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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구입을 위한 성익의 몽고 원정

문서에서 문틈으로 본 조선의 농업과 사회상 (페이지 96-112)

병자호란(1936.12~1937.1)이란 큰 전쟁을 전후한 시기, 조선에 소 전염병[牛疫]이 크게 발생해서 농업이 큰 위기를 맞는다. 1636년에는 우 역 발생이 매우 심해서 평안도 지역의 소가 괴멸상태였고, 전국적으로 우 역이 확산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외국에서 소를 수입하기로 결정한다.

당시의 주요 우역 발생 상황이다.

● 1636년: 평안도에 우역이 크게 번져 살아남은 소가 한 마리도 없다 (인조14년 8월 15일).

● 1636년: 우역이 치성(熾盛)하여 서쪽에서 남쪽으로 번지고 경성에도 죽는 소가 줄을 이으니 소 값이 갑자기 떨어지고 살아 있는 것은 도살 하였다(인조14년 9월 21일)

● 1636년: 황해도와 평안도[西路]에 우역이 크게 치성하여 열 마을에 한 마리의 소도 없었다. 조정이 소를 사서 보낼 것을 의논하였다(인조 14년 10월 12일).

● 1637년: 우역이 크게 치성하여 한 마을에 한두 마리도 없으니, 이는 매우 좋지 않은 일입니다(인조15년 4월 17일).

이러한 상황에서 소를 외지에서 구입하자는 논의가 조선조정에서 나 왔고, 실제로 소를 몽고에서 들여온 것이다. 몽고 소의 수입 경과를 살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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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15년에 제주에서 소를 들여오는 것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지난 번 비국에서 이미 아뢰었으므로 제주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사 오게 하 였다.”는 기록이 있다(1637년 10월 5일). 같은 날 기록에, “대마도에서 소를 사 오는 일도 비국 당상 1인으로 하여금 전담하여 시행하게 하라.”

는 왕의 명령이 있었다. 같은 해에 예조의 공식문서를 작성하여 역관 홍 희남을 대마도에 보내겠다는 비변사의 청이 있었다(1637년 10월 17 일). 그러나 대마도에서 소를 가져왔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당시 제 주도에는 우역이 번지고 있어 제주 소의 반입도 어려운 사정이었다.

부족한 소는 북방지역에서 구입해 왔다. 인조15년에 비변사에서 몽고 지방에서 소를 사오자는 청이 있자 왕은, “나라가 불행하여 우역이 있지 않은 곳이 없어 거의 절종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실로 절박한 재앙이고 더할 수 없이 큰 근심이다. 내년이 지난 뒤에도 마련해 낼 곳이 없으니 비록 농사철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넉넉한 숫자를 사와서 앞으로 경작하고 번식시킬 바탕으로 삼으라.”고 하였다(1637년 12월 14일).

몽고에서 소를 무역해 온 것에 대해 인조15년 실록에는, “비국랑(備 局郞)92 성익(成釴)93을 보내어 몽고 땅에서 소를 사 오게 하였다(1637 년 12월 14일).”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인조15년 승정원일기 에는 몽고지방에서 소를 사는 일 등에 대해 보고하는 상세한 비변사의 장계가 수록되어 있다(1637년 12월 14일).

92 조선시대 비변사의 종6품 벼슬로 비랑(備郞)이라고도 한다.

93 성익은 몽고를 다녀온 후 1654년 첨사(僉使), 1655년 충청수사와 경상좌수사, 1666년 황해 병사, 1669년 평안병사로 관직생활을 한다. 황해병사로 있을 때 저지른 직권남용 문제로 수차례 탄핵을 받았지만, 성익의 장재를 아낀 현종이 허락하지 않는다. 1674년경에는 성익은 벼슬을 내놓고 유배상태였다. 그러나 숙종이 즉위하면서, “성익에게 직첩(職牒)을 환급(還給)하라.”는 명이 있어 복권 된다.

“몽고지방에서 소를 사는 일을 지금 막 처리하려는데 저쪽의 사정을 자세히 안 다음에라야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사은사 (謝恩使)94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입니다만 이미 초생(草生)을 시기로 삼았는데 초생의 때는 3, 4월 동안입니다. 미리 값을 보내서 모춘(暮 春)95에 맞춰 사 오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수 천리 밖에서 오느라 소를 분배할 즈음에는 농사철이 지났기가 쉬우니 바로 멀리 있는 물이 가까이 에 생긴 화재에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더구나 들으니 저쪽의 소 값이 자못 높다고 하니 비록 자세히 다 알 수는 없으나 대개 계산해 보면 수천 금(金)을 가지고 가더라도 사는 숫자는 필시 많지 않을 것입니다.

또 저들이 취하는 것은 청서피(靑黍皮), 청포(靑布) 등의 물건인데, 청포는 저축되어 있는 것이 한계가 있고 청서피는 칙사의 행차가 사가는 바람에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지금 비록 사서 얻는다 하더라도 필시 넉 넉하지 못할 형편입니다. 설혹 넉넉한 숫자를 찾아 보낸다 하더라도 장 차 저들이 욕심낼 길만 열어 줄 것이니 뒤에 어떻게 이어 댈 수 있겠습니 까. 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심양의 쇄마(刷馬)96도 오히 려 어려운데 더구나 심양을 지나서 절원(絶遠)한 곳에 있는 것이야 더 말할 것 있겠습니까. 면포(綿布)나 지지(紙地)97나 지삼(枝三) 등의 물건 을 운송할 때 쇄마를 요구하여 대기시키는 것은 일이 심히 쉽지 않고 필 시 농사철에 미치지도 못할 소를 얻기 위해 다소의 물력(物力)을 다 써 서 저들이 욕심낼 길만 열어 놓고 뒷날의 폐단을 증가시키는 것은 사의 94 조선시대 명나라와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여 은혜를 베풀었을 때 보냈던 답례 사

신으로 수시로 파견한 임시사절이다 95 暮春: 늦은 봄, 음력 3월이다.

96 조선시대 지방에 배치한 관용의 말 또는 이러한 말의 이용을 규정한 법. 주로 사 신의 왕래나 진상품의 운반 및 지방관이 이용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역참에 소속 된 말과 인부가 주로 이용되다가 임진왜란 이후부터 민간의 말을 대가를 지불하 고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97 각종의 종이를 말하며 지물(紙物)·지속(紙屬)도 유사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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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헤아려 볼 때 득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도록 허락하였으니 사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각종 가물(價物)98을 적절히 처리하여 때에 다 다라 들여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심양의 쇄마의 값은 이 미 일체 같다고 하였는데 심양을 지나는 값이 몇 배 될 것이니 필경 열댓 마리의 말만 보낸다 하더라도 가격이 무명 십 수동(同)을 밑돌지 않을 것 입니다.

이것으로 말해 보건대 차라리 말을 사서 보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마부(馬夫)는 황해도와 평안도로 몫을 나누어 정해서 보내게 하고 별도 로 길러 보호하도록 하며 나온 뒤에는 구입한 말을 양서의 역에 분급하 면 쇄마에 대해 값을 소비하는 폐단은 없고 길이 공적으로 쓸 것으로 삼 게 될 것이니 또한 양쪽으로 편하게 될 것입니다. 무역을 그만둘 수 없으 면 이대로 하는 것이 무방할 듯 합니다만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한번 몽고와 말을 무역하는 일과 같이 하면 뒷날 몽고가 트집 잡아 말 하여 왕래하며 무역하자는 폐단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나라 재력이 탕진되었으므로 멀리 몽고에서 사지 못한다고 말하고 심양에서 약간의 소를 사 얻는다면 현재의 허비가 없을 수 있고 또 뒷날 의 환난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뜻이 이와 같으므로 감히 성상의 재 결을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나라가 불행하여 우역이 있지 않은 곳이 없어 거의 절종(絶種)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실로 절박한 재앙이고 더할 수 없이 큰 근심 이다. 내년이 지난 뒤에도 마련해 낼 곳이 없으니 비록 농사철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넉넉한 숫자를 사 와서 앞으로 경작하고 번식시킬 바탕으로 삼으라. 굳이 지나치게 의심하고 염려하여 백성의 먹을 것을 궁핍하게 할 필요가 있는가. 또 이 일은 황제의 특명에서 나온 것이니 우리나라에

98 공물(貢物)을 거둘 때 그 공물을 대납(代納)한 값으로 거둔 물건을 말한다.

서 말한 것과는 또한 차이가 있는 듯하다. 말을 사는 일은 매우 편리하고 좋으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 같은 과정에서 몽고에 상단을 보내는 내역이 실록기사에 구체화된다.

● 인조16년 1638년 1월 4일자 기사

“지금 몽고지방에서 무역해 오려고 합니다. 신이 소 값이 가장 헐한 곳에 가서 사오라는 뜻으로 차인(差人)에게 말해 놓았습니다.”

● 인조16년 1638년 1월 11일자 기사

소를 무역하러 가는 성익을 한관(閑官)99으로 바꿔 차임할 것을 청 하는 형조의 계가 있었고, 인조가 허락한다.

“본조의 좌랑 성익이 소를 무역하는 일로 먼 곳에 나가는데 오가는 시일이 얼마나 걸릴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성익을 한관으로 바꿔 차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638년 5월 성익이 이끈 조선 무역 상단이 몽고에서 사온 소가 조선 의주에 도착하였다. 그 기록은 두 번으로 나누어져 승정원일기에 나온다.

● 인조16년 1638년 5월 6일,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성익이 사들인 소를 먼저 보내온 것이 53마리이고, 또 25마리100를 보냈는데, 청 천강(淸川江) 이북 각 읍에 헤아려 나누어 주고 계문하게 하고, 나 중에 운송해 올 사들인 소는 의주(義州)에 남겨 두었다가 조정의 처 치를 기다리라는 뜻으로 평안 감사에게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 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99 중요한 직사를 띠지 않은 한가한 자리의 관리, 또는 실무가 없이 관직명만 가진 벼슬을 말한다.

100 심양일기에는 ‘선송 56마리, 후송 26마리’로 되어 있는데, 의주에는 78마리만 도착했다. 도중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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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조16년 1638년 5월 23일, 역관 조효신이 인솔해 온 소는 청남 각 고을에 나누어 준 뒤에 보고하게 할 것을 청하는 비변사의 계가 있었고 왕이 허락한다.

“성익이 사들인 소 가운데 먼저 보낸 71마리를 평안도 청천강 북쪽 [淸北]의 각 고을에 먼저 나누어 주도록 재가를 받아 통지하였습니 다. 나중에 조효신(趙孝信)이 인솔해 온 36마리는 청천강 남쪽[淸 南]의 각 고을 중에 특히 소가 없는 곳에 균등하게 나누어 준 뒤에 똑 같이 보고하도록 평안감사에게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성익이 사들인 소 가운데 먼저 보낸 71마리를 평안도 청천강 북쪽 [淸北]의 각 고을에 먼저 나누어 주도록 재가를 받아 통지하였습니 다. 나중에 조효신(趙孝信)이 인솔해 온 36마리는 청천강 남쪽[淸 南]의 각 고을 중에 특히 소가 없는 곳에 균등하게 나누어 준 뒤에 똑 같이 보고하도록 평안감사에게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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