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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음기와 실재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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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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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프리드리히 A. 키틀러의 이론을 중심으로 ―

유 현 주*1)

Ⅰ. 들어가며

Ⅱ. 키틀러와 기록의 양식

Ⅲ. 축음기와 실재의 소리 1. 음에서 소리로

2. 예술과 문학의 선택지 3. 실재의 소음과 실재의 조작

Ⅳ. 나가며

Ⅰ. 들어가며

“말하자면, 말이 영원하게 되었다.

Speech, as if it were, has become immortal”.

* 연세대학교 교수

이 논문은 한국미학예술학회 2015년 봄 정기학술대회 기획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 보완하여 게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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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에 흐르는 아름다운 음악, 혹은 내 귀에 속삭이는 사랑하는 이 의 음성을 그대로 저장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움직이는 영상을 눈앞에서 직접 보고 싶었던 인류의 오래된 꿈이 19세기 후반 필름의 탄생으로 드디어 실현 된 것처럼, 발생하자마자 바로 사라지는 ‘소리’를 불멸의 존재로 보존하고 언제라 도 원하는 시점에 다시 재현해 주는 축음기의 등장은 옛사람들이 상상했던 미래 의 실현이기도 했다.1) 근대의 기술은 시각의 영역뿐만 아니라, 청각의 영역에서도 스스로를 관철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축음기의 역할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회전원판에 흔적으로 새겨 놓았던 울림이나 소음들을 재생하여”2) 다시 들려주는 이 놀랍도록 단순한 메커니즘의 기계는 ― 적어도 독일의 매체학자 프리드리히 A. 키틀러의 논법을 따르자면 ― 19세기까지 계속되어 오던 인류의 기록 패러다 임을 완전히 뒤바꾼 주인공이며, 동시에 무의식이라는 실재의 세계를 인류에게 드러내며 마침내 ‘현대’를 견인한 근대의 동력이기도 했다.

사진과 영화로 인해 주목받은 시각적 근대성에 비해 지금까지 청각적 근대 성의 문제는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을 받아왔다. 키틀러는 우리 시대를 만들어낸 매체의 태동기에 등장했던 축음기, 영화, 타자기를 ‘세 개의 기술적 근원 매체(die drei technische Urmedien)’3)로 명명하고 이들이 그 이전까지 ‘문자’를 통해서만 저장할 수 있었던 음향과 광학, 텍스트를 최초로 각각 분화시켜 저장하는데 성공 했다고 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 가지의 근원매체 중에서도 축음기를 이전 시 대가 구현해 왔던 문자의 상징계에서 기술정보와 연산이 중심이 되는 실재계4) 1) 마이클 채넌, 음악녹음의 역사, 박기호 옮김, 동문선, 2005, 13쪽 참조. ‘소리’의 저장과 재현에 대한 옛사람들의 상상력은 서양의 예를 들면 라블레(François Rabelais)의 풍자소 설 팡타그뤼엘의 네 번째 이야기 The Fourth Book of Pantagruel (1552)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차가운 바닷물이 얼어붙으면서 처절한 전투의 고함소리와 신음을 저 장했다가, 봄에 얼음이 녹으면서 이 소리들을 다시 들려주는 ‘언어의 바다’가 등장한다. 같 은 책, 14쪽 참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 (1145)에 나오는 경문왕과 대나무 숲의 이 야기가 청각적 정보의 보존과 재현이라는 면에서 여기에 상응한다.

2) Kittler, Friedrich A., Grammophon, Film, Typewriter, Berlin: Brinkmann & Boss, 1986, S. 38.

3) 같은 책, S. 79.

4) 같은 책, S. 57. 키틀러는 여기에서 실재계를 ‘현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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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이행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매체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주저 축음 기, 영화, 타자기(Grammophon, Film, Typewriter) (1986)에서 축음기5)가 가장 첫 번째로 호명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키틀러의 논법을 빌려 축음기를 현대를 견인한 근원매체로서 상정하고, 축음기의 등장이 기록과 재현의 방식을 변화시킴으로써 현대음악 및 문학의 영역에 어떠한 변화를 일으켰는지 살 펴보고자 한다.

Ⅱ. 키틀러와 기록의 양식

우선 우리에게 매우 낯설어 보이는 키틀러 매체이론의 전체 맥락을 거칠게 나마 살펴보자. 현대 매체이론의 가장 급진적인 갈래 중 하나가 바로 얼마 전 타 계한 독일의 매체학자 키틀러로부터 나왔다고 평가된다. 키틀러에게 있어 매체는

‘정보의 저장, 전달, 처리(Übertragung, Speicherung, Verarbeitung von Information)’6)로서 이해되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매체의 기능은 바로 ‘저장’

이다. 따라서 발화되자마자 저장되지 않은 채 사라지는 언어는 키틀러에게 한 번 실재계는 형태를 가진 상상계와 구문법을 가진 상징계와 구분되는, 기호의 조합을 통한 조 직화나 광학적 시지각 과정에서 누락되는 부분을 표시해 준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이 전의 예술적 매체와는 다른 오직 기술적 매체를 통해서만 저장하고 처리할 수 있는 그 무 엇이다. Kittler, Friedrich A., Optische Medien, Berlin: Merve, 2002, S. 40.

5) 여기에서 호명된 축음기의 원어는 독일인 베를리너가 발명한 그라모폰(Grammophon)이다.

에디슨의 축음기는 이와 구분하여 포노그라프(Phonograph)라고 불린다. 키틀러는 축음기 의 역사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포노그라프와 그라모폰을 엄밀히 분리하여 논리를 전개하고 있지는 않지만, 최초의 축음기인 에디슨의 포노그라프에서는 녹음만 가능했으며, 이후 베 를리너가 발명한 그라모폰에 이르러서야 녹음과 재생이 가능해졌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맥락에서 의미 있는 축음기는 포노그라프가 아닌 그라마폰이라고 할 수 있 다. Kittler, Friedrich A., Grammophon, Film, Typewriter, S. 10. 또한 한번 녹음할 때마 다 매번 연주를 해야 하는 포노그라프에 비해 그라모폰은 한번 녹음한 음반을 계속 복제 하는 방식으로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다. 조너선 스턴, 청취의 과거, 윤원화 옮김, 현실문 화, 2010, 273-274쪽 참조.

6) Kittler, Friedrich A., Drauculas Vermächtnis. Technische Schriften, Leipzig: Reclam, 1993, S.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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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매체로 간주된 적이 없으며, 이 점이 언어 모델을 중심으로 한 소통구조를 통 해 매체이론을 전개해 온 여타의 다른 이론가들과 차별되는 지점이다. 그렇지만, 현대 매체학자들의 주요 관심 중의 하나가 각 시대의 주도 매체를 중심으로 인류 사를 재편성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한다면, 키틀러의 이론체계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구축하고 있는 시대 구분은 ‘기록체계 (Aufschreibesystem)’라고 불리며, 이는 ‘(문화적) 정보를 저장, 전달, 재현할 수 있는 기술의 네트워크’로 설명된다. 기록체계라는 단어는 “주어진 문화에 중요한 정보의 위치지정과 저장, 처리를 가능하게 하는 […] 기술의 네트워크”7)라는 것이 다.

키틀러가 기록체계라는 용어를 통해 재구성하고 있는 역사는 디지털 매체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간단히 말하자면, 문자 매체의 시 대인 ‘기록체계 1800’와 아날로그 기술매체의 시대인 ‘기록체계 1900’가 바로 그것 이다. 우선 기록체계 1800(정확히 보자면 1785-1815)은 문자가 기록체계의 중심이 되며, 문자라는 유일한 기록방식이 자의적인 기호가 아니라, 어머니 혹은 자연에 서 비롯된 초월적인 기의를 담고 있다는 낭만주의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기록되고 저장되는 것은 보편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것 이 우리가 예술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며, 기본적 저장양식이 문자이기 때문에 이때는 모든 예술이 문자 혹은 시학을 지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문자가 기록과 저장을 독점하는 시대라는 뜻의 ‘문자의 독점(Monopol der Schrift)’8)이라는 용어 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상황은 20세기의 시작을 전후로 급변하게 되었다. 공고해 보였던 문 자의 독점은 새롭게 등장한 매체기술에 의해 와해된다. 이제 소리와 빛을 기호로 치환할 필요 없이 그 형태 그대로 저장하는 방식들이 기록체계를 새로이 구성한 7) Kittler, Friedrich A., Aufschreibesysteme 1800․1900, München: Fink, 1995 (3., vollst.

überarb. Aufl.), S. 519. “[…] das Netzwerk von Techniken und Institutionen […], die einer gegebenen Kultur die Adressierung, Speicherung und Verarbeitung relevanter Daten erlauben”.

8) 같은 책, S. 12 et pas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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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시 말하면, 소리와 빛은 각각 녹음기와 사진이라는 기술조건들과 만나게 되 었으며, 이것이 바로 20세기의 지배적인 문화적 기록양식인 축음기와 영화였던 것이다. 그리고 문자의 기록방식 또한 타자기의 발명으로 일대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내면의 목소리를 따른 필사 방식에서 독립된 개별자로 인식될 수 있는 시 민적 개인이 탄생했다면, 분절된 알파벳을 불연속적으로 기입하는 타자기로 글을 쓰면서 개인은 익명화된 존재로 해체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기록체계 1900 (1885-1915)은 모든 면에 있어서 이전 세기 낭만주의 패러다임과의 결별을 의미 한다. 문자가 모든 감각을 통합하여 독점적으로 전달하며 작가의 천재성과 독자 의 상상력이 중요하던 시대로부터, 정보의 저장과 전달, 재현방식이 각각 상이한 아날로그 매체로 분화되는 시기로 이행하는 것이다.

키틀러는 이와 함께 우리가 믿고 있는 ‘영혼을 가진 인간’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이 기술매체를 통한 인간지각의 분화를 통해 어떻게 무너지게 되는지를 상세 하게 기술한다. 기술매체의 부상은 인간의 중앙신경계가 해체되는 과정과 동일하 다는 것이다.

1880년경 구텐베르크의 정보 저장 독점권을 폭파시켰던, 시각, 청각, 문자의 기술적 분화와 함께 이른바 인간은 원하는 대로 조작 가능한 것이 된다. 인 간의 존재는 기술적 장치로 변질된다. 기계들은 이전 시기처럼 근육만을 장 악하는 것이 아니라, 중추 신경계의 기능을 장악하게 된다. […] 이른바 인 간은 생리학과 통신기술로 해체되는 것이다.9)

이제 기록체계 1900에서 중심이 되는 매체는 축음기, 영화, 타자기이며, 이 아날로그 기계들은 각각 근대의 음향 기술, 광학 기술, 문자 처리 기술 전반을 대 9) “Mit der technischen Ausdifferenzierung von Optik, Akustik und Schrift, wie sie um 1800 Gutenbergs Speichermonopol sprengte, ist der sogenannte Mensch machbar geworden. Sein Wesen läuft über zu Apparaturen. Maschinen erobern Funktionen des Zentralnervensystems und nicht mehr bloß, wie alle Maschinen zuvor, der Muskulatur.

[…] Der sogenannte Mensch zerfällt in Physiologie und Nachrichtentechnik”. Kittler, Friedrich A., Grammophon Film Typewriter, S.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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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한다. 이 부분에서 키틀러는 정신분석학자 라캉이 제시한 세계구분을 차용하는 바, 1900년대 이후 전개된 아날로그 기술매체의 발달사를 현실적인 것, 상상적인 것, 상징적인 것을 뜻하는 라캉의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에 각각 대응시킨다.10)

바로 축음기가 상징적인 것을 실재적인 것으로 대체하는 기록매체다. 앞서 언급한대로, 축음기 이전까지 모든 소리의 저장은 기호로의 전환을 통해서만 가 능했다. 아름다운 음성은 문자로, 아름다운 음악은 기보법을 통해 기록되었으며 여기에서는 음성이 아닌 소리, 아름답지 않고 귀에 거슬리는 음, 혹은 인간이 판 단하기에 의미가 없다고 여겨지는 소음은 진지한 기록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 러한 어려운 기준을 통과한 청각 데이터만이 다시 등가적인 상징, 즉 기호로 번 역되어 저장되었다. 그러나 이제 인류가 진입하게 되는 현대의 문턱에서 청각적 데이터를 그 형태 그대로 저장하는 축음기가 등장함으로써 모든 소리는 의미유무 나 가치에 대한 인간의 판단과 관계없이 실제의 소리대로 기록/녹음되게 되었고, 그 안에는 우리가 그전까지는 아예 소리로서 인식하지 못하던 것들도 포함되었다.

벤야민이 사진기술에 대해 그 이전까지 육안으로 보지 못하던 시각적 무의식의 영역을 우리에게 처음으로 노출시켜 주었다고 평가한 것처럼, 축음기는 우리가 의식적으로는 듣지 못했던 이 세상의 모든 소리들, 즉 청각적 무의식의 영역을 활짝 열어주었다. 동물의 소리, 기계의 소음, 일상의 잡음도 이제는 기호화되어지 지 않은 그 상태 그대로 저장되어 전달 및 재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러한 의미에서 축음기는 우리에게 상징적인 것을 실재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은 최초의 기록양식이 되었다. ‘1900년의 역사적 전회’는 “상상력에서 정보처리로, 예 술에서 정보기술적 혹은 생리학적 개별성에로의 이행”11)을 뜻한다. 상징적인 격 자에서 부스러기로 떨어져 나갔던 실재의 소리들을 축음기를 통해 인식하게 된 경험은 현대음악과 예술의 경향을 크게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10) 라캉은 자기지각의 상이한 방식(직접적 욕망/반사영상/언어)을 설명하기 위해 이 도식을 사용하는데, 키틀러는 이를 1900년경에 이루어진 현대 정보통신의 세 가지 형식으로 투사 하고 있다. 앞의 책, S. 7-33 비교.

11) 앞의 책, S. 115. “[…] vom Einblidungskraft zu Datenverarbeitung, von Künsten zu nachrichtentechnischen oder physiologischen Einzelhei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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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축음기와 실재의 소리

1. 음에서 소리로

20세기에 들어서서 서구의 음악형식이 겪어야 했던 큰 변화는 바로 ‘음 (Ton)’으로부터 ‘소리(Klang)’로의 이행이다. 바로크 음악으로부터 시작하여 고전 주의에서 그 정점을 이룬 ‘아름다운 화음’에 대한 요구는 낭만주의를 거치면서 정 련된 음의 조화에서 벗어나 반음계와 불협화음까지 포괄하는 풍부한 성과를 보여 주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후기 낭만주의에 이루어진 다양한 실험적 음향의 등장 과 그로 인한 폭발적인 음량의 확대는 다른 한 편으로는 새로운 시대의 예고이기 도 했는데, 후기 낭만주의에서 표현주의를 이끌어낸 쇤베르크에 이르러서 현대음 악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관심사를 본격적으로 전면에 부각시키게 된다. 더 이상 아름다운 음과 그 음들로 이루어진 앙상블이 중심이 아니라, 이전까지 음악 외적 요소라고 여겨지던 청각적 데이터 모두를 지칭하는 ‘소리’ 전체가 무대 위로 등장 하는 것이다.

20세기 시작을 전후하여 […] 음악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이 등장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여러 ‘음’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리’가 어떠한 ‘효과’를 만들어내느냐가 더 중요해진다. 아름다운 멜로디, 조화로운 화성은 더 이상 음악적 특성의 본질적 요소가 아니다. 멜로디의 부재, 불협화음, 무조성(Atonalität), 소음의 활용, 지각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폭발적 소리의 활용, 또는 소리의 극단 적 제한 등과 같은 새로운 방법들이 음악의 주도원리로 자리 잡게 된다. 이 러한 새로운 시도들에 의해 음악의 무게중심이 ‘아름다운 음(들의 관계)’에 서 ‘소리(의 효과)’로 옮겨지게 된다.12)

12) 주일선, 사이렌의 유혹 - 폭력의 소리, 소리의 폭력 , 뷔히너와 현대문학, 36집 (2011.05), 161-186쪽, 여기서는 160-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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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변화의 예로는 무조음악과 12음기법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으며, 이 들은 온음계에서 으뜸음, 딸림음, 버금딸림음 등으로 위계관계로 구성되어 있던 음의 구조에 혁명과도 같은 평등을 부여했다. 무조성의 음악은 으뜸음을 중심으 로 한 중심음 체계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음악을 의미하며,13) 이로부터 발전된 12 음기법은 모든 12개의 음에 동일한 위치를 부여하는 혁신적인 민주성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12음기법을 사용한 음악은 12음 중 어떠한 음도 중복되어 강조되 거나, 혹은 하나라도 생략되지 않도록 12개의 음을 모두 나열해 놓는다.14) 인간의 귀에 최적화된 ‘아름다운 화음’을 포기하면서, 현대음악은 ‘들리는 것’의 세계를 대 폭 확장시켰으며, 더 나아가 그 너머의 세계로 청자를 인도한다.

이러한 경향은 현실세계에 대한 아름다운 재현에서 주관적 내면세계(혹은 무의식의 세계)의 표현으로 그 목표가 이전하기 시작한 전체 예술과도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15) 시각적 영역과 청각적 영역 모두에서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던 광범위한 변화는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관찰되지만, 그러한 변화의 동인에 대해 서 포괄적으로 답변이 이루어진 경우는 매우 드물게만 찾아 볼 수 있었다. 바로 우리의 맥락에서 매체태동기의 축음기라는 근원매체가 이끌어낸 변화로서 이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대답을 구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장방식이 문자에서 소 리 그 자체로 바뀌게 되는 것은 음악기록과 재현 양식에서의 커다란 변화를 뜻했 기 때문이다. 이전 시기 아름다운 화음으로 이루어진 작품만이 작곡과 감상의 대 상이었다면, 축음기를 통한 소음과 잡음의 발견은 음에서 소리로 예술적 영역을 크게 확장시켜 현대음악의 토양을 마련해주었던 것이다.16) 또한 음악을 구성했던

13) 이종구, 20세기 시대정신과 현대음악, 한양대학교 출판부, 2007, 132-134쪽 참조. 여기서 는 주일선, 앞의 논문에서 재인용.

14) 이러한 음렬주의는 후기에 가서는 모든 음악적인 요소들을 사용하는 총음렬주의로 발전하 며, 신디사이저와 시퀀서, 샘플러 등 다양한 전자악기들이 사용되는 현대 전자음악의 태동 으로 이어진다.

15) 주일선, 사이렌의 유혹 - 폭력의 소리, 소리의 폭력 , 181쪽 참조.

16) 이러한 직접적인 녹음은 서양의 전통적인 기보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비서구 음악의 요소 들의 적극적인 수용도 가능하게 했다. 마이클 채넌, 음악녹음의 역사, 29쪽 및 31-3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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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격과 화음은 주파수와 진동으로 대체되었으며, 시간당 진동수, 즉 시간이라는 독립변수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존 케이지의 <4분 33초> (1952)와 같은 작품이 가능해졌 다. 연주자가 자신의 악기와 함께 무대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퍼포먼 스를 통해 ‘음의 부재’를 보여주는 이 작품의 실질적 효과는 ‘소리의 발견’이며, 이 는 음으로부터 소리로 전환된 현대음악을 요약해서 담아낸다. 작품이 ‘연주’되는 동안 청중이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아름다운 음 대신, 그 순간 실제적으로 들을 수 있는 일상의 모든 소리가 되며, 그것이 작품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의식적 인 음의 부재가 무의식적으로 충만한 소리의 존재를 비로소 의식하게 만든다. 소 음이 음악작품의 새로운 질료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험 위에서 신디사 이저나 샘플러를 사용하는 현대 전자음악에서는 모든 소음이 음악 창작을 위한 재처리 과정에 필요한 원재료로 기능할 수 있었다.17)

이렇게 음악 생산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음악녹음의 역사 Repeated Takes (1995)를 기술한 마이클 채넌(Michael Chanan)에 따르면, 축음기의 탄생 은 서구음악의 수용과 감상에 있어서도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우선 녹음이 가 능하게 되면서 청중뿐만이 아니라 연주자 자신 또한 자신이 연주한 음악을 객관 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고, 타인이 생산한 음악을 어디에서든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18) 이러한 변화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여기에서도 무엇 보다 축음기의 발명으로 드러난 음의 물질성, 즉 음이란 이전 시기에 상상하던 대로 이상적인 비례관계와 형이상학적 산물이 아니라, 단지 금속판에 새겨진 홈 에 불과하다는 발견이 전제되어 있다. 축음기는 결정적으로 음악연주를 물질적 대상으로 바꾸었다. 음악은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는 아름다운 영혼의 소리가 아 니라, 손으로 쥐고 만질 수 있는 용기에 담겨져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축 음기가 가능케 한 음악의 녹음은 연주와 감상의 행위 또한 물리적으로 분리시켰 다. 연주자는 자신의 연주를 처음으로 청자가 되어 들어볼 수 있었으며, 이것은 17) 같은 책, 53쪽 참조.

18) 같은 책, 24-29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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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해석의 근본 성격을 바꾸었다.”19) 또한 재생의 기술은 음악을 감상하는 새 로운 방식을 창출했다. 다시 한 번 벤야민을 인용하자면, 작품의 모사본을 원작의 아우라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소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우리는 지하철을 타면서 오페라를 들을 수 있고, 고속도로를 운전하면 서 말러의 음악을, 비행기로 대양 위를 날면서 스페인 수도사들이 노래하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 재생 기술은 음악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은 전통의 영역에서 음악 작품을 떼어내며, 벤야민이 아우라 라고 했던 것, 즉 그 작품의 진품성을 보증했던 것을 파괴한다.20)

이제 음악을 듣는 청중이란 특정한 공간과 세대, 혹은 어느 공동체에 묶여 있는 전통적 개념으로 환기되지 않는다. 청중은 마치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의 인 터넷 유저처럼 전 세계 곳곳에 퍼져 있으며, 이것은 음악 체험의 형식을 근본적 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20세기라는 근대의 문턱에서 집중적 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로써 우리는 이 시기 음악 장르를 포함한 예술 전반이 보였던 패러다임의 변화와 그 원인을 당시 기술매체의 부상 과 함께 유추해 볼 수 있게 되었다.

2. 예술과 문학의 선택지

축음기가 일으킨 현대의 파동은 예술 전반에 파급된다. 특히 문학에 있어서 의 충격은 ― 많이 알려진 영화의 간섭 이전에 이미 ― 압도적인 것이었다. 현대 의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인 릴케는 파리에서 해부학 강의를 들으며 근원소음 Ur-Geräusch (1919)이라는 글을 저술한 바 있는데, 그는 여기에서 매우 기이하 고도 이채로운 제안을 하고 있다. 그는 인간 두개골이 가지고 있는 우연적인 봉 19) 같은 책, 25쪽 참조.

20) 같은 책,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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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선과 축음기 바늘이 실린더에 새긴 흔적과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축음기의 원 리가 실린더에 새겨진 흔적을 재생하는 것이라면, 축음기의 바늘을 “소리를 시각 적으로 번역해서 나온 흔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 ― (예 를 들어) 두개골의 봉합선 ― 위에 올려놓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21)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릴케의 질문에 대해 키틀러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붙인 다.

릴케 이전에는 그 누구도, 그 아무것도, 아무도 암호화한 적이 없는 궤도를 해독하자고 제안한 적이 없다. 축음기가 생겨난 후부터 주체가 없는 문자들 이 존재하기 시작한다.22)

시인을 매혹한 것은 ‘실린더에 새겨진 기호들’, ‘모든 인간의 목소리를 넘어 서는 생리학의 흔적’들이다. 그 누구도 기호화하거나 암호화한 적이 없었던 것들 이 이제 해독되고, 읽혀진다. 이러한 ‘주체가 없는 문자들’이란 이제 곧 인간의 손 에서 펜을 빼앗아 가는 일련의 기계적 글쓰기가 완성하게 될 현대적 글쓰기의 가 장 큰 특징이기도 했다. 즉, 매체기술의 태동시기에 ‘쓰기의 기술적 완성 (technische Überrungungen des Lesens)’23)을 먼저 이룬 것은 타이프라이터가 아 닌 축음기였다는 것이다. 이제 작가는 “자신의 고유한 매체인 문자와는 정확히 맞 서는 대립물, 백색 소음을 얻게 된다.”24) 이러한 백색 소음은 어떤 문자로도 저장

21) Friedrich A. Kittler, Grammophon, Film, Typewriter, S. 66. “Wie nun, wenn man diesen Stift täuschte und ihn, wo er zurückzuleiten hat, über eine Spur lenkte, die nicht aus der graphischen Übersetzung eines Tons stammte, sondern ein an sich und natürlich Bestehendes -, gut: sprechen wirs nur aus: eben (z. B.) die Kronen-Naht wäre -: Was würde geschehen?”.

22) 같은 책, S. 71. “Niemand vor Rilke hat je vorgeschlagen, eine Bahnung zu decodieren, die nichts und niemand encodierte. Seitdem es Phonographen gibt, gibt es Schriften ohne Subjekt”.

23) 같은 책, S. 69.

24) 같은 책, S. 72. “Damit aber feiert ein Schriftsteller das genaue Gegenteil seines eigenen Mediums - weißes Rauschen, wie keine Schrift es speichern k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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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는 것이다. 축음기의 등장과 함께 음보를 기록하던 악보 종이가 당면한 위기를 철자를 기록하던 문학의 종이들도 동일하게 직면하게 되었다.25) 그러한 의미에서 축음기는 문학과 음악을 동시에 무력하게 만들었으며, 문학과 음악이 기반을 두고 있던 표상할 수 없는 실재계를 물리적으로 재생가능한 것으로 만들 었다. 이렇게 축음기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기록체계에서는 이전까지 인간에 의 해서 무의미하다고 여겨진 것들이 기록되고, 기억된다. 동시에 이와 함께 기록되 고, 기억되는 것의 지위도 변화한다. 아날로그 기술매체로 이루어진 기록체계는 이전까지 숭고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여겨졌던 문학의 가치를 하락시킨다. 이제 문학은 내면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영혼의 작업이라기보다는 부분적으로만 해독 가능한 소음의 기록으로 간주된다. ‘문학으로부터 매체기술로의 역사적 전환(der historische Schwenk von Literatur zu Medientechnik)’26)은 이렇게 완수되었다.

기술이 기억술을 누르고 승리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의 대상이던 문학의 죽음을 알리는 조종이 울리는 것이다.27)

이러한 상황에서 문학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다음과 같다. 예술에서의 가장 뚜렷한 변화는 시문학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전달하고 있는 문자라는 매체의 물질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등장했던 아방가르드 실험예술과 다다, 칼리그람과 비주얼 포엠들은 문자가 가진 시각성을 강조하고 (자연, 여성 혹은 영혼 그 무엇이든 간 에) 문학에 내포되어 있다고 믿었던 근원적 목소리와의 연결고리를 끊는 역할을 하게 된다. 문자는 공간적으로 재배치되어 자기 자신의 물질성에 몰두하게 되며, 자연과의 연관성 안에서 실재를 포착(축음기)하거나 상상을 통해 환영을 만들어 내는 임무(영화)는 다른 기술매체에게 내어주게 된다. 의미가 아닌 물질적 형식이 25) 같은 책, S. 93 비교.

26) 같은 책, S. 116.

27) 같은 책, S. 125. “Technik triumphiert über Mnemotechmik. Und der Dichtung, wie sie so vielen und so lange die Liebe gewesen war, schlägt ihre Totenstu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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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에 부각되는 현대문학의 새로운 상황은 이러한 기술적 배경에서 야기되었다.

또 다른 선택은 다른 매체예술로의 전환이다. 문학이 무명 작사가의 서정시로 레 코드 판 위에 등장하는 형식으로, 이제 상상계에서 실재계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 이다.28) 이제 디지털 매체의 등장으로 문학이 다시 한 번 어떠한 변화를 겪어야 했는지 상기해보면, 기술적 매체의 태동기에 겪었던 문학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3. 실재의 소음과 실재의 조작

그렇지만 축음기의 등장이 가지고 온 변화는 현대 음악과 예술전반의 형태 를 바꾸어 놓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실상 축음기는 그때까지 발명되지 않았 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매우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필 연적으로 새로운 기술의 발견이 아니라, 시대정신이 그러한 발명을 이끌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29) 여기에서 시대의 흐름과 축음기의 발명은 서로 상호작용하는 순환의 고리를 만들어낸다. 현대가 이끌어낸 것은 이전 시대에서는 불가능한 것 들이라는 것이다. 또한 축음기가 이루어낸 것도, 그 전에는 요청하지도 않았고, 가 능하지도 않았던 것들이다. 축음기와 함께 그동안 상징화에서 누락되고 배제되었 던 것들이 이제 전면에서 우리를 마주하게 되었다.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무의식 이라는 실재의 신대륙을 발견하게 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축음기의 등장과 함께 정신의학은 처음으로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서 소음과 잡담을 그대로 저장할 수 있는 장치를 가지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축음기의 실재계는 무의식의 영역을 포착한다. 축음기가 차별 없이 저장하는 소음에 가까 운 무의미한 말은 인간이 이전까지 의식적으로 접하지 못했던 복잡하고 광활한, 그리고 숨겨져 있던 영역의 문을 여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28) 같은 책, S. 125f 비교.

29) 마이클 채넌, 음악녹음의 역사, 15-16쪽 참조; 조너선 스턴, 청취의 과거, 10쪽 참조.

또한 Kittler, S. 47f.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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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만이 기록되고 저장되던 시대를 지나, ‘무의미’의 양산과 함께 “무의미의 시대, 바로 우리가 사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30) “여기에서 무의미란 이미 무의식이 다.”31)

따라서 축음기의 발명은 정신의학의 발전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키틀 러는 매우 상세하게 당시 환자와의 상담에 축음기의 녹음기능이 사용된 역사적 정황을 들려주는 바, 이것은 음악의 녹음에서 의미 없다고 여겨졌던 소음이 동등 한 자격으로 포함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전까지는 환자의 진술에서도 잡음, 잡담, 실수로만 여겨졌던 부수적인 내용들이 이제는 아무런 차별 없이 진지하게 기록된 다는 것을 의미한다. 축음기 등장 이전에 의사가 필기로 직접 작성했던 프로토콜 은 정해진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지향하는 선택적 결과로 이해된다. 환자가 내는 모든 소리는 청자의 기준에서 의미 있음이라는 필터를 통 해서만 기록되었다는 뜻이다. 흥미롭게도 ― 적어도 정신의학의 영역에서는 ― 피험자가 그냥 지나가는 말을 한다고 믿고, 실험자 또한 중요한 진술을 포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바로 그 순간에, 실상 환자의 정신적 환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찰나의 통로가 되어주는 매우 중요한 진술들이 행하여지는 경우가 많다 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무의식의 영역은 상징계의 차원에서는 불러내어질 수 없 는 그런 것이다. “그에 반해 축음기는 정신의학이 연구하는 언어착란을 그대로 불 러낸다.”32)

그러나 축음기에 의해 불려나온 실재계가, 마치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들 려줄 것 같은 축음기에 의해 동시에 언제든지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이 기술매체를 고찰하는 데 있어 키틀러가 수행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이며 또한 급진적인 주장 이다. 키틀러는 축음기가 발명되었던 당시 뇌의 활동과 축음기 기능의 유사성을 서술하고 있는 장 마리 귀요(Jean Marie Guyau)의 기억과 축음기 Gedächtnis

30) Friedrich A. Kittler, Grammophon, Film, Typewriter, S. 134. “Die Epoche des Unsinns, unsere Epoche, kann beginnen”.

31) 같은 책, “Dieser Unsinn ist immer schon das Unbewußt”.

32) 같은 책, S. 133. “Der Phonograph dagegen lockt jene Sprachverwirrtheiten, um deren Psychiatrie es geht, nachgerade hervor”.

(15)

und Phonograph (1880)라는 글을 소개한다.33) 지각세포를 통해 인간의 뇌에 들 어온 데이터들은 보이지 않는 선으로 뇌세포에 새겨지면서 저장이 되며, 그리하 여 기억이란 축음기의 재생과정과 마찬가지로 새겨진 홈에 따라 재생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두뇌의 중앙신경시스템의 기능이 기술적으로 이 식된 것과 같았다.34) 귀요는 기록과 재생 기능 이외에도, 축음기와 두뇌에 각인된 진동의 속도가 저장된 정보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인간의 뇌와 축음 기의 공통점으로 들고 있다.

여기에서 축음기의 속도를 빠르게 하는 작업, 이것이 바로 키틀러가 아날로 그 기술 매체에서 가장 특징적인 기능으로 보고 있는 시간축의 조작(time axis manipulation, TAM)이다.35) 축음기에서 속도의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변화는 이 전의 음의 변화와는 다르다. 기술매체가 기록된 것에 대해 저장 및 재현의 시간 을 마음대로 조정하는 순간, 기록 자체가 조정 가능한 것으로 변화한다. 예를 들 면 속도를 빨리하여 음을 높일 경우, 축음기에서는 소음도 같이 증가하여 이전에 들리지 않던 소리까지 들리게 되는 것이다. “축음기의 재생 속도가 녹음 속도와 달라지면, 깨끗하게 들리는 음들뿐만 아니라 소음 스펙트럼 전체가 변화하게 된 다. 상징계 대신 실재계가 조작되는 것이다.”36) 원래는 들리지 않는 음들도 재생 할 때 귀에 들릴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면, 축음기에서 소리의 저장과 변조는 원 칙상 동시에 수행된다. 축음기로부터 시작한 기능은 이후 청각데이터를 저장 및 재생하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점점 더 강화되는 길을 걸었다.

저장, 삭제, 선택, 빨리 돌리기, 되감기, 잘라내기 - 마이크에서 매스터 음반

33) 같은 책, S. 49-54. 비교.

34) 같은 책, S. 47 비교.

35) 같은 책, S. 56.

36) 같은 책, S. 57. “Wenn beim Phonographen die Wiedergabegeschwindigkeit von der Aufnahmegeschwindigkeit abweicht, wandern nicht nur saubere Töne, sondern Geräuschspektren in ihrer Gesamtheit. Manipulierbar wird statt dem Symbolischen das Re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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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신호회로의 중간삽입은 조작 자체를 가능하게 하였다. 대독일 라디오 방송의 오리지널-전황보고 이후 라이브 방송은 더 이상 라이브가 아니다.

[…]

실제적인 것은 데이터 흐름에도 불구하고 검열의 가능성이 생겨나게 된다. 테이프 레코드 기계가 사운드 프로세싱 과정에서 행하는 기능이 바로 이것이다. 편집과 청취 조정은, 상징적 연쇄물들로 이루어진 예술에서라면 조작될 수 없는 것을 조작되게 한다. 빨리 돌리기, 되감기를 통해 반복되는 시간이 순수한 우연을 조직하고 있는 것이다.37)

이러한 모든 데이터의 조작가능성은 바로 녹음과 재생이 모두 가능했던 최 초의 축음기였던 베를리너의 그라모폰이 행한 단순한 재생기술로부터 시작되었 다. 다시 말하면, 저장된 소리의 재생은 언제나 조작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것은 기록 자체를 위협한다. 아날로그 기계에 기록되는 순간, 기록은 이미 기계 적으로 조작된 것으로 의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매체기술에 의존하는 모 든 기록이 가지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되었다. 오늘날 각종 매체에서 우리가 접 할 수 있는 기록은 이러한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기술적 발전의 최종 종착 지, 즉 모든 정보를 다시 디지털 기호로 치환하여 통합하는 슈퍼매체인 컴퓨터의 등장과 함께 기록의 조작가능성은 그 어떤 봉합선이나 불연속면 없이 그 어느 때 보다 매끄럽게 완수되었다.38)

37) 같은 책, S. 165f. “Speichern, Löschen, Auslesen, Vorlaufen, Rückspulen, Schneiden – die Zwischenschaltung von Tonbändern in den Signalweg vom Mikrophon zur Masterplatte macht Manipulation selber machbar. Seit den Original-Kampfreportagen des Großdeutschen Rundfunks sind nicht einmal Live-Sendungen mehr live. […]

entstehen auch im Datenfluß des Realen Möglichkeiten von Zensur(um nicht Kunst zu sagen). Genau das ist die Funktion des Tonbandgeräts im Sound Processing. Schnitt und Abhörkontrolle machen das Unmanipulierbare so manipulierbar, wie das in den Künsten nur symbolische Ketten gewesen sind”.

38) 같은 책, S. 8. “컴퓨터 안에서는 모든 것이 숫자이다. 이미지도 없고, 소리도 없고, 단어도 없는 양적인 존재. 그리고 회로의 접속이 지금까지 분리되었던 정보의 흐름을 한꺼번에 디 지털로 표준화된 수열로 가지고 온다면 모든 매체는 다른 모든 매체로 전환하는 것도 가 능하다. 숫자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변조, 변환, 동시녹음; 느리게 하기, 저장하기, 전환 하기; 혼합화, 스캐닝, 맵핑 -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전면적인 매체연합이 매체 개념 자체 를 흡수한다. In den Computern selber dagegen ist alles Zahl: bild-, ton- und wortlose

(17)

Ⅳ. 나가며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키틀러의 논법을 따르자면 청각적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새로운 음향 녹음과 재생의 기법은 음악예술 장르의 영역에서 커다란 전 환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시대정신과의 결합으로 현대라는 거대한 시대의 문턱을 넘어서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축음기라는 기술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이라는 시공간에서 인간 지각의 방식이 분화되어 변화하는 데 중요한 물적 토대로서 작용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현대에 이르러 ‘인간’으로부터

‘기계적 조작과 연산’으로 역사의 중심축이 옮겨졌다는 키틀러 특유의 (비관적) 사고방식이 기저에 깔려 있다. 축음기를 만들어내고 발생시킨 음향학은 “인간이 자의적으로 부여하는 소리의 의미보다는 주파수와 파동을 중요시했다”39)는 것이 다. 우리가 이전에 중심했던 가치들, ‘작품, 마음의 선율, 기의’40)에 대해 주파수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기록과 재생이 동일한 바늘 하나로 이루어지는 최초의 기계였던 축음기는 그 당시까지 서구의 유일한 시간 저장 수단이었던 문 자와 악보를 대체하고, 저장과 조작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면서 현대의 매체기술 시대를 새롭게 구성하기 시작했다.41) 이러한 최초의 시도는 이후 계속해서 등장 한 영화와 타자기에 의해서 강화되었으며, 우리시대 주도 매체인 컴퓨터에 이르 러서 그 정점을 이루게 된다. 본 논문의 영역은 출발점인 축음기에 한정되어 있 지만, 그로부터 다채롭게 전개되는 키틀러의 현대매체 발달사와 그 의미에 대한

Quantität. Und wenn die Verkabelung bislang getrennte Datenflüsse alle auf eine digital standardisierte Zahlenfolge bringt, kann jedes Medium in jedes andere übergeben. Mit Zahlen ist nichts unmöglich. Modulation, Transformation, Synchronisation; Verzögerung, Speicherung, Umstatung; Scrambling, Scanning, Mapping – ein totaler Medienverbund auf Digitalbasis wird den Begriff Medium selber kassieren”.

39) 조너선 스턴, 청취의 과거, 65쪽.

40) Friedrich A. Kittler, Grammophon, Film, Typewriter S. 111. “Einmal mehr siegt der Frequenzbegriff über Werke, Herzensmelodien und Signifikate”.

41) 이러한 시각에는 늘 지적되듯이 매체 결정론적이며 환원주의적인 오류의 가능성이 내재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나, 키틀러 이론의 맹점을 지적하거나 그 기본 전제를 비판하는 것은 본 논문의 관심사가 아님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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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는 계속되는 연구에서 보다 복합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42)

* 논문투고일: 2015년 4월 15일 / 심사기간: 2015년 4월 16일-5월 20일 / 최종게재확정일: 2015 년 5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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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Kittler, Friedrich A., Grammophon, Film, Typewriter, Berlin: Brinkmann &

Boss, 1986.

______, Drauculas Vermächtnis. Technische Schriften, Leipzig: Reclam, 1993.

______, Aufschreibesysteme 1800․1900, München: Fink, 1995 (3., vollst.

überarb. Aufl.)

______, Optische Medien, Berlin: Merve, 2002.

마이클 채넌, 음악녹음의 역사, 박기호 옮김, 동문선, 2005.

이종구, 20세기 시대정신과 현대음악, 한양대학교 출판부, 2007.

조너선 스턴, 청취의 과거, 윤원화 옮김, 현실문화 2010.

주일선, 사이렌의 유혹 - 폭력의 소리, 소리의 폭력 , 뷔히너와 현대문학, 36집 (2011.05), 161-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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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덧없이 사라지는 아름다운 음악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저장하여 재 생해주는 축음기의 발명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오래된 꿈의 실현이다. 그 렇지만 독일의 매체학자 프리드리히 A. 키틀러의 논법을 따르자면 축음기의 역할 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축음기는 19세기까지 계속되어 오던 인류의 기록 패 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꾼 주인공이며, 동시에 무의식이라는 실재의 세계를 인류에 게 드러내며 마침내 ‘현대’를 견인한 근대의 동력이었다. 축음기 기술은 19세기 후 반부터 20세기 초반이라는 시공간에서 인간 지각의 방식이 분화되어 변화하는 데 중요한 물적 토대로서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전 시대에서는 청각적 데이터를 기 록할 때 인간에게 의미 있는 소리만 선별하여 문자로 저장했다고 한다면, 이제 모든 소리를 차별 없이 저장하는 축음기는 무의미한 소음들을 최초로 인식가능하 게 해주었다. 이러한 경험 위에서 더 이상 아름다운 음의 조화가 아니라, 전체로 서의 소리의 효과에 더 관심을 가지는 현대음악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새 로운 음향 녹음과 재생의 기법은 음악예술 장르의 영역에서 커다란 전환을 이끌 어냄과 동시에, 시대정신과의 결합으로 현대라는 거대한 시대의 문턱을 넘어서는 데 기여했다. 여기에 더하여, 기록과 재생이 동일한 바늘 하나로 이루어지는 최초 의 기계였던 축음기는 그 당시까지 서구의 유일한 시간 저장 수단이었던 문자와 악보를 대체하고, 저장과 조작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면서 현대의 매체기술시대를 새롭게 구성하였다.

핵심어

축음기, 키틀러, 실재의 소리, 소음, 기록체계, 영화, 타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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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Gramophone and the Sound of the Real : Focusing on the Theory of Friedrich A. Kittler

Hyun-Joo Yoo*43)

The invention of the gramophone ― which stores and plays beautiful music that meaninglessly disappears or the voice of a loved one ― is, like the motion picture; a the fulfillment of mankind's oldest dreams. However, according to the argumentation of Friedrich A. Kittler, the role of the gramophone does not end at this. The gramophone is what completely changed mankind's recording paradigm that lasted until the 19th century.

Simultaneously, the gramophone revealed to mankind the existence of subconsciousness, becoming the moving force towards ‘the modern.’

Gramophone technology was used as a crucial physical base to divide and change the method of human perception of the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y. If the previous era had stored acoustic data by recording only sounds that had meaning to humans into letters, the gramophone which stored all sounds with no discrimination allowed meaningless sounds to be recognized for the first time. Thanks to these experiences, modern music that showed more concern towards the effect of the sound as a whole could be created, instead of music that focused more on the harmony of beautiful sounds. The new

* Professor, Yonsei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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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recording and playing techniques brought about a huge shift in the field of artistic music genres, and at the same time contributed to moving towards the modern age by binding with the spirit of the times. Additionally, the gramophone, the first machine which recorded and played with the same needle, replaced letters and musical scores which were the only methods of storing time in Western civilization. By allowing storage and operation possible at the same time, it formed a new era of modern digital media.

Key Words

Gramophone, Kittler, Sound of the Real, Noise, Discourse Network, Film, Typewriter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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