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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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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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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기 역사문화아카데미 “국립공주박물관 특별전시 기행”

특별전시 ‘공산성-공주 역사기행 1번지-’ 연계 강좌

백제의 성곽

도성을 중심으로

일 자 : 2013년 10월 23일(수) 장 소 : 국립공주박물관 세미나실 강 사 : 서 정 석 (공주대학교 문화재보존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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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의 시작 이후부터 중간 쉬는 시간 전까지는 강의실에 들어올 수 없으며, 강의 도중 강의실 밖으로 나갔을 경우에도 중간 쉬는 시간 전까지 강의실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3) 추가로 교재가 필요하신 분은 홈페이지→학술/교육/행사→교육자료에서 교재파일을 다운받아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4) 강의 중에는 휴대폰을 꺼주시기 바랍니다. 제7기 역사문화아카데미 “국립공주박물관 특별전시 기행” 특별전 “공산성-공주 역사기행 1번지-” 연계 강좌 백제의 성곽 도성을 중심으로 -발행 국립공주박물관 우)314-020 충남 공주시 관광단지길34 TEL/(041) 850-6365 FAX/(041) 850-6350 gongju.museum.go.kr (재)중앙문화재연구원 우)305-500 대전광역시 유성구 테크노7로 32-9 TEL/(042) 933-2700 FAX/(042) 933-7300 www.jungang.re.kr 인쇄 (주) 계 문 사 / (02)725-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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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성곽

도성을 중심으로

-서 정 석 공주대학교 문화재보존과학과 교수

머리말

백제의 성곽은 크게 보아 도읍지에 축조한 도성과 도성을 지키기 위해 각 지방 군현郡縣에 축조한 산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도읍지에 축조한 도성이나 왕성이 평지나 나지막한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면 각 지방에 축조된 군현성은 높은 산봉山峰의 정상부에 축조되어 있기 때문에 산성의 형태로 되어 있다. 이렇게 도성과 산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기 때문에 백제의 성곽이라 하면 이 두 가지를 모두 언급해야 하지만 이번 역사문화 아카데미는 공산성 특집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여기서는 산성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도성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도 웅진기의 도읍지에 대해서는 다른 발표자가 있는 만큼 생략하고, 한성기의 도읍지 모습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웅진기와 사비기 백제 도읍지의 구조도 여전히 숙제가 많이 남아 있지만 한성기는 더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처음에 건국한 곳이 위례성인지, 하남위례성인지, 하북위례성인지 조차 불분명한 실정이다. 언젠가 현재의 서울시 송파구 일대가 백제의 도읍지가 되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한데, 이 경우에도 백제의 왕성이 풍납동토성인지 몽촌토성인지, 아니면 풍납동토성에서 몽촌토성으로 옮겨졌는지, 풍납동토성에서 몽촌토성이 아닌 제 3의 장소로 옮겨졌다가 다시 풍납동토성으로 돌아왔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2013년 9월 27일에 한성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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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 ‘한성백제의 왕궁은 어디에 있었나’라는 주제로 집중토론회가 개최된 것만 보아도 한성기 백제 도읍지의 모습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의외로 문헌기록을 검토해 보면, 이러한 문제에 어느 정도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오늘은 문헌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한성기 백제 도읍지의 모습을 찾아보고자 한다.

1. 한성기 백제 도읍지의 구조

종래 한성기의 도읍지와 관련하여 논쟁이 되어 왔던 부분은 위례성의 위치,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과의 관계, 근초고왕 26년(371)에 ‘이도한산移都漢山’하였다는 한산漢山의 위치 등이 아닐까 한다.

1) 위례성의 위치

위례성이 백제의 첫 도읍지였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조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A.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곳을 살펴보았는데, 비류沸流는 물가에서 살고 싶어 하였다. 십신十臣이 간하여 이르기를, “오로지 이곳 하남河南의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가로막고 있고, 남쪽으로 기름진 들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막고 있으니⋯온조는 드디어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백제는 처음에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여기서 말하는 하남위례성은 현재까지의 고고학 자료에 의하는 한 현재의 서울시 송파구 일대인 것이 틀림없다. 문제는 󰡔삼국사기󰡕에 <사료 A>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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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성곽 도성을 중심으로 -B.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의 남쪽을 살펴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오랜 동안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겠다”라고 하였다.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慰禮城의 민호들을 옮겼다⋯14년 봄 2월에 천도하였다. <사료 B>는 온조왕 13년(기원전 6)과 14년(기원전 5)때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것인데, 여기에서 보면 확실히 백제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하남이 아닌 하북이었다. 아울러 그 때의 도읍지는 온조왕 즉위년조 기사에 나오는 ‘하남위례성’이 아니라 그냥 ‘위례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료 A>에서는 백제가 처음부터 ‘하남위례성’에서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료 B>에 의하면 처음에는 하북의 어디엔가에 있다가 온조왕 14년에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례성의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이 두 기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정리가 먼저 있어야 한다. <사료 A>와 <사료 B>에 보이는 ‘하남위례성’과 ‘위례성’은 다른 곳이기 때문이다. <사료 A>와 <사료 B>처럼 하나는 처음부터 하남에 자리한 것으로 나오고, 다른 하나는 하북에 있다가 하남으로 천도한 것으로 나온다면 하북에 있다가 하남으로 천도했다는 기사가 좀 더 사실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한다. 하북에 있다가 하남으로 천도한 사실을 처음부터 하남에 자리한 것처럼 기록할 수는 있지만 처음부터 하남에 자리했던 것을 하북에 있다가 하남으로 천도한 것처럼 기록할 수는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결국 백제는 처음 한강 북쪽의 어디엔 가에 있다가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한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하기 전의 위치는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이야기해 온 것처럼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이 아니라 그냥 ‘위례성’이었던 것도 확인할 수 있다. ‘하남위례성’의 상대적인 개념은 ‘하북위례성’이 아니라 그냥 ‘위례성’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위례성’은 어디일까. 위례성은 이미 󰡔삼국사기󰡕에 ‘이름만 있고 그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에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고려시대에는 이미 그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따라서 종래에 그 위치를 삼각산 동쪽으로 비정하기도 하고, 서울의 강북지역으로 보기도 하고, 세검동 일대로 보기도 하고, 중랑천 일대로 보기도 하였다. 실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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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례성’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는데,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참고하면 어떨까 한다. C-1. 2월에 한수漢水 동북부의 모든 부락에서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 2. 한수 동북부의 부락이 기근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해 들어간 자가 1천여 호에 이르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사료 C-1>은 온조왕 41년(기원 23)조 기사고, <사료 C-2>는 온조왕 37년(기원 19)조 기사다. <사료 C>에서 보면 위례성을 수리하기 위해 한수漢水 동북부 사람들을 동원했던 것을 알 수 있고, 아울러 여기서 말하는 한수 동북부란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임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위례성 역시 패수와 대수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면 좋지 않을까 한다. 이렇게 패수와 대수 사이의 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한 것이 맞는다면, 그 하남위례성은 현재의 서울시 송파구 일대에 해당된다. 문제는 송파구 일대에는 잘 아는 것처럼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연히 이 두 성곽 중 하나가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큰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어느 것이 하남위례성이냐 하는 점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성에 관한 또 다른 사료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2) 근초고왕의 ‘이도

移都

’와 하남위례성

<사료 A>와 <사료 B>에서 보듯이 백제는 하북에서 하남으로 천도하였는데, 근초고왕 때에 다시 한 번 ‘이도移都’한 기록이 보인다. <사료 C>가 그것이다. D.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서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斯由가 힘을 다해 싸워 막았으나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서울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사료 D>에서 보면 백제는 근초고왕 26년(371)에 한산漢山으로 이도移都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도移都’하였다는 한산漢山은 어디일까. 종래에 이 문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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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성곽 도성을 중심으로 -관련하여 여러 가지 주장이 있어왔다. 남한산성으로 보기도 하고, 춘궁리春宮里 일대로 보기도, 이성산성으로 보기도 하고, 북한산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때 한산으로 이도移都한 다음에 다시 하남위례성으로 환도還都한 기사는 어디에도 없다. 아울러 제 3의 위치로 재차 이도移都, 혹은 천도遷都한 기사도 없다. 그렇다면 백제는 근초고왕 26년에 하남위례성에서 한산으로 이도한 다음 한성 함락 때까지 도읍지의 구조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한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주목된다. E-1. 󰡔백제기󰡕에 이르기를 개로왕 을묘년 겨울에 이리의 대군이 와서 대성大城을 7일 낮 7일 밤 동안을 공격해 왕성王城이 함락되니 마침내 위례를 잃었다. 2.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對盧인 제우⋅재증걸루⋅고이만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성南城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사료 E-1>은 󰡔일본서기󰡕의 기록이고, <사료 E-2>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둘 다 한성漢城이 함락될 당시의 사정을 전하고 있는 기록인데, 여기에서 보면 당시 한성은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북성은 다른 말로 대성大城 이라 하고, 남성은 왕성王城이라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왕성이란 어떤 성곽을 가리키는 말일까. 왕성이란 말 그대로 왕이 평소 거처하는 성곽을 말한다. 왕성과 비슷한 말로 도성이 있는데, 이는 말 그대로 도읍지를 에워싼 성곽을 뜻한다. 부여의 나성 같은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도성’이라는 말은 도읍지 전체를 에워싼 나성이 있는 부여에나 어울리는 개념이 아닌가 한다. 서울이나 공주는 그런 나성이 없기 때문에 도성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왕도王都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에 부합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생각이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고구려군에 의해 한성이 함락될 당시 한성에는 북성과 남성이 있었고, 그중 남성을 왕성이라 부르고 있기 때문에 왕은 남성에 거처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료 A>에서 <사료 E>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백제는 맨 처음 하북의 ‘위례성’에서 건국하고, 뒤이어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하였다. 다시 근초고왕 26년(371)에는 한산漢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는데, 이로써 한성에는 왕성이 두 개 있었음을 알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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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근초고왕 26년 이전의 왕성이 하나고, 근초고왕 26년에 옮겨 간 왕성이 또 다른 하나의 왕성이다. 실제로 근초고왕 때 이도移都한 이후 더 이상의 이도移都나 환도還都는 없이 개로왕 때 한성 함락을 맞이하게 되는데, 개로왕 때 한성이 함락되던 장면을 묘사한 기록을 보면 당시 한성은 북성과 남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상의 사실을 그림으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한성기 천도 및 한성의 구조> 위례성 → 하남위례성 → 이도 한산 : 북성 + 남성 = 한성 여기서 말하는 한성이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일대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때 북성, 즉 대성은 풍납동토성이고, 남성 즉 왕성은 몽촌토성 이라는데 의견을 달리 하는 연구자는 많지 않다. 그렇다면 근초고왕 26년(371)에 ‘이도한산移都漢山’한 곳은 몽촌토성임을 알 수 있다. 자연히 하북에서 천도해 온 ‘하남위례성’은 풍납동토성이라고 보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한다. 다시 말해서 백제는 하북의 위례성에서 풍납동토성으로 천도한 다음, 근초고왕 26년(371)에는 다시 몽촌토성으로 이도移都하였다. 자연히 근초고왕 26년 이전까지의 백제 왕성은 풍납동토성이었고, 그 이후 백제왕이 머물던 왕성은 몽촌토성이었다. 그렇게 되다보니 한성이 함락될 때 풍납동토성은 왕성이 아닌 대성으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이해와 달리 종래에는 풍납동토성에 백제 왕이 줄곧 거주하고, 몽촌토성은 유사시에 들어가서 농성하는 곳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다수를 이루고 있었는데, 한성이 함락될 당시의 기록에 남성이 왕성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상 몽촌토성은 왕성으로 이해해야지 유사시에 대비한 방어용 성곽으로 이해하는 것은 좀 곤란한 것이 아닐까 한다. 참고적으로 한성漢城 왕도로 표현되고 있는 만큼 하나의 특정 성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을 포함한 일정한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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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성곽 도성을 중심으로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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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지고(소현숙 역), 「풍납토성의 세가지 문제에 대한 시론」, 󰡔동북아시아 속의 풍납토성󰡕, 학연문화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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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주박물관 특별전시 기행”

● 일 시 : 2013. 03. 27(수)~11. 27(수) / 15:00~17:00 ● 장 소 : 국립공주박물관 세미나실 ● 강의 일정 및 강의 내용 주제 연번 일자 강의 내용 특별전시 일 정 국립공주 박물관에서 느끼는 제주 문화 1차 03.27. 제주의 역사와 문화 (김동전, 제주대학교 박물관장) 제주의 뭍그릇과 섬그릇 (03.12.~05.26.) 특별전시 “제주의 뭍그릇과 섬그릇” (김진경,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사) 2차 04.03. 제주의 이야기, 본풀이, 신앙(김헌선,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3차 04.10. 제주 전통건축의 공간미학(김태일, 제주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4차 04.17. 제주도 옹기 - 허벅을 중심으로(이경효,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5차 04.24. 계룡산 분청사기(김영원,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6차 05.01. 제주도의 또 다른 문화를 들여다보기 - 제주유배문화 -(양진건, 제주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7차 05.08. 세계자연유산 제주의 지질학적 특성과 가치(손영관, 경상대학교 지구환경과학과 교수) 국립공주 박물관에서 느끼는 옛사람들의 삶과 죽음 8차 07.17. 기증, 문화 나눔의 소중한 실천(김미경,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기증, 문화 나눔의 소중한 실천 (07.09.~08.25.) 9차 07.24. 죽음이 남긴 장례와 제례(정종수, 전 국립고궁박물관장) 10차 07.31. 우리의 옛 그림 - 조선 회화(홍선표,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11차 08.07. 옛 사람들의 손맛을 담아낸 도자기(한국 도자의 이해)(이종민, 충북대학교 고고미술 사학과 교수) 12차 08.14 전통복식에 담긴 옛 사람들의 멋(고부자, 전 단국대학교 전통의상학과 교수) 13차 08.21 옛 문서로 본 인간만사 이야기(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국립공주 박물관과 떠나는 공주 역사기행 1번지, 공산성 14차 10.02. 공산성-공주역사기행 1번지 (최장열,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공산성-공주 역사기행 1번지-(09.26.~11.24.) 백제의 웅진성이며 왕성, 공산성 (이남석, 공주대학교 사학과 교수) 15차 10.16. 고구려, 아리수를 건너다(양시은, 서울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16차 10.23. 백제의 성곽(서정석, 공주대학교 문화재보존과학과 교수) 17차 10.30. 신라 도성의 방어체제(박방룡, 전 국립부여박물관장) 18차 11.13. 조선시대의 공산성(임선빈,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임연구원) 19차 11.20. 근현대 시기의 공산성(지수걸,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20차 11.27. 고지도로 본 공산성(윤용혁,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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