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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하소기(何紹基)의 동주초당문집(東洲草堂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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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옛사람의 자취를 배우고 옛사람의 마음을 배우지 않는 것”159)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옛사람의 자취를 배우고 옛사람의 마음을 배우지 않으면, 옛사람을 조금도 넘어 설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옛 사람의 화법을 얻었으되 그것을 버리고 새로 창조할 줄 모르는 것은 , 스스로를 속박하는 것이며, 화가는 대상 세계를 끊임없이 느끼고 그 느낌을 존중하여야 한다.

懸)’이라는 특별한 방법으로 붓을 운용하였는데, 스스로 말하길 “온 몸의 힘이 이르 러 비로소 글씨를 이룰 수 있음에도 반에 미치지 못하여 땀이 흘러 옷을 적시네”161) 라고 하면서 현완법을 강조하였다. 화론에 불사지사(不似之似 : 닮지 않은 닮음)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하소기가 임서한 <장흑녀비>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외형으로 본 원본 <장흑녀비>와 하소기의 임서본은 하나는 해서이고 하나는 행서라는 점에서 분명 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미지상으로 본 두 작품은 의심할 여지없이 닮아있다고 한 다.

자신의 서력에 관해서는 〈법화사비〉 발문에서 밝힌 것처럼, 40년 가까이 안진경과 이옹의 서법에 경도되었다가 중년 이후에는 북비로 눈을 돌리고, 만년에는 한비로 거 슬러 올라갔다고 밝혔다. 이는 당시 유행한 비학의 영향이다. 기본적으로 완원의 남북 서파론과 북비남첩론을 계승하며 북파의 연원을 좇아 서법을 탐구하였다. 이로 인하여 하소기의 서는 안진경의 〈쟁좌위고〉와 〈장천비〉 및 〈석문송〉의 필의가 강하게 배어있다.

〈임장천비〉는 말 그대로 한나라의 팔분 중에서 양강지미(陽剛之美)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장천비〉 탁본을 입수하여 임서한 것이다. 〈장천비〉만 모두 100번을 임서 했다고 한다. 청대 후반기로 갈수록 금석학과 비학의 흥행과 맞물려 고비(古碑)에서 서의 법을 찾으려는 경향이 농후해졌는데 하소기도 이에 다름 아니었다. 청대 비학의 학풍을 계승하여 ‘동경의 석묵이 모두 나의 스승(東京石墨皆吾師)’이라고 외쳤던 하 소기는 분명 자립문호(自立門戶)와 자성일가(自成一家)의 꿈을 이룬 걸출한 서가였다.

하소기가 젊었을 때 일이다. 어느 날 한가롭게 저자길로 산책을 나갔는데 때마침 많 은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여 글씨를 써서 팔고 있는 한 노인을 보게 됐다. 그래도 당시 필명을 날려 자기 글씨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던 그가 노인이 휘두르는 용호상박의 필력 앞에 그만 기가 죽어 망연자실, 흠상(欽賞)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낙성관지(落成款識)하는 것을 보니 이게 또 무슨 변고인가, 노인이 휘갈겨 쓴 글씨 옆 에 ‘동주’라는 자기 아호를 버젓이 써 넣더니 그 밑에 도장까지 빨갛게 찍은 다음 즉석에서 팔고 있는 것이다. 정신을 수습한 동주는 그 순간 크게 깨닫고 자신의 신분 을 감춘채 그 노인을 집으로 모신 후 주안상을 차려 놓고 스승이 되어주기를 간청했 다. 어렵사리 허락을 받아 낸 동주가 조심스레 안작(贋作)의 사유를 물으니 노인이 쳐 다보지도 않고‘낸들 아오. 글씨는 내가 잘 쓰나 이름은 동주란 자가 더 나으니 먹고

161) 熊秉明,『中國書藝理論體系』, 郭魯鳳 譯(東文選, 2002), p. 79.

살기 위해서는 그 자의 도장을 찍을 밖에……’라며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진짜 동주는 이 말을 듣고 그동안 자신의 글씨가 득명하게 된 데에는 이 노인의 공 로가 컸음을 알고 가짜 동주에게 자신이 진짜 동주임을 부끄러이 고백하였다. 이후로 동주는 더욱 서법에 정진하여 그 누구도 그의 가짜 작품을 만들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올라 홀로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162)

[도 8 ] 하소기, <임장천비>, 청, 종이에 먹, 일본 개인소장.

임서에는 형태를 모방하는 형임(形臨), 형태의 특징과 필의(筆意)를 살려내는 의임 (意臨)이 있다. 오늘날 한국 서단의 임서 성향은 형임에 편중되어 있는 것 같다.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는 서예인들의 임서에 대한 천착기간은 다른 나라에 비해 대단히 길다 고 볼 수 있다. 임서중심의 학습 기간이 너무 길고, 임서를 예술로 인정하는 전통의 뿌리가 너무 깊어서 거기에 안주하다보니 창신(創新)이나 창의에 대한 개념이 없어져 버렸다.

오창석(吳昌碩 : 1844~1927)도 청년시절부터 80세가 넘도록 평생 동안 〈석고문〉을 임서했다. 청년시절에 외형을 베끼는 형태 모방의 단계를 지나 중년기에는 석고를 의 임으로 해석한 새로운 변신을 하고 있고, 다시 노년기에 이르러서는 또 다른 의임의 단계로 옮겨갔다. 오창석은 평생을 〈석고문〉 임서에 몰두하면서, 석고문이 가지고

162) 이종상, 『중앙일보』(2005, 01, 13), p. 8.

있는 특징적인 이미지를 자기의 주관적인 재해석으로 새롭게 풀어내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그의 〈임석고문〉은 글자에 머물러있지 않고,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끊임 없이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이러한 임서법은 제백석(齊白石 : 1875~1957)의 임서에도 잘 나타나있다. 그는 법서 의 형태를 그대로 베끼지 않았다. 갑갑하게 보이는 공간은 시원하게 틔워주고, 엉성하 게 보이는 곳은 적당히 좁히면서 필획과 결구를 재구성하고 있다. 제백석에 있어서의 임서는 글씨를 그대로 베끼는 임서가 아니라, 비문에서 느낀 이미지를 간취해내고, 원 본에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재해석 해나가는 창조적인 입서 법을 택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임서라는 텍스트에 머물러있지 않다는 점이다.

임서의 대상이 되는 법첩의 특징을 파악하면서 적극적인 사고의 언어를 개입시키고 있다. 전통적 의미의 임서는 창작과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임서는 창작으로 이어주는 건널목 역할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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