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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와 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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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제: 〈문자(文字)의 감옥(監獄)에서 나를 꺼내다(破字圄) Free myself from restraint of letters〉

[도22]전종주,〈파자어(破字圄)〉, 전각, 2.8 × 2.8, 2010.

서예와 관련된 담론에서 그 중심에는 언제나 문자(文字)가 있다. 문자를 빼고는 서 예를 논(論)할 수 없다는 논리는 만고의 진리로 여겨지던 시대가 있었다. 언어의 부호 체계인 문자는 개인과 집단과 사회와 역사를 소통시키는 도구이다. 이러한 공익개념 때문에 문자는 그 사용의 편의성과 소통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언제 나 문자 본래의 원형을 유지시켜야 하는 사회적 목표가 분명하다.

따라서 저명한 서예가라고 할지라도 문자의 원형을 함부로 왜곡하거나 변형시킬 수 는 없는 것이다. 마치 기차가 철로위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처럼, 전통서예가들은 문자를 바르고 정확하게 써야하는 논리 위에서만 자유로울 수가 있었다. 이러한 문자 조형과 표현의 한계 때문에 다른 장르의 예술인들로부터 서예가 예술이 아니라는 힐난 과 핍박을 받는 직접적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서예가에게는 언제나 예술가이기보다는 장인(匠人)의로서의 이미지가 더 크게 각인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대다수의 서예가들은 ‘좋은 글씨’보다는 ‘잘 쓴 글씨’의 작업에 열중한다. 그러나 ‘좋은 글씨’가 예술이라면, ‘잘 쓴 글씨’는 특 정한 기술과 기법에 의존하면서 반복적이고 재현적인 작업의 속성 때문에 기능적인 능 력에 보다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장인정신(匠人精神)에 기초한 기능공의 글씨라 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나마 서예가 예술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은 ‘좋은 글 씨’를 이루는 필획의 다양한 성격과 표정 때문이다. 서예가에게 있어서 절대자유와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것은 필획뿐이다. 필획이야말로 누구의 간섭도 배제하고 뿌리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성격과 표정으로 창신의 경계를 열 수 있는 자유의 공 간이다. 다만 이러한 자유는 전통서예의 서법과 서론의 천착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 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전술한대로 필획에는 조형의 형식논리가 있고, 그것을 통 해서만이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붓과 먹의 교합을 통하여 생명의 의미와 가치를 노래하고, 구도와 초월 을 꿈꾸는 형식과 내용을 한 번에 모두 담아내는 그릇이 필획인 것이다. 한 번의 붓질 로 시간과 공간을 융합하고, 그 안에 작가의 감정과 사상을 응축함으로서 다양한 성격 과 표정의 필획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물질의 재현적 의미가 큰 회화에 있어서 묘사력은 작가의 우월한 능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지만, 서예에 있어서의 필사력(筆寫力)은 작가의 굴욕이고 수치이다. 필사력은 곧 사자력(寫字力)이고, 사자(寫字)는 필사에 대한 작가의 창의성과 아름다움보다는 정확한 소통과 기록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공공성과 공익성을 중요하게 생각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와 굴레 안에서 인문학적 상상력을 펼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예술은 상상력에 대한 자기표현이다. 장자의 곤(鯤)이 새로 변하여 남쪽바다로 날 아가려는 붕(鵬)의 모습은 절대자유를 희구(希求)하는 인간의 꿈이고 상상이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시간과 공간은 물론이고, 관념의 속박으로부터도 절대자유를 희구하는 자기 자신의 몸짓이기도 하다.

상상력이 없는 예술은 이미 죽은 허물이다. 하물며 꿈과 상상력을 용인하지 않는 표 현은 예술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 순간에도 문자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 는 서예가의 숙명적인 한계를 초극하기 위한 항상성의 발로가 연구자로 하여금 〈문자 (文字)의 감옥(監獄)에서 나를 꺼내다(破字圄)〉를 주제로 삼게 하였다. 이는 수 천년

동안 춥고 어두운 문자의 감옥에 갇혀 있는 서예를 해방시켜 현대미술의 중심에 자리 잡게 하고 싶다는 연구자의 욕망이기도 하다.

연구자의 작업이 문자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시도된 탈문 자화 때문에 일반 향수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인지적 충격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 만, 같은 길을 걷는 동도(同道)에게는 정서적 상충(相沖)으로 다가갈 수도 있을 것이 다.

이러한 실험의 결과들이 현대서예의 다양성으로 기능하면서, 꿈과 상상의 세계를 이 지적 감성으로 정제(精製)하고, 그것을 작위(作爲)가 배제된 필묵언어로 펼치고 싶은 것이 연구자의 소망이다.

2) 부제:<사랑의 노래, 자연의 노래, 신명(神明)의 노래, 생명의 노래>

전통서예가 자획의 간가결구(間架結構)로 문자를 조형하면서 문장을 쓰는 서사예술 이라면, 현대서예는 문자의 한계와 속박(束縛)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표현영역이 다. 표형대상으로서의 사물을 예리한 통찰력으로 꿰뚫어 보고 난 후의 추상적인 내용 들을 이지적 감성으로 걸러내고 정제(精製)하여, 그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구축하고, 그것을 직관적인 필획으로 표현하는 것이 현대서예이다.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사랑의 노래”는 그것의 상징적인 의미가 큰 식물이 나 동물들 가운데 땅위의 ‘연리지(連理枝)’와 하늘의 ‘비익조(比翼鳥)’ 그리고 바 다의 ‘비목어(比目魚)’들을 재해석하고 촌철살인의 필묵으로 화답하는 형식을 취하 였다. 이는 회화적인 구도 보다는, 선문(禪門)의 할(喝)처럼, 화두(話頭)를 간명(簡 明)한 이미지로 축약하고, 그것을 단숨에 풀어내는 필묵작업을 통하여 필획의 다양한 성격과 표정에 더 큰 의미를 두고자 하였다.

[도 23 ] 전종주, <사랑의 노래 - 비익조(比翼鳥)>, 종이에 먹, 150 × 210, 2010.

두 나무가 각기 자라다가, 나뭇가지가 서로 이어져 한 나무가 된 것을 '연리지'라 하고, 두 나무의 줄기가 서로 만나 결합하고 한 나무로 살아가는 것을 ‘연리목’이라 한다. 서로 다른 나무가 하나 된 모습으로 서있는 나무가 연리지이다. 각자의 나무줄 기나 가지가 껍질이 터지고 벗겨진 채 서로 다른 진액이 엉키면서 ‘인연’이라는 굴 레로 하나가 될 때 까지 보낸 인고의 세월에 사랑이 익는 나무이다. 서로의 숨결이 끊 긴 뒤에 고사목이 되어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것이 연리지의 사랑이다.

비익조(比翼鳥)는 암컷과 수컷의 눈과 날개가 각각 하나씩이어서 서로 짝을 이루지 않으면 하늘을 날지 못한다는 전설상의 새를 말하는데, 남녀 간의 영원한 사랑을 비유 하기도하고, 부부의 금실지락(琴瑟之樂)을 상징하기도 한다. 비익조와 연리지를 줄여 서 비익연리(比翼連理)라고도 한다.

한편 중국 설화에 동쪽바다에는 비목어(比目魚)가 살고 남쪽바다에는 비익조(比翼

鳥)가 산다고 하는데, 비목어(比目魚)는 눈이 하나뿐이어서 혼자서는 헤엄칠 수가 없 고, 둘이 붙어있어야 대양을 건널 수 있다고 하는 전설속의 물고기인데 ‘외눈박이 물 고기’라고도 한다.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당 현종과 양귀비의 뜨거운 사랑 을 읊은 시‘장한가(長恨歌)’에서 비익조와 연리지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 다.

七月七日長生殿, 夜半無人私語時, 在天願作比翼鳥, 在地願爲連理枝, 天長地久有時盡, 此恨綿綿無絶期.

(7월 7석일 장생전에서/ 깊은 밤 아무도 모르게 한 약속/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 하네/ 하늘과 땅이 다할 때까지 변하지 않고/ 이 한은 끝없이 계속되리라.)

연구자는 ‘사랑의 노래’를 통해서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근원을 찾 고 그것의 인연과 파연(破緣)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흐르는 세월 따라 맞이해야 하는 죽음을 통해서 자연의 순환 질서를 이해하고, 그 이치를 가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의 의미와 참 가치를 알게 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월 따라 변하지 않고, 서로에게 바라는 것도 없 으면서, 서로의 일에 간섭하지도 않는 무위자연의 동반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도가적 사랑일 것이다.

동양미술에 있어서 자연은 언제나 경외의 대상이었고, 표현의 주제였다. 인류가 자 연의 외적 형태와 내적 생명의 숨결에 본능적으로 감응하게 되면서부터 자기 멸각의 관조와 초월적인 사유를 통하여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욕구를 표출하였고, 그 것이 예술표현으로 승화되었다.

자연은 형(形)과 이(理)로 구성되어 있다. 형은 기(器)라고도 하는데 주희(朱熹)는 이를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은 모습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이(理)다. 형 이하학이라고 하는 것은 실상도 있고 모양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물(器)이다.

316)

라고 하였다. 모든 사물에는 이가 있고, 만일 사물에 이가 없다면 사물도 존재할 수

316) 朱熹,『朱子語類』, 卷 95, "形而上者, 無形無影是此理, 形而下者, 有情有狀是此器."

없으며, 자연은 물론이고, 어떤 사물을 인공적으로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반 드시 어떤 이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의 정신을 말하는 데, 조형적으로 어떤 형태가 갖추어지면 그 안에 정신이 깃들어 있게 되는 것임을 뜻 한다. 따라서 사람도 살아있을 때에는 이가 있지만, 죽으면 이도 함께 사라져 자연에 귀일(歸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자연에 순응하면서 무위자연의 경계를 동경하고, 그림 이나 글씨마저도 자연스러움을 최고의 가치로 인식하는 것이다. 자연의 참모습을 예술 로 재현하는데 있어서, 그 표현의 능력에 따라 유위와 무위의 경계로 나뉘게 되는 것 은 당연한 귀결이다.

무위(無爲)는 작위(作爲)가 배제된 자연스러움의 경계로서, 자연스러움은 곧 ‘자연 의 닮음’이라는 뜻이고, 자연을 닮는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은 유․ 불․ 선 (道家)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자연스러움’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은 결국 자연 과의 합일이나 귀일을 향한 원초적 욕구의 발로로 은일(隱逸)을 꿈꾸는 예술가의 이상 향이기도 한 것이다. 남송의 조희곡(趙希鵠,1195?-1242?)은

가슴 속에는 만권의 책이 있고, 눈으로는 전대(前代)의 명적으로 배가 부르고, 또 수레바퀴 자국과 말 발자국이 천하의 반은 되어야 비로소 붓을 댈 수 있다.317) 라고 했으며, 후대의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은

만 리의 길을 걷지 않고 만권의 책을 읽지 않으면 화조(畵祖)가 되고 싶어 하더 라도 그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318)

라고 하였다. 십 여 년에 걸친 연구자의 답사여행은 언제나 티벳고원이 그 중심에 있 었다. 그곳은 인류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한계고도(4000~5300m)에 자리 잡고 있는 오 지이면서 황량하기 그지없는 고원의 사막이다. 모래자갈과 바람, 그리고 수많은 호수 와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준봉(峻峰)들의 눈부신 풍광으로 원초적 아름다움 을 간직하고 있지만, 희박한 산소와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가 여행자의 발목을 붙잡 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모두가 척박한 사막에 손바닥만 한 농토를 일구면서 유목민으로 가난하게

317) 趙希鵠,『洞天淸祿集』, 「古畵辨」, "胸中有萬卷書, 目飽前代奇蹟, 又車轍馬迹半天下, 方可下筆."

318) 董其昌,『畵旨』, "不行萬里路, 不讀萬卷書, 欲作畵祖, 其可得乎."

살아가지만, 하루 반 줌의 보릿가루와 한 잔의 수유차(Tibetan butter tea)로 행복한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않는 경이로운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다. 성자와 같은 삶을 실천하고 있는 그들의 일상은 항상 고독한 수행자의 모습이다. 그래서 그들은 목자이 지만 고원의 성자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돈과 권력은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굴레이지만, 윤회의 사슬을 끊기 위한 종교적 신념을 지키면서 청빈하게 사는 것은, 천라지망(天羅地網)을 벗어날 수 있는 지혜로 인식된다.

그들의 가슴속 깊은 곳에는 언제나 ‘샴발라(Shambhala)’319)가 있고, ‘베율’320) 이 있으며, ‘페마코’321)가 있을 뿐이다. 티벳 여행자들의 입을 통해서 생성된 속담 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다와쫑322)을 보지 않고는 풍광(風光)을 논하지 말고, 구게왕 국323)의 벽화를 보지 않고서는 불교미술에 대하여 입을 다물라’는 말이 있다.

다와쫑의 신비스러운 자연은 언어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신비의 계곡으로 서,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보름밤이면 계곡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바위와 작은 봉우 리들이 모두 일어나 부처님의 형상이 되어버리는 장관을 연출한다. 이렇게 아름답고 신비한 풍광 때문인지 티벳 사람들은 실제로 다와쫑(月城) 근처에 샴발라(Shangri-La) 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달의 계곡인 다와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샴발라에 성스러운 말띠해의 4월 보 름달이 뜨면,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門: 페마코)이 열리는데, 그곳에는 수많은 도인들 이 촌락을 이루고 산다고 한다.

319) 티벳 사람들의 이상향(理想鄕)으로 사바세계와는 달리 시간이 정지된 낙원으로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 나 영원히 사는 유토피아를 샴발라라고 한다. 8세기에 쓰여 진 티벳 불교의 문헌상에는 세 곳의 샴발라가 있고, 그 가운데 옛 티벳 국경과 파키스탄 국경지대 사이, 지금의 카라코럼(karakorum)계곡 어딘가에 있 는 것이 북 샴발라이고, 서부 티벳의 다와쫑 근체에 중 샴발라가 있으며, 티벳 국경과 부탄의 동쪽 국경, 그리고 미얀마의 서쪽 국경이 접하는 지점에 얄룽창포강이 크게 휘어지는 남쪽의 아루나찰 프라데시 밀림 이 만나는 곳에 남 샴발라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티벳 사람들은 서부 티벳의 다와쫑 근 처에 샴발라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320) 베율은 티벳어로 비밀스럽고 신비한 성역(聖域)이란 뜻이다.

321) 페마코는 샹그릴라(Sangri-la) 즉 티벳어로는 ‘샴발라’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여러 성역(聖域)중에 하 나인 남쪽의 얄롱창포강 주변에 있다는 ‘남 샴발라’를 지칭하는 말이다.

322) 구게왕국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히말라야산맥의 동북쪽의 낮은 지대에 펼쳐진 수많은 계곡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바위로 된 크고 작은 봉우리들로 이루어진 곳으로 달(月)의 성(城)을 의미함.

323)‘구게’는 동굴을 뜻하는 티벳어로서 동굴국가를 의미하는 ‘구게 왕국은 9세기 티베트의 토번(吐蕃)왕국 이 분열된 뒤 성립된 지방 정권으로 비교적 세력이 강성한 국가였다고 한다. 구게 왕국은 토번의 마지막 왕 랑다마(郎達瑪)가 죽은 뒤 벌어진 수 차례의 왕위 쟁탈전에서 패한 지더니마(吉德尼瑪)왕자가 아리(阿 里) 지역으로 도피해 새로운 왕국을 건설했다. 지더니마는 후에 아리 지역을 세 부분으로 나눠 아들들에 게 나눠줬는데, 이들 나라가 라다크 왕국과 푸란 왕국, 그리고 구게 왕국이다. 구게 왕국은 지더니마의 셋째 아들인 더짜오(德朝)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서장왕신기(西藏王臣記)'에 따르면 구게 왕조는 700 여년간 16명의 왕이 통치했으며 강성했을 때는 서쪽으로 캐쉬미르 일대와 지금의 파키스탄 일부까지도 지 배했다고 한다. ’ <위키백과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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