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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의 고단한 삶과 생활

문서에서 문틈으로 본 조선의 농업과 사회상 (페이지 112-122)

제주도는 돌이 많고, 바람이 많고, 여자가 많아서 삼다도(三多島)라 불리며, 해녀의 고장이기도 하다. 진수(陳壽, 233~297)의 뺷삼국지뺸「위 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도 제주도에 대해 언급하는 가운데, “베옷 한 겹만 입고 바다를 떠다닌다[一布衣從海中浮出].”고 하였으니 제주도의 잠수 채취업의 연원이 오랜 것을 알 수 있다.

뺷고려사뺸에도, “제주에서 큰 진주 두 개를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으 며(문종 33년, 1079), “원나라에서 사람을 보내 제주[耽羅]의 진주를 채 취하려 하였다가 채취하지 못하고 백성들이가지고 있던 1백여 개의 진 주를 탈취하여 돌아갔다.”는 충렬왕 때(1276)의 기록이 있어 고려 때에 도 잠수어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에서 바다 속을 잠수해서 미역을 캐거나 전복을 채취하는 일은 주로 여인들이 해왔으며, 그 여인들을 잠녀(潛女)라고 하였다. 또 미역 을 따는 해녀는 채곽녀(採藿女), 전복을 따는 여인은 채복녀(採鰒女)라 부르기도 했다.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해녀(海女)란 이름은 일제강점기 이후에 바뀐 명칭이다.

제주 해녀에 대한 시문과 기록을 살펴가며 옛 해녀들이 살았던 모습 을 더듬어본다.

제주에서 깊은 바닷물에 잠수해서 수산물을 채취하는 일은 여인들의 몫이었고 고된 일이었다. 게다가 조선시대에는 제주 전복이 왕실에 바치 는 진상품으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해녀들은 과중한 진상물 할당량 을 채우려 고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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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어려운 해녀의 삶과 고난을 그린 시가 여럿 있다. 우선 그중 한 수.

<제주를 읊은 시 중 해녀>

가련하구나, 전복 캐는 여인이여,

휘파람 불고는 깊은 물속으로 헤엄쳐 간다.

마치 인어가 물속에 잠기는 것 같아, 구름 물결 사이로 아득하기만 하네.

<濟州雜詠 二十二首> 金允植(1835~1922, 雲養集卷之五) 可憐採鰒女, 歌嘯游深淵. 恰似鮫人沒, 雲濤正渺然.

시에는 해녀의 작업 모습을 낭만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잠수작업은 쉬 운 일이 아니었다.

시인 신광수(申光洙)는 1765년 의금부 금오랑(金吾郎)으로 제주도에 갔다가 풍랑으로 인해 40여일 머물렀다. 그동안에 탐라록(耽羅錄)을 지 었고, 제주 해녀의 어려움을 보고 잠녀가(潛女歌)란 시를 남겼다.

<잠녀의 노래>

제주의 여자들 헤엄치기 잘하는데, 열 살 때부터 앞 시내에서 놀며 배웠다네.

지방 풍속에 혼인할 때 잠녀를 높이 쳐주어, 부모들 입고 먹을 걱정 없음을 자랑했지.

나는 북쪽 사람이라 듣고도 믿지 않았는데,

임금님 명으로 이제 남쪽바다에 와서 노닐게 되었다.

성 동쪽은 이월인데도 날씨가 따듯해서,

집집마다 여자들 물가에 나왔구나.

빗창 하나, 망사리 하나, 테왁 하나,

벗은 몸에 물옷을 입고 부끄러이 여기지 않네.

깊고 푸른 물에 서슴없이 바로 뛰어 들어가니, 분분히 날리는 낙엽이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 같구나.

북쪽사람은 놀라워하는데, 남쪽사람은 웃기만 하는데, 물장구치며 서로 장난하며 물결 타고 이리저리 다닌다.

홀연 오리새끼처럼 잠겨서 간 곳이 없고, 다만 가벼이 떠있는 테왁만 보이누나.

잠시 후 푸른 물결 속에서 솟구쳐 올라, 급히 테왁 줄을 당겨 품고 머무네.

길게 휘파람 불어 숨 한번 토해 낼 제, 그 소리 처량해서 아득한 수궁까지 들리리라.

사람이 어찌 이 같은 일로 생업으로 삼고, 너희는 어찌 이익을 탐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가.

뭍에서 농사와 누에치기, 산에서 나물 캔다는 것을 듣지도 못하였나, 세상에서 가장 험난함이 물과 같은 곳이 없다는데.

능숙한 이는 백 자 가까이 깊이 들어간다고 하나, 더러는 굶주린 상어의 밥이 되리라.

균역법에 따라 공물이야 없어졌으니, 관리들도 입으로는 돈을 주고서 산다고 하네.

팔도에서 진상으로 서울로 올리는 것이, 생전복, 말린 전복 하루에도 몇 바리인가.

귀하고 높은 관리의 부엌, 비단옷 입은 공자들의 잔치자리.

전복의 오게 된 내력과 그 어려움을 어찌 알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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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한번 씹어보고는 상을 물린다.

잠녀여, 잠녀여, 네 기꺼이 일한다 해도 나는 슬프구나.

어찌 사람의 목숨을 희롱하여 내 입과 배를 채우랴.

아서라, 우리네 선비야 맛난 물고기 맛보기 어려우니, 단지 끼니마다 부추나물만 있어도 넉넉하여라.

<潛女歌> 申光洙(1712~1775, 石北集, 耽羅錄 並序)

耽羅女兒能善泅, 十歲已學前溪游. 土俗婚姻重潛女, 父母誇無衣食憂.

我是北人聞不信, 奉使今來南海遊. 城東二月風日暄, 家家兒女出水頭.

一鍬一笭一匏子, 赤身小袴何曾羞. 直下不疑深靑水, 紛紛風葉空中投.

北人駭然南人笑, 擊水相戲橫乘流. 忽學鳧雛沒無處, 但見匏子輕輕水上浮.

斯須湧出碧波中, 急引匏繩以腹留. 一時長嘯吐氣息, 其聲悲動水宮幽.

人生爲業何須此, 爾獨貪利絶輕死. 豈不聞陸可農蠶山可採, 世間極險無如水.

能者深入近百尺, 往往又遭飢蛟食. 自從均役罷日供, 官吏雖云與錢覓.

八道進奉走京師, 一日幾駄生乾鰒. 金玉達官庖, 綺羅公子席.

豈知辛苦所從來, 纔經一嚼案已推. 潛女潛女爾雖樂吾自哀, 奈何戲人 性命累吾口腹. 嗟吾書生海州靑魚亦難喫, 但得朝夕一䪥足.

潛女: 잠수를 해서 물질을 하는 여인을 말하며, 일제강점기에 해녀라고 개칭되었다.

風日: 風陽, 바람과 볕이라는 뜻으로 날씨를 이르는 말. 擊水: 물장구치다. 一鍬一笭一 匏子: 해녀가 물질할 때 쓰는 빗창, 망사리, 테왁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小袴: 작은 아 랫도리 옷, 해녀가 물질할 때 입는 소중의. 均役: 1750년 군포 징수를 2필에서 1필로 감 한 균역법이 실시되었다. 日供: 공물. 進奉: 진상. 達官: 지위가 높은 관리. 所從來: 지내 온 내력, 내력. 海州靑魚: 해주에서 2월에 잡히는 귀한 청어.

시에서는 물질하는 해녀의 약동적인 모습과 전복을 따는 어려움을 측 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해녀는 물질이라는 특수 기능을 가져서 가 계에 도움이 되어 제주 어촌에서 탐내는 좋은 아내이고, 좋은 며느리 감 이었다. 그러나 일단 전복을 따는 해녀로 지정이 되면 그녀들의 고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건(李健, 1614~1662)이 쓴 「제주풍토기」에는 당시 해녀의 생활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미역을 캐는 여인을 잠녀(潛女)라 부른다. 2월에서부터 5월에 이르 기 전까지 바다에 들어가 미역을 캔다. 미역을 캘 때에는 소위 잠녀들이 벌거벗은 알몸[赤身露體]으로 물가에 그득히 들어선다. 낫을 가지고 물 밑바닥에 들어가서 미역을 캐서 끌고나온다. 남녀가 뒤섞여도 부끄러워 하지 않으니 해괴하다. 산전복[生鰒]을 잡는 것도 그와 같다. 캐어서 관 가의 징수하는 요구에 따라 응하고 나서 남은 것을 팔아서 의식을 해결 하는데 그 몸이 힘든 것은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염치없는 관리 를 만나면 욕심 많고 더러운 마음보로 각종 명목을 만들어 착취하는 것 이 한이 없다. 일 년 내내 일해도 뜯어가는 것을 채우지 못해 관가에 바 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아전들의 간악한 폐단은 극에 달해서 의식을 해결하기도 난망한 상황이다. 만약 욕심 많은 관리를 만나게 되면, 소위 잠녀들은 모두 빌어먹는 거지가 될 것이다(葵窓遺稿卷之十一).”

그림 7 규창집 제주풍토기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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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을 따는 작업 자체도 힘든 일이었지만 해녀들에게 더욱 고통을 준 것은 전복을 진상하는 일이었다. 제주 해녀들은 진상이라는 명목으로 매년 정해진 량의 전복을 관에 바쳐야 했다. 제주 주민이 처한 어려운 상 황에 대해 중앙에 알린 이형상(李衡祥(1653~1733)의 장계가 있다(‘濟 州民瘼狀’, 甁窩集卷之十七). 그 내용의 일부이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제주도의 풍속은 남자가 전복을 채취하지 않아, 진상 책임이 해녀에게 있고, 여자가 관역(官役)에 나오는 것은 제주도뿐 이다. 남자도 전복채취[鮑作]에 선원노릇을 겸하는 등 힘들지만, 여자는 일 년 내내 진상할 미역과 전복을 마련해 바쳐야 한다. 일 년을 통틀어 남 자가 포작으로 바치는 금액이 20필(疋)이며, 해녀가 바치는 것도 7, 8필 에 이르러 한 집안에서 부부가 바치는 것이 거의 베 30여필에 이른다.”

조관빈(趙觀彬, 1691~1757)의 기록에 의하면 해녀가 진상할 전복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관부(官府)에 불려가서 매를 맞고, 심한 경우 는 부모도 붙잡혀서 질곡에 신음하고 남편도 매를 맞는다. 그녀에게 부 과된 수량을 모두 납부하기까지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 “해 녀가 할당을 채우려 무리해서 바다에 들어갔다가 낙태를 하는 수도 있 다.”고 하였다(悔軒集).

해녀들이 수중에서 작업하는 과정과 그 어려움은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이 쓴 글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囚海錄 ‘潛女說’, 北軒集).

직접 해녀를 만나 듣고 기록한 잠수작업의 어려움에 대해 해녀가 말한 부분을 옮겨 본다.

<잠녀>

소위 잠녀라 하는 이는 잠수를 업으로 한다. 미역이나 전복을 채취하 는데, 미역 채취에 비해 전복 채취는 매우 어려워 그 괴로움이 도가 지 나칠 정도이다. 잠녀의 얼굴을 살펴보면 검고 파리한데다 걱정과 괴로

움으로 죽을상을 하고 있다. 내가 근심스러워 그 일하는 자세한 것을 물 어보았다. 그러니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해변에 장작으로 불을 피워 놓고는 벌거벗은 몸으로 박을 가슴에 안고 끈으로 짠 주머니를 박에 묶고는, 이전에 잡았던 전복을 주 머니에 채웁니다. 손에는 쇠꼬챙이를 잡고, 이리저리 헤엄쳐 다니다가 적당한 곳에서 물속에 잠깁니다. 물밑에 이르러 한 손으로 바위를 더듬

“우리들은 해변에 장작으로 불을 피워 놓고는 벌거벗은 몸으로 박을 가슴에 안고 끈으로 짠 주머니를 박에 묶고는, 이전에 잡았던 전복을 주 머니에 채웁니다. 손에는 쇠꼬챙이를 잡고, 이리저리 헤엄쳐 다니다가 적당한 곳에서 물속에 잠깁니다. 물밑에 이르러 한 손으로 바위를 더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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