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극의 역사2)
창극(唱劇)은 판소리가 파생시킨 고전과 근대적 성격을 아울러 갖춘 음악극이다. 판소리는 3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전통공연이지만, 창극 은 근대극장에서 불과 100년의 역사를 가지고 형성된 음악극이다. 판소리 는 마당과 같은 열린 공간에서 고수와 창자 두 사람이 벌이는 공연예술이 다. 이에 대하여 창극은 근대적인 옥내의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음악 반주 에 맞춰 펼쳐내는 음악극이다.
판소리가 지닌 연행예술로서의 기본조건은 판소리 광대가 서사적인 이야기를 특별한 무대장치 없이 고수의 북반주에 맞춰 아니리·창·발림을 통해 공연하는 것이다. 판소리는 서사문학, 연희, 연극, 음악이 복합적으 로 어우러진 종합예술로써, 전통음악극인 창극으로 변화할 수 있는 좋은 토대를 이미 갖추고 있다.
창극(唱劇)이라는 용어에는 ‘창(唱)’과 ‘극(劇)’이 복합적으로 들어있 다. 창은 판소리를 지칭하며, 극은 연극을 의미한다. 그래서 창극은 ‘판소 리연극’, 즉 판소리를 토대로 삼은 음악극이라는 뜻이다. 창극이 판소리를 위주로 구성된 연극이기 때문에, 창극에서 대사는 사건 전개에 있어서 기본적인 핵심정보를 제공하고, 주요 장면의 부연은 창을 통해 이루어진 다.
창극이 판소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창극에서는 반드시 판소리창만 을 주요 표현매체로 사용해야만 한다는 입장과, 판소리창 이외에도 전통 연희양식과 음악어법을 총체적으로 활용하는 총체극이 되어야 한다는 입
2) 창극의 역사와 시대구분의 대부분은 유영대(고려대)의 2014년 글인 “창극의 전통과 구립창극단의 역사”에서 대부분 인용한 것이다.
10 창극 전문예술인 양성을 위한 교육과정 연구
장이 병존하고 있다. 창극 공연은 판소리 창자가 주된 출연자이지만, 전통 시대의 연희를 하는 사람들이나 연극을 전공하는 이들도 자유롭게 배우로 참여하여 완성도 있는 작품을 제작한다.
창극은 시대에 따라 1900년대에는 ‘신연극’으로, 신파극이 공연되기 시작한 1910년대에는 ‘구파극’으로, 1920~30년대에는 ‘창극’으로 불렸 다. 이 시기에 ‘창극’이 판소리를 지칭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판소리가 갖고 있는 공연예술적 특성과 일정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창극은 일제 의 지배에서 전개된 문화말살정책 아래에서도 한국의 전통연희물로 그 위상을 유지하면서 대중속에서 전승시켜왔다. 창극은 1902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110년간 우리 민족과 호흡을 같이 해왔다. 시행착오를 거 쳐오면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으로 정립되는 과정에 있다.
창극은 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의 형성기를 거쳐,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1960년대에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그리고 60년대에 들어서서 국립창극단이 생기면서 비로소 제도적으로 보호받는 문화유산이 되었다. 창극의 형성배경과 역사적 전개의 양상들 을 형성기, 전성기, 쇠퇴기, 부흥기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가. 형성기
창극의 근원이 되는 판소리는 18세기 이전에 광대라는 천한 신분의 연희자에 의해서 민중예술의 한 형태로 연행되었다. 19세기, 판소리는 양반층이 주된 향유층으로 확대되면서 사설과 음악이 고급스럽게 변화하 게 된다. 19세기 중엽이 되면 대원군이나 고종과 같은 왕실의 인물들이 판소리 광대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소리를 듣고 벼슬을 제수하였다.
창극은 20세기 초에 희대(戱臺)라고 불리는 협률사 무대에서 공연된 종합 예술이다. 판소리는 광대 한사람이 여러 역할을 서사적으로 연행하 는데 대하여, 창극은 각 인물의 소리대목을 분창(分唱) 형식으로 나누어 무대에서 연행하였다. 일본을 통하여 들어온 서양식 연극을 ‘신파극’으로
부르게 되면서, 기왕에 희대에서 우리 전통방식으로 공연된 음악극이 ‘구 파극’이 되었다. 프로시니엄 무대에 선 경험이 있는 판소리배우들이 ‘구파 배우조합’을 만들어 다양한 창극을 공연하면서 스스로의 입지를 세워가게 되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공연된 창극이 흥행을 누리게 되자, 지방에도 천막으로 가설극장을 짓고 ‘협률사’라는 이름으로 창극공연이 이루어졌다.
형성기에 공연된 창극의 레퍼토리로는 판소리 다섯마당인 <춘향가>·
<심청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가 대종을 이루었다. 그리고 판소 리계 소설작품인 <배비장전>·<장화홍련전>을 토대로 만든 창극도 공연되 었다. 1908년에는 명창 강용환이 새롭게 구성한 <최병도 타령>을 이인직 이 <은세계>로 이름 붙여 원각사에서 공연하였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한국연극이 출발한 원점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형성기의 양상은 굴곡이 심하여 일제시대의 문화탄압 정책으로 전통극이 설 자리를 잃게 되면서 창극을 공연하는 단체가 강제로 해산되고, 극장이 폐관되었다.
나. 전성기
신파극의 영향으로 형성기에서 바로 위기를 맞이한 창극은 1934년이 되면서 전환기를 맞이한다. 이 해에 정정렬·송만갑 등 당대의 명창들이 종로구 익선동에 모여 조선성악연구회를 결성하고, 이 모임을 통하여 창 극이 거듭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창극이 정립되면서 대중의 호응을 얻게 되자, 여러 개의 창극단이 생겨나고 공연물로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레퍼토리가 확충되어 판소리를 창극화한 작품과 함께 우리의 고 전작품을 창극화했다. ‘동일창극단’·‘임방울창극단’·‘김연수창극단’ 등이 전국을 유랑하면서 왕성하게 공연활동을 하였다. 창극은 대중들의 사랑 을 받으면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전성기에는 수십개의 창극단이 전국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1946년 1월, 해방을 맞이하여 국악원이 설립되고, 국극사가 산하단체
12 창극 전문예술인 양성을 위한 교육과정 연구
로 창단되었다. 전국의 명창들이 모여 국극사 창단 기념 <대춘향전>을 공연하였다. 그 외에도 창극단으로 국극협회, 조선창극단, 김연수창극단 등이 활동을 벌였다. 1948년 여성국악인들이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면 서 여성창극을 공연하면서 영역이 확장되었다.
1950년 4월, 국립극장이 개관하면서 개관기념공연으로 창극 <만리장 성>을 무대에 올렸다. 국립극장과 국극사가 공동으로 제작한 창작창극으 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6․25 전쟁의 발발로 국극사는 해산하게 되고, 1953년 재건되었지만 활동이 거의 없었다.
다. 쇠퇴기
일제강점기 후기에 전성기를 누린 창극은 6․25를 거치면서 급격하게 쇠퇴하게 된다. 미국으로부터 직접 유입된 대중문화와 대중예술의 충격 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와 TV는 창극쇠퇴의 큰 원인 이 되었다. 창극 내부에서도, 새롭게 밀려오는 새로운 문예사조에 대하여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토록 영화를 누렸던 창극이 급격하게 쇠퇴하고 만다. 여성국극단이 한동안 인기를 누렸으나 그 영향력도 창극 을 번성시키기에는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라. 부흥기
창극단과 여성국극단의 급격한 몰락에 대하여 전통예술계에서 우려를 표명하였다. 중앙국립극장에는 국립극단이 전속단체로 있었는데, 1962 년 국립창극단을 창단하여 산하단체로 포함시키면서, 창극의 명맥이 이 어지게 되었다. 국립창극단의 작품제작활동은 시기에 따라 크게 5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국립창극단 제1기(1962~1970)
국립국극단이 창단되고, 김연수 명창이 초대 단장이 되면서 창극과
판소리 연창을 정기공연으로 삼던 시기를 지칭한다. 1962년 창단공연부 터 1970년까지로 창극이 판소리의 연장이라는 생각을 답습해오던 시기이 다. 이 시기는 1902년 프로시니엄 형태 최초의 극장 희대(戱臺)에서 판소 리의 분창 형식으로 창극이 무대에 오른 이래, 협률사와 유랑 창극단에서 창극을 올리던 전통적 방식, 그리고 1940년대 후반부터 50년대에 크게 번성한 여성국극과 일정하게 연결되는 방식으로 창극을 제작하던 시기로 규정한다. 박진과 서항석이 연출한 창극작품이 있으나, 완창판소리·민속 잔치와 같은 옴니버스식 공연이 이루어졌다. 원각사 이래 창극전통이 특 별한 고민 없이 답습되던 시기이다.
2) 국립창극단 제2기(1970~1980)
1969년 설립된 ‘국극정립위원회’의 구성에 의미를 두고, 이들의 지도 아래 창극이 연극적 기법을 도입하여 작품을 무대에 올리던 시기로 구분 지울 수 있다. 이 시기에 판소리와 창극이 일정하게 다르다는 생각이 확고 하게 자리잡게 되면서, 전통적 방식으로 창극을 무대에 올리던 관습에 대하여 일정하게 의문을 제기하였다. 창극의 독창적 성격과 연극적 특성 을 한데 아우를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본 중요한 시기이다. 이진순과 허규가 각각 연극과 창극, 창극과 전통마당극의 고리를 찾아내기 위하여 진지하게 모색하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3) 국립창극단 제3기(1980~1990)
중견연출가 허규가 국립극장장으로 재직하면서, 창극연출에 마당극 적 요소와 전통적 느낌을 부여한 10년간의 시기로 설정한다. 엄밀하게는 허규가 처음으로 창극 연출을 맡았던 1977년 <심청가>부터 1989년 <심청
중견연출가 허규가 국립극장장으로 재직하면서, 창극연출에 마당극 적 요소와 전통적 느낌을 부여한 10년간의 시기로 설정한다. 엄밀하게는 허규가 처음으로 창극 연출을 맡았던 1977년 <심청가>부터 1989년 <심청