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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순풍조를 비는 마음과 제문

문서에서 문틈으로 본 조선의 농업과 사회상 (페이지 178-194)

고대에 있어 기상의 불안정, 특히 가뭄으로 인한 흉작은 위정자인 왕 의 책임이었다. “강우와 가뭄이 순조롭지 않아 오곡이 제대로 익지 않으 면 그 죄를 물어 왕을 바꾸거나 죽여야”할 정도였다.141 한발을 비롯한 기상재해는 곧 왕권교체로까지 연결되던 최대의 정치쟁점이었다.

봄 가뭄은 동아시아 몬순지역의 농업국인 우리 땅에서 피하지 못할 숙명이었다. 뺷삼국사기뺸에도 가뭄의 기록이 남아있다. 가뭄 기록이 남 아 있는 것은 고구려 12회, 백제 32회, 신라 63회뿐이지만, 이는 기록 회수상의 문제일 뿐 항시 가뭄의 피해를 입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가뭄으로 인한 흉작은 항상 역대왕조의 큰 걱정거리였다. 농사를 순 조롭게 짓기 위에서는 농사 제철에 용수(用水)가 필요했지만 저수, 관개 시설이 빈약했던 시대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용수의 주원천일 수밖 에 없었다. 가뭄이라는 기상재해에 대해 왕들은 근신하며 ‘비가 오시기’

만을 기원했다. 비와 바람이 순조로워야[雨順風調] 풍년이 들고 나라가 평안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면 임금은 식사할 때 음식 가짓수 를 줄였다[減膳]. 또 나라에 재앙이 들었을 때 임금이 근신하기 위하여 고기반찬을 먹지 않았고[撤膳], 또 술을 삼갔다[撤酒]. 자연재해에 대해

141 뺷三國志뺸「魏志」 夫餘傳, “水旱不調五穀不熟, 輒歸咎於王, 或言當易, 或言當 殺.”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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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제는 주로 제문을 올리고 향을 피우는 제사 방식이었지만, 가뭄 이 심할 경우에는 특이한 방법도 동원되었다. 태종13년(1413) 7월에는

‘사내아이[童男] 수십 명을 모아 상림원145에서 도마뱀으로 기우제를 지 냈다.’는 실록기사가 있다. 이는 ‘석척기우제(蜥蜴祈雨祭)’라 하며 도마 뱀[蜥蜴]146을 병 속에 잡아넣고 제사를 지내는데, 도마뱀의 모습이 용 (龍)과 비슷하기 때문에 용의 응험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 도마뱀을 넣은 항아리를 푸른 옷을 입은 동자들이 돌며 버들가지로 두드리며 구름을 일 으키고 비를 내려 주기를 기원하는데, 동자들은, “도마뱀아, 구름이 일 게 하고 비가 내리게 하라. 그러면 너를 놓아주겠다.”고 외쳤다.

또 용(龍)의 그림을 그려 놓고 간략한 의식을 갖추고 제문을 지어 비 를 빌고 제사가 끝나면 그림을 물속에 던져 넣었다[畵龍祈雨]. 호랑이 모양으로 만든 인형을 물에 던져 넣기도 하였다. 용이 비를 내리게 하는 것을 담당하는 신이라 여겼기에 용이 살고 있음직한 강이나 못에 호랑이 를 잡아넣으면 용과 호랑이가 싸우는[龍虎相搏] 과정에서 구름과 비가 일어나고 비가 내리게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옛 글에 ‘원래 구름이란 용을 따르고, 바람이란 범을 좇는 법’이라는 구절이 있다. 구름이 일고 바람이 불면 비가 내리게 되는 것을 알고 있는 옛 분들이 기우를 위해 생각해 낸 아이디어가 ‘호랑이를 물에 넣는’ 주술 적인 행위로 나타난 것이다. 나무로 호랑이 머리 모양을 만들어 한강에 넣는 ‘침호두(沈虎頭)’도 비슷한 기우제 방식이었다. 용산강(龍山江)147 에 호랑이 머리를 넣으면 한강에 사는 용이 호랑이와 서로 싸워 구름과 비를 일으킨다고 보았던 것이다.

145 上林苑: 조선시대 궁중의 원유와 화과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청으로 세조 때 에 장원서로 개칭되었다.

146 도마뱀 혹은 도롱뇽의 잘못 부른 이름이다.

147 용산구 원효로4가의 한강 일대를 일컫는 이름으로 용호(龍湖) 혹은 용산진(龍 山津)이라고도 하였다. 지금 원효대교가 놓여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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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그러나 뺷서운관지뺸에는 열두 번째의 기우제에서 ‘토룡을 채찍 질 하는 것은 없앴다’고 적고 있다. 영조29년 실록에, “대저 토룡제(土 龍祭)는 기우제에 있어 극진한 것이지만 편룡(鞭龍)하는 데 이르러서는 무례하고 방자스럽기 그지없으니, 이 뒤로는 일체 하지 말라.”는 유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1753년 5월 15일).

조선시대에는 인간으로서 어찌 대응할 수 없는 기상재해에 대해 제사 를 올렸고, 그 감응을 비는 제문이 남아 있어 당시의 고충을 전해준다.

기우제를 올릴 때 제문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과 장소에 따라 달리 지었 으며, 기우대상에게 비를 구하는 절절한 문구가 적혀 있다. 기상재해 중 가뭄피해가 가장 심해서 기우제를 자주 올렸기에 기우제문이 많이 남아 있다. 그중 화룡(畫龍)153에게 고하는 기우제문을 우선 살펴본다.

<박연(朴淵)154의 화룡에게 고하는 기우제문>155 가뭄 재해가 극심함이, 오늘에까지 이르러,

곡식이 장차 다 없어지게 되었으니, 그 불쌍함이 애처롭기만 합니다.

죄를 지은 이유 알지 못하나, 위태롭고 두려운 심정 실로 깊습니다.

바라건대 신령께서는, 고요히 못 속에 잠겨 계십니다.

능히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려서, 넓은 천하를 적셔 주소서.

이에 신을 거듭 번거롭게 하오며, 경건히 제사를 드리나이다.

산이 높은 곳과 물결이 이는 곳에, 제단을 쌓아 공경히 받드나이다.

여러 신명께서는 밝게 살피시어, 비를 성하게 내려주소서.

사람이 먹을 것이 있어야, 신 역시 의지함이 있으리다.

153 본래 나라의 기우제에는 본래 토룡(土龍)을 만들었고, 민간에서는 토룡 대신 용 그림[畵龍]으로 대신하였다. 화룡은 토룡의 약식인 것이며, 용과 같은 의미로도 쓰였다.

154 개성에 있는 박연폭포의 소를 말한다.

155 ‘朴淵畫龍祈雨祭文’, 卞季良, 春亭集卷之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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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계량(卞季良, 1369~1430)의 춘정집(春亭集)에 실려 있는 기우제 문이다. 마지막 구절이 의미심장하다. 농작물이 풍성하게 나야 사람이 먹고 살고, 또 사람이 잘 살아야 신도 제대로 모실 것이라는 것이다. 가 뭄을 당해 신에게 애원하고 노여움을 풀어 달라는 애절한 호소이자 은근 한 압력이다.

다음 기우제문은 정조대왕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있는 기우제문으로 한강에서 기우제를 올릴 때 쓴 것이다.

<한강(漢江)에 고하는 기우제문>156

한강은 나라의 벼릿줄로서, 수많은 내가 모여드는 곳이니.

마른 곳을 적셔 윤택하게 하니, 실로 물의 지극한 공을 주관하네.

생각건대 이 극심한 가뭄이, 우리의 전답에 물을 마르게 했습니다.

비록 허물이 사람에게 있으나, 또한 신령의 부끄러움이 됩니다.

밭에 있는 보리만 가지고는, 봄철 굶주림을 구할 수 없습니다.

만약 가을 결실마저 없다면, 백성은 장차 살아날 수 없습니다.

제 마음 타는 듯하여, 폐백과 희생을 갖추어 급히 왔습니다.

이제 흥건히 비를 내리시기를, 오로지 신명의 도움만 믿나이다.

한강의 용신에게 비를 구하는 제문이다. 밭에 심은 보리농사가 잘 되 고, 또 논농사로 짓는 벼가 잘 되어야만 가을걷이가 풍성하여 백성이 살 아남으니, 부디 비를 내려달라는 것이다. 정조 왕이 직접 제문을 짓고 제 사를 지냈으니 가뭄이 정말 심했나보다.

워낙 농사철에 제 때 내리는 비가 중요하다보니 기우제에 관한 이야 기가 길었다. 그런데 다른 기상현상에 대한 제사는 없었을까?

156 ‘祈雨祭文中漢江’, 正祖 弘齋全書卷十九 祭文.

조선시대에는 기우제(祈雨祭) 외에도 기청제(祈晴祭), 기설제(祈雪 祭)도 지냈다. 고대하던 장마가 져서 단비가 내리면 반갑고 고맙지만, 장 마가 너무 길어지고 비가 너무 많이 와도 걱정이었다. 장마가 너무 길어 지게 되면 비가 개기를 비는 나라의 제사가 있었다. 기청제(祈晴祭) 혹 은 영제(禜祭)라고 하며 서울의 4대문(四大門)에서 행하였다.

기상에 대한 제문은 당시 명 문장가들이 지었다. 조선중기의 문신 장 유(張維, 1587~1638)는 문집에 별도로 제문을 정리할 정도로 제문을 많이 남겼고, 기청제문도 지었다.

<사직 기청제 제문>157

아, 사(社)께서는 토지를 주관하시고 직(稷)께서는 곡식을 주관하고 계시는데 토지와 곡식이야말로 백성들이 목숨을 이어가는 근본이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근본에 보답하는 의리를 이에 중히 여겨 담을 두르 고 단(壇)을 세운 뒤 때가 될 때마다 정결하게 제사를 올리고 있는 것입 니다.

대체로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고 백성은 신령님들께 의지하고 있는 데, 신령님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은 또 나라와 백성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삶이야말로 정말 고달프기 그지없습니다. 위로 어버 이를 봉양하고 아래로 자식들을 기르면서 지세를 내고 나라에 공물을 바치고 있는데, 이를 오직 춘하추동의 농사에만 의지하고 있습니다. 따 라서 한번만 재해를 입어 흉년이 되어도 살아갈 길이 막막해지는데, 국 가가 불행하게도 근년 들어 농사를 망쳤으므로 굶주린 백성들의 목숨 이 경각에 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다행히도 금년 들어서는 계절에 맞게 기후가 순조롭게 진행

157 谿谷集의 祭文四十二首 중 ‘社稷祈晴祭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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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결과, 제때에 밭 갈고 씨를 뿌려 모종한 벼의 싹도 날마다 자라나고 보리 이삭도 익어 장차 거둘 수가 있게 되었으므로, 농부들이 마냥 기뻐 하며 수확할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궂은비가 계속 내리면서 열흘이 넘도록 그치지 않고 있 으므로 높은 지대의 곡식이 손상된 것은 물론이요, 낮은 지대의 곡식들 도 모두 물에 잠긴 채 보리 이삭이 검게 변해 썩어가면서 밭 가운데 쓰 러져 가득 메우고 있으니, 며칠만 더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어떻게 해 볼 수도 없게 되고 말 것입니다.

생각하건데, 신령님은 본래 우리 백성들이 귀의하며 우러러보는 대상

생각하건데, 신령님은 본래 우리 백성들이 귀의하며 우러러보는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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