많은 고조선 관련 연구에도 불구하고 고조선 사회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부족한 편인데 이는 문헌기록 을 중시한다는 명목 아래 고고학 성과를 연결시켜 해석하지 않거나 중국사 서 등 타인의 기록을 우선시하여 뺷삼국사기뺸 뺷단군세기뺸등의 기록물을 무 시한 행태에서 비롯한 편협함 때문이라 생각된다. 더욱이 대일항쟁기를 거치면서 일본이 조선사편수회를 앞세워 정립해 놓은 고조선의 세력범위 가 아직까지 국사교과서에 그대로 재인용 되고 있어 “만주와 한반도 서북 부”의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75) 때문에 비파형 동검과 탁자

한국사에 있어서 고조선이 갖는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 유불선으로 대표 되는 외래문화의 유입 이전의 시대라는 점도 그렇지만 단군을 위시한 홍익 인간 정신을 바탕으로 한 최초(最初), 최고(最古)의 건국이라는 점을 들어 대몽항쟁기나 대일항쟁기 시기 민족정신 부활의 수단으로 구심점 역할을 하게 한 영향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일부에서는 고조선과 단군은 역사적 전통성을 내세우기 위한 수단일 뿐 실존하지 않다는 주장을 현재까지 하고 있으나 뺷조선왕조실록뺸을 비롯하여 고조선에 대한 우리 기록과 생활 곳곳 에 스며든 문화, 고고학적 발견과 부합되는 사실들은 더이상 고조선의 존재 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다만, 상당히 많은 고조선 관련 연구에도 불구하고 고조선 사회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부족한 편인데 이는 문헌기록 을 중시한다는 명목 아래 고고학 성과를 연결시켜 해석하지 않거나 중국사 서 등 타인의 기록을 우선시하여 뺷삼국사기뺸 뺷단군세기뺸등의 기록물을 무 시한 행태에서 비롯한 편협함 때문이라 생각된다. 더욱이 대일항쟁기를 거치면서 일본이 조선사편수회를 앞세워 정립해 놓은 고조선의 세력범위 가 아직까지 국사교과서에 그대로 재인용 되고 있어 “만주와 한반도 서북 부”의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75) 때문에 비파형 동검과 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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