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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을 뜨는 사람의 노래

얼음은 오늘날 가정에서 필수품이지만, 옛 생활에서도 얼음은 긴요했 다. 얼음을 저장하는 제도와 시설이 있었던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뺷삼 국사기뺸에 신라 3대왕인 유리왕(儒理王, 재위 24~57)이, “장빙고(藏氷 庫)를 지었다.”고 하였고, 지증왕(智證王) 6년(505)에도, “신라에서 얼 음을 저장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는 것을 보면 얼음을 저장하는 역사는 꽤 오랜 것이다. 신라 당시에 얼음을 보관하는 시설인 석빙고(石氷庫)가 현재에도 경주에 남아있다.

그림 3 경주 석빙고, 일제 강점기 사진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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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이듬해 가을까지 보관하기 위해서는 저장 시설 이 필요했는데, 일반 백성들로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사철 얼음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예부터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고, 옛 중국에서는 대부 이상의 고위층만이 집에 얼음을 저장해 둘 수 있었다 한다.

조선시대에 얼음은 상례, 제례, 공물의 신선도 유지, 열병 치료를 위 한 귀한 물건이었고, 한 여름에 왕실에서 신하에게 내리는 주요 하사품 중의 하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얼음을 저장하고 관리하였 으며, 성종 무렵에는 일부 종실이나 권력층에서 사빙고(私氷庫)를 설치 하였고,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민간 장빙업(藏氷業)이 발달하였다.

조선시대에 얼음을 채취, 보존하고 얼음의 출납을 담당하던 관서로 빙고(氷庫)가 있었고, 도읍인 한양에는 얼음을 저장하는 시설인 서빙고 (西氷庫)와 동빙고(東氷庫)가 있었다.

서빙고는 태조5년(1396)에 동빙고와 함께 설치하였고, 예조에 속한 관청이었다. 서빙고는 한강가의 둔지산(屯智山)에 있었으며 오늘의 서 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동 파출소 근처이다. 서빙고의 저장 얼음은 13 만 4,974덩이[丁]에 이르렀고, 서빙고에는 8개의 저장고가 있어 궁중에 서 사용하고, 문무백관에 나누어줄 얼음까지 저장했다.

서빙고의 얼음 저장은 음력12월에 시작되었고 이듬해 날이 더워지면 빙고를 열고 얼음을 반출하기 시작한다. 저장된 얼음은 제향과 각종 행 사 때, 그리고 궁궐 내의 음식을 보관하는 데 쓰였고, 국상이 있는 경우 에는 수개월 동안 시신을 보존하는데 사용되었다. 또 여름철에는 정2품 이상의 관료에게도 나누어주었다. 궁중의 부엌에서 쓰이는 얼음을 음력 2월부터 10월까지 공급되었고, 관아에는 5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관원에게는 음력 6월 한 달 동안 배급하였다. 해마다 관리들은 서빙고에 서 얼음을 나누어 받는데 이를 반빙(頒氷)이라 하며, 받을 수 있는 얼음 의 양이 표시된 빙패(氷牌)를 지급받았다.

이밖에 활인서(活人署)49의 환자, 의금부(義禁府)의 죄수들에까지 얼음 을 나누어 주었다. 김종직은, “성상께선 오히려 백성의 더위를 염려하여, 감옥에까지 얼음을 나눠 주도록 윤허하도다.”라고 시를 지어 읊고 있다.

<여름에 금중에 숙직하면서 지은 2수 중 둘째 수>

흰 모시옷 검은 모자에 땀이 흠뻑 젖어라, 분수 넘치게도 무능한 나를 경연에 참석시키셨네.

해가 정오에 이르니 꽃그늘은 말려들고, 대궐 모서리 서늘하니 대나무 그림자 없어졌다.

때로는 상아첨대 집어다 졸린 눈에 문지르고, 한가히 물시계 소리 들으며 저녁 종을 기다린다.

임금께선 오히려 백성의 더위를 염려하여, 감옥에까지 얼음을 나눠주도록 허락하시다.

<夏日禁直應制二首> 金宗直(1431~1492, 佔畢齋集)

白紵烏紗汗正濃, 金華非分著疎慵. 日輪午駐花陰卷, 闕角凉生簟影空.

時點牙籤挑睡睫, 閑聽銅漏待昏鐘. 九重尙軫元元熱, 更許頒氷岸獄中.

金花: 관이나 의상 등에 장식하기 위하여 황금으로 만든 꽃을 말한다. 금화전(金華殿): 한 나라 때 성제(成帝)가 이곳에서 강론하였으므로 후세에 경연이나 서연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牙籤: 상아로 만든 첨대, 즉 상아로 만든 책갈피를 말한다. 銅漏: 물시계, 漏壺라고도 한다. 岸獄: 감옥.

동빙고는 나라의 제사에 사용할 얼음만을 저장했고 크기도 서빙고의 12분의 1정도였다. 태조5년(1396) 두모포(豆毛浦, 서울 옥수동)에 처음 설치되었고, 얼음을 공급하는 시기는 음력 3월부터 9월 상강 때까지였다.

서빙고와 동빙고 외에도 내빙고(內氷庫)가 궁궐 내에 설치되어 있어 왕실의 여름철 얼음 수요에 대처하였다. 내빙고는 조선시대에 왕실에서 49 조선시대 도성내의 병인을 치료하는 업무를 관장하였던 관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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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얼음을 보관하고 관리하던 이조(吏曹)의 경직(京職) 종6품 아문(衙 門)이다. 조선초기에는 창덕궁 요금문(曜金門) 안에 있었지만, 정조13 년(1789) 양화진에다 옮겨 설치되었다. 내빙고는 오로지 임금의 식사 [御供]를 위해 궐내에 두었고, 저장하는 얼음은 4만여 덩어리[丁]였다.

그중 3만정은 한강 연안의 백성의 호역으로써 얼음을 채취하여 공납하 였고, 나머지 1만여 정은 병조에서 대가를 주고 사들였다.

우리나라에서 겨울에 얼음을 떠서 보관하였다가 여름에 먹는 것은 예 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강에서 얼음을 뜨고, 한여름까지 보관하는 것이 당 시로서는 대단한 일이었을 것이다.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뺷용 재총화뺸50에 채빙의 장소, 사용처, 채빙 방법 등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지금의 빙고는 옛날의 능음(凌陰)51이다. 동빙고는 두모포에 있는데, 얼음을 넣는 창고가 하나뿐이라서 국가의 제향에 쓰이는 수요만 담당 한다. 얼음을 저장할 때는 봉상시가 주관하며 별제 두 사람이 함께 검찰 한다. 또 감역부장과 벌빙군관의 감독 하에 저자도 부근에서 얼음을 채 취하는데, 이것은 개천(청계천) 하류의 더러움을 피하기 위함이다. 서 빙고는 한강 하류 둔지산 기슭에 있는데, 빙고가 8채나 되므로 모든 국 용 및 여러 관사와 고위 관료가 이 얼음을 쓴다.

얼음은 두께가 4치가량 언 뒤에 채빙작업을 하는데, 그때는 여러 관사 의 관원들이 동원되어 경쟁을 하므로 군인이 많아도 잘 채취하지 못한 다. 그래서 강촌 백성들이 얼음을 채취하여 군인들에게 팔곤 한다. 또 칡 끈을 얼음 위에 걸쳐 놓아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강가에는 땔나무 를 쌓아두어 동상에 대비하며, 의원과 약을 갖춰 두어 병들거나 다친 사

50 慵齋叢話: 조선중기에 성현(成俔)이 지은 필기잡록류(筆記雜錄類)의 책으로 유 명인들의 일화나 해학담, 일반대중이나 천인들의 소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설 화를 담고 있다.

51 빙실(氷室) 즉 얼음을 보관하는 창고이다.

람을 치료하는 등 사고에 대한 대비가 철저하다.

8월에 군인들을 보내서 고원(雇員)의 인솔 하에 빙고의 천정을 수리 하고, 대들보와 서까래가 썩은 것을 갈고, 담이 허물어진 것을 고친다.

또 난지도[鴨島]의 갈대를 베어다가 빙고의 상하 사방을 덮는데, 갈대 를 두껍게 덮으면 얼음이 녹지 않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담당 관원이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얼음 저장하는 일을 하리 (下吏)들에게 맡기곤 하였다. 계축년(1493)에 얼음 저장이 허술하게 되 자 왕이 노하여 담당 관원들을 모두 파직하였다. 그 때문인지 갑인년 (1494)에는 얼음 저장이 잘 되어 을묘년(1495)의 국상과 중국 사신 접 대에도 얼음이 부족하지 않고 가을까지 빙고에 얼음이 남아 있었다.”

추운 강에서 얼음을 뜨는 것은 모두 백성들의 일이었다. <그림 4>는 1900년대 초에 한강에서 채빙을 하는 모습이다. 시대와 복장은 조금 다 르더라도 조선시대에 빙고를 채우기 위한 채빙작업의 모습도 이와 비슷 했을 것이다.

그림 4 한강의 채빙, 일제강점기 사진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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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鑿氷行> 金昌協(1651~1708, 農巖集卷之一)

季冬江漢氷始壯, 千人萬人出江上. 丁丁斧斤亂相斲, 隱隱下侵馮夷國.

斲出層氷似雪山, 積陰凜凜逼人寒. 朝朝背負入凌陰, 夜夜椎鑿集江心.

한겨울 강에서 얼음 뜨는 모습을 묘사한 시가 있다.

<얼음을 뜨는 사람의 노래>

늦겨울에야 한강에 얼음이 꽁꽁 얼기 시작하니, 수많은 사람들 강가로 몰려나왔다.

꽝꽝대며 도끼로 얼음을 찍어 내니, 울리는 소리가 용궁까지 들리겠다.

찍어낸 얼음이 설산처럼 쌓이니, 싸늘한 음기가 사람을 엄습하네.

아침부터 등에 져다 빙고로 얼음 나르고, 밤늦게까지 얼음을 파 들어가네.

낮은 짧고 밤은 길어 밤늦도록 쉬지 않고,

힘들게 일하며 부르는 노랫소리 모래톱에 이어지네.

짧은 옷은 정강이 겨우 가리고 발에는 짚신조차 없어, 매서운 강바람에 손가락 얼어 떨어지려는 듯.

높다란 집 오뉴월 무더위 푹푹 찌는 날에,

아름다운 여인의 고운으로 손 맑은 얼음을 내어오네.

작은 칼로 얼음 깨서 온 자리에 돌리니, 밝은 대낮에 하얀 김이 피어나네.

집에 그득한 사람들 즐거워하며 더위를 모르니, 얼음 뜨던 노고를 그 누가 말해주랴.

그대는 못 보았나? 길가에 더위 먹고 죽은 백성들이, 강에서 얼음 뜨던 바로 그 사람들인 걸.

晝短夜長夜未休, 勞歌相應在中洲. 短衣至骭足無屝, 江上嚴風欲墮指.

高堂六月盛炎蒸, 美人素手傳淸氷. 鸞刀擊碎四座徧, 空裏白日流素霰.

滿堂歡樂不知暑, 誰言鑿氷此勞苦. 君不見道傍暍死民, 多是江中鑿氷人.

季冬: 섣달, 늦겨울. 馮夷國: 물속에 있는 水神의 나라. 凌陰: 빙고. 屝: 짚신, 얼음위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신던 신을 말하는 것이다. 鸞刀: 희생을 잡을 때 사용하는 칼로, 방울이 자 루에 세 개, 칼등에 두 개가 달려 있다.

조선시대에는 겨울에 한강에서 채빙하는 사람은 부역으로 차출된 백 성들이었다. 옷도 변변히 입지 못한 백성들은 매서운 강바람, 추위를 무 릅쓰고 나라에서 여름에 쓰기 위한 얼음을 캐서 저장하였다. 그것도 한

조선시대에는 겨울에 한강에서 채빙하는 사람은 부역으로 차출된 백 성들이었다. 옷도 변변히 입지 못한 백성들은 매서운 강바람, 추위를 무 릅쓰고 나라에서 여름에 쓰기 위한 얼음을 캐서 저장하였다. 그것도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